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기) 날 짜 (Date): 1999년 2월 27일 토요일 오후 01시 14분 09초 제 목(Title): 신동아/안영배 대한제국과 대한민국 1899년 대한제국과 1999년 대한민국 ‘어설픈 근대화론이 조선 망쳤고, 서툰 세계화가 국난 불렀다’ ●구한말 국채보상운동과 IMF시대 금모으기 운동. ●경천동지할 개화파의 「신자유주의론」과 IMF 자본주의. ●19세기와 20세기의 「조선책략」, 상황은 똑같다. ●미국에 배신당한 고종, 미국에 의존하는 한국은? 안영배 〈동아일보 신동아부 기자 ojong@donga.com〉 ------------------------------------------------------------------------------- - 제1부 조선의 근대화와 실패 『조 선은 바둑판이요, 조선 인민은 바둑돌이다. 현하(現下)의 대세가 다섯 신선이 바둑을 두는 형국(五仙圍碁)인데, 두 신선은 판을 대하고 두 신선은 각기 훈수하고 한 신선은 주인이다. 네 신선이 판을 대하여 서로 패를 들쳐서 따먹으려 하지만, 주인은 어느 편도 훈수할 수 없어 수수방관하고 공궤(供饋;손님 대접)만 할 따름이라…』 19세기의 사상가 강증산(1871~1909;증산도 창시자)은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한반도를 무대로 한 세계 열강의 각축전을 바둑에 비유해 압축적으로 설명했다. 한반도라는 가로 세로 19줄짜리 바둑판에서, 조선 사람들은 흑과 백의 바둑돌이자 「4 신선들(4 강대국)」을 접대하는 주인이었다. 조선은 주인으로서 「말발」도 제대로 세우지 못하는 가운데, 일본·청·러시아·미국이라는 네 신선들의 바둑판(조선) 따먹기 놀이에 휩쓸릴 따름이라는 것이다. 증산은 전라북도 순창 땅 회문산에 있는 전설적 명당인 「오선위기혈(五仙圍碁穴)」이 발음(發蔭)된 것에 비유해 19세기 조선의 상황을 묘사했다. 그리고 그런 상태는 「후천개벽(後天開闢)」때까지 지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묘하게도 증산의 말마따나 21세기를 코앞에 둔 시점에, 아직은 「후천개벽되지 않은」 상황에서, 한반도의 주변 정세는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과 별차이가 없다. 오히려 100년 전보다 오선위기의 형국이 더 선명히 나타난다. 조선은 흑돌(북)과 백돌(남)로 분명히 나뉘었고, 네 신선인 미국과 일본, 중국과 러시아(구소련)의 「한반도 따먹기 시합」에서 남은 남대로, 북은 북대로 끌려다니고 있는 상황이다. ------------------------------------------------------------------------------- - 조선의 근대화, 한국의 세계화 ------------------------------------------------------------------------------- - 게다가 한국의 IMF(국제통화기금) 체제 이후 전개되는 상황 자체가 100년 전 구한말의 그것과 너무나 흡사하다는 지적도 최근 지식인들 사이에 광범위하게 제기되고 있다. 외교안보연구원의 윤덕민 교수(정치학)는 19세기가 서구 제국주의에 의한 「근대화의 도전」이었듯이, 현시점 역시 서구로부터 밀려들어오는 「세계화의 도전」이라고 규정한다. 『20세기 말의 현시점은 우리가 마치 19세기 말과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들 정도다. 100년 전 중국과 일본, 조선은 서구 제국주의의 개항 압력에 직면했다. 그것은 동아시아에 서구식 가치관과 기술을 이식하는 근대화의 도전이었다. 여기서 일본만 성공했을 뿐, 조선은 근대화라는 새로운 물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많은 고통을 당하고 결국 일본에 항복하고 말았다. 마찬가지로 이제 100년 만에 또 다른 도전, 즉 세계화가 우리 앞에 닥쳤다. 이것 역시 서양에서 온 충격이다. 우리는 이미 세계화의 물결 앞에서 서전(緖戰)에 실패했다. 세계화를 잘 이해하지 못한 우리는 지난 30년간 피땀 흘려 구축한, 단군 이래 최대의 부(富)를 수개월 사이에 절반 이상이나 까먹었으며, 미국식 IMF관리체제를 받아들여 경제적 주권을 제약받고 있다. 북한 또한 대외지원 없이는 체제를 유지하기도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 한국이 100년 전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고, 지금은 세계화의 도전에 성공적으로 응전할 수 있는 안목이 절실히 필요한 때라고 본다』 한국외국어대 송일 교수(경영학) 역시 한국이 1876년 개항한 이후 국제사회로 편입하는 과정은 부끄럽게도 항상 외세의 개입에 따른 타율적이고 강압적인 특징을 수반해왔다고 말한다. 『IMF 대란도 따지고 보면 외세에 의한 세계화의 빅뱅이었다. IMF 구제금융의 발단이 된 외환위기는 결과적 현상에 불과하며, 화근의 본질은 한국 경제가 국제수준의 규범과 관행에 맞는 경쟁 체질로 미리 거듭나지 못한 데 있다. 100년 전 우리 민족이 국제 물정으로부터 등을 돌린 탓에 개방과 관련된 협상에서 피동적이고 압박적인 전철을 되풀이하다가 나라를 빼앗겼듯이, 1세기가 지난 오늘도 개발연대의 자만과 구각, 악습과 시대적 오류를 우리 힘으로 털어버리지 못해 국난을 자초했다. 우리는 아직도 진행되는 IMF체제에서 구한말의 비운과 좌절의 역사를 되씹어보지 않을 수 없다』 과거는 오늘을 살아가는 지혜를 준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100년 전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잘못했는지에 관한 자성은 오늘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지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 국채보상과 금모으기운동 ------------------------------------------------------------------------------- -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인 1907년 정월, 한반도의 대한제국에서는 매우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새해 들어서자마자 「느닷없이」 대구 사람들을 주축으로 한 국채보상운동이 삽시간에 전국 규모로 퍼져 전개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일찍이 경험한 적이 없는 이상한 운동이 전개되자 한국을 「점령하고」 있던 일본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반도라는 바둑판 위에서 그동안 강대국들과 승부를 겨루던 일본은 청일전쟁(1894~1895년)에 이어 마침내 러시아와의 마지막 「수 싸움(러일전쟁:1904~ 1905년)」에서 완승을 거둔 후, 을사조약(1905)을 강제로 맺는 등 한반도를 거의 접수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러던 차에 국채보상운동이 불거져나오니, 일본을 비롯해 세계 강대국들이 한반도 상황을 주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구한말 지식인인 황현(1855~1910년)은 저서 『매천야록』에서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는 독특한 국민경제운동을 생생히 전하고 있다. 