|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기) 날 짜 (Date): 1999년 3월 26일 금요일 오후 02시 11분 04초 제 목(Title): 이성주/한국정신문화비판 한국 정신문화 비판 -황무지 기행 넓은 세상은 크게 변했는데 작은 머리속은 변하지 않았다 우리의 정신문화는 전반적으로 미숙하며 부분적으로는 불균형하다. 이성과 판단력은 발육부진이고 情 은 좁게 한곳으로만 흘러 구덩이에 익사할 지경이다. 표면적인 거칠음에도 불구하고 행동의 동기는 극히 여성적이고 자제력 없음은 청소년적이다. 그래서 필자는 이곳을 황무지에 비유한다. 그러나 이 황야는 가능성의 대지이기도 하다. 이성주 〈언론인〉 ------------------------------------------------------------------------------- - 변하지 않으면 유지도 못한다 사 람이란 날 때부터 만들어진 것인가, 만들어 나가는 것인가. 이 오래 된 질문을 되풀이하는 것은 이 글의 주제가 우리의 정신개조이기 때문이다. 완전히 선천적으로 운명지어진다면 우리에겐 할 일이 없다. 서양에서는 태생이냐 양육이냐(Nature or Nuture?)라고 질문하고 있다. 현재까지의 답변으로는 인종적 차원에서 태생, 즉 Nature는 전혀 과학적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코카서스(백인) 인종이나 심지어 아프리카의 피그미, 그리고 몽골이나 흑인이 인류의 진화과정에서 볼 때에는 모두 똑같은 단계에 와 있다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아직도 열대지방 사람들은 게으르고 정신도 벙벙하지 않으냐고 말한다. 그러나 그 열대기질 자체가 사라지고 있다. 싱가포르의 리콴유 전 총리는 지난 1000여년간의 최대발명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에어컨을 꼽았다. 이 예리하고 상황인식에 뛰어난 정치인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이제 소위 열대인종은 피부색으로만 존재하게 될 것이다. 개인차원에서는 태생이 여전히 숙명은 아닐지라도 사람 사이의 격차를 결정하는 중요한 인자다. 우리는 지능 건강 기질 등에서 날 때부터 개인간에 차이가 있다는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 형제간에도 차이는 많다. 그러나 이것 역시 후천적 노력으로 상당한 정도까지는 수정이 가능하다. 우리는 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외국으로부터 『열심히 일한다』 『세계에서 노동시간이 제일 많다』는 말을 들었다. 영국의 대처총리는 방한중에 한국인의 근면성에서 19세기의 영국인을 보는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땀 흘리며 열심히 일한다』는 것은 칭찬임에 틀림없지만 어른이 어린이에게 하는 칭찬 같다. 「독창성이 있다」거나 「성숙미가 보인다」라는 얘기는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90년대 들어서는 갑자기 모범학생이 불량학생이 된 듯한 비난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렸다』느니 『용이 지렁이가 됐다』느니 하는 말이 자주 들렸다. 90년대에 거의 유일하게 들린 칭찬은 파리의 샹젤리제나 밀라노의 상점가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비싼 물건을 몇 개씩 마구 사가니 『한국인은 통이 크다』는 것이었다. ------------------------------------------------------------------------------- - 충격받아야 자성하는 버릇 ------------------------------------------------------------------------------- - 현재 실업자가 200여만명에 이른다고 한다. 그럼에도 IMF 한파는 다행이란 게 일부 사람들의 견해고 필자 역시 그렇게 판단한다. IMF 한파가 아니었다면 우리가 탄 수레는 내리막을 향해 가속도가 붙은 채 질주했을 것이고 그러면 더 큰 파멸로 회생이 불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는 충격이 있어야 자성하는 버릇도 있다. 하버드대의 라이샤워 교수 등 동양학팀은 한국의 식민지화 과정을 묘사하면서 이렇게 지적한 바 있다. 『한국인은 충격을 받고 쓰러져 통증을 느낀 다음에야 자신을 물끄러미 돌아본다』 망국(亡國) 후 거의 100여년이 지났을 뿐인데 우리는 또 한 번의 충격을 받고서야 겨우 자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서양의 누군가가 『지혜는 경험의 딸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경험을 하고도 「왜 그렇게 됐을까」 「우리의 결함은 무엇이었나」 하고 깊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경험은 또 다른 아픔을 수반할 뿐이다. IMF 사태는 중요한 계시로 받아들여야 한다. IMF 사태를 예방하면서 우리가 21세기의 한국을 말할 수 있었다면 더욱 좋았을 것이다. 우리가 더 큰 위험을 겪을 수 있다는 전망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배경에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은 산업화에 일단 성공했다고 하지만 거의 중급기술(Medium Techno-logy)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것은 후발국가들이 비교적 쉽게 추월할 수 있는 수준이다. ▲공산국가들 대부분이 붕괴하면서 중국이라는 거대한 생산기지와 동유럽이 새로운 산업세력으로 등장하고 있다. 과거 60년대나 70년대와 같은 재수좋은 국제환경이 사라진 것이다. ▲산업구조가 지식·정보 쪽으로 옮겨가고 있다. 지식·정보 산업에는 고도의 개성있는 창조력이 요구된다. 한국문화의 기조는 이런 요구에 반대되는 성향을 갖고 있다. ▲공적인 인간관계에서 전근대적 성향인 정(情)과 연고주의 권위주의가 강력히 작용하며 이것은 합리성과 능률을 저해하고 개인의 자기개선 노력을 무디게 한다. ▲일상의 시민생활에서 외국인이 혐오감을 느낄 만큼 무질서하고 자기중심적이다. 이것은 우리 자신을 피곤케 하며 대외적으로는 저급문화민족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주는 것이다. ▲산업구조의 고도화는 필연적으로 소득격차를 크게 벌려놓는다. 여기에다 IMF사태로 인한 대량의 실업군(群) 탄생은 수년간 사회불안을 가중시킬 위험이 크다. 이런 판에 권한남용·뇌물·탈세 등 고질적 악폐가 청산되지 않으면 불만이 폭발할 가능성이 크다. 이미 강력해진 노동조직, 근로계층을 배경으로 한 정당은 정치와 산업의 민주화에 기여할 수 있지만 반대로 비정상의 사회조건에서는 폭발의 도화선이 될 것이다. ------------------------------------------------------------------------------- - 자기 자신의 비판엔 철저해야 ------------------------------------------------------------------------------- - 우리는 분명히 변해야 하고 또 변할 수 있다. 앞에서 태생이냐 환경이냐를 얘기했지만 태생이란 사회 전체로 볼 때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다. 훌륭하게 키워진 아이는 훌륭한 어른이 되기 마련이고 성인 역시 반성을 통해 자신을 계속 개선해나갈 수 있는 것이다. 노력을 안하는 게 문제일 따름이다. 