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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워싱턴사과)
날 짜 (Date): 1999년 1월 12일 화요일 오전 06시 19분 30초
제 목(Title): 최장집/ 박정희정권과 한국근대사 2




역사/철학(KNGO 1 9) [279/420]
제  목: [현대사]박정희 정권과 한국근대사2
      4. 군사주의와 발전주의의 결합

           한국현대사에 있어서 박정희정권이 갖는  특성은 무엇인가? 그것
      은  무엇보다도 군사주의(militarism)와  발전주의(developmentalism)
      로 특징지어질 수 있을 것이다.  군사주의는 한국전쟁의 산물이다. 불
      행하게도 한반도는  지정학적 특성으로  인하여 미소냉전의  최전방에 
      위치하게 되었고 한반도의 분단선은 분단된  남북한간의 대립 뿐만 아
      니라 세계적 수준에서 전개되는 미소  진영간 대립을 지탱하는 이중의 
      대립을 떠받치는 분단선이었다. 냉전시기에 최대의  국제전이라 할 한
      국전쟁이 한반도라는 좁은  지역의 남북한 쌍방을 군사화 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 글의 주제와 관련하여  중요한 
      문제는 남북한간의 대결과 경쟁구조속에서  군사주의가 빚어내는 역동
      성이다. 그 핵심은 군사주의가 발전주의와  결합하면서 그것이 군사전
      략적 수준에서가  아니라 쌍방의 산업화과정에 미치는  영향과 역동성
      이라 하겠다. 필자의 관점에서 볼 때  박정희의 리더십과 능력은 군사
      주의를 소극적으로 활용하여 독재권력을  유지관장하는 동력으로만 사
      용한 것이 아니라  그가 이를 자본주의 산업화와 결합하여  폭발적 결
      과를 창출해낼 수 있었던 재간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실상 한국전쟁 이전 까지만 하더라도  한국사에 있어서 군사주
      의의 전통은 약한  것이었다. 어떤 면에서 조선조말  한국의 근대화는 
      군사주의적 전통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패하였다고 할 수도 있
      을 것이다. 흥미있는  것은 해방이후 이 군사주의는  무엇보다도 북한
      정권수립의 기반이었다는  사실이다. 항일무장투쟁을 하였던  그룹들, 
      즉 만주의  항일무장 게릴라그룹과 중국대륙에서 중공군과  더불어 항
      일전쟁에 참여한  그룹들이 남한으로 넘어오지 않고  북한정권을 수립
      한 중심세력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북한과  비교해 남한에서의 군사주
      의는 한국전쟁을 계기로  하여 때늦게 왔다. 한국전쟁  이후 시기부터 
      남북한 쌍방에서  전후복구가 이루어지면서  남쪽은 자본주의  산업화
      를, 북쪽은 사회주의 산업화를 추구하였으며  그것은 양방의 군사주의 
      격돌의 방법으로  수행되었다. 일찌기 오스트리아의  군사전략가 클라
      우제비츠는 전쟁을  다른 방법의 외교라고  본 바 있다. 이와  유사하
      게, 우리는 남북한간  군사주의를 쌍방의 권위주의적 방법에  의한 산
      업화 경쟁의 다른 이름이라고 볼 수 있을지 모른다. 
