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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요키에로타)
날 짜 (Date): 1998년 11월 13일 금요일 오전 04시 09분 04초
제 목(Title): 대한매일/항일독립군 장정따라 6천리 상


기사분야 : 해설/특집 [대한매일]

게재일자 : 11월11일



                             항일독립군 장정따라 6천리(上)-日軍학병서 
광복군까지



  한국 독립유공자협회 회원들이 조국 광복을 꿈꾸며 젊은 날  이역만리에서
피 흘렸던 중국땅을 찾았다.한국광복군 간부훈련반(韓光班) 출신 광복군  초
급장교들로 흔히 광복군 마지막 세대로 분류된다.일본군의 학병으로  끌려왔
다가 탈출,독립을 위해 싸웠던 이들이 항일투쟁의 족적을 찾아 나선 것은 광
복의 참뜻을 지금의 시대 정신으로 승화시키기에 충분했다.중국 중부  장쑤(
江蘇)성 쉬저우(徐州)에서 쓰촨(四川)성의 충칭(重慶)까지 장장  6,000리길.
일본군  탈출부터 광복군 훈련장,항일 지하공작 거점 등 열하루간  동행했던
이들의 답사 행로를 3회에 나눠 소개한다.

  ‘마지막 독립군’들의 첫 현장 답사는 장쑤성(江蘇省)  쉬저우(徐州)에서
시작됐다.베이징(北京)서 814㎞.기차로 8시간.54년전에 거쳐온 길을  더듬기
위해 1시간 남짓한 비행기편도 마다했다.

  1944년 2월초.평양을 출발,기차에 강제로 실려 닿은 곳은 일본군과 중국군
이 대치하던 최전방 쉬저우.7월까지 쉬저우와  슈저우(宿州),푸양(阜陽)일대
전선에 배치됐던 이들은 그해 3월부터 7월까지 하나둘 일본병영을 탈출했다.

  “일본군이 되어 동포들의 가슴에 총을 겨누느니 차라리 탈출하다  죽기로
했다”고 50여년전 결의를 회상했다.“상당수는 우선 충칭에 있던  임시정부
를 찾아가기로 했었습니다” 회고담은 이어졌다.당시 쉬저우 주변에선  일본
군이 밀집해 있었고 중국으로 끌려온 ‘조선학병’ 3,000여명의 대부분도 부
근에 배치됐다.

  때마침 텐진(天津)에서 시작된 진푸선(津浦線)철로가 쉬저우를 지나  상하
이(上海),푸둥(浦東)쪽으로 향하는 모습을 보며 노 광복군들은 눈시울을  적
셨다.일본군은 철도와 주변을 점령,광대한 중국대륙을 ‘선’과  ‘점’으로
연결하는 전략을 펴고 있었기 때문에 끌려갔던 학병들은 대부분 철도역 주변
에 주둔해 있었단다.

  밤을 틈타 3m가 넘는 철책을 넘었다.짧게는 2∼3일에서 일주일이상을 풀잎
이나 과일로 연명하며 낮에는 수수밭에 숨어 있다가 밤이면 들판을  달렸다.
대개는 중국 유격대와 조우했고 당당한 광복군이 되었다.

  44년 6월 ‘宿縣부대’ 제4중대에서 탈출했던 金柔吉 부회장과 全履鎬  회
원은 슈저우역에서 2㎞쯤 떨어진 곳을 찾아 헤맨끝에 당시의 탈출지점을  찾
아냈다.지금은  ‘宿縣 付小樓 村庄’로 이름이 바뀌어 있었다.붉은  벽돌로
지어진 2∼3층의 주택들이 병영을 대신하고 있었다.

  이에 앞서 5월에 같은 부대 보병중대에서 津浦線을 넘어 탈출했던  石根永
회원도 슈저우에서 50㎞ 떨어진 구쩐(固鎭)역부근에서 병영터를 찾아냈다.일
본군은 철도가 파괴되거나 공격받으면 주변의 중국인을 몰살시켜 보복했다고
 악몽같은 50년전을 떠올렸다.중국 유격대원이 생포되기라도 하면 총검술 연
습의 표적으로 삼아 살해하기도 했단다고 치를 떨었다.

  대부분의 병영들은 푯말하나 남지않고 촌락 등으로 바뀌는 등  사라졌지만
尹慶彬 회장과 金永錄 회원이 탈출했던 쉬저우시 통산로(銅山路)의 부대터는
 지금도 ‘중국 인민해방군’ 주둔지로 사용되고 있었다.

  부대안을 돌아본 尹慶彬회장 등은 연병장앞의 3층 본부 건물,검은  벽돌과
돌로 지어진 단층 막사가 옛 그대로라며 회상에 젖었다.높은 천정의  막사안
에는 시멘트바닥에 철로 만든 2층 침대 10여개와 간단한 사물함이 눈에 띄었
다.

  張俊河선생 등과 함께 尹회장 일행 4명이 44년 7월7일.일본군의 이른바 ‘
중국침략 기념일’로 경계가 느슨해 틈을 타 ‘취침전 15분의  자유시간’을
이용했다.일본군을  벗어난 이들은 이틀밤을 앞만 보고 달리다 먼저  탈출해
중국 유격대에 와 있던 金俊燁(전 고대총장)씨와 해후했다.

  “중국의 여러 유격대에 흩어져 있던 탈출자들은 린촨(臨泉)로  모였지요.
린촨에서 군사훈련을 받으며 광복의 꿈을 키워 대일항전의 장정(長征)을  시
작했습니다” 노 독립군의 회고는 덜컹거리는 비포장 도로를 따라 어느새 50
년전의 린촨에 닿고 있었다.   
 



<李錫遇 swlee@daehanmail.com>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 "활쏘기는 군자의 덕성과 비슷한 바 
가 있으니, 활을 쏘아 과녁을 벗어나더라도 오히려 그 이유
를 자기 몸에서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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