남을 비판하는 데는 지나친 것이 좋지 않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비판에는 철저해야 한다. 자신의 성장은 그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이제 적어도 우리는 자기비판을 자기비하라고 배척하는 시대에 살고 있지는 않다. 『맞아죽을 각오로 쓴 한국 한국인』이라는 책을 쓴 일본인 저자에게 돌은커녕 달걀 하나 던진 사람이 없다. 그만큼 우리는 비난을 받아도 무감각해진 것이 아니라 그것을 수용할 수 있는 여력이 생겨난 것이다. 성장 잠재력을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깨닫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자신을 비판하기에 앞서 우리는 약간 자신을 위로할 수 있는 근거를 갖고 있기도 하다. 그것은 첫째, 정신문화의 진보보다 산업화·도시화가 훨씬 빨리 진행됐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불가피하게 물(物)과 정신의 불일치가 생겨났다. 고요한 농경사회가 도시적 산업사회로 급변하는 과정에 혼란 범죄 무질서 등 각종 병리가 발생한 것은 선진국의 예에서도 쉽게 발견된다. 일본도 예외가 아니었다. 『일본인은 문 밖에만 나서면 난폭자가 된다』거나 『남의 발을 밟고도 미안해하지도 않는다』고 투덜거린 서양인의 글도 있다. 둘째, 산업화과정에 근면과 규율은 강조됐지만 책임있는 민주시민의 덕성은 중요시되지 않았다. 시민적 자각이 싹트는 것은 오히려 억압당해 왔다. 이것은 박정희정권의 후반기, 그리고 전두환정권 시절에 두드러졌다. 셋째, 정치가 사회분위기를 결정하는 최대의 변수라면 개인의 심성을 만드는 것에는 교육이 가장 큰 영향을 준다. 광복이후 한국의 교육은 양적으로 엄청난 성장을 했지만 정신문화면에서는 의미없는 교육을 해왔다. 서강대의 한 외국인교수가 『학생들이 열심히 공부하지만 쓸데없는 공부를 하는 것 같다』고 지적한 대로 읽고 생각하고 토론하는 교육이 아니라 단편적인 지식을 주입하는 교육이 거의 전부였다. 이런 환경에서 주체성 있고 타인을 이해하며 배려하는 성숙한 정신은 자라날 수가 없다. 시민으로서도 인간으로서도 우리는 미숙한 채로 자본주의사회라는 거친 풍토에 내던져졌다. ------------------------------------------------------------------------------- - 미숙하고 불균형한 정신문화 ------------------------------------------------------------------------------- - 이상과 같은 현실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이 정도의 사회체제를 유지하는 것도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럼에도 우리 자신을 엄혹하게 비판해야 하는 것은 높게 비상하려는 열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준이 높기에 요구하는 수준도 높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는 중진국 수준에 머무를 수 없다. 그것은 자존심 문제다. 또 하나의 이유는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세계화 물결에서 중진국가는 전진하지 않으면 처지거나 자칫하면 쓰러질 수도 있다는 조건에 놓여 있다는 사실이다. 산업의 고도화, 정보·지식 산업으로의 이행, 이에 따른 정신문화의 변혁 없이는 현재의 수준도 유지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몰릴 수도 있다. 폭력과 단두대를 연상시키는 프랑스 혁명을 거친 뒤 그곳에서 이런 경구가 생겨났다. 『변하지 않으면 유지도 못 한다』. 이 말은 오늘의 우리에게 절실하게 호소하는 것 같다. 우리는 경제전쟁시대에 살고 있다. 필자가 지금 쓰고 있는 정신문화비판도 실은 한심한 일이다. 이미 사회의 전반적인 시스템이나 정신의 기조에 대해서는 국민적 컨센서스가 이룩됐어야 마땅하다. 그래서 일반론적인 얘기는 더 할 필요가 없는 단계에 와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지금은 각론이랄까 전략에 관한 담론이 성행하고 지하철 승객은 문고판책에 쓰인 글을 읽고 고개를 끄덕이거나 「내 생각과는 다른데」 하며 고개를 가로젓는 그런 모습이 보여야만 한다. 늦기는 늦은 것이다. 그러나 늦었음을 철저히 깨닫는다면 분발심도 대단할 수 있다. 우리가 번영과 질서의 밝은 미래를 소망한다면 정치·경제·사회의 모든 면에서의 개혁과 함께 정신혁명도 수레의 두바퀴처럼 동시에 추진돼야 할 것으로 본다. 정신적으로 부패한데 부패를 없앤다고 제도개선을 하거나 처벌을 강화하는 것은 부패추방에 필요한 조건이기는 하지만 충분조건은 될 수 없다. 외형적인 것과 내면적인 것이 동시에 추진될 때 소위 시너지 효과도 생길 것이다. 다른 부문도 마찬가지다. 공정한 인사를 한다고 하면서 저녁에는 끼리끼리 모이는 연고주의가 있다면 공정이 가능할까. 권위주의를 타파한다고 사무실의 책상배치를 바꾸고 기구를 개편하지만 만나면 선·후배 따지고 또 나이 한두 살 가지고 서열을 정하려는 그런 풍토에서 언제 권위주의가 사라질까. 언젠가는 사라지겠지만 그 언제가 되기 전에 우리는 몰락할 수도 있다. 지난 1월 하순 재미교포기업인 이종문씨는 교육부관리들과 대학교수 등 250여명이 모인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21세기의 주요산업은 아다시피 지식·정보 산업이다. 한국이 이에 적응할 수 있을까. 한국이 종래의 집단주의적 사고에 젖어 개인의 창의를 계발하는 교육을 등한히 한다면 한국은 머잖아 OECD국가는커녕 라오스 미얀마 인도네시아와 경쟁하느라 바쁠 것이다. 유교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희망은 없다』 그의 강연을 들은 청중은 긴장했고 장내는 물을 끼얹은 듯 조용했다고 한다. 우리의 정신문화는 전반적으로 미숙하며 부분적으로는 불균형하다. 이성과 판단력은 발육부진이고 정(情)은 좁게 한곳으로만 흘러 구덩이에 익사할 지경이다. 표면적인 거칠음에도 불구하고 행동의 동기는 극히 여성적이고 자제력 없음은 청소년적이다. 그래서 필자는 이곳을 황무지에 비유한다. 그러나 이 황야는 가능성의 대지이기도 하다. 왜 황무지인가 이 땅에서 선량하게, 그리고 건강한 상식에 맞게 살려는 사람들에게 이 땅은 정신적 황무지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있어 두려운 곳이기도 하고 외로운 곳이기도 하며 개척해볼 만한 곳이기도 하다. 극소수의 용기있는 사람들은 성서의 예언자처럼 외쳐왔고 투쟁해왔다. 그리하여 많은 것을 성취하기도 했다. 이제 산업화에 이어 표면적으로는 민주화라는 거창한 이정표에 도달했다. 그런데도 아직 황무지인가?, 여론조사를 무작위로 해본다면 『그렇다』고 답변할 사람은 소수일 것이다. 다수는 뚜렷한 문제의식은 없어도 이 나라가 모든 분야에서 변화가 필요하다고 막연하게 느끼는 사람들일 것이다. 또 반대편의 소수는 아예 문제의식도 없고 특히 이 소수 가운데는 이 땅의 정신적·사회적 풍토가 적성에 맞아 변화니 개혁이니 하는 게 아예 싫은 사람도 있을 것이며, 세상이야 어떻든 요령껏 적응하는 게 최선이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들의 눈은 강자의 거동에서 떨어질 수 없고 무엇이 돈벌이가 될 것인지에 대해 머리가 빨리 회전하니까 매우 바쁜 사람들이다. 글로써 함께 대화하고픈 사람들은 첫째가 적극적인 문제의식을 가진 독자들이고 둘째는 속으로나마 「이대로는 안 되지」 하고 느끼는 대다수의 분들이다. 자기 나라 자기 동포에 대해 소위 자아비판을 한다는 것은 결코 유쾌한 일이 될 수 없다. 