『대구사람 서상돈과 김광제 등이 단연회(斷煙會)를 결성하여 국채 보상금을 모금하였다. 이때 일본에 진 우리 국가의 부채는 1300만원이나 돼, 그것을 갚지 못하고 있으므로 사람들은 모두 (일본이) 우리 국토를 송두리째 가져가도 속수무책이라고 하였다. 서상돈 등은 오랫동안 생각한 끝에 우리 국민 2000만명이 금연을 하면 매 사람의 한달 연초비가 절약돼 신화(新貨) 20전(錢)의 이익을 남길 수 있으므로, 만 3개월이면 그 채무를 모두 메울 수 있다고 생각해 모임을 갖게 된 것이다. 그후 각 신문에서도 이 사실을 게재해 전국민이 호응했다. 고위층은 1만원 내지 1000원을 희사하였고 평민들은 10전에서 20전까지 희사하였다. 그 액수의 다소를 구애받지 않고 희사하였고 강제로 인원을 파견해 희사를 하도록 하지 않았다. 그러나 정부의 대관(大官)과 서울의 사대부 및 부상(富商)들은 한 사람도 출연하지 않았다. 그토록 미친 듯이 슬퍼하여 큰 소리로 외치며 혹 그 목표량에 미치지 못할까 걱정하는 사람들은 노예와 걸인들이 훨씬 많았다. 고종은 이 소식을 듣고 탄식하기를 「백성들이 이렇게 나라를 걱정하고 있으니 짐이 무슨 낯으로 조용히 앉아 있을 수 있겠는가」 하며 양궁(兩宮)이 피우는 궐련도 중지하라는 명을 내렸다. 각 학교 생도로부터 군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상의는 하지 않았지만 한결같은 말로 「황상(皇上)도 그렇게 하시는데 하물며 우리들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라면서 모두 금연하였다. 이때 일본인들이 금연을 하여 국채를 보상한다는 말을 듣고 이지용을 위협해 금연을 못하게 하자, 이지용은 「우리 국민들이 나를 을사 5적(을사조약을 주도한 다섯 한국인 관료들)의 괴수로 지목하고 있어 내 몸도 어떻게 처신할 줄 모르니 다른 일은 금지할 수 있어도 이 일은 금할 수 없다」고 하므로 장곡천(長谷川) 등도 「이것은 의로운 일이니 어찌 막을 수 있겠는가?」 하고 탄식했다. 그리고 이때 출연하는 사람이 있으면, 각국 영사들은 모두 자기 나라로 전화해 보고하였다…』 ------------------------------------------------------------------------------- - 조선의 빚잔치 ------------------------------------------------------------------------------- - 당시 일본은 우리 정부가 원치도 않는빚을 억지로 사용토록 했다. 이는 일본이 대한제국을 빚에 옭아매 경제 주권을 뺏는다는 철저한 계산 아래 꾸민 일이었다. 결국 대한제국 1907년도 예산 1370만원 가운데 1300만원(원금 1150만원, 이자 150만원)이 일본의 차관으로 채워졌고, 일본이 1할의 고금리 수수료(이자)를 떼도 우리 정부는 말 한마디 하지 못했다. 특히 일본이 파견한 재정고문 메가다는 화폐정리를 통해 금융을 장악하고 일본 금융제도를 조선에 실시함으로써 가격 기구에 의한 경제침략의 첨병 역할을 톡톡히 발휘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민간 차원에서 일제의 예속적 차관에 저항해 「나라 빚을 갚아서 주권을 사수하고 민족경제를 이어나가자」는 뜻으로 국채보상운동이 전개됐던 것이다. 그때 남자들은 담배를 끊어 푼돈을 모으고 부녀자는 가락지와 비녀, 심지어 머리카락까지 팔아 기금을 내는 방법으로 해서 1907년 5월 말까지 약 232만원이 모금됐다(전체 기간의 모금액은 확인되지 않음). 그러나 일제는 이 운동의 목적이 빚을 갚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국권 회복에 있다고 파악해 온갖 방해공작과 탄압을 가했다. 일본은 국채보상운동이 한창 전개되는 와중에 고종 황제가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는 네덜란드 헤이그에 밀사를 보내 일제의 부당한 한국 침략을 호소하려 하자 결국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1907년 7월) 순종을 즉위케 했다. 이후 1910년 대한제국은 역사의 문을 닫게 되었다. 1907년에 벌어진 국채보상운동은 마치 1997년 IMF 국난을 맞은 이후 외채를 갚기 위해 우리 국민이 대대적으로 벌였던 「금모으기 운동」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는 듯하다. 약 351만명이 참가, 전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금모으기 운동은 IMF와 세계은행(IBRD)이 제시한 불공정한 차관조건(기관 탄생 50년 역사상 최고의 이자율과 최초의 전후수수료 징수 등)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 국민들이 벌인 눈물겨운 외화확보운동이었던 것이다. 비슷한 점은 또 있다. 황현이 국채보상운동에 대해 『우리나라에서 하는 일은 무슨 일이든 시작은 있어도 끝이 없으니 이 일을 어찌 기대할 수 있겠는가』 하고 우려했듯이, 현재의 우리 사회 역시 마치 IMF가 언제 있었느냐는 듯 흥청거리는 분위기가 되살아나고 있는 상황이다. ------------------------------------------------------------------------------- - 외채 불러온 「주범」은 누구인가 ------------------------------------------------------------------------------- - 1999년 2월 중순 현재 한국에서는 외환위기의 진상을 가리기 위해 국회 청문회가 벌어지고 있다. 환란 당시 국정을 책임졌던 사람들을 불러내 잘잘못을 가려내고 교훈으로 삼기 위해서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100년 전 당시 과연 대한제국 정부가 일본으로부터 차관을 도입하는 데 동의한 주도세력은 누구이며, 그 돈을 어떻게 사용했는지, 그리고 돈을 갚아야 하는 주체가 과연 일반 백성이었는지 등을 규명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가 20세기에 들어서만 나라의 흥망과 관계되는 큰 실수를 한 번도 아닌 두 번이나 되풀이했다는 사실은 분명히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이상찬 서울대 규장각 연구위원의 말. 『국채보상운동 지도부에는 전·현직 고위 관리와 개화파 인사가 다수 참여하고 있었다. 