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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기)
날 짜 (Date): 1999년 3월  9일 화요일 오후 06시 21분 24초
제 목(Title): 퍼옴/한국의 삼국이 중국의 삼국보다 컸다



  제  목 : ● 우리나라의 삼국! 중국의 삼국보다 컸다(수정)
 이글은 이 코너의 10번 글 <삼국의 국력은 얼마나 됐을까?>에서
잘못된 부분을 바로 잡은 글입니다. 지난번 유니텔 삼국지 코너의
이용자이신 한신님(오광수님, ID:marverick)께서 10번 글 <삼국의
국력….>의 내용 중,《정사삼국지》에 본기(本紀)가 없다고 한 저
의 실수를 지적하여 주신 바 있습니다.
 한신님의 지적은 매우 정확한 것이었기 때문에 잘못된 부분을 바
로잡으며, 아울러 그 내용을 보완해서 다시 올리게 되었습니다.
 한신님의 정확한 지적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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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하의 패권을  놓고 중국대륙을  삼분했던  위(魏)·오(吳)·촉
(蜀) 세 나라의 국력은 과연 얼마쯤 됐을까? 인접했던 수많은 국
가들 ― 우리의 고대국가를 포함한 북쪽의 흉노, 오환, 그리고 서
역의 여러 국가들 ― 과 비교해서는 어땠을까?
 아시아의 역사를 연구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중국을  한가운데
놓고, 그 주변 여러 민족의  역사를 마치 중국사의 부산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 과연 그랬을까?
 당시는 국가 경제력의 근본을 거의 대부분 농업에 의존하고  있
을 때이므로, 농업력과 전쟁수행능력으로 국력을 평가해볼 수 있
을텐데, 이 두가지 척도를 충족시키는 것은 역시 인구(人口)이다.
인구의 많고 적음은 예나 지금이나 국력을 재는 중요한 척도이지
만, 기술의 발달이 미약했던 그  당시에는 인구야말로 국력을 재
는 절대적인 척도였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진수(陳壽)의《정사삼국지(正史三國志)》를 주해한 배송지(裵松
之)는 그에 관한 기록을 남겨놓고 있어 당시 삼국의 국력을 비교
해볼 수 있게 한다.
 먼저〈오서 손호전〉에는《진양추》의 기록을 인용하여, 오나라
가 망할 당시 오(吳)의 국력을 기록해놓았다.
「…왕준(王濬:진나라의 장군)은 지도와 호적을  접수했는데, 4주
43군, 313현에 호구수 52만3천호,  관리 3만2천, 병사 23만, 남녀
인구 2백30만, 쌀 2백80만휘(휘:쌀을 세는 단위, 1휘는 10말), 병
선 5천여척, 후궁 5천여 명이었다.」
 또한〈촉서 유선전〉에서는 왕은의《촉기》를 인용하여 촉이 멸
망할 때의 국력을 밝혀놓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호구수 28만, 남녀인구 94만, 갑옷입은 장수 10만2천, 관리 4
만 명에, 쌀이 40여만 휘, 금은이  각기 2천근, 비단과 명주가 각
기 20만 필 등 남은 재물이 이와 같았다.」
 삼국의 국력에 관한  내용은 나관중의  소설《삼국지연의》에도
나와 있는데, 오나라와 관련해서  4주83군으로 정사의 4주43군과
차이가 있고, 촉의 경우 금은(金銀)이 3천근이라 하여 정사의 2천
근과 다를 뿐 다른 내용은 모두 정사의 기록과 같다.
 다만 위(魏)나라의 국력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기록이 없어 정확
한 내용은 확인할 수가 없지만, 통상 삼국의 국력을 말할 때 '촉
의 국력은 오의 절반, 위의  1/3'이라 했으므로,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위나라는 호구수가 대략 84만 내외 정도 되었을 것으로  짐
작할 수 있다.
 인구는 촉이 가구당 약 3.36명 정도되는 셈이고, 오가 4.4명 정
도되므로, 위의 인구는 약 2백82만∼3백69만 명 정도되었을 것으
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같은 시대에 동쪽에 위치해있던 우리나라의 삼국과 비
교해본다면 어떨까?
 김부식이 편찬한《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에는 백제와 고구
려의 국력에 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있다.
 먼저〈고구려 본기〉 '보장왕'편을 보면,



