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TBA (To B Anncd) 날 짜 (Date): 1998년 11월 14일 토요일 오전 05시 42분 01초 제 목(Title): [폄] 우리나라의 화기 발달사 http://bora.dacom.co.kr/~warmm 에서 펴왔습니다. 우리나라의 화기 발달사 -1 화약이 생산되기까지 인류의 발생과 성장에는 무기의 역할이 절대적이라 할 수 있는데 바로 이 점이 인간과 동물의 중대한 차이점으로 지적된다. 인간은 직립(直立)에 따른 손의 해방으로 무기를 다룰 수 있었고, 이와 함께 두뇌의 발달과 기술의 진보는 연약한 인간들을 일약 지구상의 제왕으로 끌어 올렸으며, 사나운 맹수들이나 인간의 천적들을 정복하여 인류 문명을 탄생시켰다. 부족이나 국가가 형성되면서 무기도 체계화 . 조직화되었으며, 이러한 무기들은 그 형체가 다양하기는 하나 이를 크게 나누면 공격무기와 방어무기로 나룰 수 있다. 이 무기들은 무기의 시원과 성능상으로 볼 때 공격용 무기가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공격용무기는 다시 충격무기와 비행 무기로 구분되어진다. 즉, 적과 맞붙어서 타살할 수 있는 칼 . 도끼 등이 충격무기이며, 어느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돌이나 화살 . 창 등을 날려 타격을 가하는 것이 비행무기이다.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적당한 크기와 무게를 지닌 나뭇가지는 인류 최초의 원시적 충격무기였으며, 인간이 적당한 거리에서 던질 수 있는 정도의 돌은 원시적 비행무기였다. 인간의 지혜와 생활경험이 축적되어 감에 따라서 뾰족한 예각의 돌이 보다 큰 비행무기로서의 성능을 나타내게 되며, 나뭇가지 끝에 단단하고 뾰족한 물질을 부착시키면 더욱 치명적인 살상효과가 나타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멀리 날아가서 불의에 살상효과를 주는 무기 즉, 활은 고대인들에게 보다 안전하고 확실한 수렵을 가능하게 하였으며, 전투시에는 승리의 확률을 높여 주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적당히 발달된 산림과 구릉 및 고지에는 천혜적으로 사냥하기에 알맞은 여러 종류의 짐승들이 서식하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사람보다도 그 행동이 민첩한 이들 짐승을 사냥하기 위해서는 비교적 원거리에서 살상할 수 있는 무기 즉 활의 사용이 편리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는 고대로 부터 궁시(弓矢)가 크게 발달하여 왔으며, 이는 곧 군사들의 주무기로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전국 각지에서 발견되는 타제석촉(打製石鏃)이나 마제석촉(磨製石鏃)은 이를 사용하였던 화살과 활이 일찍부터 존재했음을 입증해 주고 있다. 화살촉이 많이 발견되면서도 활과 화살이 발견되지 않는 것은 이것들의 재질이 주로 목재였으므로 오랜 세월을 지나는 동안 완전히 썩어 없어지고 말았기 때문이다. 중국의 옛 기록을 보면 우리나라의 고대인들은 활과 칼 . 창으로 무장하였으며, 특히 보병전투에 능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활은 일찍부터 주변에 맹위를 떨쳐 조선을 지칭하는 동이(東夷)의 이(夷)는 곧 큰 활(大弓)을 뜻하는 것이었다. 활과 칼 그리고 창은 화약병기가 출현하기 전까지는 전투에서의 주무기로서 그 위치를 한 번도 빼앗긴 적이 없었다. 그러나 현재의 우리들에게 보다 큰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은 화약병기의 출현 이후의 전투 양상이나 무기의 발달과정이다. ~~~~~~~~~~~~~~~~~~~~~~~~~~~~~~~~~~~~~~~~~~~~~~~~~~~~~~~~~~~~~~~~~~~~~~~~~~~~ 우리나라의 화기발달사 - 2 화약의 자체 생산 일찍부터 위정자(爲政者)들은 전투에서의 화공(火攻)의 효과를 크게 인식하여 방화(放火)의 목적으로 가연성 물질을 전투목적에 사용하는 방법을 개발하여 왔다. 견고한 적의 요새(要塞), 또는 집결된 적의 병마(兵馬)에 풍향을 이용하여 화공하는 방법은 우리나라에서도 예로부터 널리 사용되어 왔으며, 화살 끝에 가연성 물질을 부착하여 적진에 날려 보내는 화공법도 흔히 사용되어 왔다. 그러나 이러한 화공법은 단순한 연소효과를 거둘 수 있을 뿐 파괴효과는 적었다. 연소효과와 더불어 파괴효과를 거둘 수 있는 무기의 개발은 위정자들의 오랜 꿈이었다. 비행무기인 돌의 경우에도 돌이 가하는 단순한 충격효과보다는 파괴력이 수반되는 보다 강력한 충격을 줄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하는 탐구심이 지속되어 온 것이다. 폭발력과 가연성을 지니며 폭발력을 이용하여 공격적 물질을 보다 멀리 날려 보낼 수 있는 물질 즉, 화약의 제조에 인류는 역사의 많은 시간을 소비하였다. 중국의 송대(宋代)에는 기원 10세기에서부터 13세기 후반에 걸쳐 화약을 제조 하여 이를 이용한 화기를 실용의 단계까지 끌어 올려놓았다. 초기의 화약의 제조와 화기의 사용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화약 중에서도 주요 성분의 하나인 염초의 제조는 폭발의 위험을 극복해야 하는 기술을 필요로 하였으며, 그때까지 유치한 단계에 머물러 있던 화기 주조술은 화약의 폭발력을 감내할 만큼 견고한 화기를 만들어 내지 못하였던 것이다. 포신은 자주 파열되었으며 사용자의 희생이 뒤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기의 음향 효과, 즉 화약이 폭발할 때의 굉음이 적의 인마(人馬)에게 주는 충격이 컸고, 또 인력에 의존하는 재래의 궁시에 비해 살상효과가 매우 컸기 때문에 이 화포의 발사시에 일어나는 위험을 감소시키려는 노력이 꾸준히 경주되었다. 화기의 사용은 화약의 존재가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14세기 중엽에 와서야 중국으로부터 전래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숙종 9년 (1104)에 고려가 북쪽의 여진을 대규모로 정벌하였는데, 이때 발화대(發火隊)라는 특수부대가 편성 운용 되었다. 발화대가 재래식 화공부대인지, 혹은 화기를 장비한 부대였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당시 중국대륙을 진척시키고 있던 몽고군(蒙古軍)이 이미 화기를 사용하였고, 이들 몽고군과의 교섭이 일찍부터 이루어지고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고려인들은 적어도 화기에 대한 인식이 있었음이 확실해 보인다. 고려가 보다 확실하게 화기를 사용한 시기는 [고려사(高麗史)]에 잘 나타나 있다. 공민왕 5년(1356) 9월 고려의 중신들은 서북면방어군을 사열하고, 총통(銃筒) 즉 화기를 이용하여 화살을 사격했다는 기록을 남겨 놓고 있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늦어도 14세기 후반부터는 화기를 제작하여 실전에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화기의 사용이 곧 화약의 자체생산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기술수준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동양권은 이미 금속활자 문화의 단계에 있었으므로 화기의 주조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으나 문제는 화약을 어떻게 제조하느냐가 관건이었다. 화기의 효능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던 중국인들은 오랫동안 화약의 제조법을 극비에 붙여 그 기술의 국외 유출을 엄격히 통제 하였다. 이는 중국이 주변국가보다도 우세한 무기체계를 유지하려는 데서 나타난 현상이었다. 화약의 성분인 유황, 목탄, 염초의 세 가지 중 유황과 목탄은 비교적 쉽게 얻을 수 있었지만 염초만은 화학적 기술로써 제조할 수밖에 없었다. 실로 화약의 제조는 이 염초의 제조 여하에 그 열쇠가 달려 있었다. 이후 중국대륙이 원과 명의 교체기를 맞이하여 화약제조기술에 대한 감시가 소홀해지자 그틈을 타서 우리나라는 화약의 제조법을 습득할 수 있게 되었다. 염초의 제조법을 알아내기 위하여 여러 사람의 노력이 경주되었지만 최초로 실용성있는 염초의 제조법을 습득한 사람은 최무선(崔茂宣)이었다. 최무선은 그가 제조한 화약을 직접 시험하여 자신을 얻게 되자 조정에 건의하여 화통도감(火통都監) 이라는 화기 제조기관을 설치하여 그 업무를 주관하였다. 화통도감의 설치는 곧 고려가 화약의 자체 생산, 그것도 대량생산체제를 갖추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써, 고려는 동양권에서는 중국에 이어 두 번째의 화기 보유국으로 등장한 것이다. 중국처럼 고려에서도 화약의 제조법에 관해서는 각별한 보안조치를 하였다. 화약장이라는 화약제조 기술자는 국가가 관리하였으며, 특히 적대국인 일본이나 여진으로의 유출을 예방하기 위하여 여러가지 조치가 행하여졌다 ~~~~~~~~~~~~~~~~~~~~~~~~~~~~~~~~~~~~~~~~~~~~~~~~~~~~~~~~~~~~~~~~~~~~~~~~~~~~~ 우리나라의 화기발달사 -3 화약의 제조 화약의 자체 생산이 중세의 전술을 하루 아침에 변모시키고 화기를 이용한 새로운 전투나 전술의 양식이 생겨나 이것이 완전한 승리를 가져다주었다고 생각할 수는 없는 것이다. 