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워싱턴사과) 날 짜 (Date): 1999년 1월 17일 일요일 오전 05시 57분 47초 제 목(Title): 퍼온글/영화로 보는 한국현대사 영화로 보는 한국 현대사 올리는 이 서문: 이 글은 연대 교지 93년 봄호에 실렸던 글입니다. 지은이 서문: 이문형 / 당시(1993) 신씨네영화사 기획실장 먼저 이 글을 읽을 이들에게 일러둘 말이 있다. 이 글은 글쓴이가 한때 '입에 풀칠할 방편'으로 어떤 라디오 프로그램에 글을 써주고 있을때 얄팍한 생각으로 적어본 것이다. 그런데 덜미를 잡혔다고나 할까, 제대로 써주길 원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으니 제 꾀에 제가 넘어간 셈이다. 어쨌든 오늘날 영화만큼 예술대접을 받지 못하면서도, 그와 동시에 만인의 관심을 한몸에 모으는 예술도 없다. 아놀드 하우저는 20세기는 영화의 시대라고 했던가 직접 영화일을 하면서 때로 당혹하게 되는 것이 영화사(史) 책이든 이론서적이든 관객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말들이 되고 있지만 영화를 '즐기는'사람들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다는 것이다. 이 글은 어줍쟎게나마 영화를 '즐기는'사람들과 그 사람들의 시대를 훑어보려는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영화 흥행의 짤막한 역사일지도 모른다. 언제, 어떤 영화를 많은 사람들이 즐겼는가? 이 문제는 그냥 보아넘길만한 것은 아니다. 글쓴이의 욕심 같아선 여러 분야의 학문에서 이 문제에 관심을 가져줬으면 한다. 이 견강부회 투성이의 글을 쓰는것은 이 분야에 누군가 다리를 놓아줄 때까지, 깊은 개울에 흔적도 보이지 않을 징검돌을 한 개 던지는 심정에서이다. 그리고 이 글은 같이 영화 음악 프로를 맡았던 MBC의 김정수, 조일수 두 선배와 같이 쓴 것이나 다름없다. 왜냐하면 두 사람이 없었더라면 이 글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분들도 아마 나와 같은 심정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새삼 고개를 든다. ----------------------------------------------------------- [정영음으로 밝아오는 새벽을 위하여] 영화로 보는 한국 현대사 I 지난해처럼 국회의원선거와 대통령선거가 있었던 1971년은, 4월 27일에 실시될 대통령선거의 열기로 술렁대면서 시작되었다. 40대 기수론과 새로운 정치세대의 선두주자로 등장한 신민당의 김대중 후보와 민주공화당의 박정희 후보의 처음이 자 마지막 대결은 온 국민들을 정치 열풍 속에 몰아넣고 있었다. 공식적인 흥행기록이 작성되기 시작한 첫 해인 1971년, 10만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영화는 외화 29편과 우리 영화 7편. 최고의 흥행작은 쟝 들라노와 감독, 앤소니 퀸, 지나 롤로 브리짓다 주연의 <노틀담의 곱추 TheHunchback of Notre Dame>. 조셉 코튼 주연의 <노틀담의 곱추>도 유명하지만 일반인들에게 알려진 것은 앤소니 퀸 주연의 <노틀담의 곱추>로, 이 영화는 원래 1956년에 만들어진 영화였다. 리바이벌된 영화가 흥행 1위를 차지하는 것은 아주 희귀한 케이스이 긴 한데, 당시에는 외화수입이 쿼터제로 한정되어 있어 관객들의 취향은 수입업자들의 손에 맡겨져 있었다. 지금은 한해에 약 2백편 가량의 외화가 수입되지만 당시만해도 80편 가량에 불과했다. 경제지상주의의 시절이라 영화를 수입하는 데에 부족한 달러를 쓸 수 없다는 당국의 견해가 지배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수입업자들은 값이 싸고 이문이 많이 남는 흘러간 영화들을 리바이벌 상영해서 돈을 쓸어 담았다. 1971년만 해도 마릴린 먼로의 <돌아오지 않는 강>, 제임스 딘의 <이유없는 반항>, 그리고 전형적인 헐리웃 뮤지컬 <남태평양>등이 리바이벌되어 흥행 10위 안에 올라섰다. 이러한 리바이벌 영화의 강세는 꽤 오랜 기간동안 지속된다. 이런 영화들은 왠지 그 영화가 상영되던, 어려웠고 힘든 시절들 을 아렷한 기억 속의 멋진 시퀀스들로 장식하기 마련이다. 그것은 복고풍과는 또 다른 정서이다. 일종의 착시현상이라고나 할까, 관객들은 극장 문을 나서면서 왠지 자신들이 살고 있는 극장 밖의 거리가 낯설게만 느껴진다. 그리고 마릴린 먼로가 고혹스런 목소리로 불러주는 '리버 오브 노 리턴'을 되새긴다. 힘들었던 시절들은 이미 돌아오지 않는 강을 따라 저 멀리 흘러가버린 것이다. 1070년대의 초반은 미국이나 우리나라나 새로운 시대로 접어드는 시기였다. 당시 아직 확실한 정통성을 확보하지 못한 박정희 정권은 근 10년에 가가운 철권통치 기간동안 재야세력과 기존 정치세력, 그리고 대학가의 도전을 효과적으로 물리치고 마지막 승부를 통해 장기집권의 기반을 다지고자 하고 있었다. 대통령 선거에서의 승리와 함께 대학가 변혁세력의 기를 꺾고자, 군사정권은 교련교육을 시행하기로 결정했고 당연히 대학가는 교련 반대를 내걸고 총궐기한다. 이 교련 반대 시위로 서울대가 휴교를 하는 등 대학가는 진통을 겪게 된다. 미국 역시 젊은이들에게는 힘든 시절을 맞고 있었다. 미국은 월남전이라는 진창에 깊숙이 빠져 허우적대면서 젊은이들은 전쟁터로 내몰았는데, 반전시위와 시위현장에서 불태워지는 성조기의 모습은 세계국가 아메리카의 환상에 빠져있던 젊은이들은 허무와 좌절의 수렁으로 몰아넣고 말았다. 이즈음 헐리우드에 새로운 영화 조류가 등장한다. 우리나라엔 개봉되지 않은 데니스 호퍼의 <이지 라이더>를 앞세운 아메리칸 뉴 시네마이다. 아메리칸 뉴 시네마의 실체를 가장 먼저 우리에게 선보인 것은 마이크 니콜슨 감독의 <졸업>이었다. 동부의 명문대학을 나와 로스앤젤레스의 집으로 금의환향한 벤자민. 그러나 그는 자신의 가정을 포함한 서부의 신흥 부르조아지 사이에서 무기력해지고 만다. 그들 기성세대가 무어라 웃고 떠들든 생일선물로 받은 아쿠아렁을 착용하고 물속에 들어가 있는 편이 오히려 편안하다. 그때 흐르는 음악이 70년대의 상징적인 뮤지션 사이먼과 가펑클의 'The Sound of Silence'이다. 그는 무기력과 침묵 속에서 부르조아지 사회를 떠돌다 로빈슨 부인의 유혹을 받는다. 그러나 로빈슨 부인의 딸 일레인이 나타나자 그녀와의 진실한 사랑으로 고민한다. 그리고 알다시피 벤자민은 일레인의 결혼식날 교회로 쳐들어간다. 대형 십자가로 기성세대의 출구에 빗장을 질러버린 두 남녀는 버스를 타고 떠나간다. 기존의 헐리웃 스타 개념과는 거리가 먼 평범하고 왜소한 더스틴 호프만. 그는 앤티 히어로로서 아메리칸 뉴 시네마가 무엇이고 변모한 미국의 플라워 세대(반전운동의 일환으로 진압경찰의 총구에 꽃을 꽂았다고 해서)의 분노가 어떤 것인가를 말하고 있다. 마이크 니콜스는 이제 새로운 영화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보여준 것이다. 