「우리의 5부 176성 69만여  호를 나누어 9도독부 42주  100현을
만들고 안동도호부를 평양에 설치하여 다스리게 하였다.」
 라고 하여, 고구려가 망할 당시의 호구수가 69만 호였음을 정확
하게 밝혀놓고 있다.
 또《삼국사기》〈백제 본기〉의 '의자왕'편에는,
「본래 나라에 5부 37군 200성 76만 호가 있었다.」
 라고 기록하여, 백제가 멸망할 당시의  국력을 분명하게 기록해
놓고 있다.
 따라서 고구려나 백제 역시 가구당 약 3.36명∼4.4명 정도되었던
것으로 계산한다면(우리 나라는  전통적으로 대가족  제도이므로
실제로는 이보다 많았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고구려의 인구는 2
백31만∼303만 정도되었을 것이고, 백제의  경우 2백55만∼3백34
만 명 정도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물론 촉과 오의 멸망은  각각 서기 263년과  280년으로, 백제의
660년, 고구려의 668년과는 약  400여 년의 시차를 두고  있으며,
중국의 삼국과 우리나라의 삼국은 그 전성기가 서로 달라서 객관
적인 비교가 어렵다는 반론이 있을  수도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
러나 당시의 인구증가율을 감안한다면 이러한 반론은 별  의미가
없을 것이다. 실제로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구가 급증하기 시작한
것은 근세 이후의 일이다.
 그러므로 백제와 고구려는 위(魏)나라와는  엇비슷한 국력을 가
지고 있었고, 오나 촉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이 강한 국력을 가지
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1976년에 북한의 평남 대안시 덕흥리에서 발견된 벽화고분은 광
개토대왕 때의 고구려 서쪽 강역이 유주(幽州:지금의 북경 일대)
를 넘어 태원(太原)에까지 이르렀음을 확인시켜준 바 있다.
 또한 중국의 역사서인《송서》《양서》의 《백제전》의  기록은
사마염이 세운 서진(西晋) 때에 백제는 이미 요서(하북성 일대)·
진평(하남성 일대)의  2개 군(郡)을  차지했음을 확인시켜  주며,
《남제서》의 기록은 백제가  대방군·낙랑군·광양군·청주군·
성양군·광릉군 등 중국  동부해안 전체를 지배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일찌기 황해를 지중해로 삼아 강력한 해양국가를 이끌
었던 백제와, 만주에서 중원 깊숙한  곳까지 광대한 영토를 지배
했던 대륙국가 고구려를 중국의 삼국시대의  국가인 오(吳)나 촉
(蜀) 정도와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일 것이다.
 이러한 비교를 통해 우리가 짚고 넘아가야  할 것은, 동양의 역
사를 보는데 있어 이제 중국중심의  사관(史觀)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중국의 삼국시대는 물론이고, 진(秦)·한(漢)시대를 전후해서 동
양의 역사는 중국을 중심에 두고 주변국가들이 중국을 섬기는 형
태가 아니라, 각기 엇비슷한 힘으로  서로 밀고 밀리는 세력판도
를 형성하고 있었다.
 실제로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를 건설했던 진시황은 북방의 흉노
족이 두려워 그 엄청난 만리장성을 건설했으며, 그 뒤를 이어 한
(漢) 왕조를 건국했던 유방(劉邦)  역시 흉노와의 싸움에서 패하
여, 자기의 딸인 화번공주(和藩公主)를 흉노의 왕에게 바치며 굴
욕적인 화친책을 취하고 있다.
 중국의 역대 왕조가 본격적인  세계국가로 발돋움하게 된  것은
당(唐)나라 때의 일이다. 그런 당나라 역시 우리의 고구려와 밀고
밀리는 접전을 벌였던 사실을 주목한다면, 동양의 역사를 바라보
는 기본 시각은 이제 바뀌어져야만 할 것이다.


  제  목 : ● 삼국의 국력에 대한 문제
 [이런건 알고 계십니까?]코너에 올린 <삼국의 국력은 얼마나 됐
을까?>라는 제목의 글에 대해, 유니텔 삼국지의 이용자이신 한신
님(오광수님, ID:maverick)께서 이의를  제기하신 일이  있었습니
다.
 한신님의 지적은 상당히 예리하고 분석력이  뛰어난 점이 있어,
제가 답변한 내용과 함께 올립니다. 이 부분에 대해 의문을 가지
시는 분들께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하며, 아울러 좋은 지적을
해주신 한신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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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삼국의 국력에 대해서>의 오류...

