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요키에로타) 날 짜 (Date): 1998년 11월 28일 토요일 오전 06시 41분 43초 제 목(Title): 퍼/김병국 반유교적 유교정치 2 반(反)유교적 유교정치 ------------------------------------------------------------------------------- - 4. 도덕 정치 그렇다고 해서 프라그마티즘이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한국적 재해석의 과정을 독점하였다는 것은 아니다. 이미 밝혔듯이, 독사의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인본주의와 가족주의의 유교문화는 현실을 중시하면서도 도덕을 따르려는 이중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프라그마티즘의 수준에서 생존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인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장기적으로는 각각을 (특히 민주주의를) 도덕적 관점에서 바라보게 되는 것은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일이다. 그렇다면 문제의 핵심은 한국에서 '도덕적'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 이다. 여기서도 분석의 출발점은 서구인의 눈이 아니라, 한국인의 마음 속 깊숙이 숨어 있는 한국 고유의 독사 안에서 도덕의 문제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영국과 한국에서 다같이 동일한 의미를 가지는 것처럼 보이는 말들이 사실은 조금씩 다른 의미도 포함하고 있는 말들임을 의식하지 못할 수 있다. '시장'과 '마켓트'(market)가 제도적으로는 동의어로 번역될 수 있지만, 철학적으로는 전혀 같은 의미를 갖고 있지 못하는, 따라서 실제 제도 및 정책의 운영과 관련한 스타일(이를테면, 신축성)의 문제에 있어 상당한 차이점을 영국과 한국 사이에 불러일으키는 관념이라는 것을 정확히 분석해 낼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민주주의를 '도덕적' 관점에서 바라본다는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느냐를 밝히려면, 시장에 대한 분석의 경우에서 처럼, 한국 고유의 독사 '안'으로 들어가 도덕의 내용(content)을 개념화하고, 그것을 서구라파에서의 이념과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이처럼 한국 고유의 독사 안으로 들어가 민주주의에 대한 도덕적 해석의 과정을 살펴보면, 그 독사 안에 '있는 것'과 '없는 것'이 해석의 결과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 밝혀진다. 흔히 민주주의는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국민의 정부'라고 말한다. 한국의 전통문화에도 번역어로서는 이들 세 가지 원칙 또는 명제 중 두 개와 비슷한 의미를 가지는 개념들이 있다. 하나는 '국민의 정부'와 친화력을 갖는, 그것의 모태가 될 수 있는 민본(民本)의식이고, 다른 하나는 '국민을 위한 정부'로 번역될 수 있는 위민관념이다. 그러나 이처럼 조어를 만들지 않고 직접 한국어 사전을 뒤지고서도 대충 뜻이 통하는 것처럼 보이는 단어를 찾을 수 있다고 해서, 그들 개념 사이에 어떠한 미묘하면서도 중요한 의미 상의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려서는 안된다. 오히려 적극적이고 조직적인 시민의 정치참여를 전제로 하고 있는 '국민에 의한 정부'의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 하에서 구사되는 위민은 온정적이고 위계적인 개념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은 자연상태와 사회계약 등의 설화를 지어낸 서구라파의 근대적 정치사상 내에서 상정하고 있는 시민과는 다른 백성을 전제로 하고 있다. 