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기) 날 짜 (Date): 1999년 1월 26일 화요일 오전 09시 14분 27초 제 목(Title): 이병천/한국의 발전국가자본주의와 발전딜� 한국의 발전국가 자본주의와 발전딜레머 이병천 1.머리말: 경제위기와 발전국가 자본주의 2.권위주의 발전안보국가와 동북아 발전안보연합 3.발전딜레머 4.맺음말: 국가주의와 시장주의를 넘어서 1. 머리말: 경제위기와 발전국가 자본주의 한국형 발전모델의 성공과 실패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많은 연구들이 있었다. 그렇지만 이 오랜 주제에 대해 현금의 경제위기는 새로운 연구를 자극하고 있다. 경제위기라는 새로운 현실에 자극받아 씌어진 이 글은 국가의 개입 양식에 초점을 맞추어 개발독재로 불리는 한국 발전국가모델이 성공할 수 있었던 제도적 조건과 그 발전 비용의 양 측면을 동시에 살펴보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개발연대 박정희정권기의 한국 발전국가모델은 현금의 경제위기에 의해 어떻게 재조명되어야 할 것인가. 경제위기 원인에 대해서는 국내외적으로 여러 견해들이 제시되고 있지만, 크게 두 가지로 대별해볼 수 있을 듯하다. 하나는 국가 개입과 규제, 즉 관치경제와 관치금융이 위기를 불러왔다는 시장중심적 견해이고, 다른 하나는 정반대로 자유화와 탈규제, 과소규제가 위기를 초래했다는 국가중심적 견해이다. 이렇게 서로 다른 진단으로부터 경제위기에 대한 해법과 새로운 경제질서에 대한 개혁 구상도 달라진다. 현재 김대중정부는 IMF와 더불어 전자, 시장주의적 견해에 서서 개혁을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필자는 후자의 진단이 옳으며, 또한 이것이 개발연대 압축성장의 제도적 조건도 다시금 잘 부각시켰다고 생각한다. IMF는 한국 경제발전의 구패러다임이 변하지 않은 채 유지된 것처럼 보지만,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발전국가모델은 80년대초 이래 시장경제의 방향으로 꾸준히 개편되어 김영삼정부에 와서는 사실상 그 기본 골격이 허물어졌다. 그렇기 때문에 현금의 위기는 구한국형 발전모델의 실패라기보다, 오히려 어설픈 시장주의적 개혁 시도의 실패로 파악해야 한다.註1)그러면 국가중심적 견해는 경제위기의 태풍 영향권에서 완전히 비켜서 있다고 해도 좋은가? 여전히 국가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으로 자족해도 좋은가? 그렇지 않다. 경제위기의 국내적 원인을 경제적 자유주의와 탈규제에서 찾는다면, 왜 한국이 80년대 이후 경제적 자유주의와 탈규제의 길을 걸었는지, 나아가 왜 외환위기가 총체적 경제위기로 발전했는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한데, 국가중심적 견해에서는 이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 필자는 이 문제는 개발독재모델로 불리는 구발전국가모델에 내재된 발전딜레머와 불가분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발전국가모델은 압축성장에 성공한 이면에, 노동 배제적인 권위주의 국가-재벌의 발전지배연합의 구조 위에서 엄청난 부정적 폐해를 누적시켜왔다. 그러므로 권위주의적 발전주의체제는 단지 그 성공의 결과라는 이유뿐만이 아니라 내부 모순 때문에 지속불가능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구체제에 대한 도전 진영은 절차적 민주화를 사회경제적 민주화, 일상생활의 민주화로까지 확대·심화시키려는 민주적 평등주의 흐름과, 민주화를 절차적 민주화로 봉합하고 오로지 국가의 규제 철폐를 추구하는 경제적 자유주의 흐름으로 대변할 수 있는데, 발전국가모델 이후의 경제질서 전환을 주도한 것은 후자의 흐름이었다. 여기서 필자가 주장하려는 것은 국가-재벌 지배연합에 의해 억압당해온 약한 시민사회의 역량은 구체제의 부정적 유산들이 간직된 재벌헤게모니 체제와 국가 부문을 혁신하기에는 역부족이었으며, 80년대 이후 한국경제가 어설픈 자유화로 나아간 어떤 역사적 제약조건을 발전국가모델에 내재된 발전딜레머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역사적 제약조건은 결코 인과론적으로 필연적인 결정요인은 아니며, 발전국가 자본주의 이후 신경제질서 개혁에 실패한 데는 당대 시기에 일차적 책임이 있다고 해야겠지만, 그것을 힘겹게 만든 역사적 제약조건이 있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발전국가론적 접근은 한국발전모델의 성공 요인을 해명하는 데는 설득력이 있었지만, 그것에 내재된 모순구조와 부정적 폐해를 경시하는 중요한 결함이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의 경제위기는 시장중심론자뿐만 아니라, 발전국가론자에게도 새로운 반성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이 글에서는 한국 발전국가모델에서 국가개입 양식의 강점과 그 내적 모순 또는 딜레머를 동시에 살펴보려고 한다. 2. 