 이런건 알고 계십니까의 10번 글 <삼국의 국력에 대해서>를 읽
다보니 오류가 발견되어, 보다 바른 이해를 돕기위해 이 글을 써
봅니다.
 진수는 위를 정통으로 보아 조조를 시작으로 4명의 황제에 대해
위본기魏本紀를 서술하고 나머지를 바깥으로 빼어 지誌라는 형식
으로 배치하였습니다. 따라서 삼국지가 본기는 없고 열전의 형태
로는 되어 있다는 서술은 아주 틀린 것입니다.
 다음으로 국력에 대한 서술도  삼국지에는 없고 연의에  있다고
되어 있는데, 삼국지는 당대에 쓰여진 역사책이고 연의는 천년이
상 뒤에 쓰여진 소설인데  어떻게 역사책에 없는 내용이  소설에
있을까요?
 국력에 대해 연의에 기술된 부분은 원래 정사 삼국지에  서술된
내용들입니다. 따라서 이 부분도 오류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호구수 내지 국력에 대한 비교에 대해  부연설
명을 하겠습니다. 삼국지에 언급된 호구수는  다 합쳐서 800만이
좀 안되죠. 이보다 100년  전에 만들어진 조사자료에  보면 호구
1067만, 인구수 5600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약 1/7로 감소한 꼴
입니다.
 이 차이는 먼저 오랜 전란으로 희생된 사람도 있지만, 중앙정부
의 통제력이 약해지면서  지방의 호족들에게 귀속된  예속민들도
있어서 현실을 아주 정확히 반영하고 있지는 못한다고  생각됩니
다. 전란이 많았던 중원보다는 외곽의  오와 촉이 더 안정적이기
는 합니다. 하지만 중원은 원래  넓고 기름진 땅이었기에 시간이
흐르면 흐를 수록 더 빨리 세력을 키울수가 있겠죠. 따라서 위나
라의 핵심부는 지구전으로 가자는 전략을 채택하였고 대조적으로
촉의 제갈량은 조기 승부를 여러차례 시도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고구려본기의 보장왕 편과 백제의  의자왕 편에 남
아있는 기록을 가지고 중국과 조선의 국력을 비교하였는데, 이는
완전히 넌센스라고 생각됩니다. 앞서  지적했듯이 중국의 인구는
평화시에는 한초기(B.C. 200년)에 이미 6천만에 육박하고 있었고,
삼국지의 시대는 전란으로 피폐해서 가장 작게 잡힌 상태였죠.
 이를 조선이 한창 강성했던 삼국시대  후반부(A.D. 600)년 경과
한 시점과 수평적으로 비교할 수는 없죠.
 이는 삼국지 당시에 위의 지방자사였던 관구검과의 대결에서 고
구려가 참패한 사실만 보더라도 아직 고구려와 백제의 역량이 위
의 한 지방에도 미치지 못하는 상태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특히
전투장면에 대한 기술을 보면 장수들의 전술 기교면에서도  중국
쪽이 훨씬 뛰어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위대했던 백제나 고구려…."등의 서술은 역사적
인 정황을 보면 맞지 않다고 보여집니다.
 그렇다면 실제 국력은 어느 정도로 비교할 수 있을까하는  의문
이 생깁니다.



 여기에 대해 미야자키 이치사다라는 일본의 학자는 <중국사>라
는 책에서 위, 오, 촉의 국력의  비교를 6:2:1 정도로 제시합니다.
촉의 국력이 생각보다 아주 미약하죠.
 그러면 다시 왜 압도적으로 강한 위가 더 일찍 촉과 오를  정복
하지 못했을까라는 의문이 발생합니다?
 답은 우선 위라는 나라가 완전히 단결되어 체제가 잡힌  국가가
아니고, 내부적으로 균열이 있었다는 점에서 찾아야할 것입니다.
 위의 변경을 맡고 있는 자사들은  하나의 번신으로서, 독자적인
행정과 군사 권한을 가지고 있는 소독립군주와 같은  상태였기에
중앙정부가 촉과 오보다는 오히려 이들의 반란을 같은  비중으로
염려하고 있었습니다. 실제 이러한 번신들의 반란은 거의 끊이지
않고 일어났습니다.
 다른 하나의 이유는 위나라 정권의 핵심부가 심각한 권력투쟁을
겪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촉 전쟁을 지속적으로 담당했던 사마
의 일가는 점차 위의 실권을  장악해나가게 되고, 이를 견제하려
는 기존의 왕실인 조씨 일가와 충돌을 겪게 되죠. 따라서 대외적
인 문제에 신경이 그만큼 덜 가게 된 것으로 보여집니다.
 이런 역사적인 사실을 이해하면서 소설을 다시 읽어나간다면 즐
거움이 더욱 늘어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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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오광수님의 <삼국의 국력에 대한 오류>