부분적인 문제점에 대한 소견은 목청 높여 외치는 게 지식인의 당연한 소명이지만 총체적인 비판은 어려운 과제에 속하는 문제로 하나의 문명(文明)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웬만한 통찰력으로는 가늠하기 힘든 대상이다. 여기에다 다소의 용기까지 요구된다. 우리 자아비판의 효시는 1922년 「개벽」이란 잡지에 연재된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이다. 그가 이 글 때문에 얼마나 곤욕을 치렀는지는 많이 알려져 있다. 일부 연구자들은 그가 일본총독부와 관련돼 이 글을 썼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상당한 정황근거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민족개조론」에 지적된 우리의 단점은 적확(的確)했다고 본다. 문제는 3·1운동 후의 침체된 분위기 속에 이런 글이 나와 더욱 의기소침하게 만든 데 있다. 그러나 이런 자기비판을 소화해낼 수 있는 포용력이 있었다면 민족을 매도하는 글이라고 매도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 - 스페인식과 독일식의 차이 ------------------------------------------------------------------------------- - 역사 연구자들이 과거 나폴레옹에 짓밟힌 유럽에서 각국이 어떻게 반응했는가를 살피면서 스페인식 반응이라는 것과 독일식 반응이란 것을 역사의 교훈으로 서술한 바 있다. 스페인은 철저히 항전했다. 게릴라전으로 침입군을 상당히 괴롭혔다. 나폴레옹은 종교재판이나 봉건제 폐지를 선언했다. 스페인 민중은 자기네 전통에 어긋나는데다가 외적이 침입한 데 대한 반감으로 나폴레옹의 조치나 군대와 함께 유입된 자유나 인권에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았다. 한편 독일(프로이센)은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피히테는 「독일 국민에 고함」이라는 연속강연으로 독일인의 분발을 촉구했는가 하면, 헤겔은 「마상(馬上)의 세계정신」이라는 최고의 찬사를 바쳤고, 괴테는 그와 만난 뒤 「상당한 공감」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독일인은 민족적 반감을 느끼면서도 각성 계기로 삼았던 것이다. 그 이후 국가체제 정비를 통해 능률적인 관료조직을 갖추기 시작했고 수백년 묵은 용병제를 폐지하면서 군제를 개혁, 막강한 군대를 키웠다. 대학은 「자유와 고독」이라는 대학정신으로 무장, 이후 독일을 발전케 하고 세계사에 기여하는 학문을 키웠다. 우리의 경우 나폴레옹과 일본제국주의가 같았다고 볼 수 없어 단순 비교는 무리겠지만 「민족개조론」에 보인 반응은 정신구조에 있어서 스페인식일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분석적으로 생각해야 할것은 맹목의 폐쇄성이나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한 저항은 지적 수준과 함수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1920년대라면 우리의 문자해독률은 기껏 10~20%였을 것이다. 그리고 교양이래야 유교적 윤리와 서양에 대한 아주 기초적인 지식에 의해 형성되었을 것이다. 「적에게서도 배운다」는 것은 그럴 듯하지만 수용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예나 지금이나 정서가 이성을 제압하는 게 우리의 토양이다. 그리고 춘원이나 그 이후 최근까지 나온 상당수의 민족문화비판이 단점으로 보이는 것들을 잘 지적했지만 그런 단점들이 생긴 연유에 대한 천착이 너무 부족했다. 해법 역시 우리의 전통과 서양문물을 조화시켜야 한다는 식으로 개괄적이다. 이광수 이후 80여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얼마나 달라졌는가. 정치·경제적 격변이야 엄청나다. 사회적으로도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던 농민은 10% 수준으로 떨어졌고 도시화율은 선진국 수준이 되었으며 문맹은 경제활동인구 중에는 사실상 없는 셈이다. 이와 같은 대변동 속에서 가장 덜 변한 게 있다면 우리의 정신문화다. 흔히 말하는 의식구조다. 이것은 그 자체로 변하기 어려운 속성도 갖고 있지만 우리가 변하려고 노력하지 않은 데 더 큰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다. 개발 초기에는 정부 역할이 클 수밖에 없고 사회적 기율을 세워야 한다는 점에서 박정희의 60년대 통치는 현실적 타당성도 있었다고 본다. 그러나 근대화의 또하나의 축인 자유·인권·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신념은 희박한 것이었고, 70년대 들어서는 오히려 시민적 정신문화의 성장을 억압했다. 독선에 빠지면서 카리스마 구축에만 열심이었다. 80년대는 경제적 기초도 상당히 마련됐으므로 새로운 출발을 기약할 수 있는 모멘트였다. 그러나 그것은 무참한 결과로 끝났다. 그리고 시계바늘이 역회전하듯 역사의 진행은 돌려졌다. 결국 우리는 정신의 성장을 이룩할 시간을 자꾸 잃은 것이다. 그 결과로 우리의 정신문화는 왕조시대의 권위주의나 농촌경제시대의 폐쇄성을 벗어나지 못한 채 급격한 산업화에 따른 혼탁마저 생겨 황무지에 쓰레기까지 쌓인 꼴이 됐다. 황무지의 장면들 최근 출판된 책 중에 한국인이나 이 나라의 여러 가지 사회현상에 대해 비판적으로 쓴 것으로는 일본인 이케하라 마모루의 『맞아죽을 각오로 쓴 한국, 한국인』, 영국 「더 타임스」의 M. 브린 기자의 『한국인』이 있다. 벌써 16년 전이지만 일본 교도통신의 구로다 가쓰히로는 『한국인 당신은 누구인가』를 한국과 일본에서 동시에 펴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두 사람의 일본인은 한국에서의 오랜 생활을 통해 느낀 얘기를 재미있게 전개하면서 우리의 허술하거나 부족한 점을 잘 짚어주었다고 본다. 「더 타임스」의 브린 기자는 주로 세계화의 관점에서 한국의 정치·경제에 초점을 둔 거시적 비판을 하고 있다. 그가 강조한 과도한 민족주의 성향 같은 것은 새로운 시대를 맞는 시점에 우리에게 좋은 충고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일본인들은 우리가 산업화·도시화 과정에 잃어버리고 있는 재래습속에 대한 향수도 아쉬운 듯 지적을 하고 있는데 그런 현상은 어쩔 수 없는 것이고, 또 그런 습속이 유지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가는 의문에 속한다. 그러나 우리의 퉁명스러움이나 무질서 부패 적당주의 마구잡이식 반일(反日) 같은 것은 우리 스스로도 비판하고 있지만 정말 하루바삐 고쳐져야 할 악습이다. 우리 모두가 느끼고 있듯이 국제적 교류가 날로 빈번해지고 외국인 투자업체도 크게 늘어나고 있다. 그래서 농촌이야 시간이 멀었다 해도 대도시는 급속히 국제적 성격을 띨 수밖에 없다. 그런데 외국인들이 이 나라에서 생활하면서 계속 불쾌한 일이 생기고 사소한 행정사무 보는 데도 사람을 피곤하게 하고 선진국 사람들의 사고방식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자꾸 생기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런 일들 가운데는 우리가 약간만 신경쓰면 해결될 것도 많다. 예컨대 외국여행자의 불만신고 가운데 가장 많은 것이 공항에서의 택시문제다. 시내까지 들어오면서 5만원, 8만원을 요구한 운전사가 있다는 것이다. 한국인이 많이 투숙한 호텔에서는 떠드는 소리가 너무 심해 잠을 설쳤다는 등의 불평도 있다. 