서구라파의 사회계약론 내에서 개인은 절대성과 주권성을 가지고 스스로 자신의 목소리를 내며 자기 이익을 챙길 줄 아는 존재라고 할 때, 유교에서의 민(民)은 상당히 수동적인 행위자이다. 동양의 유교적 설화에서 '계약'의 당사자는 오히려 군주와 천(天)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전자는 후자에게 백성의 삶을 보살필 것을 약속하는 대가로 사회를 다스릴 수 있는 천명을 얻는다. 군주가 약속자라면 천은 수약자이고 민은 계약의 수혜자라고 할 수 있다. 권리는 천이 가지고, 책임은 군주가 지는 반면에, 혜택은 민의 몫인 독특한 삼각관계가 상정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삼각관계를 상정하고 있기 때문에, 첫째 한국 고유의 유교적 국어사전에는 '국민에 의한 정부'에 근접하는 단어 또는 개념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이고, 둘째 그 결과 위민은 온정적이고 위계적인 관념이 될 수밖에 없으며, 셋째 신분제가 무너지고 백성이 시민, 대자적(對自的) 민족으로 변화한 현대 한국의 정치에서도 '국민에 의한 정부'는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전통이 아니라 실제 삶 속에서 체험을 통해 새로이 배워나가야 하는 창조의 대상으로 남는다. 그 결과 현대 한국정치는 군사독재의 시대가 지나간 다음에도 여러 면에서 여전히 민주주의의 이상에 근접해 있지 못하다. 시민 개개인은 정치에 대한 비판의식을 이미 상당히 키워놓은 상태이지만, 그러한 비판의식이 강력한 실천의지과 구체적 행동으로까지 발전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또 정치적 참여의 통로를 가로막아 온 갖가지 법적 제약요소가 허물어지고, 정보를 차단하고 독점해 온 정치권력이 다양화와 세계화 및 정보화의 추세로 그 안에서부터 사회 전반에 대한 통제력을 일부 잃어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민 개개인은 대다수가 아직도 정치권 밖에서 그 안의 권력투쟁을 지켜보고 비판하는 청중이나 관객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 지 모른다. 우리는 현대에 대한 전통적 해석을 통해 현대를 살아가고 있다. 사회계약론의 기저에 깔린 절대 개인의 독특한 존재론과 현대 과학의 경험론적 인식론에 설복당하지 않은 채, 단순히 서구라파 내에서의 철학적 논의의 결과물인 시민권과 선거정치를 민본관념과 위민의식의 연장선 상에서 실용주의적으로, 또 도덕주의적으로 이해하고 긍정하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대하여 철학적 논쟁을 심층적으로 벌이는 것이 아니라, 서구라파에서 그러한 철학적 논의의 제도적 결과물로 등장한 것들, 이를테면 공명정대한 직접선거, 그리고 민간정부의 군(軍)에 대한 강력한 통제권한 등을 역사경험 속에서 일종의 도덕적 원칙으로 배워 나간다는 이야기이다. 바로 여기에 한국 민주주의가 공허한 수사로밖에 보이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체제 정당화 또는 비판의 논리를 제공하는 틀로 존재할 수 있는 또다른 이유가 있다. 실제 삶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수단으로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이해하고 긍정하는 프라그마티즘의 정신에 의해서만 아니라, 직선제와 문민화 및 절차의 민주성 등을 도덕적 관점에서 이해하고 긍정하는 도덕주의의 전통에 의해서도 한국 민주주의가 유지되고 발전한다는 진단이다. 그리고 그러한 프라그마티즘과 도덕주의는 유교라는 동일한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다. ------------------------------------------------------------------------------- - 5. 