 좋은 문제 제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먼저 <정사삼국지>의 역사서술 방식에 대한 님의 지적은  옳습
니다. 그 부분에 대한 저의  표현에 오류가 있었음은 인정하겠습
니다.
 님께서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사마천의  <사기(史記)>등과는
달리 <정사삼국지>는 기전체(紀傳體)의 형태를 취하고는 있지만,
'기(紀)'가 위서(魏書)에만 있고  나머지 촉서(蜀書)나 오서(吳書)
등에는 없습니다. 물론 그것은 저자인  진수가 위에 정통성을 주
려 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제 개인적으로 <정사>를 보면서 좀  아쉽게 느꼈던 점은, 당시
사회를 좀더 알 수 있게 해주는 기록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후한서>를 보면, [군국지]라는 부분이 따로 있어 당시 각 군의
실태에 대해 기록을 해놓았고, [백관지]라는 부분을  두어 당시의
관직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해놓는 등 그 시대 상황을 가늠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기록을 남겨놓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사삼국지
>의 경우 그런 점이 부족한 점이 아쉽다는 생각이 있더군요.  그
런 여러가지 점들을 정리한다는게 착각을  잃으킨 것 같은데, 그
렇지 않아도 제가 한참 전에 그에 대한 내용을 원고로  정리하면
서 그 부분을 확인하고 바로 잡았습니다.
 아직 통신에 올려놓은 것은 바로잡지 못했는데, 조만간 그 내용
의 수정본을 올려놓을 예정으로 있습니다.

 그리고 님의 두 번째 지적을 보면 국력에 관한 내용이 잘못되어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부분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먼저 제가 삼국의 국력에 관한 내용이 <정사>에는 없고, <연의
>에만 있다고 한 뜻은 국력에 관한  내용이 배송지 주해에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촉서> 후주전에서  배송지가  인용한 왕은(王隱)의  <촉기(蜀
記)>와, <오서>  삼사주전에서 배송지가   인용한 <진양추(晉陽
秋)>의 기록에 두 나라의 국력에  관한 내용이 언급되어 있습니
다.
 내용은 <연의>와 거의 같은데, 아마도 저의 생각으로는 나관중



이 <연의>를 쓸 때 위의  두 책(왕은의 촉기와, 진양추) 내용을
그대로 인용한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러나  배송지의 주해는
분명히 <정사>와는 구분되어져야 하는 내용이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이 부분도 수정된 글에서는 배송지의 주해를 직
접 인용하는 방식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지적하신 내용이 국력의 기록에 관한 신빙성을
말씀하신 것 같은데, 그 점에 대한 저의 견해는 다릅니다.
 먼저, 중국의 삼국시대 당시에는 문명의 중심권이 중원인 듯 하
다는데에는 동의하겠지만, 이는 서로의 전성기가 시차를 두고 달
랐을 뿐입니다.
 우리의 삼국이 전성기로 접어든  것은 중국이 5호 16국  시대로
접어들면서부터의 일인데, 이것을  두고 마치 중국이  약한 틈을
타고 잠시 대륙의 변방을 차지한 적이 있었다는 식으로 이야기하
는 것은 곤란하다고 봅니다.
 상고(上古) 시대, 산동 일대에서 만주 지역에 이르는 지역은 우
리 민족의 강역이었습니다. 황하를 상류와  하류로 갈라 그 서쪽
에서 일어났던 앙소문화와  동쪽의 용산문화가 확연히  다르다는
점은 누구나 인정하는 부분이지요. 그리고 동쪽의 용산문화가 바
로 동이족(東夷族)이 일으킨 문화라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역
사학자는 별로 없을 겁니다.
 중국 신화시대의 인물 중 <치우(蚩尤)>라는 인물이 있는데,  그
치우가 헌원(軒轅)씨에게 패배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치우는
바로 동이족의 신입니다. 이게 세월이 흐르고 동이족이 중원에서
물러나게 되면서 치우는 중국의 신화속으로 편입되고 만  것이지
요.
 그리고 고조선에 이르기까지 그 지역 일대는 우리 민족의  무대
였습니다. 따라서 고구려가 다물(多勿:옛 것을  되찾는다는 뜻)이
라는 것을 국시로 정하고, 일찍부터  고토수복에 나선 것은 너무
나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실은 광개토대왕때에 와서
어느 정도 맺게 되는데, 그때에도 그 모든  땅이 회복된 것은 아
니었지요.
 고구려와 태생적 뿌리를 같이 하는 백제 역시 사정은  비슷했는
데, 이렇듯 건국  초기부터의 숙원사업을 마치  일시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할 것입니다.  어느 나라의 역사나 마
찬가지이겠지만, 인접국의 약화가 이웃한  국가에게는 국력을 키
울 절호의 기회가 된다는  점은 우리의 백제와 고구려의  경우도
비슷했을 뿐인 것이지요.
 이야기가 좀 다른 방향으로 진행된 듯 합니다만,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상고사나 고대사 속에서의 우리 민족이 지금 이  땅의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약하거나 미개하지 않았
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정사삼국지> 위지동이전의 기록을 통해
서도 확인할 수 있으실 겁니다.