요즘 이른바 세계화다 글로벌화다 해서 세계 각국에서 통용될 수 있는 글로벌 스탠더드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이것은 국제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경제시스템뿐만 아니라 사회생활의 대부분 영역에서 누구나 용인할 수 있고 적응하기 쉬운 제도와 행동의 준칙을 말하는 것이다. 하버드대의 국제정치학자인 조셉 나이는 군사력 같은 하드 파워(hard power)의 시대는 가고 앞으론 새로운 아이디어나 문화의 힘 같은 소프트 파워(soft power)의 시대가 전개된다고 되풀이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지식·정보 산업시대에는 창조력이 가장 중요하다는 얘기의 다른 표현일 것이다. 그런데 소프트 파워가 지배하는 시대에 사고가 유연하지 못하거나, 논리보다 정으로 문제해결을 하려 한다거나, 계산에 모호성 같은 것이 있다면 어떻게 외국인과 새로운 21세기 사업을 할 수 있겠는가. 지식·정보분야에서뿐만 아니라 기존 산업, 즉 제조업이나 금융부문에 대해서도 외국인의 불평은 많다. 한 프랑스 은행지점장은 『한국인은 시키면 부지런히 잘하는데 시키지 않으면 아무것도 못 한다』고 TV에서 털어놓기도 했다. 그리고 근무시간이 지나 퇴근해도 괜찮은데 자기가 퇴근하지 않으면 그대로 앉아 있는 것도 이해하기 어렵다고 했다. 우리가 갖고 있는 기본정서의 하나는 외국 것이라고 다 따라야 하느냐 하는 일종의 반감 같은 것이다. 하지만 무엇을 따르고 무엇을 따르지 말아야 하느냐 하는 구체적인 문제에 들어서면 난감해진다. 그러나 이것도 좀 생각해보면 의외로 간단한 답변이 나온다. 문제는 그런 걸 생각도 안 해보고 터무니없는 민족주의 정서를 내세우거나 서양적인 것은 버터냄새 난다고 싫어하는 경향이 아직도 상당히 남아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간단히 말하겠다. 사고의 지평을 약간 넓혀 근대·현대 사회라는 것을 생각해도 외국인과 쉽게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채널은 확 뚫린다는 것이다. 앞서 프랑스인 지점장의 얘기를 했지만 요컨대 그는 수평사회의 정신문화를 갖고있고, 그 지점의 한국인은 수직사회의 정신문화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수평사회는 신분적 사고를 거부한다. 직장의 서열은 능률을 위해 정해진 것이지 그것 자체에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반면에 수직사회는 권위주의로 지탱되며 권위주의에 젖어 서양인과 상대하면 소통이 안 되기 마련이다. 우리 관공서나 회사에서는 상사가 퇴근하기 전에 하급자가 불쑥 일어나 퇴근하면 대부분의 상사가 겉으로는 가만 있더라도 속으로는 괘씸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자기 권한내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서 열심히 해도 약간만 문제가 생기면 「문제아」니 「저돌적」이니 「제멋대로」니 하는 비난을 받고 더러는 치명상을 입을 수도 있다. 이런 게 바로 권위주의 체제하의 조직이다. ------------------------------------------------------------------------------- - 「법률상인」이 되지 말라? ------------------------------------------------------------------------------- - 앞서 예를 든 이케하라 마모루는 한국인이 엄청난 뇌물을 받고 적발돼도 『재수없다』고 말하는 것을 어이없는 일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여기에서 또 우리 전통문화의 취약성이 발견된다. 부정이니 뇌물에 대해서는 한국인 누구라도 나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재수없다』는 말을 하게 되는 심리적 배경을 보면 우리의 전근대적 사고의 틀이 발견되는 것이다. 재수없다는 것은 내 주변, 내 조직, 내 사람들이 거의 비슷한데 「나만 걸렸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이런 불평은 자기네 조직 내의 사람끼리는 푸념으로 통할 수 있는 말이다. 그러나 공무원이 뇌물로 적발됐다면 그는 공무원과 국가, 공무원과 시민이라는 근대사회의 기본관계에 대해서는 아무런 의식도 없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설혹 수십명의 동료가 다 뇌물을 받았더라도 자기가 걸렸으면 자기의 행위는 납세자인 국민의 입장에서 평가받아야 마땅한 것이다. 그런 기초 의식이 희박하거나 아예 없으니까 「재수없다」는 말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이런 예를 조금 더 들어보자. 얼마 전 대전 법조계에서 일어난 일로 떠들썩했다. 대구고검장이 징계를 받아 물러났다. 그는 퇴임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부끄럽지도 않은 일로 부끄럽게 물러난다』 수사(修辭)로서는 괜찮은 표현이다. 그가 떡값이나 향응을 받은 일이 없다면 징계는 부당하고 정말 부끄러울 것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떡값은 받았지만 그것은 관행이고 법조계에서 말하는 누구나 자유로울 수 없는 그런 유의 과오에 속한다, 따라서 내가 부끄러워해야 할 이유가 없다는 뜻으로 얘기했다면 앞의 뇌물 예와 같은 멘탈리티에 속한다. 즉 판사나 검사라면 그 정도 대접은 늘 받아왔는데 그게 무슨 잘못이냐고 생각한 것이라면 그야말로 어이없는 사고방식을 갖고 있다고 봐야 한다. 자기네끼리는 누가 누구를 탓하느냐고 항변하고 논쟁하고 징계의 부당성을 따지더라도 국민이 지켜볼 공개된 자리에서는 할 수 없는 말이다. 더욱 우스운 것은 지난 1월에 사법 연수원졸업식에서 대법원장이 한 말이다. 그는 법조계 비리와 관련, 『여러분은 법률상인이 되지 말라』고 당부했다. 신문과 TV에서도 그대로 인용보도했고 이 말에 대해 논평도 없었다. 시민단체나 일반국민에게도 저항감 없이 지나갔다. 이런 표현에 전혀 어색해하거나 나아가 부당하다고 여기는 징후가 없다는 것이 우리의 정신문화 수준이다. 만약 대전의 문제 변호사가 법률상인으로 제대로 일했다면 이번 사건이 생길 수 있었을까. 변호사가 변론을 잘해서 많은 수임료를 받는다면 하등 나쁜 일이 아니며 오히려 유능한 변호사라 할 수 있다. 상인이란 어감이 뭣하더라도 서비스를 제공하고 그 대가를 받는 것은 경제적으로 엄연한 상행위인 것이다. 「법률상인」이란 말의 함축에는 「상행위는 아무렇게나 하는 것」이라는 잠재의식이 깔려 있다. 아다시피 지금은 경제시대다. 법조비리도 요컨대 돈 때문에 생긴 것이다. 이 경제시대의 핵심적 과제는 「상윤리」가 제대로 정립되는 것이다. 판사직업의 최고위에 있는 사람이 이렇게 의식없이 말하는데도 그 많은 경제단체에서는 무반응이다. ------------------------------------------------------------------------------- - 한국적 사고의 비극 ------------------------------------------------------------------------------- - 다음 2월에 끝난 국회청문회장 광경을 새겨보자. 듣자고 증인을 불러놓고 말도 제대로 못 하게 윽박지르는 난센스는 수많은 사람들의 빈축을 샀다. 여기서는 몇 가지 발언의 배경을 음미해본다. 한 증인이 질문자와 논쟁조로 얘기하니까 위원장이 『여기 위원장도 당신 5, 6년 선배인데 태도가 그게 뭐요』 하고 꾸짖었다. 또 『여기 의원들도 다 좋은 학교 나왔으니 혼자 아는 체하지 말라』는 훈계말씀도 있었다. 