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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기)
날 짜 (Date): 1999년 3월  8일 월요일 오후 03시 24분 22초
제 목(Title): 퍼옴/서남동 '恨'의 사제 


한의 사제
徐 南同
 
 
1. 믿음의 증인의 전통
증인의 전통에 관한 전형적인 개요(槪要)가 히브리서 11장에 있다. 그 전통은 
믿음의 계승이다. 왕통(王統) 의 계승, 권좌의 계승, 장자권(長子權)의 계승은 
기계적·법률적인 계승이지만 믿음의 계승은 간헐적이고 말 하자면 
양자역학(量子力學)적인 방식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 전통을 우리가 이어받은 
것이다. 이 전통은 어떻 게 발견할 수 있느냐 하면, 그 전통의 완성자이며 목표인 
갈릴리 사람 예수를 통해서, 그분의 삶을 렌즈로 삼고 그 렌즈를 통해서 먼저 
"구약성서"를 보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이스라엘의 왕조사(王朝史)나 민족사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계승되는 증인의 전통이 보인다. 그것이 히브리서 
11장의 기록이다. 

창조자 하느님은 인간을 내고 그 인간과 계약을 맺는다. 창조주는 인간에게 
생육(生育)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고, 땅을 경작하고 생물을 관리하고 아우 
이웃을 보살피라고 하였다. 이것은 생산하고 노동하며 경제적 ·문화적 가치를 
창조하는 구체적인 인간 아담과 하와와 더불어 계약을 맺은 것이지, 타락의 역사 
과정에서 그 후에 생겨진 제왕과 지배자와 계약을 맺은 것이 아니다. 창조자 
하느님의 계약의 상대방은 민중이지 지배 자가 아니다. 그래서 민주주의라는 
것이다. 아담과 하와, 곧 민중의 하느님, 신앙의 증인의 제1원형이다. 

다음에는 아벨이다. 카인과 아벨의 대조를 어떤 성서학자들은 가나안의 농경문화를 
상징하는 카인과 유목 민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아벨의 대립이라고 하며, 
어거스틴류의 교화사관(敎會史觀)에서는 땅의 나라 대 하 느님 나라, 세속사 대 
교회사의 대립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갈릴리 사람 예수의 모범을 가지고 
본다 면 그것은 장자 대 차자(次子), 기득권자 대 맨사람, 지배자 대 민중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 신앙보다 나 은 새 사회에 대한 약속의 담당자인 증인의 
전통은 아벨 곧 민중을 통과한다. 

또 애녹이 이 증인의 전통을 이어받는다. 그는 평소의 생활에서 하느님과 
동행하였기 때문에 그에게는 이 승과 저승의 구별이 철폐되었고, 하느님 신앙이 
없는 사람들이 제일 두려워하는 죽음을 초월하는 증인이 될 수 있었다. 

역사의 주 하느님은 노아를 선택해서 믿음을 계승하는 증인으로 세우고 그와 
더불어 계약을 갱신한다. "모 든 혈육 있는 자들의 행위가 강포(强暴)하기에" 그 
강포를 평화로 바꾸려고 노아가 선택된 것이다. 여기 '강 포'라는 말은 곧 
폭력인데, 법과 우정으로 설득하는 것을 저버리고 물리적인 힘으로 강압하는 것이 
폭력이다. 노아의 방주 건립은 그러한 힘 가진 자의 강포에 대한 저항의 행동이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증인의 표본적인 경우이다. 평범하게 표현하면 현상유지(status 
quo)이고 적극적으로 말 하면 육욕을 위한 호화와 폭력으로 유지되는 안정, 이러한 
아비의 집, 친척간의 유대, 고향땅을 뒤에 두고 하 느님이 인도하는 열려진 미래, 
변화의 소용돌이를 향하여 진행하는 역사의 대열에 참여한 것이다. 그는 또 
하느님의 지상명령 때문에 자기의 생존과 미래의 약속이 담겨진 희생으로 외아들을 
제단에 바쳤기 때문에 다시 이삭을 돌려받은 것이다. 

오늘날 교회의 지도자들이 정의구현을 위해서 필요하고 불가피하다면 교회의 
존속까지도 희생하는 각오가 있어야 그 교회를 다시 새롭게 새로운 교회로 
돌려받을 수 있다. 지금 우리의 교회는 바로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으로 자기 
희생을 통하여 새롭게 돌려받아야 하도록 낡아진 것 같다. 교회의 존속 때문에 
말씀의 증인이 되는 것을 보류한다고 해서야 말이 되겠는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도 믿음의 증인의 전통에 서 있 다. 나이 늙어도 생산할 수 있다는 믿음의 
증인이 되었다. 여자인 사라'도' 늙었을지라'도'의 이 두 번의 '도' 는 문화적 
제약, 생리적 제약에 대한 항거이다. 하느님 신앙이 없는 사람들이 절대적인 
운명이라고 체념하는 이러한 제약들을 믿음으로 극복한 증인이 되었다. 