화기가 효과적인 보병의 통상 병기로 채택되고 더 나아가서는 보병의 전투를 지원하는 오늘날의 포병과 같은 역할을 수행하기에 이르기까지는 장구한 세월이 소요되었다. 이와 같은 현상은 화약병기의 발달이 그 사회의 일반적인 산업수준과 공업기술 수준에 따라 서서히 진행될 수밖에 없었으며, 초기에는 극히 유치한 수공업적 기술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약병기의 개발은 끈질기게 추구되었는 바 그 이유는 활과 창같은 재래식 무기와는 비교도 안되는 살상효과를 발휘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려 우왕(禑王) 3년(1377) 10월 최무선의 건의에 의해 화통도감(火통都監)이 설치됨으로써 우리나라는 화약과 더불어 화약병기의 자체 생산단계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고려가 화통도감을 설치한 것은 왜구의 창궐을 격멸하려는 의지와 함께 국가기관으로서 화약병기 제조기술의 보안을 유지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세계에서 최초로 금속활자를 주조하는 등 선진적 주조기술을 보유하고 있던 고려로서는 화약병기의 생산에 그리 큰 어려움은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고려는 단시일내에 화통도감에서 대장군(大將軍),이장군(二將軍),삼장군(三將軍),육화석포 (六花石砲),화포(火砲),신포(信砲),화통(火筒),화전(火箭),철령전(鐵翎箭),피령전 (皮翎箭),철탄자(鐵彈子),오룡전(五龍箭),유화(柳花),주화(走火),촉천화(燭天火) 등 18종의 화기를 제작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들 각종 화기들이 어떤 제원과 성능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현재로서는 명확히 밝힐 수는 없지만 각종 전술목적에 적합한 다양한 화기의 제조에 주력하였던 것 만은 확실하다. 또한 화통도감이 설치된 후 불과 6개월만에 비록 소규모이기는 하지만 화통방사군(火통放射軍)이 편성되었는데, 화약병기를 사용하는 부대의 출현은 곧 화약병기가 재빨리 전술적 목적에 이용되었음을 증명해주고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화약병기의 크기는 대형으로부터 소형으로 발전했는데 그 이유는 화약의 폭발력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포신(砲身)이 육중할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화약병기도 커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고려의 경우에도 화기는 우선 크고 육중하게 제조되었다. ~~~~~~~~~~~~~~~~~~~~~~~~~~~~~~~~~~~~~~~~~~~~~~~~~~~~~~~~~~~~~~~~~~~~~~~~~~~~ 우리나라의 화기(火器) 발달사 -4 새로운 형태의 해전 화약의 폭발력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화기가 부득이 육중하고 크게 제조될 수밖에 없었기때문에 초기에는 주로 이동의 필요성이 적은 고정포로서 요새(要塞)나 성곽 (城郭)의 방어에 사용되었다. 산지가 많은 우리나라의 자연적 조건은 이러한 경향을 더욱 촉진시켰다. 그러나 해상의 경우 크고 무거운 화기도 일단 선박에 거치하면 선박의 이동에 따라서 자연히 기동성을 보유하게 된다. 지상 전투에서 그다지 효용성이 없던 대형화포도 해전에서는 훌륭한 성능을 발휘할 수 있었다. 특히 당시의 군선(軍船)은 모두 나무로 이루어진 목선(木船)이기 때문에 포탄으로 쉽게 파괴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화포를 거치한 군선의 등장은 종래의 해전(海戰)의 형태를 획기적으로 변화 시켰다. 종래의 해전에서는 원거리에서 적선을 제압할 공격수단의 미비로 인해 적선에 접근하여 전투원이 적선으로 돌입한 후 백병전(白兵戰)을 전개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선상(船上) 백병전의 성공률은 매우 낮은 것으로써 비록 승리를 얻더라도 피차간에 막대한 희생을 치러야 했다. 고려말 왜구(倭寇)는 거의 한반도의 모든 해안에 걸쳐 창궐하였다. 그 당시 고려는 이들 왜구를 해상에서 격멸하지 못하고 연해지방에 20~30리 혹은 50~60리 간격으로 소규모 방어기지를 구축하여 왜구가 상륙한 후 격퇴하는 방어체제를 유지하여 왔다. 그러나 방어기지의 편성 자체가 모든 해안지방을 망라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군사들의 훈련마저 부족하여 고전을 면치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왜구는 이러한 고려의 허술한 연안 방어체제를 교묘히 이용하였다. 규모가 큰 왜구는 대선단(大船團)을 구성하여 연해를 배회하다가 불시에 기습상륙하여 방어 기지를 수비하고 있던 고려군을 격파한 다음 각종 물자를 약탈하고, 고려군의 조직적인 반격이 개시되기 이전에 재빨리 승선하여 도주하였다. 반대로 소규모의 왜구일 경우에는 은밀히 정찰병을 상륙시켜 미리 약탈 대상을 선정해 놓았다가 기습 상륙하여 약탈을 자행한 후 고려군의 출동 이전에 신속히 철수하는 침략방법을 썼다. 따라서 언제 어느 지점에 상륙할 지 모르는 왜구를 방어하는데 있어서는 무엇 보다도 그들 선단을 해상에서 격멸할 수 있는 전투수단의 개발이 필요하였으며, 화약병기의 출현은 이러한 고려의 시대적 요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었다. 고려는 화약의 자체 제조에 성공하자 화약병기를 장비한 포왜선(捕倭船)을 건조 하였다. 군선에 장비한 화기는 아직 그 성능이 유치한 단계이기는 하였으나 적어도 200보 내외의 거리를 두고 왜선을 공격할 수 있었다. 명중률이 극히 낮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화기는 집결중인 대선단에 대한 공격에는 매우 효과적이었다. 고려 우왕 6년(1380) 8월 왜구가 500여척의 대선단을 금강 하구에 집결, 정박시킨 후 상륙하여 각지를 침범하고 있는 동안 화기를 장비한 고려의 포왜선(捕倭船)이 적의 선단을 기습 공격하여 거의 전멸시킨 것은 바로 그 일례(一例)라 할 수 있다. 해전에서 화기의 이용은 수세적이었던 고려의 방어 전략을 공세적으로 변화 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그리하여 비록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고려는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를 직접 정벌할 계획까지 추진하다가 중단된 일도 있었다. ~~~~~~~~~~~~~~~~~~~~~~~~~~~~~~~~~~~~~~~~~~~~~~~~~~~~~~~~~~~~~~~~~~~~~~~~~~~~ 우리나라의 화기(火器) 발달사 - 5 화기의 지상군 이용 고려말 급진적으로 발전하던 화약병기는 1392년 조선왕조가 건국된 이후 10여년 간은 일시적으로 발전 추세가 정지되었는데, 이는 조선 건국이후 왕권이 확립되지 못하여 정치적으로 불안정 했었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화기가 반대세력의 군사적 저항에 악용될 것을 우려하여 현상유지에만 치중함으로써 새로운 개발에 소극적인 정책을 편 데에 있는 것 같다. 화기는 왕권이 어느 정도 안정된 태종 때부터 다시 개발되기 시작했으며, 그 업무를 주관하여 큰 성과를 거둔 사람이 최무선의 손자인 최해산(崔海山)이었다. 태종 17년(1417) 화약의 제조와 그 성능의 개량을 주관할 독립적 관청으로서 화약 제조청(火藥製造廳 ; 일명 火藥庫)이 설치 되었으며, 종래 주로 화살(箭)을 쏘던 화기는 돌로 만든 탄환이나 철제 탄환을 사격할 수 있도록 개량하여 나갔다. 또한 동시에 수십 개의 화살을 발사할 수 있는 장치인 화차도 개발하였으며, 개국이래 운영해 오던 화통군에 대하여 특별한 정치적 배려가 시도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즉위초의 화약 6근4냥, 화통 200여 정의 상태에서 태종(太宗) 15년 7월에는 화약 6,980여 근, 화통 13,000여 정을 보유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때의 화기는 전부가 동철로 주조되었으며, 사거리는 대체로 200 ~ 250보에 불과한 것 이었다. 태종의 뒤를 이은 세종도 적극적으로 화기의 개발에 주력하였는데 특히 지상 전투에서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화기의 개발에 노력하였다. 이러한 세종의 시책은 여진이 점거하고 있던 북쪽 변경의 수복을 위한 준비작업의 하나이기도 하였다. 평안도와 함경도의 산악과 삼림이 많은 지형적 조건을 교묘히 이용하여 상습적인 침입을 반복하는 여진을 제압하기 위해서는 휴대용 화기와 더불어 박격포와 같은 성능을 지닌 곡사포, 그리고 조기에 경보를 전달할 수 있는 신호용 화기 등이 필요하였다. 또한 화기의 성능을 향상시키기 위해 화약 자체의 성능을 개량함은 물론 화기의 주조술을 향상시켜야만 하였다. 