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kdycap (도영 ) 날 짜 (Date): 1998년 11월 13일 금요일 오전 11시 19분 03초 제 목(Title): 부여의 시작과 끝 그리고 고구려 제가 최근에 다시 한단고기와 삼국사기를 읽다가 흥미로운 점을 한가지 발견했습니다. 어디에 쓰긴 써야 할텐데 하고 망설이다가 여기에 글을 씁니다. 먼저 이 한단고기가 위서니 아니니 하는 논란은 접어두고(제 생각으로는 무리가 있는 내용도 있지만 이 책이 여러사람이 쓴 사서가 통합되어 엮어진 것이고 일제를 무사히 넘긴 책들이기 때문에 위서는 아니라고 봅니다. 다만 후세 사람이 엮으면서 약간의 실수가 들어가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고 시중에 나온 번역본에서 주해의 내용이 앞뒤가 안맞는것이 더러 있는 것 같았습니다.) 부여에 대한 글을 쓰겠습니다. 부여에 대한 글을 쓰자면 먼저 고조선을 이야기 해야겠지요. 규원사화에서는 고조선이 기원전 천년 정도까지 존재했다고 합니다. 그 이후로는 이 고조선의 제후국들에 의한 열국시대가 있었다고 봐야겠죠. 한단고기의 단군기에서는 고조선이 기원전 240년경까지 존재했다고 합니다. 물론 여기에서 일차 혼란이 오지만.. 이런 사실이 있다는 것만 알고.. 곧장 부여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물론 한단고기의 북부여기 상하와 가섭원 부여기 그리고 삼국사기를 통해서 부여를 다시 재조명 하겠습니다. 저는 전적으로 이 한 단고기의 기사들을 신뢰하고 다음의 글을 쓸 것입니다. 고조선의 마지막 47세 단제 고열가때에 이르러 종실의 대신인 해모수가 반란을 일 으킵니다. 이에 고조선은 멸망하고 북부여가 시작합니다. 이 해모수가 스스로 단제 가 된것이지요, 이때가 임술년(기원전 239년)이라고 하는군요. 그리고 경진년(기원전221년)에 연장군 진개가 부여의 서쪽 변두리 땅 즉 번조선의 땅을 침략했다고 하는군요. (혼란을 피하기 위해 여기서 부여는 고조선을 그대로 계승한 나라로 보면 될 것입니다. ) 병오년(기원전 195년)에 위만이 단제에게 망명을 요청했으나 단제가 허락치 않았는데 번조선(고조선이래의 제후국)의 왕 기준이 크게 실수하여 위만에 박사(관직인듯)의 지휘를 줍니다. 이후로 번조선왕은 이 위만의 도적떼들에게 패하여 망했고 오가의 무리들은 대장군 탁을 받들어 산을 넘어 월지에 이르러 나라를 세웠다는데 이것이 중마한이라고 하는군요. 여기서 위만은 한나라에서 무리를 이끌고 망명하여 번조선왕을 내쫓고 스스로 위만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운 인물입니다. 부여로 보았을때는 도둑떼와 다를바가 없겠지요. 북부여기 상편에서는 이 위만조선과의 전쟁에 대한 기사가 서너군데 되는 것 같군요.. 이 위만조선과의 싸움에서 공을 세운 이가 고진인데(신유(기원120년)에 고진을 발탁하여 우거를 대비하였는데 큰 공이 있어 그를 고구려후로 삼았다는 군요.) 바로 이 고진이 주몽의 선조라는 기사가 가섭원부여기에 나오는군요. 그리고 좀더 시간이 지나 한무제가 기원전 108년에 우거(위만조선)을 멸망시킵니다. 그리고 4군을 두고자 하여 사방으로 병력을 침략시켰는데 이 때 고두막이라는 이가 있어 의병을 일으켜 가는 곳마다 한나라 침략군을 연파하였다는 글이 있군요.( 사기에 이르기를 이때에 출정한 장군들 중 공을 세워 후에 봉해진 자가 없었다고 하니 이것은 바로 이 고두막의 의병에 전패했기 때문이 아 닐까? 