야곱은 도망다니는 유랑자로서 하느님 신앙을 견지하며 마침내는 의지의 집요함과 
강인함 때문에 신과 맞 서 씨름하여 승리하는 믿음의 증인이 되었다. 요셉은 
어렸을 때 꿈을 잘 꾸는 소년이었다. 보다 나은 미래를 내다보려는 자세이다. 그는 
여성의 유혹을 물리치고 물질에 청렴하고 자기 직책에 성실하였을 뿐 아니라 가 
난하고 굶주린 동족을 그 굶주림으로부터 해방시키게 되었는데 이 모든 일들은 
그의 하느님 신앙에서 온 힘 이었다. 모세는 그의 유모에게서 배운 하느님 신앙 
때문에 제왕의 궁전의 안일한 생활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진흙을 이기며 벽돌을 
굽는 동족과 운명을 함께 하여 엄청나게 크고 무서운 제국 지배체제의 억압 
아래에서 신음하는 동족 노예들에게 항거하는 인간으로 일어서는 용기를 
불러일으켜 자기해방을 쟁취하게 하는 믿음 의 증인이 되었다. "히브리서" 기자가 
기록한 이 믿음의 증인 열전(烈傳)에는 그 전통을 잇는 한 고랑으로 이 스라엘 
백성을 열거하고 있다. 이스라엘 민중의 집단적 믿음이 홍해를 가르고 해방의 길을 
행진했다는 것이 다. 

하느님 신앙의 전통을 이어가는 데 있어서 눌린 자인 민중에 대한 신뢰는 그 
다음에도 있었다. 그것은 창 녀 라합의 믿음의 증거이다. 창녀의 생활, 그리고 
정탐꾼을 숨기고 추적하는 자를 속인다는 것은 부도덕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눌린 
자가 살아남는 유일한 방편이다. 그렇기에 그것은 지배자들이 기존질서를 유지하게 
하 는 도덕에는 반대되지만, 눌린 자들이 자기를 지키는 유일한 무기로 쓰여진 
경우에는 그것은 믿음의 증거가 된다. 창녀 라합은 그렇게 해서 믿음의 증인이 
되었다. 

내가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 기드온, 발람, 삼손, 입다, 사무엘, 다니엘과 같은 
예언자들을 일일이 다 이야 기하자면 한이 없다. 이것은 이스라엘 국가의 왕조사가 
아니고 믿음의 증인의 전통사이다. 이천년 교회사에 도 위와 같은 방식으로 
왕권종교의 교권확장사가 있는가 하면, 거기에서 늘 배제되었던 믿음의 증언인 
전통- 민중운동사가 있었다. 

2. 믿음의 전통과 민중운동의 전통
나는 우리가 이어받아야 할 믿음의 증인의 전통을 밝히기 위해서 우리 민족사 
5천년 간의 왕조사가 아닌 민중사의 계보를 더듬어 보겠다. 아직 암중모색의 
단계이지만. 

나는 요즈음 우리나라의 민중운동사의 전개과정에서 14개의 매듭을 헤아려 본 바 
있다. 

1.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제5에 보면 봉상왕(烽上王)의 사여와 독재를 뒤엎는 
당시 국상(國相) 창조리(創 助利)가 주도한 민중의 평화적 혁명의 성공이 있다. 

2. 태봉의 궁예나 후백제의 견훤이 통일신라의 전제왕권에 대항한 사회적 기반은 
민중운동사적인 것이 여 러 모로 분명하다. 곧 가혹한 수탈체제에 대한 민중의 
항거의 성격이 있다는 말이다. 

3. 고려 상대(上代)에서 묘청의 정치적 배경과 일련의 종교적 기반은 김부식이 
대표하는 지배체제에 대립 하는 사회의 전통적·민중적인 주체의식의 표현인 것 
같다. 

4. 원(元)의 고려 침략에 대항한 농민항거와 삼별초(三別秒)의 반란도 민중의 
전통을 잇는 한 매듭이다. 

5. 12세기 말 고려조, 전국적인 천민·농민의 연쇄적인 반란, 그 정점인 만적의 
난이라는 것도 민중의식의 성장과정에 세워진 의미있는 성취이다. 

6. 이조 양반사회에서 전호(佃戶)와 화척(禾尺)·노비·백정·광대·사당 등 
천민의 천대와 수탈은 말할 수 없는 형편인데다 임진왜란·병자호란의 외국군 
침략에 대항한 것은 민중의 의병궐기였다. 

7. 19세기에 들어와서 정권의 특정지역 편중에 항거한 홍경래의 난과, 

8. 세도정치로 인한 삼정(三政)의 극도의 문란 때문에 전국에 걸쳐서 연쇄적으로 
일어난 임술민란에서 민 중의식은 정치의식이라는 뼈대를 가지게 되었다. 

