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요키에로타) 날 짜 (Date): 1998년 12월 12일 토요일 오후 06시 46분 44초 제 목(Title): 유석춘/유교자본주의와 IMF개입 '유교 자본주의'와 IMF 개입 유석춘 ------------------------------------------------------------------------------- - 현재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1955년 생. 81년 연세대 사회학과 졸업, 86년 미국 일리노이대학 사회학 박사. 한국사회학회 총무, '연세춘추' 주간, 한국동남아학회 총무 역임. 『막스 베버와 동양사회』, 『발전과 저발전의 비교사회학』, 『동남아시아의 사회계층』, 「유교 자본주의의 가능성과 한계」 등 논저 다수 ------------------------------------------------------------------------------- - ------------------------------------------------------------------------------- - 1. 위기를 기회로 바꾸려면 온 나라가 침통해 하고 있다. 국민들은 IMF의 개입을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과 같은 국치를 당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고, 여론을 주도하는 언론은 이런 분위기를 앞장서 확산시켜 왔다. 하기야 미국의 조정을 받는 국제통화기금(IMF)에 앞으로 3년간의 경제정책을 미주알 고주알 협의하고 허락을 받아야 한다니 경제주권을 빼앗겼다는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다. 1997년 가을부터 기자들이 전해 온 우리 정부와 IMF간의 협상과정 또한 우리 국민의 자존심을 무참히 짓밟기는 마찬가지였다. 우선 우리 국민은 김영삼 정부가 숨기려 했던 국가의 부도위기 정보를 IMF측의 공개에 의해 알게 되었다. 구제금융에 관한 실무진의 협상결과를 양측의 최고책임자가 수용하는 과정에서도 우리는 수모를 당하였다. 캉드쉬 총재의 의중은 비상소집된 한국 정부의 국무회의를 웃음거리로 만들었으며, 급기야는 대선 후보들마저 양측의 양해각서에 동의서를 제출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하였다. 온 나라가 '세계화'를 한다고 법석을 떨더니 결국 한 일이란 우리 나라의 국무회의를 국제통화기금의 총재 밑으로 편입시킨 일 뿐이었다. 그 결과 대선 후보들은 집권을 해 보기도 전에 운신의 폭을 저당 잡혀야 했고, 열심히 일해서 저축한 국민들은 돈 떼이고 실직 당할 처지로 내몰리게 되었다. 누구의 잘못인가? 우리 나라가 언제부터 이 지경으로 전락하게 되었는가? 지금까지 우리 나라의 경제적 성공을 평가할 때 누구도 부정하지 못하는 요소를 한가지 찾는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 나라가 매우 능률적인 경제관료 집단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Johnson, 1985). 경제발전에 필요한 일을 계획하고 집행하는 과정에서 이들 관료가 제공한 역할은 다른 어느 국가와 비교하여도 독보적인 것이었다. 이들이 한편으로는 '시장경제를 수용'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국내산업을 보호'하였기 때문에 우리 나라의 경제는 세계에서 유래를 찾을 수 없는 고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시장경제 유지'와 '국내산업 보호'라는 두 가지의 정책적 목표는 '수출주도산업화'라는 보다 구체적인 전략으로 결집되어 이를 실현하기 위한 정책수단이 하나하나 제공되면서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였다. 그리고 경제관료는 이 전략을 추진하는데 필요한 모든 행정적 지원과 결정을 도맡아 처리하였다. 그래서 경제적 동원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관치금융'이라는 금융정책 그리고 '재벌육성'이라는 산업정책은 모두 수출을 위한 관료집단의 선택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OECD 가입을 위한 샴페인을 터뜨려도 좋을 정도의 성공으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과거의 성공이 미래의 성공으로 자동적으로 연결될 수는 없다. 우리 경제관료 집단은 과거의 성공에 안주하면서 국내외의 변화된 상황에 적절히 적응하지 못하였다. 국내적으로 재벌은 이미 육성의 대상으로 남아 있지 않았다. 정부가 육성하지 않아도 이들은 스스로의 판단으로 온갖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며 공룡화를 시도하고 있었다(Kim, 1997). 그런 재벌을 과거와 같은 특혜금융으로 뒷받침해 줄 까닭이 없었다. 재벌 스스로도 오히려 정부가 방해만 하지 말아 달라는 형국이었다.(1) 국제적으로도 사회주의가 무너지면서 출발한 WTO 체제는 국내산업에 대한 특혜를 인정해 주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부실기업을 붙들고 밑 빠진 독에 물 붓듯이 재정을 낭비할 이유가 없었다. 과거와 같은 경제정책이 효과적이지 않을 것임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2) 그러나 경제관료는 이러한 요구를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중앙은행의 손발을 잘라내고 재경원을 키우는 일에 매진하였다. 기업의 자율성을 제고하여야 할 시점에서도 우리 경제관료는 재벌의 '배째라'식 요구에 끌려 다니기만 하였다. '경쟁력'보다는 '애국심'에 호소하여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해 보겠다는 자세 자체가 WTO 체제라는 시대의 조건과는 맞지 않는 구시대적 발상이다.(3) 그런 의미에서 이번 IMF의 구제금융 조건은 우리 경제의 자율성과 탄력성을 확보할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어 오히려 위기를 기회로 바꿀 수 있는 계기로 작용할 수 있다. 재벌에 끌려 다니고 노조에 끌려 다니며 앞뒤가 맞지 않는 경제정책을 수시로 발표해 온 우리의 경제관료는 이제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하고 뼈를 깎는 고통을 치러야 한다. 시대의 흐름과 국내외의 상황변화에 적절히 대응할 수 있는 그리고 국민적 이익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하는 관료집단으로 재탄생하기 위해서는 물론 관료 자신의 변신이 중요하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이들에게 실질적인 권한과 책임을 위임하고 일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어야 하는 정치권의 변신이다. '챙기는 관료'가 존재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정치권의 지도력이 절실하다. 이도 저도 안되면 마지막으로 정치권을 개방하여 '구조조정'을 해야 할 판이다. ------------------------------------------------------------------------------- - 2. IMF 개입의 원인' 30년을 넘게 성장하던 우리 경제가 왜 갑자기 지난 겨울을 기점으로 거꾸러지게 되었는가? 국내외의 의견이 분분하다(한국정치연구회, 1998). 우선 가장 설득력 있다는 외국 전문가의 고견을 한 번 들어보자. 제일 유명한 사람은 신고전주의 경제학을 신봉하는 MIT 대학의 크루그만 교수다(Krugman, 1994). 그는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경제의 성장이 구사회주의권의 경제와 같이 생산에 필요한 요소의 투입을 동원을 통해 확대하면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한계에 부딪칠 것이라고 일찍이 예언한 바 있다. 그리고 우리 경제는 작년에 드디어 성장을 멈추어 버렸고, 이에 따라 크루그만은 엄청난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이 견해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동아시아의 경제는 과거 사회주의권의 경제가 보여 주던 문제점 즉 강제적 동원에 의한 '무기력'을 전혀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다. 사회주의는 경제적 행위자들에게 이윤추구의 동기부여를 인정하지 않는다. 대신 공산당의 계획과 집행이 있을 뿐이다. 이 체제에서는 따라서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그 결과가 자신에게 돌아오지 않는다. 그러니 일할 까닭이 없고, 따라서 경제는 활력을 가질 수 없다. 여기까지는 나도 크루그만 교수의 견해에 백퍼센트 동의한다. 그런데 문제는 과연 한국이 구사회주의권과 같은 모습을 보여주는가 하는 부분이다. 나는 크루그만 교수에게 한가지 충고를 하고 싶다. 당장 서울에 와서 남대문 시장을 한 번 둘러보라는 권유이다. 그곳에서는 한 푼이라도 더 벌려는 장사꾼들이 손님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눈물겨운 경쟁을 하는 모습을 언제나 발견할 수 있다. 