권위주의 발전안보국가와 동북아 발전안보연합 민족주의적 근대화와 권위주의 발전안보국가 근대화가 자생적으로 전개될 수 있는 국내적 조건이 갖추어져 있지 않은 상황에서, 다시 말해 시장경제와 민간자본가, 시민사회가 미성숙한 상황에서, 후진국이 세계체제의 압력 아래 후발산업화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민족주의적 동원과 결집이 필수적이다. 그리고 이때 민족주의적 근대화의 주도자는 국가일 수밖에 없다. 근대화의 세계사는 영미형의 선발 자생적 근대화 유형은 소수의 나라만이 경험했을 뿐이고, 다수의 나라는 민족주의적 근대화의 길로 나아갔으며, 또한 후진국일수록 국가의 역할이 더욱 컸음을 보여준다. 19세기 이래 후발근대화 동원체제는 레닌-스딸린주의 국가사회주의모델과 비스마르크-메이지 자본주의 발전국가모델이라는 대조적인 두 개의 기본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전자는 사적 소유와 시장경제를 국가소유와 계획경제로 대체한 길인 반면, 후자는 사적 소유에 기반한 시장증진적 국가관리경제의 길이었다.註2) 이 비교 근대화, 비교 자본주의 세계사의 역사적 견지에서 볼 때, 북한은 소련·중국보다 한층 더 경직적이고 폐쇄적인 전체주의적 국가사회주의 길로 나아간 반면, 남한은 1960년 이후 비스마르크-메이지 권위주의적 자본주의 발전국가의 길로 나아갔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61년 박정희군부의 등장과 미국의 대한 경제정책 전환 및 군부에 대한 지원은, 남한의 후발 경제적 근대화가 성공하게 된 가장 중요한 전환점에 해당한다.註3)박정희 경성발전국가는 이승만 약탈국가, 장면 연성국가와는 매우 달랐다. 박정희정권은 경제를 정치보다 우선시했다. 군부는 경제발전을 통한 조국근대화라는 국민통합의 목표, 다시 말해 민족주의적인 역사적 프로젝트를 제시하였고 이것을 국가의 정당성 원리로 삼았다. 그렇지만 박정희정권의 발전주의는 단순히 선진자본주의 국가─무엇보다도 일본─의 추적을 목적으로 한 부국강병의 이념으로만 그치지 않았다. 그것은 그 이상으로 북한과의 체제 대결에서의 승리를 목표로 한 경제적 승공통일의 이념이었다. 군부의 ‘혁명’공약은 민생고의 해결 및 자립경제 건설과 더불어, 반공태세의 재정비 강화였다. 박정권의 국정운영에서 대북 산업화 경쟁은 70년대에 더욱 전면화되지만, 여하튼 어느 시대 어느 나라들의 경험에서도 보기 어려운 한국 발전국가모델의 돌진적인 국민동원모델적 성격은, 군사문화적 성격과 더불어, 적대적 상호의존 질서라고 해야 할 분단체제하의 대북 체제경쟁에 의해 규정된 것이었다. 박정권의 조국근대화 프로젝트는 곧 분단체제를 활용하고 이를 더욱 격화하고 공고화함으로써 국민대중의 에너지를 북한과의 산업화 경쟁에 동원한 반공근대화 헤게모니 프로젝트였다. 그러한 의미에서 한국의 발전국가는 동시에 안보국가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헤게모니는 그렇게 안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합헌 민선정부를 붕괴시키고 부정축재자를 경제근대화 주역으로 올려세운 군부정권은 처음부터 잠재적 정당성 위기를 가지고 있어서 성장을 통한 정당성 확보라는 갈등이 박정권시대의 동학을 이끌었다. 일본모델 모방과 정치적 조건 군부의 근대화 비전은 일본모델이었다. 박정희는 일본이 메이지유신을 통해 수립한,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국가주의적 자본주의체제와 발전이념을 칭송·모방하였다. 심지어 그는 영구집권체제의 확립 기도를 ‘10월유신’이라고까지 불렀다. 천황의 지위와 같은 사회구심으로서의 강력한 국가와 재벌, 국가의 지원과 규제를 내포한 협력체제는 일본발전모델뿐만 아니라 한국모델의 핵심구조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박정권은 재벌을 발전의 주역으로 내세워 반공근대화 프로젝트의 구조적 특권세력으로서 발전지배연합을 구축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박정권이 처음부터 일본발전모델의 구체적 내용들을 잘 알고 있던 것은 물론 아니었다. 그는 군사쿠데타를 메이지유신뿐만 아니라 쑨원(孫文)의 중국혁명, 케말 파샤(Kemal Pasha)의 터키혁명, 그리고 나쎄르(Nasser)의 이집트혁명에까지 비교했다. 또한 그의 메이지유신 찬미론에는 일본발전모델에 고유한 경제정책에 대한 분석이 없다는 사실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만 이후 박정권의 일본 모방은 강한 국가-재벌 연합을 넘어 국가의 전략적 산업정책과 금융통제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구체적 경제정책 수준에서는 박정권과 결합한 민간 핵심경제관료들의 역할이 컸다. 통상 강한 국가, 약한 사회를 낳은 역사적·구조적 조건으로 지적되어온 것은 식민지 경험과 관련된 부르즈와지와 노동계급의 미성숙, 지주계급의 몰락, 그리고 냉전 분단체제 아래서의 반공규율 등이다. 이들 요인의 중요성은 충분히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와 더불어 4 9에서 군부정권이 출현하기까지의 특정한 정치적 정세와 그것이 어떠한 방식으로 정치적 타결을 보았는가 하는 부분이 중요하다. 