           한국전쟁이 종결되고  남북한간 군사적  방법에 의한 대결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게 되었을 때  이들의 군사적 에너지는 산업화경쟁으
      로 집중되었다. 이제  박정희는 수출과 경제성장목표 달성을  마치 군
      사목표 달성이나 되는  듯이 정부를 그 목표를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관장하였고, 목표를  보다 빨리 보다 대규모적으로  보다 효율
      적으로 달성하기  위하여 동원가능한  내외자를 집중적으로  투자하여 
      재벌이라는 거대기업 집단군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이 목표달성에 저
      해되는 것으로 인식되는 노동자를 억압하였으며,  지배권력 내의 분열
      이나 민주화요구를  허용하지 않으면서  '총화단결'의 기치하에  모든 
      국민의 에너지를  고속성장을 실현하는데 쏟아부었다.  한국에서 이런 
      일들이 어떻게 가능하였고,  그 결과로 어떻게 세계에서  유례가 드문 
      고도성장이 가능할 수  있었는가? 그것은 상당 정도로  남북분단의 효
      과라고 할  수 있다. 해방이후  압도적 다수의 국민의 의지에  반하여 
      이루어진 분단과 동족상잔의 전쟁이 산업화에  관한 한 긍정적 효과를 
      만들어낸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외부의 敵의 존재는  국내의 분열을 봉합하기 쉽게  하고 국민의 
      에너지를 국가의 목표에  쉽고도 효과적으로 동원할 수 있게  하는 매
      우 유효한 조건이다. 그러므로 군사주의는  특히 후발자본주의 산업화
      국가들이 선발국가들을  따라잡기 위해 활용하는 가장  유용한 수단이
      기도 하였다. 초기 산업화 과정에 있어서  독일과 일본만큼 이에 합당
      한 사례는 드물  것이다. 독일이나 일본과는 달리  유사한 후발자본주
      의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군사주의의 전통이  약한 이탈리아가 이들 국
      가만큼 초기 산업화에 성공할 수  없었던 것은 군사주의와 후발자본주
      의발전과의 연관을 보여  주는 하나의 좋은 사례이다.  위로부터의 근
      대화를 주도한 박정희와 한국의  군부엘리트들은 라틴아메리카와 같은 
      후후발자본주의 국가보다 독일의 비스마르크나  일본의 사무라이 엘리
      트들에 더 가깝게 비유될 수 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박정희에 의해 
      주도된  개발독재가  세계에  있어서   발전주의  국가(developmental 
      state)의 한국적 모델이라고 까지  인식되는데 있어서는 라틴아메리카
      나 독일 및 일본과 구별되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한국에서는 군사주
      의와 결합된 발전주의가 또 한편  대중적 현상과 결합하였다는 사실이
      다.  온국민이 궁핍으로 부터 열성적으로  탈출하고자 하는 집합적 의
      지를 표현하는 60,  70년대의 구호였던 "잘살아 보세"라는  말만큼 정
      부의 주도에 대해 열렬한 대중적 호응을  표상하는 말은 없을 것이다. 
      즉 위로부터의  근대화와 아래로부터의 대중적 호응의  결합이 그것이
      다.
           정치경제학자 알버트  허쉬만은 독일과 같은  유럽의 후발자본주
      의 국가와  라틴아메리카와 같은 후후발 자본주의국가의  차이는 이들 
      후후발국가에 있어서는 '엘랑'  (elan), 즉 산업화에 대한  열정적 집
      합의지가 없다는  사실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 점에 있어서  한국은 
      후후발국가 가운데서는  희귀하게 정부가  산업화 과정에서  국민들로 
      부터 이러한 열정적 호응을 끌어낼 수  있었다는 특징이 있다. 배링턴 
      무어는 유럽의 후발산업화 국가에 있어  군사주의의 역할을 논하는 가
      운데서 기본적으로 그것을 전통적인 토지귀족의  속성으로 보았다. 근
      대화에 대한 권위주의적 대응이 대중적  현상으로 나타난 것은 파시즘
      에 이르러서 였다. 이 점에서 한국은  유럽의 후발국가나 이와 유사한 
      일본의 군사주의와도 구별된다. 즉 한국의  박정권은 근대화 엘리트들
      의 군사주의적  충동과 근대화에 기꺼이 참여하는  동력으로서의 대중
      적 열정을 결합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한국과 같은  분단된 후후발산업국가가 군국주의를  바탕으로 한 
      제국주의 팽창을 통하여  고도성장을 달성할 수는 없다.  그러나 분단
      상황은 강력한 외부의 적이 존재하게  함으로써 일본이나 독일이 제국
      주의 팽창을 통해 산업화를 도모한 것과  유사한 효과를 갖게 하였다. 