그리고 종래의 국사에서는 위만조선의 멸망이 내부분열이라고 하였는데 사실은 위만의 피 지배 민족들인 고조선의 인민들이 번조선을 빼앗은 위만조선을 배반한 것이 아닐까?) 이 때 고두막은 스스로 동명이라고 칭하고 무리를 이끌고 단제를 위협합니다. 다음처럼 '나는 천제의 아들인데 장차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자 하니, 왕은 이 땅에서 옮겨가시오' 이에 단 제는 병을 얻어 붕어하고 동생 해부루가 즉위하였는데 이 동명이 계속 위협하니 국상 아란불이 '말하기를 통하의 물가에 가섭원이라는 땅이 있어 기름지고 오곡이 제법 잘 되니 서울을 둘 만 한 곳입니다.'라고 하니 왕은 그곳으로 도읍을 옮겼는데 이를 가섭원부여 혹은 동부여라고 합니 다. 이것이 바로 가섭원 부여의 시작인데 이 가섭원 부여의 직계선조는 바로 북부여를 창시한 해 모수라는 것을 염두에 두었으면 합니다. 또 위에서 동명이 왕에게 위협한 말에서 `나는 천제의 아 들이다` 라는 말이 있는데 동명이 이 말을 한 이유는 바로 그가 고조선 마지막 단제 고열가의 후 손이(북부여기 하편)기 때문에 그 말을 쓴 것 같습니다. (즉 동명은 고열가의 후손으로써 나라를 찬탈한 해모수의 자손을 내쫓고 다시 나라를 찾은게 아닌가 싶습니다.) 고대사의 일대적 사건이라고 할만하겠죠. 이 사건이 북부여가 한나라의 침략을 겪은 다음 가섭원 부여(동부여)와 졸본부여(북부여)로 갈라지는 일대의 사건이 됩니다. 그리고 이사건은 삼국사기의 고구려본기와 백제본기의 건국기사에 나오는 부여의 실체를 이해하는데 아주 핵심적인 사건입니 다. 익히 알겠지만 바람의 나라라는 만화에서 고구려는 바로 졸본부여의 후신이고 부여는 이 가 섭원 부여를 말하는 것이겠지요. 6~6~제가 최근에 다시 한단고기와 삼국사기를 읽다가 흥미로운 점을 한가지 발견했습니다. 어디에 쓰긴 써야 할텐데 하고 망설이다가 여기에 글을 씁니다. 먼저 이 한단고기가 위서니 아니니 하는 논란은 접어두고(제 생각으로는 무리가 있는 내용도 있지만 이 책이 여러사람이 쓴 사서가 통합되어 엮어진 것이고 일제를 무사히 넘긴 책들이기 때문에 위서는 아니라고 봅니다. 다만 후세 사람이 엮으면서 약간의 실수가 들어가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고 시중에 나온 번역본에서 주해의 내용이 앞뒤가 안맞는것이 더러 있는 것 같았습니다.) 부여에 대한 글을 쓰겠습니다. 부여에 대한 글을 쓰자면 먼저 고조선을 이야기 해야겠지요. 규원사화에서는 고조선이 기원전 천년 정도까지 존재했다고 합니다. 그 이후로는 이 고조선의 제후국들에 의한 열국시대가 있었다고 봐야겠죠. 한단고기의 단군기에서는 고조선이 기원전 240년경까지 존재했다고 합니다. 물론 여기에서 일차 혼란이 오지만.. 이런 사실이 있다는 것만 알고.. 곧장 부여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물론 한단고기의 북부여기 상하와 가섭원 부여기 그리고 삼국사기를 통해서 부여를 다시 재조명 하겠습니다. 저는 전적으로 이 한 단고기의 기사들을 신뢰하고 다음의 글을 쓸 것입니다. 고조선의 마지막 47세 단제 고열가때에 이르러 종실의 대신인 해모수가 반란을 일 으킵니다. 이에 고조선은 멸망하고 북부여가 시작합니다. 이 해모수가 스스로 단제 가 된것이지요, 이때가 임술년(기원전 239년)이라고 하는군요. 