동양의 인식론 한국적 재해석의 과정은 서구라파적 관점에서 볼 때 명시적으로 철학적·이론적 체계를 구상하지도 않고 '무턱대고' 이루어지는, 연역적 이론화 보다 경험적 집단학습에 근거하여 이루어지는 별로 체계적이지 않은 과정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현대 한국인은 서구라파적 근대화의 제도적 결과물들인 직선제와 문민화 및 민주적 절차 등을 지켜야 할 도덕적 원칙으로 서서히 배워나가고 있지만, '어떠한 의미에서,' 또 '왜' 그러한 제도적 결과물들이 도덕적 원칙이 되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서로 체계적이고 심층적인 철학적 논의도 해 본 적이 없고, 서구라파처럼 자기 자신만의 독특한 이론을 개발하려고 노력해 본 적도 없기 때문이다. 직선제 등이 도덕적 원칙이라는 것에는 이론(異論)을 제기할 사람은 많지 않지만, 그것이 왜 도덕적 원칙이 되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체계적으로 다루는 한국 고유의 '두꺼운 이론적 서적'은 어디서고 발견할 수 없다. 그러나 이처럼 한국 고유의 민주주의 이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서, 민주주의가 도덕적 재해석의 과정을 거쳐 한국사회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또 명시적인 추상화와 이론화 없이, 자신의 주장을 도덕적 명제의 형태로 '막연하게' 제시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그것이 한국적 담론체계의 기형성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도 없다. 한국의 독사 내에는 명시적 추상화와 이론화로 진리를 캘 수 없다는 독특한 인식론, 그것도 따져들어가 보면 근대적 서구라파의 담론체계 밑바닥에 깔려 있는 과학적이고 경험론적인 인식론 보다 더 타당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는 나름의 인식론이 존재한다. 그 인식론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두꺼운 이론적 서적'없이 민주주의의 제도들을 도덕적 명제의 형태로 재해석해 내고 긍정하는 것이 앎(knowledge)의 속성 상 어쩔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나카무라는 불교의 중국화 과정에 대한 분석을 통해 그 인식론의 성격을 알아 본 바 있다. 그의 저서에서 중국적 정서의 특징으로 제시되었던 것 중 한국의 정치문화에 대한 이해의 단초를 제공해 줄 수 있는 것은 서너 가지이다. 하나는, 추상적 개념을 이해하고 그 의미를 상대방에게 전달하려 할 때 인간의 감각과 지각기관에 포착되는 유형명사를 떠올리고 갖가지 그림과 표를 그려보는, 다시 말해서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져 볼 수 있는 사물에 대한 이미지를 연상하는 구상적(具象的) 관념화의 경향성이고, 다른 하나는 세상의 이치를 명시적으로 하나의 보편적 명제의 형태로 표현하려 하기 보다 불가설(不可設)의 자세에서 그 의미를 수많은 은유적이고 직관적인 언명 속에 담아내는 경향성이다. 그리고 그러한 불가설은 다시 인생경험의 특수성을 존중하고 강조하는 철학적 자세로 이어진다. 보편적 진리는 인간이 거치는 경험들 속에 수많은 특수한 형태로 숨어 있는 불가형언의 것이라는 진단이다. 그러나 중국적 정서는 이렇게 진리가 불가형언의 것이라고 진단을 내릴 때, 동시에 그 진리는 개개인이 수신과 훈련 및 극기를 통해 알아낼 수 있다는 대단히 낙관적인 인식론 또한 지니고 있다. 하나하나가 서구라파의 근대적 담론체계 밑바닥에 깔려 있는 경험론적 인식론과는 배치되는 견해이다. 근대 서구라파의 이론과 관념은 '비판적 사고'(critical thinking) 위에서 존재한다. 일정한 가정을 세우고 그로부터 연역적으로 가설을 도출한 다음에, 그 타당성 여부를 경험으로 검증하고 가설의 수정과 재검증에 재차 나서도록 하는, 다시 말해서 지식의 진실성 여부에 대하여 상당히 신중한 자세를 취하고 건전한 회의와 비판의 정신을 장려하는 것이 서구라파의 근대적 담론체계이다. 한편 유교는 마음공부를 통해 진리를 터득할 수 있다는 낙관적인 인식론적 자세를 취한다. 