사회주의권의 상점과 같이 손님이 와도 쳐다보지도 않는 종업원은 남대문시장에 발을 붙이지 못한다. 그리고 경쟁이 치열한 만큼 혁신을 통한 생산성의 향상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이다. 그러니 나는 크루그만 교수의 견해에 절대 동의할 수 없다. 크루그만 교수는 그것은 매우 제한된 현상이고 보다 중요한 산업부분에서는 국가가 개입하여 기업의 이윤추구 동기를 꺾고 있다고 주장할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우리 나라 산업활동의 중심적인 역할을 해 온 재벌 기업간의 경쟁이 결코 남대문시장에 존재하는 경쟁의 수준에 비해 정도가 떨어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죽기 아니면 살기로 재벌은 서로 경쟁하여 왔다. 경쟁사와 비교하여 실적이 떨어지는 재벌기업의 사장자리는 파리 목숨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 한국의 현실이다. 그러니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기업의 혁신이 없고 따라서 생산성 향상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주장은 한국의 현실을 너무도 모르는 이야기일 뿐이다. 물론 그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재벌은 다른 한편으로 국가와의 결탁을 도모하며 독과점적 지위를 유지하려고 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러한 특혜의 대가로 검은 돈이 오갔을 수 있다. 한보 등의 사건이 이를 구체적으로 뒷받침하는 증거가 된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이 우리 나라에만 있는 일은 결코 아니다. 경쟁의 본산이라는 미국에서도 정치권과 기업의 밀착이 검은 돈을 매개로 진행되다가 발각되어 청문회를 여는 등의 법석을 떠는 일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러니 한국의 국가는 특별히 더 부패하고 미국의 국가는 특별히 더 깨끗하다는 주장에도 나는 동의할 수 없다.(4) 문제의 핵심은 우리 국가의 관리 능력이다. 국민소득 만불이 되는 선진국 문턱에서 우리 국가는 방심했다. 춥고 배고픈 시절 어떻게 하면 경제를 일으켜 국민을 잘 살게 할 수 있을까를 불철주야로 고민하던 국가가 소위 말하는 성공에 취해 90년대 새로운 국제경제의 질서 아래 국민경제를 기획하고 관리하는 일을 소홀히 하였다. 경제적 성장과 함께 공룡화되고 있던 재벌의 활동을 제대로 감독하고 통제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지 못한 것이다. 탐욕의 화신인 재벌이 무제한의 경쟁을 벌이며 사적 이익을 추구할 때, 우리 국가는 이를 길들여 국민경제가 무제한의 국제경쟁에서 버텨 나갈 수 있는 방책을 마련해야 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새 정부가 나서 부실기업과 부실은행을 퇴출시키며 재벌을 길들이고 있음은 천만다행한 일이다. ------------------------------------------------------------------------------- - 3. 아시아적 가치논쟁 '아시아적 가치'에 관한 논쟁이 한창이다(김영희, 1998).(5) IMF 이전에는 긍정적인 평가가 부각되더니, IMF 이후에는 부정적인 평가로 돌아서고 있다. 그러나 논쟁의 초점은 서구와 대비되는 가치체계의 내용 그 자체보다는 경제적 성공 여부라는 현실적인 기준이다. 그래서 아시아 경제가 성장할 때는 아시아적 가치의 유용성이 주목을 받았고, 최근 아시아 경제가 휘청거리면서부터는 아시아적 가치의 문제점이 집중적인 성토의 대상이 되고 있다. 아시아적 가치에 대비되는 유럽적 가치는 과연 무엇인가? 두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근대 서구의 발전을 가져 온 유럽의 가치체계를 이르는 말이다. 가톨릭이 지배하던 중세 서구의 질서를 밑에서부터 부정하며 새롭게 등장한 기독교 개신교 분파의 가치체계가 유럽을 중세로부터 근대로 바꾸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음은 누구나 알고 있는 일이다. 그러나 개신교의 가치체계가 근대 유럽의 가치체계로 자리잡는 데에는 두 가지 중요한 계기가 있었다. 첫째는 우선 종교로부터 정치가 분리되는 과정이었다. 세속적인 문제를 다루는 국가가 성스러운 문제를 다루는 교회로부터 분리되지 못하는 한 중세 유럽의 질곡은 깨어질 수 없었다. 르네상스로부터 시작되어 종교개혁을 거치면서 등장한 유럽의 절대주의 국가는 바로 종교로부터 분리된 국가의 탄생을 확인해 주는 역사적 과정이었다(Anderson, 1974). 둘째는 이렇게 탄생한 국가로부터 다시 경제가 분리되는 과정이었다. 재분배의 과정을 정치적으로 결정하는 국가의 통제로부터 경제가 분리되지 않는 한 서구에서 산업혁명과 같은 생산력의 비약적 발전은 기대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 과정에서 개신교의 가치체계는 자유방임이라는 이데올로기를 내세우며 유럽의 시장을 국가로부터 독립시키는 작업에 성공했다. 시장의 주역이었던 부르조아 계급이 귀족의 절대주의 국가를 무너뜨리며 경제적 이익의 자유로운 추구를 지배적인 가치로 등장시킨 것이 바로 유럽의 역사인 것이다(Polanyi, 1957). 이러한 두 단계의 분리과정을 거치면서 유럽은 기독교 개신교 분파의 가치를 지배적인 가치로 수용하게 되었다. 근검절약을 전제로 절대자와의 고독한 만남을 통해서만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개신교의 가르침은 이러한 사회구조적 변화를 배경으로 근대 서구에서 자본주의를 탄생시킨 정신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Weber, 1958[1930]). 그렇다면 아시아적 가치는 과연 어떠한 사회적 및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자라온 것인가? 아시아적 가치는 물론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다. 어쩌면 비유럽적 가치는 모두 아시아적 가치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중동의 무슬림에서부터 인도의 힌두교 그리고 동남아시아의 불교는 모두 넓은 의미의 아시아적 가치에 포함될 수 있다. 그러나 최근 관심의 주된 대상은 물론 동아시아의 유교적 가치체계이다. 그러나 동아시아의 역사는 앞에서 살펴보았던 유럽 역사와는 엄청난 차별성을 보여 준다. 우선 유교는 처음부터 세속적인 종교이었기 때문에 국가를 종교로부터 분리할 여지가 없었다. 예수가 태어나기 수백 년 전부터 전개된 유교의 가르침은 개인의 구원이라는 성스러운 문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처음부터 유교는 국가를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가의 문제에 관심이 집중된 가치체계였다. 그렇기 때문에 서구에서 진행되었던 정치와 경제의 분리라는 두 번째의 과정도 동아시아에는 전혀 나타날 여지가 없었다. 유교적 가치체계에서 생산이 정치적 재분배로부터 독립하겠다는 생각은 국가의 올바른 역할을 포기하는 일과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Hall & Ames, 1987; Tu, 1996). 이러한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맥락을 무시한 채 진행되고 있는 최근의 아시아적 가치에 관한 논쟁은 그래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 가족이나 공동체의 중요성 혹은 혈연, 지연, 학연의 기능과 역기능은 모두 사회의 구조적이고 총체적인 짜임새와 연관될 때에만 의미를 갖는다. 역사적 축적을 사상한 채 현실의 부침에 편승하는 아시아적 가치에 관한 논쟁은 지양되어야 한다. ------------------------------------------------------------------------------- - 4. 경제위기와 가족자살 우리는 흔히 자살을 극단적인 개인적 불행의 결과로 이해한다. 소외되고 좌절한 삶이 최종적으로 선택하는 대안이 자살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자살이 개인적이고 심리적인 차원의 문제만이 아니라 사회적이고 집단적인 차원의 현상이라고 밝힌 사회학자가 있다. 불란서 혁명기의 혼란한 사회를 분석한 뒤르껭이다(Durkheim, 1951[1930]). 뒤르껭은 자살이 사회적 통합과 매우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현상이라고 생각하였다. 사회적 통합이란 사회를 구성하는 여러 개인과 집단이 공통의 규범과 가치를 따르는가 혹은 그렇지 못한가에 의해 결정되는 개념이다. 혼란한 사회는 통합의 정도가 낮고, 안정된 사회는 통합의 정도가 높다. 이로부터 한 걸음 더 나아가 뒤르껭은 사회적 통합의 수준에 따라 서로 다른 종류의 자살이 발생한다고 생각하였다. 즉 통합이 강한 사회는 '이타적' 자살이, 그리고 통합이 약한 사회는 '이기적' 자살이 많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기적 자살은 자신만을 생각하는 자살이다. 