이 관점에서 주목할 것은 재벌들이 부정축재자로 몰려 있었고,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이 활기를 띠었으며, 그러면서도 민주당정권은 재벌들과 새로이 결탁하고 미국에 사대적 태도를 취하면서 대내외적인 국가 자율성과 국정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군부정권이 조직력과 반공근대화 프로젝트를 통해 정권 장악에 성공하고 노동에 대해서는 물론, 금융통제권으로 자본에 대한 규율과 순응을 얻어낸 것은 이같이 정치적 조건에 크게 기인한 것이다. 그리고 또 이같이 특수한 정치적 조건과 일본을 모델로 한 군사정권의 근대화 비전이 한국과 대만 모델의 차이를 낳게 한 중요한 요인인 것 같다. 국가와 재벌의 발전연합─규율을 동반한 지원 많은 연구들은 국가개입 실패의 중요한 이유를 국가보호가 시장규율을 능가하는 규율기제를 창출하지 못한 데서 찾고 있다. 코르나이(J. Kornai)가 사회주의 경제의 기업이 연성예산의 제약하에 놓여 있다고 지적한 것은 이러한 관점에서였다. 또한 많은 ‘제3세계’ 민족주의적 산업화 노력이 실패한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도 국가에 의한 규율의 부과 없는 지원과 보호 때문이었다. 암스덴(A. H. Amsden)은 한국 발전국가모델 성공의 핵심요인을 지원과 규율의 상호성 원리에서 찾았다. 즉 국가의 재벌에 대한 지원이 부의 일방적 이전으로 되지 않고 경제적 성과를 낳게 한 조건, 국가-재벌 연합이 발전연합이 되게 한 것은 지원에 실적 의무를 결합시킨 지원-실적의 교환관계였다는 것이다. 암스덴은 국가의 자본에 대한 규율을 1 수출 목표부과 2 금융통제 3 진입제한적 산업정책 4 시장지배적 기업에 대한 가격통제 5 자본 도피를 봉쇄하는 엄격한 외환관리라고 지적하였다. 암스덴의 자본규율론을 통해서 우리는 한국 발전국가모델의 중요한 특성을 파악할 수 있다. 즉 그것은 국가가 재벌에 대한 지원의 대가로 경제 실적을 요구하고 또 재벌의 산업투자가 국경 내에서 이루어지도록 규제함으로써, 재벌의 자본축적이 민족주의적 경제발전의 요구에 밀착되게 하고, 또 자본과 노동 간에도 일정한 경제적 타협이 성립할 수 있게 하였다는 것이다. 암스덴의 국가의 자본에 대한 규율부과론은 한국 발전국가모델에서 국가개입의 질에 대한 뛰어난 통찰임이 분명하다.註4) 그러나 암스덴의 규율 접근은 결함이 있다. 암스덴의 주장은 가령 중화학공업화 정책에서 국가가 종합상사제도를 만들어 그 지정 요건을 설정한 정책은 잘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분석에는 국가의 자본에 대한 규율부과정책이 산업정책과 유기적으로 연계되어 있지 않다. 수출실적 의무부과에 대한 분석이 산업정책과 분리된 채 논의되고 있기 때문에, 시장친화적 접근과의 질적 차이를 확연히 드러내지 못했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것처럼 한국의 후발산업화는 수입대체와 수출촉진의 결합과 상호강화 방식으로 진행되었으며, 이 때문에 국가는 각각의 정책에 상응하는 유인제도간의 충돌을 적절히 조절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다시 말해 국가의 기업에 대한 규율은 복선형 산업화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행사되어야 했던 것이다. 우선 암스덴은 수출이 가격기구를 통한 자생적인 방식이 아니라 수출의무제도에 의해 압출(壓出)되었음을 바르게 지적했지만, 수출의무제도와 산업적·시장적 조건의 관계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다. 한국에서 수출의무 규율제도가 필요했던 것은, 규모의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는 대규모 설비를 설치해야 하지만 국내시장은 좁기 때문에 이 곤란을 타개하기 위해 마련된 방책이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좁은 국내시장에서 다수 기업의 과당경쟁을 막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국내시장의 경쟁은 제한하고 대신 수출시장으로 진출케 한 것이다. 나아가 중화학공업의 경우에는 처음부터 세계시장을 겨냥하여 수출시장에서의 경쟁에 노출시켰다. 둘째, 수출의무제도 못지않게 중요한 규율제도는 수출용 원자재 생산에 대한 규율이었다. 수입대체의 진전은 통상 최종생산물의 국내 가공, 중간 생산물적 공업원료의 국내생산, 그리고 최후에는 기초 공업원료의 국내생산으로, 후방적 방식으로 진행되는 과정이다. 이때 관건이 되는 고리는 후방연관 동학이 순조롭게 작동되는 것인데, 국내 생산품은 가격, 품질, 입수의 용이함 등에서 수입품보다 열등할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수입원료의 국내생산은 수출을 저해할 가능성이 있고, 또한 그 때문에 그간 수입원료에 의존해온 기업가의 저항에 봉착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수출산업에 대한 종래의 지원이 클수록, 그 산업원료의 해외수입이 자유로울수록 이 저항은 더 커진다. 그래서 수입대체와 수출촉진이 동시에 진전된 한국의 복선형 공업화 과정에서는 실적규율은 단순히 수출목표 부과라는 것만으로 그칠 수는 없었다. 이 복선형 산업화의 특성과 관련하여 그 못지않게 중요한 규율방식은 수입대체와 수출촉진의 상호강화 메커니즘이 작동하게 하는 것이었다. 대표적인 것은 수출용 원자재의 국내 생산품을 동제품의 세계시장 가격수준으로 공급케 하여 수입대체산업을 국제경쟁에 노출시키게 강제한 국가규율이었다. 이 규율정책을 우리는 화학섬유산업과 석유화학산업의 사례에서 잘 볼 수 있다.