증인의 발언태도가 실제 얼마나 불량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불량했다면 증인으로서 그의 태도에 대해 주의를 주면 그만이지 5, 6년 선배 얘기는 국가차원의 공개석상에서 왜 나오는가. 가장 예리하고 객관적이어야 할 국회청문회에서 선배나 학교 얘기가 나오는 것은 우리 기성세대가 과거 속에 살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세계화시대라고 해도 외국인은 이런 소상한 내용까지는 잘 모를 것이다. 재판이 있어도 거의 상사재판일 테니까 아직은 한국 법조계의 생리까지 유심히 들여다보지는 않을 것이다. 정치문제도 내분이 어느 정도 심한가, 정치적 안정은 기대할 수 있는가 하는 이해관계로 관심을 가질 것이다. 그네들이 TV를 보면서 이런 발언들을 다 새겨듣는다면 정말 낭패다. 아마 「제살을 깎아내는 아픔」 같은 것은 얼른 이해하기 어려울지 모른다. 그게 다행이다. 공직에 있는 사람이 부정이나 공직윤리에 반하는 행동을 했다면 처벌받아 마땅한데 후배를 처벌한다 해서 제살을 깎아내는 아픈 심정을 토로한다면 역시 국민 앞에서는 사선공후(私先公後)가 되는 것이다. 자기네 조직원들만 듣는 자리라면 용인될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조차 옳은 태도는 아니다. 교도통신의 구로다가 쓴 책에는 이런 얘기도 나온다. 한국인 친구가 일본에서 운전을 하다가 과속으로 걸렸다. 일본인 교통경찰은 깍듯이 인사를 하고 웃으며 『도쿄에서 운전하기 힘들죠』 하며 친절히 대해주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한국인은 자기를 봐주려니 하고 안심했는데 딱지를 떼더라는 것이다. 이 한국인은 귀국 후 분개해서 말하기를 『일본인은 겉 다르고 속 다르다』 이런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뒤집어서 살펴보면 오히려 쉽게 이해가 되겠다. 그 일본경찰이 무뚝뚝하게 말하고 딱지를 뗐다면 그것이 옳은 자세일까. 실제 우리는 그렇게 하는 경우가 더 많다. 우리는 많은 경험을 통해 일본인의 이중성을 비난한다. 실제 큰 이해관계에서 그들은 철저히 전술·전략적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니까 이중성이 있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러나 이중성이 있고 없고는 이쪽에서 분간할 문제고 위의 교통경찰의 예에서 보듯 오해는 말아야 하는 것이다. 그 순경은 쓸데없이 위엄을 부리지 않고 오히려 상대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려는 배려까지도 했을 것이라고 보는 게 정확할 것이다. 그리고 「봐준다 안 봐준다」는 식의 생각 자체가 한국적 사고에 불과한 것이다. 이렇듯 우리는 그동안 이 땅에서 젖은 정서와 사고방식으로 남을 평가하는 버릇이 있다. 그것이 세계적 기준이 될 수 있는가. 넓은 세상은 크게 변했는데 작은 머리속은 변하지 않았다. 정신현상에 대한 오해 90년대 들어 가장 흔하게 쓰인 용어가 아마 「문화」라는 말일 것이다. 교통문화, 외식문화, 토론문화, 음주문화 등. 이 밖에도 많다. 최근에는 노태우씨가 「전직대통령문화」라는 말까지 했다. 어쨌든 문화란 말이 많이 쓰이는 것은 좋은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생각이나 행동을 좀 세련되게 하자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자는 뜻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또 90년대 후반 들어서는 시민(市民)이란 말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주로 단체이름에 많이 쓰이고 있는데 이것 역시 환영할 일이다. 시민이란 대강 짐작되듯이 백성이란 말의 반대 개념이다. 능동적인 존재, 주권자라는 존재감을 드러내는 말이다. 그것은 또 시민 가운데서도 중산층을 대표하는 이미지가 있어 어떤 논평을 하거나 행동을 할 때 치우치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감도 갖게 한다. 크거나 작거나 많은 시민단체는 사기꾼만 끼지 않는다면 민주사회의 버팀목으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시민단체는 새로운 시대에 더욱 의미있는 역할을 할 수 있다. 냉전 이후의 시대는 세계적 규모로는 무한경쟁이, 국내적으로는 무자비한 능률주의가 생존 논리로 굳어지고 있다. 그 동안은 시민단체의 역할을 언론이 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왔다. 그러나 제4의 권부(權府)라는 말이 생겼듯 언론의 역기능에 대한 논란과 비판은 날이 갈수록 거세질 것이다. 유럽과 미국에서는 주요 언론기관의 시민성이 의심받은 지 오래다. 권력, 대기업, 주도적 언론의 유착이 냉전 이후 심해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도 그 징후들을 적잖게 보아왔다. 언론인과 법률가는 대표적인 시민계급의 향도자로 등장했건만 최근 새로운 신분으로 변질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변하는 환경에서 시민단체는 노동계와 경영층의 요구 사이에서 균형추 노릇을 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으나 아직 선진국 수준에는 훨씬 못 미치고 있다.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크거나 작거나 수많은 결사(結社)들이 등장해서 토론과 행동으로 전위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 - 문제의 핵심을 보자 ------------------------------------------------------------------------------- - 그런데 언론이나 시민단체의 활동 중 현상의 본말을 오해해 초점에서 이탈하는 사례가 많다. 예를 들어보자. IMF 사태 이전에 우리는 과소비나 낭비벽 등을 크게 꾸짖었고 외국인들은 샴페인 일찍 터뜨린다는 비유로 우리에게 충고를 해주었다. 외국인의 시각에서는 한국 또는 한국인 전체에 대해 말한 것이니까 초점이 빗나간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 언론이나 시민단체들이 국민의 정신을 탓하는 것으로 초점을 맞췄어야 했을까. 당시 필자는 과소비는 정신보다는 부패로 인해 생기는 공짜 돈이 주범이라는 것을 알자고 주장했다. 예컨대 당시나 지금이나 월급이 500만원이라면 상당히 큰 액수다. 만약 그것이 전부라면 그런 고소득자라도 낭비를 할 여유가 있을까. 세금 1백몇십만원에다가 각종 공제금 경조비를 빼고 또 아내에게 생활비 주고 나면 용돈이 얼마 남을까. 하룻저녁 10만원짜리 저녁 회식하기에도 벅찰 것이다. 아내라는 소비자 역시 마찬가지다. 200여만원의 생활비로 값비싼 모피나 외제 가구를 턱턱 살 수 있을까. 참고로, 당시 수입 옷가게의 쇼핑 실태를 한번 살펴보자. 어느 점원의 얘기라고 신문이 보도한 것이다. 『하루 평균 7~8벌 팔면 매출액이 500만원 넘습니다. 고객은 20대부터 광범위 합니다. 그런데 고객들에게 공통된 현상은 진열상품 중 가장 비싼 것을 택한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비싸야 잘 팔립니다』 만약에 소비자의 정신에 문제가 있다면 외제 콤플렉스나 상품에 대한 지식의 미비, 들뜬 기분 같은 것은 지적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비쌀수록 좋다고 마구 덤비는 이런 현상의 배경에는 쉽게 번 돈, 눈먼 돈, 부정한 돈이 있기에 가능하다는 것을 필자는 강조했다. 