남아 있는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되건 상관하지 않는다. 뒤르껭은 이러한 자살이 '무규범'의 상태에서 많이 발생한다고 설명하였다. 서로 다른 가치와 규범이 혼재할 때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헷갈리고, 방황과 고민 끝에 죽어 버리는 것이 가장 편하다는 생각을 한다. 반면에 이타적 자살은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경우이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친 수많은 애국 열사의 경우가 바로 이러한 자살에 해당한다. 집합적인 가치가 개인의 선택을 지배하는 '초규범'의 상황에서 이타적 자살은 자주 발생한다. 최근 우리사회는 가족의 집단자살이라는 충격적인 사건을 빈번히 목격하고 있다. IMF 시대가 초래한 비극의 가장 극단적인 모습이다. 40대 가장의 실직을 계기로 아내는 물론 어린 자녀까지 동반하여 죽음을 선택하였다는 보도는 온 국민을 숙연케 한다. 또한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으로까지 이르지는 않았더라도 아이들을 보육원에 버리는 일이 증가하고 있다는 보도 역시 우리들을 우울하게 만들기는 마찬가지다. 사회적 환경의 급격한 변화와 함께 등장하고 있는 무규범 상태가 초래한 비극이다. 분명 뒤르껭의 분석은 IMF 시대 한국사회의 심각한 사회문제를 설명하는데 상당한 설득력을 제공한다. 그러나 가족의 자살에 관한 의문을 모두 해명해 주기에는 역부족이다. 왜 한국의 무규범 상황에서는 '자살의 단위'가 개인이 아니고 가족으로 나타나는가? 이 질문은 역시 우리 사회의 역사적 발전의 특수성을 고려해야 답을 찾을 수 있다. 서양의 근대화는 가족이나 이웃과 같은 전통적인 사회관계로부터 개인을 분리해 내는 과정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변화를 요약한 표현이 바로 '공동사회에서 이익사회로' 혹은 '일차집단에서 이차집단으로'와 같은 말들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우리 사회는 역사적으로 개인을 가족으로부터 분리하는 과정이 존재하지 않았다. 전통사회의 이념인 유교는 다른 어떤 이데올로기보다 가족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념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유교적 인간관계는 우리 사회의 급속한 근대화 경험에도 불구하고 전혀 약화되지 않았다(고병익, 1996; 함재봉, 1998; Helgesen, 1998). 그렇기 때문에 수출을 중심으로 급속히 세계시장에 편입한 지 3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우리 나라의 경제는 여전히 '재벌'이라는 가족중심적 기업조직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또한 국가나 기업의 중요한 직책을 맡을 때 우리는 지금도 친인척이 신원보증을 하도록 한다. 한편 사업에 필요한 자금을 빌리는 경우에도 우리는 가족이 대부분 보증을 선다. 우리는 이렇게 발전하여 왔다. 가족주의는 한국식 발전모델의 사회적 기반이었고 원동력이었다. IMF가 초래한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사회현상에서도 우리는 가족이라는 사회적 단위의 강력한 기초를 읽을 수 있다. ------------------------------------------------------------------------------- - 5. 한국의 유교적 가치 부유한 딸의 집에 살던 병들은 아버지와 가난한 남동생 가족은 딸(누이)이 요구하는 최소한의 월세도 낼 수 없어 딸로부터 집을 비워 달라는 요구를 받는다. 딸은 자신의 요구가 관철되지 않자 급기야 재산권의 행사를 법에 호소한다. 1심과 2심은 딸의 손을 들어준다. 그러나 대법원은 딸의 재산권은 인정하지만 그것의 행사는 인륜을 저버린 행위이므로 부당하다고 판결하고 사건을 하급법원으로 되돌려 보낸다. 1998년 6월 12일 있었던 대법원 판결의 내용이다. 그리고 우리 나라의 거의 모든 언론은 다음날 이 사건을 대서특필하였다. 왜 그랬을까? 비정한 딸의 재산권 행사보다는 병든 부모를 모셔야 한다는 인륜이 더욱 중요한 가치라는 대법원의 판단에 동의하기 때문이다. 배타적 재산권에 기초한 개인주의적 삶을 우리 사회는 아직 수용하지 못하고 있다. 아니 '아직' 수용하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절대' 수용하면 안 된다는 정서가 지배적이다. '서구화'와 어떤 차이를 가지고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는 소위 '근대화'가 한국에서 시작된 지 이미 100년이 훨씬 넘었다. 1876년의 강제된 개항이후 한국은 끊임없이 근대화를 추구하여 왔다. 그 결과 정치체제와 경제제도가 바뀌었고, 가치체계와 생활양식이 달라졌다. 누구라고 특별히 구분할 필요도 없이 우리는 모두 서구의 제도와 가치를 본떠 새로운 사회를 만드는데 열심이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상당한 성과를 이룩하였다. 지난해 여름까지 우리는 산업화와 민주화를 연속적으로 이룩한 기쁨을 자랑하면서 근대화에 성공하였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성공에 대한 기대가 확신으로 바뀌면서부터 다시 새로운 혼란은 시작되고 있다. 외환시장의 위기가 촉발한 IMF의 개입은 이제 금융은 물론 실물경제까지도 잠식하면서 우리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IMF가 요구하는 신자유주의적 개혁의 논리가 경제는 물론 사회의 모든 구석구석에 침투하여 효율성을 높여야 한다는 목청을 높이고 있다. 심지어 미국을 방문한 대통령까지도 한국은 미국적 가치를 신봉하는 국가이니 안심하고 투자하라고 연설하였다(한국일보, 1998. 6. 14. 2면). 미국적 가치의 표상은 두말할 것도 없이 '자유'이다. 그리고 언론, 출판, 결사, 집회의 자유 없이 민주주의는 불가능하다. 이런 의미에서 자유라는 미국의 가치는 보편적인 민주주의의 전제로 기능하기 때문에 중요하다. 그리고 물론 우리는 '자유'라는 미국적 가치의 보편성을 받아들였기에 미국을 모형으로 한 근대화를 지금껏 죽기살기로 추진하여 온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근대화 그 자체만을 추진하는 일에 급급한 나머지 미국적 가치의 이면에 있는 역사의 유산과 사회적 조건에 관해서는 체계적인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였다. '개인주의'는 미국적 가치인 자유의 개념을 담아내는 또 다른 용어이다. 미국적 자유의 이면에는 개인을 국가나 사회의 개입으로부터 분리해 내는 서구의 역사가 존재하여 왔다. 중세의 교회로부터, 그리고 절대주의 시대의 국가로부터 근대의 개인은 분리되었다. 종교적이고 정치적인 자유를 획득한 이후에 개인은 다시 경제적인 자유를 요구하며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확립하였다. 그리고 경제적 자유를 확립한 서구의 개인은 이제 마지막으로 가족으로부터의 자유를 요구하고 있다. 사회적 약자인 여성과 동성애자의 권리에 대한 보호는 서구의 가족을 해체시키며 개인을 가족으로부터 분리해 내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서구의 근대화 과정이 과연 바람직한 모습인지에 관하여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 인륜을 중시하는 대법원의 판결에 박수를 보내는 가치체계와 배타적 재산권의 행사를 존중하는 개인주의적 가치체계는 결코 양립할 수 없다. 우리는 겉으로 드러난 미국식 가치인 자유만을 추구하였지 그 자유의 이면에 있는 '개인의 분리'라는 역사적 과정에 대한 충분한 검토를 하지 못하여 왔다. 조금 심하게 이야기하면 대소변을 못 가리고 미국을 흉내내는 일에만 급급하여 왔다. 그리고 최근 IMF라는 국난을 만나고 나서부터는 이러한 경향이 더욱 증폭되고 있다. '따뜻한 인륜'과 '비정한 개인주의'는 과연 상보적인 관계로 정착될 수 있을까? 모르긴 몰라도 우리는 두 가지 대안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어려운 결단을 내려야 한다. ------------------------------------------------------------------------------- - 6. '유교 자본주의'와 IMF 개입 한국은 중앙집권적인 사회구조의 유산을 강하게 물려받은 사회이다. 오백 년에 걸친 유교 왕조의 지배와 이를 이은 일본의 식민통치 및 미군정은 한국사회에 항상 분권의 경향보다는 집권의 경향을 강하게 각인하여 왔다. 해방 후의 국가건설, 군사혁명 이후의 경제발전, 그리고 6.29 이후의 민주화 모두 중앙집권화된 관료권력이 주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국가관료의 하향적 지배와 통제가 사회의 나머지 영역을 장악하는 정도와 범위에 있어서 한국은 다른 어떤 국가와 비교하여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 이러한 한국사회의 중앙집권화된 지배구조는 특히 최근의 급속한 경제발전 과정에서 매우 두드러진 역할을 제공해 왔다. 위로부터의 계획과 집행 그리고 감시와 동원을 통해 한국의 경제는 지난 30여 년 간 세계 최고의 성장율을 기록하여 왔다. 