문제는 이들이 바로 국가를 위기 상태로 몰고 간 장본인들이거나 일본으로부터 들여온 부채에 의해 직접적으로 혜택을 받은 사람들이란 점이었다. 특히 상당수가 친일 성향인 개화파 인사 중 상당수는 일본의 침략 과정에 부를 축적하였거나 출세한 인물들로 일본으로부터 빚을 들여오는 것에 대해서도 별로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이들은 일찍부터 문호개방과 일본의 명치유신을 모델로 한 근대화를 주장해왔기 때문에 차관을 들여오는 것을 근대화라고 반색했다. 결국 개화파의 근대화론은 일제의 침략을 묵인하는 것이었고, 그 결과 대한제국은 일본의 식민지가 돼버렸다』 이상찬씨는 20세기 말 우리나라가 처한 IMF 상황이 1960년대 이후 추진한 개발독재식 근대화 정책의 부작용과 오류에서 비롯됐듯이, 대한제국의 재정을 파탄시킨 차관 도입 건도 그것을 가능케 했던 내부의 사상, 즉 개화파의 「서툰」 근대화론에서 그 연유를 찾아볼 수 있다고 진단한다. ------------------------------------------------------------------------------- - 구한말 개화파의 「신자유주의론」 ------------------------------------------------------------------------------- - 묘하게도 1960년대의 근대화 정책과 1세기 전 개화파의 근대화론은 「남다른」 인연을 맺고 있다. 박정희 정권이 경제개발계획을 시작하자 때를 맞추어 우리나라 사학계에서는 개화파, 개화사상, 개화운동 등에 많은 관심을 둬 상당한 연구 성과를 올렸다. 한때 이들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가 상당히 우세했는데, 이는 개화와 관련된 근대화가 경제개발계획을 합리화시켜주는 근거로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풀이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렇다 보니 개화파의 개국 통상론이나 문명 개화론이 결국 식민지화로 이어졌다는 간단한 사실조차 외면받게 됐다는 것. 사실 친일 및 친미 개화파들의 주장을 현재 시점에서 살펴보면 깜짝 놀랄 정도로 「과격하게」 자본주의체제를 옹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은 구한말 대표적 개화파로 꼽히는 서재필, 윤치호 등이 주축을 이뤄 펴낸 『독립신문』의 사설이다. 『개항(開港)함이 필경 이익이 많고 해가 적은 것은 동서고금 역사를 보아도 알지라. (대한제국이) 본래 있는 다섯 항구 외에 또 세 항구를 연 일로 해 혹 국가에 유해무익할까 염려하는 사람이 있기로 대강 아래 의견을 말하노라. 외국물건이 들어오더라도 억지로 파는 것이 아닌, 즉 대한 사람이 자기에게 이롭지 아니하면 살 이치가 만무하니, 무명옷 한 벌 하여 입을 돈으로 서양목 옷 두 벌이나 한 벌 반이나 하여 입는 것이 이득있는 방책이라. 그리하면 대한의 무명 짜는 사람은 결딴날 것이라 하니 그와 같은 일은 과연 민망하나, 다시 생각하면 무명 짜는 사람은 불과 몇천명 혹 몇만명이요, 서양목 입어서 이익보는 사람은 천백만명이니 다른 것도 마찬가지라』(1898년 6월9일자) 개화파들은 외제품은 가격이 저렴하고 질이 좋으므로 한국의 소비자에게 이익이 되고, 국내 수공업자가 몰락하더라도 더 많은 수의 소비자가 이익을 얻으므로 국가 전체로는 이익이 된다고 주장했다. 외국자본이 국내의 미숙 산업을 몰락시키고 독점이윤을 획득하는 것은 무방하며 통상의 확대는 한국의 독립에 유리하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던 것. 마치 오늘날 한국에서 유행하고 있는 미국식 신자유주의를 충실하게 따르고 있는 듯한 논리다. 더 나아가 『독립신문』은 문명개화 능력이 부족한 나라는 외국에 이권을 넘겨서라도 문명 시설을 해야 하고, 문명국이 그러한 나라의 국권을 침해하는 것은 침략이 아니라 문명 실현의 과정이라고 주장했다. ------------------------------------------------------------------------------- - 개화파의 두 얼굴 ------------------------------------------------------------------------------- - 그렇다면 개화파는 시대의 선각자인가, 아니면 외세의 앞잡이인가. 오늘의 시점에서 볼 때 「조선의 근대화」라는 대의명분을 걸고 이를 실천하려 한 개화파가 조명을 받고 있지만, 당시 일반 대중의 눈에는 「외세의 앞잡이」로만 비쳤다. 황제 고종을 최측근에서 모시고 지켜보면서 『남가몽』이란 회고록을 남긴 정환덕(1857~ 1944)은, 당시 개화파가 우리나라의 자주독립과 내정개혁을 주장하며 만든 독립협회(1896~1899년)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사람 같지 아니한 무리[匪類], 즉 어두귀면(魚頭鬼面)의 무리들이 작당을 하여 단체를 만들고 이름을 독립협회라 하고 광화문 앞에 모여서 밤낮으로 선동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소란 상태가 미치지 않는 곳이 없으므로 문 안이나 성 밖을 막론하고 온 서울의 인심이 물끓듯하였다』 또 독립협회 구성원들의 활동을 지켜본 선비 정성우는 이렇게 고종에게 상소했다. 『갑신정변(1884년 친일 개화파들이 일으킨 3일 천하) 때 망명했던 역당들이 외국에 종적을 감추었다가 갑오년 6월의 변란(갑오개혁)을 만들어냈으며, 이 역적들이 다시 을미년 8월의 큰 반역음모(명성황후 시해사건)를 빚어냈습니다. 특히 흉악한 무리 서재필은 만고에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지었는데 제멋대로 본국으로 돌아와서, 더구나 폐하 앞에서 스스로 외국의 신하라고 자칭하며 국권에 간여하고 있는 것은 무슨 장난이며, 「독립신문」이라는 것은 정부를 훼방하는 글뿐이요 의리를 저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순전히 나라를 뒤집어 엎으려는 것뿐이니 어찌 용납할 수 있겠습니까』 사실 개화파에 대한 학계의 평가는 연구자에 따라 매우 상반되게 나타난다. 『개화파가 일시적으로 일본에 의존하려 했던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그들은 여러모로 자주·자존의 태도를 견지하려고 했으며, 역사를 변혁하려는 창조적 소수자로서 잠재력을 갖춘 애국자』였다는 식의 긍정적인 평가가 있는 반면, 『개화파는 정권욕에 사로잡혀 민족 주체성을 망각한 채 일본과 손을 잡은 전형적인 친일파이며, 개화파가 마치 우리나라 근대화의 선구자로 미화되는 것은 매우 잘못된 일』이라는 부정적 평가도 함께 내려지고 있다. 분명한 사실은 개화파는 철저히 외세 의존적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다만 그 내심이 진정으로 민족의 자존과 자주라는 큰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하나의 실천 수단으로 외세에 의존했는지, 정권를 쟁취하기 위한 사욕으로 의지했는지는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할 것 같다. 