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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워싱턴사과)
날 짜 (Date): 1999년 1월 14일 목요일 오전 04시 56분 50초
제 목(Title): 윈/마오쩌똥의 근대인물평가



중국 개혁·개방 20주년 새로 보기  제 44호 199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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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의 근대 인물 평가 
간결한 문장으로 자유분방한 사고 표출 



김승일 동아시아미래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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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개혁·개방 20주년, 마오쩌둥은 중국 사회를 읽는 하나의 키워드다. 
빈부격차, 부정부패 등 자본주의 폐해가 심각한 가운데 홍위병 세대에 대한 관심이 
일고 있다. 홍위병은 마오쩌둥이 정적 제거를 위해 일으켰던 문화대혁명의 
꼭두각시들. 이들은 현재 40~50대로 중국 사회 발전의 중추세력으로 성장했다. 
홍위병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던 마오쩌둥의 철학은 중국의 미래를 예측하는 데 
아직 유용하다. 

 
▲중국이 개혁·개방정책을 실시한지 20년. 중국을 읽는 데 마오쩌둥은 아직 
유용하다. 집무실에서 일에 열중하고 있는 마오쩌둥.  
 98년말은 중국의 덩샤오핑(登小平)이 개혁·개방을 시도한 지 20주년 되는 
때였다. 20년 전과 비교하면 현재 중국은 경제적으로 많은 발전을 이룩했다. 
하지만 발전의 이면에는 자본주의적 폐해가 드러나 중국 당국은 이를 퇴치하기 
위해 골머리를 앓고 있다. 부정부패·빈부격차·인권탄압 문제 등은 개방의 
부산물로 나타난 ‘자본주의의 종양’으로 평가되고 있다. 

따라서 마오쩌둥(毛澤東)이 중국을 공산화한 때부터, 덩샤오핑이 개혁·개방을 
주도한 때까지를 새롭게 조명하자는 움직임도 있다. 그렇다고 중국인들이 
마오쩌둥을 마음속으로 존경하는 것은 아니다. 중국인들은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정책이 중국의 근대화에 크게 기여했다고 믿고 존경의 마음을 보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문화대혁명이 일어나던 65년 10~20대였던 사람들이 이제 40∼50대의 나이로 중국 
사회 곳곳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홍위병이라는 미명 아래 마오쩌둥에게 
이용당해 10년동안 학업을 중단하고 하방(下放)한 청년들은 모두 1천6백23만명 
정도였다. 이들은 그후 스스로 학업을 계속한 사람 외에는 모두 중졸 이하의 
학력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이들은 권력투쟁의 이용물에 지나지 않은 
채 오늘에 이르렀고, 소위 ‘잃어버린 세대’로 불린다. 이처럼 인재육성에 커다란 
결함이 생겨 중국의 현대화가 그만큼 늦춰졌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홍위병 출신들이 과거의 어려움을 딛고 현재의 
개혁·개방을 이끄는 중심세대로 부상하고 있다. 이들이 그동안 사회 각계에서 
이룩한 상당한 성과를 보면 반드시 홍위병 세대가 동정의 대상인 ‘잃어버린 
세대’만은 아니라고 본다. 이들은 마오쩌둥으로부터 엄청난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자신들의 경험을 통해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세대’로 
성장함으로써 덩샤오핑의 부르주아적 개혁·개방 노선을 이해하고 정책을 추종하며 
오늘날 중국 건설의 토대가 됐다. 

두차례에 걸친 천안문사건을 주시하면서도 이들이 끝내 동조하지 않은 것도 과거에 
행했던 자신들의 과오가 어떤 것인가를 이해했기에 나온 행동이 아닐까 한다. 