      1970년대 중반  노동집약적 소비재수출에 의한 발전이  한계에 이르고 
      고도산업구조로의 상승전략이 요구되었을 때,  박정권이 중화학공업을 
      추진하였던 방법은 앞선 자본주의국가들이  군수산업의 개발에 박차를 
      가했던 그런 류에 비교되는 것이었다. 
           남북한간의 산업화경쟁이라는  맥락에서 박정권의  산업화전략이 
      북한의 그것에 대해  우위를 갖게 되었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
      다. 그것이 비록  남북한 쌍방간의 경쟁의 결과만이라기  보다 세계적 
      수준에서의 자본주의  對 사회주의의 경쟁의 결과라고  하더라도 그러
      하다. 군사주의에  의한 남북한간 산업화경쟁이라는  측면에서 박정권
      이 주도하였던  권위주의적 국가의 시장개입과 시장의  원리를 결합하
      는 자본주의적  경로에 의한 산업화,  세계자본주의시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외향적  산업화, 유신독재에도 불구하고  도전하는 민주주의 
      세력과 씨름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상황, 즉 완벽하게  독재를 제도화
      할 수 없었던  정치의 공간과 이로 인한 정치의  다이나믹스가 빚어낸 
      결과가 전체주의와  사회주의적 자력갱생을 통한 산업화의  경로로 달
      려 나갔던  북한 김일성정권의 그것을 이미  1970년대초부터 압도하기 
      시작하였다는 사실은 남북한 통일을 내다보는  시점에서 그 어떤 요소
      보다 커다란 중요성을 갖는다. 
           5.16으로 집권한 박정희를 중심으로한  새로운 군부엘리트들에게 
      있어 자본주의산업화는 두 가지 점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명제
      였다. 첫째는,  군부엘리트들은 그들이  집권했던 방식과  유신체제의 
      수립을 통하여 민주주의의 원칙을  파기하였기 때문에 경제발전이라는 
      업적을 통하여 이를 보전할 수 있는 정당성의  근거를 찾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둘째는, 위에서 말했듯이  전쟁이 아닌 방법으로 그
      들은 남북한간  경제발전 경쟁에서 승리하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이
      다. 민주주의가 이들에게 있어 가장  약한 고리였다면, 경제발전은 이
      들이 가장 효과적으로 해낼 수 있다고  판단한 강점이었을 것이다. 그
      들은, 이전의 정권이 남북한 관계를 아무것도  하지 않는 소극적 대결
      구조로 접근하였던 것과는 달리  산업화경쟁이라는 적극적 대결구조로 
      방향을 바꾸어  통일문제를 혁신적으로  새롭게 접근하였다.  이것은, 
      4.19가 제기하였던  중대의제, 즉 민주주의,  민생문제, 통일문제라는 
      역사적 과제를 군부엘리트들이 대면했던 방법이었다.  그리고 그 가운
      데서 민생문제의 해결은 가장 성공적인 것이었다.
           5.16으로 한국정치무대의  전면으로 등장한 군부엘리트들은,  이
      승만과 민주당정권의  舊엘리트들과 완전히 종류가  다른 집단이었다. 