물론 국가가 시장에 개입한 범위와 정도는 시기에 따라 변화를 보이지만, 그것은 기본적으로 정부는 상급자 그리고 민간기업은 하급자라는 역할분담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정부와 기업의 이러한 위계적 관계로 인해 한국은 경우에 따라 시장경제의 기본질서를 따르지 않는 개입주의 국가라는 낙인을 얻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바로 그러한 개입주의의 결과 한국의 경제가 압축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최근 논의되고 있는 '유교 자본주의'라는 개념은 한국을 비롯한 유교문화권의 동아시아 국가가 서구의 '기독교 개신교 자본주의'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경제발전을 이룩한 사실에 주목하는 개념이다(Lew, 1996; 1997; 유석춘 1997a, 1997b, 1998). 동아시아에서 유교와 자본주의가 역사적으로 결합하는 과정은 서구에서 개신교가 자본주의와 결합하는 과정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 주었다. 서구는 중세의 지방분권적인 지배질서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개신교와 자본주의가 결합하였다. 그러나 동아시아에서는 중세의 중앙집권적인 지배질서를 유지하는 과정에서 유교와 자본주의가 결합하였다. 따라서 서구의 자본주의는 '밑으로부터' 시작되었고, 동아시아의 자본주의는 '위로부터' 시작되었다. 이 두 자본주의는 발생의 기원뿐만이 아니라 발전의 과정도 대조적이다. 서구에서는 귀족과 대항하며 성장하던 '부르조아' 계급이 경제적으로는 물론이고 마침내는 정치적이고 문화적인 지배계급으로 성장하면서 '자본주의 국가'를 건설하고 노동자 계급을 포섭하였다(Gramsi, 1971). 그러나 동아시아에서는 자생력이 없는 '부르조아'를 국가관료가 경제적으로 육성하는 것은 물론이고 정치적 그리고 문화적으로 지도하면서 '자본주의 국가'를 이룩하였고 노동자 집단 역시 국가의 직접적인 관리 아래에 두고 통제 및 보호하고 있다(Deyo, 1989). 또한 서구에서는 부르조아 집단의 독립적인 '경제적 경쟁력'이 가장 중요한 자본의 축적수단이었다. 그러나 동아시아의 유교 자본주의에서는 지배세력과의 '정치적 유착'이 가장 중요한 자본의 축적수단이었다. '개신교' 자본주의는 모든 경제적 거래에서 '배타적 재산권'의 확립을 경제활동의 예측가능성을 보장하는 전제조건으로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North & Thomas, 1973). 사적인 소유권이 없다면 시장에서 이루어지는 이해 당사자간의 '거래'(Williamson, 1985)가 불확실성에 종속되어, '사회적 신뢰'(Fukuyama, 1995)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교' 자본주의에서는 배타적이고 사적인 소유권보다는 공공의 질서와 이해를 공식적으로 대변하는 정치집단 즉 집권관료의 개입과 보증이 모든 경제적 거래의 궁극적 기준이 된다(Jacobs, 1985). 비록 근대적인 법체계가 사유재산을 보호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국가적 위기와 같은 비상사태가 발생하면 이해 당사자간의 법률에 근거한 거래보다는 도덕적인 기준에 따른 경제행위를 제3자 특히 지식인집단이 요구하고 이를 국가가 관철시키기 때문이다(Hahm, 1986). 한국이 최근의 외환위기로부터 비롯된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유교 자본주의'의 특징은 다시 한번 확인되고 있다. 예를 들면 재벌의 사재를 헌납하라는 요구나 혹은 인위적으로 기획조정실을 폐지하라는 요구 또한 대규모 사업을 서로 교환하여 업종을 전문화하라는 요구(소위 빅딜)는 모두 여론을 등에 업은 지식인 집단의 도덕적인 요구인 동시에 정치권력의 지원을 받는 강압적 요구이다. 특히 이러한 요구를 관철시키고 있는 김대중 대통령의 각종 개혁정책은 국회의 입법과정을 통해 법률적인 정당성을 전혀 확보하지 못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강력한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6) 물론 이를 문제삼는 여론이나 저항은 미미하다. 국민 대중의 지배적인 의견이 이러한 법률적인 문제와 상관없이 대통령의 개혁정책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김영삼 정부의 초반기에 행해진 사정정국이나 5공 초기의 '국보위' 정국에서도 꼭 같이 반복되었던 일이다. IMF의 개입에도 불구하고 '유교 자본주의'는 살아 남을 것이 확실하다. ------------------------------------------------------------------------------- - 7. 재벌과 IMF 개혁 재벌의 입지가 좁아졌다. 차입경영에 의존하던 재벌이 IMF의 '고금리'라는 장애물을 만나면서부터 시작된 일이다. 고도성장시대 우리 재벌은 언제나 특혜의 대상이었다. 재벌은 항상 시중금리보다 낮은 은행대출을 받을 수 있었다. 산업구조를 고도화하기 위한 정부의 정책이 가능성 있는 소수의 기업을 골라 집중적인 지원을 하는 방식으로 전개되면서 온갖 특혜는 재벌에 집중되었다. 따라서 오늘날 문제가 되고 있는 재벌의 차입경영 구조는 국가의 정책선택이 가져 온 필연적인 결과일 뿐이다. 우리는 마치 올림픽에 파견하는 국가대표 선수를 키우듯이 재벌을 육성해 왔다. 그리고 국민들은 재벌이 수출이라는 메달을 따 올 때마다 환호했다. 국제경쟁을 통하여 재벌이 메달을 따오는 한 우리 국민은 재벌에 대한 특혜를 문제삼지 않았다. 80년대 후반 일부 재벌이 드디어 중화학공업 분야에서 금메달권에 진입했을 때 우리는 특혜에 의한 재벌의 성장을 성공의 모형으로 받아들였다. 우리뿐이 아니었다. 전세계가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성공을 배워야 한다고 법석을 떨었다. 당시 침체하고 있던 미국과 유럽의 경제는 한국을 '아시아의 다음 거인'(Amsden, 1989)이라고 부르며 부러워했다. 동남아시아에서는 동북아시아의 성공을 본받아야 한다는 '동방정책(Look East Policy)'이 제안되기도 했다. 또한 시장경제로 전환하고 있던 구사회주의권 국가들도 앞다투어 한국의 성장모형을 도입하였다. 우리는 러시아와 중국 그리고 중앙아시아에 성공의 비밀을 설명해 주는 사절단을 보내기에 바빴다. 성공에 취해 성공의 뒤안길에 있는 특혜의 대가를 우리는 잊어 버렸다. 그러나 당시 영국의 대처와 미국의 레이건은 고통분담을 외치며 가시밭길의 개혁을 진행시키고 있었다. 이들이 취한 개혁의 방식은 소수의 국가대표 선수를 선발하여 집중적인 지원을 하는 방식이 아니었다. 오히려 스포츠 인구의 저변확대를 통해 국가적 경쟁력을 키우는 방식이었다. 이른바 '신자유주의 개혁'은 사회의 모든 부분에 경쟁을 도입하는 고통분담을 핵심으로 한다. 이 방식은 소수정예를 미리 선발하고 특혜를 통해 이들을 육성하면 오히려 장기적으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광범위한 저변인구의 치열한 경쟁이 결과적으로 가장 높은 효율성을 배출한다는 논리이다. 산업화의 후발국가가 이러한 논리를 따를 때 과연 어느 정도나 성공할 수 있는지는 그러나 여전히 미지수이다. 역사적 경험은 오히려 '소수정예'의 전략이 유효한 것으로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불란서가 영국을 추격할 때 그리고 이 두 국가를 다시 독일이 추격할 때 선택된 방법이 '보호주의'였기 때문이다(Gerschenkron, 1962). 서구의 산업화를 동아시아가 추격할 때에 사용된 방법도 물론 '보호주의'에 의한 소수정예 전략이었다. 따라서 문제는 보호주의 혹은 소수정예에 의한 국가대표의 육성이라는 전략 자체에 있다고 보여지지 않는다. 오히려 중요한 일은 국가대표를 어떻게 선발하고 어떻게 관리하는냐 하는 문제인 것이다. IMF의 개입을 초래한 최근 우리 경제의 문제는 국가적 지원에 힘입어 성장한 재벌이 국제적인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만큼의 경쟁력을 확보하지 못한데서 원인을 찾아야 한다. 소위 동아시아의 기적이라는 성공에 만족하면서 국가는 재벌의 경쟁력에 대한 감시를 소홀히 하였다. 노조 또한 경쟁력의 문제는 제쳐두고 제 몫 찾기에 골몰하였다. 재벌 스스로도 경쟁력 없이 국가의 특혜가 당연히 보장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노사정' 모두 경쟁력을 확보하는 일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고 각자 생색내기에만 골몰하였던 것이다. 서구적 효율성의 기반이 되는 광범위한 풀뿌리 수준의 경쟁체제가 확립되지 않은 우리의 상황에서 갑자기 시장의 논리를 모든 영역에 도입하자는 주장은 어쩌면 한국 경제를 완전한 진공으로 몰고 갈지도 모른다. 우리는 소수정예에 대한 특혜를 통해 선진 국가를 추격하여 왔다. 그러므로 우리가 앞으로 해여 할 일은 특혜의 기준을 엄격히 하여 재벌이 특혜의 대가 즉 '경쟁력 확보'를 준비하도록 하는 일이다. 막무가내의 재벌 해체론은 한국경제를 붕괴시킬 뿐이다. 인도네시아가 타산지석이다. ------------------------------------------------------------------------------- - 8. 신보수주의의 등장 레이건의 당선은 1932년 루즈벨트의 당선 이후 유지되어 온 미국의 정치경제 운영방식의 획기적인 전환을 의미하였다. 