불가설과 구상적 관념화 및 낙관론 등으로 특징되는 동양의 인식론은 현대 한국인의 말과 행동 구석구석에 짙게 배어 있다. '무엇이 바람직한 사회인가' 하는 질문에 부딪혔을 때, 적지 않은 한국인이 '상식이 통하는 사회'라고 대답하지만, 그 '상식'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가를 분석적으로 따져보는(아니, 분석적으로 따져보고 몇 개의 보편적 명제로 그 의미를 압축시켜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또 말과 행동의 정당성 여부를 가려주는 잣대를 찾을 때, 상당수가 '양심'을 떠올리지만, 그 양심을 체계적으로 개념화시키고 명시적으로 이론화하는 사람 역시 흔치 않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중국적 인식론의 관점에서 볼 때, 인간 개개인에게는 무엇이 상식이고 또 무엇이 양심인가를 밝혀줄 수 있는 마음이 존재하기 때문에 구태여 이론화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뿐만 아니라, 둘째 서구인처럼 아무리 가정과 가설을 세우고 정교한 이론을 만들어낸다 하더라도, 그 이론과 그 명제들이 모든 특수한 상황들에 적용될 수 있을 만큼 진실의 전부를 담아내고 있다고 생각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중국적 인식론의 골격을 간추리면, 이렇게 서너 가지로 개념화할 수 있다. 구상적 관념화를 선호하고 불가형언의 진리를 추구하는 동시에, 몇마디의 말로 표현될 수 없는, 오직 직관에 의해 그 실체가 느껴질 수밖에 없는 보편성을 수많은 특수한 상황 속에서 찾아내고, 더 나아가 마음공부를 통해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는 낙관적 견해를 품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인식론 때문에, 현대 한국에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뿌리를 내리는 과정은 체계적인 과학적(서구적) 이론화의 과정을 생략한 채 도덕적 학습의 형태로 진행될 수 있었던 것이다. 한국에서의 도덕주의가 도서관의 한 층도 채워넣을 수 없는 일천한 민주주의 이론서적 밖에 만들어내지 못한다고 해서, 몇 층을 채울 수 있는 서구라파의 서적들 안에 담겨 있는 개념과 이론 보다 한국의 도덕적 원칙들이 정당성 여부를 가려주는 잣대로서 효과적으로 기능할 수 없다고 단언해서는 안된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한국의 독사는 두 가지의 관념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프라그마티즘이고, 다른 하나는 도덕주의이며,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근대적 관념들은 이들을 통해 재해석되고 한국적 의미를 가지게 된다. 인간이성이 보다 나은 미래를 창조할 길을 밝혀 주리라는 확신 아래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이론의 개발에 나서는 것이 아니라, 삶의 진리는 몇 가지 명제로 축소·표현될 수 없는 불가형언의 것이라고 인식하기 때문에, 또 그러한 진리는 수신과 훈련 및 극기 등의 마음공부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서구라파의 경우와는 달리 도서관 안에 가득 진열시킬 만한 이론적 서적들로 축소·표현될 수는 없지만, 일상생활의 언어와 행동 속에 이미 내포되어 있는 것이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한 실용주의적이고도 도덕주의적인 재해석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 - 6. 반(反)유교적 유교정치 한국 전통문화의 잠재력과 한계가 다같이 여기에 있다. 거기에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한국식 대로 해석할 수 있도록 해주는 -- 그리하여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한국사회에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해주는 나름의 독특한 정치적 언어가 있다. 정치가 지향하여야 하는 것이 무엇인가가 위민이라는 관념으로 분명하게 설정되어 있고, 그 관념은 또 프라그마티즘과 도덕주의의 양면성을 가진 덕분에 정책을 구상할 때 고려해야 할 두 가지 요소(하나는 현실적 제약, 또다른 하나는 도덕적 원칙)를 동시에 강조하는 경향성이 있다. 