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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요키에로타)
날 짜 (Date): 1998년 12월 12일 토요일 오전 01시 42분 36초
제 목(Title): 김윤식/노벨상의 두 일본문학과 바쇼 




노벨상의 두 일본문학과 바쇼 『芭蕉』김윤식 










C 시인의 바쇼 공부행 



시인이자 평론가인 C씨가 시업(詩業) 정진을 위해 이웃나라 수도 도쿄에 간 지도 
어느덧 수 삭이 지났다. 유달리도 이번 겨울엔 눈이 썩 많이 내린 도쿄라고 
외신까지 전하고 있다. 분교구『文京區』의 당고『團子) 고갯길 너머에 있는 모리 
오가이『森鷗外』 박물관을 에워싸고 도는 동백 울타리에도 지금쯤 짙은 녹색에 
새빨간 얼굴을 내민 동백꽃이 선연하지 않을까. 태평양에서 불어오는 해풍이란 
조금 차기는 해도 제법 견딜 만한 청량제라 느끼며 그 큰 눈썹으로 큰 걸음을 걷고 
있을 C시인을 생각한다. C시인은 아마도 그 짙고 큰 눈썹으로 그곳 동백 울타리를 
능히 제어하고 있지 않을까. 

눈썹이란 무엇이겠는가. 

내 마음속 우리님의 고은 눈섭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 섣달 날으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冬天" 중에서 

미당 선생에 있어 눈썹은 그냥 눈썹이다. 어찌 그리움의 대상(눈썹이 검은 금녀 
동생)만이겠는가. 어찌 눈썹의 탈물질화이겠는가. 눈썹은 그냥 눈썹인 것이, 
하늘에다 심을 수조차 있기 때문이다. 하늘이란 무엇이겠는가. 허무일 수 없다. 
진흙밭이거나 옥토이거나 좌우간 형이상학적 씨앗을 싹트게 하고 키우는 토양인 
것. 무란 그러니까 허공이 아니고 실체이다. 이 경지에까지 이르기 위해서는 
무수한 절을 지어보아야 된다. 절이란 무엇이겠는가. 

나는 지난밤 꿈 속의 내 눈섭이 무거워 

그걸로 여기 

한채의 새 절간을 지어두고 가려하느니 

―"여행가" 중에서 

무로 통하는 입구, 그것이 절간이었다. 그러니까, 무란 본래 있었던 것이 아니라 
각자가 만들어낸 것이 아닐 수 없다. 무엇으로 절을 만드는가. 눈썹으로써이다. 
육체와 혼, 물질과 정신의 분리지점, 그것이 절이다. 눈썹이란 그러니까 절간을 
짓는 질료이기보다는, 작용하는 힘이었던 것. 

C시인이 지닌 짙고 큰 눈썹이란 대체 무엇이었던가. C시인의 외유풍문이 들렸을 때 
먼저 그 눈썹을 떠올린 것은 나만의 편견이었을까. 더구나 바쇼『芭蕉, 1644∼94』 
공부라 함에랴. 일본 근세의 특출한 시인이며 인류 서정시의 재산으로 평가되는 
하이쿠『俳句』의 완성자가 바쇼이기에 바쇼 공부란 곧 하이쿠 공부이며 하이쿠 
공부란 바쇼 공부라 할 것이다. 

古池や蛙飛こむ水のをと 

(huruike-ya kawazu tobikomu mizu-no-oto) 

오래된 연못이며 \ 개구리 뛰어드는 \ 물소리 

(old pond : \ frog jumping \ water-sound) 

閑さや岩にしみ入蟬の聲 

(sizukasa iwa-ni shimi}iru semi-no-koe) 

한적함이여 \ 바위에 스며드는 \ 매미소리 

(so still : \ into rocks it pierces \ the locust-shrill, M. G. Handerson 역) 

바쇼 하면 누구나 이 두 구절을 하이쿠와 더불어 떠올리지 않을까. ‘5·7·5’로 
된, 극히 짧은 형식 속에 우주를 담기 위한 미적 발명품이 하이쿠라면 극단적인 
생략(침묵, 여백)으로 이루어지지 않을 수 없다. 눈썹을 하늘에다 심는 방식이라 
할 수 없을까. 무를 언어로 포착하기란 원래 절망적인 법. 이를 옛 선사들은 전 
생애를 두고 추구하여 마지않았다. 이를 선(禪)이라 불렀는지도 모른다. 

어째서 C시인은 바쇼에 매료 당했을까. 바쇼가 아니라 하이쿠의 그 극소화된 
형식미에 매료되었기 때문이었을까. 헤아릴 길이 내겐 없지만 다만 다음 두 가지 
사실은 지적해볼 수 있겠다. C시인이 한산시에 깊은 조예가 있다는 사실이 그 
하나. 수년 전 나는 C시인과 함께 ‘풍교야박(楓橋夜泊)’의 그 종소리를 듣기 
위해 소주 땅 한산사(寒山寺)에 들르기도 했거니와 실상 C시인은 한산시의 훌륭한 
해설가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나라 서정시의 한 맥이 한산시와 이어져 
있음을 논증해낸 장본인이기도 했다. 

한산시와 더불어 ‘달마가 동쪽으로 온 까닭’을 캐기 위한 노력의 헛됨을 
읊어버렸음이 그 다른 하나. C시인은 두 개의 한산시를 썼다.

때때로 

하늘 편지 구름에게 받아보고 

언제나 적적한 

마당을 쓴다. 

드문드문 빗방울에 

지워지다 흐리게 남아 있는 

산새들의 야윈 발자국 

올올한 

바위 틈에 찾아올 길 없는 

집 한 채 지어놓고 

때때로 

이끼 낀 물소리 베개하고 

바람소리 적적한 

귀를 씻는다. 

