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요키에로타) 날 짜 (Date): 1998년 11월 5일 목요일 오전 11시 06분 30초 제 목(Title): 안병직/한국근현대사연구의 새로운 패러다� 한국근현대사 연구의 새로운 패러다임 --경제사를 중심으로 안병직(安秉直)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머리말 경제성장과 산업구조의 변화 경제성장의 역사적 제조건 새로운 패러다임 맺음말 1. 머리말 한국근현대사는 현재 그 연구패러다임의 획기적인 전환이 요청되고 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간 불투명했던 한국근현대사의 발전방향이 근래의 10여 년간에 걸쳐서 누구의 눈에도 점점 분명하게 되어왔기 때문이다. 그간에 우리는 한국에서 과연 자립적 자본주의의 발전이 가능할까 하는 데 대하여 의문을 품어왔다. 그러나 오늘에 와서는 저간의 한국의 경제발전상황과 현재의 세계사적 동향으로 볼 때, 한국현대사의 발전방향은 자본주의적 발전밖에 없다는 것이 명백하게 되었다. 이 점을 명확하게 인식하는 것이 패러다임 전환을 위한 출발점이다. 그런데 한국자본주의는19세기 자본주의와는 다른 20세기 자본주의이다. 19세기 자본주의가 자생적 발전의 측면이 강했다고 한다면, 20세기 자본주의는 선진자본주의에의캐치업(catch-up, 따라잡기)과정으로서의 발전이라는 측면이 강하다. 따라서19세기 자본주의는 대외침략을 해서라도 하나의 완결된 국민경제의 형성을 지향했으나, 20세기 자본주의는 수출지향 공업화정책을 통하여 발전해 왔기 때문에 국제협력을 중시하고 있다. 이 때문에 고전적 자본주의를 전형적 자본주의라고 생각하는 연구자들에게는, 20세기 자본주의는 종속적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무슨 기형적인 자본주의로 비칠 수도 있다. 국민경제론적 입장에서 볼 때, 20세기 자본주의가 그러한 특징을 다분히 가지고 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오히려 20세기 자본주의는 경제순환의 대외적 연결이 강한 것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점이 국민경제의 대외종속의 계기로 작용할 수 있음은 물론이나, 한국의 경우에는 고도성장의 계기로 작용해왔다. 한국은 경제개발계획이 수립되기 시작한 1960년대초에는 1인당 소득이 100달러 미만인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의 하나였으나, 지금은 1인당 소득 1만 달러인 중진국의 상위권에 속하는 나라가 되었다. 오늘날 한국경제가 선진국으로 진입하기 위하여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사실은 누구에게나 명백할 것이다. 이와같은 것이 경제적 측면에서 본 한국현대사의 기본동향이라면, 한국근현대사의 연구방향이 어떠해야 하리라는 것은 자명할 것이다. 그것은 다름아니라 경제발전이라는 시각을 가지고 조선후기, 일제시대 및 해방 이후를 일관되게 파악하는 것이다. 물론 역사적 사상(事象)은 다면체(多面體)이므로, 경제적 사상만을 관찰한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경제발전이라는 측면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정체도 있고 수탈도 있고 착취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현대사적 과제와 관련하여 역사의 어떠한 측면을 집중적으로 관찰할 것인가에 있다. 어떤 사람은 아무리 경제발전이 한국현대사의 핵심적 과제라 하더라도, 일본의 식민지시대까지를 그러한 시각으로 관찰하는 데에는 저항감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아니, 그러한 연구에 대하여 강력한 거부감을 보이는 것이 한국근대사학계의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일제시대를 경제발전론적 시각으로 연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비록 한국자본주의는 1960년대 이래의 경제개발계획의 실천으로 성립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일제시대의 사회경제구조의 변화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조선후기와 해방 이후가 바로 접속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20세기 자본주의는 식민지시대를 그 전사(前史)로 가졌다는 것을 특질로 하는 점도 있다. 