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fftkrr (천사구함) 날 짜 (Date): 1998년 11월 24일 화요일 오후 09시 13분 17초 제 목(Title): [퍼옴] 삼국시대 천문현상기록의 독자 관측 안녕하세요... 이 글도 역사 하이텔의 한국사동호회에서 퍼온 글입니다. 이 논문이 발표되고,곧바로 시사저널인가에 실려 삼국의 위치가 중국 양자강에 있다고 와전되어 우메한 백성들에게 혼란을 준 바로 그 논문입니다.. (저는 잡지책에서는 못보고 하이텔에서만 봤습니다..) 이제 부터 올라갑니다.. 이현수 (삼위태백) [자료]삼국시대천문연구논문(박창범)-1 1998-04-11 11:23 172 line 【삼국시대 천문현상기록의 독자 관측사실 검증】 snu-ast 1994.7.27 박창범(서울대학교 천문학과) 라대일(경희대학교 지구과학과) 차례 가. 머리말 나. 자료 다. 삼국시대 천문관측의 독자성 증명 1. 달의 행성 엄폐 현상 증명 2. [太白晝見]의 검증 3. 일식의 독자관측 증명 라 토의 및 결론 ---------------------------------------------------------------- 가. 머리말 일반적으로 고대사서에는 자연의 특이 현상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 그것은 자연의 비일상적인 변화가 인간과 사회의 운명에 중요한 임시를 준다는 고대인의 믿음 때문이다. 자연현상 중에 천문현상은 고대사 연구에 특별한 가치를 지닌다. 그 중 세 가지를 지적해 보자 첫째, 천문현상은 다른 자연현상처럼 객관적 사실이라는 점이다. 사서에 기록된 정치, 사회, 문화적인 내용들은 집필자의 주관에 의하여 선별되고 변조되기 마련이다. 또한 역사변천에 따라 후대에서 왜곡되거나 윤색될 수가 있다. 그러나 자연현상에 관한 기록은 그 기록의 성질상 변조가 불가능하고 , 설령 조작이 있었다고 하여도 많은 경우 조작사실을 알아낼 수가 있다. 천문현상은 정연한 물리법칙에 의하여 일어나기 때문에 , 천체역학적 계산이나 자연에 남아있는 증거를 통해서 기록의 진위여부를 과학적으로 밝힐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로, 천문현상은 시간개념을 필수적으로 동반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천문현상기록은 고대사에서 시간적 이정표 역할을 한다. 고대역사를 연구하는 데에 있어서 연대 즉 시각을 밝히는 일은 가장 중요한 과제 중의 하나이며, 천문현상 만큼 시각을 정확히 그리고 절대적인 근거에서 알려주는 자료는 없다. 사서에 기록된 천문현상들은 천체역학적으로 드물게 일어나는 특이현상들이기 때문에. 그 기록의 의미를 쉽게 알 수 있고 천체역학적 계산에 의하여 발생시각을 정확히 알아낼 수가 있다. 천문현상이 가지는 세 번째 가치는 , 그것이 관측자의 위치를 알려준다는 점이다. 지구상의 일부지역에서만 관측이 가능한 대표적 천문현상은 일식과 달이 행성이나 별을 가리는 엄폐현상과 운석의 낙하이다. 운석의 낙하는 매우 국지적 현상이므로 관측자의 위치를 정확히 알려줄 수 있는 가능성이 있으나 대부분의 작은 운석 구덩이는 수천년 세월이 흐르면 풍화되어 무너지므로 증거를 찾기 어렵다. 한편 일식현상은 보다 광범위한 지역에서 관측되는 현상이지만, 해와 달의 운동을 역계산하여 일식기록의 진위여부를 밝힐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리고 일식기록(특히 개기일식의 경우)이 여럿 있는 경우 , 모든 일식을 다 잘 관측할 수 있는 최적관측지로부터 관측자 즉 국가의 수도위치를 추정할 수 있다. 달의 엄폐현상도 천체역학적 계산을 통하여 실현 여부를 밝히거나 관측자의 위치를 찾는데 에 이용할 수 있으나 기록회수가 적다는 단점이 있다. 이외에도 천체관측과 기록은 고대과학의 역사와 문화수준을 가늠하게 해주는 척도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또한 어느 특정 사서에 수록되어 있는 천문현상기록들이 과연 실제로 일어났었는지를 검증하는 일은 그 사서 전체내용에 대한 신뢰도 평가를 가능하게 해준다. 천문현상 기록이 이렇게 다양한 정보를 줌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의 고대사 연구에서는 천문현상을 비롯한 자연현상 기록들이 사료로서 이용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것은 역사학자와 자연과학자들이 갖는 나름대로의 한계와 관심부족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고대사 자료가 매우 부족한 현실을 감안할 때 이 귀중한 자연현상 기록에 깊은 관심을 쏟아야 할 시점에 와 있다고 생각한다. 본 연구에서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나오는 자연현상 기록들을 천문학적인 그리고 기상학적인 측면이라는 새로운 관점에서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그 기록들이 주는 사료로서의 의미를 객관적으로 도출하고자 한다. "삼국사기"에 수록된 고대 천문현상 기록들은 금세기 초부터 일본학자들에 의하여 여러 번 연구되어 왔다. 기존의 연구방향은 이 기록들이 사실인가 아닌가, 그리고 중국기록을 베낀 것인가 아닌가에 초점이 맞춰졌었다. 일본학자들이 수행한 이 연구들은 삼국시대의 천문기록이 5세기까지는 중국의 기록을 차용했거나 꾸며낸 것이며, 7세기 중반 이후에야 독자적으로 천문관측을 시작했다고 결론짓고 있다.( 飯島忠夫 1926; 齊藤國治1985 ) 이러한 연구결과는 국내외에 널리 알려져 왔으며, 국제적인 인정을 받기에 이르렀다. 구미학자들(Stephenson과 Houlden 1986)은 고대한국의 천문기록들이 중국기록을 무분별하게 옮겨 놓았다는 일본학자들의 주장을 사실로서 받아들이고 있으며, 국내학자들의 과학사 서적(전상운1983;김영식등1992) 에도 긍정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삼국사기"에 수록된 천체현상들이 중국의 것을 차용한 것이라는 견해는 곧 "삼국사기" 내용 전반에 관한 불신으로 유추해석 되고, 삼국시대에 관한 유일한 정사서인 "삼국사기"마저도 학계에서 불신되는 현실을 초래하였다. 따라서 천문현상기록을 이용하여 한국의 고대사를 연구하기에 앞서 이 기록들이 한국의 독자관측기록인지 아닌지부터 밝혀야만 할 것이다. 만약 이 천문현상기록들이 독자관측에 의한 것임이 증명된다면, "삼국사기"의 내용은 진지하게 재고되어야만 한다. 본 연구에서는 현재까지 한국학자들에 의하여 고대 천문기록이 독자관측에 의한 결과라는 사실을 증명하였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독자관측으로 입증된 천문자료와 기상자료로 부터 신라, 백제, 고구려 삼국의 위치와 연결 지어 생각할 수 있는 관측자의 위치를 추정하였다. 나. 자 료 고려시대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와 일연의 "삼국유사"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시대에 일어난 일식이 67회, 행성의 이상현상이 40회, 혜성출현이 65회, 유성과 운석의 낙하가 42회, 기타 약 12회등 총 226회의 천체현상이 기록되어 있다. (기타 현상 중에는 '二日竝出'이나 '白虹 日'처럼 천체현상으로서의 의미가 불분명한 것들이 있다.) 표1<생략함>은 이 천문기록들을 각국별로 모은 것이다. 이 표에서 "삼국사기"열전에서 발췌한 기록 4회와 "삼국유사"에 나온 4회 기록들은 비고란에 표시하였다. 또한 일식기록이 중국사서에도 나오는 경우 그 이름을 기입하였다. 중국의 고대천문기록을 모두 집대성한 북경 천문대 발행 "중국고대천상기록총집(1988)"가 齊藤國治(1985)의 논문을 참조하여 삼국의 기록과 동일한 현상을 기술한 중국기록이 없는 경우 '독자기록'이라고 표시하였다. 100 | 일식 행성별자리 혜성 유성운석 행성달 태백주현 | |---| |---| |---| |---| |---| |---| 비율| |___| | | | | | | | | | | | |////| |___| | | | | | | | | | |////| |////| |___| | | | | | | | |////| |////| |////| |___| | | | | | |////| |////| |////| |////| |////| | | |----------------------------------------------------- 0 <그림1>. 삼국시대 천문현상기록의 독자기록 비육 빗금친 부분은 동일현상에 대한 기사가 있는 동시관측기록의 비율이다. --------------------------------------------------------------- 그림1에서 천체현상별로 독자기록의 비율(빗금없는부분)을 보였다. 또한 천체역학적 계산에 의해 실현이 확인된 현상에 대해서는 그것이 발생한 서력 연월일을 첨가하고 비고란에 계산결과를 설명하였다. 표1에 있는 천체현상을 종류별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일식은 음력 초하루 달이 태양을 가리는 현상이다. 삼국사기에는 일식이 그믐날에 일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로써 당시의 역서가 하루정도 부정확했음을 알 수 있다. 