―"여름 한산시" 전문 

시인 자신이 뭔가 불안하지 않았을까. 정신의 집중력이 없다. 왜? 정신을 
집중해보지 못했으니까. ‘빗방울에 드문드문 지워지는 산새 발자국’으로 족한 
것이 아니었을까. ‘빗방울’로도 넘치지 않았을까. ‘산새 발자국’으로도 오히려 
길지 않았을까. 어찌 산새 발자국이랴. 그냥 발자국이어도 족하지 않았을까. 
요컨대 한산시의 시적 사유란 이처럼 형식에 무신경했던 것. "여름 한산시"가 
그러하다면 "겨울 한산시"도 그러할까. 

인적이 끊긴 눈 속에서 

밤늦도록 몰아치는 쓸쓸한 바람의 

낯선 목소리를 등불 밑에서 찾으리라 

눈 그친 산과 들에 쏟아지는 무량한 햇빛을 

잔잔히 흔들리는 갈대와 함께 

눈이 시리도록 바라보리라 

(……) 

내내 잠들지 못하리라 

―"겨울 한산시" 중에서 

"여름 한산시"에서는 흐릿하나마 산새 발자국이 나름대로의 몫을 했다고 볼 수 
있지만, "겨울 한산시"에 이르면, 시인은 오히려 세속인들 수준에도 못 미치고 
있지 않겠는가. 형식미도 정신력도 보잘것없는 경지라 할 수 없을까. 동쪽과 서쪽, 
무와 유가 당초부터 없는 마당이고 보면 달마의 동쪽행이란 당초 있지도 않은 
분별법이 아니었던가. 

C시인이 부딪힌 절벽, 그것은 혹시 C시인이 이해한 한산시의 한계가 아니었을까. 
그가 바쇼 공부차 동쪽으로 나아간 까닭이 이 부근에 있지 않았을까. 

오에 씨의 노벨상 수상 연설 " 애매한 두 일본인

C시인의 바쇼 공부행의 풍문이 들렸을 때 초라한 내 서재 한귀퉁이에 놓인 문고판 
책 한 권이 눈짓을 했다. 오에 겐자부로의 『애매한 일본의나』(이와나미 신서, 
1995. 1. 31)가 그것. 이 책에는 약간의 사연이 있다. 오에 씨의 서명과 내 이름이 
적혀 있기 때문. 1994년도 노벨상을 수상하기 전에 오에 씨는 모 연구소와의 
계약으로 1995년 2월 초에 방한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내가 이 사실을 안 것은 
오에 씨와 평소 교분이 짙은 이학수 교수(UCLA)로부터였다. ‘일본연구 
쿄토회의’(1994. 10. 17)에 참석한 뒤 귀국한 이교수가 거기서 오에 씨로부터 
직접 들었다는 것. 오에 씨가 이 회의의 주제발표자였는데, ‘세계문학은 
일본문학일 수 있는가?’라는 제목이었다. 노벨상 수상 이전에 쓴 것이며, 노벨상 
수상 직후에 발표된 만큼 씨는 원고 일부를 수정함으로써 만장의 웃음과 박수를 
받았다. 그 대목은 이러하여 인상적이다. 

일본문학은 다음 셋으로 분류된다. 

(1) 세계와 고립된 문학 범주. 타니쟈키 준이치로, 카와바다 야스나리, 미시마 
유키오 등. 

(2) 세계문학에서 공부한 작가들의 문학 범주. 오오카 쇼헤이, 아베 고보, 오에 
겐자부로 등. 

(3) 서브 컬처(대중문학) 범주. 무라카미 하루키, 요시모토 바나나 등. 

이 범주들 중 노벨상이 어째서 (1)에 주어졌는가. 동서구는 물론, 미국, 남미, 
심지어 아프리카, 아시아로부터도 고립된 (1)에 노벨상이 주어졌음이란 대체 
무엇인가. (3)은 돈이나 벌지만 (2)처럼 세계문학에서 많은 것을 본질적으로 
수용하여 독자적인 창작을 해낸 범주는 대체 무엇인가. 이처럼 푸대접해도 좋단 
말인가. 

이상이 초고였는데, 정작 (2)에도 노벨상이 주어졌다는 것. 초고 수정이 
불가피해질 수밖에. 이 강연 원고를 읽으면서 나는 저류에 깔려 있는 오에 씨의 
심정이 조금 헤아려졌다. 도대체 세계에서 고립된, 일본인 저들끼리만 아는 문학, 
그런 미학도 문학이라든가 예술이라 할 수 있는가. 설사 있다 치더라도(가장 
토착적인 것이 세계적이다라는 명제의 허위성) 그게 우선할 수 있겠는가. 천재적인 
예감으로 씌어진 아베 고보의 『모래의 여인』에 앞서 (1)에다 노벨상을 수여해도 
되는 것일까. 『만년 원년의 풋볼』에 앞서도 되는 것일까. 이제 (2)에도 노벨상이 
주어져서 다행이긴 하나, 여전히 그 순서가 틀렸다는 울림이 글 전체를 지배하고 
있었다. 

이러한 오에 씨의 심정이 노골적으로 드러난 것은 ‘회로를 닫은 일본이 
아니다’(1993년 5월 25일, 뉴욕 시립도서관 강연)에서이다. 이 강연에서 씨가 
비판해 마지않은 것이 바로 노벨상 수상 작가 카와바다 야스나리『川端康成, 
1899∼1972』이다. 이 강연 첫 줄에서 이 점이 분명해진다. 

일본어의 작가로 첫 노벨상을 받은 카와바다는 스톡홀름에서 ‘아름다운 일본의 
나’라는 수상 강연을 했습니다. 이는 실로 아름답습니다. 동시에 참으로 애매한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지요. 그러나 이 아름다움이 일본적이듯 그 애매함도 분명 
일본적이라 생각합니다. 

이렇게 운을 뗀 씨는 카와바다의 수상 연설의 첫 줄이 “봄은 꽃이다. 여름은 
두견이다. 가을에는 달, 겨울은 눈이 맑아 서늘키도 
하더라”(春は花夏ほととぎす秋は月冬雪さえて冷しかりけり)라는 도오겐『道元, 
1200∼53』 선사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이라는 제목의 이른바 선시(禪詩)에서 
비롯 기까이『喜海』의 "묘오엔전『明惠傳』"으로 끝냈음을 지적, 그 이유를 
이렇게 비판했다. 