세종 15년(1443) 9월에 세종은 한 번의 사격으로 여러 발의 화살을 쏠 수 있는 이른바 '일발다전법(一發多箭法)'의 개발에 성공하였다. 이는 4군 6진의 개척, 왜구에 대한 정벌 등에 따른 병기의 수요증대로 화기의 발달이 크게 촉진되었기 때문이다. 화기의 발달이 가장 높았던 시기는 세종 27년부터 30년 사이이다. 당시 개량의 주안점은 화약의 소비량을 적게 하고, 크고 무거워서 사용이 불편했던 단점을 줄여 사거리를 倍이상으로 연장시킴과 아울러 '일발다전법'을 보다 완전히 향상시킨데 있었다. 이때의 화약병기의 개량 결과는 다음과 같다. 표 . 세종대의 화기 개량 결과(1보=6자=125cm) 화기명칭 개 량 전 개 량 후 사거리(射距離) 일발일전법(一發一箭時) 화약 일발사전시(一發四箭時) 천자총통 400-500보 1300보 극소 1000 보 지자총통 500보 800-900보 종전과 동일 600-700보 황자총통 500보 800보 500 보 가자화포 200-300보 600보 400 보 세화포 200보 500보 이 당시에 사용된 화기는 천자총통(天字銃筒), 지자총통(地字銃筒), 현자총통 (玄字銃筒), 황자총통(黃字銃筒), 가자화포(架字火砲), 세화포(細火砲), 총통완구 (銃筒碗口), 장군화통(將軍火筒), 일총통(一銃筒), 이총통(二銃筒), 삼총통(三銃筒) 사전총통(四箭銃筒), 팔전총통(八箭銃筒), 세총통(細銃筒), 신기전(神器箭), 총통 완구(銃筒碗口) 등이 있다. 여기서 총통완구가 가장 큰 화기이고, 천자총통, 지자 총통, 현자총통, 황자총통, 장군화통, 일총통 등은 무겁고 큰 대포류이며, 그 이하는 가볍고 작은 휴대용 화기인 듯하다. 이렇듯 세종은 화기개발을 끈기있고 계획적으로 추진해 나갔으며, 화약과 화기 제조에 필요한 재료를 일본 등지에서 대량으로 구입하기도 하였다. 이때 개발한 화기 가운데 특히 주목을 끄는 것은 기병용 휴대화기인 세총통이다. 이 세총통은 지금의 권총과 비슷한 화기로 어린애와 여자도 사격할 수 있을 정도로 가볍고 작아서, 기병이 활이나 창과 더불어 이를 휴대함으로써 전투효과를 크게 증진시킬 수 있었다. 이와 함께 세종은 화기운용부대를 증편하고 화기의 발사술을 개량하였는데, 세종 12년 6월에는 각도의 본영(本營)과 포진(浦鎭)에 여러명의 화포방사군(火砲放射軍)을 반드시 두게 하였으며, 변경을 지키는 군사에게 화기사용법을 적극적으로 보급케 하였다. 이후 세종 15년 1월에는 화기의 발사술이 개량되었으며, 따라서 서북방면 에서의 화기 이용은 날로 증대되어 갔다. 세종 17년 4월 평안도에 900문, 함길도에 750문 등 모두 1650문의 화포와 방패를 배치키로 하였으며, 이를 각기 지방에서 만들게 하되 군기감(軍器監)에서 화포의 규격을 통일코자 몇 개의 화포와 전(箭) 및 방패를 견본으로 제작하여 공급하기로 하였다. 또한 총통을 운용하는 화포군 (火砲軍)을 설치하고 이를 계속 증강하였는데, 세종 18년 11월에는 여연 등 여섯 곳에 배치된 화포군의 군사가 이미 524명에 달하는 등 화포군의 운영이 자리잡게 되었던 것이다. 세종 당시의 각 읍진의 화포군 정수는 15 - 30명 정도로, 보병중에서 30 ~ 50%를 차지한 것으로 보인다. 화포군은 변방만이 아니고 중앙에도 설치되어 있었고 남도 각 관에도 배치 운용되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당시의 화기는 화약과 탄환을 총구 쪽에서 장전한 다음 심지에 불을 직접 점화하여 발사하고, 다음에는 다시 이러한 조작을 반복해야 하였다. 따라서 사격속도가 느릴 뿐만 아니라 일단 발사한 후 다음 발사를 준비하는 동안 전투원은 적의 공격으로부터 무방비 상태에 놓이게 되는 취약점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취약점은 세종대에 사격하는 사람과 장전하는 사람을 분리함으로써 해결되었다. 세종 23년 6월에 이루어진 화기 사격술의 개혁은, 사수(射手)는 사격만 맡고 다른 한 사람은 많은 시전(矢箭)을 가지고 사수를 따라 다니면서 시전을 연속 보급토록 하는 것이었다. 사수와 시전 보급인을 구별함으로써 이제까지 한 사람 단위로 사격을 했을 때에 지니고 있던 몇 개의 화살을 발사하고 나면 속수무책이 되어 버리는 결점을 보완하려고 하였다. 사격하는 사람과 장전하는 사람이 한 조가 되어 발사속도를 증가시키는 방법은 비단 보병뿐만 아니라 기병에게도 적용되었다. 즉 기병의 경우 사격하는 사람의 뒤에 많은 양의 화살과 탄환 그리고 여분의 화기를 휴대한 사람이 뒤따라 다니면서, 장전된 화기를 사격하는 사람에게 쉴 새 없이 전달하도록 한 것이었다. 이러한 방안은 이미 동왕 15년부터 시작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일단락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세종 27년 3월까지만 해도 그 사용이 불편해서 자칫하면 궁시보다 우위 (劣位)에 서는 형편이었다. 그리고 이와 같이 사격하는 사람과 장전하는 사람을 한 개의 사격조로 편성하는 개념은 전투원의 과도한 수요의 증가를 가져왔다. 따라서 세종 29년 11월에 이르러 총통군(銃筒軍)을 오(伍) 단위로 편성하여 사수와 장전수로 분리하여 운영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사격술의 대개혁을 시도 하였다. 즉 화기를 사격하는 총통군 5명을 1오(伍)로 편성하여 그중 4명은 사격만 담당하고 나머지 1명에게는 장전만 맡게 하여 계속 보급토록 하였고, 또 이총통, 삼총통, 팔전총통, 사전총통, 세총통의 다섯가지 총통은 격목과 화약량이 각기 달라 혼용하기 쉽기 때문에 한 오내에서는 모두 같은 총통을 사용하여 이총통오 (二銃筒伍), 팔전총통오(八箭銃筒伍) 등으로 구분하여 운영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한 오내에서 장전수는 장약된 많은 총통과 장약에 필요한 여러가지 기구를 말에 싣고 따라 다니면서 보급하고 사수는 총통 외에 궁시, 도검 등을 가지고 다니도록 하여 사수와 장전수가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유지하도록 하였다. 이와 같은 노력으로 15세기 전반기에 이르러서는 지상전투에 화기의 이용이 가능하게 됨으로써 우리나라의 전술은 비로소 이때부터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 우리나라의 화기(火器) 발달사 -6 화기의 상대적 낙후 이렇듯 15세기 전반 세종대에 이르러 비약적으로 발전했던 우리나라 화기의 발전 추세는 문종이 즉위한 후에도 그대로 계승되었다. 문종은 즉위년 9월, 화약의 확보를 위해 화약발달의 중요한 요소인 염초자취술 (焰硝煮取術)을 크게 개량하였으며, 각도에 책임 제조량을 할당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또 이를 토대로 문종 1년(1451) 1월에는 화차(火車)와 같은 다연장포를 개발하여 이를 같은 해 3월에 130량, 6월에 전국 각지의 28개영에 337량, 8월에는 32개영에 357량을 배치하여 실전에서 운용케 하였다. 화차는 신기전기화차(神機箭機火車)와 총통기화차(銃筒機火車) 두 종류가 있는데, 신기전기 화차는 중신기전 100발을 장착하여 단발 내지는 연발로 발사할 수 있는 일종의 다연장 로케트식 화기이고, 총통기화차는 사전총통 50자루가 장착되어 있어 세전 200발을 동시에 발사할 수 있는 화기이다. 이후 이들 화차는 계속 사용되었으며 특히 임진왜란 때에 권율장군이 행주산성에서 이를 사용하여 일본군을 격퇴하고 승리하는데 큰 효과를 보았다. 그러나 15세기 후반 즉 단종대부터 우리나라의 화기발달은 정체현상을 나타내었으며, 이러한 현상은 당시의 혼란된 국내 정치정세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결과이기도 하였다. 특히,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세조는 화기의 개발에 매우 소극적이었는데, 그 궁극적인 이유는 그의 반대세력에 의해 화기가 군사적인 반란에 이용될 것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화기의 발달은 현상을 유지하는 선에서 오랜 기간 침체의 국면을 벗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또 세조대의 소극적 화기개발은 부대의 편제에도 영향을 주어 총통군(銃筒軍)이라는 화기부대 마저 해산시키는 조치를 취하였으며, 이러한 총통군의 해체는 곧 화기의 전술적 운용을 퇴보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은 다행히도 세조 13년에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겪으면서 바뀌어져 화기의 그 중요성을 새로이 인식하게 되었다. 이시애의 난이 일어나자 이를 진압하기 위해 다수의 완구, 화차, 화전 등이 투입되었으며 여기서 큰 효과를 보았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개인 소지용 화약병기인 신제총통(新製銃筒)이 개발되기도 하였다. 세조에 이어 성종때에는 북쪽의 야인(野人)과 남쪽의 왜구(倭寇) 도발에 맞서기 위해 화기에 대한 관심이 증가되었다. 그 결과 육총통(六銃筒), 신제화기(新製火器), 후지화포(厚紙火砲), 주자총통(宙字銃筒), 측자총통(徐字銃筒) 등이 새로이 개발되었다. 육총통은 실전에 가장 유용했었다고 나와 있으나 그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가 없다. 신제화기는 신제총통과 같은 것인 듯 하고, 후지화포는 두꺼운 종이로 만든 발화(發火), 지화(地火), 지신포(地信砲) 등 화약병기의 총칭인 듯 짐작되는데 그 우수성이 명나라에까지 알려졌다고 한다. 