일식은 천체역학적으로 실현을 학인할수 있으며, 관측시각과 관측자의 위치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둘째로 달이 행성을 가리는 엄폐(掩蔽. occultation)현상이나, 서로가 매우 근접하는 현상이 있다. 예를 들면 신라 내해10년(205년) 太白犯月이나 문무왕19년(679년) 太白入月 등이다. 맨눈으로 관측 가능한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 등 다섯 행성들은 표에서 진성(辰星), 태백성, 형혹성, 세성, 진성(鎭星)으로 부리고 있다. 셋째로 금성이 낮에 보였다는 '太白晝見'기록이 있다. 태백주현과 행성의 엄폐현상은 거의 독자 기록이면서 계산을 통해 실현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역시 중요한 자료이다.(그림1참조-생략) 또한 행성에 대한 기록으로 자주 나오는 행성이 어느 별자리에 들어서거나(犯) 오래 머무는(守)이다. 이 부류의 기록들은 상당수가 중국기록과 중첩되고 , 독자기록은 다소 후대부터 나오므로 본 연구에서는 자세히 다루지 않겠다. 이외에도 '동방에 오행성이 모였다'는 기록이 고구려본기에 있고, 금성이 수성이나 향성을 가린 사건들이 신라본기에 있다. 혜성은 彗星, 패, 長星, 客星, 蚩尤旗 등으로 불린다. 객성 중 일부만이 혜성이라고 생각된다. 패성과 객성의 일부는 신성이나 초신성일 수 있다. 혜성기록은 풍부하게 나오고 독자기록도 많으나, 혜성이 그 당시 실제로 출현했었는지를 검증하는 일은 쉽지 않다. 이 당시에 보였던 혜성중 상당수가 오늘날 소멸되어 관측되지 않기 때문이다. 혜성기록의 유용성은 다음기회에 연구하고자 한다. 운석은 天狗星으로 불리기도 한다. 유성과 운석의 낙하기록이 거의가 독자기록임은 이 천체현상이 국지적으로만 관측된다는 사실 과 잘 부합된다. 운석은 운석구덩이를 만드므로 기록에 의거하여 증거를 찾 아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표1에는 이외에도 노인성(알파 Car)과 같은 보기 힘든 별이 나타남, 둘 또는 세 해가 뜸, 흰 무지개가 태양을 뚫음, 해가 빛을 잃음, 달이 핏빛을 띰 등의 기록이 간혹 있다. 표1에 수록된 천문기록의 연대별 분포를 그림2에 보였다. ------------그림 2 생략 ---------------------------------- 각국별로 천문기록 횟수분포는 매우 특이한 양상을 보인다. 백제는 건국에서 멸망까지 기록수가 늘엇다 줄어드는 자연스러운 추세를 보인다. 그러나 신라는 서기전 1세기에서 서기 3세기 사이와 7세기에서 10세기 사이에, 그리고 고구려는 2세기경에 기록이 집중되어 있다. 특히 신라의 경우 3세기 말에서 7세기 초까지 약 400년간 천상 기록이 전무하다시피 한다. 천체현상 기록횟수의 분포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일식현상을 중심으로 다음 장에서 하였다.【】 계속하시겠습니까? (Y/n) >> y 이현수 (삼위태백) [자료]삼국시대천문연구논문-2 1998-04-11 11:25 272 line <표 1> =====삼국사기등 삼국의 천문관계 기록===== |----------------|-------------|------------|-----------------------| |제위년(양력)음력일 | 기록 | 사실여부 | 비고 | |----------------|-------------|------------|-----------------------| ●신라 혁거세4(전54)4월1일 日有食之 실현(54.5.9) 漢書선제기,오행지 9(전49)3월 有星패干王良 ---- 한서선제기,천문지 14(전44)4월 有星패干參 ---- 한서천문지 24(전34)6월그믐 日有食之 불식(전34.8.23)한서원제기,오행지 30(전28)4월그믐 日有食之 실현(전28.,6.19)한서성제기(개)오행지 32(전26)8월그믐 日有食之 실현(전26.10.23)한서성제기,오행지 43(전15)2월그믐 日有食之 실현(전15.3.29)한서성제기.오행지 54(전4)2월 星패干河애( ) ---- 漢書哀帝紀(3월) 56(전2)1월1일 日有食之 실현(전2.2.5) 한서애제기,오행지 59(2)9월그믐 日有食之 실현(2.11.22) 한서평제기, 오행지 남해 3(6)10월1일 日有食之 불식(6.11.10) 한서왕세고 13(16)7월그믐 日有食之 실현(16.8.21) 한서왕세고 20(23)가을 太白入太微 후한서광무제기 유리 31(54)2월 星패干紫宮 후한서광무제기 탈해 3(59)6월 有星패干天船 후한서명제기천문지 23(79)2월 彗星見東方 독자기록 23(79)2월 又見北方二十日乃滅 독자기록 파사 6(85)4월 客星入紫微 후한서선제기,천문지 25(104)1월 衆星隕如雨不至地 독자기록 지마 9(120)2월 大星墜月城西 독자기록 13(124)9월그믐 日有食之 실현(124.10.24)후한서효안제기오행육 16(127)7월1일 日有食之 실현(127.8.25) 후하서오행육 17(128)8월 長星竟天 독자기록 일성 8(141)9월그믐 日有食之 실현(141.11.16)후한서오행육 10(143)6월을축 熒惑犯鎭星 후한서질제기 16(149)8월 有星패于天市 後漢서桓帝紀 20(153)10월 彗星見東方 독자기록 20(153)10월 又見東北方 독자기록 아달 13(166)1월1일 日有食之 실현(166.2.18) 후한서효환제기(이문) 벌휴 3(186)5월그믐 日有食之 실현(186.7.4) 후한서오행육 10(193)1월1일 日有食之 실현(193.2.19) 후한서오행육 11(194)6월그믐 日有食之 실현(194.8.4) 후한서오행육 내해 5(200)7월 太白晝見 不審 독자기록(금성밝기-4) 5(200)9월1일 日有食之 실현(200.9.26) 후한서오행육 6(201)3월1일 日有食之 실현(201.3.22) 후한서오행육 10(205)7월 太白犯月 실현(205.9.4) 독자기록(금성달거리2.1, 일몰시 2.5도 까지 떨어짐 금성) 첨해 10(256)10월그믐 日有食之 不食 독자기록 14(260)7월 星패于東方25日而滅 독자기록 내물 45(400)8월 星패于東方 독자기록 소지 6(484)3월 土星犯月 不審 독자기록(약6도거리, 목성3.19접) 진평 8(586)5월 星隕如雨 독자기록 53(631)7월 土星犯月 不審 독자기록(약7도거리) 진평 용천사혜성가 慧星犯心大星 독자기록(삼국유사) 진덕 1(647)8월 慧星出於南方 독자기록 1(647)8월 于衆星北流 독자기록 1(647) 大星落於月星 독자기록 무열 8(661)5월9일 忽有大星落於賊營 독자기록 문무 8(668)4월 彗星守天船 독자기록 10(670)12월 土星入月 독자기록(약6.2도) 12(672)9월 慧星七出北方 독자기록 13(673)1월 大星隕皇龍寺在城中間 독자기록 13(673)봄 妖星見 독자기록(삼국사기열전) 16(676)7월 慧星出北河積水之間 구당서천문하.고종하 長六七許步 구당서고종.천문.일본서기 19(679)4월 熒惑守羽林 구당서 고종기 19(679)6월 太白犯月 실현(679.8.10) 독자기록(0.04도거리) 19(679)6월 流星犯參大 독자기록 19(679)8월 太白入月 不審 독자기록(10.3.토성이 0.34도접) 21(681)5월 流星犯參大星 독자기록 21(681)6월 天狗落坤方 독자기록 신문 2(682)5월 太白犯月 실현(682.6.7) 독자기록 3(683)10월 慧星出五車 구당서고종하천문하 4(684)10월 自昏及曙流星縱橫 독자기록 효소 2(693)6월12일 有慧星패于東方 독자기록(삼국유사) 2(693)6월17일 又패于西方 독자기록(삼국유사) 8(699)2월 白氣竟天星패于東 독자기록 9(700)6월 滅星入月 不審 독자기록(2.8도거리, 수성이 6월21일 0.69도까지 접근) 10(701)2월 彗星入月 독자기록 성덕 5(706)3월 衆星西流 독자기록 7(708)4월 鎭星犯月 실현(708.4.28) 독자기록(0.19도거리) 9(710)1월 天狗隕(운)三郞寺北 독자기록 14(715)9월 太白掩庶子星 실현 독자기록(sco) 14(715)10월 流星犯紫微 독자기록 14(715)12월 流星自倉入大微 독자기록 15(716)1월 流星犯月月無光 독자기록 17(718)10월 流星自昻入于奎 독자기록 衆小星隨之 17(718)10월 天狗隕長方 독자기록 34(735)1월 隕(운)惑犯月 실현(735.2.13) 독자기록(0.17도거리) 효성 1(737)9월 流星入大微 독자기록 2(738)4월 白虹貫日(백홍관일) 4(740)5월 鎭星犯軒轅大星 6(742)5월 流星犯參大星 독자기록 경덕 3(744)겨울 妖星出中天 독자기록 大如五斗器浹旬乃滅 7(748)1월 天狗落地 독자기록 18(759)3월 慧星見至秋乃滅 독자기록 19(760)4월1일 二日竝見浹旬不滅 독자기록(삼국유사) 20(761)1월1일 虹貫日月有珥 20(761)5월 彗星出 독자기록 23(764)3월 星패于東方 독자기록 23(764)12월11일 流星或大或小 구당서대종기천문지 觀者不能數 구당서천문지(12월3일) 24(765)6월 流星犯心 독자기록 혜공 2(766)1월 二日竝出 3(767)7월 三星隕王庭相擊 독자기록 其光如火병散 4(768)봄 慧星出東北 독자기록 4(768)6월 大星隕皇龍寺南 독자기록 6(770)5월11일 彗星出五車北 구당서대종천문 至六月十二日滅 신당서덕종 15(779)3월 太白入月 不審 독자기록 원성 3(787)5월 太白晝見 不審 독자기록(금성등급-4.1) 3(787)8월1일 日有食之 實現(787.5.23) 구당서덕종천문하 신당서덕종천문이 5(789)1월1일 日有食之 실현(789.1.31) 신당서덕종천문이 6(790)4월 太白鎭星聚于東井 독자기록(97Tau) 8(792)11월1일 日有食之 실현(792.11.19) 구당서덕종하천문 신당서덕종 애장 2(801)5월1일 日有食之 실현(801.6.15) 구당서덕종하 천문 신당서 덕종 2(801)9월 熒惑入月(형혹입월) 不審 독자기록(2.2도차이) 2(801)9월 星隕如雨 독자기록 9(808)7월1일 日有食之 실현(808.7.27) 구당서신당서천문이 10(809)1월 月犯畢 헌덕 2(810)7월 流星入紫微 독자기록 2(810)10월 流星入王良 독자기록 7(815)8월1일 日有食之 실현(815.9.7) 구당서천문하 신당서천문이 7(815)8월 大星出翼軫間指康 芒長六許尺廣二許寸독자기록 10(818)6월1일 日有食之 실현(818.7.7) 구당서천문하 신당서천문이 14(822)4월13일 月色如血 독자기록 14(822)7월12일 日有黑暈(훈)指南北 독자기록 15(823)4월12일 流星起天市犯帝座過天市 東北坦織女王良至閣道 分爲三聲如擊 而滅 흥덕 2(827)8월 太白晝見 실현(827.9.4) 독자기록(금성등급-4.57Z) 11(836)1월1일 日有食之 관측불능(836.1.22) 신당서문종천문이 11(836)6월 星패于東 독자기록 11(836)7월 太白犯月 실현(836.7.17) 독자기록(1.02도거리 금성등급-3.92) 회강 2(838)겨울 彗패見西方 독자기록(삼국사기열전. 