9. 동학혁명에서 민중은 자기의 정체를 스스로 정의하여 역사적 주체성을 쟁취하게 
된다. 동학혁명에서 전 봉준은 16세기 허균의 호민(豪民)-민중의 영웅이랄까, 
민중의 메시아랄까 하는 호민-역을 담당한다. 동학혁 명은 한국 민중운동사의 
가장 의미 있는 경계표(境界標)이다. 

10. 20세기 초에 우리나라 각지에서 일어난 활빈당 투쟁에서 민중은 가공적인 
메시아상 홍길동을 형상화 한다. 민중의 갈망이 형상화된 것이다. 

11. 독립협회 및 만민공동회로, 민중은 근대적 시민의식을 갖게 된다. 

12. 을사조약(1905) 이후에 전국 각지에서 궐기한 의병운동에서도 민중이 역사적 
주체임을 확인하는 것이 다. 신돌석은 민중의 호민이다. 

13. 기미년 3 1운동과 거기에서 뻗어난 한용운, 신채호 등의 민중이 주체가 되는 
민족주의가 우리의 역사 의식의 근간으로 제시된다. 

14. 1960년 4월 혁명은 한국 민중운동사-민중이 역사의 객체인 처지로부터 역사의 
주체로 등장하는 투쟁 의 역사-과정에서, 말하자면 '실현될 종말', '예발적 
종말'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 우리에게는 두 갈래 증인의 전통이 있다. 성서의 믿음의 증인들의 전통과 
우리나라 역사상에 뻗어나 간 민중운동의 전통 말이다. 구름같이 둘러싼 증인이 두 
겹으로 우리를 포위하고 있다. 그 두 전통이 오늘의 우리에게 합류되고 있다. 
1970년대에 들어와서 인권과 민중을 위한 투쟁으로 전개되는 한국 교회의 '하느님 
의 선교' 활동에서 이 두 전통은 극적으로 합류되었다. 여기에서 한국 교회는 
한국민족의 역사의식의 근간에 서서 억눌린 민중의 갈망에 호소하는 신의 선교에 
초청받고 있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이 두 가지 전통을 이 어받아야 한다. 그것은 
이 땅에 태어나서 오늘을 사는 한국 크리스찬들의 역사적 운명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지금 우리가 아니고서는 이 증인의 전통이 완결되지 않는다고까지 말한다. 
나는 이러한 믿음의 전통을 이어 받는 것이 곧 예수만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증인의 전통을 이어받는다는 것, 예수만을 바라본다는 것은 역사적 
지식의 문제 곧 이론의 문제가 아니고, 실천의 문제 곧 프락시스(praxis)의 
문제이다. 실천으로써 전통을 잇고, 발전시킨다. 예수를 바라본다는 것은 편협한 
교조주의(敎條主義)가 아니고 실천의 굳은 의지를 말한 것이다. 

3. 소리의 매체
오늘 이 땅에서 '하느님의 선교의 지평(地平)'이란 어떤 것인가? 그것은 우리의 
역사적 현실-정치, 경제, 사회의 현실이다. 

우리는 국토가 분단된 상황에 있다. 따라서 분단의 아픔과 모순에 고민하게 된다.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분단되어 있다는 허위의식-사귀들린 상태에서 그 사귀를 
추방하면 경제성장으로 위장된 레비아탄, 곧 공룡 의 정체가 드러난다. 이 공룡에 
시달린 사람들의 행방에 관해서 어떤 사람은 이렇게 더듬고 있다. 농민→이 
농→노동자→실업→빈민→인륜상실→도둑→ 범죄→감옥. 이것이 이 사회가 
시들어가는 현실이다. 우리나라 농촌의 인구는 전체의 38%이다. 농가의 67%가 호당 
3천평 미만의 극빈농이다. 소작 농지는 전체의 16.4%의 작은 땅인데, 전체 농민 
30%가 농사를 지어 그중 반 이상을 부재 지주, 곧 사회의 기생충에게 먹히고 있는 
실정이다. 

지난 15년 동안에 약 750만 명이 이농(離農)했다. 그중 150만명이 명목상의 
임금노동자가 되었고 나머지는 무직자이다. 또 하나의 통계(동아일보, 1979년 4월 
24일)에 의하면 1975년에 21만 5천명, 1976년에 45만 9천 명, 1977년에 47만 
6천명, 1978년에 78만 1천명, 그러니까 지난 4년간에 거의 2백만 명이 이농한 
셈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에 있다. 농민이 이농하여 노동자가 되고, 그러다 실업자가 
되어 빈민으로 전락하 면 인륜을 상실하게 되고, 그러다보면 자연히 범죄를 저질러 
감옥으로 가게 될 수 밖에 없다는 점이다. 이러 한 인륜상실은 개인도덕의 
문제라기보다 사회의 구조적 문제이다. 인간만이 아니고 사회기구가 문제이다. 이 
것을 진지하게 문제삼아야 할 기구들(노조 농협 신문 방송 종교조직 등)이 
역기능을 일삼고 있는 실정이다. 오 히려 사치생활이 인간의 등급을 표시하는 
것으로 된 가치관을 보급하고 있는 형편이다. 