아래에서는 우선, 1910년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 경제성장의 장기추세와 경제성장에 의한 산업구조의 변화를 개관하고 그것을 가능케 했던 여러 역사적 조건을 밝힘으로써, 한국의 경제성장이 일시적이거나 현상적인 것이 아니라 본질적인 것이며 현대사의 핵심과제임을 제시한다. 그리고 그러한 것이 사실이라면, 기존의 한국근현대사 연구의 기본 패러다임이 현대사적 과제와 어떻게 모순되는가를 밝히고, 현대사적 과제에 상응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다. 여기서 제시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은 경제사적 시각에서 제기된 것이지만, 다른 분야의 연구에서도 응용될 수 있을 것이다. 2. 경제성장과 산업구조의 변화 경제성장 한국에서의 고도경제성장은, 흔히 1960년대 이후의 현상으로만 알고 있지만, 추계(推計)가 가능한 1910년까지 소급해보면, 1960년대 이후만의 현상이 아니고, 1910년대 이후의 현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연평균 실질경제성장률은 1911~38년은 3.7%이고, 1953~90년은 7.7%이다. 후자가 세계적으로도 가장 높은 성장률에 속한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지만, 전자도 세계적으로 고도성장이라고 알려진 같은 시기의 일본 및 대만의 그것과 기본적으로 같은 것이다. 그리고 한국에서의 경제성장률은 1930~38년이나 1960년대 이후의 공업화기간에 특히 높았으므로, 두 시기의 공업화가 고도성장을 가능케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출국민소득의 측면에서 성장을 주도해온 항목을 보면 총고정자본 형성, 수출, 수입이 두 시기에 각각 7.9%, 9.9%, 8.0%와 14.3%, 17.2%, 11.8%를 나타내고 있다. 이는 각 시기 경제성장률의 약 두 배씩을 나타내는 것이다. 경제성장률보다 수출과 수입의 무역성장률이 높다는 것은 경제성장이 진행될수록 국민경제의 무역의존도가 높아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역의존도의 추이를 보면, 1911~38년에는 15%에서 65%로, 1963년~현재까지는 12%에서 70% 전후로 급격히 상승하고 있다. 무역의존도는 1980년대 중엽 이후 크게 상승하고 있지는 않지만, 한국경제의 개방적 체질을 여실히 보여준다 할 것이다. 한국경제의 개방적 체질은 총고정자본 형성을 위한 재원조달에서도 명백히 드러난다. 총고정자본 형성률은 1911년에는 5.1%, 1938년에는 16.9%, 1990년에는 34%였는데, 국내저축은 1915년 0.6%, 1938년 10.6%, 1990년 36.4%였으므로, 두 시기 경제성장의 초기에는 해외저축이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 해외저축은 1930년대에는 3~6%, 1955~80년에는 4~9%를 차지했다. 그러나 1986년에는 무역수지가 흑자기조로 돌아섬으로써 투자재원의 해외의존은 기본적으로 해소되었다. 말하자면 한국은 경제성장이 시작되는 초기에는 가난한 나라였기 때문에 해외저축, 즉 자본도입으로써 경제개발을 추진했으나, 경제가 성장함에 따라 국내저축이 급속하게 증가함으로써 자립적 국민경제의 형성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와같은 무역의존도 및 해외저축과 관련하여 검토해야 할 두 가지 문제가 있다. 하나는 국민경제의 대외종속이며, 다른 하나는 외국자본에 의한 국민경제의 수탈이다. 높은 무역의존도와 투자재원의 외자의존도가 국민경제의 대외종속의 계기로 작용할 수 있음은 말할 필요도 없겠으나, 한국의 경우에는 그것이 경제성장과 자립경제의 형성으로 귀결되었다. 무역의존도에 관해서는 다음에 후발성이익의 흡수문제와 관련하여 다시 논하겠지만, 투자재원의 외자의존은 그간 국내저축률이 급격히 높아짐으로써 이미 해소되었다. 외국자본에 의한 국민경제 수탈은 수탈의 정의(定義) 여하에 따라서 아직도 행해지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지만, 국민경제를 피폐시키는 그러한 수탈은 한국에서는 있어본 일이 없다. 왜냐하면 외자는 기본적으로 자본축적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산업구조의 변화 이와같은 장기간의 고도경제성장은 선진자본주의 제국이 수백년간에 걸쳐 이룩한 산업구조의 변화를 100년도 안 되는 사이에 실현하게 하였다. 