중국 현대화 과정에서 모순에 모순이 점철됐던 마오쩌둥의 초상은 이들의 마음 
속에서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 그러나 부정부패·빈부격차 등이 사회문제로 대두된 
지금 마오쩌둥의 초상을 마음속에서 완전히 지우기는 어렵다. 따라서 중국인들의 
내면세계의 흐름을 정확히 이해하는 데는 그 기점이 되는 마오쩌둥의 통치술 및 
자기중심적 성격을 알면 상당한 시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앞으로 
중국과 교류를 더욱 활발히 해야 할 입장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마오쩌둥은 어떤 인물인가. 자유분방한 논리를 구사해 신비감을 고조시켰던 
마오쩌둥은 연구자들 사이에 많은 추종자들이 있다. 마오쩌둥의 풍부한 지식과 
자기 사상에 대한 구체적 체계화 그리고 이를 통해 이룩한 카리스마적 지위 및 
공산혁명의 성공 그리고 이후 정치투쟁 과정에서 나타난 각종 모순 등이 신비감의 
요소를 형성하고 있다. 

98년 여름 마오쩌둥 시신에 참배하려고 늘어선 행렬 

98년 여름 천안문광장 앞. 보지 못했던 행렬이 인민대회당 앞으로 길게 나 있는 
것이 보였다. 1년에 한번 공개되는 마오쩌둥의 시신에 참배하기 위해 늘어선 
행렬이었다. 시대가 이렇게 바뀌었는데도 아직 마오쩌둥인가 라는 물음을 던질 
정도로 놀라운 장면이었다. 

마오쩌둥, 그는 인민공사를 만들어 ‘공동작업·공동분배’를 한다며 잘 나가던 
중국 경제를 도탄에 빠뜨려 헤어나지 못하게 했던 인물이다. 사회주의를 
건설한다는 구실로 지식(專)보다 당성(紅)이 중요하다 하여 10여년간 수많은 
지식인들을 농촌과 공장에 보내(下放) 그들의 머리속에서 반동성(反動性)을 지우려 
탄압했던 인물이다. 문화재를 파괴한 문화대혁명의 주범. 하지만 마오쩌둥은 
오늘도 여전히 중국인들의 가슴 속에 살아남아 있었다. 

덩샤오핑이 개혁개방을 외치고 정국을 주도하면서 새로운 중국의 영웅으로 
떠오르자, 마오쩌둥의 초상화를 떼어내고 덩샤오핑의 것으로 대체하자고 건의했다. 
하지만 덩샤오핑은 “마오쩌둥 동지가 잘못한 것은 30%에 불과하다. 반면 우리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운 공 70%는 여전히 위대하다”고 평하며 그의 초상화를 계속 
달아두게 한 일화는 유명하다. 산 덩샤오핑이 죽은 마오쩌둥을 이길 수 없었던 이 
일화는 “삼국지” 같은 소설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지만 현재의 중국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마오쩌둥의 신비적 요소는 어디에서 나올까. 그와 관련된 여러 가지 연구서를 보면 
잘 알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사람들을 압도하는 의연함과 포용성 그리고 헤아릴 수 
없는 자유분방한 논리에서 연유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매력은 
바로 그의 풍부한 지식과 자기 사상에 대한 구체적 체계화에서 나온다. 이는 그의 
엄청난 독서량과 문장력이 바탕이 됐을 것이다. 

 
▲덩샤오핑과 담화를 나누는 마오쩌둥. 마오쩌둥은 劉少奇와 덩샤오핑을 제거하기 
위해 문화대혁명을 일으켰지만 덩샤오핑은 이후 재기했다.  
 특히 마오쩌둥의 문장은 아주 개성적이다. 대체로 담화와 강연을 위해 쓴 그의 
문장은 한국인들은 물론 그를 추앙하던 중국 공산주의자들의 문장과도 전혀 
다르다. 

솔직하고 직설적인 마오쩌둥의 인물평 

그의 문장을 통해 나타난 근대 각 인물들에 대한 평가는 그만큼 솔직하고 
직설적이어서 일반 대중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때문에 이들에 대한 마오쩌둥의 
신뢰의 정도를 금방 알 수 있다. 중국인들은 마오쩌둥이 직설적인 언어로 표현한 
인물평을 하나의 잣대로 삼고 정치인들을 평가했다. 

물론 마오쩌둥의 근대 각 인물에 대한 평가는 나름대로 솔직한 측면도 있지만 
자신의 인식과는 전혀 상반되는 측면에서 평가하기도 했다. 또 자신에게 도전하는 
기미가 보이는 사람에 대해서는 곧바로 적으로 만들어버리는 아전인수적인 평가도 
했다. 마오쩌둥에게서 느끼는 섬뜩한 점이기도 하다. 