구당서문종하천문하신당서문종이) 2(838)겨울 芒角指東 독자기록(삼국사기열전) 문성 6(844)2월1일 日有食之 실현(844.2.22) 구당서천문하 신당서무종천문이 6(844)2월 太白犯鎭星 7(845)12월1일 三日竝出 12(850)1월 土星入月 실현(850.3.19) 독자기록(0.63도거리) 17(855)12월 土星入月 不審 독자기록(12.27.1.33도거리) 경문 7(867)12월 客星犯太白 독자기록(금성등급-4.0) 15(875)2월 星패于東二十日乃滅 독자기록 헌강 6(880)2월 太白犯月 실현(880.2.17) 독자기록(일출후0.96도거리 ) 11(885)10월 太白晝見 不審 독자기록(금성등급-4.0) 진성 2(888)3월1일 日有食之 실현(888.4.15) 신당서희종천문이 4(890)1월 日暈五重 효공 9(905)2월 星隕如雨 12(908)2월 패星于東 독자기록 15(911)1월 日有食之 실현(911.2.2) 구오대사 양서육 사천고 선덕 6(917)1월 太白犯月 실현(917.1.29) 독자기록(일몰전0.89도거리) 경순 8(934)9월 老人星見 실현(934.11.9) 독자기록(a Car) ========================================================== ●고구려 유리 13(전7)1월 熒惑守心星 한서 천문지 민중 3(46)11월 星패于南二十日而滅 독자기록 태조 62(114)3월 日有食之 불식(114.5.4) 후한서효안제기 64(116)3월 日有食之 실현(116.4.1) 후한서효안제기오행육 사관불현요동이문 72(124)9월그믐 日有食之 실현(124.10.25) 후한서효안제기오행육 차대 4(149)4월그믐 日有食之 실현(129.6.23) 후한서효환제기오행육 4(149)5월 五星聚於東方 불현 8(153)12월 客星犯月 독자기록 13(158)2월 星패于北斗 독자기록 13(158)5월그믐 日有食之 실현(158.7.13) 후한서효안제기오행육 20(165)1월그믐 日有食之 실현(165.2.28) 후한서교한제기오행육 신대 14(178)10월그믐 日有食之 실현(178.11.27) 후한서오행육 고국천4(182)3월갑인 夜赤氣貫於大微 4(182)7월 星패于大微 후한서천문지 8(186)4월을묘 熒惑守心 후한서천문지 8(186)5월그믐 日有食之 실현(186.7.4) 후한서오행육 산상 21(217)10월 星패于東北 후한서 23(219)2월그믐 日有食之 실현(219.4.2) 후한서오행육 서천 4(273)7월1일 日有食之 不食(273.8.1) 진서세조무제천문중 봉상 8(299)9월 客星犯月 독자기록 미천 1(300)12월 星패于東方 진서혜제기 16(315)8월 星패于東北 독자기록 고국원6(336)3월 大星流東北 독자기록 소수림13(383)9월 星패于西北 독자기록 양원 10(554)12월그믐 日有食之 不食 독자기록 11(555)11월 太白晝見 실현(555.11.26) 독자기록(금성등급-4.68) 평원 23(581)2월그믐 星暈如雨 독자기록 영류 23(640)9월 日無光經三日復明 독자기록 보장 2(643)9월15일 夜明不見月衆星西流 독자기록 27(668)4월 彗星於貫昻之間 구당서고종하 ============================================================== ●백제 온조 6(전13)7월그믐 日有食之 실현(전13.8.31) 한서성제기오행지 다루 46(73)5월그믐 日有食之 실현(73.7.23) 후한서오행육 기루 9(85)4월 客星入紫微 후한서장제기천문지 11(87)8월그믐 日有食之 실현(87.10.15) 후한서오행지 (사관불현 타 관이문) 16(92)6월1일 日有食之 실현(92.7.23) 후한서오행육 개루 10(137)8월경자 熒惑犯南斗 38(165)1월그믐 日有食之 실현(165.2.28) 후한서오행지(양상이문) 초고 5(170)3월그믐 日有食之 관측불능 후한서오행육 21(186)10월 星패于西北二十日而滅 독자기록 24(189)4월1일 日有食之 실현(189.5.3) 후한서오행육 26(191)9월 蚩尤旗見于角亢 후한서 39(204)10월 星패于東井 후한서 40(205)7월 太白犯月 실현(205.9.4) 독자기록(2.1도거리신라본기) 47(212)6월그믐 日有食之 실현(212.8.14) 후한서오행육 구수 8(221)6월그믐 日有食之 실현(221.8.5) 삼국지위서 송서오행오 진서천문중 9(222)11월그믐 日有食之 실현(223.1.19) 상동 11(224)10월 太白晝見 실현(224.12.21) 독자기록(금성등급-4.67) 고이 16(249)1월갑오 太白襲月 진서천문지 36(269)9월 星패于紫宮 송서천문지 진서무제기천문지 분서 5(302)4월 彗星晝見 진서혜제기천문지 비류 5(308)1월1일 日有食之 不食(308.4.4) 송서오행오 진서 13(316)봄 大星西流 독자기록 18(321)7월 太白晝見 不審 독자기록(금성등급-3.) 30(333)5월 星隕王宮火連燒民戶 진서오행지 송서오행지 32(335)10월1일 日有食之 不食 송서오행지진서성제천문중 33(336)1월신사 彗星見于奎 진서성제기천문지송서천문중 근초고23(368)3월1일 日有食之 실현(368.4.4) 송서오행오진서해서공천문중 근수구10(384)2월 日有暈三重 진사 6(390)7월 星패于北河 진서천문지송서추눈지 8(392)5월1일 日有食之 실현(392.6.7) 송서오행오진서효무제 아신 3(394)7월 太白晝見 실현(394.8.12) 독자기록(금성등급-4.53) 4(395)2월 星패于西北二十日而滅 독자기록 7(398)8월 大星落營中有聲 독자기록 9(400)2월 星패于奎婁 송서천문지진서안제기천문지 9(400)6월1일 日有食之 실현(400.7.8) 송서오행오진서안제천문중 위서천상지북사위본기 전지 11(415)5월갑신 彗星見 송서천문지진서안제기천문지위서 13(417)1월1일 日有識之 실현(417.2.3) 송서오행오 진서안제천문중 북사위본기 15(419)1월무술 星패于大微 진서(공)제기천문지 15(419)11월1일 日有食之 실현(419.12.3) 송서오행오진서(공)제천문중 북사위본기 비유 14(440)4월1일 日有食之 실현(440.5.17) 송서오행오 남사송본기 위서천상지북사위본기 28(454) 星暈如雨 독자기록 28(454) 星패于西北長二丈許 독자기록 개로 14(468)10월1일 日有食之 실현(468.11.1) 송서명제오행오 남사송본기 위서천문지 북사위본기 삼근 2(478)3월1일 日有食之 관측불능(478.4.19)남사소온기 동성 17(495)5월1일 日有食之 실현(495.6.19) 위서천상지북사위본기 만제서천문상 남사제본기 무령 16(516)3월1일 日有食之 실현(516.4.18) 위서천상지 북사위본기 위서무제기 남사양본기(개) 성왕 10(532)7월갑진 星隕如雨 양서무제기 남사양무제기 12(534)4월정묘 熒惑犯南斗 양서무제기 25(547)1월1일 日有食之 실현(547.2.6) 위서천상지 북사제본기 남사양본 기 27(549)1월경신 白虹貫日 위덕 6(559)5월1일 日有食之 관측불능(559.6.21)진서고조하 남사진본기 수서천문하 19(572)9월1일 日有食之 실현(572.9.23) 진서선제 남사진본기 주서무제기 26(579)10월 長星竟天二十日而滅 독자기록 39(592)7월그믐 日有食之 관측불능(592.9.10)수서고조하북사수본기 41(594)11월계미 星패于角亢 북사수본기 수서고조천문하 무왕 41(640)1월 星패于西北 독자기록 =========================================================== 계속하시겠습니까? (Y/n) >> y 이현수 (삼위태백) [자료]삼국시대천문연구논문-3 1998-04-11 11:26 199 line 다. 삼국시대 천문관측의 독자성 검증 여기에서는 삼국의 천문관측을 독자적으로 수행하여 기록을 남겼음을 증명하고자 한다. 어느 사서에 수록된 천문현상 기록이 독자적 관측에 의한 것인가, 아니면 외국의 사서 내용을 베낀 것인가를 판가름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그 사서에만 나오는 독자 기록이 실현된 자연현상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본 연구에서 이 방법을 적용할 천체현상은 달이 행성을 가리는 엄페현상과 금성이 낮에 보이는 현상이다. 독자 관측의 증거를 이끌어 내는 두 번째 방법은 어느 한 국가가 남긴 천체 현상이 비록 중국에서도 관측되어 기록됐다 하더라도 , 자료 전체에 걸쳐 상이한 지역적 특성을 반영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 예가 일식현상이다. 