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알림판목록 I] [알림판목록 II] [글목록][이 전][다 음]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요키에로타)
날 짜 (Date): 1998년 11월 22일 일요일 오후 03시 40분 25초
제 목(Title): 뉴스피플/ 문부식_임수경 이제야 밝힌다 


 


                   [새 기획] 문부식·임수경,이제야 밝힌다



  80년대의 세상은 앞을 가로막아서던 커다란 바윗덩어리였고,90년대의 그것
은 승객을 기다리지 않고 쏜살같이 달려가는 출근길의 버스같은 것이다가,그
90년대도  종점에 다다른 요즘 세상은 이유를 대지 않고 사람들을 자신의 바
깥으로 내모는 불도저같은 것이다.80년대를 20대로 보내고,90년대를  30대로
맞닥뜨렸다가  이제 40대가 되어 이 IMF 구제금융의 시대에 대책도 없이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된 내게 세상은 그런 느낌으로 다가선다.

  살아가는 일이 누구에게라도 피곤하게 느껴지는 요즘,나는 80년대초의  한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라는 제안을 받았다.앞만 보고 달려가도  세상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은 시절에 이 무슨 부질없는 주문이란 말인가? 그런데 정
작 고개를 가로저어야 할 내가 반대로 고개를 주억거리는 이것은 또 웬 조화
인가? 나는 마치 슬그머니 감추어두려 했던 나의 내면을 다시 한번 들켜버린
느낌이었다.

  1982년 3월 18일의 ‘부산 미문화원 방화 사건’(이하 ‘부미방  사건’).
그것은 이미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나름의 평가가 끝난 사건일 수  있다.지
금도 여전히 ‘좌경 의식화된 극렬 분자들에 의해 저질러진 용서받을 수  없
는 반국가적 폭력 행위’라고 기억하든지,아니면 그와는 반대로 소수의 사람
들이 그랬던 것처럼 ‘한국 전쟁 이후 잠자고 있던 반미 민족의식을  일깨워
준 선구적인 행동’으로 기억해주든지 어느쪽으로 평가의 추가 기우는가  하
는 것은 사실 내가 관여할 바가 아니다.

  어떤 사건에 대한 평가이든 그것은 일어난 순간부터 당사자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몫이라는 점을 내가 어찌 모르겠으며,지금에 와서 새삼스럽게  그
것과 관련하여 재론의 여지를 제공할 만한 ‘밝혀지지 않은’ 새로운 사실의
 목록을 내가 지닌 것도 아니다.

   내가 지금부터 하려는 이야기는 80년대 초의 그 사건에 대한  ‘진상’에
관련된 것이 아니다.어쩌면 그것은 ‘진상’이나 객관적인 ‘사실’과는  무
관할 수도 있는 지극히 개인적인 내면의 이야기다.

  언제,누구한테 들은 이야기인지 정확한 기억은 없다.80년대에 있었던 여러
  사건이 주제가 되던 어떤 술자리에서였을 것이다.“사람은 사라지고  결국
사건만 남는 것 아니냐”고,그 자리의 누군가가 냉소적인 어투로 내게  말을
건네왔을 때 나는 무척 당황스러웠다.왜 그랬을까? 사람은 사라지고…? 그때
로부터 내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는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내면속 ‘소영웅주의’에 대한 공격이고, 그 시대  사람들의
숨결이 증발해버린 80년대의 기록이나 보고서가 가지는 군색함에 대한  비판
이었다.

  우리들 가운데 소수는 ‘주모자’나 ‘주동자’가 되거나  ‘배후조종자’
가 되어 유명해졌다.그리고 그 소수는 자신이 얻은 유명함을 바탕으로  90년
대의  ‘정치’나 ‘사회’나 ‘경제’에 성공적으로 진입했다.그렇다면  그
밖의 다수는? 어떤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려는 게 아니다. 그것은  역
사의  안쪽에서 지금도 묵묵히 자신의 삶을 살아가며 아름다움을 잃지  않은
그이들에 대한 모욕이다.

  나는 기억한다.80년대의 마지막 해가 되는 어느날, ‘부미방 사건’  관련
자들이 모처럼 함께 모인 자리에서 우리들중 누군가가 다른 사람들에게 사건
의 관련자들을 소개했다.“여기는 ‘방화조’고, 여기는 ‘유인물조’고…”
그 ‘소개자’는 자상한  자신의 소개로 인해 ‘방화조’와  ‘유인물조’가
모두 얼굴이 붉어지다 못해 고개를 숙이는 걸 보았는지,어땠는지.

  80년대의 역사와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사건과 사람의 정신은 그렇게   천
박하고 유치하게 표현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누군가를 비난할  필요
도  없다.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너무나 부끄럽다.나는 긴 시간 나를  지배해
온 소영웅주의와 함께 춤추며 귀중한 시간을 허비했다. 적어도 80년대의  한
사건에 관련된 사람으로서 나는 어떤 사실적 기록과 평가 이전에 거기에  참
여했던 사람들의 이야기, 즉 그때 그 20대의 젊은 영혼들이 무엇을 고민하고
무엇을 실천하려고 했는지 그 숨결들에 대한 기록을 남겨야 할 의무가  있는
데도 말이다.