이처럼 이율배반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성격이야말로 혁명가로서의 본질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실 이러한 성격이 그의 위치를 더욱 확고하게 해준 원인이고, 이로 
인해 내부적인 권력투쟁 등이 사전에 정리돼 정치적 안정을 가져온 원동력이 
되기도 했던 것이다. 

이처럼 중국인들 마음속에서 깨지지 않는 마오쩌둥의 비밀을 마오쩌둥의 인물 
평가를 통해 알아보자. 마오쩌둥은 지식인에 대해 “혁명성이 없는 것은 아니나 
사회적으로 불우하기 때문에 혁명에 접근하는 부류” 쯤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이들은 몸도 마음도 병으로 뒤덮여 있기 때문에 계급투쟁에 참가시켜야 한다고 
했다. 또 ‘비천한 자는 원래 총명하고, 고귀한 자는 원래 바보다’라는 구호를 
만들 정도로 지식인을 싫어했다. 즉 지식인들은 사상개조가 힘들므로 이들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비판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자신의 생각과 비슷한 관점을 가진 지식인들에게는 높은 관심을 보였다. 
대표적인 사람이 루쉰(魯迅)이다. 원래 마오쩌둥은 문학작품 읽기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 그가 읽은 작품수는 적다. 그런데 유일하게 루쉰의 작품만은 
신문화운동을 주도해온 잡지 “신청년”을 통해 열심히 읽었다. 루쉰은 이 잡지에 
백화문으로 된 소설과 잡문들을 많이 발표했는데, 이중 맨 뒤에 실린 루쉰의 
잡문이 마오쩌둥의 눈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1932년에 펑윈펑(馮雲峰)이 루이진(瑞金·중국공산당혁명 근거지)에 있던 
마오쩌둥을 찾아가 담화하는 가운데 이런 일화가 있다. “어떤 일본 사람이 
말하기를 전중국에 중국을 아는 사람이 두사람 반이 있다고 합니다. 한명은 
장제스(蔣介石)이고, 다른 한명은 루쉰이며, 그리고 반사람은 마오쩌둥 
당신이랍니다.” 그러자 마오쩌둥은 큰소리로 웃다가 좀 생각하더니 “그 일본사람 
대단하군. 그러나 내가 알기로 중국을 아는 사람은 루쉰밖에 없소이다”라고 했다 
한다. 

루쉰과 마오쩌둥은 비록 서로 만나지는 못했지만 마음속으로는 교감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마오쩌둥은 많은 사람들 앞에서 루쉰의 정신을 ‘정치적 원견’ 
‘투쟁정신’ ‘희생정신’ 등 세가지로 정리하면서 높이 평가했다. 즉 사회를 
관찰하는 원견이 있어 중국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설정하고 이를 위해 중국인들을 
깨우쳐 주려 노력한다는 것이다. 

71년 11월20일 우한(武漢)에서 행한 연설 중에 마오쩌둥은 “중국 제1의 성인은 
공자가 아니고 나도 아니며, 바로 루쉰”이라고 했고, 나아가 자신은 루쉰의 
학생이라고까지 했다. 루쉰에 대한 흠모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게 해준다. 

마오쩌둥이 좋아했던 다른 지식인으로는 중국 신문화운동의 선도자인 후스(胡 
適)가 있다. 그는 후스에 대해 “진보적인 모범청년”이라고 평했다. 마오쩌둥은 
사범학교시절 후스가 주도해 펴내던 “신청년”이라는 잡지를 통해 후스를 알게 
됐다. 그는 후스를 자신이 버린 강유위와 양계초를 대신하는 인물이라고 
치켜세우며 한동안 자신의 본보기가 된 인물이라고 평했다. 

후에 후스와 만나 유학의 필요성에 대해 말하던 마오쩌둥은 후스가 유학은 
필요없다며 ‘비유학편’(非留學篇)이라는 글까지 쓰자 결국 출국하지 않고 
국내에서 공부를 계속했다. 이처럼 후스는 마오쩌둥의 앞날에 직접적 영향을 준 
인물이었다. 