      舊엘리트들은 한국사회의  최상층계급으로 부터 왔다.  그들의 대다수
      가 일제식민통치의 수혜층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민족적 차별을 제외
      하고는 최소한 그 때문에 박탈된 계급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들은 해방이후 혼란이  왔을 때 탈식민 사회에 있어서  구질서가 최소
      의 변화와  더불어 온존되기를 바랐던  가장 완강한 보수세력이  되었
      다. 반면  새로운 군부엘리트들은 한국사회에서의 최빈층,  빈한한 농
      민출신들이 대다수였다. 따라서 그들이 비록  일제하 군사교육과 친일
      적 배경때문에 자주  비판된다 하더라도, 해방후 그들의  대부분이 북
      한으로 갔던 항일무장운동에 투신하였던  동시대의 젊은세대들과 유사
      한 계급적  배경을 갖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남한의  군부엘리트들
      은, 가장 미국식  교육으로 훈련된 군사경험과 특히  한국전쟁의 경험
      으로 한국사회에서 가장 근대화된 집단이었다.  사실상 5.16의 주역들
      과 4.19의 주역들은 분단이후 50년대를  통하여 가장 강력하게 미국식 
      가치와 이념을 교육받은 사회집단이며,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미국의 
      헤게모니가 관철된   전후세대의  쌍생아였다. 차이가 있다면  4.19의 
      주역들이 사회의 상층  및 중산층으로 부터 왔다면,  5.16의 주역들은 
      민중출신이라는 사실이다.  이 글의 범위를 넘는  주제이지만, 이들이 
      70, 80년대의 군부독재  기간 동안 서로 융합되면서  사회의 상층엘리
      트층을 형성하게 된 것은 흥미있는 사실이다.
            무엇보다 군부는  이 시기 한국사회에 있어서  목적합리성을 가
      지고 효과적으로 조직의  목표를 수행할 수 있는 가장  근대화된 조직
      이었으며, 군부엘리트들은 이러한 조직의  산물이었다. 이는 민주당의 
      구엘리트들과는 완전히  배경이 다른  엘리트집단이 아닐 수  없었다. 
      박정권하에서 군부엘리트들은 구엘리트들을 대체하고,  자신들의 헤게
      모니하에 구엘리트들을 포섭.융합하게 되었다.  이들의 정향은 군사주
      의의 중심적인  에토스라고 할 수  있는 도구적 합리성과  기술관료적 
      경영주의(technocratic managerialism)로  특징되었고 이들의  가치와 
      정향이 전체 사회에  대해 헤게모니적 지배력을 갖게 되는  것은 시간
      문제에 지나지  않았다. 우리는, 이러한 에토스로  무장된 군부엘리트
      가 주도한  위로부터의 권위주의적 산업화를 한국사에  있어서 두번째
      의 '수동혁명' 또는 '보수적 근대화'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박정
      권은, 무엇보다도  한국을 근대산업사회로 혁명적으로  변화시켰고 노
      동자 농민들이 절실하게 요구하였던  민생문제를 이들을 억압하면서까
      지 해결해 주었기 때문이다.

      5. 박정권이 남긴 것들

           경제발전과 정치의  권위주의화를 결합시키는 방법을  통하여 수
      행된 박정희식 근대화의  공과를 평가하는데 있어 다음의 두  가지 문
      제는 매우 중요한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박정권이  권위주의적 자본
      주의산업화에 상당한  정도의 성공을  거두었다고 인정한다  하더라도 
      이러한 체제가  민주주의를 발전시킬 수  있는 어떤 출로를  가졌느냐 
      하는 문제이다. 다른  하나는 박정권이 추진했던 특정  형태의 자본주
      의 산업화가  이후에 한국사회가 민주주의를  발전시켜 나갈 때  이를 
      위한 정치적, 사회경제적  기반을 조성함에 있어서 얼마나  기여할 수 
      있었느냐 하는 문제이다. 50년도 채  안되는 한국현대사에 있어서, 국
      가건설과 그것도  정치적으로 엄청난 소용돌이 속에서  분단정권을 수
      립할 수 밖에  없었던 조건과, 자본주의 산업화를  이룩하고 민주주의
      를 정착시켜야  하는 과제 모두를  특정 정권이 수행하기  어려웠다는 
      한국적 특수성을 고려할  때, 필자는 박정권은 그에  주어진 산업화의 
      임무를 잘 수행했다고 평가하게 된다.