그러나 대학은 벤자민처럼 기성세대의 출구에 빗장을 지르지 못하고 좌절하고 만다 서울에서는 교수들까지 학원자주화 선언을 하고나서 대학가는 70년대의 위상을 정리 하지만 10월이 되면서 서울 일원에 위수령이 선포되고 학원은 군에 의해 점령되고 만다. 그리고 학생들은 닫힌 교문을 뒤로 하고 학교앞 동시상영 극장에서 사이먼과 가펑클의 'The Sound of Silence'에 분노를 실을 뿐이었다. 그리고 광주에선 미니 스커트를 입은 죄로 여덟명의 아가씨가 구속된다. 이 무렵 지금은 정치영화의 대표적인 감독으로 소개되는 그리스의 코스타 가브라스의 영화 한 편이 국내 최초로 소개된다. 제목은 <생사의 고백,The Confession>. 코스타 가브라스는 알다시피 1988년 가 상영되어 해금될 때까지 기피인물로 찍힌 문제감독이었다. (그의 영화 <계엄령>은 아직까지도 수입이 거부되고 있다) 그러나 당시에는 어느 누구도 코스타 가브라스를 모르고 있었다. <생사의 고백>은 그의 단골 배우인 이브 몽땅 주연의 영화로 어느 공산주의 국가에서 이유도 모르는 채 비밀경찰에 체포된 지식인이 겪는 고초를 그리고 있다. 그는 어느날 아침 비밀경찰에 의해 아무런 해명도 없이 연행된다. 그리고 인간으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온갖 고문끝에 생사의 기로에 서게 된다. 그러다가 비밀 경찰은 착오로 당신을 체포했다며 여지껏 겪은 일을 비밀로 하라고 한 뒤 그를 풀어준다. 당시 검열당국은 코스타 가브라스의 존재를 모른채 <생사의 고백>이 공산정권의 비리를 파헤친 반공영화라고 판단해 이 영화의 수입을 허가해 준다. 그런데 이 검열 당국의 무식함은 저 멀리 유럽에 있는 코스타 가브라스를 궁지에 몰아넣고 만다. 코스타 가브라스는 이 영화를 이념을 떠나서 시민의 인권을 억압하는 모든 세력에 대한 저항의 표시로 만들었는데, 유럽의 좌파 지식인들은 공산주의 형제 국가를 비난했다고 해서 그를 궁지로 몰아넣고 있었다. 물론 코스타 가브라스는 자신의 연출 의도를 열심히 설명했는데, 좌파 지식인들의 한 마디에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당시 좌파 지식인들은 이렇게 말했다. "당신의 의도는 알겠는데, 이건 어떻게 생각 하오? 아시아의 극동지방에 있는 독재국가 한국에서 당신 영화를 반공 교재로 삼고 있는데 대해서 말이오......" 검열당국의 무식함은 코스타 가브라스를 장기간 동안 곤혹스럽게 만들고 만 것이다. 1971년은 월남전이 격렬하게 전개되던 때로, 한국군의 작전 지역을 캄보디아로 넓힐 것인가로 논란이 있던 때이기도 했다. 그리고 언론에는 보도되지 않았지만 미군의 밀라이 마을 학살사건에 버금가는 한국군의 집단학살 사건이 세계여론을 시끄럽게 하던 때이기도 한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영화가 상영되기 전 보여주는 대한뉴스에서 한국군의 전과를 필름으로 보여줘 승전국의 쾌감을 맛보게 해주었다. 그래서 그런지 60년대 최고의 흥행장르였던 전쟁영화들은 70년대로 들어서도 사랑을 받고 있었다. 일본의 진주만 기습을 영화로 옮긴 <도라, 도라, 도라>는 헐리웃 역사상 '가장 많이 돈을 까먹은 영화'10위안에 드는 작품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제법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조지 스코트가 열연하고 미래의 거장 프란시스 코폴라가 각본을 써 아카데미 각본상을 수상한 <패튼 대전차 군단>이 개봉된 것도 이해였다. 골수까지 스며든 군사문화는 세계적으로 시들어가는 장르인 전쟁영화 앞에 아직도 관중들을 묶어 놓고 있었다. 영원한 흥행장르인 러브스토리 역시 흥행차트의 상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줄리 앤드류스, 록 허드슨 주연의 <밀애, Darling Lily>가 <사운드 오브 뮤직>의 인기에 편승하여 대 히트를 기록했고, 연말에 개봉된 <러브 스토리>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몇 가지 장면을 보여준다. 부모의 반대로 결혼할 수 없게 된 올리버와 제니는 자기들이 스스로 주관하는 결혼식을 선보인다. 주례없이 한마디씩 결혼에 임하는 각오를 나누는 두 사람의 결혼식 장면은 자유연애와 결혼의 순수성을 주장하던 당시의 젊은층에 굉장한 호소력을 가졌던 것이었다. 다투고 난 후에 제니가 올리버에게 울면서 한 말 "사랑은 후회하지 않는 것이예요 . Love means not having to say you're sorry"는 70년대의 새로운 애정관을 뜻하기도 한다. 예식장에 선 신부들이 한번씩은 <졸업>에서처럼 누군가 자기를데려가주기를 꿈꿨던 타율적인 결혼의 시대가 무너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우리 극장가는 이 해에 정소영 감독, 문희, 신영균 주연의 <미워도 다시 한번>을 마지막 작품으로 내놓는다. 지리했던 구체제 하에서의 신파가 한결 세련된 서양식 신파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이른바 <대완결편 미워도 다시한번>. 그리고 새마을 영화의 원조인 김희갑 주연의 <팔도강산>씨리즈가 4편으로 <내일의 팔도강산>을 선보이는데 16만 관객을 동원, 우리영화 흥행 1위를 차지했다. 액션배우 박노식은 전성기를 맛보고 있었는데 용팔이 시리즈등의 영화를 내놓고 있었다. 지금은 홍콩영화의 액션을 따라가지 못하지만 당시는 우리 영화팀이 홍콩영화계에 한 수 가르쳐주러 가던 시절이었다. 이해 최고의 액션영화 흥행작은 박노식의 <인간사표를 써라>. 70년대는 이렇게 온갖 장르의 곤혹스러움으로 일금 사백원짜리 극장에서 막을 올린 것이다. 영화로 보는 한국 현대사 II 첫해인 1971년은 모색의 시절이었다. 그리고 1972년은 우리 현대사에 암울한 그림자를 드리운 질곡의 해였다. 그리고 정치적으로나 영화적으로나 복고풍의 시대였다. 김대중과의 백만표 싸움에 놀란 박정희는, 10월 17일 국민의 선거권을 제한하고 드골식의 비상대권을 골자로 하는 유신헌법의 도입을 위해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와 정당을 해산한다. 그리고 11월의 유신헌법의 통과, 12월의 통일주체 국민회의 대의원 선거를 거쳐 이른바 '체육관 대통령선거'의 시대를 확립한다. 그것은 숨돌릴 사이없이 진행된 어두움의 시작이었다. 복고풍이란, 현실에 대한 비전을 어디서도 찾을 수 없을 때, 당대인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암울함의 그림자이다. 10월 유신이 있기 얼마전 국내 유일한 70밀리 상영관이던 대한극장에서 <벤허>가 리바이벌 된다. 때아닌 스펙타클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아다시피 스펙타클이란, 칼라TV와의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50년대의 헐리웃이 들고나온 무기이다. 