이상찬 박사는 19세기의 조선 사회가 경제적으로 상업과 광공업이 발달해 자본주의사회로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고 있던 상황에, 올바른 발전 방향은 「자주적 근대화」였다고 말한다. 즉 자본주의 사회로 순조롭게 발전할 수 있게 하는 동시에 외세의 침략을 막아내는 것이 역사적 과제였다는 것. 그러나 그 「해법」을 두고 조선사람들의 의견은 사분오열돼 있었다. 『1876년 조선의 개항 이후 자주적 근대화와 관련해 4가지 방안이 제시됐다. ▲조선 정부는 기존 체제는 유지하되 서양의 과학기술을 일부 받아들여 부국강병을 이루겠다는 정책(東道西器)을 추진했다. ▲그러나 조선 정부의 정책에 대해 재야의 척사(斥邪) 유림들은 봉건사회를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 문을 닫아걸고 싸우자고 주장하였다. ▲반면 개화파는 자본주의 제도를 확립하고 문호를 개방해야 한다고 하였다. ▲또 민중들은 기존 지배체제를 무너뜨리고 외래 침략자들을 막아낸 후 새로운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고 보았다. 결국 이 네 가지 흐름은 서로의 장점을 살리고 의견을 통일시켜가기보다는 대립 갈등함으로써 「자주적 근대화」라는 역사적 과제를 더욱 어렵게 만들고 말았다』 ------------------------------------------------------------------------------- - 개화 세력의 갈등 ------------------------------------------------------------------------------- - 4가지 조류의 반목이 조선의 자주적 근대화를 어렵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개화파 내부의 사상적 갈등 역시 조선에 엄청난 정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주진오 교수(상명대 한국근대사)는 그 대표적 사례로 1884년의 갑신정변을 꼽는다. 갑신정변은 김옥균 박영효 등 친일 개화당이 명성황후 쪽 친청 세력을 물리치고 국정을 장악하기 위해 일으킨 정변으로 3일 만에 실패로 끝나고 만 사건이다. 『갑신정변은 문호개방 이후 지배층 안에서 동도서기론이 체계를 갖추어가는 과정에, 일본 등지에서 문명개화론을 접한 일부 세력(친일 개화파)이 급속하게 동도서기론과 대립하면서 일어난 사건이다. 동도서기론과 문명개화론은 청에 대한 대처방안 등을 둘러싸고 대립하면서 끝내 피를 부른 사건으로 끝나고 말았다. 갑신정변은 결국 권력 내부의 갈등이 표출돼 근대화 역량에 치명적 손실을 가져온 사건이다』(주진오, 「1884년 갑신정변의 사상적 배경」) 주교수는 민씨 정권은 흥선 대원군이나 위정척사론자(衛正斥邪論者)들과 달리 동도서기론에 입각한 개화당이었다고 평가한다. 반면 김옥균 박영효 등 문명개화론자들은 1882년 일본을 방문해 후쿠자와 유키치 등을 만나 자극을 받은 뒤 서양의 법과 제도를 수용해 근대화를 이룩하자는 논리를 폈는데, 부국강병을 위해서는 동도(東道)의 폐기까지 가능하다고 생각했으며 기독교의 수용까지 고려했다는 것이 주교수의 분석. 이렇게 문명개화론자들은 일본식 부국강병을 꿈꿨다. 그들에게 있어 일본은 선망의 대상이자 추구해야 할 절대선이었다. 이들이 받은 충격이 어떠했는지는 박영효의 다음과 같은 실토에 잘 나타나 있다. 『일본은 명치유신의 대개혁을 단행하던 때라 상하가 결속하여 내치외교에 국운은 날로 융성하여가는 판이었다. 「우리나라는 언제나」 하는 조급한 마음이 일어나는 동시에 개혁의 웅심(雄心)을 참으려 하여도 참을 수 없었다』 또 갑신정변 주동자들과의 친분 때문에 해외로 도피한 윤치호의 육필 일기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만일 내가 살 곳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다면 일본이 바로 그 나라일 것이다.…오, 축복받은 일본이여! 동양의 파라다이스여! 세계의 정원이여!』(1893년 11월1일) 이런 인식 때문에 문명개화론자들은 조국을 부강한 나라로 만들기 위해 아무 거리낌없이 일본을 끌어들여 갑신정변이라는 쿠데타를 단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당시의 일반대중들로부터 지지를 받을 수 없었다. 갑신정변에 실패한 후 망명한 서재필은 쿠데타 실패 이유에 대해 자신의 소감을 나중에 밝혔다. 『청국 원세개의 간섭으로 독립당의 3일몽은 깨어지고 말았던 바, 그 독립당 계획에는 부실한 것도 많았지만 무엇보다도 제일 큰 패인은 그 계획에 까닭도 모르고 반대하는 일반 민중의 무지몰각이었다』(서재필 회고담) 서재필은 갑신정변의 패인으로 근대화에 대한 일반 민중의 무지몰각(無知沒覺)을 꼽았다. 그러나 갑신정변을 일으킨 주역들의 외세 의존적 태도는 또 다른 외세를 조선에 불러들이는 빌미를 제공하고 만 것도 사실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유명한 「시일야방성대곡」을 쓴 언론인 장지연은 이렇게 평했다. 『갑신년 겨울에 이르러 개혁파는 급격한 유신을 일으켜 마침내 일대 결렬을 낳고 청·일 양국의 갈등만 낳게 해서, 사태는 더욱 긴장되었다…이제까지 일으켜놓은 약간의 사업(개화시설)마저 수포로 돌아가버렸다…조급한 진보와 가벼운 운동으로 급격한 행동이 지나쳐서 오늘날의 슬픈 지경에 이르렀다』(『장지연 전서』) 이는 미국인 의료선교사로서 고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던 알렌(1858~1932년)의 시각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갑신정변의 실패 이후) 원세개의 거만스러운 대한정책(내정간섭)이 바로 청일전쟁을 유발하는 원인이 됐을 뿐 아니라, 그 뒤 러일전쟁 발발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고 있다』 말하자면 알렌은 갑신정변 실패가 일본의 군사력 강대화를 촉발, 일본의 정한론(征韓論) 실행을 유발했다고 보았던 것. 제2부 외세의 도전 부국강병을 꿈꾼 개화파들이 적극적으로 외세를 끌어들이는 것과 동시에 외세 역시 자발적으로 우리나라를 침탈하려는 야욕을 갖고 있었다. 양자의 뜻이 맞아떨어지면서 조선은 네 강국(네 신선)의 패 따먹기 시합이란 대격랑에 휩쓸리게 된다. 1884년의 갑신정변에서 더 거슬러 올라가, 조선을 둘러싼 외부세계의 흐름을 살펴보도록 하자. 1880년 8월28일(음력) 창덕궁 어전(御殿), 고종 임금은 영의정 이최응(李最應)을 불러들였다. 고종은 내치(內治)에 관해 이러저러한 얘기를 나누던 중, 문득 얼마 전 일본 수신사(修信使) 김홍집(金弘集)이 자신에게 바친 『조선책략(朝鮮策略)』이란 책자에 대해 물었다. 