레이건이 후보로써 제시한 정강정책은 공화당의 입장에서 볼 때에도 매우 과격한 시장주의를 표방하였다. 레이건이 대표하는 ‘신보주의’는 루즈벨트가 시작하고 케네디와 존슨, 카터가 이어온 뉴딜식 복지정책의 철저한 거부에서 출발하고 있었다. 미국의 신보수주의는 60∼70년대 미국이 겪은 경기침체와 사회불안은 과도한 복지지출과 방만한 연방정부의 운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경제학에서는 하버드와 MIT 경제학과를 주도하면서 정부의 시장개입과 복지정책의 추구를 주장하던 케인지언 학파 대신에 밀튼 프리드먼(Milton Friedman) 등 ‘통화주의자’(Monetarists)라고 불리는 시카고 대학의 자유시장주의자들과 루카스(Lucas) 등 정부의 모든 재정, 금융정책의 무용성을 주장하는 ‘합리적예측이론’(Rational Expectations Theory)이 득세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프리드먼은 부인과 공동집필한 『선택의 자유』(Free to Choose)라는 책에서 모든 사회보장제도의 비효율성을 지적하면서 광범위한 독자층과 막대한 영향력을 획득하였다. 정치이론에서는 합리적 선택이론을 이용하여 복지정책의 정당성을 증명하고자 하던 존 롤즈(John Rawls)의 『정의론』(A Theory of Justice)에 대항하여 극단적 자유주의(libertarianism)를 주장하고 나선 로버트 노직(Robert Nozick) 의 『무정부, 국가, 유토피아』(Anarchy, State, Utopia)가 점차 영향력을 확대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정치적, 사상적 흐름을 바탕으로 레이건은 과감한 규제철폐와 세금 인하를 통하여 시장에 대한 정부개입을 줄이면서 시장의 기능을 활성화시키고자 노력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는 뉴딜정책을 통하여 탄생한 미국의 막강한 노동조합들과 정면대결을 벌였다. 그는 1981년 전국의 항공관제사들이 일제히 총파업에 돌입하자 이미 은퇴한 관제사들과 공군 관제사들을 대거 기용하면서 노조에 가담하고 있던 모든 관제사들을 전원 해고시켜 버렸다. 이러한 정책을 통해서 그는 결국 AFL-CIO와 같은 거대 노조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고 그 결과 미국의 노조들은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복지축소 정책은 미국의 중하류층과 빈곤층에 엄청난 고통을 가져다 주었다. ‘뉴딜’과 ‘위대한 사회’ 등의 대규모 복지정책을 통해서도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은 채 방치되어 오던 도시빈민층과 농촌의 하층민들의 생활수준은 레이건의 신보수주의 정책의 실현으로 그나마 받고 있던 혜택마저도 축소 또는 철폐되면서 더욱 악화되기 시작하였다. 더욱이 레이건의 시장중심적 정책은 미국의 사향산업에 대한 과감한 포기를 수반하면서 미국의 전통적인 중공업부문인 철강, 조선, 기계, 자동차 등에 종사하던 수많은 ‘블루칼러’(blue collar) 노동자들을 직장으로부터 내몰았다. 일본과 한국 등의 급격한 부상을 통해서 경쟁력을 상실해 가던 이들 부문의 노동자들은 ‘시장의 규율’(market discipline)을 강조하던 레이건의 정책 때문에 별다른 보호를 받지 못하면서 일자리를 잃게 된 것이다. 그 결과 펜실베니아주의 탄광촌과 제철소에서 오하이오와 일리노이, 그리고 미시건주의 디트로이트의 자동차 공단에 이르는 미국 산업력의 상징인 ‘산업벨트’(Industrial Belt)는 80년대를 지나면서 ‘녹슬은 벨트’(Rust Belt)로 전락하고 만다. 이러한 분위기를 반영하여 1980년대 미국의 지식인 사회는 ‘미국의 쇠퇴’, ‘팍스 아메리카나의 몰락’에 대한 논의를 활발히 전개하였다. 이 당시 학계를 휩쓴 책 중의 하나는 강대국들이 필연적으로 쇠락하는 이유를 설명한 예일대학의 사학자 폴 케네디(Paul Kennedy) 교수의 『강대국의 흥망』(The Rise and Fall of Great Powers)였다. 그리고 미국경제의 경쟁력 회복을 위해서 일본식 경영기법과 도요다식 생산방식을 도입하고자 하는 운동이 산업계 전반에 걸쳐서 활발히 전개되었다. 종신고용제를 도입한 일본의 기업경영방식과 노동자들의 의사를 생산라인에서 적극적으로 반영하면서 쾌적하고 효율적인 조업환경을 창출한 일본의 생산방식은 테일러-포드 생산체계의 한계를 극복한 미래형 경형-생산방식으로 칭송을 받았다. 그리고 이러한 분위기는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미국사회 내에서 지배적이었다. ‘미국적 가치’가 ‘아시아적 가치’ 앞에서 맥없이 침몰해 가던 때였다. 다음의 인용문은 이 당시의 분위기를 잘 반영하고 있다.: 가족 중심주의, 사회기강의 유지, 건전한 노동정신 등은 중국의 전통 사상인 유교의 영향권에 속하는 태평양 연안국들의 장점이다. 한국, 일본, 홍콩, 싱가포르 등은 아시아의 전통 문화가 후진 경제에서 선진 산업국의 대열에 들어서는 과정을 수월하게 하였음을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오히려 미국은 1960∼70년대를 거치면서 프로테스탄트 노동윤리의 중요성에 대해 회의를 품는 듯 하였지만, 같은 때에 태평양 연안국들은 유사한 노동정신을 철저히 발휘하여 날로 번창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태평양 연안의 수백만 가구들이 이와 같이 자진해서 열심히 일하며 희생하는 정신을 발휘하게 하였던 것을 우리는 ‘유교적 노동윤리’라고 이름할 수 있을 것이다.9) 그러나 1992년부터 미국 경제가 회복기에 접어들고 일본경제가 침체의 늪에 빠지기 시작하면서 분위기는 급속히 바뀌기 시작하였다. 1992년에서 1998년 사이에 미국은 역사상 가장 길게 지속된 경제활황기를 맞고 있는 반면 일본은 역사상 가장 긴 불황의 터널을 지나고 있다. 그리고 1997년 말에는 급기야 아시아의 외환위기가 불어닥치면서 갑자기 미국식 경제와 동아시아식 경제모델에 대한 그간의 평가는 역전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미국은 미국식 모델, 시장중심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미국적 가치의 저력을 과시하는 한편 경제위기를 겪고 있는 동아시아 여러 나라들에게 자국의 모델과 가치관의 채택을 강요하고 있다. IMF가 이들 나라에 금융원조의 대가로 요구하고 있는 다양한 구조개혁은 바로 다름 아닌 미국식 신보수주의 정책, 미국적 자유주의와 시장주의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들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동아시아 모델을 버리고 아시아적 가치 대신 미국적 가치와 경제모델을 채택해야 하는 것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미국경제가 ‘컴백’을 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고 또 그러한 경험이 다른 한국과 같은 국가에서도 반복될 수 있는 것인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 - 9. 미국경제의 부활과 그 그늘 미국은 어떻게 6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후반까지 20여 년에 걸친 불황의 늪에서 탈출하면서 90년대 중반에 이르러 화려하게 부활할 수 있었는가? 그리고 그것은 과연 한국과 같은 나라들이 채용할 수 있는 모델인가? 미국경제 부흥에는 우선 여러 가지 외부변수들이 작용하였다. 소련의 붕괴로 인하여 군비경쟁이 막을 내리고 국방예산의 삭감이 가능해졌으며 석유의 과잉공급으로 인하여 산유국들의 힘이 약화되면서 전세계적인 유가안정이 지속되는 등 60∼70년대 미국경제를 어렵게 하던 요인들이 사라졌다. 또 대내적으로는 레이건의 신보수주의 정책이 경쟁력을 상실한 산업과 기업의 퇴출을 용이하게 함으로써 나머지 산업과 기업의 효율성을 제고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미국의 현재의 활황은 정보통신산업이란 새로운 분야의 급속한 부상에 힘입은 바 크다. 1980년대 초반부터 일기 시작한 미국의 정보통신산업의 발전은 18∼19세기에 걸쳐 일어난 영국의 산업혁명에 필적할 만한 또 하나의 산업혁명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오늘날 웬만한 가정과 직장에 필수적이다 못해 당연한 것으로 간주되는 PC, 즉 개인용 컴퓨터(personal computer)는 198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그 개념조차 일반화되지 않았었다. 최초의 PC는 스티브 좁스(Steve Jobs)와 스티브 워즈니액(Steve Wozniack)이라는 두 청년이 창업한 애플 컴퓨터사(Apple Computers)가 1977년에 시장에 내 놓은 애플 II 였다. 당시 세계 최대 컴퓨터 회사였던 아이비엠(IBM)은 1981년에야 IBM PC를 내 놓으면서 개인컴퓨터 시장에 뛰어 들었다. 그 때까지만 하더라도 중대형 컴퓨터만 고집하던 IBM이 개인컴퓨터의 CPU(Central Processing Unit, 중앙 처리 장치)로 채택한 것은 인텔(Intel)이란 회사의 8088 칩이었다. 그리고 최초의 IBM PC의 운영체계로는 그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무명이었던 빌 게이츠(Bill Gates)라는 한 대학교 중퇴생이 만든 Microsoft Disk-Operating System, 즉 MS-DOS 가 채택되었다. 