한편 이들과는 다른 유형으로 마오쩌둥에게 직접적인 지원을 한 인물로 
궈모루(郭沫若)가 있다. 국내에 “역사소품=족발”이라는 책으로 이미 잘 알려진 
궈모루를 마오쩌둥은 형님이라는 애칭을 써가며 따랐다. 궈모루에 대한 기대는 
그가 보낸 편지에 잘 나타나 있다. 

 ▲
1999.1월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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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개혁·개방 20주년 새로 보기  제 44호 199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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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의 근대 인물 평가 
간결한 문장으로 자유분방한 사고 표출 



김승일 동아시아미래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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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적 숭배자에게 존경심·애정 직접 표현 

‘당신의 사론과 사극은 중국 인민에게 매우 유익하니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 
그 정신은 절대로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개인적인 글이기에 더욱 자신의 감정을 
표현했는지 모르지만 학문적 숭배자에 대한 존경심과 애정표현 등 마오쩌둥의 
인간적인 면을 느낄 수 있다. 
 
▲마오저둥과 함께 한 劉少奇(오른쪽). 劉少奇는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알려졌다가 
문화대혁명 이후 자본주의 노선의 당내 실권파 거두라는 비판을 받고 실각했다.  
 마오쩌둥의 인생을 바꾸어 놓은 또 다른 지식인으로 리다자오가 있다. 리다자오는 
16세 때 과거에 합격할 정도로 학문이 뛰어났는데 신학문에 눈을 뜨면서 공산주의 
사상에 몰두했다. 그리고 국민당 우파에 대항하다 1927년 장쭤린(張作霖)에게 
체포돼 사형받은 중국공산당의 창시자다. 

마오쩌둥은 이런 그를 베이징(北京)에서 만났는데, 그는 “베이징에서 만난 유일한 
좋은 사람”이라고 평했다. 마오쩌둥은 “30년 전부터 구국(救國) 구민(救民)의 
진리를 찾기 위해 바쁘게 뛰어다닌 끝에 리다자오 동지를 만나게 됐고, 그에 의해 
마르크스-레닌주의자가 됐다. 그는 나의 진정한 선생이었고, 그의 가르침이 
없었던들 오늘의 나는 어디에 있을지 모른다”며 추앙했다. 
지식인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던 마오쩌둥은 그렇지만 자신의 이해와 부합하는 
지식인에 대해서는 편애적인 호의를 보였다. 물론 이들은 중국 근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유명한 지식인들이기에 당연한 평가일지는 모르지만 마오쩌둥이 중국 
최고의 자리에 오르는 데는 이들의 도움과 영향이 절대적이었다. 지식인에 대한 
자신의 편견과는 상관없이 개인적인 교제에 의해 이들을 자기의 후원자로 만들었던 
그의 친화력은 혁명을 성공시키는 바탕이 됐다. 

정치가들에 대한 평가는 지식인 평가와는 달랐다. 마오쩌둥은 정치인을 세밀하게 
분석해 그들을 조종했던 특징이 있다. 그는 이러한 인물 평가를 통해 자신의 주변 
인물들을 철저히 통제했는데 이러한 그의 면모는 문화대혁명 이후의 행적에 잘 
나타나 있다. 이런 마오쩌둥에게도 존경받은 정치가가 있었다. 신해혁명을 일으켜 
봉건군주제를 무너뜨리고 민주공화정을 세운 쑨원(孫文)이다. 마오쩌둥은 쑨원에 
대해 “쑨원 선생의 위대함은 그의 각고분투·불요불굴과 더욱 분발하는 혁명적 
의지력·혁명 실천정신의 결합에 있다”고 평하며 중국 혁명의 모범을 보인 위대한 
인물로 존경했다. 

쑨원은 중국국민당과 공산당이 모두 숭배하는 인물로 중국인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그러다보니 다른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그의 주의나 정책을 강조하는 
경향이 많은데, 마오쩌둥은 관점이 달랐다. 쑨원의 인내와 끈기 그리고 어떤 
어려움에도 굽히지 않는 강인한 정신력에 주안점을 두고 높이 평가했던 것이다. 