『수신사가 가지고 온 책자는 청나라 사신이 보낸 것이니 그 후(厚)한 뜻이 일본보다 더하다. 대신(大臣)도 그 책을 보았는가?』 20세기가 저물어가는 오늘에도 정치· 외교 문제를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 회자되는 『조선책략』은 이렇게 고종의 입을 통해서 역사에 등장한다. 주일(駐日) 청국공사관 참찬관 황준헌이 지은 이 책은 4강국(중·일·러·미)이 동아시아에서 패권 싸움을 벌이는 상황에 조선의 「바람직한」 외교정책을 기술한 것이다. 골자는 땅 욕심이 많은 러시아의 남침을 막기 위해서는 조선정부가 「친(親)중국·결(結)일본·연(聯)미국」 해야 하며, 조선이 부강(富强)을 꾀하는 길은 반드시 서양의 제도를 배우고 서양의 기술을 익혀야 한다는 것. ------------------------------------------------------------------------------- - 고종의 「외교지침서」 ------------------------------------------------------------------------------- - 고집스럽게 「쇄국의 길」을 우기던 조선이 처음으로 일본과 수호조약을 맺어(1876년) 공식적으로 「개항의 길」을 걷게 된 지 4년. 그간 고종은 주위 열강이 한반도를 옥죄어오고 있음을 민감하게 느끼면서도 어떻게 대응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던 차에 「눈을 번쩍 뜨게 해주는」 책자를 보게 됐다. 거기에는 일국의 군주로서 못내 궁금했던 세계 강국들의 역사와 정세까지 상세히 설명돼 있었다. 그래서 고종은 2인자인 영의정에게도 그 의향을 물어보았던 것이다. 『신도 그 책을 보았는데, 그(황준헌)가 여러 조항으로 분석하고 변론한 것이 우리의 심산(心算)과 부합되니 한번 보고 묶어서 시렁 높이 얹어둘 수는 없습니다. 대체로 러시아는 먼 북쪽에 있고 성질이 또 추운 것을 싫어해 매번 남쪽을 향해 나오려고 합니다. 러시아 사람들이 욕심내는 것은 땅과 백성입니다…바야흐로 지금 러시아 사람들은 병선 16척을 집결시켰는데, 배마다 3000명을 수용할 수 있다고 합니다. 만약 추위가 지나가면 그 형세는 틀림없이 남쪽으로 향할 것입니다. 그 의도를 헤아릴 수 없으니 어찌 대단히 위태롭지 않겠습니까』 『방비 대책은 어떠한가?』 『우리 스스로가 어찌 강구할 방비 대책이 없겠습니까. 청나라 사람의 책에서 논한 것이 이처럼 완벽하고, 이미 다른 나라(조선)에 준 것은 충분한 소견(所見)이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 그 중 믿을 것은 믿고 채용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틀림없이 믿지 않을 것이니 장차 휴지로 되고 말 것입니다』 영의정 이최응의 우려는 사실로 드러났다. 『조선책략』은 오랑캐의 사주를 받아 지은 것이며, 그런 책을 들고 온 김홍집을 의심하는 유언비어가 일파만파로 번져나갔다. 마침내 당대의 여론 지배층인 영남 유생(儒生)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났다. 퇴계 이황의 후손인 이만손을 필두로 한 이들은 1881년 2월 상주에서 대회를 가진 뒤 「임금을 그릇된 길로 인도한」 김홍집을 탄핵하는 「만인소(萬人疏;1만명이 연명으로 올리는 상소)」를 지어 올렸다. 전통적인 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을 내세운 「만인소」는 『조선책략』에 대해서 조목조목 반박했다. 요약하면 ▲조선은 이미 200년 전부터 중국의 속방으로서 그 직분에 충실해왔는데, 새삼 중국과 친(親)하라고 한 것은 공연히 중국을 자극하는 일이며 ▲이미 우리의 지형지세를 잘 파악하고 있는데다 도대체 믿을 수 없는 일본과 결탁하는 일은 위험하며 ▲미지(未知)의 미국을 일부러 끌어들였다가 그들의 꾐과 요구에 말려 감당하기 어려운 국면에 처할 수 있으며 ▲러시아의 경우 쓸데없이 그들을 자극하여 침범을 자초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므로, 황준헌이 말한 것은 백해(百害)만 있지 일리(一利)가 없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서학(西學)을 배우고 상공업에 힘을 다하라는 『조선책략』의 지적에 대해서는 농공업을 경제의 바탕으로 삼아온 선대의 훌륭한 법도를 해치는 것이며, 사교(邪敎;기독교)를 전파하려는 음흉한 속셈이 깔려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만인소 외에도 목숨을 담보로 조정의 개화정책을 격렬히 반대하는 유생들의 상소는 그치지 않았다. 강원도 유생 홍재학은 「고종 및 민씨 일파가 사학(邪學)의 주범」이라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가 처형당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고종은 이에 굴하지 않았다. 한편으로 유생들을 회유하고 또 한편으로는 극형으로 다스리면서 개화의 길을 암중 모색했다. ------------------------------------------------------------------------------- - 러시아판 「조선책략」 ------------------------------------------------------------------------------- - 이후 조선은 1882년 한 해에만 미국·영국·독일과 수호통상조약을 맺었다. 이처럼 『조선책략』은 국왕과 지배층에게는 대외관계에 대한 귀중한 전략으로 생각됐고, 사실상 그것을 실천에 옮기기도 했다(진덕규 이화여대 정치사회학 교수). 사실 『조선책략』의 저자인 황준헌은 이홍장의 막료로 조선 정부에 대한 청의 의도를 「권면」 형식으로 꾸며 고종에게 은근히 흘렸다. 청은 날로 자신을 위협하는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속방인 조선에 미국을 끌어들여 러시아를 견제하려는 이이제이(以夷制夷)책을 염두에 두었던 것. 그러나 황준헌이 조선의 입장에 서서 대외 정세를 논한 대목은 참고할 점이 적지 않았다. 그는 책 서두에서 『조선은 실로 아시아의 요충지여서, 형세가 (외세에 의해) 반드시 다투게 마련이며, 조선이 위태로우면 중동(中東)의 형세도 날로 위급해질 것』이라고 밝혀 조선의 지정학적 특성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이는 19세기 말 제정러시아의 비밀 문서에서 잘 드러난다. 이 문서에 의하면 러시아는 전략 요충지인 조선을 자국의 세력권에 묶어두어야 하는 이유로 ▲아시아 대륙에서 러시아의 확고부동한 패권 유지와 원동(遠東)지방의 안전 확보 ▲중국과 전쟁시 러시아 군대의 한반도 통과권 안전 확보 ▲조선과의 통상 확대에 따른 이익 확보라는 점을 들고 있다. 또 이 문서는 놀랍게도 만일 경쟁상대인 일본이 조선을 보호하에 두려 한다면 전쟁도 불가피하다고 지적해 그 후에 한반도에서 발생한 러일전쟁(1904~1905년)을 20년이나 앞서 예견했다. 