즉, 삼국초기에 중국의 왕조는 西漢과 東漢이었는데, 이들의 수도가 황하유역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한나라가 남긴 일식들은 주로 황하유역 에서 관측하기 좋은 것들일 것이다. 삼국이 남긴 일식기록 중에 동아시아에서 실제로 볼 수 있었던 것들은 모두 중국 사서에서도 기록이 남아 있다. 따라서 삼국의 일식기록은 중국기록의 부분 집합이다. 그런데 만약 삼국사기의 기록이 한서나 후한서에 수록된 일식기록의 일부를 무분별하게 베낀 것일 경우 , 그 부분집합은 모집단과 동일한 성격- 즉 평균적으로 황하유역에서 관측이 쉬운 양상-을 띨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이러한 통계적 예측에서 크게 벗어난다면 그것은 독자관측에 의한 것이라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독자관측이 수행됐었음을 간접적으로 뒷바침해주는 정항적 근거를 찾아보는 일이다. 이것은 여기에서 제시하겠다. 첫째로 앞서 언급한대로 가장 국지적인 천체현상인 유성과 운석의 낙하가 거의 독자관측이라는 점이다. 운석은 대기층을 통과하다가 부서져 간혹 지구상의 몇 군데에 동시에 떨어지는 수고 있으나 일반적으로 매우 제한된 지역에서만 낙하를 알 수 있다. 천체관측을 독자적으로 수행하여 기록을 남겼을 경우 ,자연히 유성과 운석의 낙하를 독자적으로 많이 관찰하게 될 것이다. 반대로 삼국사기가 중국의 주요 천체현상들을 베꼈다면, 일식이나 행성이 별자리에 머무는 현상 등은 중국사서 내용을 고스란히 베끼고, 유성이나 운석의 낙하에 대해서는 거의 지어내어 기록하는 매우 불공평한 선택을 했었느냐 한다 . 삼국사기의 편자가 천문학적 지식도 없이 그러한 태도를(특히 유성의 경우) 견지했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둘째로 중국과 우리나라가 선호하는 천체현상이 매우 다르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중국은 일식을 그 무엇보다도 철저히 관측하였으며, 행성이 별자리에 머무는 현상과 혜성의 출현에도 큰 관심을 보였다. 삼국도 이 현상들에 큰 관심을 가졌으나 금성이 낮에 나타나는 현상, 행성이 달에 가리는 현상 등에도 주의를 기울였다(그림1참조). 이렇게 천체현상별로 독자 기록의 비율이 크게 다르다는 사실은 삼국이 중요시하던 천체현상이 중국의 것과 상대적으로 달랐기 때문이라고 설명된다. 이 경우에도 "삼국사기"의 편자가 행성이 별자리에 머무는 현상 등은 거의 중국사서의 것을 옮겨다 적고, 행성이 달에 가리는 현상 등은 모두 지어내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부자연스럽다. 한편 일본학자들은 삼국초기의 천문현상기록이 모두 거짓이거나 중국기록을 차용한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는 데에 두 가지 정황적 근거를 항상 제시한다. 첫째 근거는 기록횟수가 비정상이라는 것이다. 신라의 경우가 그렇다(그림 2참조) 신라의 천체현상기록은 서기전 50년경에서 서기200년경 까지와 600년경에서 934년까지의 두 기간에 집중되어 있고, 그 사이의 약 400년간 기록이 거의없다. 따라서 앞쪽 기간은 신라의 초기 역사를 늘이기 위해 중국기록을 차용하거나 거짓을 꾸며낸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리고 백제와 고구려에 대해서는 확대해석을 적용하여, 역시 실제 관측에 의한 기록이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이 주장은 횟수분포가 정상적인 백제에 대해서는 적용될 수가 없는 것이다. 또한 신라와 백제가 독자적으로 남긴 서기 205년의 '太白犯月' 기록과 224년과394년에 나오는 백제의 독자기록인 '太白晝見'등이 사실이었음이 이 논문에서 밝혀졌으므로, 이 결론이 오류임이 드러났다. 따라서 기록횟수가 양분되어 있다는 사실은 신라가 처한 역사적 상황 때문이나, 삼국사기 편찬에 참조되었던 기초사료가 시기적으로 고르지 못했었기 때문이나, 災異 예고로서의 천체현상에 대한 인식도가 시대에 따라 크게 변했던 것 등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두번째 정황적 근거는 천체역학 계산으로 보아 실제 일어나지 않았던 사건이 삼국과 중국사서 양쪽에 기록되어 있는 경우가 있다는 점이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삼국사기가 현상을 기술하는 표현이 중국의 것과 매우 유사한 경우이다.(백제의 경우가 특히 그렇다.) 후에 다시 논의하겠지만 이러한 경우 삼국사기의 기록이 중국의 기록 자체나 그 표현을 차용할 가능성도 있지만, 거꾸로 중국이 기록이 삼국기록의 차용한 것일 가능성도 있고(아래참조),당시의 부정확한 천체궤도 계산법에 의한 실수를 함께 범했을 수도 있는 등 제 삼자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즉 이 근거는 삼국사기가 중국사서의 내용을 베꼈을 가능성에 대한 필요조건일 뿐 충분한 조건은 아니며, 일본학자들의 결론은 과학적 증명이라기 보다는 주관적 해석일 뿐이다. 이제 삼국사기에 수록된 천체현상이 독자관측에 의한 것이라는 증명을 하겠다. 아래의 모든 천체역학적 계산은 Meeus(1991)의 계산법을 따랐다. 1. 달의 행성 엄폐현상 달이 행성을 가렸다는 기록은 신라 17번, 백제 2번 고구려 0번으로 도합 19회 있다. 이 가운데 백제의 1회 기록은 동일시기에 신라에 동일기록이 있으므로 총 현상 횟수는 18회이다. 또한 백제의 나머지 1회 기록을 晉書에도 나온다. 그러나 나머지 17회는 모두 독자 기록이다. 이 기록들의 진위를 확인하게 위해 이 당시 행성들과 달의 위치를 계산하였다. 17회 현상중 9히는 천체역학적으로 실현이 확인되었고, 3회는 입월(入月)했다는 항성이 달에 상당히(1-3도정도)접근하였으며, 2회는 다른 행성이 달에 근접하였다. 이 현상에 대한 기록들 가운데 여기에서 특히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신라본기(내해10년)와백제본기 (초고40년)에 동시에 나오는 205년 7월의 '太白犯月'기사이다. 이 기록은 물론 중국사서에 없는 독자기록이다. 우선 '犯'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 조선말에 저술된 서운관지(書雲觀志)의 정의에 따르면 달과 행성이 촌(寸)이내에서 광망(光芒)이 서로 미치면 '犯', 행성이 달에 들어가서도 體가 보이면 '입', 보이지 않으면 '食'이라고 한다 (나일성1978). 1촌이 몇 도를 뜻하는지는 알려지 있지 않다. 또한 이 현상은 빛이 미치는 정도를 표현하므로 달과 행성 사이의 거리 뿐 아니라 행성의 밝기에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太白犯月 현상 5회는 모두 실현이 확인되었다. (표1). 太白犯月 기록이 있는 이 다섯 시기에 달과 금성사이의 최근접거리는 1- 2.5도 이었는데 금성이 밝을수록 거리가 멀어도 犯月로 묘사되었음을 알 수 있다.(그림3). ---------------------그림3생략---------------------------- 205년의 기록 경우 9월 4일(양력)오후 4시경 달은 금성에 2.1도 가지 가까워 졌다가 금성을 쉽게 볼 수 있게 되는 일몰 때에는 2.5도 정도로 멀어졌다(여기에서는 관측자의 위치를 이 당시의 신라 일식을 가장 잘 관측할 수 있는 경도 -114, 위도 +31인 곳으로 보고 금성과 달의 각 거리를 계산하였다. 경주의 위치인 경도 -129.2, 위도 +35.8을 사용하면 거리는 0.2도 정도 증가한다.) 이 당시 금성은 평소의 밝기인 약 -3.9등급보다 0.5등급이나 밝은 -4.4등급이었다. 다른 시기의 기록에 비해 금성이 달에서 다소 멀리 떨어진 편이나 , 금성이 매우 밝아서 犯月로 묘사되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백제와 신라가 동시에 관 측했으며, 후한에서는 관측하지 못한 이 천체현상이 실제로 일어난 것임이 증명됐다. 따라서 백제와 신라가 적어도 서기 205년부터는 행성과 달의 움직임을 지속적으로 관측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림4는 신라 문무 4년(679) 8월 10일(양력) 새벽에 일어난 太白入月 현상이다. 새벽 4시 3분경 금성이 달에 들어가기 시작하여 , 4시 43분에 달 중심에 최근접하고, 5시 9분 경에 달 밖으로 다시 나온다. (이상 경주에서의 지방時). 이외에도 삼국사기에 나오는 달의 행성엄폐현상 기록들은 천체역학적 계산 결과와 매우 인상적인 일치를 보여주고 있어 "삼국사기"의 천체 현상기록의 정확도를 직접적으로 알려준다. 한편 일본학자들의 기존 연구에서는 "삼국사기"의 엄폐현상 기록들이 계산에 의해 확인되지 않는 것들이 대부분이라는 결론이 발표되었다 .(齊藤國治 1985). 이러한 결론을 내리게 된 이유는 달과 행성의 최근접 시각이 조금이라도 해가 떠 있을 때 일어난 경우를 모두 무시하는 부주의함을 범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비록 일몰직전에 달이 행성에 최근접하고 이후 서서히 멀어진다해도, 일몰 때 달이 아직 행성과 매우 가까이 있는 경우가 많아서 犯이나 入 등의 묘사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망각한 것이다. 2. 