실제 회사 경영층이나 고위간부는 비자금이다, 판공비다 해서 얼마나 마구 썼는가. 정계나 관계에는 또 얼마나 돈을 많이 뿌렸는가. 변호사 같은 소위 전문직업인은 사소한 사건 하나에도 수백만원씩 받으며 세금은 얼마나 냈는가. 당시 한 기자에게 이런 말을 한 기억이 난다. 『당신 과소비 기사 쓰는 건 좋지만 큰 갈비집 주인이 소득세 얼마 내는지 취재해봐요. 당신보다 몇 배 잘 살고 잘 벌지만 세금은 당신보다도 적게 낼 거요』 우리나라 사람은 분위기에 쉽게 휩싸여 누가 하면 「너도 나도」 하지만, 그래도 내면에는 엄청난 「가난에의 공포」가 도사려 있다. 절박한 경험은 거의 안 했을 현재의 20대, 30대도 부모들의 가난 얘기를 듣고 자라거나 아주 어렸을 때의 희미한 기억으로 가난에 대해 선진국 젊은이와는 다른 경계심리를 갖고 있다고 본다. ------------------------------------------------------------------------------- - 도덕·윤리에 앞서는 것 ------------------------------------------------------------------------------- - 이런 사람들에게 「소득형성의 부당성」은 지적하지 않고 도덕적 해이니 낭비벽이니 하고 떠드는 것은 우스운 일이었다. 해외여행 역시 마찬가지다. 환율이 800원대라는 것에 본질적인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보통사람들조차 해외여행중에 『지금 달러가 너무 싼 게 아닙니까?』 하고 묻는 말을 여러 번 들었다. 벼락부자가 늘고 또 이들에게 과시적 소비경향이 있는 게 사실이지만 한 해 500만명(연인원)이라는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해외여행을 한 것은 정신적 해이 이전에 환율을 탓했어야 마땅했다. 필자가 보기에 이 나라 사람들은 정상적인 수입으로만 생활한다면 극소수의 부자들을 제외하고는 쓰라고 해도 아낄 사람들이다.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처절했던 가난의 기억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일본인들 역시 소비부족으로 경제가 잘 돌아가지 않아 아우성이지만 그래도 안 써서 문제가 커지고 있다. 요즘도 세계 제2차 대전 후 굶어죽었다는 어느 판사의 얘기가 가끔 소개되기도 한다. 투기도 같은 차원에서 말할 수 있다. 전형적인 자본주의 국가라는 미국에서도 투기는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요즘의 헤지펀드라는 유령이 취약한 나라의 금융시장을 얼마나 교란시킬 수 있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비난한다고 해서 투기를 없앨 수 있을까. 우리의 경우 산업화 과정에 수십년간 최고의 수익률을 올린 것은 땅 등 부동산이었다. 이 부동산은 또 담보대출을 하는 우리 금융시장에서 최고의 담보물이 되었기 때문에 하루에 황금알을 두 개씩 낳는 거위나 마찬가지였다. 누가 마다하랴. 직위를 이용해 개발정보를 먼저 빼내 투기를 한 공무원은 도덕적인 문제가 아니라 불법행위를 한 것으로 처벌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보통의 기업이나 개인의 경우 윤리나 시민정신을 들먹이기에 앞서 투기적 환경이 만들어진 데 대한 비판이 우선돼야 할 것이다. 누구나 인정하듯 윤리와 도덕은 사회질서의 기초요건이다. 그것이 붕괴되면 아무리 법이 잘 집행된다 해도 극히 제한적인 기능밖에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윤리 도덕은 귀중하고 고상한 것이다. 존귀하므로 함부로 입에 올리면 그 가치가 훼손되기 마련이다. 더구나 경제 행위에 있어서는 직업적 윤리, 실정법적 규정 이상으로 과도한 정신적 부담을 안겨주는 추상적 도덕은 유해하다. 직업윤리가 최소한으로 표현된 상도(商道)만 웬만큼 지켜도 우리는 대단히 상쾌한 상태에서 살 수 있다. 범죄적인 행위만 하지 않아도 그 많은 불량식품, 그 많은 사기적 행위는 현저히 줄어들 것이다. 정신문화의 성숙 필자는 한국인의 정신구조를 「어린이성 성격(childish personality)」이라고 본다. 다른 말로 하면 미성숙(immaturity)이다. 우리네 교통질서는 엉망이다. 이는 운전자들이 나 혼자 빨리 가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답답한 것을 적절히 통제하지 못하는, 어린이 같은 조급·충동성에 더 큰 원인이 있다고 본다. 폭행이나 강·절도 등의 범죄가 늘고 있는데 이 역시 어떤 사악함보다는 충동성이나 감정적 요인이 깊이 내재한다고 느낀다. 그래서 가설로 「어린이성」을 내세우고 싶다. 이런 측면에서 필자는 학교 교육에서 생각하고 토론하는 교육을 강조한다. 그래야만 정신이 성숙할 수 있는 심리적 토양이 조성된다. 대학입시는 그러한 교육을 보장할 수 있게끔 혁명적으로 개편돼야 한다. 지난 1월 하순에 소위 「왕따」 문제로 고교생끼리 토론시간을 가졌다는 기사가 있었다. 토론이 끝난 뒤 한 학생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왕따 당했다는 애의 말을 듣고 보니 그 정도로 심한 고통을 받았는지 처음으로 알게 됐습니다. 동정이 가고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남을 따돌리며 괴롭히지 말라고 열 번 설교하는 것보다 이처럼 직접 느끼게 하는 게 교육 요령이자 과학적 접근법이다. 이런 과학적 접근법은 주로 심리학에 의존하게 된다. 최근에는 선진국에서 21세기 주요 연구과제의 하나로 두뇌연구를 꼽고 있는데 이것 역시 우리의 복잡한 심리현상 해석에 큰 도움을 줄 것이다. ------------------------------------------------------------------------------- - 「성숙한 인간」의 특성 ------------------------------------------------------------------------------- - 70, 80년대에는 심리학에서 프로이트나 융의 결정론적 이론을 넘어 인간 정신의 변화·성장·발전이라는 측면에서 연구가 크게 진척되었다. 이런 경향의 연구를 「성장 심리학」이라고 부른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E. 프롬도 인간 성격에 영향을 주는 거대한 사건들, 즉 전쟁·대공황·혁명 등에 주목하면서 인간 정신의 비극적 형성과정을 강조했지만 그도 결정론에서는 탈피했다. 그가 나중에 제시한 「생산적 인간」은 사회현상이나 문화에 의해 사람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와 함께 스스로 변할 수 있는 가능성도 얘기했다. 프롬 이외에도 많은 연구자들이 정신의 성장 잠재력에 대해 책을 쓰고 강연을 했다. 두뇌 연구자들은 우리가 걸핏하면 걸려들 수 있는 미신이나 심리적 불안, 긴장 등이 육체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 한결 선명한 설명을 해주고 있다. 예컨대 얼마 전까지 동양인은 서양인보다 우뇌가 발달해서 정서적 측면이 강하다고 알고 있었지만 이것이 근거없는 말임을 밝혀냈다. 서양에서 자란 동양계 아이에겐 우뇌 발달의 증거가 전혀 없는 것으로 조사됐다. 학자들은 또 사람은 두뇌능력의 1%도 활용하지 못하고 죽으며 100명 중 두뇌의 역량을 제대로 발휘한 사람은 1명이나 될까말까 하다고 말한다. 두뇌 활용이란 게 수치로 계산될 수 없는 것이긴 하지만 연구자들의 말은 우리가 물려받은 최고의 자산을 아주 조금밖에 활용하지 못하고 죽는다는 안타까운 사실을 강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우리 경험으로도 대강 알 수 있다. 