「러시아판 조선책략」이라고 불릴 만한 이 비밀문서는 1884년 8월8일 북경 주재 러시아 수석무관 슈네유르 대령이 조선의 외무협판(외무차관)이자 고종의 고문으로서 한말 외교를 좌지우지했던 파울 묄렌도르프(독일인·한국명 목린덕)와 중국에서 장시간 비밀회합을 가진 후 합의사항을 보고서로 작성, 제정러시아 군부대신 반노프스키에게 제출한 것이다. 이 문서가 작성된 것은 『조선책략』이 국내에서 문제되고 3년 후의 일. 그러나 러시아는 진작에 중국 동북부에서 흑룡강 동쪽을 장악했고 일본으로부터는 사할린을 접수하는 등 지속적으로 남하 정책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러니 요충지인 한반도를 영향권에 두려는 것은 당연한 일. 사실 고종도 1880년 일본에서 돌아온 수신사 김홍집을 불러들여 『러시아가 두만강으로부터 곧바로 산동(山東;중국의 한 성)으로 갔다고 하는데 과연 오래지 않아 사변이 일어날 것 같던가?』 하고 물어볼 만큼 러시아의 움직임을 매우 관심있게 지켜보고 있었다. ------------------------------------------------------------------------------- - 세계 열강의 야욕 ------------------------------------------------------------------------------- - 실제로 당시 세계 정세는 조선이 쇄국의 길을 한가로이 걸을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19세기 초부터 산업혁명에 성공한 서구 제국주의 열강은 자신들이 만든 상품을 팔 수 있는 시장을 확보하고, 산업 원료를 구하기 위해 군함과 대포를 앞세우고 아시아를 침략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곧 동아시아에서 중국을 중심으로 한 중화체제가 붕괴되고, 서구 열강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그 자리를 대신하는 과정이었다. 그 결과 영국과 치른 아편전쟁에서 진 청나라가 쇄국의 빗장을 열었고(1842년), 일본은 미국에 의해(1854년) 불평등 조약을 맺으매 두 나라는 서구 열강의 상품시장으로 편입됐다. 그런데 1870년대와 1880년대에 걸쳐서는 청과 일본이 서구 열강에 의해 강요된 자국내의 사회적 모순을 전이하기 위해 「만만한」 조선을 넘보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조선은 러시아와 미국으로 대표되는 서구 열강세력뿐 아니라 전통적으로 이웃나라인 청과 일본으로부터도 위협을 받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제국주의 식민지 경영에 가장 「재미」를 보고 있던 영국도 한반도에 남달리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영국은 아프가니스탄과 이란 등 아시아권에서 남하정책을 추진하는 러시아와 사사건건 부딪쳤고, 러시아보다 앞서 조선정부와 「조영수호통상조약」(1882.6.6)을 맺었다. 당시 조선을 여행했던 영국의 여행저술가 비숍 여사는 『개발 여지가 있는 자원과 전략적 가치를 지닌 항구가 있는 이 나라(조선)를 경쟁국들이 선점한다면 극동에서 영국의 권익은 심각한 타격을 받을 것』이라고 하면서 영국의 이익 수호를 표명하기도 했다. 조선으로서는 목에 비수를 들이대는 섬뜩한 표현이었다. 이런 상황에도 조선의 집권층은 한반도까지 뻗쳐오는 제국주의 세력에 대한 정보와 대처능력이 부족했고, 조선의 지식인층은 국제정세에 대한 몰이해와 함께 수구적 자세로 일관했다. 이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일본의 압력을 받아 맺은 강화도 수호조약. 1876년 일본의 강요로 마지못해 맺은 최초의 근대적 조약인 강화도 조약은 조선에 대한 일본의 권리만 규정했을 뿐 조선의 권리나 일본의 의무에 대해서는 한마디 언급도 없는 대표적인 불평등 조약이었다. 이 조약에서 조선은 ▲일본화폐 유통권 ▲개항장내 모든 일본인에 대한 치외법권 인정 ▲일본상품의 무관세 무역 등을 허용했다. 우리가 문호개방 조건으로 얻어낸 것은 ▲망명자 및 밀입국자 송환 ▲아편 수입 금지 ▲천주교 전래 금지 뿐이었다. 그나마 조약서에는 한 조항도 명시되지 않았다. 이와 같은 결과는 조선의 집권자나 조약에 나선 교섭대표들이 일본의 속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통상에 대한 기본적 인식이 없었던 반면, 일본은 조약체결 이전에 청국이나 러시아의 반응은 물론 조선 정계의 내분 상태까지 사전에 파악하고 협상을 이끌었기 때문이다. ------------------------------------------------------------------------------- - 『사대부는 통상에 관심없소』 ------------------------------------------------------------------------------- - 조약체결에 나선 조선측 대표 신헌은 무관으로서 통상외교가 무엇인지도 몰랐다. 그는 조약체결 당사국의 국명이 명기되는 조약문에 일본이 「대일본」이라 쓰자, 무슨 큰 발견이나 한 것처럼 우리도 「대조선」으로 쓰겠다고 하였고 그것을 대단히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또 일본의 수행원이 조선에서의 통상과 관련해 일본의 화폐제도를 설명하려 하자『사대부는 덕치(德治)에 대해서나 생각하지 통상 같은 천한 문제에는 관심이 없다』며 알아서 하라는 식의 태도를 보였다. 그는 또 노동을 모른다는 증거로 자신의 길게 기른 손톱을 일본측 대표들에게 보여주기까지 했다. 나중에 신헌은 조약을 맺고 나서 고종으로부터 수고했다는 격려와 함께 무위도통사라는 벼슬까지 제수받았고, 1882년 미국과 조약할 때 통상교섭 대표자로 나섰으니 한심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근대경제사를 연구하는 하원호 박사(고려대 강사)의 말. 『조선의 교섭 당사자들은 관세 자주권(무관세 무역)을 상실하고 말았는데, 이는 결국 자본재 공산품의 침투로 국내산업을 보호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후일 자주적 식산흥업 추진에도 장애가 돼 민족자본이 육성되지 못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또한 일본화폐를 조선에서 유통할 수 있게 됨에 따라 일본 은행이 조선에 진출, 일본 상인은 자본력 면에서 조선 상인을 압도할 수 있었고 양국간 환시세를 조작해 수출품을 염가 매입하는 한편, 일본 은행에서 대부받은 자금을 조선 상인에게 대부하고 환차익까지 챙기는 등 횡포를 부렸다』 나아가 일본과 맺은 불평등조약 개정 문제에 있어서도 조선의 관리들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일본은 1850년대에 서구 열강과 불평등 조약을 맺은 이후 상당히 짧은 기간에 양국 평등조약으로 개정해나갔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 뒤늦게 불평등조약이 많은 문제점을 지닌 것을 알고 조약개정 협상에 나서자, 일본측은 조선측이 근대적 통상 지식에 무지하다는 사실을 이용해 협상대표자의 자격시비와 양국간 무력충돌 위협 등 다양한 방법으로 협상 자체를 기피했다. 