첫째, 카와바다의 미의식이 그의 전생애에 걸쳐 일본적 또는 이를 넘어선 동양적 
신비주의와 일치하는 곳에까지 깊어졌다는 것. 

둘째, 서구의 청중을 향해 연설하면서도 실은 서구, 미국을 향해 말한다는 의식이 
없었다는 것. 이 사실은 다르게 말하면 일본의 현대인까지도 염두에 두지 않았다는 
것. 

이처럼 논조는 정중하지만 카와바다의 연설문이란 저 혼자, 혹은 저와 같은 특수한 
부류의 일본인 신비주의자들을 향해 씌어졌다는 것이 오에 씨의 비판이다. 과연 
이래도 되는 것일까. 그게 노벨상의 의도의 하나라면 참으로 기괴한 현상이라 할 
수 없겠는가. 

이 기괴함이 오에 씨에게 얼마나 깊은 상처를 남겼는가는 씨의 스톡홀름에서의 
수상 연설(1994. 12. 7)의 제목에서도 확연히 읽을 수 있어 인상적이다. 

일본어 작가로서 최초로 이 자리에 섰던 카와바다 야스나리는 ‘아름다운 일본의 
나’라는 강연을 했습니다. 그것은 매우 아름답고 동시에 매우 애매한 것이었지요. 
저는 지금 vague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이는 일본어로 ‘애매한’이란 뜻을 지닌 
형용사에 해당됩니다. 여기서 이 점을 표나게 내세우는 것은 ‘애매한’이란 
일본어를 영어로 번역할 경우 번역어로서 여러 낱말을 떠올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카와바다 야스나리가 아마도 의도적으로 선택한 이 애매함은 그 강연의 제목이 
말해주고 있지요. 그것은 일본어로 ‘아름다운 일본의 나’라는 그 조사 ‘의’의 
기능에 의한 것입니다. 

(1) 우선 ‘아름다운 일본’에 속하는 ‘나’를 가리킴인 것. 

(2) ‘아름다운 일본’과 ‘나’를 동격으로 제시한 것.

카와바다 문학 번역 전문가인 미국인 사이덴스티커의 영역은 Japan, the beautiful 
and myself로 되어 있음은 이 까닭. 꼭 이런 표현을 쓴 것은 아니나 오에 씨의 글 
저류에 흐르는 감정이랄까 의식은 다음과 같은 것 이 아니었을까. “카와바다 씨가 
자기 자신을 아름답다 하고, 선(禪)을 내세우고 나아가 동양적 신비주의를 외치고, 
그런 미학의 완성자라고 세계를 향해 외치는 것은 상관없으나, 또 그런 외침이란 
용기 있는 행위이며 자기 자신에 대한 정직함이며 자기 문학에 대한 
성실성이겠지만, 그것이 일본 자체라든가 일본문학이나 미학도 그러하다고 한다면 
곤란하지 않겠는가. 어찌 오늘의 일본의 문학이나 미학이 그러할까보냐. 극히 
일부, 그것도 늙은 층의 한 부분이 그러할 따름 아닌가. 사정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카와바다 씨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납득하기 어려운 말을 농하고 있지 
않겠는가”라고.

카와바다가 주장한 독자적 신비주의란, 선(禪)의 맥락 속에 있는 만큼 이를 말하기 
위해 일본 중세의 선승들의 와까『和歌』를 인용하고 있다. 오에 씨의 표현을 
빌면, 이러한 와까란 ‘언어에 의한 진리 표현의 불가능성을 주장’하고 있다는 
것, 말을 바꾸면 ‘닫혀진 언어’라는 것. ‘그 언어가 이쪽으로 전달되어 오는 
것을 기대할 수 없고 단지 이쪽이 자포자기하여 닫혀진 언어만으로 들어가지 
않고서는 그것을 이해하거나 혹은 그것에 공감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에 
해당된다는 것. 

이러한 와까를, 그것도 일본어 그대로 스톡홀름 청중 앞에 낭독함이란 대체 
무엇인가. 카와바다로서는 물론 자기의 정직성, 성실성이겠으나, 그 때문에 
그것으로 족하며, 또 그 강연의 결말이 자기의 그러한 미학이나 신념이란 서구의 
니힐리즘과는 다르며 따라서 니힐리즘이 아니라고 못박고 있었다는 것도 그의 
필연성이며 따라서 신뢰할 가치가 있고 존중되어야 마땅하겠으나, 그것이 막바로 
‘일본’이라 우긴다면 곤란하지 않겠는가. 적어도 그런 오해를 불러일으킬 
‘애매한’ 표현을 한 것은 곤란하지 않겠는가. 