예컨대 초등학교 때 비슷한 학습능력을 가졌던 두 명의 학생 중 계속 고등교육을 받은 학생과 그렇지 못한 학생이 나중에 얼마나 현격한 정신적 차이를 보이게 되는가.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도 더욱 인간자원이 최대 최선의 자본이 될 것이다. 한국인이 지니고 있는 여러 문제도 궁극적으로는 「인간 자질」에 좌우될 것이다. 성숙한 인간이 다수를 차지한다면 이에 따라 성숙한 사회가 도래할 것이다. 참고로 미국의 존경받는 학자였으며 심리학회장을 지낸 A. 매슬로가 정리한 「성숙한 인간」의 특성을 간추려 본다. ▲현실인식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본다. 주관이나 선입견을 최대한 배제하면서 객관적으로 살피려 노력한다. 부정직이나 허위를 재빨리 간파한다. 세속의 평판이나 유행 등에 휩쓸려 판단하지 않는다. ▲솔직·자연스러움 꾸밈없이 자신을 표현한다. 자신의 마음을 숨기지 않는다. 일반적인 규칙이나 규범 등을 고의로 우롱하며 쾌감을 느끼지 않는다. 전통이나 관습에 복종하는 것이 정신적 성장에 지장이 될 경우 과감히 대적한다. ▲일에 대한 성실 자기 일에 헌신적인 정열을 바친다. 일에서 돈이나 명성을 구하기보다 더 높은 가치를 발견하려 한다. 작가나 학자는 진실을, 예술가는 미(美)를, 법률가는 정의 실현을 추구한다. ▲독립성 스스로 결정하며 사생활을 존중하고 강한 독립심을 갖고 있다. 자신의 성취에 대한 외부평가보다 자기만족으로 충분하다. 그들은 주위에서 고고하다는 비난을 받기도 하는데 이것은 그들이 타인을 피하거나 경멸해서가 아니고 타인에 대한 강한 욕구를 못 느끼기 때문이다. ▲자율성 자신의 욕구불만이나 결핍, 위기와 같은 외적 환경에 덜 지배당한다. ▲신선한 감각 유지 일상적이고 평범한 것에도 싫증내거나 지루해하지 않는다. 저녁 노을을 보며 생의 즐거움을 느끼고 맛있는 음식을 대할 때 감사한다. 돈이나 화려한 파티 등에 대해서는 무감각한 편이다. ▲사회적 관심 이웃과 사회 인류에 대해 관심이 많고 애정을 느낀다. 누구에게나 너그럽고 형제애로 대하려 한다. 두드러진 성향은 인본주의(人本主義)다. ▲민주적 성향 사회계층 교육수준 종교 인종 등에 구애받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관대하며 수용적이다. 상대가 지적 수준이 낮아도 우월감을 보이지 않으며 자기가 모르는 분야의 사람에겐 겸손하게 배우려 한다. ▲선과 악의 구별 어떤 상황에서나 자신이 정의한 윤리와 도덕을 지키려 한다. 목적 달성도 중시하지만 목적을 향해 가고 있다는 사실 자체도 즐긴다. ▲창의력 성숙하고 자아실현을 한 사람들에게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 창의성이다. 어떠한 직업을 가졌든 새로운 시각으로 사물을 대하고 혁신적인 태도를 견지한다. ▲유머 감각 남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것, 음탕한 것, 또는 우월감을 나타내는 유머는 삼간다. 대체로 교훈이 담겨 있거나 듣는 이가 미소지을 수 있는 유머를 즐긴다. 우선 필자의 마음도 들었지만 매슬로 박사의 이 특성들을 소개한 또 다른 이유는 이 특성들이 우리가 도달하기에 너무 어려운 높은 곳에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런 특성들이 아주 특별한 사람들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누구나 어릴 적부터 집에서나 학교에서 좋은 교육을 받고 또 스스로 자기성장을 위해 노력한다면 어느 정도까지는, 그리고 이런 특성 중 일부는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 성숙한 인품은 자신을 자유롭게 할 뿐 아니라 사회에도 기여하게 된다. 그것은 또 우리와 같이 전통문화에서 새로운 문화로 나아가야 하는 입장에서 좋고 나쁜 것, 버릴 것과 취할 것의 선택적 안목을 키워줄 것이다. 되풀이해서 얘기하지만 우리의 혼탁현상은 위로부터 사회의 저변층에 이르기까지 인간으로, 시민으로, 사회의 지도자로 적절한 교육·훈련을 못 받은 데 가장 큰 원인이 있다고 본다. 훈련되지 않은 채 사회·경제의 급격한 변화에 던져진 것이 문제의 핵심이라는 얘기다. 그렇다면 문제해결의 길도 명백하다. 새로운 환경의 성격을 이해하고 이에 걸맞은 교육을 하는 것이다. 이 교육은 물론 학교교육만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고유문화라는 함정 우리는 이제까지 우리 정신문화의 취약성이나 미숙함에 대해 살펴보았고 그 원인이 되는 역사적 배경이나 최근의 사회·경제적 상황 등을 검토했다. 그리고 우리가 목표로 하는 번영되고 자유로운 사회는 외형적 개혁과 함께 정신문화의 성숙에서 가능하다고 얘기해왔다. 물질적으로 풍족하고 개인이 자유스럽게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단계는 다시 말하면 「근대화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다. 독자들은 이 근대화가 서구화와 같은 것은 아님을 알 것이다. 예컨대 서구사회의 기본정신구조 가운데 하나인 기독교적 윤리나 내세관이 우리의 근대화와는 관련없다는 것을 인정할 것이다. 정신적 가치로는 개인의 자유·인권·민주주의 그리고 물질적으로는 산업화가 근대화의 기본 테마라는 것을 우리는 대개 동감하고 있다. 논자(論者)들 사이에서는 「무엇이 근대화냐」 하는 현학적 논쟁도 있지만 쉽게 말해 서양도 근대화 이념이 생겨나서 그것을 목표로 근대화를 이룩한 게 아니고 근대사회가 생겨나면서 그 특질로 근대성(modernity)이란 말이 나오게 된 것이다. 그런데 최근 국내에서는 약간, 그리고 우리보다 산업화가 덜된 지역에서는 상당한 기세로 고유문화론이 일고 있다. 이런 경향은 서양의 개인주의가 지나치게 이기주의화하고 그네들의 물질주의 기계문명이 자연파괴와 인간의 타락을 초래하고 있는 여러 가지 부정적 증후군에 의해 촉발된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오해와 기득권층의 위험한 음모까지 개재돼 있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앞에서 근대화를 저해하는 우리의 정신문화를 비판하면서 개방적인 자세로 세계의 문물을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무엇이 우리 것이 되는가 하는 것은 미리 선택하기도 어려운 것이다. 결국 전반적인 지적 성숙을 통해 비판 능력이 향상되면 여과될 것은 되고 남을 것은 남는다는 시각에서 「우리 것」을 생각했다. 따라서 우리 것의 정체성은 불변이 아니라 생성되는 것이요 끝없이 변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최근 몇 년 사이에 고유문화론은 재래의 「아시아적 가치론」에다 S. 헌팅턴의 저서때문에 증폭되고 있다. 유교윤리와 집단주의 성향을 강조하고 아시아적 가치론은 화교측 학자들이 처음 제기한 것이다. 이것은 90년대 들어 일본이 침체하고 아시아 신흥공업국들이 흔들리며 주춤해졌고 일부에서는 『아시아적 가치란 없다』는 반격도 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의 이론이 경제사정에 따라 부침하는 것은 가소로운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헌팅턴은 이슬람의 편협, 중국의 자만, 서구의 오만으로 상징되는 문명권의 충돌 가능성이 냉전 이후의 세계에 높아가고 있음을 지적했는데 매우 구체적인 자료 인용과 예리한 관찰력으로 상당수 독자의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우리가 보고 있듯이 이슬람권은 내부적으로는 근본주의의 득세와 범이슬람권의 결속강화가 계속되고 있고, 중국은 14억 인구가 산업화 바람에 휩싸여 고도성장기에 들어섰다. 