註5) 한미일 발전안보연합 전후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구도에서 한국은 그 자체의 고유한 가치보다는 공산주의 진영에 대해 일본을 수호하기 위한 방벽으로 필요했다. 우리 자신은 곧잘 미국과 직거래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미국의 눈에 비친 한국은 언제나 일본을 중간다리로 하고 있었다.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의 일본중심주의는 반공의 최전선에 있는 한국의 군사적 강화를 최우선적 목표로 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경제적으로도 한국을 공업중심부 일본이 주도하는 동아시아 지역의 수직적 분업체제 내의 농업주변부로 설정하려는 일본의 정책에 동조하는 것이었다.註6) 그러나 60년대 미국의 대한정책 기조는 군사우위정책에서 발전정책으로 전환된다. 미국은 장면정권이 자유주의적이고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긴 하지만, 너무 허약하고 무능력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사전에 군부쿠데타의 가능성을 잘 알지 못했지만, 곧 이를 근본적인 개혁을 시도하려는 진정한 혁명이라고 평가했다. 미국은 국제적으로는 공산진영의 개발 공세, 국내적으로는 자국 경제사정의 악화에 대한 대응책으로서 한국에서 국가건설 및 경제발전의 자본주의적 접근의 성공을 입증하는 것을 과제로 설정하고 박정권을 지원했다. 이리하여 남북한 체제경쟁은 일국적 차원을 넘어 반공연합과 공산연합, 이 두 개의 발전안보연합간 체제경쟁의 한 부분으로서 진행된 것이다. 미국의 동아시아지역 통합의 일본중심주의 전략도 변화되었다. 50년대 한일관계에 대한 미국의 정책이 일본의 부흥에 한국이 복무하도록 짜여진 것임에 반해, 60년대에는 일본이 한국을 도와주도록 전환되었고, 한일간 국교재개는 미국의 후원에 절대적으로 힘입어 실현되었다. 한일 국교재개는 거액의 유무상자금 도입면에서는 물론, 기술과 시장 접근의 면에서도 한국의 경제도약을 위해 불가결한 원동력이 되었다.註7)1960년대 중엽 한국의 경제도약을 가능케 한 또하나의 국제적 계기는 베트남전쟁이었다. 한국의 참전은 단순히 미국의 요청에 의해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박정희의 최초 방미 이래 박정권은 전쟁을 경제도약과 안보목표 달성을 위한 지렛대로 활용하기 위해 줄기차게 미국과 협상을 벌였고, 나름대로 목표 달성에 성공했다. 그리하여 1966년은 미국의 원조와 경제개혁 지원, 한일 국교재개, 그리고 베트남전쟁 참전 등으로 한국의 경제적 도약이 시작되고, 정치안보적 측면에서도 박정권이 안정과 자신감을 얻음으로써 한국 발전국가 자본주의 역사의 중요한 전환점이 마련된 시기였다.註8)미국은 초기에 박정권이 정치적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학습하도록 순치시키는 역할을 많이 한 것이 사실이다. 박정권이 군정연장 기도를 포기하고 선거를 치르도록 결정적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미국이었다. 그러나 한국의 정치·경제 발전에서 미국이 수행한 역할에는 심각한 모순이 있다. 한국이 베트남 방어를 위한 더없는 협력자로 되면서부터는, 박정권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은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이후 미국이 베트남에서 철수하고 중국에 접근함으로써 동북아 냉전체제는 크게 허물어지게 되었는데, 이러한 미국의 탈냉전 ‘햇볕노선’과는 반대로 오히려 박정권은 냉전분단체제와 권위주의 정권을 더욱 심화시키는 대북 적대적·경쟁적 산업화 노선으로 치달았다. 그러나 70년대에 균열을 보였던 한미 안보발전연합도 70년대말 80년대초 권위주의체제의 반동적 재편을 미국이 지원함으로써 다시 공고화된다. 그렇지만 이 화해도 예전 형태로의 복귀는 아니었다. 미국은 이제 한국을 냉전의 동맹자로부터 개방의 표적으로 삼았다. 한국은 개발연대의 ‘봉쇄자유주의’와는 전혀 다른 세계경제적 조건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註9) 3. 발전딜레머 국가의 취약한 규율, 권위주의적 자의주의와 보수주의 한국 발전국가모델은 자이레로 대표되는 약탈국가모델이나, 인도네시아·필리핀 등의 연고자본주의(crony capitalism)모델과는 달랐다. 국가는 그 정당성 원리를 경제발전에 두었으며, 이를 위해 재벌을 키움으로써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을 분리시켰다. 이는 발전국가가 나름대로 자기규율을 가진 국가임을 의미한다. 뿐만 아니라 발전국가는 재벌이 경제적 실적을 낳도록 규율을 행사하였고, 세계경제로의 전략적 통합정책을 구사했다. 이로 인해 발전국가모델은 경제발전 성과가 국민적으로 확산되는 메커니즘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국가주의적 동원형 발전체제에서 규율기제는 매우 취약한 것이었다. 