오에 씨가 세계를 향해 전하고 싶은 요점은 무엇인가. 자기의 노벨상 수상이야말로 
그 동안 홀대받아온 ‘세계문학에서 배워(연결된) 창조된 일본문학’의 가치 
선양이 아니었을까. 자기의 노벨상 수상이란, 이 사실을 세계 속에 인식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 따라서 카와바다가 퍼뜨려 놓은 일본문학 및 일본인의 
미의식의 신비주의를 씻어버릴 수 있는 기틀로 삼겠다는 것으로 요약될 수 없을까. 
그렇게 하기 위한 치밀한 방편으로 행해진 것이 역설적이게도 『애매한 일본의 
나』였다. 그렇지만 여기서 말하는 ‘애매한’이란 vague가 아니라 ambiguous라는 
것. 영어의 이 낱말의 어떠함은, 영시의 본질을 파헤친 표준적인 시론서로 고명한 
저 엠프슨의 『일곱 개의 다의성(Seven Types of Ambiguity)』에서 잘 엿볼 수 
있다. 영시의 본질이 의미 전달에 있다는 것(프랑스 시가 울림, 존재의 드러냄에 
본질이 있다면). 따라서 의미 전달의 일곱 가지 유형을 정밀히 분석한 이 이론서의 
제목으로 사용된 ambiguity 란 ‘애매모호함’으로 번역되긴 하지만, 실상은 
다의성(多義性)이 아닐 수 없어, vague(막연함)와는 구별되지 않을 수 없다. 이 
다의성이야말로 근대 일본의 참모습이라는 것. 그가 자기의 문학을 ambiguity 라 
규정할 때, 그가 지향한 것은 자기 문학이야말로 진짜 일본의 근대문학을 
대표한다는 선언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이렇게 운을 떼고 있지 않겠는가. “개국 
이후 120년 동안 근대화를 계속해온 현재의 일본은 근본적으로 
애매함(ambiguity)의 양극으로 갈라져 있으며, 뿐만 아니라 그 애매함에 깊은 
상처를 입은 표나게 뚜렷한 작가로 제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곳”이라고. 국가와 
인간을 모두 갈라놓을 정도로 강하고 날카로운 이 ‘애매함’이란 무엇인가. 
서구를 모방하면서도 일본식 전통 지키기, 이 애매한 진행은 급기야 “아시아에서 
침략자 역할로 일본을 몰고갔다는 것”, 서구를 향해 전면적으로 개방되어 
있으면서도 서구 쪽에게는 언제나 이해 불가능한 어두운 부분을 지켜왔다는 것, 
게다가 “아시아에 있어서조차 정치적·사회적·문화적으로 고립되어 있었던 것”, 
이것이 일본 근대의 실상이라는 것. 이런 것에 ‘깊은 상처를 입은 표나는 
작가’가 바로 자신이라는 것. 과연 노벨상을 타기 위한 자기 선전이랄까 자기 
이미지 창출 방식치고는 참으로 집요하고도 적극적이라 할 만하다. 그만큼 끈질긴 
노력을 기울인 형국이라 할 것이다. 

일본문학이 과연 오에 씨의 자기 주장대로일까. 오에 자신의 일방적인 주장이기에 
그 혼자의 생각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자기 소설에 대한 해설가라든가, 
독서를 열심히 하는 척하고 그것을 자랑삼아 쓴다든가, 순문학이라 자처한다든가, 
체제비판적이면서도 고단샤『講談社』, 『분게이 신슈『文藝春秋』』, 
이와나미『岩波』, 『아사히 신문『朝日新聞』』 등의 제도권 밖으로 한번도 
나서지 않았다는 것 등의 비판도 있으며, 심지어 그의 소설을 펼치기만 하면 
졸린다는 비평가의 지적도 나와 있을 정도다. ("오에 겐자부로는 누구인가", 
산이치 신쇼, 1995) 그렇지만 오에 씨에게 계속 귀 기울일 필요도 있다. 오에 씨의 
이러한 연설문이 내 가슴에도 와닿는 것은 카와바다 못지 않게 씨의 성실성, 
정직성의 드러냄인 까닭이다. 우선 이 연설문 속엔 근대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과 
그로 인한 이웃나라의 고통이 여러 번 지적되고 있다. “나는 한국의 김지하와 
중국의 정의(鄭義), 모에이『莫言』 등과 연결짓기도 했다”고 그는 적었다. 씨의 
이러한 발언이란 지식인으로 독서를 열심히 한다는 자랑이겠지만 그의 전 작품에서 
어느 정도 증명되는 것이기에 그만큼 확실한 것이라 할 것이다.(졸고, "오에 
문학과의 어떤 만남", 『소설과 사상』, 1995. 여름호 참조) “세계의 중심이 
동북아시아가 될 것이다”라는 김지하씨의 주장에 반대하면서 오에 씨가 세계 온 
마을이 저마다 중심이 있을 뿐이라 주장하는 것도(동아일보, 1995. 2. 4. 김지하와 
오에의 대담) 이런 문맥에서 설명될 수 있겠다. 

근대 일본이란 다양성으로 구성되었다는 것, 보편성과 특수성이 깊은 골짜기를 
이루고 있으며, 그 골짜기에 상처입은 문학이 진짜 일본문학이라면 자기 
문학이야말로 그러한 유형의 대표적 유형이라는 것으로 오에 씨의 연설문을 요약할 
수 있지 않을까. 카와바다가 ‘일본문학’의 고유성이랄까 전통적 측면을 
내세웠다면 오에 씨가 내세운 것은 ‘일본 근대문학’의 실상이라 할 것이다. 세계 
속의 일본(그들은 80년대 이래 ‘국제화’를 내세웠다)을 목표로 하는 일본의 
세계화의 시선에서 보면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고장이었다’(『눈고장』 첫 줄)라는, 폐쇄적인 눈세계의 거울 속보다는, 오에 
문학의 다의성이 훨씬 현실적이라 할 것이다. 유력지 아사히 신문이 그토록 
대대적으로 또 지속적으로 오에 문학에 관심을 표명한 이유도 이로써 조금 
설명되지 않겠는가. 서울에서 씨를 잠시 만났을 때(1995. 2. 4) 묻지도 않았는데도 
씨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내 작품에 반한(反韓)적인 대목이 있다는 
한국측의 비판이 있었다. 내가 일본인이기에 일본인의 무의식 속에 그러한 요소가 
있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현상이 일어났는지도 모르겠다”라고. 

카와바다 문학과 바쇼 문학 

카와바다의 예술이 훌륭하듯 그의 노벨상 수상 연설문 또한 훌륭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와 꼭 같은 의미로 오에 씨의 문학과 씨의 연설이 훌륭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두 문학(미의식)의 차이가 아닐 수 
없다. 차이의 확인에서 만일 조금 나아갈 수 있다면 하고 나는 바랄 뿐. 어느 쪽 
미학이 좀더 현대적일까(오늘날의 우리의 삶에 한층 접근해 오는 것일까)를 묻는 
단계가 그것이리라. 나는 아직도 그런 수준에 이른 바 없다. 다만 그런 경지가 
열리기를 바랄 뿐. 바쇼를 공부하러 간 C시인에게 내가 유독 관심을 갖는 것도 이 
사정에 관여되어 있다. 