가로 세로 2:1의 대형 시네마스코프 화면에 펼쳐지는 스펙타클 영화의 세계는 관객들을 또 다른 생생한 세계로 끌고 갔다. 윌리엄 와일러는 <벤허>의 시사회를 끝내고 이렇게 말했다. "신이여. 진정 제가 이 영화를 만들었습니까?" 영화를 만든 감독마저도 자신이 만든 세계의 위력에 놀라고 있다. 암울한 시대의 국민은 <벤허>의 세계에서 위기감과 비분강개함, 그리고 마지막의 통렬한 복수에 이르기까지 스펙타클의 세계로 빠져든다. 그리고 해를 넘기면서까지 스펙타클의 세계는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스탠더드 화면보다 더 박진감 넘치고 웅장한 시네마스코프의 세계는 전설을 만들고 관객들은 그 전설속의 영웅들의 모습에 빠져들고 만다. 그것은 모든 권위에 우선하는 아버지 독재자의 모습이었다. 진정한 아버지가 없는 사회에 온갖 거짓 아버지들이 찾아온다. <쿼바디스>와 <십계> 에 나오는 성서의 영웅들이, 그리고 <대장 부리바>와 <엘 시드>, <흑기사/Ivanho>가 수많은 깃발들에 싸여 위기-분노-통렬한 복수의 과정을 이어간다. 그리고 1972년 12월 비비안 리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다시 등장한다. 그리고 한국의 민주주의 역시 바람과 함께 사라진다. 이 시기에 죤 웨인이 쓰러진다. 죤 포드 감독과 함께 미국 서부영화의 간판스타이자 보수적인 미국을 상징하는 아메리칸 죤 웨인은 윈체스터 엽총을 한 손으로 쏘며 영화가 끝날 때까지 한번도 죽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실화를 바탕으로 한 <알라모 The Green Leaves of Summer>는 예외). 그러나 이 해에 개봉된 서부영화 <11인의 카우보이>에서 죤 웨인은 마침내 '비열한 악당'에게 등뒤에 총을 맞고 쓰러진다. 그는 카우보이가 모자라 열명의 아이들을 카우보이로 삼아 소를 몰고가다 악당에게 총을 맞고 죽은 것이다. 그리고 영화는 뒤에 남은 꼬마 카우보이들이 죤 웨인의 복수를 하는 것으로 끝맺는다. 죤 웨인이 꼬마들에게 복수를 부탁하다니! 서부영화는 이제 끝나고 만것이다. 관객들 역시 철저하게 죤 웨인의 죽음을 외면했다. 그 조짐은 아메리칸 뉴 시네마가 수정주의 서부영화를 들고 나왔을 때부터 엿볼수 있다. 조지 로이힐 감독은 <내일을 향해 쏴라/Butch Cassidy & The Sundance Kid> 에서 전설적인 총잡이 부치 캐시디와 선댄스 키드를 희극화시키면서 서부영화에 처음으로 앤티 히어로를 등장시켰다. 그리고 랄프 넬슨은, 켄디스 버겐 피터 스트라우스 주연의 <솔져 블루>에서, 백인 기병대에 의해 저질러진 인디언 학살을 그리고 있어 여지껏 영화와 TV에서 보여지던 기병대의 이미지를 확 바꾸어 놓았다. 당시에만해도 매주 TV에서는 카스터 장군이 이끄는 기병대 이야기가 방송되고 있을 때였다. 이때 아서 펜 감독, 더스틴 호프만 주연의 <작은 거인/The LIttle Big Man>이 개봉되는데, 백인이었다가 우연한 기회에 인디언이 된 더스틴 호프만은 바로 그 카스터 장군의 대학살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인디언으로 백인의 잔혹함을 증언한다. 케빈 코스트너가 <늑대와 춤을>이 되기 이십년전에, 더스틴 호프만은 작은 거인이 되어 미국의 양심에 통렬한 비난을 가한 것이다. 70년대말 핵개발 등의 독자 노선으로 사사건건 미국과 마찰을 일으켰던 박정희의 유신정권이 미국의 제국주의 정신을 대표하는 서부영화의 몰락과 함께 시작되었다 는 것은 우연치곤 심상치 않은 것이다. 그러나 이 순간까지도 미국은 정권의 후견인이다. 서부영화의 종말을 맞아, 영웅 죤 웨인은 이제 공화당 매파답게 새로운 역할을 찾는다. 월남전 특수부대의 영웅담 <그린 베레/The Ballad of Green Beret> 다. 그는 이제 인디언 대신 아시아의 원주민들을 상대한다. 월남에 파병을 한 우리 나라 국민 역시 그린 베레 죤 웨인의 옆에 서서 같이 정글을 달린다. 죤 웨인의 가장 친한 친구 레이건이 대통령이 된 80년대에 람보와 함께 베트남의 정글을 달렸 듯이. 이 무렵 프랑스 영화는 오늘날과는 달리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그것은 알랭 들롱이라는 걸출한 스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제시대와 전후의 관객들을 사로잡은 것은 쟝 르노와르나 쟝 콕도, 르네 끌레망 등의 감독, 그리고 제라르 필립과 쟝 가방과 같은 배우들이 활약하던 프랑스 영화였다. 물론 헐리웃 영화들이 양적으로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관객들의 가슴을 때리는 영화는 이들 프랑스 영화와 비토리오 데시카나 페데리코 펠리니가 버티고 있던 전후의 이태리 영화들이었다. 두차례의 세계대전 속에서 고초를 겪은 유럽인들의 영화가 한국전쟁을 겪은 우리들의 정서에 더 가까웠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런지 <맨발의 청춘>을 필두로 한 우리나라 갱 영화는 정서면에서 헐리웃의 필름 느와르보다 프렌치 갱 영화의 정서를 닮고 있다. 1971년에 수입된 <볼사리노>는 프렌치 갱 영화의 전형이다. 마르세이유를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부와 권력을 위해 갱의 세계에 뛰어든 지프레디(알랭 들롱)와 카페라 (쟝 폴 벨몽도)의 이야기다. 프렌치 갱 영화의 특징은 특유의 비장함이다. 프렌치 갱 영화의 주인공들은 <볼사리노>의 카페라처럼 성공의 문턱에서 대개 죽거나 버림받은 신세가 된다. 찰스 브론슨, 알랭 들롱 주연의 <아듀 라미>나 알랭 들롱의 <리스본 특급>역시 그렇다. 그리고 1973년에 리바이벌된 알랭 들로의 데뷔작 <태양은 가득히>역시 그 범주를 못벗어 난다. 70년대가 다 가도록 알랭들롱은 흥행의 보증수표로 통했다. <빅건>, <암흑가의 두사람>(1974), <볼사리노 2>(1975), <부메랑>(1977), <르지탕>(1978), <체이사>(1980), <레갱>(1980)에 이르기가지 그는 프렌치 갱의 전형으로 관객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는 눈물많은 국민들의 淚腺을 자극하는 비장한 시대의 스타였던 것이다. 당시는 관객에게 박수를 받기보다 눈물을 흘리게 하는 영화들이 더 사랑을 받았다. 그래서 영화업자들은 관객의 눈물을 자아내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워렌 비티, 나탈리 우드 주연의 <초원의 빛/Splendor in the Grass>도 다시 선보였다. 그리고 게리쿠퍼가 잉그리트 버그만을 떠나 보내고 파시스트 군대를 죽음으로 저지하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와 <슈베르트의 아베마리아>도 다시 선보였다. 그리고 몽고메리 클리프트가 우수어린 표정으로 출연한 영화 <젊은이의 양지/A Place in the Sun>도 각광을 받았다. <젊은이의 양지>는 데오도어 드라이저의 소설 <아메리카의 비극>을 영화로 옮긴 것인데, 가난한 애인의 도움으로 대학을 마쳤으나 가난에서 벗어날 돌파구를 찾지 못한 청춘의 비극을 그리고 있다. 