첫째, 발전국가모델은 경제적 규율기제의 중심을 국가가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국가의 규율이 문란해지면 경제 전체의 규율이 문란해지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나아가 경제과정뿐만 아니라 정치과정도 국가중심주의에 종속되어 있다. 그러므로 정치·경제 질서의 규율이 국가권력에 매달려 있는 구조에서, 사회를 규율하는 국가는 누가 어떻게 규율하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둘째, 규율기제의 중심을 국가가 장악한 것은 ‘약한 사회’라는 시민사회의 낮은 발전 수준에 기인한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부분적인 설명에 불과하다. 발전국가모델에서 자유와 공정은 사회통합의 독자적 가치가 아니었다. 발전국가는 경제발전이라는 결과적 목표를 최고의 정당성 원리로 내세우고 심지어는 강요하면서, 시민사회의 자율적 규율기제의 발전을 위에서부터 억압해온 측면이 있다. 국가가 그 정당성 원리 자체에서 법을 위시한 제반 사회규칙을 준수하지 않은 것을 가볍게 여기고, 경제발전을 지상명령으로 하여 독재와 인권 억압, 규칙 파괴를 정당화할 때 사회 전반의 기강이 얼마나 흐트러질지는 명약관화한 일이다. 그러므로 사회의 규율기제 중심을 장악하고, 오로지 경제발전만을 최고의 정당성 원리로 내세움으로써, 발전국가의 자기규율이 취약한 것이 발전국가모델의 기본적 문제점이며, 이로부터 권위주의적 자의주의와 보수주의, 정치적 독재와 경제적 독점의 보수적 지배유착구조, 부패사슬을 확대재생산하는 경향이 나오게 된 것이다.註10)사회질서 이완의 이면에 있는 것이 무책임한 개인의 탄생이다. 룰이 마비되고 사회질서가 구성원들에게 자유와 공평한 기회를 제공해주지 못할 때 개인이 주체로서 성장할 것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자유와 권리가 없는 개인은 동시에 책임 없는 개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주체적 책임의식은 약해지고 책임은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바깥으로 돌려지게 된다. 한국 발전국가모델이 경제발전을 통해서 민주주의의 기초를 닦은 면이 있음을 부인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렇지만 민주주의의 기초는 개인들이 단지 소비자로서가 아니라 자율적 주체로 사고하고 행위할 수 있는 성찰적 능력에 있으며, 시민들간에 그러한 능력을 상호 인정받는 데 있다.註11) 그러한 의미에서는 발전국가모델은 오히려 민주주의의 기반을 약화시키고 허물어뜨려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비단 개발연대뿐만 아니라, 오늘날까지 사회 전반에 만연된 고질적 부정부패와 부실, 저신뢰의 문화, 그리고 후진 위험사회 양상 등 각종 사회병리 현상은 근본적으로 발전국가모델에 내재된 국가규율의 취약성, 권위주의적 보수주의, 사회적 기강 이완과 비주체적인 개인의 성장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註12) 산업정책의 문란 발전국가모델이 실효성을 갖는 중요한 요인의 하나는 장기적이고 일관된 정책을 수립·집행할 수 있는 관료조직의 자율성 및 내적 제도적 일관성, 그리고 공사협력으로 일컬어지는 기업집단과의 협력관계다. 그렇지만 한국모델은 일본과는 달리 관료제의 자율성이나 기업집단과의 연계가 아주 약하고 ‘대통령 지배형’이라 할 정도로 권위주의적 재량주의가 강했다. 60년대에는 그래도 경제기획원이 주도하는 경제관료조직이 경제정책의 수립·집행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70년대에는 청와대 비서실을 중심으로 하는 대통령 직할체제가 구축되어 관료기구보다는 대통령 개인에게 경제정책의 결정권이 집중되었다. 대통령의 결단에 의해 중화학공업화 정책이 수립됨으로써 경제기획원의 제3차 5개년 계획이 번복되었고, 그것을 관장한 기구도 기획원이 아니라 청와대 경제수석이 단장이 된 기획단이었다. 뿐만 아니라 권위주의적 재량주의는 국가기구 내부에서의 대통령 개인으로의 의사결정 집중뿐만 아니라, 산업정책의 수립·운용에서 국가가 민간부문과 제도적 관계를 형성하지 않은 데서도 찾을 수 있다. 한국에서 국가와 민간부문의 관계는 일방통행·명령하달식일 뿐만 아니라, 중간단체의 매개가 결여되어 있었다. 일본의 국가-기업관계를 관계의존형 구조라고 본다면, 한국은 수직적 권위주의 구조다. 중화학공업화는 국가와 재벌 간 정보의 상호공유와 의견의 상호조정을 통해서가 아니라, 국가가 사업을 재벌에 떠맡기는 식으로 추진되었다. 이러한 일방적인 투자유도와 불투명성 때문에 역설적으로 국가가 재벌들의 경쟁적 압력에 밀려 정책의 원칙과 일관성을 잃고 과잉 중복투자가 야기된 것이다산업정책의 문란상은 성격과 양상에서 차이가 있지만 60년대에도 많았는데, 주목할 것은 경제정책 주무기관인 경제기획원이 산업정책을 문란하게 한 경우가 많았다는 사실이다. 그 원인의 하나는 경제기획원장관이 정치자금 창구의 일익을 담당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외자도입기구와 외자도입법에도 허점이 있었다. 경제기획원장관을 위원장으로 하는 외자도입심의위원회는 국회 승인을 필요로 하지 않는 외자도입의 의결권을 가지고 있었고, 나아가 위원회의 의결이 기획원장관의 의결과 다를 때는 이를 국무회의의 심의를 거쳐 대통령이 결정하도록 했다. 그 결과 개발연대 20년간 기획원장관의 의견과 위원회의 결정이 달랐던 적은 한번도 없었다.