그리고 경진년(기원전221년)에 연장군 진개가 부여의 서쪽 변두리 땅 즉 번조선의 땅을 침략했다고 하는군요. (혼란을 피하기 위해 여기서 부여는 고조선을 그대로 계승한 나라로 보면 될 것입니다. ) 병오년(기원전 195년)에 위만이 단제에게 망명을 요청했으나 단제가 허락치 않았는데 번조선(고조선이래의 제후국)의 왕 기준이 크게 실수하여 위만에 박사(관직인듯)의 지휘를 줍니다. 이후로 번조선왕은 이 위만의 도적떼들에게 패하여 망했고 오가의 무리들은 대장군 탁을 받들어 산을 넘어 월지에 이르러 나라를 세웠다는데 이것이 중마한이라고 하는군요. 여기서 위만은 한나라에서 무리를 이끌고 망명하여 번조선왕을 내쫓고 스스로 위만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운 인물입니다. 부여로 보았을때는 도둑떼와 다를바가 없겠지요. 북부여기 상편에서는 이 위만조선과의 전쟁에 대한 기사가 서너군데 되는 것 같군요.. 이 위만조선과의 싸움에서 공을 세운 이가 고진인데(신유(기원120년)에 고진을 발탁하여 우거를 대비하였는데 큰 공이 있어 그를 고구려후로 삼았다는 군요.) 바로 이 고진이 주몽의 선조라는 기사가 가섭원부여기에 나오는군요. 그리고 좀더 시간이 지나 한무제가 기원전 108년에 우거(위만조선)을 멸망시킵니다. 그리고 4군을 두고자 하여 사방으로 병력을 침략시켰는데 이 때 고두막이라는 이가 있어 의병을 일으켜 가는 곳마다 한나라 침략군을 연파하였다는 글이 있군요.( 사기에 이르기를 이때에 출정한 장군들 중 공을 세워 후에 봉해진 자가 없었다고 하니 이것은 바로 이 고두막의 의병에 전패했기 때문이 아 닐까? 그리고 종래의 국사에서는 위만조선의 멸망이 내부분열이라고 하였는데 사실은 위만의 피 지배 민족들인 고조선의 인민들이 번조선을 빼앗은 위만조선을 배반한 것이 아닐까?) 이 때 고두막은 스스로 동명이라고 칭하고 무리를 이끌고 단제를 위협합니다. 다음처럼 '나는 천제의 아들인데 장차 이곳 제가 최근에 다시 한단고기와 삼국사기를 읽다가 흥미로운 점을 한가지 발견했습니다. 어디에 쓰긴 써야 할텐데 하고 망설이다가 여기에 글을 씁니다. 먼저 이 한단고기가 위서니 아니니 하는 논란은 접어두고(제 생각으로는 무리가 있는 내용도 있지만 이 책이 여러사람이 쓴 사서가 통합되어 엮어진 것이고 일제를 무사히 넘긴 책들이기 때문에 위서는 아니라고 봅니다. 다만 후세 사람이 엮으면서 약간의 실수가 들어가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고 시중에 나온 번역본에서 주해의 내용이 앞뒤가 안맞는것이 더러 있는 것 같았습니다.) 부여에 대한 글을 쓰겠습니다. 부여에 대한 글을 쓰자면 먼저 고조선을 이야기 해야겠지요. 규원사화에서는 고조선이 기원전 천년 정도까지 존재했다고 합니다. 그 이후로는 이 고조선의 제후국들에 의한 열국시대가 있었다고 봐야겠죠. 한단고기의 단군기에서는 고조선이 기원전 240년경까지 존재했다고 합니다. 물론 여기에서 일차 혼란이 오지만.. 이런 사실이 있다는 것만 알고.. 곧장 부여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물론 한단고기의 북부여기 상하와 가섭원 부여기 그리고 삼국사기를 통해서 부여를 다시 재조명 하겠습니다. 저는 전적으로 이 한 단고기의 기사들을 신뢰하고 다음의 글을 쓸 것입니다. 고조선의 마지막 47세 단제 고열가때에 이르러 종실의 대신인 해모수가 반란을 일 으킵니다. 이에 고조선은 멸망하고 북부여가 시작합니다. 이 해모수가 스스로 단제 가 된것이지요, 이때가 임술년(기원전 239년)이라고 하는군요. 