클리프트는 어쩌다 자신이 다니는 회사 사장 딸의 사랑을 얻게 된다. 그러나 가난한 시절의 연인은 그의 아이를 임신 중이었고 그의 변화를 눈치챈 뒤 결혼을 재촉한다. 가난뱅이 가장으로서의 질곡과 상류사회로의 신분상승 사이에서 고민하는 클리프트. 그는 연인과 보트놀이를 갔다가 그녀를 죽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마침 보트가 뒤집어지는 바람에 수영을 못하는 그녀는 허우적댄다. 그는 주저한다. 그녀를 구해야되나? 망설이는 사이, 그녀는 죽는다. 하지만 그도 그녀를 죽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고, 최소한 죽었으면 하는 마음을 품었다는 것을 깨닫고 전기의자를 택한다. 이 영화는 우리 영화들이 여러번 베껴 먹은 신파영화의 원형이 된다. 60년대의 개발 독재끝에 어느 정도의 경제성장을 이루었지만 빈부의 격차는 이제 개인적인 차원의 것이 아니었다. 60년대까지 대학은 부와 출세의 통로였지만 군사정권의 10년 집권은 범죄적인 부의 축적만을 가능하게 했을 뿐이다. 범죄적인 구조는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이라는 청년이 근로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분신자살을 하게 만든다. 그리고 광주단지(지금의 성남)에서, 신촌의 중국집에서 죽음은 계속 이어진다. 무기력해진 젊은이들은 몽고메리 클리프트의 길을 갔고 아무런 죄책감없이 독재하의 기득권층에 편입되어 갔다. 그런 상황에서 <젊은이의 양지>와 그를 베낀 우리 영화들은 많은 관객들의 손수건을 적셨다. 질릴만치 많은 영화의 남자주인공들은 출세와 사랑 사이에서 헤매면서 관객의 한숨과 눈물을 얻어냈다. 그것은 현실이었기 때문이었다. 현실은 그 어느 허구보다도 신파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눈물의 세대는 1973년 연말에 찾아온 스웨덴 영화 <엘비라/Elvira Madigan>로 절정을 이룬다. 귀족출신인 장교와 하층계급의 줄타는 소녀 엘비라의 사랑. 그들은 낭만적인 애정의 도피행각 끝에 굶주림과 절망속에 마지막 피크닉을 간다. 그리고 나비를 쫓는 엘비라의 스톱 모션과 두방의 총성으로 영화는 끝맺는다. 그리고 관객의 가슴을 겨눈 그 총성과 함게 눈물 대신 사이비 예술과 오락의 시대가 온다. 영화로 보는 한국 현대사 III 1973년 한국영화계는 큰 변화를 맞는다. 그것은 외적인 변화와 함께 내적인 변화도 몰고온 지각변동이었다. 한국영화는 자멸의 길로 간다. 이른바 영화의 독과점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이 해 문화공보부는 영화사 설립을 허가제로 바꾸고 이른바 '메이저'회사를 제외한 소규모 영화사들을 정리한다. 이 후 1986년 미국의 무역통상 압력에 따라 영화업 허가를 신고제로 하기까지 우리나라 영화계는 20개 메이저 컴퍼니가 지배하게 된다. 이에 덧붙여 문화공보부는 우수영화 및 수출영화에 대한 포상으로 외화수입쿼터를 준다고 발표한다. 상금대신 외화수입쿼터를 준다는 것인데 그것은 곧 막대한 돈을 의미했다. 영화업자 정리후, 1년에 수입되는 외화편수는 한해 100편가량에서 30~40편으로 대폭 줄어든다. 그것은 그만큼 볼 영화가 없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기에 대충 비슷한 외국영화를 극장에 개봉하면, 코묻은 돈 담을 정부미 부대를 준비하기만 하면 됐다. 신이 난 독재시대의 독과점 제작사들은 상을 탈 수 있는 문예영화를 만들기에 혈안이 된다. 때아닌 심훈의 <상록수>가 나오고, <벙어리 삼룡이>가 나온다. 그리고 이 해에 창설된 영화진흥공사가 '진흥'을 위해 손수 막대한 물량을 들여 <들국화는 피었는데>, <증언>같은 반공영화를 만들어 모범을 보이자 상에 혈안이 된 제작사들은 그리로 몰려간다. 이런 반공영화들은 각급 학교의 강당에서 아주 싼 값을 받고 보여지기도 했는데 그것은 극장손님을 빼앗아 갔고 70년대 세대에게 한국영화에 대한 아주 부정적인 이미지를 심어 놓았다. 그리고 문교부는 한 술 더 떠 각급학교에 상을 탄 문예영화를 학생들에게 보여주라고 사발통문을 띄웠다. 학생들은 시험이 끝나는 날 으레 사열종대로 줄을 서서 극장에 갔다. 김진규 제작, 주연의 <성웅 이순신>, <상해 임시정부>, 그리고 거기에 덩달아 업자의 뇌물이 주효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벤허> 등이 이 시대의 영화 비망록이다. 이렇게 외화수입쿼터를 노린 시대착오적인 문예영화와 반공영화들이 다량으로 제작되자 그틈을 노리고 극장가를 석권한 것이 홍콩영화이다. 당시 헐리웃영화 역시 작품 경향이 일신되던 시기로 고만고만한 오락영화 이외에는 이렇다 할 작품을 내놓지 못하고 있을 무렵이어서 홍콩영화의 정상 진입은 순조롭기만 했다. 게다가 이소룡이라는 수퍼스타의 등장이 있었음에야... 앞서도 말했지만 당시의 홍콩은 아시아권에서마저도 영화 후진국을 면치 못했던 저급한 수준의 영화제작국이었다. 한국의 액션영화 감독들이 홍콩으로 초빙되어가서 영화를 만들기도 했을만큼 아시아의 영화강국인 한국과 일본의 기술을 배워가던 형편이었다. 쇼 브라더스가 당시의 홍콩영화의 모든 것이었는데, 이소룡의 등장과 함께 골든 하베스트라는 새로운 영화사가 등장해 홍콩영화의 새로운 장을 연다. 80년대 후반 시네마 시티가 홍콩 느와르의 시작을 선포한 것처럼. 이전까지의 홍콩영화는 왕우 주연의 일본 사무라이 영화를 본딴 검객영화가 주종을 이루었는데, 이소룡이라는 국제스타의 등장은 쿵후영화라는 쟝르를 만들어 냄과 동시에 흥행적으로 세련된 홍콩영화의 기틀을 닦았다. 73년 한해만해도 이소룡의 <정무문>, <당산대형>, 그리고 왕우의 <독행도>, 우리나라 정창화 감독이 홍콩에 가서 만든 <14인의 여걸>등이 10위권에 자리잡고 있을 정도이다. 이소룡의 인기는 가히 세계적이어서 이듬해에는 미국의 워너 브라더스사가 <용쟁호투>를 제작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소룡의 급작스런 죽음은 홍콩영화의 열풍을 멈추게 한다. 그리고 이소룡의 등장에 눌렸던 왕우 역시 옛날의 인기를 회복하지 못하고 주저앉고 만다. 그리고 홍콩영화는 성룡의 등장을 오랫동안 기다려야만 했다. 홍콩영화의 등장은 유신 초의 기막힌 상황에 많은 도움을 받은 바가 크다. 직접적인 선거가 아닌 간접선거에 의해 뽑힌 '체육관 대통령'의 정부는 유난히도 국민정신과 도덕성을 들먹거렸다. 1973년에 통과된 개정 영화법은 영화의 판단 기준 역시 국가안보가 최우선이라고 선언하며 영화를 통한 국민정서계몽을 최고의 가치로 삼았다. 도덕성 없는 정부의 도덕성 제고 캠페인에, 재미없는 시대착오적인 문예영화들은 극장가를 덮었고, 재미를 찾아나선 관객들은 새로이 홍콩영화를 발견한 것이었다. 그것은 아무래도 착오였던 셈인 것 같다. 