그리고 주자총통과 측자총통은 주로 화살(箭)을 사격하는 소형화기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중종때에는 중종 10년(1515) 삼포왜란, 23년 야인의 만포진 침범, 39년 사량진왜변 등 야인과 왜구의 침구가 많아져 화기의 이용도가 높아짐에 따라 약간의 새로운 화기가 개발되기도 하였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서후(徐厚)가 창제한 벽력포(霹靂砲)이다. 벽력포는 해전에 유용하게 사용되었는데 중종 16년 1월부터 제작하기 시작하여 다음해 3월 군기시에서 완성되었다. 또 하나는 신기전총통(神器箭銃筒)으로 중종 17년 6월에 전라도(全羅道)의 노근도에서 왜선과 전투하면서 이를 사용했다고 한다. 중종 때에는 위에서 서술한 몇가지의 화기가 새로이 개발되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화기의 개량과 주조가 크게 진전된 시기라고는 볼 수 없다. 이러한 상황은 화약 제조기술에 대해 보안만 유지한다면 우리나라는 계속해서 주변 적대국(敵對國)에 비하여 무기체계상의 우위를 유지해 나갈 수 있으리라는 낙관론적인 태도에서 연유한 것이었다. 아울러 화약제조법에 대한 국가적 통제만은 더욱 강화되었다. 이렇듯 우리나라가 정치적 이유로 화기 개발에 소극적 태도를 유지하는 동안에 여진(女眞)과 일본(日本)은 화기의 개발에 주력하고 있었다. 특히 유구국(琉球國)과 같은 경우에는 화기의 기술이 거의 우리나라와 비슷한 수준에 이르렀으며, 이와 같은 화기 제조기술의 보급은 우리나라가 아무리 보안을 유지하였다 하더라도 일본이나 여진은 또 다른 경로를 통해서 기술을 습득할 수 있었던 것이다. 16세기 중엽에 이르러 일본은 마침내 화기기술을 습득하기에 이르렀다. 일본은 우리나라보다도 약 2세기나 늦게 화기기술을 개발하였으나 이를 급속도로 발전 시키는데 성공하였다. 우리나라가 화기 기술의 개량을 자극할 만한 외부로부터의 큰 충격이 없는 가운데 세월을 보내고 있는 동안 그들은 국내에서 끊임없이 내전을 계속하고 있었으므로 화기의 개량에 모두가 혈안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왜구는 그때부터 화기를 장비한 대선단으로 우리나라를 침범하기 시작하였으며, 또 그들은 이미 중국으로부터 새로운 조선술을 배워 우리의 재래식 화포로는 파괴할 수 없는 견고한 배를 만들고 있었다. 1555년 을묘왜변(乙卯倭變)은 우리의 화기가 왜구의 침입을 저지, 격퇴시키기에는 한계성이 있음을 증명해 준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을묘왜변은 명종 10년 5월 11일 왜구가 70여 척의 선단을 이끌고 전라도 영암군 달양포에 침입함으로써 시작되었다. 당시 왜구는 견고한 대형 선박과 철환화기(鐵丸火器)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기존의 화력으로는 이를 제압하기가 용이하지 않았다. 당시 현지를 돌아 본 선전관 이세현 (李世賢)이, 왜선을 결정적으로 격퇴시킬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천자총통과 지자총통이 없어서 그대로 놓쳐 버렸다고 하고, 이에 왜선을 부수는데 적합한 천자총통, 지자총통과 같은 대형총통을 포함한 각종 화기를 시급히 주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현지의 철산지에서 자체적으로 총통을 주조하였으며, 이를 통해 왜인들을 제압할 수 있었다. 이렇듯 명종때에는 화기 주조와 개발이 많은 성과를 거두었는데 그 중 대형 총통의 발달이 가장 특징적인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을묘왜변이후 조선은 니탕개의 난이 일어나게 되는 선조 16년(1583)까지 이른바 태평의 세월을 보내고, 을묘왜변을 계기로 제고되었던 군비 강화에 대한 인식마저도 날로 쇠퇴하여 국방체제는 다시 해이해졌다. 그리하여 16세기 후반부터 우리나라는 남쪽의 왜구 침범과 더불어 북쪽으로는 여진의 위협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른바 니탕개의 난이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약 10년전인 1583년 2월에 일어났던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조선군은 온성부사 신립 (申砬)장군의 분전과 전라,경상병사를 역임한 바 있는 김지(金지)가 개발한 승자총통(勝字銃筒)이라는 휴대용 화기의 위력에 힘입어 적을 토벌할 수 있었다. 승자총통은 한번에 철환 15개와 피령목전(皮翎木箭)을 발사하며 사거리는 600보인데, 경희대박물관의 [소승자총통]의 제조년대(1577)와 육군박물관의 [승자총통]의 제조연대(1581)로 보아 1577년 이전에 개발된 듯 하다. 이 화기는 선조 21년(1588) 정월에 북병사인 이일(李鎰)장군이 여진의 시전부락을 소탕하는 데에도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이렇듯 승자총통은 종래의 소화기보다는 좀더 성능을 개량하여 장전과 휴대가 간편해져 화기를 보유하지 못한 야인들의 격퇴에는 큰 위력을 발휘하였으나, 여전히 지화식점화법(持火式點火法)에 의해 사격해야 하고 또 주철로 주조하였기 때문에 사격간에 총열이 자주 파열되는 결점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는 승자총통을 과신하게 되고, 이같은 자만은 여진은 물론 일본이 침입해 오더라도 이러한 무기체계를 갖추고 있는 한 이들을 능히 격퇴할 수 있을 것이라는 낙관론에 빠지게 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이렇듯 우리나라는 북방의 야인과 남방 왜구의 침구를 겪으면서 화기의 필요성을 더욱 절감하게 되었고 그때마다 다량의 화기 주조와 개발에 힘썼던 것이다. 그러나 대체로 밖으로는 우리나라의 전 국토를 뒤흔들어 놓을만한 대전란이 없었고, 안으로는 대외적인 군국의 기밀 유지와 정변시의 화기 사용에 대한 불안감에 따른 억제책, 그리고 장래의 발전을 도모한다는 기본적이면서도 계속적인 과학기술 개발의 의욕이 없었던 탓으로 화기의 발달은 발전과 정체적인 상태를 되풀이 하고 있었다. ~~~~~~~~~~~~~~~~~~~~~~~~~~~~~~~~~~~~~~~~~~~~~~~~~~~~~~~~~~~~~~~~~~~~~~~~~~ 우리나라의 화기(火器) 발달사 -7 임진왜란과 화기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우리나라는 중앙의 군기시(軍器寺)에 27,000여 근의 화약과 천자총통, 지자총통, 현자총통, 황자총통 등의 대형 화포, 그리고 승자총통, 차승자총통, 대승자총통, 중승자총통, 소승자총통, 별승자총통, 영자총통, 측자총통 등의 휴대용 화기를 보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화기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는 전쟁 초기 일본군에게 연패를 거듭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는 군기시에 비축된 화기는 전쟁발발 직후 왕의 피난에 격분한 백성들의 분소(焚燒)로 하루아침에 날아가 버렸기 때문에 화기가 부족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지방에서도 어느 정도는 비슷했으리라 짐작된다. 특히 지방에서는 원래 비축된 화기가 많지도 않았고, 지방관이 적을 만나 본영(本營)을 굳게 지키면서 항전한 경우가 적었던 관계로 화기가 제대로 쓰여지지 못했을 것이다. 다만 전라 좌수영 등 수군과 일본군의 공격이 미치지 못했던 청천강 이북의 안주, 영변, 의주 등지 에서는 화차를 비롯한 각종 화기가 어느 정도 비축되어 있어서 이를 적극적으로 이용하였다. 둘째는 화기의 성능문제이다. 당시 우리나라가 사용하던 휴대하였던 화기는 승자총통 계열의 화기이다. 선조때 김지(金지)가 육전용으로 개발한 승자총통은 차승자총통, 소승자총통, 대승자총통, 중승자총통, 별승자총통 등으로 계속하여 연구 개발되었으며 그 제원도 다양했는데 대체로 무게는 1.5~4kg, 구경 12~30mm, 길이는 60~76.5cm 정도로써 종래의 소화기 보다 총신이 길었으며, 또 3개에서 15개의 탄환을 발사하고 사거리는 600보 정도였다. 특히 별승자총통은 승자총통 계열의 화기 중에서 총신이 가장 긴 형태로 되어 있어 탄환 속도가 빠르고 사거리도 길었으며, 4개의 탄환을 사격하여 임진왜란 당시 가장 많이 사용되었던 화기이다. 최근에 전남 여천 앞바다에서 많이 인양된 별승자총통은 발견장소가 임진왜란때의 해전 지역와 근접한 지역이기 때문에 당시 조선 수군이 해전에서 사용하다가 전투 도중에 물 속으로 빠뜨린 것으로 추정된다. 이상과 같이 조선군이 장비한 화기는 종류도 다양하고 사거리도 비교적 길었다. 그러나 화기 발달의 초기단계인 지화식(指火式) 화기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함으로써 정확한 조준사격이 불가능하였으며 따라서 명중률도 낮았다. 또한 총통의 규격이 통일되지 못함에 따라 제작 및 운용에 있어서 많은 혼동을 초래하였다. 이에 반해 일본군은 조총을 소지하고 있었다. 일본이 조총(鳥銃)을 입수하게 된 때는 1543년 8월 25일이다. 일본의 조총 전래 사실을 담고 있는 [철포기(鐵暑記)]에 의하면 당시 일본 구주(九州)에 속해있는 종자도(種子島)의 영주 종자도시요(種子島時堯)는 내항(來航)한 2명의 포르투갈 상인으로부터 2개의 조총을 구입하였으며, 이들에게서 화기의 제조방법과 화약의 배합 방법, 그리고 사격술을 전습(傳習)받았다. 