따라서 이들의 세력이 상대적으로 약화되고 있는 서구권과 마찰을 빚을 가능성을 예상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문명의 충돌이라고 볼 것인가, 또는 중국처럼 국력이 커지면 자연스레 생기는 자기 현시욕 때문에 빚어질 수 있는 힘의 충돌 가능성인가는 생각해볼 문제다. 여하튼 여기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고유문명을 강조하는 것이 자국에 이익인가 손해인가, 고유문명을 강조함으로써 어느 계층이 혜택을 보며 어느 계층이 계속 피해를 보게 되는지를 살펴보는 일이다. ------------------------------------------------------------------------------- - 누구를 위한 전통인가 ------------------------------------------------------------------------------- - 고유문화론자에게 『고유문명이란 뭐요, 무엇을 지킬 것이오』 하고 물으면 대답을 못 한다. 그저 막연히 전통에 대해 향수를 갖거나 서구적 합리주의는 좋은 것 같지만 어쩐지 정나미가 떨어지고 사람 사는 맛이 안 나는 것으로 느끼는 사람 중에 이렇게 전통문화를 언급하는 예가 많다. 그 심정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그리고 합리주의든 개인주의든 과잉이면 좋을 게 없다는 평범한 진리도 우리는 알고 있다. 또 이런 사람들 가운데는 정이나 의리를 강조하는 그것이 전래의 미덕이라고 말하면서도 남들이 그런 모습을 보이면 『끼리끼리 논다』거나 『패거리를 짓는다』고 야단이다. 이런 정신상태를 흔히 이중성이라거나 허위성이라고 힐난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필자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앞서 얘기한대로 그 시간 그 장소에서 즉시 느껴진 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어린이성 성격에서 나온 것으로 본다. 따라서 악의성이 별로 없어 비난할 정도도 못 된다. 고유문화 또는 고유문명의 강조는 우리처럼 변화가 많아야 하는 사회에서는 역기능이 크다. 「우리 것」 「민족적인 것」 하면 그 성격에 대해 음미해보지도 않고 일단 호감을 갖고 수용하려는 정서적 자세가 있는데다 그 말들이 마력 같은 것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오랫동안 고립된 사회의 특징이기도 하다. 고유문명에의 회귀 자세는 이슬람권의 근본주의자(Fundamentalists)에게서 전형적으로 볼 수 있다. 이들은 밖에서 보면 반(反) 또는 역(逆) 근대화주의자들이다. 이들이 더욱 세력을 넓혀나갈지, 한때의 난센스로 끝날지는 장담할 수 없으나 현재 세력을 넓혀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헌팅턴은 서구권의 경제적 군사적 힘의 상대적 감소로 문화적 영향력도 줄어드는 것과 관련, 이슬람의 복고주의의 경향은 심화될 것으로 보았다. 중동지역의 이슬람권은 왕정 아니면 공화정이지만 공화국도 대통령이라는 반(半) 군주가 지배하고 있다. 이라크의 후세인은 잘 알려진 바와 같고, 아랍에미리트 대통령이 28년, 시리아 대통령은 31년간 통치자로 군림하고 있으며, 둘 다 아들에게 지위를 승계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들 나라들에 있어 고유문명의 유지나 전통으로의 회귀가 민중의 자유 인권과 어떻게 연관될까. 누구를 위한 전통일까. 석유가 고갈될 때 아무런 산업기반이 없는 나라에서 민중은 다시 낙타를 타고 대상이 되거나 사막의 비적이 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왕족과 기타 귀족은 스위스나 미국에 예금해 놓은 것만으로도 누대가 풍족하게 살 수 있다. 중국에 있어 고유문명 논의는 이슬람권과는 다르게 접근해야 할 것이다. 중국인들은 1919년의 5·4운동을 전후해 공식적으로는 전통과 단절한 것으로 되어 있다. 황제와 관료통치로 요약되는 권위주의 지배와 그것을 뒷받침했던 유교윤리는 수십년간의 논쟁 끝에 드디어 버리는 것으로 5·4운동 지도자들에 의해 천명됐다. 『신청년』이라는 계몽주의 잡지에서 진독수(陣獨秀)는 과감히 말했다(진독수는 국민당 쪽에서는 공산당 두목, 공산당 쪽에서는 기회주의자로 냉대받은 혁명가이자 사상가). 『존비(尊卑)를 구분하고 계급을 중시하며 인치(人治)를 내세우고 민권을 반대하는 주장은 전제 제왕을 만들어내는 근본원인이다. 공교(孔敎)의 교리는 군주에 충성, 부모에 효도, 남편에의 복종을 가르친다. 이러한 사상하에 공화정치는 불가능하다』 ------------------------------------------------------------------------------- - 비판적 창조정신을 키우자 ------------------------------------------------------------------------------- - 현재 중국의 이데올로기는 사회주의 시장경제다. 최근에는 사유재산까지 부분적으로 허용한다고 밝혔다. 거대한 인구와 넓은 국토의 나라, 강력한 지배력이 없으면 천하대란이 일어났던 역사적 전통. 현재의 통치 방식이 최선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지도층은 점진적 자유화 방식을, 그리고 천안문사태 희생자들로 상징되는 자유주의자들은 인권과 자유의 대폭 확대를 요구한다. 중국의 경우 고유성을 강조한다 해도 절대 과거로는 복귀할 수 없다. 여러 가지 전통적 요소가 유지된다 해도 시장경제는 확대될 것이며 자유화의 정도는 시간이 결정할 것이다. 유교가 초월적 종교가 아니었던 것이 중국의 유연성을 가능케 한다. 간단히 말해 중국은 전통문화로 회귀해 대국이 되는 게 아니라 자기 모습을 조금씩 바꿔가면서 강자로 떠 오를 것이다. 우리는 중국보다는 앞서 있지만 그래도 전통사회와 근대사회의 중간에 있다고 본다. 여기에서 과감히 나아가지 않고 머뭇거리며 뒤돌아본다면 선진화는 그만큼 뒤처질 수밖에 없다. 또 앞으로 나아간다고 해서 서구문화의 진수를 깨닫지 못하고 외형만을 모방한다면 한국문화는 영원히 이·삼류의 수준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이미 그런 징후들이 나타나고 있어 안타깝다. 이것 역시 우리 학교교육과 사회교육의 부실에서 연유한 것으로 본다. 다시 강조하지만 우리에게 과거 회귀는 불행을 초청하는 것이고, 분별없는 모방은 우리 자신이 성장의 한계를 긋는 일이 될 것이다. 필자에게 인상 깊었던 말을 소개한다. 이것은 우리보다 훨씬 일찍 근대화에 나섰던 터키의 존경받던 여류작가 하리데 아드바르가 쓴 것이다. 『서구 문화권에 뒤늦게 편입하는 나라도 서구문화의 단순한 추종자가 돼서는 안 됩니다. 동반자라는 자각이 있어야 합니다. 천하고 무분별한 서구문화의 모방은 그 자체로 서구정신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비서구권 나라들은 이 점을 똑똑히 알아야 합니다』 여기에 필자가 약간 덧붙인다면 모방 아닌 비판적 창조정신은 어떻게 생겨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제껏 얘기한 대로 오직 정신문화의 성숙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근대화 완성과정에 동양과 서양이라는 이분법적 시각이나 정서도 이제는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서양문명은 이질적인 그 무엇이 아니라 인류공동의 유산으로 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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