한국영화를 재미없게 만들어 놓는 통에 고전적인 통치 기술인 3S의 하나로서 영화의 기능은 한국영화에서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오히려 그런 통치의 효능을 한껏 발휘해준 것은 이전에는 추억의 명작들로 꽉 차있었던 외국영화 상영관이었다고나 할까. 1973년을 전환점으로 해서 우리 영화의 강점이던 오락성은 소멸되었고, 지적이고 서정적이던 외국영화가 오락의 영역을 장악한다. 보편적인 세계성보다 미국의 저급한 대중문화를 침투시키는 첨병으로서 수입영화들이 자리잡기 시작한 것이다. 영화법 개정 이전에 극장가의 흥행은 우리영화가 이끌고 나갔다. 외화는 아무래도 역부족이었던 측면이 있었는데, 그것은 자막이라는 장애물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극장관객의 문맹율이 현저하게 높았던 5-60년대의 극장에서 자막을 읽어야 했던 외화보다는 국산영화가 관객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그런 탓에 외화는 대개 지식인층을 상대로 한 고급영화와 여고생 취향의 서정적인 영화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반면 일반대중을 상대로 하는 우리영화는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같은 명화에서부터, 김희갑,구봉서,서영춘 주연의 코미디영화, 박노식,박암,장동휘 등의 액션영화, 신정일,문희,윤정희 등이 활약한 성인 취향의 영화에 이르기까지 백화제방의 전성기를 갈구했던 것이다. 그러나 자막 해독률과 우리영화의 보급률은 반비례일까? 꼭 그렇지만은 않다. 물론 박정희 시대의 고도성장이 가능했던 것은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교육열 탓이기도 하다. 그 교육열은 극장에서 자막을 부담없이 읽으며 외화를 즐길수 있는 관객대중을 양산해 냈다. 그리고 경제수준도 많이 나아졌다. 한국영화가 다양한 장르속에 산업화될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데 그때 독재정권은 이제 독서율도 높아지고 어느 정도의 사회적인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해진 국민들에게 영화로써 재교육을 하려는 무리수를 두고 만 것이다. 그들은 뻔한 거짓말과 복고풍적인 정서를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국민들에게 심어주고자 했다. 이미 깨인 국민들을 다시 계몽주의 시대로 몰고가려 했던 것이다. 쟝르란, 산업적인 안정성을 얻기 위해 확립되었다가 그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면 스스로 해체, 확산되기 마련이다. 헐리웃에서 확립된 장르란, 흥행적인 안전판을 마련하기 위해 이전에 성공한 영화의 패턴을 답습하다가 그것이 하나의 전형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것은 흥행적인 재미를 추구한다. 그러나 어차피 같은 패턴의 영화를 계속하는 것은 자극과 재미의 한계효용체갑법칙을 피하기 위해 물량면에서, 그리고 자극의 강도에서 지속적으로 에스컬레이팅된다. 그러다 그 한계에 다다르면 한 쟝르는 다른 장르에서 재미의 요소를 차입한다. 예를 들어 코미디영화를 보자. 넘어지고 엎어지는 슬랩스틱 코미디에서 점차 더 세련되고 함축적인 웃음을 추구하게 되고 복잡해지는 사회에 적응하여 사회적인 웃음까지도 이끌어내기 시작한다. 사랑도 마찬가지이고 섹스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1973년 독재정권은 영화를 국민의 다양한 재미를 보장해주고, 여가시간의 재투자를 가능케하는 산업으로 키우기보다는 죽이기를 택했다. 다양한 사람들에 의해 의욕적으로 추진되던 산업으로서의 영화의 싹은 몇몇 친정부적인 인사들의 메이저 컴퍼니로 정리되면서 말살되고 만다. 정권이 산업으로서의 영화를 원하지 않았다는 것은 신필름의 정리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당시로서는 유일하게 헐리웃 스튜디오 시스템을 지향했던 신상옥 감독의 신필름은 국제경쟁력을 키우기 위해 국가의 지원을 받기는 커녕 단순한 예고편 불법상영을 기회로 공중분해되었다. 독재정권은 영화진흥을 한다며 영화를 죽였다. 그리고 지식인은 한국영화를 안본다는, 미신 아닌 미신을 만들어냈다. 그것은 한국영화산업의 생장시계를 삼십년 정도 뒤로 돌려 놓아버렸다. 어찌됐든 한국영화가 문예영화와 반공영화를 양산하면서 공자왈 맹자왈을 하고 있을때(문예영화와 반공영화에 상을 주기 위해 만들어진 대종상 수상작품의 흥행성적은 실로 비참할 정도였다.) 헐리웃의 파상적인 공세가 시작된다. 오락영화의 시대로 불리우는 70년대의 헐리웃 영화가 극장가를 석권해버린 것이다. 우리 오락영화가 자취를 감춰가고 있는 시점에서 그들의 침공은 위력적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관객은 냉정하리만치 날카로운 판단력으로 그런 영화들의 재미를 즐기기 시작했던 것이다. 따분한 시대, 극장은 최고의 피난처였다. 영화로 보는 한국 현대사 IV 미국에선 1972년 월남전 종결을 구상하게 된다. 주월 한국군 역시 1973년에 철수한 다. 그리고 워터게이트 사건은 닉슨을 권좌에서 몰아냈을 뿐만 아니라 월남전의 상처로 시무룩해진 미국민을 더욱 우울하게 한다. 60년대말 저항적인 신세대가 이루어 놓았던 아메리칸 뉴 시네마의 선풍도 시들해진다. 그리고 중동전쟁의 여파는 세계를 불경기로 몰아넣었고 헐리웃 역시 불황에 허덕인다. 막대한 제작비가 드는 고전적인 스펙타클 영화보다는 물론, 돈이 안될만한 영화는 만들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이전에 영화쟁이들이 차지하고 있던 메이저 회사의 사장자리는 회계사와 변호사들이 앉는다. 오락영화의 시대가 온 것이다. 우선, 1973년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그는 <대부 3>을 만들때가 되서야 이탈리아계로서의 아이덴터티를 찾기 위해 이름 가운데의 '포드'를 빼낸다)가 <대부,The God-father>로 갱영화를 선보인다. 이전까지 우리 암흑가 영화들이 장악하고 있던 이곳에 미국의 마피아와 앞서 말한 아랑 드롱의 프렌치 갱들이 나타난다. 그들은 세련된 깡패들이다. <맨발의 청춘>의 신성일처럼 우리의 슬픈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깡패가 아니라 동경해 마지 않는 뉴욕이나 파리의 일부인 스타일리스트들이다. 그리고 신세대들에 의한 멋진 미장센 속에서 그 어떤 영화석의 히어로들보다 멋지게 등장한다. 유신의 시대에 깡패란 없어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의 어두운 한 단면을 이루고 있었던 뒷골목은 스크린에서 삭제된다. 