종자도에서 조총의 제조가 성공하자 이것이 전국 각 지역로 보급되어 제작되기 시작했는데, 1544년에는 한해 동안에 600여 정이 제조되는 등 일본 전역에 보급되었다. 이와 함께 조총을 이용한 전술을 개발하고 이를 통해서 병사를 적극적으로 훈련 시킴으로써 전투에서의 활용도를 높였다. 이후 실제 전투를 통해서 조총의 효용 가치는 한층 더 빛을 발하여 보급은 더욱 활발해졌던 것이다. 당시의 조총은 대체로 구경이 15내지는 18㎜ 정도로 사거리가 보통 100m에서 150m 정도이나 전투에서는 50m를 적용하였으며, 수분에 1발 정도씩을 발사할 수 있었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조총은 화승식점화법(火繩式點火法)으로 사격하는 화기로서 우리나라 승자총통 계열의 화기에 비해 사격시 조작이 간편하고 명중률이 높은 수준이었다. 물론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년전인 1589년(선조22)에 일본 대마도(對馬島)의 종의지(宗義智)가 우리나라 정부에 2점을 진상(進上)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총의 성능에 놀라기는 하면서도 이를 이용하여 새로운 화기개발에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그리고 조선군이 일본군에 연패를 거듭했던 또 하나의 요인으로는 화기운용 전술의 부재로 조선군이 화기전술에 대해 전혀 대비하지 못했음을 들 수 있다. 당시 일본군은 대체로 기사와 보병으로 전투편제가 되어 있었고, 보병은 다시 조총병(鳥銃兵), 창병(槍兵), 궁병(弓兵)의 3개조로 구분되어 있었다. 임진왜란 때 벽제관 전투에 참가했던 입화종무세(立花宗茂勢)의 부대를 보면, 전투 주체인 조총병은 350명이고 창병은 640명, 궁병은 91명으로 조총병은 창병의 절반이었다. 이들 일본군은 다음과 같은 전술을 구사하였다. 즉 적과의 대치상태에서 먼저 조총병이 사격을 하고 난 후 2선으로 물러나 재장전을 하면, 이어서 궁병이 조총병의 사격장전 시간을 메꾸기 위해 활을 쏘았고, 그 후 조총병이 계속적으로 사격을 하여 적의 전열이 흐트러지면 창병이 뒤를 따라 보병의 후방에 위치해 있던 기사와 함께 돌격하여 백병전을 벌임으로써 전투의 승패를 결정지었던 것이다. 이는 원거리 무기인 총과 접전용 무기인 창을 효과적으로 배합 운용함으로써 전술적효과를 극대화한 것으로, 이를 위해서 병사들에게 매우 강도높은 훈련을 시켰다. 이에 반해 전쟁 초기 우리나라의 지휘관들은 일본군의 조총과 화기를 통한 전술에 대하여 정확한 인식을 갖고 있지 못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유성룡(柳成龍)도 [징비록(懲毖錄)]에서 '신립(申砬)이 충주에 도착했을 때 조령을 먼저 점거하고 길을 끼고서 50~60리 사이에 사수(射手), 포수(砲手)를 세워 공격하면 일본군도 쉽게 진격하지는 못했을 것이나, 이 곳을 버린 채 평야에서 우리나라 군사들은 활과 화살을 가진 기병으로 일본군의 장기인 조총 전술에 대항함으로써 패하였다'고 하여 전술 부재에 대해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당시 조선군의 장수들은 일본군의 전술을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에 대응할 만한 전술을 익히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우리나라가 임진왜란 초기에 일본군에게 육전(陸戰)에서 연패하였던 요인이다. 즉, 일본군이 소지한 조총의 성능이 월등하기도 했지만, 조총을 이용한 전술을 처음으로 경험한 조선군이 이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일본군은 비교적 많은 조총을 소지하지 않고서도 그들이 기대했던 이상으로 보다 월등한 공격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공격하여 왔으며,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군은 가지고 있던 화기조차 제대로 한 번 사용해 보지도 못한 채 무너졌던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해전에서는 우리나라가 연전 연승을 구가하였는데, 이는 조선 수군이 운용하던 거북선과 판옥선(板屋船)에 장착되어 있는 천자총통(天字銃筒), 지자총통(地字銃筒),현자총통(玄字銃筒),황자총통(黃字銃筒),별황자총통(別黃字銃筒 ) 등 화포의 성능이 매우 우수했기 때문이다. 다음은 당시 조선수군이 함선에 장착시킨 화포의 제원과 성능이다. 표 . 임진왜란 당시 화포의 성능 구분 천자총통 지자총통 현자총통 황자총통 별황자총통 구경 118mm 105mm 60mm 40mm 58mm 길이 136cm 89.5cm 83.8cm 50.4cm 89.5cm 발사물 대장군전 1 장군전 1 차대전 1 피령차중전 1 피령목전 1 조란탄 100 조란탄 200 조란탄 100 조란탄 40 조란탄 40 사거리 1200보 800보 800보 ~ 1500보 1100보 1000보 특히 별황자총통은 황자총통을 개량하여 만든 화포로, 총통의 약통뒤에 조정 손잡이를 부착시키고 총통의 중간부위에 포이(砲耳)가 달려 있어 삼각다리 형태의 받침대와 결합시켜 배의 갑판 등에 고정하여 상하 좌우로 쉽게 운용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따라서 일본 수군이 중소형선과 조총을 중심으로 하여 배의 현(舷)을 붙이고 백병전(白兵戰)을 편 반면 조선 수군은 대형 선박의 전후좌우에 장착된 각종 화포를 바탕으로 한 포전(砲戰)을 위주로 하였고, 조선군이 사용한 화포는 일본군의 조총에 비해 사거리가 월등히 길었기 때문에 접근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적을 공격할 수 있었으므로 육전과는 다르게 조선군이 절대적인 우위를 점할 수 있었던 것이다. ~~~~~~~~~~~~~~~~~~~~~~~~~~~~~~~~~~~~~~~~~~~~~~~~~~~~~~~~~~~~~~~~~~~~~~~~~~ 우리나라의 화기(火器) 발달사 -8 조선의 신무기 개발 조선군은 초기 전투의 경험을 토대로 피아(彼我) 화기의 성능상의 우열과 전술상의 차이를 비교적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이에 조선은 국난을 타개하기 위한 길은 일본과 명나라의 선진 화기를 도입하는 것이라고 판단하고 이를 위해 노력하였다. 선조 26년(1593) 2월 당시 의주에 있던 선조는 화포장(火砲匠)으로 하여금 조총을 시방(施放)하게 하였는데, 명군(明軍)의 주모(周某)라는 자가 우연히 이를 보고 자신에게 사람을 보내면 조총과 염초의 제조법을 지도해 주겠다고 제의하였다. 이에 선조는 비밀리에 그 사람과 접촉하여 기술을 배워오도록 하였다. 또 왜병 포로를 조총과 화약 제조장에 투입하는 것이 기술 전습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여 포로 중에서 흉폭하고 교활하여 다스리기 어려운 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조총, 염초 제조장에 투입하라는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이처럼 조선은 조총의 제조법을 알아내기 위해 부역 죄인을 심문하여 그 제조법의 전습 여부를 확인하고, 적으로부터 노획한 조총을 행재소(行在所)에 올려 보내게 하여 심사하는 한편, 항왜(降倭)를 동원하여 조총에 대한 기술을 알아내고 조총을 시험 제작하는 동시에, 명군을 통하여 보다 발전된 화기 제조술을 배우려고 시도하는 등 여러 가지 노력을 경주하였다. 이러한 노력들이 쌓인 결과 다음 달에는 마침내 조총의 제조기술을 전습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초에는 중앙에서뿐만이 아니라 지방의 감영(監營), 병영(兵營)에서도 조총을 제조하게 하였다. 이렇듯 중앙에서 훈련도감(訓練都監)의 무기생산 체제가 정비됨에 따라 지방의 무기제조 작업도 추진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는 지방군의 속오삼수제(束伍三手制)의 적용을 가능하게 하였다. 하지만 조총의 제조에는 몇 가지 난관이 있었다. 하나는 제작의 기술적인 문제로 조총의 총신 제조에 있어서 제조법이 교묘하여 제조가 쉽지 않았으며 제조된 조총의 성능도 낮았다. 또 하나는 조총의 재료인 철물이 부족하였고 재정이 궁핍하여 제조 되는 조총의 수량이 적었던 것이다. 이에 선조는 중앙의 숙달된 철공(鐵工) 5~6명을 뽑아 훈련도감에서 조총 제조법을 교육시킨 뒤, 황해, 충청 양도의 연해 각 군현 중 탄과 철이 풍부한 곳에 내려 보내 도회소(都會所)를 설치하여 조총 등의 화기를 제조토록 하였다. 이와 함께 지방에서의 조총 자체 조달과 상납을 적극 권장하였다. 그리하여 선조 27년 4월에는 조총을 자주 올려 보낸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의 노고를 치하하기 위해 조총을 가지고 상경한 그의 아들 원사웅(元士雄)에게 관직을 제수하기도 하였다. 한편 전화(戰禍)를 입지 않아서 비교적 재력이 충실한 전라도와 경상도의 병영과 수영에서는 장인들을 모아 조총을 제조하기도 하였다. [난중일기(亂中日記)]에 의하면 이순신(李舜臣)은 선조 26년 9월 14일 왜군의 조총을 모방하여 우수한 성능의 조총을 제조하는데 성공하였으며, [진주수성승첩장(晋州守成勝捷狀]에도 진주목사 김시민 (金時敏)이 진주성에서의 전투에 대비하여 170여 점의 조총과 화약을 제조하였다고 나와 있다. 