마오쩌둥은 사상적으로 반대적 입장이던 사람들도 포용하는 쑨원의 인간성을 
흠모했으며 그러한 친화력이 신해혁명을 성공시킨 토대라고 보았다. 마오쩌둥도 
주변인물들과의 관계를 특히 중요시했으며 이러한 인간적 접근법이 중국 민중의 
사랑을 받은 비결이 되기도 했다. 

반대파 수용하는 쑨원의 인간성 흠모 

그러나 쑨원의 아들인 쑨궈(孫科)에 대해서는 아버지와는 전혀 다른 행동과 사상을 
취했다 하여 인간적인 배반감을 느껴서인지는 몰라도 혹독하게 비판했다. 즉 
“쑨궈는 국민당 내부의 무력을 맹신하는 ‘소수인사’ 중의 한 사람이다. 마치 
자기는 무력을 맹신하지 않는 것처럼 말하지만 그는 삼민주의가 실현되지 못해도 
책임지려 하지 않을 것”이라고 평했다. 

이러한 평은 쑨궈가 정치적으로 자신과 정반대 입장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지만, 마오쩌둥의 쑨원에 대한 확고한 경외심이 그 아들에 의해 손상되는 것을 
안타까워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한편 같은 공산주의자라 해도 자신의 노선에서 벗어나는 인물들에 대해서는 지독한 
혹평을 가했다. 대표적인 사람이 장궈타오(張國燾)와 천두슈(陳獨秀)였다. 이들은 
중국공산당을 창건하고 이끌었지만 소련의 트로츠키파에 연계되면서 우경 기회주의 
노선을 추종하는 바람에 중국공산당에 많은 타격을 주었기 때문에 마오쩌둥의 
투쟁대상이 됐던 사람들이다. 

이들에 대해 마오쩌둥은 “천두슈도 마르크스주의를 신앙한 적이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는 반혁명주의자가 돼버렸다. 장궈타오도 마르크스주의를 신앙한 적이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도 지금 잘못된 생각으로 수렁에 빠져 있다”고 평했다. 

이 글을 보면 노선을 바꿔 자신과 다른 방향으로 간 사람들에 대해서는 정적(政敵) 
차원에서 철저하게 비판했고, 이런 평가를 통해 마오쩌둥은 그들이 재기할 수 
없도록 몰아갔던 것이다. 

그러나 같은 노선을 걷는 동지라 할지라도 자신의 권력을 앞질러 나가려는 
사람에게는 무지막지하게 공격했다. 

그 대표적 인물이 류샤오지(劉少奇)와 덩샤오핑이다. 류샤오지는 마오쩌둥의 
실질적인 후계자였다. 1959년 4월부터 국가주석이던 마오쩌둥이 재선을 사퇴하자 
류샤오지가 국가주석이 됐는데, 마오쩌둥의 사퇴는 대약진 운동과 
인민공사화운동에 대한 책임을 지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류샤오지가 자신의 인맥을 
형성해나가면서 자신의 권위에 대항해 오는 듯하자 마오쩌둥의 심기가 불편해진 
것이다. 

이는 마오쩌둥만이 가지고 있는 기묘한 자기 중심적 성격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마오쩌둥은 56년 제8회 당대회에서 류샤오지·덩샤오핑 체제가 확립되는 
시기부터 66년까지 10년간이나 고통스러워했다. 이러한 불만을 어린 학생들을 
이용해 터뜨린 것이 문화대혁명이다. “나의 후계자는 류샤오지다”(61년 9월23일 
무창 동호빈관에서의 대화 중에서)라고 영국의 육군 원수 몽고메리에게 한 말이 
유럽에 전해져 세계적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류샤오지도 결국은 마오쩌둥의 이런 
자기중심적 성격에 의해 죽음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다. 

류샤오지와 같은 운명이었던 덩샤오핑의 경우는 제3인자였기 때문에 직접적인 
충격은 덜 받았다. 그것이 다행스럽게도 덩샤오핑이 일어설 수 있던 비결이었다. 
덩샤오핑은 마오쩌둥보다 10년 늦게 태어났지만 일찍이 혁명에 참가해 
마오쩌둥과는 전우 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초기 마오쩌둥의 덩샤오핑에 대한 
신뢰감은 대단했었다. 제8기 대표대회를 열기 전 덩샤오핑을 중공 중앙총서기로 
추천하면서 다음과 같이 평했다. 