후발업체인 IBM의 추격을 받기 시작한 애플은 1984년에 모타롤라사의 칩을 채택한 매킨토시(MacIntosh) 컴퓨터를 시장에 내 놓으면서 최초로 그래픽 인터페이스(graphic inter-face)를 선뵈었다. 얼마 전 제네럴 모터스 사(General Motors, GM)를 제치고 세계최대 회사가 된 마이크로소프트사, 그리고 오늘날 미국 산업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인텔과 모터롤라 사 등은 모두 1980년대 초에 비로소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기업들이다. 이 회사들은 정보통신 산업이란 새로운 산업을 일으키면서 미국 산업의 중심지를 디트로이트에서 실리콘 밸리로 옮는 관련 미국 경제의 판도를 완전히 뒤바꿔 놓았다. 그 이후 데스크탑 컴퓨터 이외에도 랩탑, 노트북, 그리고 팜탑 컴퓨터는 전화나 TV, 냉장고와 같이 일상적인 가전제품이 되어 버리면서 미국산업의 총아로 떠오르게 되었다. 또 CD-ROM의 발명, 컴퓨터 통신의 대두, 인터넷의 보급, 네트스케이프(Netscape)가 대표하는 정보검색소프트웨어 회사의 등장으로 인하여 정보통신 업계는 눈부시게 발전하면서 미국 경제회복의 견인차 역할을 톡톡히 해 낸다. 그리고 불과 10년만에 전통적으로 중공업이 주도하던 미국의 산업구조는 이제 완전히 정보통신 산업이 주도하는 구조로 바뀌어 버렸다. 미국의 정보통신 산업의 지속적인 역동성은 경쟁상대가 전혀 없다는데서 찾아볼 수 있다. 영국이 발명한 산업혁명, 즉 석탄과 석유, 증기와 철을 이용한 중공업 산업화는 다른 나라들이 비교적 쉽게 모방할 수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19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독일과, 프랑스, 미국, 그리고 일본 등이 산업화에 성공하면서 영국을 능가하는 경쟁력을 갖추게 되었다. 물론 그 이후로는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한국이 부상할 때까지 중공업을 바탕으로 하는 산업화에 성공한 국가는 한동안 없었다. 그러나 일단 한국과 같은 신흥 공업국들은 후발국가로서의 이점을 최대한 활용하면서 전세계 중공업 시장을 무서운 기세로 잠식해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미국이 1980년대 초반부터 발명한 정보통신이 주도하는 산업화는 아직까지 아무런 경쟁상대도 없다. 미국의 마이크로소프트, 인텔, 모타롤라, 아이비엠 등의 회사들이 자기 분야에서 갖고 있는 경쟁력과 효율성은 그 어느 국가의 어떤 기업체도 감히 넘볼 수 없는 가히 절대적인 것이다. 미국의 증시가 1980년대 후반 1,000 포인트 대에서 오늘날 9,000포인트 대 까지 경이적인 상승세를 지속할 수 있었던 것도 미국의 정보통신 산업이 국가의 기간산업 역할을 해 낼 수 있는 새로운 산업을 발명하고 주도하는 기업체들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결국 미국경제의 화려한 컴백은 정보통신산업이란 새로운 분야의 실로 눈부신 발전에 힘입은 바 크다. 그러나 지난 20년간 미국의 정보통신 산업이 보인 생산성의 향상은 초기 산업혁명시기의 영국에서나 볼 수 있었던 다시는 되풀이되기 힘든 현상이다. 후발 국가들이 쉽사리 모방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미국 특유의 사회, 문화, 교육, 산업 배경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더욱이 미국 경제의 재기는 모방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그 화려함 뒤에 감춰진 어두운 단면들을 볼 때 결코 바람직하지도 않다. 미국경제의 변신은 실로 많은 대가를 지불하였고 아직도 지불하고 있기에 가능하였다. 신보수주의 정책은 저효율 산업의 퇴출을 용이하게 하면서 미국경제의 유연성을 제고하여 주었지만 반면에 빈부격차의 심화, 중하층민들의 생활수준 저하를 가져왔다. 효율성과 유연성의 제고라는 기치아래 직업안정이라는 전통적 가치 역시 퇴출 대상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대규모 고용창출을 가능케 하던 중공업의 붕괴와 이 부문에 종사하던 노동자들의 대규모 실직은 중하류층 가족의 붕괴로 이어지면서 가치관의 붕괴를 초래하였다. 그 결과 신보수주의 정책이 적극적으로 추진되던 기간 동안 미국의 각종 범죄율과 함께 이혼율, 미혼모 출산율, 마약 복용율, 문맹율 등이 급증하였다. 가장 중요한 범죄의 증가율만 살펴본다면 다음과 같다. 미국 통계청의 공식 통계에 의하면 1984년에서 1994년 사이에 강력범죄율은 46.4% 증가하였다. 이를 범죄 유형별로 분류해 보면 살인이 24.6%, 강간이 21.3%, 도난이 27.6%, 그리고 폭행이 63.5% 증가하였다. 이러한 범죄 발생률은 선진국 중에서 가장 높은 것이다. 또 미국 인구의 13%를 차지하고 있는 흑인은 강력범의 45%를 차지하고 있다. 이로 인하여 미국의 감옥은 범죄자로 넘쳐흐르고 있으며 1백만 명이 넘는 죄수들을 수용할 시설이 없어 로스앤젤레스와 같은 대도시에서는 대부분의 범죄자들을 형기를 채우기 전에 석방시키고 있는 형편이다. 1991년 통계에 의하면 미혼모 출산은 전체 출산의 30%에 육박하고 있다. 이혼으로 인한 결손 가정 역시 30%에 달한다. 결과적으로 볼 때 미국경제는 정보통신과 같은 새로운 산업이 있음으로 해서 중공업 등 전통산업의 붕괴로 인한 사회계약의 파괴와 가정의 파괴, 복지의 축소가 가져오는 고통을 어느 정도 감해 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대가로 미국은 뉴딜이래 민주당이 대표하는 진보진영이 그나마 정착 시켜 놓았던 복지제도 마저 축소시켜야 했다. 1992년 클린턴의 당선은 미국민들이 다시금 복지와 분배정책의 필요성을 절감하였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그러나 의회 상, 하, 양원에서 열세를 면치 못하는 민주당으로서 새로운 복지정책은 엄두도 못 내고 있는 실정이다. 집권 전반기에 클린턴은 의료보험제도의 확대실시를 시도하였으나 공화당의 반대로 실패하고 말았다. 그리고 미국은 선진국 중에서는 물론 한국에 비해서도 훨씬 낙후되고 불공평한 의료 보험제도를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실패를 경험한 클린턴은 본래의 진보주의 노선을 수정하여 시장주의적 시각을 대폭 수용한 신-신자유주의(New Neo-Liberalism) 라는 정체불명의 노선을 표방하고 있다. 경제의 활황이 지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소득의 재분배를 요하는 복지제도의 구축은 어려울 수밖에 없다. 미래의 경제상황에 대한 낙관이 지배하고 있는 만큼 복지정책의 시급성을 절감하는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적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전통적으로 시장의 효율성과 생산성에 대한 남다른 신념을 갖고 있는 미국민들이다. 그러나 미국 경제도 언젠가는 하향국면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 시장의 자율적인 조정기능에 모든 것을 맡기고 있는 경제체제일수록 활황기간에는 놀라운 생산력을 발휘하지만 불황기에는 실직과 가난 등 복지의 문제 역시 더욱 심각하게 체험할 수밖에 없다. 복지제도를 제대로 갖추고 있지 않은 미국이 불황기에 접어들었을 때 미국사회의 전통적인 병폐인 빈부격차, 흑백간의 갈등, 범죄와 마약 등의 문제가 더욱 심각해 질 것은 자명하다. ------------------------------------------------------------------------------- - 10. 한국적 발전모델의 유효성 따라서 미국적 가치와 제도가 한국의 선택이 될 수는 없다. 역사와 전통, 문화와 가치관이 판이하게 다른 미국의 가치와 제도가 우리에게 시사해 줄 수 있는 것들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또 미국적 가치와 제도가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항상 더 좋은 결과를 가져다준다는 것도 불분명하다. 우리가 취해야 할 가치관과 제도는 지금까지 우리의 성공을 가능케 해 주었던 요소들을 유지, 발전시키면서 수정하고 개혁해야 될 점들은 과감하게 고쳐 나아가는 길이다. 그런데 우리의 경험이나 사상으로 볼 때 미래의 국가체제는 여전히 강력한 국가를 요구한다. 특히 경제에 있어서 지난 30년간의 급속한 경제성장이 생산해 낸 가장 강력한 경제 주체인 재벌과 노조를 견제하면서 이끌 수 있는 유일한 주체는 정부다. 현재 상황에서 ‘시장중심적’ 개혁을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재벌의 영향력을 과도하게 키우는 결과만 낳을 것이라는 점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지적한 바 있다. 또 재벌의 구조조정을 강요하거나 유도할 수 있는 주체 역시 정부밖에 없다. 반면에 노동조합을 설득하고 때로는 희생을 강요할 수 있는 주체 역시 정부뿐이다. 물론 정부 자체가 하나의 이익집단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 이것이 아시아적 가치를 비판하는 사람들, 특히 국가와 정부에 대한 불신에서 출발하는 시장주의자들의 기본적인 인식이다. 