그것은 부패한 자유당과 민주당 정권 때의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단지 남산 마피아와 세종로 국회의사당 갱들인 유정회가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갱들의 시대에 걸맞게 이해 8월 동경에서 전 대통령 후보인 김대중씨를 납치해온다. 그리고 이 사건은 <대부>처럼 검열에 의해 삭제된다. <대부>는 새로 강화된 검열기준에 의해 무더기로 잘려나간 최초의 희생자이다. 폭력의 시대에 폭력을 드러내놓고 말해서는 안되었다. 모든 영화에서의 폭력은 삭제된다. 시실리에서 뉴욕으로 건너와 마피아의 대부가 된 돈 콜레오네와 군인으로 복무하면서까지 미국시민으로 정착하려던 막내아들 마이클의 이야기가 전개되는 1편에서는 충격적인 장면들이 많이 등장한다. 말을 안듣는 영화제작자 침대에 애마의 목을 잘라 넣는다던가, 콜레오네의 심복 부하 루카 브랏시가텅 빈 빠에서 처참히 살해되는 장면은 마피아의 무자비함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이었는데 모조리 삭제되었다. 영화를 보고나면 누가 누구를 죽였는지 모를 정도로 연결이 되지 않는다. 협박과 공갈, 그리고 폭력의 시대는 유사한 행위들을 스크린에서 확인하기 싫었던 것이다. 그런 탓인지 무참히 난도질당한 <대부>는 27만을 동원, 30만이 넘는 관객이 본 크리스 미첨 주연의 또다른 갱영화 <썸머타임 킬러>에 2위를 넘겨주었다. 물론 1위는 이소룡의 <정무문>으로 31만 5천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해는 바뀌어도 폭력적인 취향은 계속된다. 1974년 정초 무장탈영한 육군 헌병대 소속의 군인이 동대구역 구내 다방안에서 인질소동을 벌인다. M16소총과 수류탄으로 무장한 이 군인은 인질극을 벌이던 끝에 두명을 사살하고 자신도 목숨을 끊는다. 70년대 초반에는 유난히도 무장탈영병의 인질극이 많았다. 월남전 참전과 북한에 대한 멸공을 고집하던 경직된 군부의 준전시 체제 운영이 낳은 부작용 중의 하나였다. 무장탈영병사가 인질극을 벌이던 시간에 공교롭게도 극장가에는 몇년전 에이즈로 죽은 록 허드슨과 제니퍼 존슨 주연의 <무기여 잘있거라,A Farewell to Arms>와 새로 로저 무어가 제임스 본드로 나온 <007 죽느냐 사느냐,Live & let die>가 선보인다. 그리고 이해 1월달에 정부는 유신헌법을 반대하는 재야인사와 대학가의 저항이 거세지자 긴급조치를 발동한다. 개헌을 언급하기만 해도 비상군법회의에 회부되는 서슬퍼런 긴급조치 세대의 시작이었다. 이른바 통기타 문화라는 60년대 미국 히피문화와 포크문화의 이입이 본격화된 것도 이들 긴급조치 세대의 무력감과 분노 속에서였다. 긴급조치가 실시된 후 얼마 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스팔타커스>가 선을 보였다. 관객들은 목숨보다도 자유를 더 소중하게 여기는 스팔타커스와 검투사 노예들의 반란과 그들의 비장한 최후를 보며 당혹감을 느꼈다. 극장 문을 나서면 로마 병정들 (주1)이 지키고 있는 서울의 거리가 이어졌기 때문이었다. 그 거리에 70년대 초부터 외국에서 시작된 스트리킹이 서울에도 등장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스트리킹으로 기록되는 사건이 이 해에 일어난다. 한 남자가 개학한지 얼마 안되서 고대 앞에서 발가벗고 약 300미터를 달린 끝에 경찰에 체포된 것이다. 그것은 암울한 시대의젊은이들이 마지막으로 택한 기행이었다. 이듬해에 만들어진 하길종 감독의 <바보들의 행진>은 스트리킹을 언급한다. 시위와 휴강의 와중에서 갈등하던 주인공 병태와 친구는 거리를 뛰어가며 '스트리킹이다!'하고 외친다. 71년부터 시작된 장발단속을 피하느라 육교에 매달리게 된 병태와 그 동세대들의 처절한 자기 부정이었다. 이 해에 만들어진 우리영화중에 남진 주연의 영화가 있는데 서울대에 써있는 낙서를 제목으로 삼았다는 이 영화는 <지구여 멈춰라, 내리고 싶다>였다. 도피적인 성향이 강했던 이 시대에 더스틴 호프만과 스티브 맥퀸은 영화 <빠비용>을 선보인다. 탈출과 탈출에 일생을 건 빠삐용. 그는 마지막으로 탈출이 불가능한 악마의 섬에서 뛰어내려 바다위에 누워 외친다. "이놈들아! 나 여기있다!" 회한에 찬 그의 절규는 오랫동안 사람들의 마음을 때리고 있었다. 그러나 <빠삐용>은 외화수입 1위의 자리를 이름도 들어보지 않은 그리스 영화에게 내준다. 그 영화는 나찌 치하의 그리스를 배경으로 미모의 여선생 나타샤가 겪는 기구한 삶을 그린 <나타샤>였다. 레지스탕스 운동을 하던 청년을 사랑한 나타샤. 그러나 그가 나찌에 체포되어 사라진 후 눈물로 세월을 보낸다. 그러다 나이 지긋한 교장 선생의 구애를 받아들여 결혼을 하게 된다. 결혼식을 앞둔 나타샤는 청년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린다. 그러나 결혼식날 청년이 다시 나타나 사랑의 결실을 맺는다. 아주 신파조의 멜러영화일 뿐이었고, 영화서적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나타샤> 라는 영화. 그러나 우리 관객들은 극장을 가득 메운 채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기에 바빴다. 왜일까? 영화가 개봉될 무렵 대통령 영부인인 육영수 여사가 문세광에 의해 저격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리고 온 국민의 애도 속에 독재자는 눈물로 아내를 떠나보냈다. 초상집에 가면 죽은 사람이 불쌍해서가 아니라 자기 처지때문에 운다고 한다. 국민들은 울고 싶어졌다. 그리고 5,60년대에 그랬듯이 극장에 가서 펑펑 울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곧 다시 돌아온 <나바론>의 영웅들과 제임스 딘의 <자이언트>의 웅대한 텍사스에 매료된다. 단지 사건이 나던 8.15에 개봉된 헐리웃 최고의 흥행작 <이것이 법이다>는 푸대접을 받는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주연의 더티 하리 시리즈인 <이것이 법이다>는 교묘히 법망을 피해가는 범죄자들을 매그넘 권총으로 처단하는 형사영화였는데, 권총이라면 진저리를 칠 시기에 검은 선글라스를 낀 더티 하리가 매그넘 권총을 겨누고 있는 포스터가 반응이 좋았을리가 없었다. 이후 폭력과 살상에 대한 영화검열은 더욱 철저해진다. 하지만 한국영화계는 이 시기에 소중한 결과물들을 얻게 된다. 이장호 감독이 최인 호 원작의 <별들의 고향>을 영화로 만들어 새로운 영상세대의 시작을 선포한 것이다 이 영화는 버림받은 여자의 이야기를 그린 전형적인 멜러영화의 범주에 속해있지만 경아라는 여주인공을 통해 우리 사회의 기존 성모랄에 도전장을 던지고 있다. 고등학교 동창인 최인호와 이장호는 질질짜는 눈물대신 능동적으로 운명을 리드해가는 경아라는 여인을 창조해낸 것이다. 이장호야말로 이전 시대의 전형적인 쟝르 멜러영화를 어떻게 동시대적으로 수용해야할 것인가를 보여준 뛰어난 감독인 것이다. 46만이 넘는 많은 관객은 모처럼 한국영화에서 흥행신기록을 세운 <별들의 고향>에서 자기 시대의 모습을 바라본 것이다. 