註13) 뿐만 아니라 외자도입법에 따르면 차관도입 신청자는 2개월 이내에 한국산업은행에 담보를 제공해야 하지만, 담보를 충분히 제공할 수 없는 경우에도 기획원장관이 승인한 해당 차관으로 건설된 공장이나 토지를 담보로 제공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이러한 후취(後取)담보제하에서는 차관도입을 신청하여 기획원장관의 허가만 얻으면, 극단적으로는 자기 자금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도 기업을 세우고 키울 수 있었다. 이는 차관을 얻으면, 사업에 따르는 위험의 대부분을 국가에 부담시킬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 부실기업사태는 이로부터 비롯되었고, 구제금융으로 기업의 도덕적 해이는 더욱 조장되었다. 재벌의 기업지배 구조 발전국가는 재벌에 정책금융, 진입 규제 등으로 거액의 지대를 제공해준 데서 그치지 않았다. 국가는 족벌에 의한 기업지배 구조가 형성되도록 직간접적으로 개입하였다. 김대중정부는 재벌 구조조정 5대원칙으로서 기업경영의 투명성 제고, 상호 빚보증 해소, 재무구조 개선, 핵심부문의 설정과 중소기업과의 협력 강화, 지배주주 및 경영진의 책임 강화 등을 제시한 바 있다. 이는 곧 우리가 그만큼 무책임하고 불투명한, 규율이 취약한 기업 지배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인데, 그 주요 부분은 개발연대 발전국가의 개입 방식에 의해 조성된 것이다. 국가는 기업 이해당사자로서 노동을 배제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주주와 최대 채권자인 은행도 경영감시 역할에서 배제했다. 그리하여 재벌경영에 대한 사회적 감시를 지극히 취약하게 만들어 총수의 전제적인 족벌지배체제를 방치·조장하였다. 발전국가체제가 거시적 수준의 권위주의적 동원체제라면, 재벌경영은 이것과 닮은꼴을 한 미시적 수준의 권위주의적 동원체제라 할 구조와 성격을 가지고 있다. 국가가 재벌경영을 감시하기 위해 취한 조치로서 기업공개촉진정책이 있었다. 1972년 기업공개촉진법의 제정, 특히 1974년의 5·29조치와 이를 보완한 1975년 8·8조치는 대표적인 것이다. 이 조치에 의해 재벌 계열사 중 상당수가 기업을 공개하게 된 것은 사실이다.註14) 그러나 이 조치가 재벌경영에 대한 규율기제로서 갖는 의미는 지극히 제한적이었다. 첫째, 강력한 제도적 규제장치가 미흡했고 재벌들이 직접금융보다 주로 간접특혜금융에 의존하는 상황에서 이들 조치는 만족스런 효과를 낳을 수 없었다.註15) 둘째, 국가는 상장기업의 주식 구입 상한지분을 설정하여 지배가족의 경영권 보호정책을 취했다.註16) 이와 함께 주목되어야 할 것은 70년대에 이미 재벌 계열사간의 상호출자가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는 사실이다. 족벌지배체제는 단순히 소유지분에 의해서가 아니라 상호출자의 관행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었다.註17) 재벌 총수의 그룹 총괄조직이자 친위부대라 할 수 있는 기획조정실도 1970년대 후반경에는 재계 전체로 확산된 것으로 보인다. 족벌지배체제는 경제발전을 위한 공식적 명분 때문만이 아니라, 비공식적·음성적인 국가-재벌 유착에 의해서도 조장된 측면을 간과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권과 정치자금을 주고 받는 정경결탁구조에서, 독재정권의 입장에서는 총수로 창구를 일원화하는 것이 효율적이고 또 재벌의 처지에서는 기업의 성장이 총수의 로비 능력에 크게 의존했기 때문이다. 무책임·불투명 경영의 집중적 표현이라 할 비자금을 조성하여 정치자금을 제공하고 특혜를 얻어내는 사업은 총수의 각별한 능력이 발휘되는 영역이었다. 그리고 재벌경영이 불투명한 부패사슬에 연계되어 있는 탓에 기업의 비밀수호를 위해 다시 동족중심의 경영의 폐쇄성과 배타성이 강화되게 된다. 발전국가가 족벌적 기업지배 구조를 방치했다는 것은, 한국의 일본모델 모방이 부분적이었음을 말해준다. 일본 자이바쯔(財閥)의 경우는 2차대전 이전에 이미 (소유권은 분산되지 않았지만) 지배주주가족은 경영일선에서 물러나고 경영권은 전문경영인에게 위임되었다. 이에 반해 박정희정권은 재벌육성 측면에서 일본모델을 모방하였으면서도, 혈연적 유대가 가족의 틀을 넘어 기업경영에까지 침투하는 것을 방치하고 조장하였다. 한국의 재벌은 일본 메이지시대 제1단계 재벌에 가깝다. 이렇게 혈연관계를 떠나면 인간관계의 신뢰도가 매우 낮아지는 한국의 저신뢰 문화의 낡은 전통이 기업경영의 핵심구조에서 온존된 것이다. 그러므로 재벌체제의 지양은 기업경영에서 권위주의적 동원체제의 지양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전근대적 ‘연고주의’(patrimonialism)의 지양이 될 것이다.註18) 금융의 불구화 한국의 금융산업은 압축성장과정에서 민간부문의 자율적 통치씨스템의 저발전이 확대재생산된 발전국가모델의 최대 취약지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발전국가모델에서 은행의 소유권과 인사권은 정부가 장악하였고, 은행은 정부의 산업정책 기준에 따라 여신 배분을 수동적으로 집행하는 실무창구에 지나지 않았다. 