카와바다의 문학과 오에의 문학을 동시에 이해하고 또 비판할 수 있는 유자격자는 
누구일까. 그런 사람에게 이 과제를 조금 풀어달라고 물어보면 어떠할까. 우선 내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일본 고전문학과 근대문학 양쪽을 동시에 전공한 
비평가이거나 학자가 아니겠는가. 야마모토 겐기치『山本健吉, 1907∼88』 씨가 
아닐 수 없다. 게이오 대학 국문과에서 오리구치 노부오『折口信夫』에게서 
배웠고, 잡지 『하이쿠 연구』를 편집했으며, 또한 『비평』(1939) 동인이고 
『고전과 현대문학』(1955)의 저자인 까닭이다. 『시의 자각의 역사』 『바쇼』 
등의 명저로 알려진 야마모토 씨라면 이러한 내 물음에 어떤 암시를 던져줄지도 
모르지 않겠는가. 

카와바다 씨가 가스관을 입에 대고 자살한 것은 노벨상을 받은 지 4년 뒤인 
1972년이었다. 이 사건이 일본에 얼마나 충격적이었는가는 바둑인 오청원을 비롯한 
27인의 견해와 그의 친구인 곤 도꼬오『今東光』의 "진짜 자살한 사나이"라는 
『문예춘추』의 특집으로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카와바다의 자살과 관련, 문인들의 
반응도 여러 가지였음은 당연한 일이었으리라. 창작력의 고갈 때문이라든가 인생 
달관이라든가 환각과 현실의 넘나듦이 빚은 행위라든가, 등등이 그것. 그렇다면 
야마모토 씨의 견해는 어떠했을까. ‘카와바다 야스나리의 죽음과 그의 문학’이란 
부제를 단 "‘그리움’과 ‘쓸쓸함’과"(『新潮』, 1972. 6.)에서 야마모토 씨는 
이렇게 말문을 열고 있었다. 

“카와바다 씨로부터 언젠가 받은 그 편지, 지금은 어디 두었던가? 지금 이 급한 
판에, 그것 찾기를 단념한 채 나는 그 내용을 떠올리고자 한다.” 그 내용이란 
이러했다. 바쇼의 다음과 같은 시구의 해석에 관한 것.

가을 깊어라 

이웃은 무엇을 

하는 사람일까 

秋深き隣は何をする人ぞ 

(aki hukaki tonari-wa nani-o suru hito-zo) 

바쇼 만년의 이 하이쿠에 대해 세계적인 수학자이자 일본 수필의 대가급인 오카 
키요시『岡潔, 1901∼78』의 해석이 모 잡지에 실려 있는바, 이를 읽은 카와바다가 
느낀 바 있어, 야마모토 씨에게 편지를 한 것이었다. 그 느낌이란 어떤 
것이었을까. 야마모토 씨의 전하는 바에 따르면, 위의 시구를 
아쿠타카와『芥川龍之介, 1892∼1927』는 ‘쓸쓸함’이라 했는데, 오카 씨는 
‘쓸쓸함’이 아니라 ‘사람 그리움’이라 했다. 그대의 견해는 어떠한가라는 
내용이었다. 물론 카와바다 씨는 그 시구에 대한 자기의 느낌이나 견해를 내비친 
것은 아니었다. 

이 시구에 대한 야마모토 씨의 견해는 그의 명저 『바쇼』 속에 표명되어 있다. 곧 
자기와 이웃 사이의, 저마다가 고독함 속에서도 어울릴 수 있는 어떤 연대의식이 
있다는 것, 다시 말해 마음속에서는 자기 자신에게 말하면서 동시에 타인에게 말을 
거는 목소리가 있다는 것. 이 시구는 그러니까 고독 저 밑바닥에 있는 적요감을 
통한 사람 그리움이라는 것. 결과적으로 보면 오카 씨의 견해와 같은 해석이었다. 
만일 카와바다 씨가 야마모토의 『바쇼』의 이 평석 대목을 읽었더라면 그러한 
편지를 썼을 이치가 없다(‘미의 존재와 발견’『하와이 대학 강연, 1969. 5. 
22』에서 카와바다 씨는 야마모토 씨의 저서 『바쇼』 속의 평석 한 대목을 
인용하고 있었음에 비추어 보아 씨가 이 책을 갖고 있었으나, 위의 인용된 ‘가을 
깊어라……’ 부분 평석에까지는 눈을 돌리고 있지 못했던 모양). 

대체 카와바다는 어떤 이유로 야마모토 씨에게 의견을 구했을까. 이 물음은 영영 
풀 길 없는데, 당사자가 자살했기 때문이다. 야마모토 씨의 안타까움도 여기 
있거니와 또한 야마모토 씨 나름의 추측의 소중함도 이로 말미암는다. 다름아닌 
일본에서 고전문학과 근대문학을 동시에 파악할 수 있는 자질을 가진 최고의 
비평가 야마모토 씨가 추측해본 카와바다의 내면 풍경은 과연 어떠했을까.

‘가을 깊어라……’의 시구에 아쿠타카와와 꼭 같이 카와바다 씨도 
‘쓸쓸함’으로 읽고 있었다. 그런 씨가 오카 씨의 ‘사람 그리움’으로 읽는 
견해에 접하고, 깜짝 놀랐고, 공감했고, 그러나 약간의 의문이 없지 않아 내 
의견을 물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 그렇지만 나는 ‘가을 깊어라……’의 
시구에 ‘사람 그리움’(차라리 그리움 일반, 그러니까 대인적對人的 감정뿐이 
아니다)을 보는 견해에 대해 카와바다 씨의 마음이 움직인 점에서 씨의 마음의 한 
경향, 혹은 원망(願望)을 읽어내고 어떤 감동을 받았던 기억을 떠올렸다.