또한 김성일(金誠一)도 산청의 지곡사에서, 호남지방에서 모은 숙련공을 통해서 정철(正鐵)을 가지고 조총을 제조하였다 한다. 이와 함께 구원병으로 들어온 명군이 사용하던 화기가 새롭게 도입되는데, 호준포. 불랑기.삼안총.백자총 등이 그것이다. 호준포(虎준砲)는 외부에 죽절을 두어 포신의 파열을 예방하고, 포신이 뒤로 퉁겨 나가는 것을 방지하는 장치를 하여 야전에서 운용하기에 편리하도록 개발한 화기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명군이 평양성 탈환전투에서 이를 처음 사용하여 효과를 보았는데, 이후 조선은 이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모방 제작하기에 이른다. 선조 26년(1593) 6월부터 호준포를 제작하게 하였는데, 이는 좁은 공간에서도 운용이 편리했기 때문에 전함 등에 탑재시켜 사용하였다. 특히 이순신장군은 노량대첩에서 이를 사용하여 일본군을 격퇴하였다. 삼안총(三眼銃)은 3개의 총열을 하나의 병부(柄部;손잡이 부분)에 결합시킨 다관식의 화기이며, 일종의 연발식 개념의 총으로 삼혈총으로도 칭한다. 그 후 조총의 제조기술이 까다로워 공급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제조가 용이한 삼안총을 대량으로 제조하여 조총의 수요를 메꾸었다. 불랑기(佛狼機)는 원래 15세기경부터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제조되어 함재포로서 많이 사용되었던 후장식(後裝式) 화포로, 16세기에 유럽의 상선들을 통하여 동양에 전래되었다. 우리나라에는 선조 26년(1593) 1월 초순 평양성 탈환전투에서 명군이 사용하면서부터 알려지게 되었다. 그 후 불랑기는 당제자모포(唐制子母砲)라고도 불리면서 제조되어 사용되었다. 특히 선조 28년 10월 비변사가 해상 통로를 차단할 좋은 계책으로써 대포와 불랑기 등의 화포를 거북선에 많이 장착시킬 것을 건의했음을 볼 때 해상 무기로서 효과가 컸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후 구한말까지 우리나라의 주요 화포로서 활용되게 된다. 백자총통(百子銃筒)은 1번의 사격시 다수의 탄환을 사격하는 화기로, 선조 27년 4월 이후부터 제조되어 사용되었다. 이상과 같이 우리나라는 전란을 극복하기 위해 많은 선진화기를 도입하여 제조 하였는데, 선조 29년(1595) 정월 비변사에서 전년도에 대소의 포 190여 점을 주조 하였다고 밝히고 있으며, 동년 6월 철을 생산하던 황해도 은율에서 28년 11월부터 29년 6월까지 조총 등의 화기 372점을 제조하였음을 보고하고 있는 데서도 잘 알 수 있다. ~~~~~~~~~~~~~~~~~~~~~~~~~~~~~~~~~~~~~~~~~~~~~~~~~~~~~~~~~~~~~~~~~~~~~~~~ 우리나라의 화기(火器) 발달사 -9 새로운 전술(절강병법)의 개발 한편 조선은 조총 등의 새로운 화기를 도입함과 동시에 이에 적합한 군사의 편제와 전술을 모색 하기에 이른다. 선조는 26년(1593) 2월 중앙과 지방의 군사들에게 조총을 학습하도록 하여, 조총 사격술을 과거 시험과목에 넣었고, 조총 3발을 사격하여 1발 이상 명중시킨 자를 선발 하였으며, 같은 해 6월에는 군기시로 하여금 서울에 와 있는 명나라의 참장 낙상지 (駱尙志)의 진지에 약간 명의 포수를 보내어 포술을 익히게 하였고, 다음 달에는 행재소의 무신 및 금군과 화포장에게 명군의 각종 화포를 비롯한 방패.낭선.창.검 등을 익히도록 하는 등 포수의 양성을 본격화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는 포수를 양성하여 자체 조총부대를 창설하려는 준비작업이었다. 그 후 8월 19일에는 유성룡(柳成龍)의 건의를 받아들여 훈련도감(訓練都監)을 설치 하여 장정을 선발하고, 여러 가지의 무예를 가르칠 것을 비변사에 지시하였으며 훈련도감의 '훈련사목(訓練事目)'을 반포하는 등 훈련도감의 창설을 본격화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같은 해 10월, 선조가 의주에서 귀경한 후부터 더욱 활발해져 같은 해 11월에는 [기효신서(紀效新書)]의 내용에 따라 도감의 편제를 정비하여 훈련도감에 좌 우영을 두었고, 훈련지사 이일(李鎰)과 조경(趙儆)으로 하여금 이를 분담하여 포수를 훈련케 함으로써 하나의 새로운 부대로서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선조 27년 2월 훈련도감은 임시기구이기는 하지만 하나의 어엿한 군영 으로 정식으로 발족하게 되었다. 훈련도감의 창설로 조선군의 전술은 종래의 궁시 위주에서 포(조총).살(창검) 위주로 바뀌게 되었으며, 이를 위하여 조총을 포함한 각종 화기의 개발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그리고 지방에서도 포수를 양성하고 속오군 (束伍軍)을 편성하기 위해 화기를 자체 생산하여 조달할 수 있도록 기존의 '훈련사목'에 그 내용을 추가하여 각 도의 감.병.수영 및 각 읍에 반포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같은 해 7월 3일에는 훈련도감이 서울에서 포수 600명을 양성하여 지방에 일부를 내려 보내고 330명만이 남아 있다고 보고하는 등 포수의 양성이 계속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포수의 양성이 그리 순조롭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포수의 양성을 더디게 했던 요인으로는 군량과 조총의 부족, 일부 위정자들의 훈련도감군의 전술적 효과에 대한 회의적 반응을 들 수 있다. 그러나 당시에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이 조총을 포함한 화기개발과 그 전술적 운용의 효과를 정확히 인식하였고, 따라서 선조의 지지를 받아 계속적으로 조총을 제작하고 포수의 양성을 추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 함께 포수의 양성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선조 26년 9월 25일 중국의 대왜방비책 (對倭防備策)의 교범이 되었던 척계광(戚繼光)의 기효신서(紀效新書)를 입수하도록 하고 이를 유성룡으로 하여금 번역케 하였다. 이에 유성룡은 이시발, 한교로 하여금 이를 번역하게 하고 모든 훈련을 기효신서에 따라 실시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선조 28년 6월 13일에는 기효신서를 인출하였고 이를 등서하여 내려 보내기에 이른다. 그리고 조선은 자체적으로 기효신서를 도입하여 포수를 양성하면서도 명나라의 군사 중에서 무예에 숙달된 자를 머물도록 하여 조선의 군사를 훈련시키도록 하였다. 이들은 '당병교사(唐兵敎師)'로 불리웠는데, 기효신서의 내용을 바탕으로 조선의 군사를 훈련시켰다. 이는 당시 조선의 이완된 전투력을 생각해 볼 때 기효신서를 번역하고 이를 가르치는 것도 좋지만, 조선이 진실로 필요한 것은 전투에 직접 투입하여 쓸 수 있는 무예의 실기를 갖춘 군사가 필요했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선조 27년 1월, 선조는 명나라 군사중에서 화포와 창검술에 능한 자 3~4인이 조선에 머물러 군사를 가르쳐 줄 것을 청하여 이때부터 당병교사들이 초빙되어 군사들을 훈련시켰다. 이러한 당병교사를 통한 훈련은 활발히 진행되는데, 당시 활동중인 당병교사는 호여화.왕대귀.이이.장육삼 등 12명으로 개개인의 장기를 바탕으로 교육시키도록 하였다. 그리고 당병교사들의 노고를 치하하기 위해 선조는 이들을 초대하여 연회를 베풀기도 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선조 31년(1598) 2월 선조가 명나라 제독 마귀(馬貴)에게 조선군의 전장에서의 활약을 묻는 물음에 답하여 '조선 포수들이 적을 많이 명중시켜 가상하나 다만 그 수가 적은 것이 한스럽다.' 고 한 것과 같이 조선의 포수는 상당한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할 수 있었다. 정유재란(丁酉再亂)때인 선조 30년 9월 훈련도감군은 약 1,200여명 정도였으며, 일본군이 재공격 함에 따라 남쪽 지방에 800여명이 내려갔고, 중앙에는 400여명이 있어 도성을 방어하였다. 이는 후에 훈련도감의 법제상 인원이 4,000명이었음을 감안할 때 이에 많이 모자라는 인원으로 당시 포수의 양성이 상당히 힘들었음을 짐작케 한다. 그렇지만 조선은 포수의 양성에 최대한의 노력을 경주하였으며, 이러한 노력은 임진왜란의 전황에 있어서 수세적인 국면을 타개하는데 커다란 힘이 되었다. ~~~~~~~~~~~~~~~~~~~~~~~~~~~~~~~~~~~~~~~~~~~~~~~~~~~~~~~~~ 우리나라의 화기(火器) 발달사 -10 병자호란과 화기 임진왜란을 계기로 우리나라에는 국방에 대한 전반적인 인식이 증가하였다. 이에 따라 화기 기술에 대한 지식이 널리 보급되었고 무기생산에 대한 정부의 관심도 높아졌다. 이는 비록 전쟁이 끝나기는 하였으나 왜적이 재침할 우려가 있었고, 만주에서 흥기한 후금(後金)의 세력도 위협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화기제작을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기관으로서 조총청(鳥銃廳)이 설치되었고, 이곳에서 조총의 대량생산이 이루어졌다. 