이처럼 은행이 독자적으로 자신의 권한과 책임을 가지고 금융써비스를 생산하고 판매하는 자율적 경제주체로 형성되지 못할 때, 스스로 우량기업을 발굴하여 신용을 기반으로 장기적 투자를 행할 유인을 갖지 못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물론 여신관리제도가 일정한 역할을 수행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한국에 고유한 것으로 알려진 이 제도에 의해서 은행은 어느정도 기업경영을 감독하긴 하였다. 그러나 여신관리제도는 은행과 기업 간의 자율적인 관행으로 발전된 것이 아니라 정부에 의해 위로부터 만들어진 것으로서, 그 주요한 목적은 재무구조의 개선과 편중 여신에 의한 경제력 집중의 완화에 있었다. 다시 말해 여신관리제도는 은행이 독자적인 기업으로 설 수 있게 유인이 부여된 제도가 아니었음은 물론이고, 기업경영을 감시하는 측면에서도 통제력이 매우 취약한 제도였다. 그리하여 관치금융과 정책금융 체제는 은행의 불구화를 초래했고, 그 집중적 표현의 하나는 은행 부실채권의 누적 현상이었다. 은행은 엄청난 저리정책금융을 재벌에 제공하면서도 재벌경영이 부실에 빠지면 이를 제재할 수 있는 유인도, 능력도 갖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기업이 정상화될 때까지 부담을 떠안거나 중앙은행의 발권력에 의존하여 부실채권을 정리할 때는 그 손실을 국민 부담으로 전가하였다. 그리고 또 이런 와중에 은행이 퇴출되는 일은 없었다. 일본의 발전주의체제를 모방한 한국은 금융씨스템에서도 시장논리에 맡기지 않고 경제발전을 위해 정부가 금융을 통제했다는 점에서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동일한 발전주의체제라 하더라도 양국의 금융씨스템은 중요한 질적 차이를 보였다. 일본형 발전주의체제에서 은행은 자신의 권한과 책임을 가진 독자적인 경제주체였고, 은행이 기업에 대해 자발적 관행을 통해 관계 투자를 하고 기업경영을 감시하는 주거래은행제도가 발전되었다. 일본의 주거래은행은 거래기업에 대해 대출비중이 높을 뿐만 아니라, 주식의 보유자인 동시에 거래기업의 핵심 경영정보를 확보·평가하여 금융계에 공급하는 감시 역할을 했다. 일본 주거래은행의 기업에 대한 감시 역할이 가장 분명하게 나타나는 것은 기업이 경영에 실패했을 때의 은행의 역할에서다. 거래기업이 경영위기에 처했을 때, 주거래은행은 구제금융을 제공할 것인지 청산 절차에 들어갈 것인지를 스스로 결정한다. 그리고 기업이 부실화되었을 경우 직접 경영에 관여하여 경영진 교체, 경영전략 수립, 기업정리 등 기업의 구조조정 작업을 수행한다. 이처럼 은행이 자율적 경영주체이고, 은행과 기업 간에 자발적인 주거래은행제도가 형성·발전되는 상황에서 일본의 국가 금융통제 방식도 한국과는 달랐다. 일본의 국가는 신규지점 허가 규제 등 은행이 자율적인 경제주체로 금융써비스를 발전시키고 기업경영에 대한 감시를 철저하게 하는 유인책을 쓰는 방식으로 개입하였다. 금융부문에서 민간제도의 발전을 촉진하고 이것과 상호작용하는 방식으로 개입하는 이같은 시장증진적(market augmenting), 금융제한(financial restraint)적 개입방식註19)은, 은행의 불구화를 초래한 한국의 시장대체적·관치금융적 개입 방식과는 중요한 질적 차이가 있다. 그리하여 한국·일본 모두 국가의 금융통제는 대규모 지대의 창출에 의해 새로운 부를 창조하고 이것이 국민적 이익으로 확산되도록 하는 데 기여했지만, 한국의 정책금융체제의 경우 인위적으로 형성된 지대의 큰 부분은 민간은행의 수중에 귀속되어 자율적 은행씨스템의 발전을 위한 유인으로 작용하지 못하고, 정치권의 정치자금 축적과 재벌의 비생산적인 투기적 축적으로 흘러들어갔다. 노동 배제와 재벌헤게모니 한국의 발전국가모델이 노동참여의 배제를 기본 특징으로 하고 있었다는 데 대해서는 긴말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발전국가의 노동통제는 노동계급의 정치활동을 금지시켜 경제정책의 결정과정에서 배제했음은 물론이거니와, 노동조합에 대한 행정적 통제와 복수노조 금지, 기업노조주의에 의해 기업수준에서도 자본의 독점적 소유권을 보장하였다. 대노동관계에서 발전국가에 의한 이같은 독점적 자본권 옹호는 재벌 주도 경제발전을 위한 온실적 배양기를 만들어주었지만, 노동기본권의 저발전을 가져오고 재벌경영의 규율기제를 취약하게 만든 요인이 되었다. 행정관청이 노조의 설립과 해산을 좌우하는 행정적 통제는 1963년의 개정 노동법에 의해 구축되었다. 그리고 1971년에는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에 의해 노동청이 모든 단체교섭과 노동쟁의를 강제 조정·중재할 수 있게 되었고, 73년에는 산별노조의 단체교섭권을 폐기함으로써 기업노조체제가 만들어졌다. 기업단위노조는 산별노조와 한국노총에 소속되어 있으면서도 이들 상위조직과의 종적 연계가 매우 취약할 뿐만 아니라, 단위노조간의 횡적 연계 또한 취약했다. 노조에 대한 행정적 통제, 기업별 노조, 복수노조 금지, 그리고 정치활동 금지의 노동통제체제 위에서 국가는 한국노총을 노동 억압과 포섭을 위한 중앙조직으로 삼았다.註20)노동시장제도는 분산형·다원주의형·양극화형·협력주의형 등 네 유형으로 구분해볼 수 있다. 분산형은 국민정치 수준에서나 고용주와의 관계에서나 노동운동에 대한 제약이 아주 크고 운동도 분산되어 있다. 다원주의형은 다소 종속된 상황이지만, 노동의 조직화가 상당히 진전된 경우다. 양극화형은 노동운동의 전통과 기반이 두터워 영향력이 크지만, 전국적 수준의 협력적 해결을 강제할 수준은 되지 못하는 경우다. 협력주의형은 조직화 노동의 정치력으로 전국적 수준의 협력을 강제할 수 있는 유형이다. 