태백주현(太白晝見)의 검증 금성은 태양주위를 공전하며 달처럼 위상이 변하는데. 태양에서 가장 먼 각도로 멀어지는 동방최대이각이나 서방최대이각 근처에서 등급이 약 -4.7까지 밝아진다. 금성은 평소에 약 -3.9등급 정도의 밝기를 가진다. 금성의 회합주기 584일 중에 낮에 보일 정도로 금성이 밝아지는 기간은 80일 정도이므로, '태백주현'은 80/584=14%정도의 확률을 가진다.(齊藤國治 1985,1989). 그런데 고려시대 숙종 4년과 조선시대 명종 17,18년, 효종 8년,10년의 기록(박성래 1994)을 보면 가장 밝을 때 -2.6등급에 불과한 목성이 낮에 보였다는 기록도 있어, 좋은 기상조건에서 주의 깊은 관찰을 하던 금성은 어느때나 낮에 볼 수 있는 행성이다. 그러나 역시 '太白晝見'은 금성이 태양에서 최대이각을 가지고 멀리 떨어져 가장 밝아지는 시기에 기록될 확률이 가장 높아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태백주현'기록은 신라에 4회, 백제에 3회, 고구려에 1회등 도합 8회가 나온다. 8개 기록의 모두가 독자기록이다. 금성의 위치와 등급계산을 수행하여 8개 기록과 모두 대조해 보았다. 그 결과 신라 흥덕 2년(827) 8월의 기록, 백제 구수11년(224)10월과 아신3년(394) 7월의 기록, 고구려 양원11년(555) 11월 기록들이 금성이 최대로 밝아지는 시기와 정확히 일치하였다. 금성이 평소보다 매우 밝은 기간의 비율이 14%정도이므로 만약 8개의 기록을 조작하여 아무 시기에나 적어 넣었다면 금성이 실제로 밝아진 시기와 우연히 들어맞을 기록 수는 0.14*8=1.1개에 불과하다. 기록의 적중률이 50%에 이른다는 사실은 이것들이 실제 관측에 의한 것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림5(그림생략)에 이 네 기록이 있는 시기와 금성의 등급이 변하는 양상을 보였다. 기록에는 음력 월까지만 주었으므로 그림에서 화살표는 좌우로 15일 정도의 폭을 갖는다고 생각하여야 한다. 모두 우연의 일치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금성이 밝아지는 시기와 일치하고 있다. 한편 앞서 지적하였듯이 기상조건이 좋은(즉 먼지나 수증기가 없어서 하늘의 색깔이 매우 검푸른) 경우 금성은 평소에도 낮에 볼 수 있는 행성이므로 금성이 최대로 밝아진 시기에 있지 않은 기록들도 오기라고 볼 수 없다. 실제로 금성이 낮에 보였다는 달을 살펴보면, 5월이 1회, 7월이 3회,8월이 1회, 10월이 1회등(이상 음력) 동아시아에서 기상조건이 좋은 늦여름에서 초겨울 사이에 주로 있다. 이 사실은 '태백주현' 기사가 단순히 조작된 기록이 아니라 실제 관측에 의한 것이라는 생각을 보조하는 증거이다. 백제의 224년과 394년 기록은 특히 기존연구에서 삼국이 독자적으로 천문관측을 수행했었다고 인정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백제의 존재에 대해서 마저도 시비가 일어났었던 시기에 있어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이 기록들은 어느 중국 사서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자 기록들이며, 천체역학적 계산에 의하여 그 사실성을 누구나 확인할 수 있는 관측기록이다. 태백주현 기록들의 독자성과 그 실현은 일본학자들도 인정하는 바이나 진위 여부와 중국사서에 없다는 사실만을 보고하고 [齊藤國治 (1985)는 8개 기록중 6개가 실현됐다고 주장하였다] 상세한 계산 결과가 보고되지 않았고, 이 기록들이 갖는 의의가 매우 소흘히 취급되어 학계에 알려져 있지 않은 상태이다. 이 기록들이 출전하는 시기가 200년대 부터이고, 태백주현이라는 현상을 관측하는 것이 낮이 밤과 같이 되어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식현상과는 달리 전문적인 관측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한다. 즉 금성을 낮에 관측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당시 천문학의 수준과 관측제도의 완벽성을 엿볼 수 있다. 금성을 낮에 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어서 장기간에 걸쳐 금성의 위치변화를 측정하여 낮에도 금성의 위치를 대체로 알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위치를 주의 깊게 관찰하여야 만 금성을 찾아낼 수 있다. 따라서 '태백주현'기록이 있다는 사실은 이 시기에 고도의 관측기술을 지닌 천문학자(日官)들이 있었으며, 이미 장기간 관측자료가 누적되어 있었음을 뜻한다.. 계속하시겠습니까? (Y/n) >> y 이현수 (삼위태백) [자료]삼국사기천문연구논문-4 1998-04-11 11:31 286 line 3. 일식기록의 독자관측 증명 고대에 태양은 절대권력자의 상징이었으므로 일식은 정치, 사회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믿어졌다. 이 때문에 고대 한국과 중국왕조, 그리고 AD628년 부터는 倭도 일식을 기록하였다. 삼국사기에는 BC54년부터 AD911년까지 신라(30회), 백제(26회) ,고구려(11회)의 일식이 67회 수록되어 있다. 그림6(그림생략)은 이 일식들의 연대별 분포를 막대 그래프로 보이고 있다. 일식의 연대별 분포가 갖는 특징들을 살펴보자. 먼저 신라의 일식기록들은 AD0년과 AD800년 근처에 밀집되어 있다. AD257년부터 AD786년까지 530년간 일식기록이 나오지 않는다. 고구려의 일식기록은 AD100년에서 200년 사이에 밀집되어 있다. 반면에 백제의 일식기록은 건국부터 멸망까지 고르게 나오고 있다. 이런 한 일식기록 횟수 분포의 특성은 전체 천문기록의 연도별 분포와도 일치하고 있다. (그림2참조). "삼국사기"에 수록된 일식 67개중 65개는 중국사서에도 있다. 삼국이 관측한 일식을 동시에 관측한 중국왕조의 이름을 그림6의 막대그래프에 기입하였다. 삼국초기의 일식기록과 중국기록을 비교해 보자. 서한(西漢)의 일식기록은 漢書,史記,通志,前漢紀등에 있다. 이들의 기록을 서로 겹치는 경우가 많다. 이 시기의 신라기록 16개중 14개와 백제 기록1개는 모두 漢書 五行志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신라기록 2개(ad6년과 16년)는 漢書 王莽에만 있다. 동한시대 신라일식기록 9개, 고구려기록 9개중 8개, 그리고 백제기록7개는 모두 후한서 오행지에도 나온다. 그러나 고구려 기록1개(ad114)은 후한서 孝安帝紀(효안제기)에만 있다. 전한시대 일식기록의 대부분(약67%)은 "한서"오행지에, 후한시대 일식기록은 대부분(92%) "후한서"오행지에 있으므로 당연한 결과이다. 이로써 삼국시대 일식은 대부분 중국에서도 관측되었으나, 동시 관측기록이 중국의 어느 한 사서에만 국한되어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에는 동아시아에서 관측할 수 없거나, 지구상에서 일어나지 않았던 일식이 13회 기록되어 있다. 이중 2개(신라의 ad256년, 고구려의 ad554년 기록, 그림6에서 검은 점으로 표시)는독자기록이고, 나머지 11개(그림 6에서 막대그래프 위의 0으로 표시)는 중국사서에도 있는 기록이다. 실현되지 않은 자연현상이 한국과 중국에 공통으로 나오므로 중국기록의 양적 방대함으로 미루어 볼 때 삼국사기의 이런 한 기록들이 중국이 것을 옮겨다 놓았다는 추측을 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의 모순점은 신라가 독자적으로 천문관측을 수행하고 있었다고 널리 인정되는 시기인 ad836년에도 이러한 기사가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이렇게 실현되지 않은 일식기록이 연도별 일식회수 분포가 비정상적인 신라나 고구려보다 정상적인 분포를 보이는 백제에 더 많다는 사실도 이 생각과 배치된다. 자료의 독립성은 사서비교와 같은 초보적이고 주관적인 연구로는 밝힐 수 없다. 객관적인 과학적 검증이 필요하다. 여기에서는 각국의 관측하여 남긴 일식들의 성격이 지역적으로 상이함을 보임으로서 독자관측사실을 증명하였다. 동아시아에서 실현되지 않은 일식기록중 일부(5회)는 지구상의 타지역(예로서 구미나 남극)에서 일어났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기록은 당시의 불완전한 일식 계산법과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다. 801년에 일식을 예측하였으나 일어나지 않았다는 기록은 당시에 일식을 계산에 의해 예보하였음을 말해준다. 또한 일식을 볼 수 없었던 신라의 기록 (4회)과 고구려의 기록(3회) 7개중 1개(836)만이 지구상의 타지역에서 일식이 일어났었던 반면에, 그러한 백제의 6개 기록가운데 4개가 지구상의 타지역에서 실제로 일식이 일어났다. 이 사실이 백제가 일찍부터 일식계산을 수행하여 빈번히 일식예보를 하였기 때문인지, 또는 백제의 활동영역이 매우 넓어서였는지 알 수 없으나, 신라와 고구려의 경우와는 분명히 통계적으로 차별성을 갖는다. 