그 뒤 광해군 6년(1614) 7월 14일에 국방 의식의 증대로 화기 제작의 중요성이 커짐에 따라 조총청을 화기도감(火器都監)으로 확대 개편하였다. 화기도감은 도제조 1인, 제조 5인, 도청 1인, 낭청은 좌우 각각 2인씩의 관원으로 구성되었으며, 도제조는 당시의 영의정이 겸임하고 제조는 정2품 이상의 고위직이 맡고 있었다. 화기도감에서는 불랑기,현자총,백자총,삼안총,소승자총통,쾌창 등을 제작하여 비변사의 방어계획과 화기 수급계획에 따라 남한산성,북한산성 그리고 각 도의 진영에 이송하는 등 활발히 활동하였다. 다만 화기도감의 주요 활동기간을 볼 때 일시적인 현상으로 그친 것이 아닌가 싶어 아쉬울 뿐이다. 아무튼 이러한 노력의 결과 광해군 14년(1622) 10월에만 해도 조총 900여 정과 화포 90문을 포함하여 기타 무기들이 많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전란 후의 국내 정세는 화기를 계획성있게 개발해나갈 만큼 안정되지 못하였다. 1623년 광해군의 실정을 구실로 쿠데타에 의해 실권을 장악한 이른바 인조반정(仁祖反正)의 서인정권은, 자파의 정치적 기반을 옹위할 목적으로 수도권의 방위 체제만을 파행적으로 강화했을 뿐 전국적인 규모의 방어체제 구축과 화기의 개발에는 눈을 돌리지 않았다. 이때의 화기 제조는 주로 훈련도감과 군기시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도록 하였다. 그런데 군기시는 조선 초기부터 무기 제조업무를 담당한 관서였지만 17세기에 들어 오면서부터 점차 훈련도감에 그 기능을 넘겨주면서 유사시에 대비한 비축무기를 보관 하는 업무와 매년 정기적으로 왕실과 청에 봉진하는 무기 등 극소수의 정교한 제품만을 생산하는 한가한 관서로 전락하고 말았다. 따라서 훈련도감은 조선 후기에 있어서 최고의 무기 제작기술을 보유한 기관임과 동시에 최대의 무기 생산처였다. 또 훈련도감에서는 인조 6년(1628) 호남지방에 표류해 온 네덜란드인 벨테브레(Weltevree;후에 박연으로 개명)를 불러들여 화포를 제작토록 하였고, 그의 후손들을 훈련도감 군적에 편입시키는 등 신무기의 개발에 주력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인조 5년(1627)에는 연간 1,000정이던 조총 생산량이 10년후에는 그 두배인 2,000정 까지 증가되었다. 이렇게 생산된 조총은 자체내의 도감군(都監軍)에게 지급되었을 뿐만 아니라 여타의 중앙군과 개성부나 황해,평안,함경도 등의 국방상 요지에도 공급되었다. 그리고 조총의 제조기술을 총융청(摠戎廳) 뿐만 아니라 수어청(守禦廳),어영청 (御營廳),금위영(禁衛營) 등의 증설된 군문(軍門)에도 이전하였다. 이렇듯 우리나라는 임란 중에 조총의 제조를 전습받은지 30여년이 지난 인조년간에 이르러서는 국내에서 생산된 조총이 일본의 것보다 훨씬 더 우수하다는 자신감까지 표명하게 되고 제조 수량도 꾸준히 증가하였으나, 임진왜란 직후의 개발수준을 뛰어넘을 수가 없었으며 전술 역시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임진왜란을 계기로 보급된 조총은 정규군보다 오히려 사냥꾼의 수렵기구로 활발히 사용되어 포수는 상당한 사격솜씨를 자랑하게 되기도 하였다. 한편 명나라의 발달된 화기기술을 인계받은 청나라는 홍이포(紅夷砲)라는 초대형 장거리포를 보유하게 되었고 화기를 이용한 전술의 습득도 이루어졌다. 이러한 상황은 1627년 정묘호란때 우리나라가 고전을 면치 못하게 하였고, 1636년 병자호란때에는 유사 이래 처음으로 국왕이 무릎을 꿇고 항복한 삼전도의 굴욕을 맞게 되었던 것도 화기의 열세에 그 하나의 원인이 있다. ~~~~~~~~~~~~~~~~~~~~~~~~~~~~~~~~~~~~~~~~~~~~~~~~~~~~~~~~~~~~~~~~~~~~~~~ 우리나라의 화기(火器) 발달사 -11 나선정벌 1636 ~ 1637년의 병자호란은 여러 측면에서 많은 교훈을 남겼다. 이후 우리나라는 이러한 교훈으로부터 출발하여 군사제도를 정비하고 군비를 강화하며 있을 수 있는 적의 재침에 대비하였다. 이에 효종은 북벌(北伐)이라는 정책의 추진 속에서 무기 생산에 진력하였고, 조총병 육성에 진력하였다. 조총을 비롯한 화포의 제조는 활발히 진행되었는데, 효종 3년(1652) 경상도 좌수영에서 동으로 현자포,황자포 107문을 만들었고, 그 후에도 불랑기 등을 많이 주조하여 각 진영에 배치하였다. 특히 1652년에 제작된 화포는 사거리가 현자포 2000여 보, 황자포 1900여 보에 달하는 등 매우 우수하였다고 하여, 단지 화포의 사거리만 늘어난 것이 아니라 원료 자체의 질을 개선함으로써 발사과정에 포가 파열되는 현상을 현저히 없앨 수 있게 되었다. 즉, 종래에는 함선들에 장착한 놋쇠로 만든 현자포, 황자포 등은 사격과정에서 파열되어 자체의 사상자를 내는 경우가 간혹 있었으며 더러는 인접한 함선의 전투원들에까지 인명피해를 입히는 일도 없지 않았으나, 숙동(熟銅)을 원료로 한 자재를 이용함으로써 화포의 파열을 방지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함께 총과 화포 가운데에서 군사들을 무장시키는데 가장 비중을 많이 차지한 것은 조총이었기 때문에 우선 조총을 질량적으로 개선하고 그 생산을 늘리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므로 인조때와 마찬가지로 효종 6년(1655) 7월에는 제주도에 표착한 네덜란드인 하멜(Hamel) 일행을 서울로 압송하여 훈련도감에 입속시킨 후 신무기 기술을 전수하도록 조처하여, 하멜은 도감군과 같은 급료와 보포(保布)를 지급받으면서 새로운 조총의 제조에 참여하였다. 이때 하멜 일행은 자신들이 소지했던 총을 모델로 하여 조총을 제작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조총이 많이 생산되고 그에 기초하여 조총부대가 조직됨으로써 군대의 무장장비가 현저히 강화되어, 1655년 국경지역에 조총 6,499자루와 5,049명의 포수들이 배치되었던 것이다. 이후 우리나라에서 제작한 조총의 우수성은 대외적으로도 널리 알려졌는데, 효종 8년 3월(1657) 청나라는 우리나라의 조총을 대량으로 무역해 줄 것을 요청해 오기도 하였으며, 또한 우수한 조총병의 지원을 요청하기에까지 이르렀다. 변급(邊渣)과 신유 (申瀏)장군의 2차례에 걸친 나선정벌은 이러한 배경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2차 나선정벌 당시에 흑룡강에 출병하게 된 조선군의 출정인원은 총 304명이었다. 이들은 영장 1명, 초관 2명, 군관 2명, 통사 2명, 포수 200명, 화병 20명, 군속 38명, 마부 39명으로 편제 되어 있어 이 중 전투원은 225명이고 비전투원은 79명 이었다. 신유장군의 출병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 {북정일기(北征日記)}에 의하면 조선군은 출병 전에 2번, 출병 후에 3번 등 5차례에 걸쳐 사격연습을 하였는데, 그 내용을 보면 조선군의 사격솜씨가 매우 우수했음을 알 수 있다. 표. 2차 출병때의 연습 사격 상황 시 기 장 소 사격인원 명중 명중률 비 고 4월 6일 회령 포수200명 51명 25% 4월 21일 회령부 남문루 - - - 기록없음 5월 17일 송화강 포수200명 40명 25% 5월 18일 송화강 포수200명 65명 32.5% 5월 21일 송화강 포수 200명 3발씩 123명 25.7% 3발:5 2발:21 1발:97 이상과 같이 우리나라 조총병의 사격실력은 평균 25.8% 즉, 4발중에서 1발을 맞추었으며, 최고 5월 18일의 32.5%에서 최저 5월 17일의 20%까지 편차를 보이는 등 매우 우수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신유장군은 흑룡강 출병에서 또 하나의 공적을 새웠는데, 이는 새로운 총기를 도입한 점이다. 당시 우리가 소지한 소총이 이른바 화승총(match lock)인데 반해 흑룡강에서 조선군과 전투를 벌인 러시아군의 소총은 17세기초에 재래식 화승총을 개량 개발한 부싯돌식 점화장치를 달은 수석식(燧石式) 소총이었다. 수석식 소총은 화승총보다 간편하고 기후의 영향을 받지 않으며, 또 사격 속도도 빠르기 때문에 이미 서구의 여러나라에서는 이를 개발하여 사용했던 것이다. 당시 조선군은 러시아군과의 전투에서 수석식 소총 수십 개를 노획하였으나 모두 청군에게 강제로 인도되었다. 신유장군은 예리한 군사적 시각으로 러시아군의 우수한 총기를 주목하고 이것을 도입 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그는 새로운 총기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사이호달(沙爾虎達)과 끈질기게 교섭한 결과 끝내 한 자루를 입수했던 것이다. 이로써 주체적으로 수석식 총이 처음으로 도입되었던 것인데,이는 우리나라의 화기발달사상 획기적인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후 이 총은 군기시의 창고에 사장(死藏)되고, 이를 통한 신화기의 개발이 이루어지지 못하였음은 당시의 한계였던 것 같다. 현종대에는 수도 한성의 서해 관문인 강화도를 비롯하여 인천 일대의 해안 요지에 수많은 각종 총포들이 대량적으로 배치하여 방비를 강화하였는데, 현종 5년(1664) 6월 당시 강화도와 인접한 연해지역에 배치한 총포의 배치상태를 보면 다음과 같다. 강화도에 배치된 총포의 수를 보면 조총 674정, 대완구.대포.중포 65문, 소완구 30문, 호준포 37문이었고, 제물포, 초지진, 광성진, 월곶, 승천부, 사각, 연화보 등지에는 조총 674정, 대완구, 대포, 중포 65문, 소완구 30문, 호준포 37문이 배치되어 있었다. 