유교정치에서의 이상은, 도덕주의가 앞으로 나아갈 정책방향을 제시해 주고, 반면에 프라그마티즘의 정신은 그 방향으로 나아갈 때 부딪히게 되는 갖가지 위험성에 대비하고 무리수를 두지 않도록 유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론'과 '실제' 사이에는 언제나 긴장관계가 성립되기 마련이다. 한국이라고 예외일 리 없다. 프라그마티즘과 도덕주의가 서로 조화를 이루면서 국가사회로 하여금 중의 상태로 나아갈 수 있도록 보장해 줄 것이라고만 기대할 수는 없다. 오히려 한국의 근대사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첫째, 위민이 실생활 중심의 관념이었기 때문에, 주어진 현실에 따라 순식간에 정치적 의제가 확대되거나 축소되고 정계개편이 일어나는 것이 한국정치이다. 한국정치의 딜레마가 여기에 있다. 현실은 언제나 가변적이다. 침체의 씨앗은 경제성장의 시대에 뿌려지고, 정치적 안정에 대한 갈망은 불안정에서부터 자라난다. 그러나 현재의 사회질서를 개혁하고 보다 나은 미래를 건설하려면, 현실과 상황의 변화에 둔감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상황의 변화에서 빚어지는 지적 혼동과 실망 및 회의를 이겨내면서 개혁을 추진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 도덕주의라고 말할 수 있을 지는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도덕주의가 프라그마티즘의 정신에 의해 너무나 쉽게 훼손될 수 있고, 개혁에 대한 의지가 무너질 위험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러한 위험성은 한국에서 진행되는 보수 대(對) 진보의 논쟁 속에 이미 상당부분 현실화되어 있다. 한국의 유교사회에서 보수와 진보는, 독사를 구성하고 있는 프라그마티즘과 도덕주의의 연장선 상에서 이해될 수 있을 지 모른다. 경과 권의 논리 가운데 전자에 치우쳐져 있는 '원칙론자'가 한국 정치에서는 '진보'가 되고, 후자는 '보수'로 구분될 수 있을 지 모른다는 이야기이다. 보수는 정책에 대한 현실의 제약을 부각시키면서 개혁에 제동을 걸려는 반면에, 진보는 사회과학의 갖가지 이론을 동원하여 현실 속에서의 변화의 가능성을 역설하는 정치적 세력으로서 다시 개념화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유교적 사회에서 최상의 상태는 경(經)에도 권(權)에도 치우치지 않는, 말하자면 양자의 논리를 생산적으로 결합하는 중(中)이기 때문에, 한국에서의 진보와 보수는 반드시 서로 배타적인 정치세력도 될 수 없고, 일단 어느 하나에 몸을 담으면 계속 그 속에 남아야 하는 영구적인 분류방식도 될 수 없다. 특정한 시점에 보수로 구분되는 정치인이건 진보로 분류되는 정치인이건, 일단 상황이 달라지고 '현실'의 제약이 변화하면, 언제든지 자신의 주의주장을 잠시 포기하거나 양보할 자세가 되어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유교의 이중성은 한국의 이념적 지형을 절대 통합할 수 없는 무리들로 갈라놓지 않는다. 특정한 시점에 '현실론'을 따르는 소문자 보수(conservative)세력이 존재하고, '원칙론'에 치중하는 소문자 진보(progressive)가 있지만, 양자 모두가 현실과 원칙을 다같이 중시하는 유교의 담론체계 내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상황이 달라지면 언제나 반대편으로 가거나 상대방과 연대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한국에는 진정한 의미의 보수도 진보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둘째, 이미 수차례 밝혔듯이, 유교는 일제강점의 충격이 지나간 다음에는 정치사회를 구성하고 운영하는 원리로서의 정당성을 더 이상 공개적이고 명시적으로 주장하기 어려웠고, 대신 말로 표현되지 않는 독특한 존재론과 인식론의 형태로 살아남아 부지불식간에 현실을 바라보는 한국인의 관점을 결정하고 서구적 관념에 대한 해석에 영향을 미쳤다. 이것은 곧, 특수한 시점과 상황에서 무엇이 경이고 권이며, 어떻게 하면 중의 차원으로 올라갈 수 있는가 하는 구체적 문제에 있어 대중을 일깨워줄 '어른'이 존재하지 않고, 도덕적 판단의 주체는 개개인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더 이상 개개인이 수신과 훈련 및 극기의 과정을 통해 중의 경지에 다다를 수 있는 '평온한' 농촌사회가 아니기 때문에, 다시 말하면 인의예지신의 덕목을 익히고 실천하기에는 생존경쟁이 지나치게 치열한 사회이기 때문에, 개개인이 내리는 도덕적 판단이 유교 본래의 취지에 부합되는 것이라고 보장할 수는 없다. 