발전국가체제하의 한국의 노동제도는 분산형에 속한다.註21) 이는 비교적 관점에서 볼 때, 한국의 발전국가모델이 얼마나 노동억압적 유형인가를 잘 말해준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국민경제에서 차지하는 재벌의 경제력 집중도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높다.註22) 그러므로 한국 발전국가모델만큼 극단적으로 대자본이 압축성장하고, 반면 노동참여가 배제된 발전유형을 찾기는 어렵다. 이는 국가-기업관계에 초점을 맞추어온 발전국가 접근에서는 간과해온 경향이 있지만, 한국 발전국가모델의 근본적 특징이자 발전모델의 진보적 전환을 어렵게 만든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80년대 이후의 한국 경제구조 전환의 기본선은 노동부문을 비롯한 시민사회의 새로운 도전에도 불구하고 노동통제가 지속되면서 압축성장의 결과 국가-재벌의 힘관계가 재벌 우위로 전환되는 과정이었는데, 이 신자유주의적 경로는 노동배제적 국가-재벌 지배연합 주도라는 한국 발전주의체제 발전딜레머의 관점에서 파악될 수 있을 것이다. 4. 맺음말: 국가주의와 시장주의를 넘어서 발전국가 자본주의는 그 고유한 위기 경향을 가지고 있고, 수차례의 위기를 경험했다. 그렇지만 그중에서도 1978~82년의 위기는 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 위기는 물론 유신체제의 파국과 그 반동적 재편이라는 정치적 측면에서 중요하지만, 그와 동시에 경제적인 측면에서 한국 경제정책과 경제질서 패러다임의 신자유주의적 선회라는 의미에서 전환적 의미를 갖는 것이다. 그리하여 80년대초 이래 한국에는 국가라는 낡은 우상이 후퇴하고, 그 자리에 시장이라는 새로운 우상이 들어앉기 시작했던 것이다. 물론 이같은 국가주의의 해체와 시장주의의 진출은 단번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민간투자와 금융을 자유화하고 노동시장을 유연화하며 국민경제의 국경을 허무는 것이 기본선이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국가의 자리를 대신 차지한 것은 순수한 시장이 아니었다. 우리가 본 바와 같이 발전국가는 재벌을 키웠으며, 그리하여 국가의 자리를 대신 차지한 것은 단순한 시장이 아니라 재벌 주도 시장경제였다. 여기서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국가의 퇴각과 시장의 진출이라는 발전국가 자본주의의 신자유주의적 질서로의 전환 과정에서, 재벌의 투명한 책임경영을 위한 개혁, 나아가 기업 소유지배 구조를 선진적으로 개혁하려는 의지와 노력이 얼마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물어야 할 것은 국가기구의 내부 부패와 국가-재벌의 부패고리를 근본적으로 청소하고 기강을 바로잡아, 국가 능력을 재구축할 수 있는 발본적 개혁이 얼마나 이루어졌는가 하는 점이다. 요컨대 국가주의적 발전주의체제의 부정적 유산을 혁파하고 새로운 민주적 발전모델을 창출하기 위해 얼마나 진지하게 노력했는가 하는 점이다. 돌이켜보면 한국은 80년대초 이래 개방적 시장-재벌자본주의의 길로 나아가면서, 종래의 국가중심적인 경제규율 메커니즘도 폐기하였다. 그러면서도 발전국가모델의 부정적 적폐가 가장 견고하게 안장되어 있는 국가부문과 재벌부문의 획기적인 개혁은 전혀 단행하지 않았다. 그럼으로써 국민경제의 규율기제는 혼란과 공백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국내 개혁이 지체되었을 뿐만이 아니다. 시장주의자들은 변화된 세계경제 상황도 잘 알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무분별하게 금융시장을 개방하여 위기를 자초했고, 개방경제에서 위기의 양상과 그 해법은 종래와 같은 것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시장주의와 세계주의에 의해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를 단순 대체하고 있는 현정부의 경제정책 노선은 이 엄연한 교훈을 외면하고 있으며, 국가주의적 민족주의의 폐해만 볼 뿐 국가의 재벌규율에 의해 압축성장을 이루었던 그 강점을 보지는 않는다. 현재의 김대중모델은 박정희·마하티르 모델의 단순 대립물일 뿐, 결코 그 지양이 아니다. 과거의 국가주의적 동원형 발전주의체제가 우리의 미래가 될 수 없음은 분명하다. 우리는 동원체제로부터 새로운 경제질서로 나아가야 하며, 새로운 경제질서는 민간부문의 자유와 책임을 바탕으로 밑으로부터 민주적으로 재구축되어야 한다. 이에 부응하여 우리의 사유도 동원적 사유에서 질서적 사유로 전환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 발전모델에 대한 근본적 성찰은 지난날의 국가주의적 민족주의의 곤경과 시장주의-세계주의 개혁 실험의 실패에 대한 성찰을 동시에 요구하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는 국가의 우상과 시장의 우상을 함께 넘어서는 새로운 상상력과 실력이 필요한 것이다. �� �後後� �짯後� �後� �碻碻碻� �碻碻� �� �� ┛┗ �� �� �� �� �後後� �碻�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