한편 중국사서의 일식기사가 삼국의 기록을 차용한 것일 가능성도 있다. 그림7(그림생략)은 서기 1000년 이전에 중국왕조의 사서에 수록된 일식들의 횟수분포이다. 그런데 그 기록들의 일부는 사관이 직접 관측하지 못하고 다른 곳에서 들어 적은 것들이 있다.(그림7의 빗금부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러한 기사들이 후한에만 집중적으로(서기30~200)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이 기간에 후한의 전체 일식기록 횟수가 타기간에 비해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외부에서 들어 적었다는 기록수가 40%에 이른다는 사실은 타기간에도 외부에서 들어 적은 일식기록이 적지 않으리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특히 고구려 태조64년(116)의 일식기록에 대응하는 후한서 오행지 기록에는 '遼東以聞'이라는 부연설명이 있어 동이족의 자료가 분명 전달된 듯하다. 신라의 일식기록중 ad124년과 186년 기록은 고구려 기록과 겹치고, 고구려의 ad165년 기록은 백제의 기록과 겹친다. 세나라가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다면 삼국간의 동시 일식관측 회수가 적은 편이나, 삼국의 일식기록이 동시에 나오는 시기가 ad2세기경 뿐이므로 이런 결과가 발생했다고 본다. 그림8(그림생략)은 천체 역학적으로 계산하여 실현이 확인된 신라 일식 25개, 백제 일식 20개, 고구려 일식 8개의 일식상황도이다. 그림위에 적은 설명중 첫줄은 일식의 종류, 기주궁심에서 보았을 때 일식이 최대로 진행되는 시각을 말해준다. (그림설명참조). 이 그림에서 실선은 굵기 순으로 최대식분(태양이 달에 최대로 가려지는 비율)이 0.9, 0.7, 0.5, 0.3인 지역을 연결한 것이고, 잔 점을 찍은 곳은 최대 식분이 0.98이상이어서 개기식을 보게되는 지역이다. 점선은 식분이 최대가 되는 시각을 알려준다. 각 위치에서 식분이 최대가 되는 지방시는, 점선옆에 기입한 시간에 경도를 15로 나눈 값을 더한 것이다. 즉 신라가 관측한 BC2년(-1년)일식을 상해에서 관측했을 때 최대 식분은 0.9이고 , 이때의 지방시는 24시 45분+121.5시 즉 아침 8시 51분이다.(상해의 경도는 121.5도). 이제 삼국의 일식기록이 독자관측에 의한 것임을 증명하겠다. 증명방법은 각국의 기록으로 남긴 일식 모두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지역이 서로 매우 상이함을 보이는 것이다. 그림8(그림생략)에서 개개의 일식도를 보면 어느 한 일식은 식의 정도차가 있지만 광범위한 지역에서 관측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혁거세 4년 (서기전54년)의 일식 경우 식붐이 서울과 동경에서 0.7, 서안에서 0.8, 상하이에서 0.9, 그리고 방글라데시의 데카에서는 1.0(개기식)이다. 그러나 특정국가가 남긴 모든 일식을 이렇게 모든 지역에서 잘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신라의 일성 8년(141)의 일식은 한반도와 그 이동에서는 볼 수 없다. 또한 신라 아달라 13년(166)의 일식은 장안 이서에서는 볼 수 없다. 따라서 특정 국가가 관측한 일식의 식분도 (그림8에 그린것과 같은)를 모두 합하여 평균하여 보면, 평균식분의 최대인 지역을 찾을 수 있고, 이것이 바로 최적 관측지인 것이다. 반대로 기록된 일식을 볼 수 없는 지역을 제외하여 나감으로서 기록된 일식을 모두 볼 수 있는 지역을 찾아 낼 수도 있으나, 삼국에 대하여그 결과가 평균식분이 최대인 곳과 대체로 일치하였으므로 본 논문에서는 이 방법을 따른 연구결과를 생략하였다. 평균식분이 최대인 곳이 바로 그 국가의 위치와 일치하는지를 검사해보자, "고려사"천문지에는138회의 일식이 기록되어 있다. 이중 99회가 실제 일어난 일식이다. 이 99회 일식 모두에 대하여 동아시아 전 지역에서 관측되는 식분을 계산한 다음 평균을 구하였다. 그림9(그림생략)에서 실선은 고려 일식이 평균식분 분포를 보인 것이다. 실선은 굵기순으로 평균식분이 0.54, 0.51, 0.47, 0.4인 지역을 연결한 것이다. (그림에서 [평균식분이 최대인 곳의 위치]와 [평균식분의 최대값]이 유용한 정보이다). 식분이 최대인 지역이 한반도 중부지방에 놓여있어 고려 수도의 위치와 대체로 일치하고 있다. 이제 이 방법을 삼국의 일식에 적용하여 보자. 평균 식분도를 얻기 위해 삼국의 일식 기록을 네 집단으로 분류하였다. 첫째는 서기전 54년에서 서기201년 까지의 초기신라 일식 16회, 둘째는 787년 이후의 후기신라 일식 9히, 셋째는 백제 전기간의 일식 20회, 마지막은 고구려의 일식8회이다. 이 네 집단에 속한 일식들의 식분을 따로 평균해 본 것이 그림 10의 ㄱ,ㄴ,ㄷ,ㄹ이다 네 집단 모두 평균식분이 최대가 되는 최적 일식 관측지가 서로 다르다. 초기신라 일식의 치적관측지는 양자강유역, 후기신라는 한반도 남부, 백제는 발해만 지역, 그리고 고구려의 일식은 최적관측지가 불분명하나 신라와 백제보다는 더 고위도 지방임은 확실하다. 특히 초기신라 일식은 평균식분 최고 값이 0.71이나 되어 16개 일식이 거의 양자강 유역으로만 지나갔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가 제기하는 의문은 다음과 같다. 만약 초기신라 백제 고구려의 일식기록이 중국의 것을 베낀 것이라면 왜 그들의 최적관측지가 모두 다르게 나타나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일련의 모의실험을 하였다. 신라 초기의 일식이 "삼국사기"에 나오는 기간(서기전 54년 - 서기 201년)에 "한서"에는 27개의 일식이 기록되어 있다. 그림 11은(그림생략) "후한서"에 나오는 일식중 실제 일어났으며, 사관이 소문을 들어 적은 것이 아닌 57개 일식의 평균 식분도이다. 후한의 수도 낙양보다는 평균식분이 최대가 되는 지역이 약간 북쪽으로 나타나 있다. 이것은 아마도 사관이 직접 관측하지 않은 일식이 기록보다 더 많아서 수도에서 관측 안된 일식이 포한됐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실제로 소문을 들어 적었다는 일식까지 모두 포함하여 구한 최적관측지도 그림11의 위치와 거의 차이가 없다. 어쨌든 중국사서에 수록된 일식들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지역이 북경 근방인 것이다. "삼국사기"의 편저자가 "한서"와 "후한서"의 일식기사를 무분별하게 베꼈다면, "한서"와 "후한서"의 일식기사 79개중에 16개를 뽑아 신라본기에 옮겨 적었을 것이다.(실제로 일어난 일식만을 고려해 보자). 이때 "한서"와 "후한서"의 일식들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지역은 북경근방인데, 그 일식들 가운데 무작위로 뽑은 16개 표본의 최적관측지는 양자강 유역이나 그 이남으로 멀리 떨어지고, 더구나 평균식분의 최대값이 0.71이나 그 이상일 확률이 얼마일까? 79개에서 16개를 뽑는 경우의 수는 79c16=79! / (16*63!) 로서10개 이상의 엄청난 가지수가 있다. 여기에서는 서한과 동한의 일식에서 16개를 임의로 선택하는 모의실험을 1만번 수행하였다. 그리고 매번 선택된 16개 일식들에 대하여 최적 관측지의 위치와 최대평균식분을 구하였다. 그림12(생략)의 ㄱ에 그 결과를 보였다. 네모를 친 지역안에 있는 점은 모두 24개인데, 한서와 후한서의 일식기사를 베꼈을 때 초기신라의 일식처럼 저위도 지방에 최적관측지가 떨어지고 최대 식분이 0.71이상인 표본이 발생한 경우이다. 따라서 "삼국사기"의 초기신라 일식이 중국의 것을 차용한 것일 확률은 24/10000=0.24%(약 4백분의 일)이다. 신라의 일식만을 고려해 보아도 중국이 기록한 일식들의 평균적인 성격과 매우 다름을 알 수 있다. 한편 고구려 일식의 최적 관측지는 분명히 정할 수 없으나, 백제나 漢의 최적 일식관측지를 회피한 북부지역으로 보인다. 그 위도를 약 52도로 정하면, 평균식분이 최대가 되는 값이 0.6이므로 후한서에서 8개의 일식을 무작위로 꺼냈을 때 이러한 성격의 일식이 표본으로 나올 확률을 물어볼 수 있다. 그림12(그림생략)의 ㄴ이 그 결과이다. 서기 116년에서 219년 사이에 나오는 "후한서" 일식 37개 가운데 8개를 뽑아 그것들의 최적관측지의 위도와 식분의 최대값을 구했을 때 高句麗일식과 같은 또는 그보다 더 북쪽에 치우치는 표본이 약 11%에 달하였다. "漢書"와 "後漢書"에서 신라일식 16개를 qpRL는 작업과 "후한서"에서 고구려 일식 8개를 베끼는 작업은 서로 독립적이므로, 高句麗일식은 북위도로 치우치고 新羅일식은 저위도로 치우칠 확률은 0.0024*0.11=0.026%이다. 한편 百濟일식의 최적관측지는 중국일식의 최적관측지와 별 차이가 없다. 