“덩샤오핑은 공정하며 재능있는 사람” 

“내가 보기에 덩샤오핑은 비교적 공정하며 재능이 있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그가 
일을 다 잘 처리했다고 볼 수 있느냐 하면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그도 나와 
같이 많은 일을 틀리게 처리했고 틀리는 말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종합적으로 
말해서 이 사람은 비교적 전체 국면을 볼 줄 알고 너그러우며, 문제를 처리하는 
데도 비교적 공정하다.” 

이처럼 그를 감싸주면서 자신의 주변을 떠나지 않게 했던 덩샤오핑이었지만, 
마오쩌둥의 마음속에는 중앙소비에트 시절 덩샤오핑이 소위 
‘모파(毛派)분자’들을 숙청한 일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그는 내면적으로는 덩샤오핑에 대해 언제나 주의를 기울이며 관찰했고, 그러다가 
덩샤오핑이 류샤오지와 함께 자신의 자기중심적인 성격을 건드리자 결국 이들 둘을 
함께 숙청한 것이다. 문화대혁명의 궁극적인 목적은 바로 이들 두 사람을 척결해 
자신이 중국의 중심이 되기 위한 것이었다. 

‘세번 숙청당하고 세번 일어서다’(三落三起)라는 덩샤오핑의 인생도 
드라마틱하지만, 자신의 전우요 혁명 성공의 일등공신이었던 두 사람을 성역 
침범으로 규정해 숙청한 마오쩌둥의 일생도 그에 못지않다. 게다가 아무것도 
모르는 젊은 학생들을 부추겨 중국의 발전을 올스톱시키는 문화대혁명을 일으킨 
행위는 이해하기 힘든 측면이 있다. 

마오쩌둥은 자본주의적 요소를 부추기는 ‘백화제방, 백가쟁명’에서 완전히 
돌아서서 반우파 투쟁을 실시하는 등 정책의 급격한 변화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에게 어떤 사상적 전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하나의 원점에 
서서 주변으로 일을 벌여나가며 계급투쟁을 진행시킨 인물이었다. 

후난(湖南)성 창사(長沙)시내에서 처음 노동운동을 시작한 이래 
농민운동·게릴라전·토지개혁, 소비에트구 건설, 정풍(整風)운동, 신국가건설, 
소련과의 논쟁과 결별, 문화대혁명 등의 순서로 주변을 확대 발전시키며 자신을 
중앙에 포진시켰던 사람이고, 그 과정에서 폭력을 운용하는 계급투쟁을 방법적으로 
이용했던 사람이다. 그는 닉슨 미 대통령에게 자신은 ‘무발무천’(無髮無天·髮의 
중국어 발음은 法과 같은데, 법률도 하늘도 무서워하지 않는 무법자라는 의미)한 
사람이라고 호언했을 정도로 자기중심적인 인간이었다. 자신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데는 어떤 인물도 그의 장애가 될 수가 없었다. 

그러나 홍위병에 의해 피해를 보았던 덩샤오핑·양상쿤(楊尙昆)·펑전(彭眞) 등은 
마오쩌둥 사후 자신들이 당했던 경험을 토대로 중국에서의 완벽한 지위를 확립하며 
새로운 중국을 건설하였으니 역사의 아이러니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것이다. 

눈물도 피도 없는 권력의 화신인 마오쩌둥이 제일 두려워했던 것은 눈물과 
피였다고 한다. 이런 점에서 보면 그는 성격적으로 변태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쨌든 ‘영웅은 영웅으로 끝나야지 국가지도자 나아가 국가지배자가 
돼서는 안된다’고 하는 것이 마오쩌둥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아닐까 한다. 

◀◀ ▲
1999.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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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께서 말씀하셨다 : "활쏘기는 군자의 덕성과 비슷한 바 
가 있으니, 활을 쏘아 과녁을 벗어나더라도 오히려 그 이유
를 자기 몸에서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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