  미리 고백할 게 있다.내게는 비록 ‘부미방 사건’에서 ‘주범’이라는 딱
지가 붙기는 했지만 부산 미문화원에 불길이 오르던 당시 나는 그  현장밖에
있었다. 전체적인 상황을 통제해야 한다는 명분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이전  서로의 역할을 나누는 과정에서 솔직히 나는 내가 현장에  뛰어들어가
는 역할을 맡게 되지 않을까 내심 두려웠다.그리고 누구보다 가깝게 지낸 후
배들이고 동료들이었지만 자신의 운명을 건 결단을 내리는 자리에서  어려운
역할을 마다하지 않고 자처하는 그들을 보면서 나는 애써 미안한 마음을  감
추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이런 ‘쓸데 없는’ 이야기까지 늘어놓는 것일까? 지금부터  쓰
려고 하는 ‘부미방 사건’은 바로 그러한 이야기이다.

  우리의 고단한 현대사에서 그 사건이 지닌 객관적인 의미와 거기에 덧붙여
져야 할 공정하고도 냉정한 평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다.그러나 내가 쓰고 싶은 것은, 진실로 용기있게 역사의 한복판에 뛰어들
었음에도  불구하고 한두 사람의 이름에 가려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역사의
진정한 주역들, 내가 알고 있는 이들의 가슴 속에 숨쉬고 있던 영혼의  발자
취이다.한 사건을 가능하게 한 계획과 그 실행에 관한 기술이 아니라 그  계
획과 실행을 가능하게 한 80년대의 정신이다. 이것을 기록해야 할 의무를 이
행하지  못하는 한 나는 80년대에 대한 채권자가 아니라 ‘사람이  사라진’
자리를 채우지 못한 불성실한 채무자이리라.

  이 글을 쓰게 만든 내면의 부채 의식은 이것만이 아니다. 앞서 말한  것이
과거에 속하는 부분이라면 오늘의 어떤 현실이 나로 하여금 82년의 ‘부미방
 사건’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게 한다는 것을 여기쯤에서 이야기해 두어야
 할 것 같다. 그것은 90년대 한국의 정치 현실이 보여주는 ‘거짓말’과  관
련되어 있다.

  몇해 전 김영삼 ‘문민정부’는 80년 5월 ‘광주학살’의 진상 규명과  책
임자 처벌을 위한 ‘광주 특별법’의 제정 요구를 받아들이고 검찰로 하여금
 수사에 착수할 것을 지시했다.이것은 물론 정권의 자발적 의지가 아니라 국
민들의 끈질긴 요구에 의한 것이었지만 피묻어 쓰러진 역사를 ‘바로 세우기’
가 시작되리라는 기대가 우리  모두를 고무시켰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TV를 통해서 저녁 뉴스를 보다가 거기에 나오는  어
떤 사람의 이름과 얼굴을 보고는 엄청난 충격을 받고 말았다.서울 지검 공안
부장 검사인 최모씨(지금도 현직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어 이름은 생략함).8
2년 군사법정에서 나에게 사형을 구형한 그 검사가 10여년이 지난 오늘 광주
시민들을 학살한 책임자를 처벌하는 대한민국 검찰의 수뇌부를 구성하고  있
다는 사실 앞에서 나는 너무 큰 충격 때문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나는 82년 전두환 신군부 정권하의 법정의 최후 진술에서 “만일 80년   5
월 광주 학살이 없었더라면 나는 이 자리에 서 있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했
다. 82년 ‘부미방 사건’은 두 말할 필요도 없이 그날의 학살에 대한  전두
환 정권과 미국 정부의 책임을 묻는 행동이었다.그런데 바로 그 사건 자체에
  ‘사형’을 구형한 검사가 10여년이 흐른 뒤 이제는 자신들의  상전이었던
전두환·노태우를 조사하고 처벌하는 역사적인 임무를 맡는다?

  나의 눈에선 눈물이 흘러내렸다.도대체 역사란 무엇인가? 오늘 내 눈 앞에
 펼쳐지는 현실을 보면서도 나는 여전히 역사 속에서 진실이 승리할  것이라
고 다른 사람들에게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또 보았다. 지난 대통령  선
거에서  어느 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사람은 바로 ‘부미방 사건’의  재판의
마지막 판결을 맡았던 대법원의 주심 대법관이었다. 그리고 이제 군사정권하
의 엘리트들인 그들은 ‘근대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과 ‘정보화 세력
’의 단결과 통합을 외치는 ‘새로운’ 정치의 주창자가 되어 있다.

  글을 쓰다말고 갑자기 옆에서 잠들어 있는 나의 아내와 딸 아이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다. 아내와 아이의 얼굴 위로 80년대에 시대의 어둠을 비추고 사
라져 간 이름과 얼굴들이 겹쳐진다.어찌 그들뿐이랴.거리에서,닭장차에서,지
하실에서, 또 감옥의 창살 안에서 자신들의 젊음을 괴로워하던 이들은  지금
어떻게들 살아가고 있을까?

  내가 믿는 한 역사는 과거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과 다가올 내
일의 시간을 위해 존재한다.나의 이야기는 80년대가 시작되던 첫 해에서  시
작하여 지금 내가 던진 이 질문으로까지 거슬러 올라올 것이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 "활쏘기는 군자의 덕성과 비슷한 바 
가 있으니, 활을 쏘아 과녁을 벗어나더라도 오히려 그 이유
를 자기 몸에서 구한다."

[알림판목록 I] [알림판목록 II] [글 목록][이 전][다 음]
키 즈 는 열 린 사 람 들 의 모 임 입 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