또 강화도를 중심으로 한 서해지방에도 조총 3417정, 각종 포 132문이 배치되어 있었다. 이밖에도 수도의 각 군문(軍門)들과 내륙의 군사 요지들에 배치되었던 조총까지 종합 한다면 조총수는 최소한 1만정 이상이 되었다. 그 후 숙종 5년(1679) 9월에는 훈련도감의 신무기 개발노력에 의하여 50정의 조총이 장착되어 탄환을 일제히 발사하는 화차가 만들어져 국왕 앞에서 발사시범을 보이기도 하였다. 또 영조 7년 9월에 훈련도감은 새 동포 50문과 홍이포 2문을 만들었다고 보고 하였는데, 그 성능을 시험한 바에 의하면 동포의 사거리는 2,000여 보이며, 홍이포의 사거리는 10리 즉 4km였다고 한다. 17세기 일반포의 사거리가 2,000여 보였던 것에 비해 홍이포의 사거리는 10리 즉 약 3배였다고 하는데, 이를 그대로 믿기는 어려우나 어쨌든 당시의 조건에서는 비약적인 발전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화기의 개량은 재래식 화기의 성능을 개선하는데 그쳤으며, 서구 유럽과 같은 새로운 화기의 근본적인 개발은 막대한 비용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거의 손을 댈 수 없는 실정이었다. 이러한 현상은 19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계속된 세도정치 아래에서 더욱 심화되어 갔다. 서양에서는 이미 19세기 중엽에 강선(腔線)을 가진 후장식(後裝式) 소총이 개발되어 전투시 병사가 안전하게 장전하고 사격할 수 있도록 하었다. 뿐만 아니라 화기의 발달은 이미 보병(步兵),기병(騎兵),포병(砲兵)의 협조된 전투방식을 가능하게 하였으며, 해군의 화포도 장족의 발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일본의 경우에도 19세기 중엽에는 우리나라의 소화기보다 진보된 수석식(燧石式)소총 으로 무장하였으며 서양식의 화기 전술로 훈련하기 시작했다. 특히 1853년 페리제독에 의해 개국된 일본은 무기체제의 개발에 주력하여 후장식 선조화기(旋條火器)로 장비해 나갔다. 중국의 경우에도 서양세력의 무력적 접근에 자극되어 나름대로 선진적인 화기 기술의 도입에 주력하였다. 이렇듯 우리나라의 주변세력이 서구식 근대군으로 면모를 갖추어 나가는 가운데 유독 우리나라만이 화기보다 궁시를 더 많이 보유한 전근대적인 군대로 남게 되었다. 소화기의 경우 그 종류는 매우 잡다하고 낙후하여 편제 무기로서의 통일성이 결여되어 있었으며, 이때까지도 화승식(火繩式) 화기를 벗어나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 우리나라의 화기(火器) 발달사 -12 대원군의 화기 개발 우리나라 화기의 적극적인 개발은 1864년 대원군의 등장 이후부터 이루어진다. 대원군은 병인(丙寅),신미년(辛未年)의 두 차례의 양요(洋擾)를 거치는 동안 화기의 중요성을 절감하게 되었고 이에따라 화기의 개발에 주력하였던 것이다. 1866년 10월 프랑스함대는 7척의 군함을 이끌고 와서 갑곶진에 상륙하여 강화부를 점령하였다. 당시 우리나라는 구식 화승총인 조총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미 1840년경 부터 뇌홍뇌관(雷汞雷管)을 격침으로 때려서 발화하는 뇌관격발식(雷管激發式)소총으로 무장한 프랑스군과의 전투에서 고전을 면할 길이 없었으며, 화포 역시 1837년이래 유탄포(榴彈砲)로 개량한 프랑스군의 함포에 제압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1871년 5월말에도 콜로라도(Colorado)호를 비롯한 5척의 군함으로 편성된 미국 원정군이 강화도를 유린하였는데, 당시 미군도 보병용 및 기병용으로 구별된 Starr소총과 7연발이 가능한 Spencer소총 및 Remington소총 등 근대적인 소총을 사용 하였고, 화포도 후장식 강선포(腔線砲)를 사용하였다. 이 두 전란을 겪으면서 대원군은 국방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고 군비 강화에 주력하였으며, 그 결과 1874년 우리나라에서 주조된 화포 가운데 가장 근대적인 소포(小砲),중포(中砲) 등이 제조되었다. 이 소포와 중포는 청동제의 포구장전식 (砲口裝塡式) 화포였지만 포신의 주조술이 매우 숙련되어 있고 죽절도 2개조에 불과하며, 두바퀴가 달린 포가(砲架)위에 설치되어 이동이 용이하게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포신을 상하로 조정할 수 있게 되어 있다. 현재 육군박물관에 있는 소포와 중포는 고종 10년 5월(1873)에 운현궁에서 제작한 것이다. 그는 비단 화기뿐만 아니라 근대적 군함의 건조와 수뢰포의 제작, 방호용구의 개발 등에도 심혈을 기울였으나, 대원군의 이러한 화기개발 노력은 근본적으로 실패의 요인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는 나라의 문호를 굳게 닫은 채 외국의 새로운 화기기술을 도입하기보다는 국내에 축적된 전근대적인 기술에만 의존하여 화기를 개발하려고 하다. 따라서 그의 시대에 주조된 각종 화기는 종래의 것보다 개선되기는 하였으나 근본적으로는 전장식 화승총(火繩銃)의 수준을 뛰어넘지 못한 것이었다. 그나마도 이러한 화기개발은 10년 이상을 계속할 수 없었다. 그후 1876년 일본의 무력도발에 굴복하여 개국한 우리나라는 신무기의 도입과 기술수용에 주력하였다. 나라의 명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국방력의 수준이 근대화 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비로소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러나 정부의 주관심은 당시의 과학적 기초가 없는 환경 속에서 오랜 시간과 재원을 필요로 하는 신무기의 개발보다는 서양무기의 모방 제조에 역점을 두었다. 근대적인 병기기술을 수용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일본에 시찰단을 파견되고 청국에는 공도(工徒)가 파견되었다. 1880년 영선사를 청국에 파견하여 무기 제조법을 학습케 하였고, 1883년에는 국내에 기기창(機器廠)이 설치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천진기기국(天津機器局)을 모방한 병기 생산공장이 1887년 10월에 준공되었으며, 1889년에는 증기기관에 의한 소총 제조가 실현 되었고, 1891년에는 화약의 기계적인 대량생산이 이루어졌다. 물론 일부 관측자들에 의하면 1892년까지는 단지 무기 수리만을 수행하고 있었다고도 전해진다. 그러나 기초적인 과학지식이 결핍된 상태에서 현대적인 화기기술을 익히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결국 이러한 선진 화기 기술의 도입은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고 정부에서는 무기제조보다는 무기구입의 방법으로 전환하여 군비 강화를 도모하려 하였다. 이때부터 도입된 화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중국의 천진기기국에서 12파운드 청동포 10문과 영국제 라이플총 1,000정 구매 . 1882년 일본에 무라다총(村田銃) 2만정 주문 . 1884년 미국에서 스프링필드 M1873라이플 소총 4000정 구매 . 미국측에 Gatling gun 6문, Remington 3,000정, Martini 1,000정 주문 . 1894년 5월 모젤식 소총 1,000정 구매 이렇듯 정부가 시도한 군비증강책은 다양한 국가의 무기류 수입에다가 한반도 침략을 획책하는 일본을 위시한 열강들의 교활한 대한정책(對韓政策)에 휘말려 시행착오와 혼란을 거듭하였다. 열강은 우리나라의 군비 강화와 무기개발 노력을 교묘히 역이용하여 그들의 낙후된 폐기 화기를 고가로 팔아먹었다. 20세기 초반에 들어오면서부터 우리나라는 더욱 거센 일본의 침략에 직면하게 되었다. 1894년 청일전쟁, 1904년 ~ 1905년의 러일전쟁을 거치는 동안 우리나라의 국방력은 사실상 일본의 장악하에 들어갔으며, 1907년에는 마침내 군대를 강제해산 당하는 비운을 맞기도 하였다. 화기의 개발은 이제 그 종막을 고하게 된 것이다. 일본은 한국군이 보유하고 있던 재래식 무기를 모두 압수하여 폐기하였다. 또한 화약과 총포를 단속하는 법을 강요하여 민간의 무기까지 모조리 압수해 갔다. 따라서 이때부터 우리나라의 화기 개발과 전술의 개선은 정규군이 아닌 항일무장 의병들의 손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일제의 강력하고 무자비한 탄압하에서 저항을 계속한 의병들이 새로운 화기를 자체적으로 개발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의병들은 극히 제한된 모금액으로 중국이나 러시아로 부터 낙후된 병기를 구입할 수밖에 없었으며, 정규전 대신 유격전술로 일본군과 대전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가운데서도 화기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은 의병, 그리고 경술국치 이후의 독립군의 활동을 통하여 꾸준히 승계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전통은 1945년 해방과 더불어 국군을 창설하는 준비과정에서 현대적 군을 조직하려는 노력으로 다시 결집 되었다.(끝) To Be Announc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