그리고 실제로 정부와 관료의 부패와 비효율성은 국가전체의 경쟁력을 위협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현재상황에서 정부의 힘을 분산해서 약화시키고 정부의 주도적인 입장을 포기하는 것은 해답이 될 수 없다. 따지고 보면 현금의 경제위기는 정부부문의 도덕적 해이와 함께 경제에 대한 통제력 상실, 또는 무책임한 방임이 그 근본 원인이었다. 한국경제 위기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정부의 잘못된 규제완화조치와 경제기획과 조정 기능의 조급한 포기였다. 특히 외환보유고의 허술한 관리, 잘못된 외환자율화 조치로 인한 무차별한 해외 차입, 그리고 산업정책의 포기 등은 동아시아 발전 모델의 가장 기본적인 틀을 허물어 버림으로써 경제위기를 초래하였다. 수출주도형 경제발전을 추구하는 국가에서 외환보유고의 제고와 지속적인 관리는 필수적이다. 현재 대만과 중국 등 세계 최고의 외환보유고를 자랑하는 국가들은 우리가 겪은 것과 같은 외환위기를 겪지 않고 있다. 높은 외환보유고로 해외 투기성 단기자본이 금리와 환율을 농락하고 국가의 신인도를 추락시키는 것을 방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 역시 경제구조개혁의 고통스러운 과정을 겪고 있지만 외환보유고 덕분에 IMF에 손을 벌리거나 해외 자본에 밀려서 구조개혁을 강요당하고 있지는 않다. 1990년대 중반에 이르러 한국의 외환보유고가 급격히 고갈되기 시작하고 수출경쟁력이 급격히 떨어지는데도 고환율정책이 유지된 데에는 ‘개인 소득 만불‘이라는 신화와 환상을 유지하고자 하는 정치적 고려가 크게 작용하였다. 그 결과 한국민들의 소비는 급격히 늘고 해외여행과 외국사치품 수입이 극에 달하면서 국제수지를 악화시켰다. 결국 정치논리가 경제논리를 좌우하기 시작하면서 60년대 경제발전에 시동을 건 이후 신성시 되어 오던 외환보유고의 관리가 돌이킬 수 없이 허술 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OECD가입을 위해서 가속도가 붙기 시작한 금융자유화 조치 역시 동아시아 경제발전 모델의 핵심부분의 하나를 포기하는 것이었다. 열악한 경제환경과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개발도상국가가 경험할 수밖에 없는 국내재산의 해외도피를 막고 외국 투기 자본의 국내 금융시장 잠식을 방지하기 위해 제정된 외환관리법의 조기 폐기는 국제금융질서의 논리를 미처 체득하지 못한 국내 금융기관과 기업들이 국제금융시장에서 철저히 농락 당하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국제금융시장의 낮은 금리, 정부의 고환율정책, 한국경제의 높은 신인도, 그리고 국내기업들의 대규모 설비투자는 국제 단기 투기성 자본, 세칭 ‘헷지펀드’의 급격한 국내유입을 초래함으로써 한국경제를 대규모 외국자본 앞에 적나라하게 노출시켰다. 그리고 한국경제의 미래에 대한 전망이 불투명해지고 한국의 국가신인도가 하락하기 시작하자 이들 자금이 급격히 빠져나가면서 한국의 외환위기를 초래하게 된 것이다. 이 역시 ‘동아시아 발전 모델’이 지속되었다면 방지될 수 있었던 일이다. 산업정책이야말로 동아시아 발전모델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그러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대표되던 한국의 산업정책은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폐기되었다. 미래의 청사진을 제시하고 경제발전의 방향과 역점사업을 명확히 제시함으로써 모든 경제주체에게 예측가능한 경제환경을 제공하여 주었던 산업정책의 포기는 엄청난 부작용을 초래하면서 한국경제를 벼랑끝으로 내몰았다. 한국의 대외신인도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힘으로써 이미 악화될 대로 악화되어 있던 한국경제를 위기로 내몰았던 한보와 기아사태는 산업정책의 실종이 빚어낸 결과였다. 한국경제발전의 원동력인 동시에 상징이었던 철강과 자동차 산업에서 일부 재벌기업들이 국내와 국제 시장의 현실을 무시한 채 추진한 과잉설비투자는 결국 대규모 부도사태를 초래하였고 이로 인하여 ‘대마불사’라는 신화를 믿으면서 한국경제에 투자를 계속하던 해외 자본이 급속히 빠져나갔다. 정부의 규제완화 정책이 재벌에 대한 조정의 기능까지도 마비시켜 버림으로써 경제위기를 초래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 밖에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강력하면서도 책임성을 갖춘 동시에 효율적인 정부가 필요하다. 따라서 현재 논의되고 있는 ‘시장중심적’ 개혁 역시 정부를 포함한 각 경제주체의 효율성을 제고하는 방향에서 추진하되 그것이 결코 정부의 힘을 약화시키거나 축소시키는 방향으로 진행되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서 ‘시장중심적’ 개혁 역시 정부가 국력을 신장시키고 국부를 늘리기 위한 또 하나의 정책수단으로 이용하여야 한다. 우리는 ‘정부’ 또는 ‘국가’ 자체를 의심하고 늘 견제하며 그 역할을 가급적 축소하고 그 대신 시장에 의존하려는 자유주의적인 사고방식에 매몰되어서는 안 된다. 정부와 국가 그 자체가 문제이기보다는 부패하고 비능률적인 정부와 국가가 문제인 것이다. 이것을 유교사상의 맥락에서도 풀이해 볼 수 있다. 우리의 정치전통은 정부의 역할을 긍정적으로 볼 뿐만 아니라 바람직한 사회를 건설하고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는데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간주하는 유교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 국가의 역할은 위민사상과 민본주의에 입각해서 백성 또는 국민들의 안위와 복지를 보장해 줌은 물론 도덕적, 윤리적 모범을 보이면서 ‘덕치’(德治)로써 이끄는 것이다. 그리고 ‘재야’의 존재를 인정하고 적극 권장함으로써 정부의 부정과 부패를 항상 감시하고 비판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한다. 현재 우리에게 필요한 체제와 정부는 이처럼 전통정치 이상에 입각하여 강력하면서도 청렴하고 투명하며 효율적인 정부이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 한국이 겪고 있는 문제는 아시아적 가치, 또는 우리의 전통가치가 잘못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 이상을 실현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공사(公私)를 분명히 하고 매사에 공명정대한 관리들이 조정자의 역할을 담당하는 정부가 있는 체제야말로 우리가 실현시켜야할 이상이다. ------------------------------------------------------------------------------- - 11. 후기: 아시아적 가치논쟁의 인식론 이러한 논의를 하다보면 흔히 두 가지 비판을 접하게 된다. 첫번째는 아시아적 가치를 옹호하는 것은 이미 적실성을 상실한 전통의 무비판적인 복고를 주장하는 보수반동적인 사조라는 비판이고 두번째는 이와는 반대로 아시아적 가치 운운하는 것은 서양이 만들어 놓은 담론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역 오리엔탈리즘’을 범하고 있다는 비판이다. 첫번째 비판은 ‘아시아적 가치’나 ‘동아시아 경제발전모델’을 얘기하는 것은 곧 ‘유교자본주의’를 이야기하는 것이고 이는 유교를 미화시키고 옹호하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리고 유교를 맹목적으로 옹호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그 역할과 의미가 아직도 모호한 사상을 전통이라는 이름 하에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두번째 비판은 유교자본주의나 아시아적 가치 논쟁이 서양의 학계가 발명한 주제이고 논쟁인 만큼 이를 수입하는 것은 서양에 대한 학문적 종속을 심화시키는 비주체적인 행위라는 주장이다. 이러한 논의가 전제하고 있는 ‘유교’나 ‘아시아’에 대한 이해는 서구인들이 자의적으로 해석한 것인만큼 이를 그대로 수입하는 것은 우리자신에 대한 묘사를 서양학자들에게 의존하는 지극히 ‘식민적’인 사고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아시아적 가치를 운운하는 것은 너무 전통적인 동시에 너무 서양적인 것이 된다. 이러한 비판은 왜 나오는 것일까? 한국에서는 동양사상과 전통을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논하는 것은 상당히 부담스러운 일이 될 수 있다. 물론 동학이나 불교, 노장사상, 그리고 민간신앙에 대한 논의는 인문학적으로 또 사회과학적으로 많이 논의되어 왔다. 그러나 유독 유교만은 과거의 사상가들의 이론을 해석하는 것을 빼고는 사회과학에서 다루는 경우가 매우 드물다. 이는 왜 그럴까? 그것은 역설적으로 유교가 그만큼 아직도 우리의 정치의식, 사회구조, 가치관을 철저히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만일 유교가 이미 사라진 과거의 것이거나 정치의식과 구조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이었다면 그토록 의식적으로 피하고 불편해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한국지식인의 매우 불편한 자아의식을 반영한다. 