그중 교회는 어떠한가?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볼 줄 모르는 교회의 지도자들, 
정치·경제의 제도적 모순과 상관이 없는 관념론적 신학, 기업과 경영능력으로 
변질된 교회 확장, 반공의 보루 속에 숨어 잠든 교회, 모든 사회적 불의를 알고 
있으면서도 조직 교회의 존속을 염려하여 말 못하는 교권, 이러한 것들이 우리의 
실정인 것 같다. 이러한 현실에서 하느님의 선교에 부름을 받고 나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나는 여러 분에게 제사장직을 저버리고 예언자직을 
수행하라고 하는, 잘못된 신학적 판단으로 권면한 것은 아니다. 내 가 말하는 
증인의 족보는 사제가 아닌 예언자들만의 족보는 아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선교에서 사제직을 잘 감당해야 한다. 그것은 지배계층, 부유계층의 횡포를 
축복하고 눌린 자들의 자기생존을 위한 항거를 마취시 키고 거세하는 사제직이 
아니고, 진정으로 저들의 상처를 싸매주고 비굴해진 저들의 주체성을 되찾는 데 함 
께 하고, 저들의 역사적 갈망에 호응하고, 저들의 가슴 속에 쌓이고 쌓인 한을 
풀어주고 위로하는 '한(恨)의 사제'가 될 것을 권한다. 

땅에서부터 하늘에 호소하는 아벨의 피소리(창 4:10)를 대변하고, 여리고 길에서 
강도 만나 빼앗기고 얻어 맞는 이웃의 신음소리를 듣고 그 아픈 상처를 
싸매주고(눅 10:25), 일꾼들에게 지불되지 아니한 품삯이 만군 의 주님의 귀에 
들리도록 외치는 소리(약 5:4)-이 '소리의 내력'을 밝히는 '한의 사제'가 되어야 
할 것이다. "벙어리와 고독한 자의 소리 없는 소리를 위하여 입을 열고, 학대받는 
자, 가난한 자들의 한을 풀어주자"(잠 언 31:8)는 것이다. 

전통적인 신학, 서구에서 이식해 온 교회가 죄와 회개를 강요하고 스스로를 속죄의 
매체로 자처하는 사제 직을 말하고 있는 데 대해서 이땅에서 '하느님의 선교'에 
종사하는 일꾼들은 민중의 한을 풀어 주는 사제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죄와 
회개는 역사상 지배계층이 피지배계층을 누르는 이데올로기의 구실을 해온 것도 
사실이고, 민중의 한은 복수의 악순환을 거듭한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잘못된 
굴절을 우리는 항상 다시 반 성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까지 죄와 회개는 
개인도덕에 결부되어온 데 대해서, 민중의 한은 사회정의에 결부 시켜서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상 집단체의 죄의식이나 회개는 있을 수 없는 이야기다. 한이란 
눌린 자, 약한 자가 불의를 당하고 그 권리가 짓밟혀서 참으로 억울하다고 생각할 
때, 그 호소를 들어주는 자도, 풀어 주겠다는 자도 없는 경우에 생기는 
감정상태이다. 그렇기에 한은 하늘에 호소되는 억울함의 소리, 무명의 무 
고(無告)의 민중의 소리 바로 그것이다. 

한의 사제는 이러한 민중의 갈망을 듣고 전달하는 매체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황야에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의 울음소리이다. 저들은 구원의 손길을 찾고 
있다. 

나는 여러분을 '하느님의 선교'에 보낸다. 예수만을 만나고 그를 따르라고 권한다. 
믿음의 전통, 민중운동 의 족보이어야 한다고 권한다. "우리가 아니고는 그 전통과 
족보가 완성되지 못한다"(히 11:40). 

나는 여러분에게 '한(恨)의 사제'가 되라고 권한다. 그리고 '소리의 매체'가 될 
것을 권한다. 우리의 현실에 서 눌린 자, 잃어버린 자, 저주받고 추방당한 자, 
'죄인과 세리들'의 소리의 매체가 될 것을 권한다. 

억울한 사람의 한을 듣도 보도 못하면서 '하느님의 선교'에 나선다는 것은 
모래밭에서 헤엄치겠다는 사람 과 같다. 여러분의 선교활동의 장도에 성령이 함께 
할 것을 빈다. 

{민중신학의 탐구}, 한길사, 1983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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