           특히 1960년대  박정권이 수립된 초기, 뒤늦게  산업화를 시작한 
      후후발산업화 국가인 한국이 앞선  선발산업국가를 따라잡는데 있어서 
      개발독재는 차라리  하나의 필요악처럼 보인다.  후발산업화를 시도하
      는 국가들이  산업화의 출발시기가 늦을수록 선발국가를  따라잡기 어
      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계자본주의체제에서 호조건이  주어졌을 때 
      이를 놓치지 않고  능동적으로 활용하는 것, 즉  산업화의 타이밍문제
      는 매우 중요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60년대 초의 산업화의 
      출발은 중요하다.  50년대가 한국전쟁으로  전후복구에 온 힘을  쏟을 
      수 밖에 없던  시기였고, 70년대는 그 타이밍에 있어 너무  때늦은 시
      기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60년대는 한국이 산업화를 시작할  수 있었
      던 가장 빠른 시기가 아닐 수  없었다. 정부도 정치엘리트들도 국민도 
      근대화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개발초기  박정권은 권위주의적인 
      방법을 통한 비상한 힘으로 국민적  에너지를 국가가 주도하는 자본주
      의 산업화에 동원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배링턴 무어의 이론을 빌리지 
      않더라도, 지상의 모든  국가들은 근대화 과정을 회피할 수  없다. 그
      리고 자본주의적 경로가 아닌 사회주의와  같은 다른 대안적 경로들은 
      이제 그  효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우리가 배링턴 무어로 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정황하에서 근대화를 하느냐 하지  않느냐 하는 
      선택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이  전환과정에서 얼
      마나 적은 댓가를  치르느냐, 특히 농민과 노동자라는  사회의 저변대
      중의 어깨  위에 떨어질 수 밖에  없는 그러한 댓가의  무게를 얼마나 
      줄이느냐 하는데 관심을 갖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긍정적 평가는 한국의  산업화전략의 초기, 그 틀
      이 잡히는 형성기에는 합당할 수 있지만,  산업화가 도약을 시작한 안
      정기에까지 항구적으로  권위주의적인 방법이  적용될 수는 없다.  즉 
      1970년대초 유신체제의  수립과 중화학공업화로의 산업구조전환이  맞
      물려 진행되어야 할  필연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현실은 이러
      한 식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모든  권력이 이미 1인에게로  집중되고 
      그가 뜻하기만 하면  엄청난 경제성장이 가져온 자원을 동원할  수 있
      는 조건에서 대통령이 개인의 의지로  권력을 포기한다는 것은 비현실
      적이다. 바꾸어  말하면 고도성장을 추진하는  과정에서의 국가권력의 
      팽창과 이를  기반으로한 권력의 초집중화현상,  국가권력과 거대자본
      의 긴밀한  협력관계의 발전을 수반하면서 정치의  권위주의화와 고도
      성장이 수레바퀴처럼  맞물려 상승작용을 일으키는 구조적  조건에 저
      항하기에 대통령의 자유의지는  허약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박정권은  그 자체가 출로를 갖지 못한  이율배반적 체제로 
      보인다. 왜냐하면  박정권은 일정기간  동안 긍정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으나 그 자체가 체제전환을 할 수  있는 정치력을 갖지 못했던 
      불완전한 체제였기 ㄸ문에  그것은 외부의 어떤 힘에 의해  폐기될 운
      명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박정권은 그것이 의도하지  않았던 두 가지 방법으로,  즉 하나
      는 그것이 만들어낸 성공의 결과로 다른 하나는  그 실패의 결과로 민
      주화에 기여했다. 성공의 결과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산업화 
      없이 민주주의가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후일 80년대에 
      들어와 60, 70년대를 통하여 발전하고  팽창한 시민사회가 폭발하면서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민주주의를 향한 요구가  밑으로부터 분출했다. 