한국의 지식인은 진보적이어야 한다. 진보란 여러 의미가 있겠지만 아무튼 ‘전통’과는 반대되는 개념으로 받아들여진다. 또 전통 중에서도 유교는 전통정치질서를 떠 받쳐주던 이념으로 가장 ‘반동’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런데 아시아적 가치론은 이러한 유교가 사라지기는커녕 아직도 우리사회 내에서 작동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매우 긍정적인 영향을 미침으로써 경제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진보와 발전은 전통파괴와 극복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근대의 진보적 역사철학을 아직도 수용하고 있는 수많은 학자들에게 이러한 시각은 매우 곤혹스럽고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 된다. 그러나 자신의 전통을 부정하게끔 하고 그것을 긍정하는 것은 보수적이고 반동적인 것으로 간주하도록 하는 서구 사회과학의 사관(史觀)이야말로 오리엔탈리즘의 전형이며 극치이다. 서구의 독특한 역사와 경험에서 도출한 역사철학과 사회과학 이론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여 한국의 과거와 현재에 적용시키면서 오히려 전통사회의 긍정적인 측면을 부각시키고 현대사회 속에서 전통이 순기능을 하는 점에 천착하는 것을 비판해야 하는 것이 오늘날 한국의 불행한 지식인 상이다. 자신의 문화와 전통사상 속에서 발전과 진보의 동력을 찾고 미래의 지향점을 모색하는 것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도록 학문적 훈련을 받은 뿌리 없는 지식인이 한국의 ‘진보적’ 지식인 상이다. 이들은 대부분의 경우에 한국과 동양의 전통사상과 사회구조에 대한 이해 없이 전통을 논하는 학자들을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거나 보수적 이데올로기를 가진 사람들로 치부해 버린다. 그리고 이들이 그나마 알고 있는 전통사회의 구조는 맑스주의적 계급이론 아니면 우파적 자유주의의 도식을 통해서 바라본 것에 국한되어 있기 때문에 철저하게 비판적일 수밖에 없다. ‘민족’과 ‘민중’은 사랑하면서 자신의 역사는 사랑할 수 없고 전통을 부정하면서 미래에 대한 비젼과 이상은 외국 사상가들의 역사의식에 의존하고자 하는 것이 오늘날 많은 한국지식인의 인식론이다. 가장 역설적인 것은 오히려 유교에 대한 얘기를 하는 것이 서양학문의 노예가 되는 것이라는 비판이다. 이러한 비판은 유교에 대한 본격적인 재평가와 연구가 한국학자들이 아닌 외국학자들에 의해서 시작되었다는 점에 근거를 두고 있다. 서양학자들은 서구의 근대문명에 대한 비판의 일환으로 동양에 대한 맹목적인 찬양을 시작하였고 중국학자들은 새로운 중화제국주의의 일환으로 유교에 대한 담론을 활성화 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분명 사실이다. 유교자본주의에 대한 논쟁은 대만계 미국인인 하버드 대학의 뚜웨이밍 등이 싱가포르의 리콴유 수상의 ‘사주’를 받아서 시작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최근에는 중국정부 역시 이 논쟁에 뛰어들면서 유교를 극구 옹호하기 시작한 것을 볼 때 유교자본주의 운운하는 것은 대만과 홍콩, 그리고 동남아시아에 퍼져 있는 화교들을 묶을 ‘대중화권’을 구축하기 위한 시도라는 비판도 일면 수긍할 수 있다. 따라서 아시아적 가치론을 받아들이는 것은 서양의 학문적 제국주의 아니면 중국의 패권주의적 음모에 휘말리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에는 많은 문제가 있다. 우선 특정 이론이 어느 나라에서 시작되었는가 하는 문제를 가지고 그것을 받아들일 것인지 아닌지를 가른다는 것은 실로 어처구니없는 짓이다. 요즈음 같이 학계가 국제화되어 있는 시대에 ‘순수 토속 이론’을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 그런 이론이 설사 찾아진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과연 현실에 대하여 어떤 얘기들을 해 줄 수 있을까? 백번 양보하여 아시아적 가치론이나 유교론이 서양에서 수입된 담론이라고 치자. 그렇다면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진보주의와 자본주의는 서양에서 수입된 것이 아닌가? 심지어는 민족주의(nationalism) 역시 서양에서 수입된 이론이지 않는가? 오리엔탈리즘의 역사와 구조를 파헤치고 통렬히 비판함으로써 비-서구인들에게 서구 학문의 지적 헤게모니에 대한 경각심을 높여주는데 누구보다도 크게 공헌한 에드워드 사이드는 철저하게 서양교육을 받은, 서구 학문세계의 산물이다. 그는 기독교인이었던 팔레스타인계 부모 밑에서 태어나 어려서는 이집트의 영국인 학교를, 고등학교는 미국의 사립고등학교를 다녔다. 대학은 프린스턴을 나왔으며 박사학위는 하버드에서 받았고 학위취득 후 줄곧 미국 콜롬비아 대학 영문학과에서 가르쳐 왔다. 그는 자신의 말로는 31세때 이스라엘과 아랍국 간의 ‘7일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도 자신의 팔레스타인 ‘뿌리’에 대하여 별다른 의식이 없었다. 그는 1969년 골라 메이 당시 이스라엘 수상이 “팔레스타인은 없다”(There are no Palestinians) 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자신의 정체성 문제에 천착하기 시작하였다. 그렇다면 그는 철저하게 서양인이다. 그의 모든 유년기 , 청년기 경험이 그랬고 그가 배운 학문과 방법론이 모두 철저하게 서구적인 것들이었다. 따라서 그의 오리엔탈리즘 비판 역시 서구 학계의 산물일 수밖에 없다. 다시말해서 우리에게 서구학문의 식민주의에 대하여 경고해 주고 있는 가장 강력한 이론인 오리엔탈리즘 비판 그 자체가 서양학계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리엔탈리즘 비판 그 자체를 거부해야 하는가? 그리고 서양 학문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해야하는가? 오리엔탈리즘적 인식론 자체가 서구적이라면 우리는 어떤 인식론적 위치를 확보해서 서양 학문을 비판해야 하는가? 아니, 왜 비판해야만 하는가? 이러한 인식론적 문제를 끝없이 추적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이처럼 황당한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러한 인식론의 문제에 너무 깊이 빠져 들어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인식론과 방법론적 논쟁은 늘 허무하게 끝난다. 특정 이론이 어디에서 왔는가가 더 이상 그 이론의 적실성의 기존이 될 수 없다. 특정 이론이 적실성을 갖는지의 여부는 오직 그것이 현실을 얼마나 잘 설명해 주고 또 공감할 수 있는 당위를 제시해 줄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서로의 정치적 의도, 인식론적 지평을 지레짐작하고 공격하는 것은 깊이 있는 학술적 논쟁을 죽이는 길이다. 물론 학문의 순수성과 객관성을 강변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문제는 어떤 특정한 사상과 제도를 그 이데올로기적 의미 때문에, 그 정치적 의미 때문에 연구하는 것을 금기시 한다면 우리는 또 교조주의에 빠지는 우를 범하게 된다. 학문에 대한 비판을 하되 그 학자의 인식론적, 이데올로기적, 계급적 배경을 분석하고 비판하기보다는 그의 학문, 구체적 주장, 역사와 현실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를 분석하고 비판해야 한다. ‘아시아적 가치’ 논쟁이 국내의 정치적, 사상적 맥락에서 갖는 의미는 매우 복잡하다. ‘진보 대 보수’, ‘좌 와 우’ 등의 구도에 익숙해 있는 우리 사상계가 과연 ‘동양과 서양’ 또는 ‘아시아 대 미국’ 등의 색다른 인식론적 구도를 어떻게 소화해야 하는지 아직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더군다나 이러한 논쟁이 미처 소화되기도 전에 경제위기가 불어닥치면서 아시아적 가치론의 인식론적 구도는 더욱 복잡해졌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인식론적인 차원의 논쟁에 경도될 필요가 없다. 우리의 인식론이 과연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인가를 따지고 있기보다는 우리의 이론이 현실을 얼마나 잘 설명해 주고 비젼을 제시해 줄 수 있는가를 따져야 한다. 현재 한국의 지식인들 앞에 놓여 있는 이론과 사상들 중에서 한국 근대화의 경험을 가장 잘 설명해 주고 그 논리와 지향점을 가장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것은 사회주의도, 자유주의도, 자본주의도 아닌 ‘유교론’, 즉 아시아적 가치론과 동아시아 경제발전론, 그리고 유교자본주의론이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 "활쏘기는 군자의 덕성과 비슷한 바 가 있으니, 활을 쏘아 과녁을 벗어나더라도 오히려 그 이유 를 자기 몸에서 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