조선의 대표자들은 할 수 없이 물러서고 말았다. 1880년대 미국과 유럽 여러 나라와 체결한 통상조약 역시 강화도 조약에 비해 일보 진전하긴 했지만, 기본적 성격은 불평등조약이었다. 당시 조선은 10% 이하의 관세를 부과하는 규정을 체결(실제는 5~8% 부과)했으나 보호무역주의가 일반적 추세였던 유럽 지역의 관세율 20~ 30%에 비하면 엄청나게 낮은 것이었다. 불평등 조약을 평등조약으로 개정하려는 노력에 있어서 개화파들의 통상에 대한 인식도 문제가 많았다.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한 친미·친일 개화파들은 『불평등 조약 개정 문제는 국력이 강해지고 난 다음에나 가능한 것으로 지금은 어쩔 수 없다』는 입장을 취했다. 오히려 개항장을 늘리고 외국인의 치외법권을 인정하는 것이 우리나라를 위해서 좋은 일이라고까지 주장했다. 이는 당시 서구 열강의 철저한 보호무역주의와는 배치되는 자유무역주의적 입장이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우리나라 상인들 역시 외국인들의 사기적 통상에 놀아났다. 황현은 저서 『매천야록』에서 이렇게 말했다. 『개항 이후 우리나라에 외화(外貨)로 들여온 물품 가격이 매우 저렴하여 상민(商民)들은 그것을 되팔아 많은 이익을 남겼다. 그러나 수년도 못 돼 일본인들은 우리나라 사람보다 더 심한 사기를 부렸다. 외화로 들여온 물품이 10건이라면 인조물품이 9건을 차지하고, 우리나라 돈으로 외국에 내놓은 물품 중에 10건 중 9건은 천연 물산이었다. 이것은 너무 심한 일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토록 머리가 둔한 것이다. 또 우리가 수입해온 물품은 비단, 표단(表緞), 종휴칠(鍾?漆) 등으로 음교(淫巧)한 기물(奇物)들에 불과하며 우리나라에서 수출한 물품은 쌀, 콩, 피혁, 금, 은 등 평일에 사용할 수 있는 절실한 물품이었다. 이런 일이 지속되면 나라가 가난해지지 않으려고 해도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다』 ------------------------------------------------------------------------------- - 미국에 대한 환상 ------------------------------------------------------------------------------- - 여기서 당시 조선의 최고 통수권자인 고종은 대외관계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고종은 대외관계 인식에 있어서 명성황후와 상당히 달랐던 것 같다. 명성황후가 청국과 러시아에 많이 의존했음에 비해 고종은 미국에 상당히 많은 기대를 갖고 있었다. 이는 아마도 『조선책략』의 영향을 받은 듯하다. 이 책의 저자 황준헌은 미국을 가리켜 『선왕(워싱턴)의 유훈을 지켜 예의로 나라를 세우고, 남의 토지를 탐내지 않고, 남의 인민을 탐내지 않고, 굳이 남의 정사에 간여하지 않았다. 그 남방에 하와이란 나라가 있어 합중국에 병합할 뜻을 보였으나 저들(미국)이 거절하였다』고 평가, 미국이 매우 믿고 의지할 나라라는 점을 부각시켰던 것. 여하간 고종은 1871년 대원군이 전국에 세웠던 척화비를 철거했고 『병인(1866), 신미(1871) 양요는 우리나라가 반성해야 할 것이며, 서양 배를 침략선(해적선)이라고만 떠드는 것도 잘못』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1882년 5월22일 인천 제물포 화도진 언덕에서 조미수호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조선이 자발적으로 쇄국정책을 청산하고 명실공히 세계만방에 문호를 개방한 최초의 문서였다. 단국대 김원모 교수(한미관계사)의 조미수호조약에 대한 평가. 『미국은 조미조약을 체결함에 있어서 청국 이홍장의 끈질긴 대한종주권 주장을 단호히 물리치고 조선왕조를 주권독립국가로 인정하고 대등한 주권국가의 위치에서 조약을 체결했다. 이로써 조선은 조·청 간의 전통적인 조공관계를 청산하고 주권독립국가로 새 출발을 했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의는 매우 크다』(한미수교사) 사실 청의 이홍장과 황준헌의 대한정책은 연미론에 의한 속방론 강화였다. 그런데 미국이 막상 조선과 조약을 체결하면서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라는 조항을 명문화하라는 청의 요구를 완강하게 반대했던 것이다. 고종은 또한 조미조약 제1조에 명시돼 있는 「거중조정(good offices)」에 상당한 기대를 걸었다. 이는 어떠한 외국이라도 불공경모(不公輕侮)로 조선의 주권을 침해하거나 내정간섭을 자행할 경우 단호히 이를 저지하고 조선을 보호하겠다는 내용이다. 게다가 1884년 3월 미국대통령 아더는 대조선정책 연설에서 이를 명확히 했다. 『조선은 상하가 한마음으로 우호를 유지하고 있어 우리 미국은 조선을 개명시킬 것을 기약하며, 가벼이 대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외국이 조선의 권리를 침해할 경우 우리 미국은 힘껏 보호하여 영원히 우호를 돈독히 할 것이다』 ------------------------------------------------------------------------------- - 배신당한 고종 ------------------------------------------------------------------------------- - 이 정도 되면 고종이 미국에 상당한 기대를 걸 만도 했다. 게다가 미국을 다녀온 개화파들은 미국에 대한 환상을 부채질했다. 당시 『독립신문』은 미국을 가리켜 『약한 나라가 강한 나라에 압제를 받든지 자유권을 뺏기면 자기 나라 군사를 죽이며 재물을 허비하면서도 그 약한 나라를 기어이 도와주는 나라』라고 평가하였고, 사설에서는 또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북아메리카는 토옥하고 각색 천조물의 부유함과 강산의 웅장하고 수려함이 세계에 둘째 아니 가거늘 인디언이라 하는 토종이 몇천년을 맡아 가지고 있어서 이 좋은 강산을 쓸모없는 땅으로 만들고 야만의 풍속을 종시 고치지 않더니 마침내 영국 인종의 땅이 된 후 세계에 제일 부강한 나라가 되니 인디언의 포진천물하던 죄악을 하늘이 벌주신 일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은 과연 어리석도다』 한국의 개화파들은 아메리카 대륙의 미개발을 인디언의 야만성에서 찾고 있고, 영국인에 의해 개발돼 부강하게 되었으며, 그것은 하늘이 인디언에게 벌을 준 것이라는 매우 위험한 시각을 갖고 있었다. 