그리고 그 흐름은 이듬해의 <바보들의 행진>으로 이어진다. UCLA에서 영화를 공부하고 돌아온, 당시로서는 보기드문 유학파 하길종은 귀국후 <화분>, <한네의 승천>등을 만들지만 인정을 받지 못한다. 그래서 상업영화계와 타협, 사돈의 영화사에서 <바보들의 행진>을 만든다. <바보들의 행진>은 하길종 감독의 영광이자 상처이다. 한국영화 70년사를 통틀어 단 한편의 대학영화인 <바보들의 행진>은 어두운 긴급조치 시대의 아픈 우화이다. 아픈 시대를 아프지 않게 살아가는 병태와 영자. 그들은 대학가의 낭만과 닫힌 교문 앞에서 느끼는 비애 사이에서 방황한다. 송창식의 목소리를 빌어 '왜 불러'를 연발하고잃어버린 마음 속에의 고래를 찾으러 떠나가자고 외친다. 그리고 병태는 군대로 간다. 플랫포옴에서 영자는 창문에 매달려 병태에게 말한다. "할머니가 될때까지 기다릴께 꼭 돌아와." 하길종감독은 이 영화를 만들면서 여러차례의 대사수정과 화면삭제를 요구받는다. 그리고 폭음끝에 시대에 대한 화병으로 몇년 후 불귀의 객이 되고 만다. 그는 긴급 조치시대의 최대의 희생자였지만 관객들은 그 영화에서 자기시대에 최초의 보고서를 본다. <바보들의 행진>이 선을 보인 1975년에 빼놓을 수 없는 우리 영화가 하나 있다. 바로 김호선감독의 <영자의 전성시대>이다. 당시로선 신예였던 김호선감독은 조선작 원작의 이 영화로 그해 36만명의 관객을 동원해 외화흥행 1위이자 아카데미상을 석권한 <스팅>을 3만명 차이로 뛰어넘어 버린다. <바보들의 행진>이 긴급초지세대의 모습을 그렸다면, <영자의 전성시대>는 창녀와 때밀이라는 사회 밑바닥 인생을 그린 사회파 영화였다. 시골 처녀 영자는 무작정 상경을 해서 식모가 되는데, 우연히 철공소 직공인 창수를 만나 사랑을 한다. 그러나 창수는 징집되어 월남으로 떠난다. 그 후 영자는 주인집 아들에게 농락당한 후 여공이 되었다가 빠걸이 되고 다시 버스 차장이 된다. 그러나 사고로 한쪽팔을 잃고 마침내는 사창골의 창녀가 된다. 월남에서 돌아온 창수는 목욕탕의 때밀이가 되는데 아직 영자를 잊지 않고 찾아 헤맨다. 세월이 흘러 영자는 다리가 하나 없는 불구의 남편을 만나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산다. 창수는 영자를 다시 만나게 되나 지난날의 영자의 전성시대를 회상하며 그녀의 행복을 빈다. 이제는 아주 생소해진 상황들, 월남간 남자, 식모, 만원버스에서 떨어져 사고를 당하는 버스 안내양,그리고 불쌍한 창녀. 하지만 그런 것들은 고도성장시대의 도시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저속한 소비문화와 향락문화가 자리잡기 시작한 천민자본주의 초기의 모습이었다. 성은 상품화되고 부패의 척도가 된다. <영자의 전성시대>가 상영되던 무렵 모 종교집단의 2세인 박동명이 외화도피혐의로 체포되는데, 그는 연예인 및 여대생 일백명을 농락하고 그 중엔 유명 연예인과 인기 스타가 있다고 밝혀 세상을 시끄럽게 한다. 이때부터 엽색행각을 일삼는 재벌 2세들의 모임인 '7공자'의 존재가 시정 사람들의 입방아 거리가 된다.게다가 대통령과 고위 관리는 말끝마다 부정부패의 일소를 부르짖어야 할만큼 사회는 썩어가고 있었다. 74억원을 부정대출해 금융사고의 신기원을 이룩한 박영복사건도 그 틈에서 터져 나오고 있었다. 나중에 이장호감독의 영화 <그들은 태양을 쏘았다>의 모델이 되는 구로공단 카빈강도 문도석, 이종대가 치안망을 뚫고 범죄를 저지르다 일가족과 함께 자살한 사건도 영자의 전성시대에 벌어진 일이다. 그리고 대규모 보석밀수단이 검거되는데 법정에선 상류층 부인들을 일컬어 '보석부인'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하기도 했다. 외화흥행 1위를 기록한 <스팅>은 로버트 레드포드와 폴 뉴먼이 거물급 마피아를 감쪽같이 속여 거액의 돈을 빼앗는 내용인데, 이들 두 귀여운 사기꾼들은 어쩌면, '보석부인'과 '7공자'들에 무참히 짓이겨진 서민들의 심사를 대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때 시골 촌놈인 카우보이 존 보이트가 남성 하나만을 무기로 돈을 벌려고 도시로 온 영화 <미드나잇 카우보이>가 선보인다. 상품화된 성과 냉정한 도시의 모습이 완벽하게 보여진 뛰어난 작품이었다. 존 슬레진저 감독의 69년도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인 이 영화는 당시로서는 아주 충격적인 남창이 등장하는데 검열 당국이 통째로 들어내버려 엉망이 되버린 작품이기도 하다. 아메리카 뉴 시네마인 명작 하나를 말아먹어 버린 것이다. 당국의 눈으로 보기에 <미드나잇 카우보이>는 퇴폐였다. 그리고 사정 당국은 퇴폐의 이름하에 통기타 문화에 칼을 댄다. <별들의 고향>의 음악을 맡은 이장희를 비롯, 윤형주, 신중현, 김추자 등의 포크가수들을 대마초 흡연을 이유로 활동을 중지시킨다. 그리고 장발단속을 실시해 통기타 세대의 상징인 장발을 무참히 가위로 잘라버린다. 유신헌법 찬반투표가 시행된 뒤 힘을 얻은 독재정권은 국민의 뜻을 빌어 칼날을 휘두른다. 게다가 75년 4월 30일 월남이 패망하자 정부는 반공의 고삐를 죄며 반대세력의 탄압에 나선다. 긴급조치가 9호까지 발동되고 민청 학련 사건이 조작되고, 이른바 인혁당 사건(주2) 주모자 8명은 국제사회의 탄원에도 불구하고 사형이 집행된다. 대학에는 학도호국단이 결성되고 사회에는 민방위대가 짜여진다. 그러나 우울하지만은 않았다. 권투선수 홍수환은 남아공화국에까지 가서 타이틀 매치를 벌려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를 유행시켰다. 그리고 연말에 찾아온 줄리 앤드류스 주연의 <메리 포핀스>는 빗자루를 타고 그림속을 여행하면서 입속으로 외우면 마음이 즐거워진다는 주문까지 가르쳐준다. 이제 거리로 나섰던 사람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달팽이처럼 마음의 문을 닫고 메리 포핀스가 가르쳐준 주문을 외운다. "수퍼칼리 프라질리스틱 이스피알리 도셔스" (주1) 로마 병정들 = 완전무장한 전경들 (주2) 이 사건에 연루되어 프랑스에 있다가 영원히 귀국하지 못하게 된 사람이 바로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의 저자 홍세화씨입니다. 영화로 보는 한국 현대사 VII 예외없이 다시 '버르장머리 없는 젊은 애들'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그 버르장머리를 고치기 위해서인지 정부는 10월 1일부터 국기 하강식을 거행하기로 했다. 오후 여섯시가 되면 모든 삶들이 멈춰지고 국기를 향해 경례를 해야 했다. 그 순간만은 모든 곳이 정지된 것처럼 느껴졌다. 극장 앞에서 깔깔대고 웃던 사람들도 갑자기 근엄한 표정을 하며 국기가 보이는 쪽을 찾느라 갈팡질팡했다. 그대 시내 대한극장엔 국기하강식에도 고독하게 뛰어가는 남자가 등장했다. 더스틴 호프만 주연의 <마라톤 맨>이었다.<미드나잇 카우보이>를 만들었던 죤 슬레진저가 감독한 이 영화는 나찌 잔당에 잡혀 혹독한 고문을 받던 더스틴 호프만이 필사의 탈출을 감행하는 서스펜스영화였는데, 많은 부분이 고문의 기술을 리얼하게 보여줬다고 해서 삭제되었다. 