 다음으로, 우리의 삼국과 중국의 삼국을 비교한 제 글이 양쪽의
전성기인 400년의 시차를 무시한 것이라는  견해 - 이것은 제가
올려놓은 글에서도 지적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 또한 마찬가지
입니다.
 물론 400년의 시차가 결코 짧은  세월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당시의 인구증가율 등을 볼 때 그건 큰 의미를 지니지 못합니다.
또, 후한 말에서  삼국시대에 이르는 중국의  역사만 혼란기였던
것이 아니라, 고구려나  백제의 경우 역시  거듭되는 수·당과의
싸움으로 피폐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리고 관구검이 고구려를 침략했을 때,  전술 기교면에서 중국



이 훨씬 더 뛰어났다고 하는 님의 견해 역시 저로서는 동의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물론 당시 싸움에서 고구려 동천왕이 거듭되는
연승에 고무되어 군사를 경솔하게 움직이다가 패했다는 점은  인
정하지 않을 수 없지만, 어느  부분을 봐도 고구려군의 전략전술
이 위나라군에 비해 떨어졌다는 점은 발견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고구려가 수·당과 싸웠던 기록을 볼 때, 고구려가 동원
한 무기나 구사했던 전략전술 등은 그들보다 더 뛰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굳이 예를 들 것도 없지만, 을지문덕의 살수싸움
이나 연개소문의 거듭되는  대당(對唐)전쟁을 보면  그런 확신은
굳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고구려나 백제의  대중국 전쟁의
승리가 결코 요행이나 이변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
지요.

 <삼국사기>의 문무왕기를 보면, 백제와 고구려가 망한 뒤 당나
라 황제가 구진천(仇珍川)이란 쇠뇌 기술자를  데려가 쇠뇌를 만
들게 했는데, 겨우 30보 밖에 나가지 못했다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자 황제가 말하기를, "너희 나라에서  쇠뇌를 만들어 쏘면 1
천 보를 간다는데, 지금 그대가 만든 것은  30보 밖에 나가지 않
으니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하고 물었지요. 그러나 구진천은 '재
료가 좋지 못한 것 같다', 또는 '목재가 바다를 건너올 때 습기를
머금었던 것 같다'는 등의 핑계만 대며, 아무리 협박을 해도 끝내
1천 보를 나가는 쇠뇌를 만들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건 하나의 예에 불과할 뿐이지만, 이런 것만 보더라도 우리의
무기체계가 중국에 비해 나으면 나았지 결코 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부분에  대한 님의 지적은 옳
지가 않은 것이지요.