실제로 독립협회는 우리나라 사람들을 인디언과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미국에 대한 이와 같은 환상은 1905년 일본이 을사조약을 맺어 한국을 장악했을 때 완전히 깨지고 말았다. 당시 고종은 대한제국 정부에 봉직하고 있는 미국의 교육자 헐버트 교수를 준외교관으로 임명, 일본이 한국에 가하고 있는 극악무도한 소행과 미국의 도움을 청하는 서한을 워싱턴에 보냈다. 그러나 헐버트 교수는 워싱턴에서 매우 냉랭한 대접을 받았다. 그가 한국의 사태를 설명했을 때 상원의원들은 이렇게 반문했다. 『당신은 우리가 어떻게 하기를 기대하는가? 미국이 한국 문제로 인해 일본과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 옳다고 믿는가?』(F.A. 맥켄지, 『대한제국의 비극』) 이후 1905년 9월9일 미국대통령은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인수하는 것에 대해 이의가 없다』고 발표했다. ------------------------------------------------------------------------------- - 구한말 최고의 부패관리는? ------------------------------------------------------------------------------- - 한 나라가 망국에 이를 즈음이면 부정부패가 만연해진다는 것은 동서고금의 상식. 구한말 너무나 부패한 탐관오리들에 대항해 일어난 대표적 사건이 바로 동학혁명(1894년)이다. 그리고 동학혁명은 청나라와 일본의 군대를 조선으로 불러들여 청일전쟁에 도화선이 됐다. 따지고 보면 부패한 관리들 때문에 외세를 끌어들인 셈이었다. 사실 조선의 부패에 대해서는 고종의 아버지인 대원군이 재야생활을 통해 너무나도 잘 알아 『우리나라에 세 가지 큰 폐단이 있으니, 호서(湖西)의 사대부(충청도 양반층)와 관서(關西;평양)의 기생 그리고 호남(湖南)의 이서(아전)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물론 대원군 자신도 뇌물에 약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박성수 교수(한국정신문화원·한국사)는 한일 외교를 보면 일본측의 협박과 뇌물 공세에 한국의 이권과 권익이 하나둘 일본측에 넘어갔다고 진단한다. 『친일파 어담(魚潭) 소장의 회고록을 보면 탁상시계 하나를 뇌물로 받고 일본에 이권을 넘겨준 외무대신 이야기가 나온다. 차마 읽기가 부끄러운 기록이 한둘이 아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된 것은 매국노 이완용을 비롯한 을사오적들이 돈 때문에 나라를 팔아먹은 것이었다』 그렇다면 대한제국 당시 최대의 부패관리는 누구였을까. 아마도 국가전매사업인 홍삼 판대대금을 착복한 민영익이 꼽힐 것이다. 명성황후의 친정조카로 민씨 일가의 세도정치세력에 대표적인 인물인 민영익은 1883년 조선보빙사가 미국으로 갈 당시 전권대신의 막중한 임무를 맡기도 했다. 그런데 고종은 1907년 국채보상운동과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결국 퇴위하기 직전 홍삼수출권을 민영익에게 위탁하면서 판매 이익금의 일정액을 황실에 납부하도록 조처했다. 이후 민영익은 홍삼판매대금으로 일약 갑부가 돼 중국 상해의 프랑스 조계(租界)에 큰 저택을 마련하고, 청국 여인을 첩으로 맞아 호화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때 민영익의 재산은 약 150만환으로 추산됐다. 이에 대해 당시『대한매일신보』는 이렇게 풍자했다. 『민영익씨 들어보소. 국가승평할 때에는 임의대로 집권하고 있다가 일이 있을 줄 미리 알고 해외국에 피신하였으니…벼슬 주신 천은(天恩)을 깊이 생각할지어다』(1909.1.7) 게다가 민영익은 홍삼판매대금을 아예 황실에 입금하지 않았다. 민영익이 홍삼판매권을 위임받은 이래 지불하지 않은 금액은 금화(金貨)로 무려 600만환. 이것은 1907년 한국 수출총액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 ------------------------------------------------------------------------------- - 고종, 부패군주였나 ------------------------------------------------------------------------------- - 그런데 대한제국의 주인인 고종 역시 뇌물 혐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게 하원호 박사(고려대 강사)의 말. 1888년 어느 날 고종이 『남정철이란 놈은 정말 큰 도둑놈이구나』 하고 화를 벌컥 냈다. 남정철은 한때 평양감사를 지냈는데, 왕이나 왕비의 인척이 아닌 대신들 중에서 재물을 제일 많이 끌어모은 자로 알려져 있었다. 그는 평양감사로 재직하면서 온갖 진귀한 물건을 계속 진상해 고종으로부터 『정말 충신이로다』라는 칭찬을 받았다. 고종은 그를 예쁘게 보아 중국문물을 배우러 가는 영선사로 삼아 천진으로 보냈다. 그래서 영선사로 가 있는 동안 민비의 척족이던 민영준으로 하여금 대신 감사를 시켰다. 그런데 민영준은 얼마 지나지 않아 큼직한 금송아지를 만들어 바쳤다. 그러자 고종은 이렇게 탄식했다고 한다. 『관서(평안도) 땅에 허다한 게 금인데 제놈 혼자 다 해먹었구나』 고종이 돈을 좋아한다는 것은 황현의 『매천야록』에도 언급되어 있다. 대신부터 무당·백정까지 돈을 싸들고 다니며 경쟁적으로 고종 곁에 출입했다는 것. 그들이 내어놓은 돈의 양에 따라 광산 이권, 토지 이용권, 회사설립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권을 얻을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는 고종이 심약하고 돈만 밝히는 부패 군주로 알려져 있는 것은 조선 왕을 깎아 내리려는 일제의 조작에 의한 것이라며, 쓰러져가는 조선을 일으키려고 나름대로 애쓴 개혁군주로 고종을 조망하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그러나 조선 고위층에서부터 하위직까지 광범위하게 퍼져 있던 말기암적인 부패상, 지나치게 외세에 의존한 개화파들의 어설픈 근대화론, 탐욕스러운 제국주의의 침탈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조선은 결국 침몰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오늘날 고위 공무원들의 부패, 어설픈 세계화 논리, 아직도 한반도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강대국의 횡포 등과 별로 달라보이지 않는다.(원전을 밝히지 않은 고종의 발언은 국역 조선왕조실록 CD-ROM에서 인용했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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