이를 계기로 야마모토 씨가 읽어낸 카와바다의 마음의 흐름이랄까 마음의 어떤 
경사란 과연 어떤 것일까. 먼저 야마모토 씨가 문제삼은 것은 바쇼의 그 시구가 
아니라 ‘눈, 달, 꽃에 벗을 생각한다’라는 시구이다. 스톡홀름의 수상 기념 
강연중에 나오는 이 시구는 대체 누구의 것인가. 카와바다는 다만 고금동서의 
미술에 박식한 야시로 유키오『矢代幸雄』 박사의 저서 『일본 미술의 특질』에서 
인용했다고 그 강연에서 밝히고 있다. ‘눈,달, 꽃에 벗을 
생각한다『雪月花時最思友』’를 두고 이것이 일본인의 미의식, 이른바 
풍아(風雅)의 사상의 근저를 가장 잘 말해주는 것 중의 하나로 거론한 것까지는 
좋으나, 대체 그 시구가 누구의 작인가라고 누군가가 묻자 ‘그런 것 따위 알게 
뭐냐’라는 카와바다 씨의 냉담한 대답이었음에 야마모토 씨는 주목하고 있었다. 
문제의 야시로의 저작 『일본 미술의 특질』을 펼쳐보면 그 시구의 출처가 당나라 
시인 백낙천의 "은협률에 부쳐(寄殷協律)"임이 밝혀졌을 뿐 아니라 일본인의 
손으로 된 『화한낭영집(和漢朗詠集)』과 수필 고전 
『마구라노죠시『枕草子』』에도 나오는 널리 알려진 시구임이 드러났다. 곧 
琴詩酒伴皆抛我 雪月花時最憶君("思友"라 제목을 단 이 시구의 뜻은, 거문고, 시, 
술, 벗 등으로 이루어졌던 인간적인 교우가 나를 버렸을 때, 그러니까 그러한 것이 
불가능해졌을 때, 제일 그리워지는 적은 언제인가? 눈과 달과 꽃이 바야흐로 피는 
그때라는 것, 곧 5년 간의 소주·항주 자사시설이라는 것). 정작 백낙천의 원시의 
뜻을 옮기면 이 점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협률랑의 은모에 부쳐(寄殷協律)"가 
그것. 

다섯 해 함께 즐겨 놀며 날을 보냈으나 五歲優遊同過日 하루 아침 흩어져 뜬구름 
같고나. 一朝消散似浮雲 

거문고와 시와 술이 더불어 모두 나를 버렸으니 琴詩酒伴皆抛我 눈과 달과 꽃의 
시절 제일 그대 그립도다. 雪月花時最憶君 몇 번인가 닭울음 듣고 백일을 읊었던가 
幾度聽계歌白日 또한 일찍이 말탄 기생들을 읊었던가 亦曾騎馬詠紅裙 

그 무렵 기생 오가 부른 저녁비 소슬함의 곡조 吳娘暮雨蕭蕭曲 강남에서 헤어지니 
다시 들을 수 없도다. 自別江南更不聞 

거문고, 시, 술과 눈, 달, 꽃이 짝으로 숙어화된 이 백낙천의 시구를 굳이 
해석하자면 어떠할까. 눈, 달, 꽃이란 사계의 자연 속에서 대표적인 좋은 경치가 
아니겠는가. 거문고, 시, 술을 이와 함께 마주함이야말로 즐거움이 아니겠는가. 
그렇지만 이 경치와 멋을 혼자 즐기기란 과연 인생 최고의 즐기기일까. 아니다. 
벗이 있어, ‘벗과 함께’ 즐기어야 최고의 즐기기라 하지 않겠는가. 혼자 즐기기, 
쓸쓸함, 현실 도피의 즐거움을 두고 어찌 최고의 즐기기라 할까. 마음 통하는 벗과 
더불어 그러니까 타자와 함께 즐기기야말로 참된 즐기기의 경지라는 것. 

카와바다가 이 시구를 인용한 것은, 그러니까 그가 이 정도의 뜻까지 파악했음에 
틀림없었다고 볼 것이다. 문인 최고의 영예의 순간 그의 이 즐기기도, 문학판에서 
함께 고뇌하며 뒹군 벗들과 함께 해야 진짜 즐기기였을 터이다. 요코미츠 
리이치『橫光利一』라든가 기타 고우들. 그들은 지금 이 땅에 없다. 이 고우들에 
대한 그리움이 ‘무의식 속에서’ 이 시구를 통해 드러났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좋게 평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면 어째서 그는 이 시구의 출처도 
알아보고자 하지 않았으며 출처를 묻는 사람에게 냉담한 반응을 보였을까. 더욱 
이상한 것은 어째서 그가 바쇼의 저 ‘가을 깊어라……’에 대한 의견을 야마모토 
씨에게 물었을까에 대한 점이다. 만일 ‘가을 깊어라……’ 구절을 ‘쓸쓸함’으로 
파악하고 있지 않았더라면 어째서 그것이 ‘사람 그리움’이라는 오카 씨의 견해에 
그가 그토록 충격을 받았겠는가. 앞에서 ‘무의식 속에서’라고 한 것은 이 사정에 
관여된다. 

오카 씨의 카와바다 비판 

카와바다와 오카, 두 거장의 두번째 대결이란 무엇이던가. 야마모토 씨가 정작 
파헤쳐보고 싶었던 것이 바로 이 장면이 아니었을까. 1971년 야마모토 씨가 
『바쇼』 책(카도가와 서점)을 내기 위해 쿄토에 있는 오카 씨를 찾아가 대담을 한 
바 있었다는 것, 그때 오카 씨는 진아(眞我, 無私)를 설명하기 위해 
도오겐『道元』의 "본래면목"이라는 작품 “봄은 꽃이라 여름은 두견이라 가을에는 
달, 겨울은 눈이 맑아 서늘하기도 하더라”를 들었다는 것.