      사회는 서구사회와 같이 높은 산업화와  도시화의 수준을 이루었고,그 
      속에서 사회의  기능적 직능적 분화가 가속화되고  중산층이 엄청나게 
      팽창하였으며, 노동자, 농민과 같은  사회의 저변대중층이 성장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구조를 갖는 사회에서 권위주의는  더 이상 그 존립기
      반을 찾을 수 없다. 그것이 실패의  결과라는 뜻은 민주주의를 폐기하
      고 권위주의를 편  결과 50, 60년대와는 판이한  강력한 민주화세력을 
      형성시키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회로 부터  체제에 반대하는 시민들과 
      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민중세력들의  저항이 없었더라면  유신체제의 
      붕괴는 훨씬 뒤로  미루어 졌을 것이다. 그리고  급기야는 민주주의를 
      가져온 80년대의 강력한 민주화의 힘은 이를 모태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보다 중요한  문제는 박정권이 이루어낸  특정 
      형태의 산업화가 이후  민주화 과정에 미치게 될 영향을  검토하는 것
      이다. 여러 요소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은 거의  통제불능상태로 팽
      창한 재벌의 영향력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산업화전략은, 국가가 
      거대기업을 창출하고 그들로 하여금 국가의  목표를 수행토록 하는 방
      법으로 추진된 바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국가의 경제적 기반과 정부
      의 업적이 소수재벌기업에 의존할 수 밖에  없게 되고, 이들이 국가의 
      경제를 좌지우지하게 되었다. 민주화가 정치화된  군부를 병영으로 퇴
      진시키고 경제적  시장자유화와 동일시될 때 한국사회에서  재벌에 대
      응할만한 힘은 어디에도  존재할 수 없게 되었다.  민주주의가 권위주
      의 국가  권력의 많은 부분을  시민사회와 국민에게로 이양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을 때, 실제로 그 권력은  국민이 아닌 재벌에게로 돌아가
      고 있기 때문이다. 
           재벌은 국가내의  국가, 즉 국가권력이 침투하기  어려운 독자적
      인 거대조적으로  발전하면서 그 소유와  결정의 구조는 민주적  통제 
      밖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자유화된 시장을  통해 독점적 힘을 행사
      하는 사익추구적 재벌에 대하여 민주주의적  정치의 힘을 통하여 공공
      재를 창출해야 하는  국가의 힘은 왜소해 보인다.  동일재벌기업이 생
      산, 유통,  써비스, 레저, 교육, 문화,  스포츠, 언론, 정치  등 모든 
      영역을 동시에 통제하는 방법으로 재벌의  힘은 통제불능의 엄청난 영
      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시민사회에서 재벌의  헤게모니는 압도적이
      다. 또한  정치사회에서 재벌의 힘은 "정경일체"라는  말이 표현하듯,
      정치와 경제의  기능분화를 무너뜨리고 정치를  지배할 수 있게  되었
      다. 특히 박정권의  권위주의 체제하에서 창출되고 성장한  재벌은 한
      국사회에서 자유주의와 이에 기반을 둔  민주주의에 대한 완강한 저항
      세력이었고 효율지상주의적인  기술관료적 경영주의와 군사주의  이데
      올로기의 보루였던 것이다. 이러한 이데올로기를  체화한 보수적 기득
      세력층이 너무  두텁게 형성되어 변화가  필요한 시점에서 변화할  수 
      없는 조건이 되어  버린 것이다. 요컨대 재벌구조의  유지와 민주주의
      는 양립하기  어렵게 된  것이다. 박정권의 권위주의는  군부엘리트를 
      통하여 전수되는 것이 아니라 재벌을 통하여 전수되고 있는 것이다.
           두번째의 장애는 한국사회에 관료권위주의를  뿌리내리게 했다는 
      사실이다. 박정권의  군사주의는 관료권위주의를 강화하였고  이를 통
      해 실현되었다. 권력이  중앙과 정점으로 집중되고 이  권력이 피라밋
      식의 위계적 관료체제를 통하여 외표화되는  현상을 모두 박정권의 책
      임이라고 전가할 수는  없다. 그것은 조선조이래 면면히  끊이지 않고 
      지속된 한국정치의  특성이며 정치문화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오늘날  우리가 목도하는 국가관료기구의 강력한  힘은 박정희가 
      그의 야심적인  근대화계획을 추진하기  위해 발전시킨  관료체제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제 80년대 후반 민주화로의  전환이 요구될 때 이렇
      게 비대해진  관료조직은 거대한 하나의 이익집단으로  변모하여 민주
      개혁에 반대하는 가장 완강한 저항세력으로 성장한 것이다. 