개개인은 수신과 훈련 및 극기의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서도 프라그마티즘과 도덕주의의 언어를 구사하게 되지만, 그것이 철저한 수신과 훈련 및 극기의 과정을 거친 다음에 이루어지는 언어 구사가 아니기 때문에, 유교의 본래 취지에 충실한 것이 될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오히려 '원칙'과 '현실'을 자기 멋대로 자기 편의대로 재해석하는, 다시 말하면 전통유교 본래의 목적과 상충되는 편의주의적 정치행태를 유교적 언어로 정당화하는 반(反)유교적 유교정치가 펼쳐질 위험성이 대단히 높다. 상황이 불리하면 현실론을, 상황이 유리하면 원칙론을 견지하면서 현실론과 원칙론을 오직 권력투쟁의 도구로 삼는, 즉 현실론도 원칙론도 아닌 편의주의만이 난무하는 반(反)유교적 유교정치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셋째, 중의 관념 때문에 보수와 진보의 경계선을 긋고 그에 따라 정치를 조직할 수 없는 틈을 타, 지연이 정치사회의 핵심적 구성원리로 떠오르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또다른 의미에서의 반유교적 유교정치를 낳는다. 위에서 주장한 바와 같이, 유교가 개개인으로 하여금 몇 개의 동심원을 자기 주변에 그리면서 자아를 규정하도록 유도하는 가장 큰 이유는, 개개인 스스로가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폐쇄성을 보다 큰 가족주의의 관념으로 극복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이다. 혈연적 가족에서 이웃으로, 이웃에서 지역으로, 그리고 다시 지역에서 민족으로 동심원을 확대할 수만 있다면, 열린 마음은 항상 유지되고, 개개인은 자신과 다른 상대방을 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대 한국인은 동심원을 '밖'으로 확대시켜 나가는 과정에서 작은 혈연과 학연 및 지연의 관념에 발목이 잡히고 만다. 열린 마음을 키우기 위하여 등장한 동심원의 개념이 오히려 닫힌 마음을 배태하고 사회공동체를 분열시키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넷째, '어른'이 없는 상황 하에서, 수신과 훈련 및 극기의 마음공부를 하기에는 삶의 리듬이 너무나 빠른 현대적 자본주의의 구조 하에서, 개개인이 전통적 관념을 제멋대로 해석한 결과, 덕(德)의 관념이 무(無)원칙의 물질적 복(福)의 관념으로 변질되고, 그 변질된 덕의 관념은 한국 정치를 거대한 부패의 구조로 전락시키고 한국사회를 긴 먹이사슬로 감아 놓는다. 현대 한국의 정치사회에서 '덕행'은 수신을 통해 배워나가고 실천할 성질의 문제가 더 이상 아니다. 오히려 금권이나 관권을 지배하면서 먹이를 나누어주는 세력만이 덕을 행하고 있다고 착각할 수 있는 그러한 사회이다. 그리고 그러한 변질된 덕의 관념은 정당정치를 부패시키고 있다. 혈연과 학연 및 지연의 연줄망을 통해 길러진 반유교적 '정'과 '의리'가 핵심 당원과 운동원들을 묶어주는 연결 고리가 되고, 그들은 다시 선거철에 유권자와 후보 사이에 교량 역할을 자처하면서 자기 나름의 연줄망을 가동시키고, 금품살포와 향응제공에 나선다. 반면에 후보는 당선되면, 정책의 구상 보다 민원의 처리에 더 많은 시간과 열정을 쏟아부으면서 '덕'을 베풀고 금품살포와 향응제공에서 자신의 '인품'을 과시하려 한다. 기실 생각하면, 한국 사회는 자기 모순에 빠져 있다. 유교적 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으면서도, 반유교적 정치를 만들어내는 것이 현재의 '어른' 없는, 현실과 원칙을 제멋대로 해석하는 한국의 유교사회이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 "활쏘기는 군자의 덕성과 비슷한 바 가 있으니, 활을 쏘아 과녁을 벗어나더라도 오히려 그 이유 를 자기 몸에서 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