 다음으로, 일본인 미야자키 이치사다라는 학자의 <중국사>라는
책의 내용을 인용하여 위·오·촉의 국력을 6:2:1 정도로 비교하
셨습니다만, 제가 읽은 청(淸)나라 사람 양신(楊晨)의  <삼국회요
(三國會要)>의 기록은 전혀 다릅니다. 참고로, 삼국회요는 삼국시
대의 예법과 관직, 군사제도,  그리고 역법, 궁중의  전각에 대한
내용까지 모아놓은 기록입니다.
 거기에 실려있는 삼국의 호구수 중 오나 촉의 경우는 <정사>의
배송지 주해와 다르지 않지만, 다른  기록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위나라의 호구수가 제시되어 있습니다.
 '위에는 66만 2천 4백 23호가 있었고, 인구는 4백 4십 3만 2천 8
백 81이었는데, 촉을 평정하고 난 뒤…'
 미야자키 이치사다라는 사람의 견해가 틀리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겠지만, 저는 평소 우리의 중국사에  대한 연구가 약한 나머지
지나치게 일본인들의 연구에 의존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가
지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저는 이런  류의 중국인들의 글을 통해
좀더 정확한 사실에 접근하는게  옳다는 생각에서, 고생스럽더라
도 <삼국회요>와 같은 한문본을 직접 검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삼국 중 위나라의 국력이 가장 강했다는 점은 대다수  사람들의
공통된 견해이고, 저 역시 그런  생각에서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
다. 다만 당시 촉이나 오가 있던 지역이 사실상 중국사에 포함시
킬 수 없을만큼 이민족의 활동이 두드러진 지역이었다는 점은 임
혜상이라는 중국인의 저서 <중국민족사>에서도 확인이 되는 사실
입니다. 그런데 삼국시대에 접어들면서 위에 비해 국력이 약한 촉
이나 오가 세력확대에 나섰고, 그  결과 중국사의 무대가 이전에
비해 넓어지게 되었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 저의 견해
는 오히려 촉과 오의 국력 역시 이전에 비해 훨씬 넓어진 강역을
포함하는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한나라 때의 역사 역시 크게 다를 바가 없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만, 그 이야기는 따로 한 부분을 차지할  만큼 긴 내용이라 여기
에서는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원래 중국인들이 그들의 역사를 서술하거나 강역을 표시할 때에
는 최대 강역, 그리고 주변국을 몇 번  이긴 사실까지도 모두 집
어넣어 최대판도만을 기록하는  특징을 찾아볼 수  있는데, 이런
사실은 삼국시대의 지도에서 위의 강역을 한반도의 북부지역까지
포함시키고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반도의 북부와 만주일대에는 엄연히 여러 독립 국가가
있었고, 위나라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곳이 많았는데, 그런 모
든 지역을 위나라의 영토에 포함시켜 이야기하는 중국인들의  견
해를 우리가 일방적으로 따라야 하는지 저로서는 의문입니다.
 역사를 보는 관점은 얼마든지 다를 수 있겠고, 객관적인 사실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자는 논의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동의를  하겠
습니다. 그러나 객관적인 사실을 바로 보기 위해서는 중국인들이
지정해놓은, 그리고 우리의 일부 사대 사학자들이 추종하기만 한
허상을 바로 보아야만 할 것입니다.

 다음으로, 삼국 중 위나라가 강국이었다고  하는 견해는 반드시
인구만을 가지고 평가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당시에는 위
나라가 위치하고 있던 중원(中原) 지역이 농업이나 산업 등의 여
러 측면에서 오, 촉이 위치한  지역보다 훨씬 발달한 곳이었다는
점도 포함된 뜻이라고 여겨집니다.
 아울러 삼국 중 강국이었던 위나라가 왜 촉이나 오를 쉽게 정복
하지 못했느냐 하는 견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견이 있을  수
있겠지요. 오와 촉이 동맹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위나라가 마음놓
고 한곳에 집중할 수 없었다는 외교전략적인 측면에서 찾을 수도
있을 것이고, 오의 경우 양자강이라는 자연적인 방어벽이 있었다
는 점도 고려될 수  있을 것이며(이것은 서양사에서, 동로마제국
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이 보스포러스 해협이라는 천험의 자연
적인 조건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토록 오랜 세월을 버틸  수
있었다는 점과 비교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외에도 다른 여러
가지 이유들이 제시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한가지의  이유만
들어 쉽게 단정지을 수 있는 문제는 아니라고 봅니다.

 다만 님께서 제시한 것처럼, 위나라의 경우 하나의 번신으로 독
자적인 행정과 권한을 가지고 있는 소독립국의 군주와 같은 상태
였기 때문에, 위나라의  중앙정부가 촉과 오보다  오히려 이들의
반란을 걱정하고 있었던게  주요한 원인이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가 없군요.
 오와 촉의 경우에도 위나라와 같은 반란이 여러 차례 있었고, 이
들 역시 여러 이민족들의 반발을 눌러야만 하는 부담을 안고 있었
기 때문입니다.

 어쨌거나 좋은 의견을 주셨는데,  제 답변이 너무  늦어진 점에
대해서는 머리숙여 사과를 드립니다. 님께서는 여러 차례에 걸쳐
좋은 글을 주셨고, 또 그것들은 모두 상당한 수준을 가진 글들이
었다는 점에서 [삼국지]코너의 발전을 가져오게  하는 좋은 촉매
제였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많이 올려주시고, 그  중에서 많은 글이 지난
번처럼 [평전삼국지]같은 코너에 올렸으면 합니다.

 - 운영자 올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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