이 시구는 앞에서 보인 대로 카와바다 씨가 스톡홀름에서 행한 강연의 첫 줄에 
인용된 것이다. 일본인의 미의식의 정수랄까 본질을 보이는 사례로 들었던 것. 
야마모토 씨가 이 점을 지적하고자 할 때 오카 씨는 말머리를 뺏다시피하면서 
이렇게 내뱉었다는 것이다. “카와바다 씨는, 그러나(그 시구의 뜻을) 진아의 
무(無)라는 경지라고 보는 것에까지는 이르지 못했다”라고. 카와바다 문학의 
근저에는 인간다움이랄까 친근미 같은 것을 찾기 어려움을 오카 씨가 말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겠는가. 이 장면에 와서야 오카 씨에게, 바쇼의 ‘가을 
깊어라……’의 시구에 대한 카와바다 씨의 반응을 비로소 실토했다고 야마모토 
씨가 말하고 있어 인상적이다. 야마모토 씨는 오카 씨가 한 말의 뜻을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카 씨의 말을 전하는 대목을 보면 다음과 같다. 

바쇼가 쓸쓸하다고 하는 것은 사람 그리움이라는 것이다. 또한 쓸쓸함이란 사람의 
쓸쓸함도 쓸쓸하지 않으면 참된 쓸쓸함이 아니다. 사람 그리움이 되고 마는 
것이다. 거기까지 이르지 않으면 인생이란 것을 알지 못하지요. 단순한 에고이즘에 
지나지 못하지요. 실로 추악한 꿈이지요. 

오카 씨의 이러한 발언의 저류에 흐르는 느낌은 무엇이었을까. 카와바다 씨는 
‘자기의 쓸쓸함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특별한 것’이라고 알고 있는 모양인데, 
이런 생각이야말로 구제할 수 없는 에고이즘이라는 것. 게다가 추악한 
망상이기조차 하다는 것. 이 점을 야마모토 씨는 알아차릴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근대 작가나 예술가는 누구나 자기 개성에 절대적인 자부심을 갖고 있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이 오만함, 이 미망에서 카와바다도 예외는 아니었을 터이다. 
자살이 그런 증거의 하나로 볼 수 없겠는가. 자기라는 존재가 특별히 슬프거나 
쓸쓸하다고 느끼지 않으면 자살 따위가 생길 이치가 없다. 물론 카와바다는 
천재이기에 범속한 인간이나 예술가와 구별되겠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인간적인 상식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카와바다 씨도 자기의 쓸쓸함을 특별한 
것이라 여기지 않고, 자기의 적막함을 보통 사람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면 자살까지는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런 천재를 범인과 혼동하지 
말라든가 천재를 범인의 눈으로 재는 어리석음이라 비난받을 수도 있지만, 이러한 
비난을 어느 정도 막아내거나 조금 묽게 하기 위해 나는 지금껏 논의해온 것이다. 
어째서 그러한가. 바쇼의 시구 ‘가을 깊어라……’에 대한 카와바다의 마음의 
흔들림이 그 증거였다. 이 증거는 스톡홀름의 강연에서도 발견해낼 수 있음은 
물론이다. 이 수상 강연에서 그는 자살한 아쿠다가와의 유서의 한 구절을 인용하고 
있었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곳은 얼음같이 맑디맑은 병적인 신경의 세계다. (……) 내가 
언제 감연히 자살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다만 자연은 이같은 나에게는 여느 
때보다도 한층 아름답다. 자네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사랑하면서도 자살하려는 나의 
모순을 웃으리라. 그러나 자연이 아름다운 것은 나의 마지막 눈길에 비쳐지기 
때문이다.(수상 연설문에서 재인용) 

아쿠다가와의 이 유서의 대목에 나오는 ‘마지막 눈길’에 착목하여 카와바다가 쓴 
수필이 유명한 "마지막 눈길"이거니와, 이 수필에서 그는 이렇게 결론짓고 있지 
않았던가. “제 아무리 현세를 혐오한다 하더라도 자살은 오도(悟道)의 자태는 
아니다. 제 아무리 덕행이 높다 하더라도 자살은 대성(大聖)의 경지에는 
멀다”라고. 카와바다 씨는 이 말을 세계인들 앞에서 해놓고 있다. 

여기까지 이르면, 카와바다의 마음의 흐름을 다음처럼 읽어볼 수 없을까. "마지막 
눈길"에서 보듯, 미와 죽음의 등가사상을 비판하면서도 한편 그것에 대한 마음의 
경사를 금하기 어려웠다는 것. 이러한 마음의 혼돈에 있을 때 바쇼의 ‘가을 
깊어라……’의 구절에 대한 오카 씨의 평석을 읽었다는 것. 그 순간 그의 마음의 
혼돈이 더욱 심해졌다는 것. 그만의 쓸쓸함이냐, 사람 그리움이냐, 이 갈림길에서 
그의 마음은 혼돈 상태였다. ‘가을 깊어라……’에서 ‘쓸쓸함’이라는 근대적 
개인주의의 추악스러움을 그는 아쿠다가와와 공유하고 있었으나 오카 씨의 평석을 
접하고 충격을 받았다. 『잠자는 미녀』 계통의 비록 아름다우나 뭔가 추악스러운 
것(근대적인 개인주의)에서 벗어나야 했을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 그는 여러 가지 
노력을 했을 것이다. 펜클럽 회장직을 비롯, 근대문학관 창립, 하와이대 세미나 
참가, 아시아 작가회의, 서울 펜대회 참가, 뿐만 아니라 토쿄 도지사 
선거유세에까지 나아가고 있었는데, 이런 사회적 활동은 무엇이었을까. 사람 
그리움의 마음의 경사라 할 수 없을까. 벗에 대한 그리움에 연결되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렇지만 이러한 일들은 창작 행위와는 무관하다. 이런 행위를 하는 동안 그는 
작품을 쓰지 못했던 것이다. 작품을 통해서 삶의 충실감이랄까 생명의 고양을 얻는 
것이 작가라면 카와바다는 불행했는지도 모른다. 사후적인 판단이긴 하나 만년의 
바쇼의 ‘가을 깊어라……’의 경지에 결국 이르지 못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 카와바다의 불행이 있고, 죽음이 스며들 마음의 틈이 생겼던 것이 
아닐까. 정중하게 수면제에 의한 사고사로도 알려져 있는 그의 죽음을 일종의 
자살로 바라보는 것은 이런 사정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오리엔탈리즘과 그 주변 