심심찮게 고문이 문제되던 아주 민감한 시절이었다. 그렇게 마라톤 맨은 1979년의 파국으로 달려간다. YH사건(주1), 김영삼 신민당 총재 제명사건, 그리고 부마사태와 궁정동에서 울린 한방의 총소리로 독재자가 죽는, 영화보다도 더 서스펜스가 있는 한 해가 시작된다.그러나 이 해의 시작은 복고적이었다. 프랑코 제페렐리 감독, 올리비아 핫세 주연의 <로미오와 줄리엣>이 리바이벌되어 25만이라는 대성공을 거둔다. 그리고 전형적인 여인의 복수가 관객의 눈길을 끈다. 김수현의 드라마가 막 인기를 끌던 무렵 시드니 셀던 원작의 <깊은 밤 깊은 곳에,The Other side of the Midnight> 는 또다른 재미를 보여준다. 그리고 마이클 치미노의 아카데미 그랑프리 수상작 <디어 헌터>가 등장한다. 월남전 영화의 한 획을 긋는 이 영화는 코폴라의 <지옥의 묵시록>이 검열당국에 의해 수입거부 당한 뒤라 신선한 충격을 준다. 러시아 제국의 말기에 왕당파 장교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러시안 룰렛 장면은 당시의 페시미스틱한 젊은층을 매료시킨다. 하지만 1979년의 여름 만큼 오락영화 일색이었던 때도 드물었다. 후일, <리썰 웨폰> 시리즈를 선보이는 리차드 도너 감독은 <별들의 전쟁>이후 확립된 SFX 기술을 토대로 <슈퍼맨>을 만든다. 이른바 거액의 제작비를 투입한 오락영화의 대작들이 속속 선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보다 더 리얼한 SFX의 시대가 온 것이다. 스필버그 사단의 <죠스2>와 <엑소시스트 2>, <오멘 2>등 속편들이 속속 상륙한다. SFX의 여름이 가고 시절은 하수상해진다. 독재자는 비명에 가고 정국은 안개속을 헤멘다. 계엄령 중에 치뤄진 박대통령의 영결식에는 많은 국민들이 눈물을 흘리며 독재자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프랑코 제페렐리의 <챔프>가 개봉된다. 아내와 헤어져 아들과 함께 사는 챔프 아버지 죤 보이트. 그는 아들의 소원대로 다시 링에 서서 재기를 한다. 하지만 그는 격투 끝에 링위에 쓰러진다. 가물가물해지는 눈가로 아들의 모습이 보인다. 그러나 챔프는 끝내 일어서지 못한다. 영화팬들은 찡한 부성애에 손수건을 푹 적시고 극장문을 나선다. 그렇게 현대사를 억누르던 독재자 아버지도 마지막 길을 간다. 그리고 간간이 전선의 병력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루머들이 돌더니(주2) 12.12사태의 날은 온다. 대학가와 정계에는 새로운 군부의 실력자의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다. 전두환 시대가 온 것이다. 임자없는 나룻배처럼 흘러가는 70년대의 마지막 끌로드 를루슈의 <남과 여>가 리바이벌된다. 때로는 황홀한 원색의 영상이 스크린을 장식하고 때로는 모노톤의 깊이있는 화면이 어우러지는 <남과 여>의 장면들처럼 유난히 눈이 많았던 70년대 의 마지막 겨울은 간다. 70년대의 대미를 장식한 것이 흘러간 명화라는 것은 참으로 시사적이다. 새로움은 언제나 상투적으로 다가오고 또 다시 옛날로 돌아가고 말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주1) YH사건: YH물산이던가, 어패럴이던가.. 하여튼 의류회사에서 파업을 했었는데 경찰이 진압하면서 여공 한명이 죽고 그외 많은 사람들이 중상을 입거나 심지어 성폭행당하는 일이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주2) 당시 북한이 전면 남침을 할거 같다는 이야기가 연일 뉴스를 때리고 있었 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을 잡으려면 북한을 이용해먹는건 마찬가지더군요 '영화로 보는 한국 현대사'를 마치며 안녕하세요~ '영화로 보는 한국 현대사'가 끝났습니다. 제가 이글을 본것은 93년도에 완전히 작정을 하고 도서관과 비디오방을 전전하던 때, 93년 봄이었습니다. 교편위실에서 교지들을 이것저것 뒤적이고 있었는데, 연대교지에서 이글을 발견한 겁니다. 참 기발한 착상이다는 느낌이 든 저는 즉시 복사실도 가서 복사를 떴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제 서류함 속에 남아있게 된것이지요. 지금 우리나라에는 역사에 유래가 없을 정도로 영화에 대한 관심이 높다고 합니다. 그러나 영화에 대한 관심은 영화 그 자체에 한정된 모습을 볼수 있습니다. 영화의 재미라던가, 장르, 좀 나아갔다는 것이 영화를 만든 감독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사람들이 그 시기에 어떤 이유로 그 영화를 즐겼는가 하는 발상으로 써진 이 글은 우리가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할때 어떤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시도라 할 수 있겠습니다. 영화를 보는 사람이 다양한만큼, 영화에 대한 느낌, 영화에 대한 이야기 또한 다양할 것입니다. 또 다양해야 합니다. 어떤 시대의 조류, 유행, 이런 것들에 따라가기 위해서 영화를 보고 이야기하는것 보다는 자신의 좋아하는 어떤 예술의 한 형태로서 영화가 자리잡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럼으로써 다양한 영화가 균형있게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완전한 초현실주의 영화가 아닌 다음에는 그 영화에는 어딘지 모르게 그 영화를 만든 감독이나 동시대의 사람들의 이야기가, 사람들의 살아가는 배경이 되는 사회의 이야기가 들어가게 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막시즘의 퇴조와 함께 사실주의가 마치 사상의 경직성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말인양 인식되었고 따라서 모호한, 그리고 충격적인 이미지나 혼성모방의 영상들이 스크린을 정복해버리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 생각합니다.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어떠한 사회를 살고 있었던가 하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이 글은 요즈음 영화나 작가 중심으로 쏠리는듯한 영화담론을 관객쪽으로 돌려 보는 좋은 계기가 될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글쓴이 : 김 세진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 "활쏘기는 군자의 덕성과 비슷한 바 가 있으니, 활을 쏘아 과녁을 벗어나더라도 오히려 그 이유 를 자기 몸에서 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