           박정권이 민주주의에 가져다 준 세번째의  장애는 거시경제 운영
      원리의 중요한 축의 하나를 이루었던  권위주의적인 노동통제라 할 수 
      있다. 이는 재벌  편향적 성장제일정책의 다른 한 축이다.  이러한 국
      가의 노동정책은 한국의 산업가들과  보수적인 정치엘리트들로 하여금 
      기업-노동 파트너쉽이라는  개념 자체를 없애 버리는데  기여했다. 이 
      권위주의적 노동통제는 산업생산 수준에서의  노사관계에 있어서나 정
      치적 수준에서의 정치참여의 면 모두에서  중대한 부정적 효과를 갖는
      다. 우리가 박정권의 초기에 해당하는  산업발전의 형성기에 자유주의
      적 틀 내에서 노사관계가 형성되기를  바라는 것은 지나친 기대일는지 
      모른다. 
           그러나 산업발전의  안정기에 접어  들어 모든 경제영역에  있어 
      국가의 경제개입이  줄어들고 국가-자본관계가 일방적  지도로부터 오
      히려 기업의 이니셔티브가 국가의 그것을  능가하는, 그럼으로써 국가
      행위가 기업을 지원하는 일종의 국가-기업간  코포라티즘적 관계로 변
      화한 시점에서 조차,  노동의 권위주의적 통제가 지속된다는  것은 중
      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제 노동의 권위주의적 통제는  한국의 
      고도자본주의 성장단계에서 노사관계의 전환과  발전을 저해하는 질곡
      으로 변화하게  된 것이다.  이제 한국의 경제발전수준이  노동억압적 
      노사관계에 기반을  둔 '포디즘'적 대량생산체제로 부터  벗어나 고임
      금, 고기술, 유연생산체제를 중심으로하는  '포스트-포디즘'적 생산체
      제로의 전환을 통하여 국제시장에서 경쟁해야  할 시점에서 그러한 전
      근대적이고 권위주의적  노사관계는 더  이상 順기능적으로  작동될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권위주의적  노사관계는 무엇보다도  민주주의와 
      양립할 수 없다. 민주주의는 그 정의에  있어 대중의 정치참여와 이를 
      통한   대중의  조직들간의   자유로운   선거경쟁을  통해   '대중권
      력'(demo-power)을 실현하는  체제이다. 노동자계급의 정치참여  금압
      은 그것이 단순히  사회의 여러 다원적 사회집단 중의  하나를 금압하
      는 것이 아니라 생산의 관계에서나  사회관계에서 그 중심에 위치하는 
      집단의 하나를 금압하는 것이다. 민주주의가  현실에서 모든 사회집단
      의 정치참여를  허용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이러한  핵심집단의 참여
      를 금지할 때 이를 민주주의라고 부르기  어렵다. 우선 핵심집단을 금
      압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강력한 비민주적인 국가의  억압기제가 존재
      하지 않으면 안된다. 권위주의적인 억압기구의  상존과 핵심집단의 정
      치참여의 제약은  정당내 구조와 정당체제,  시민사회의 기본조직들로
      서의 이익집단  및 자발적 단체의  활동을 포함하는 정치체제  전체를 
      심대하게 왜곡할 수 밖에 없다. 이는  그 체제가 군부권위주의로 불리
      우든, 민주주의로  불리우든 한국의  정치를 항구적으로 사회  상층의 
      엘리트간 게임으로 만들 수 밖에 없고,  그렇기 때문에 대중이 항구적
      으로 정치로 부터  소외되는 '위로부터의 개혁'을 되풀이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네번째 장애는  박정권의 산업화전략이 만들어낸  호남배제의 지
      역차별이다. 박정권의  비판자들은, 계층간, 부문간,  지역간, 거대기
      업과 중소기업간 등의 불균등산업화를 부정적  요소로 지적해왔다. 그
      러나 이러한  여러 부면에서의  불균등산업화 가운데서도  지역차별을 
      중요한 문제라고 보는 것은, 그것이 80년대  민주화 과정에서 가장 중
      요한 정치적  균열요소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박정권은 산업과  농
      업, 도시와 농촌간의  부문간 불균등 발전을 완화시키려는  많은 노력