그리고 경진년(기원전221년)에 연장군 진개가 부여의 서쪽 변두리 땅 즉 번조선의 땅을 침략했다고 하는군요. (혼란을 피하기 위해 여기서 부여는 고조선을 그대로 계승한 나라로 보면 될 것입니다. ) 병오년(기원전 195년)에 위만이 단제에게 망명을 요청했으나 단제가 허락치 않았는데 번조선(고조선이래의 제후국)의 왕 기준이 크게 실수하여 위만에 박사(관직인듯)의 지휘를 줍니다. 이후로 번조선왕은 이 위만의 도적떼들에게 패하여 망했고 오가의 무리들은 대장군 탁을 받들어 산을 넘어 월지에 이르러 나라를 세웠다는데 이것이 중마한이라고 하는군요. 여기서 위만은 한나라에서 무리를 이끌고 망명하여 번조선왕을 내쫓고 스스로 위만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운 인물입니다. 부여로 보았을때는 도둑떼와 다를바가 없겠지요. 북부여기 상편에서는 이 위만조선과의 전쟁에 대한 기사가 서너군데 되는 것 같군요.. 이 위만조선과의 싸움에서 공을 세운 이가 고진인데(신유(기원120년)에 고진을 발탁하여 우거를 대비하였는데 큰 공이 있어 그를 고구려후로 삼았다는 군요.) 바로 이 고진이 주몽의 선조라는 기사가 가섭원부여기에 나오는군요. 그리고 좀더 시간이 지나 한무제가 기원전 108년에 우거(위만조선)을 멸망시킵니다. 그리고 4군을 두고자 하여 사방으로 병력을 침략시켰는데 이 때 고두막이라는 이가 있어 의병을 일으켜 가는 곳마다 한나라 침략군을 연파하였다는 글이 있군요.( 사기에 이르기를 이때에 출정한 장군들 중 공을 세워 후에 봉해진 자가 없었다고 하니 이것은 바로 이 고두막의 의병에 전패했기 때문이 아 닐까? 그리고 종래의 국사에서는 위만조선의 멸망이 내부분열이라고 하였는데 사실은 위만의 피 지배 민족들인 고조선의 인민들이 번조선을 빼앗은 위만조선을 배반한 것이 아닐까?) 이 때 고두막은 스스로 동명이라고 칭하고 무리를 이끌고 단제를 위협합니다. 다음처럼 '나는 천제의 아들인데 장차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자 하니, 왕은 이 땅에서 옮겨가시오' 이에 단 제는 병을 얻어 붕어하고 동생 해부루가 즉위하였는데 이 동명이 계속 위협하니 국상 아란불이 '말하기를 통하의 물가에 가섭원이라는 땅이 있어 기름지고 오곡이 제법 잘 되니 서울을 둘 만 한 곳입니다.'라고 하니 왕은 그곳으로 도읍을 옮겼는데 이를 가섭원부여 혹은 동부여라고 합니 다. 이것이 바로 가섭원 부여의 시작인데 이 가섭원 부여의 직계선조는 바로 북부여를 창시한 해 모수라는 것을 염두에 두었으면 합니다. 또 위에서 동명이 왕에게 위협한 말에서 `나는 천제의 아 들이다` 라는 말이 있는데 동명이 이 말을 한 이유는 바로 그가 고조선 마지막 단제 고열가의 후 손이(북부여기 하편)기 때문에 그 말을 쓴 것 같습니다. (즉 동명은 고열가의 후손으로써 나라를 찬탈한 해모수의 자손을 내쫓고 다시 나라를 찾은게 아닌가 싶습니다.) 고대사의 일대적 사건이라고 할만하겠죠. 이 사건이 북부여가 한나라의 침략을 겪은 다음 가섭원 부여(동부여)와 졸본부여(북부여)로 갈라지는 일대의 사건이 됩니다. 그리고 이사건은 삼국사기의 고구려본기와 백제본기의 건국기사에 나오는 부여의 실체를 이해하는데 아주 핵심적인 사건입니 다. 익히 알겠지만 바람의 나라라는 만화에서 고구려는 바로 졸본부여의 후신이고 부여는 이 가 섭원 부여를 말하는 것이겠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