한국은 그간 순수 농업국으로부터 이제는 선진국 그룹 OECD의 멤버인 공업국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식민지체제나 종속체제하에서 쓰라린 경험을 한, 지금도 여전히 선진국이 되기에는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점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는 우리들로서는 좀처럼 믿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그같은 정상적이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여러 현상은 실제로 한국근현대사의 특질이며, 그러한 상황 속에서 이러한 산업구조의 변화도 있었던 것이다. 산업구조의 면에서 보면, 한국은 1920년대까지는 순수 농업국이었다. 1930년대에 들어서 식민지공업화가 진행됨에 따라 식료품 및 섬유를 중심으로 하는 공업이 발전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에는 ‘대륙전진병참기지정책(大陸前進兵站基地政策)’에 따라 금속공업과 기계공업도 상당히 발전하여 화학공업과 더불어 중화학공업이 크게 발전했으나 그것은 군사공업화정책이 낳은 이례적인 현상이었고, 한국의 공업은 1970년대 중엽에 이르기까지는 기본적으로 섬유공업을 중심으로 하는 경공업 단계에 있었다. 그러나 1970년대 중엽 이후에는 중화학공업화정책의 결과로 공업구조도 중화학공업 위주로 바뀌었으며, 이제는 임금수준이 선진국의 4분의 1 내지 2분의 1 수준으로 상승함으로써 대부분의 경공업은 생산기지를 임금수준이 한국의 10분의 1 이하인 중국이나 동남아시아로 이전하게 되었다. 이러한 산업구조의 변화를 통계수치로 나타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국내총생산의 산업별 구성을 보면 농업, 광공업, 써비스업은 1911년에는 각각 65.2%, 4.5%, 30.3%였으나, 1990년에는 각각 9.1%, 29.6%, 61.3%이다. 이에 따라 농업종사자의 비중이 크게 줄어들었는데, 1963년까지만 해도 61%였으나 최근에는 15%로 크게 낮아졌다. 거꾸로 도시인구의 비중은 1960년에는 28%였으나 1990년에는 74%로 높아졌다. 여러가지 점에서 고전적 자본주의와는 다른 비정상적인 자본주의 발전이라고 인식되어온 저간의 한국자본주의가 1인당 실질소득의 면에서나 산업구조의 면에서 선진자본주의 제국이 수백년간에 걸쳐서 달성한 성과를 100년 이내의 단기간에 이룩했다는 점은 참으로 놀랍지 아니할 수 없다. 3. 경제성장의 역사적 제조건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한국경제는 20세기 자본주의로서 19세기 자본주의와는 달리 자생적 발전과정이라는 측면보다도 선진자본주의에의 캐치업 과정이라는 측면이 강하다. 따라서 한국자본주의는 초기자본주의·산업자본주의·독점자본주의라는 발전의 길을 걷지 않고, 저개발국·중진자본주의·선진자본주의라는 발전의 길을 걷는다. 따라서 한국자본주의의 전개과정은 이식(移植)자본주의의 전개과정이며, 자본주의 발전의 역사적 조건도 19세기 자본주의의 그것과는 다르다. 자생적 자본주의의 발생과정에 관해서는 이미 모리스 돕(Morris Dobb), 폴 스위지(Paul Sweezy) 및 타까하시 코오하찌로오(高橋幸八郎) 간의 유명한 논쟁이 있다. 얼마 전의 브렌너(Brenner) 논쟁이나 근대경제학적 입장에서 전개되고 있는 프로토(proto, 原基的)공업화론도 모두 여기에 속한다. 그러나 이식자본주의의 전개과정에 관한 이론으로는 알렉싼더 거쉔크론(Alexander Gerschenkron)의 후발성이익(後發性利益)에 관한 논의나 아까마쯔 카나메(赤松要)의 경제발전의 안행형태론(雁行形態論)이 좀더 유효한 것으로 생각된다. 두 이론은 19세기 자본주의의 역사적 경험을 토대로 정립됐지만 모두 자본주의의 이식과정에 관한 이론이기 때문이다. 다만 두 이론은 자생적 자본주의의 발전과정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이식자본주의의 수용주체에 관한 고찰이 약하다. 이상의 여러 논의들을 고려하면서 한국자본주의의 객관적인 전개과정을 관찰해보면, 한국자본주의 전개의 역사적 제조건으로는 다음 같은 점들이 검토되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첫째, 한국에서 어떻게 밖으로부터 자본주의를 수용할 수 있는 정치·경제체제가 형성되는가. 이러한 체제는 밖으로부터 강제될 수도 있고 스스로 선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을 ‘개방체제와 후발성이익의 흡수’라는 각도에서 검토한다. 둘째, 한국에서 밖으로부터 자본주의를 수용할 수 있는 주체가 어떻게 형성되는가. 이 경우에는 한국 전통사회 내부로부터 반드시 자생적으로 자본주의적 제관계가 발생할 필요는 없으며, 밖으로부터 들어오는 자본주의를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가 없는가가 문제된다. 