      을 기울인 바 있었다. 새마을운동은 그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재벌중심의 고도성장정책은  이러한 불균등산업화를 필연적으로  수반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지역차별문제가 호남차별이라는 집중성
      을 갖게 됨에 따라 문제의 심각성이  나타난 것이다. 호남을 배제하는 
      지역차별은 단순한 지역간 불균등발전의 한형태가  아니라, 특정 지역
      에 집중되고 특정  지역을 배제하는 산업가와 재벌의  편중, 정치엘리
      트의 편중, 산업과  농업의 편중, 계급적 계층적 구조화  등의 문제와 
      중첩되어 나타났기 때문에 그러하다. 80년대의  호남문제가 보다 직접
      적으로 전두환정권의 광주사태로 부터  유발되었다고 하더라도 박정권
      이 원인을 제공한 것은 사실이다.

      6. 맺는말

           박정권의 성장제일주의적 발전전략은 한국사회의  자본주의 산업
      화를 가능케 하는데  있어서 효과적인 것이었고, 우리가  보다 민주적
      인 방법에 의한 어떤 대안을 발견하지 못했을  때 긍정적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민주주의가 60년대 이후 산업화의  토대없이 발전하기 
      어려운 것이었다고  할 때 한국의  민주화는 산업화의 일정한  수준에 
      도달된 이후의 과제로 미루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박정권을 평가
      함에 있어서  우리는 후후발산업화가 초래할  수 있는 부정적인  측면 
      모두를 박정권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그것은  후후발산업화 일반
      의 문제이지 박정권의  문제라고 보기 만은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양자를 구분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가 후후발산업화를 선택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아닌가 하는 문제는 이 글의  범위를 넘는 보다 철학
      적인 문제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들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박정권  자체가 군사주의를 바탕으로 빚어낸  정치적 권위주
      의의 과오를 절대로 과소평가해서는 안될 것이다.
           다른 한편  민주개혁을 통하여 민주주의를  공고화하는 과정에서 
      민주주의발전에 저해적인  요소나 민주주의의  실패를 모두  박정권에 
      그 기원을 갖는 구조적 요소에 돌리는  것을 허용해서도 안된다. 90년
      대초 김영삼정부는  민주화 개혁을 할 수  있는 더 없이  좋은 입지에 
      있었다. 그것은  한국사회가, 박정희정권이 남겨 놓은  민주주의를 저
      해하는 여러가지 장애요인을 극복할 수  있는 엄청난 동력을 가졌음을 
      의미한다. 만약 김영삼정부가 보다 민주적인  의지를 가졌다면 재벌구
      조는 상당 정도로  합리적이며, 자유주의적으로 재편될 수  있었을 것
      이고, 관료체제는 지금보다 훨씬 더 민주적으로  개혁될 수 있었을 것
      이며, 노사관계는 보다 민주적으로 재편될  수 있었을 것이고, 호남은 
      보다 체제내로 통합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안타깝게도 김
      영삼정부는 이러한  사회의 동력을  허비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렇게 될 때 권위주의를 극복하지 못하는  책임은, 이를 전수해준 박
      정권보다 민주주의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김영삼정부에게  돌아갈 것
      이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 "활쏘기는 군자의 덕성과 비슷한 바 
가 있으니, 활을 쏘아 과녁을 벗어나더라도 오히려 그 이유
를 자기 몸에서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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