그러나 중국의 일식을 베꼈을 때 , 백제 일식의 최적관측지가 고구려보다 북쪽이나 , 신라보다 남쪽으로 나타나지 않고 , 북쪽에 고구려, 중앙에 백제 남쪽에 신라 순서로 줄지을 확률은 분명 고구려와 신라 일식만을 고려한 확률보다 더 작을 것이다. "三國史記"의 기록이 중국기록의 무분별한 차용이라면, 고구려의 일식으로 양자강이나 그 이남으로 지나가는 것들이 선택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삼국의 일식 기록이 중국 기록을 차용한 것일 확률은 0.026%(약 4천분의 일)이하 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비록 삼국의 일식기록에 대응하는 관측기록이 중국사서에도 있지만 각 국가가 남긴 일식들은 지역적으로 매우 상이한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이것은 곧 삼국이 독자적으로 서로 다른 위치에서 일식을 관측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에서 우리는 달이 행성을 가리는 현상과 금성이 낮에 보인 현상에 대한 기록으로부터 삼국이 서기 200년 이후에 수준 높은 천체관측을 하 였음을 증명하였다. 또한 일식기록으로부터 기원전부터 천체관측이 독자적으로 수행됐음을 보였다. 이제 이 일식기록과 기상현상기록으로 부터 자연현상들을 관측하였던 관측자의 위치를 고증하고자 한다. 먼저 일식기록을 이용하여 관측자의 위치를 추정해보자. 고대 천문현상의 관측은 그 국가의 수도 근방에서 하였으리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본 연구에서 삼국의 자연현상들을 분석하여 추정한 위치는 기존 역사관으로 해석이 불가능하므로 일단 그 위치를 '관측자의 위치'로 명명하겠다. 앞서 본 바와 같이 개개의 일식은 광범위한 지역에서 볼 수 있지만 많은 일식자료가 있을 경우 그 일식을 모두 잘 볼 수 있는 지역을 찾아내어 관측자의 위치를 찾을 수 있었다. 삼국 일시그이 식분을 각각 평균한 그림10(그림생략)은 곧 삼국의 일식을 관측한 위치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이 그림에서 초기 신라의 일식은 양자강 유역, 후기 신라는 한반도 남부로 나타나서, 후기 신라의 관측자 위치는 기존 상식과 부합하나 초기 신라의 관측자 위치는 의외의 결과이므로 좀 더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또한 百濟일식의 관측지는 勃海만 유역으로 나타났다. 이 지역은 백제의 진출설이 많이 제기되고 있는 곳이어서 큰 무리는 없어 보이나, 역시 상설 천문관측소가 있던 백제의 수도 위치로는 이해할 수 없는 곳이다. 고구려의 관측자 위치는 신라나 백제보다 북위도 지방이라는 것 이외에는 일식자료로부터 위치추정을 정확히 할 수 없다. 이것은 고구려의 일식 횟수가 8회 뿐인것에 가장 큰 이유가 있지만, 고구려가 실제로 광대한 영토상의 몇 군데에서 천체관측을 했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한다. 후기 신라의 일식기록도 9회 뿐이지만 최적 관측지가 수도위치와 정확히 일치하고 있음과 대조적이기 때문이다. 일식의 최적 관측지로부터 찾은 초기 신라의 관측자 위치가 잘못일 확률을 알아보자. 우선 관측자가 황하유역에 있는데 최적 관측자가 양자강으로 나타날 확률은 앞에서 보인 것 처럼 0.24%로서 그러한 가능성은 배제된다. 한편 관측자가 한반도에 있는데도 관측된 16개 일식의 최적관측지가 우연히 초기 신라 일식의 최적관측지점처럼 서쪽에 위치하고 평균식분의 최대값이 0.71이상일 수 있는지 알아보자. 高麗의 일식은 분명 한반도에서 관측했으므로 이 모의 실험에서는 고려일식 99개를 모집단으로 사용하였다. 고려 일식99개에서 16개를 임의로 선택하는 실험을 1천번 수행하고, 매번마다 선택된 16개 일식의 최적관측위치의 경도와 평균식분의 최대 값을 구하였다. 그 결과가 그림13 (그림생략)이다. 사각형안에 있는 네 점들은 한반도에서 일식을 관측했음에도 불구하고 최적관측지가 양자강유역이나 그 이서에 , 그리고 평균식분의 최대 값이 0.71이상인 경우이다. 다라서 초기 신라의 위치가 한반도임에도 불구하고 그림 10의 ㄱ처럼 양자강 유역으로 잘못 나타날 확률은 0.4%로서 역시 무시할 만큼 작다. 따라서 초기 신라 일식은 바로 양자강 유역에서 관측한 것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신라의 초기 일식 기록은 201년을 마지막으로 끝나고(일어나지 않은 일식 기록이 256년에 한번있음) 787년에 일식 기록이 다시 등장할 때까지 긴 공백 기간이 있다. 따라서 201년 이전의 일식들을 관측하던 신라가 어느 시기에 역사적 변동을 겪고나서 787년 이후부터 전혀 이질적인 일식들을 관측하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다른 자연현상 기록을 분석하여 보았다. 자연현상 중에는 천체현상 이외에도 지역적 특성을 반영하는 것들이 있다. 그러한 예는 장마, 지진, 태풍 등이다. 그러나 태풍은 비슷한 시기에 중국대륙 동부나 한반도에 상륙하므로 변별력이 없다. 지진의 경우도 20세기에는 한반도에 지진이 거의 발생하고 있지 않치만 조선시대의 기록을 살펴보면 땅이 갈라지는 정도의 대 지진도 여러번 발생하였다. 중국대륙의 동부 지역에는 지진지대가 많으므로 지진자료 역시 한반도와 중국 동부지역의 차별성을 찾는데에 도움을 주지 못한다. EK라서 여기에서는 '大水'로 표현된 홍수기록을 이용하여 "三國史記"의 기상자료가 한반도와 중국동부중 어느 지역과 부합되는지 알아볼 것이다. 그림14(그림생략)는 신라본기에 있었다는 달(음력)을 연도별로 보인 것이다. 그림에서 세모꼴은 나라의 서쪽(4회) 또는 동쪽(1회)에 큰물이 났다는 기록들을 구별한 것이다. 또한 250년의 기록은 여름이라고만 표현하였으므로 5월에 점을 찍고 오차범위를 4월과 6월사이로 하였다. 이 그림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신라에서 큰물(홍수)이 나는 시기가 서기 약 500년 이전까지는 음력 4-5월에, 그 이후에는 6-8월에 일어난다는 점이다. 장마와 같은 기상현상은 1-2백년 사이에 변하지 않으므로 이 사실은 지구상의 위치가 다른 두곳의 기상관측자료가 500년을 전후하여 연결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동아시아에서 음력 4-5월에 큰물이 나고, 그 이전과 이후에는 강우량이 적은 곳이 어디인가? 또한 음력 6-8월에 큰물이 나는 곳은 어디인가? 신라본기에 묘사된 기상학적 특성을 지닌곳을 동아시아에서 찾기 위해 동아시아에 산재한 기상측후소가 최근 50-100년간 축적한 강수량 자료를 분석하였다. 그림15(그림생략)는 이 측후소들의 위치이다. 동아시아 전역에 고르게 분포하고 있다. 이 측후소들에서 약 50년에서 100년간 관측한 강수량 자료를 월별로 모아 평균을 취하였다. 그림 16 (그림생략)에 5, 6, 7, 8월(양력)에 평균 강수량이 25cm(큰점), 20cm(중간점), 15cm(작은점)이상인 곳을 표시하였다. 양력 5-6월은 음력 4-5월에 해당하는데, 이때에 많은 비가 오는 곳은 중국대륙에서 양자강 유역과 그 이남임을 알 수 있다. 한편 7-8월(음력 6-7월)에는 산동반도와 한반도지역에 강우량이 많은 반면에 양자강 유역과 그 바로 아래 지역은 강우량이 적음을 알 수 있다. 중국대륙 남해안과 일본열도는 내내 비가 많이 온다. 그림17(그림생략)은 한반도 안의 세 기상관측소(실선:인천,목포,강릉)와 양자강 유역의 세 관측소(점선: Tunxi, Nachang, Wuhan-우한은 낙양으로서 황하남부)에서 측정한 평균 강수량의 연중 변화이다. 양자강 유역에서는 4-6월에 많은 비가 오고, 그 이전과 이후에는 건조하다. 반대로 한반도에서는 건조하다가 7-9월에 강수량이 많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따라서 500년 이전의 신라 大水기록이 의미하는 것처럼 양력 5-6월에만 비가 많이 오는 지역은 바로 양자강 유역인 것이다. 또한 양력 7-8월에 비가 많은 곳은 산동반도와 한반도 지역이다. 결론적으로 서기 500년가지의 신라본기에 나타난 기상학적 특성은 신라의 초기일식으로 찾은 양자강유역과 일치하고 있으며, 그 이후의 기상조건은 신라 후기 일식으로 찾은 한반도 지역과 부합되고 있다. 전혀 독립적인 두 자연현상이 일치된 결론을 주고 있다는 사실은 신라 초기에 자연현상을 기록한 관측자의 위치가 양자강 유역으로 밝혀진 본 연구의 결과가 특정자료의 선택적 성향이 아님을 보여준다. 한편 "三國史記"의 백제본기와 고구려본기에는 큰물 기록이 각각 7회와 6회만 나와 통계적 분석이 어렵다. 그러나 백제의 경우 큰물이 날 달이 5월에 3회, 6월에4회가 있었고, 고구려의 경우 5월이 3회, 6,7,8월이 1회씩 있어 백제는 신라보다 한달정도 늦고, 고구려는 백제보다도 약간 늦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또한 홍수발생 계절이 두나라 모두 연대에 상관이 없어 보인다. 따라서 백제와 고구려의 경우에도 기상자료는 일식으로 추정한 각국의 위치과 일치하고 있다. 계속하시겠습니까? (Y/n) >> y 이현수 (삼위태백) [자료]삼국사기천문연구논문-5 1998-04-11 11:32 139 line 라. 토의 및 결론 본 연구에서는 "三國史記"에 기록된 천문현상자료들이 독자적 관측에 의한 기록임을 증명하였다. 三國이 독자적으로 천문관측을 하였음을 입증하는 첫 번째 증거는 외국사서에 없는 독자기록이 실제로 일어났었던 현상과 일치한다는 점이다. 본 연구에서는 대부분이 독자기록인 太白晝見과 달의 행성 엄폐현상을 천체역학적 계산을 통해 그 실현을 검증하였다. 특히 주목하여야할 관측기록은 8회 기사가 모두 독자기록인 太白晝見이다. 그림 5에서 볼 수 있듯이 8회기록중 4회가 금성이 가장 밝아지는 시기와 일치하고 있으며, 7회가 기상조건이 매우 좋은 가을에서 초겨울 사이에 있다. 