1994년도 노벨상이 오에 씨에게 주어졌음은 매우 상징적이었다. 세계로 하여금 
일본문학이 두 가지로 크게 분류된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케 한 계기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일본의 나’로 대표되는 ‘일본문학’과 ‘애매한 일본의 
나’로 대표되는 ‘일본 근대문학’이 그것. vague 와 ambiguous로 비유되는 이 두 
가지 문학 범주의 동시적 인정을 강요하고 있음이 노벨상 위원회의 겨냥한 
곳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일본 및 일본문학을 일면적으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 카와바다류의 문학이 일본문학의 주류도 아니며, 다만 한 유형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오에의 문학을 내세워 그들은 정정하고자 시도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좀더 순리적으로 말해본다면 국제화 속에서 서구와 더불어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는 
전후 일본인의 자신감이 vague 쪽이 아닌 ambiguous 쪽으로 기울어지게끔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E.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1976)에 촉발된 것으로 
보이는 한 비평가의 다음과 같은 견해가 이 사정을 잘 말해준다고 볼 수 없을까. 

전후 『눈고장』은 미국의 일본문학자들에 의해 특권적으로 선호되었고 마침내 
노벨상까지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참으로 점령하의 일본을 
‘눈고장’으로 본 결과이다. 4년 간 미국과 싸운, 군사력과 기술력을 가진 일본, 
아시아를 침략하고, 거기에서 서양 제국주의 국가들을 쫓아낸 제국주의의 일본, 
그러한 일본 따위는 잊자. 그러한 일본의 처리는 점령군에 맡겨버리자. 그들이 본 
것은 『눈고장』의 가난한 기생들과 같은 무력하고 아름다운 일본, 혹은 그런 
일본문화이다. 그들은 ‘국경의 긴 터널’을 지나, ‘눈고장’을 찾고, 그것을 
‘타자’로 알고 감탄한다. 그러나 거기의 일본은 그들의 자기의식이 투사하는 
‘거울’에 지나지 않는다’(가라타니 고진, "일본근대문학의 기원 재고", 
『비평공간』 제1호, 1991). 

미국과 4년 동안이나 군사력으로도 기술력으로도 겨눌 수 있었던 근대 일본의 
위엄에 어울리는 그러한 일본문화 및 문학이란 무엇이겠는가. 이 물음에 대답하는 
책무를 일본문학이 짊어지고 있지 않았을까. 이러한 열망이 오에의 노벨상 
수상으로 어느 정도 달성되었는지도 모른다. 비록 오에 씨가 일본 제국주의를 
비판하고, 김지하, 정의(鄭義), 모에이『莫言』 등을 내세웠을지라도 120년에 걸친 
일본 근대를 그대로 수용한 점에서 보면 그러한 판단을 가능케 한다. 이러한 
시선에서 보면 오에의 수상은 씨의 자기 선전 및 성실성과 더불어 썩 현실적이라 
할 것이다. 

이로써 일본은 ‘일본문학’과 ‘일본 근대문학’을 세계 속에서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고 대범하게 말해볼 수 있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나는 마지막으로 남는 
다음과 같은 의문을 끝내 떨치기 어려웠다. 바쇼의 ‘가을 깊어라……’의 시구가 
그것. 『궤 일기』(1694)에 실려 있는 이 작품은 그의 죽던 해에 쓴 작품이다. 이 
작품의 경지가 어느 수준인지 알지는 못하나, 이 방면의 전문가인 오카 씨나 
야마모토 씨의 평석을 빌면, 카와바다가 이른 경지보다는 한층 윗수로 이해된다. 
개인주의가 아니라 ‘사람 그리움’의 경지라는 것. 도오겐이나 바쇼는, 오카 씨의 
표현을 빌린다면, 진아(眞我)의, 무(無)의 경지까지 이르렀으나, 카와바다는 
여기까지 이르지 못한 것으로 말해진다. 만일 이 점을 믿는다면, 세계에 소개된 
카와바다의 문학이란, 특출하긴 해도 뭔가 조금 어색한 ‘일본문학’이라 할 수 
없겠는가. 내가 좀더 알아보고 싶은 곳이 바로 이 점에 있었다. 바쇼에 관심이 간 
것은 이 때문이었다. C시인이 도일한다는 풍문이 들렸을 때 내가 갖고 있던 바쇼의 
기행 시집 『오쿠노호소미치『奧の細道』』(영역판)를 C시인에게 우송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C시인이 만일 바쇼를 깊이 공부해서 귀국한다면 나는 ‘가을 
깊어라……’의 그 시구에 대한 C시인의 해설을 잘만 하면 경청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않겠는가. 정작 오에의 저러한 자기 선전의 문구라든가, 그의 지속적인 
카와바다 문학 비판의 허실도 조금은 엿볼 수 있지 않을까. 오에 문학을 옹호하는 
일본 지성계의 어떤 취향도 엿볼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내 세속적인 얄팍한 공리주의를 비웃듯, 그로부터 반 년이 지난 어느 
눈오는 날, 내 서재에 C시인의 엽서가 날아들었다. 거기엔 내 이름과 함께 이런 
C시인의 자작시가 적혀 있을 뿐이었다. 

어둠이 묵정밭 갈아 염주알 만들었나 

닭벼슬 꼭대기에 올라서는 새벽빛 

쪽배 같은 책상에 홀로 받을 때 

소란한 물보라 일으키는 마당 빗방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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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께서 말씀하셨다 : "활쏘기는 군자의 덕성과 비슷한 바 
가 있으니, 활을 쏘아 과녁을 벗어나더라도 오히려 그 이유
를 자기 몸에서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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