太白晝見기록 시기와 금성이 실제로 가장 밝아지는 시기가 일치하여 實現이 확인된 백제 구수11년 (224)기록은 최소한 이 시기에 이미 백제가 관측하기 어려운 천체현상 까지 체계적으로 관측하고 기록하였음을 입증하는 것으로서 역사학적 중요한 가치를 갖는다고 생각한다. 금성을 낮에 관측했다는 사실에서 낮에도 천문관측을 수행하는 전문기관이 있었으며, 금성의 위치를 예측할 수 있는 자료와 지식을 지닌 천문학자가 있었음을 뜻한다. 한편 백제 구수왕대를 가공적 왕조로서 해석하는 견해는 이 기록의 검증 결과로써 완전히 부정된다. 달의 행성 엄폐 현상 기록 중에도 가장 초기 기록인 신라 내해10년(205) 7월과 백제 초고40년 7월의 太白犯月은 역사적 가치가 크다. "삼국사기" 에는 태백범월 현상이 5회 기록되어 있는데 모두 독자기록이다. 이 기록들을 확인해 본 결과 금성과 달의 거리가 약 2.5도이고 금성의 등급이 -4.4이었던 205년의 현상은 太白犯月로서 인정될 수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왕명 비교등 객관성 없는 추론을 통해 百濟 肖古王 (초고왕)의 존재를 회의하는 견해 역시 오류였음이 밝혀졌다. 또한 근거 없는 편견으로서 "삼국사기"가 기술한 신라의 초기역사를 외면하던 자세에 전환이 있어야 함을 이 자료는 보여주고 있다. 본 연구에서 밝혀진 또 한가지 사실은 "삼국사기"에 수록된 천체현상들이 ,일부 잘못된 관측을 제외하면 대부분 삼국의 건국초기부터 천체역학적 으로 계산한 시각과 정확히 일치하고 있다는 점이다.(표1참조). 주지하여야 할 점은 만약 三國史記의 연표에 착오나 조작이 있었다면, 본 연구에서 검증한 천체현상들은 모두 계산과 맞지 않게 된다는 사실이다. 행성과 달의 운동은 매우 불규칙하여 간단한 주기성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삼국이 행성과 일식관측기록이 전반적으로 독자관측에 의한 것이고, 그 시기가 절대로 뒤섞일 수 없다는 사실은 "三國史記"가 기술한 삼국의 초기 역사가 지금보다 더욱 진지하게 받아 들여져야 함을 뜻한다고 생각한다. 혜성 관측기록에도 독자적인 것이 많다. 그런데 독자적인 기록과 중국사서에 공동으로 나오는 것과는 표현에 있어 차이가 있다. 즉 高句麗 민중 3년(46) '星패干南'이나 신라 탈해 23년(79) '彗星見東方 又見北方', 백제 초고 21년(186) '星패干西北' 등 독자기록은 대부분 혜성의 출현 위치를 팔방위 중의 하나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신라 혁거세 9년(전49) '有星패干王良' , 고구려 고국천 4년(182) '星패干大微' , 백제 기루9년(85) '客星入紫微' 등 중국과 동시에 관측한 혜성의 위치는 중국식 별자리 이름으로 표현되어 있다. 삼국시대에 천체의 위치를 4방이나 8방으로 표현한 사실은 덕화리 2호고분, 약수리 고분, 복사리 고분, 덕흥리 고분등 많은 고구려 고분벽화에 그려진 별자리 그림에서도 알 수 있다. 천체의 위치가 중국식으로 표현된 기록은 "三國史記"의 편저자가 중국사서를 참조하여 독자기록은 그대로 두고 , 중국사서에 동시관측 기사가 있는 경우 혜성 위치에 대한 명칭을 별자리 이름으로 수정하였다고 추측된다. 삼국이 남긴 일식들로부터 각국에 대하여 최적관측지를 찾음으로서 관측위치를 추정하였다. 그 결과 신라초기(201년 이전)의 관측자 위치는 양자강유역으로, 후기(787년 이후)의 위치는 한반도 남부로, 그리고 백제의 관측자 위치는 발해만 유역으로 나타났다. 고구려는 백제보다 더 북위도에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201년 까지의 신라 일식은 일식진행지역의 집중도가 매우 높아 16개 일식이 거의 양자강 근처로 지나가며, 평균식분의 최대 값이 0.71이나 된다. 이 평균식분은 한국, 중국, 일본의 역대 모든 고대국가가 남긴 일식기록들의 평균식분중에서 가장 큰 값이다.(즉 일식의 중심지가 한곳에 집중되고 있다). 또한 "三國史記"의 일식기록은 평균 80%의 높은 실현율을 보이고 있다(66개중 53개 실현, 1개는 當食不食으로 기록되었으나 실현). 반면에 중국과 일본 사서의 일식 실현율은 "삼국사기"의 것에 못 미친다. 예를 들면 전-후漢, 동-서晉, 唐, 倭(일본서기)의 일식적중률은 각각 109/140=78%, 40/64=63%, 70/108=65%, 5/11=45%에 불과하다. 삼국의 초기 일식 기록들은 실현율이 더욱 높아 중국왕조가 前漢과 後漢이었을 때, 즉 신라 내해6년(201)까지의 일식기록과, 백제 초고 47년(212)까지 , 그리고 고구려 산상23년(219)까지의 일식기록35개 가운데 31개가 실현되어 일식 실현율이 무려 89%나 된다. (이후 백제 일식기록에 일어나지 않은 것이 많아진다. 그림6참조). 이 당시 漢書와 後漢書에 기록된 일식의 실현율이 약 78%이므로 "三國史記"의 일식기록이 11%나 높은 실현율을 갖는다. 따라서 일식현상에 관한 한 三國史記는 동아시아의 모든 고대사서 중에 신뢰도가 가장 높음을 알 수 있다. (즉 실제 관측에 근거한 자료임.) 한편 신라초기의 홍수자료를 분석한 결과 신라본기에 나타난 기상학적 특성을 지닌 동아시아의 위치는 서기 500년 이전에는 양자강 유역과 그 이남, 그 이후에는 산동반도와 한반도 지역으로 밝혀져 일식으로 추정한 위치와 일치하였다. 삼국에서 자연현상을 관측한 위치의 추정결과는 기존 사료들과 상충된 점이 많다. 우선 한반도 내에 있는 유물 유적 지명 등의 역사적 해석과 상호 모순되는 점이 있다. 또한 三國時代 중반 이후에 신라나 백제는 그들과 동시대에 존재하던 중국의 여러 고대 국가들과 뒤섞여 있었어야 하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한편 기상자료를 분석하여 신라의 위치가 500년경을 기점으로 큰 변동이 있었어야 함을 보았다. 이 특별한 시점에 신라가 어떠한 역사적 변화를 일으켰는지에 대한 , 또는 삼국사기 편찬에 참조된 사료에 대한 향후 연구가 요청된다. 한편 백제본기에 보면 개국이래 문자로서 사실을 기록한 것이 없다가 375년에 이르러 박사 고흥(高興)이 서기(書記)를 만들었다는 古記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그러나 신라와 백제가 독자적으로 기록한 205년의 太白犯月과 백제의 太白晝見 기록(224)등이 사실로 밝혀졌으므로, 三國은 漢文을 수용하기 이전에 천체 관측결과를 기록하였거나 구전하였음에 틀림없다. 서기전부터 관측된 일식기사, 혜성관련기사, 그리고 특히 전문적인 관측에 의한 자료축적과 금성위치에 대한 예측력이 필요한 太白晝見 기상등의 독자기록으로 보아 이러한 천문관측자료를 구전에 의하기 보다는 기록으로 보존하였다고 생각된다. 이 당시 사용하던 기록문자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 이상에서 우리는 천체현상을 비롯한 자연현상에 관한 고대기록이 사료로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는 사실을 보았다. 본 연구에서는 일식, 달의 행성 엄폐, 금성이 낮에 보이는 현상들을 중점적으로 다루었다 이 현상들에 대해서는 천체 역학적 계산에 의해 쉽게 그 실현 여부와 당시의 진행 상황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뿐만 아니라 독자 기록이 많은 혜성 기록도 좋은 연구자료라고 생각한다. 또한 대다수가 독자기록인 유성과 운석기록 중 운석기록은 현지 답사에 의해 증거를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한편 본 연구에서 중국 동해안과 한반도의 지역적 차별성을 중시하여 분석하지 않은 지진과 태풍 기록도 다른 목적의 연구에 중요한 역할을 하리라고 기대된다. 감사의 글 논문을 읽고 격려와 조언을 해주신 홍승수, 구본철교수 그리고 논문의 방향을 이끌어 주시고 참고문헌을 소개해 주신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노태돈 교수와 송기호 교수에게 감사를 드린다. 참고문헌 김부식 ,김종권역 삼국사기(명문당1988) 김영식 ,박성래,송상용,과학사,전파과학사(1992) 노태돈,삼구사기 상대기사의 신뢰성문제 아시아문화 제2호 渡邊敏夫,일식월식 옥전 ,웅산각, 동경(1962) 라일성 간상감가 현대 천문학 동방학지 제20집(1978) 박성래 과학사상 제10호 (1994) 飯島忠夫,삼국사기 일식기사 동양학보 제15권(1926) 북경천문대, 중국고대천상기록총집 강소과학기술출판사(1988) 이은성 한국의 책력 전파과학사 서울(1978) 일연 박성봉 고경식 역 삼국유사 서문문화사(1985) 전상운 한국과학기술사 정음사(1983) 전용신 역 일본서기 일지사(1989) 齊藤國治,"신라,고구려 백제의 천문기록"(1985) 제등국치, 고천문학 환성사(1989) Maeeus,J. , Astronomical Algorithms, Willmann-Bell,미국91991) Stephenson, F.R., Houlden. M. A., [Atlad of Historical Eclipse Maps], Campridge Univ. Press, Cambridge91985) 박창범 서울시 관악구 신림동 산 56-1 서울대학교 자연과학대학 천문학과 PRINTER/CAPTURE를 OFF 하시고 [ENTER] 를 누르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