이것을 ‘소농사회와 농민·자본가·노동자층의 성장’이라는 각도에서 검토한다. 마지막으로, 후발자본주의일수록 제도개혁 및 경제정책의 전개 등 정부의 역할이 중요해진다. 이것을 ‘정부의 역할’이라는 각도에서 검토한다. 개방체제와 후발성이익의 흡수 한국은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개방체제를 유지하여왔으나, 1960년대 이래 수출지향 공업화정책을 추구하기 위해 정책적으로 대외개방정책을 추구한 것을 예외로 한다면, 한국의 개방체제는 제국주의 제국이 한국을 침략하기 위해 혹은 기타의 이유로 밖으로부터 강제함으로써 유지되었다. 그러므로 개방체제가 한국의 경제성장을 위한 필요조건이라고 말한다면 현재 한국근현대사학계의 상황 속에서 비판받을 각오를 해야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그것이 객관적인 사실이었음을 논증하려고 한다. 개항기에 제국주의 일본을 비롯하여 자본주의 제국은 군사·정치력을 동원하여 조선에 불평등조약을 강요하여 개방체제를 유지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아직도 조선정부가 건재하고 근대적 개혁을 단행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본주의의 침입에 강력히 저항했다. 그 결과 조선경제의 대외개방 수준은 매우 낮았으며 산업화도 거의 진행되지 못했다. 그런데 1905년의 을사조약과 1910년의 한일합방으로 사태는 일변하였다. 일본은 한국의 주권을 빼앗고 경제개혁에 착수한 것이다. 개방체제와 관련하여 중요한 조치는 1905년의 ‘화폐정리사업’이었다. 이 사업은 조선의 화폐제도를 일본의 그것과 동일하게 함으로써 조선을 일본의 엔(円)통화권으로 포섭한 것이다. 관세제도 면에서는 1920년에 이르기까지 10년간의 관세거치기간이 있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일본과 동일한 관세권으로 되었다. 그 결과 조선경제는 일본제국의 한 지역경제의 위치로 전락한 것이다. 그러나, 조선경제의 일본제국으로의 포섭은 조선과 일본 간의 무역을 촉진시키고, 일본으로부터의 자본 및 기술의 유입을 자유롭게 하였다. 이는 1920~34년의 ‘산미증식계획’과 1930년대의 식민지공업화정책의 전제조건이었으며, 그 결과 조선에서는 일본자본을 중심으로 하는 산업화가 진행된 것이다. 해방 이후 1945~48년에는 미군정이 실시되고, 1950년대까지는 일제 식민지경제로 인한 대외불균형과 6·25사변 등으로 미국 원조경제체제가 유지되었다. 1945~60년에 미국의 경제원조가 없었더라면, 식민지기의 대외적 불균형과 6·25사변에 의한 파괴 등으로 야기될 국민경제의 파탄을 막을 수 없었을 것이며, 삼백산업(三白産業)과 화학비료공업의 발전 등 기초적 산업화도 없었을 것이다. 1961년의 군사정부는 수출지향 공업화정책을 추진함으로써 개방체제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이 정책은 한편에서는 유치산업 보호정책을 동반하기도 하였으나, 개방정책을 일관성있게 추진함으로써 그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것이다. 구체적 내용이 무엇인지는 매우 이해하기 어려우나, 현정권이 ‘세계화’를 중요한 정책방향으로 제시하고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개방체제는 후발성의 이익을 흡수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유지해야 할 체제이다. 후발자본주의가 선발자본주의로부터 얻을 수 있는 후발성의 이익은 매우 다양하지만, 경제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 자본과 기술의 도입일 것이다. 앞에서도 본 바와 같이 한국은 기본적으로 자본부족 국가였다. 1986년 무역수지가 흑자로 반전되기까지 한국의 경제성장에는 해외저축의 역할이 매우 컸다. 자본도입은, 그중에는 무상자본의 도입도 있었으나, 기본적으로는 원리금을 상환해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자를 도입 활용해서 얻는 이익은 막대하다. 왜냐하면 본원적 자본축적과정에서 치러야 할 국민의 막대한 희생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술도입에서 얻을 수 있는 후발성의 이익 또한 매우 크다. 기술도입 상황은 기술도입의 건수로 직접 파악할 수 있으나 수입상품 구조로도 파악할 수 있다. 왜냐하면 기술은 상품에 체화되어 도입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수입상품 구조를 보면, 1930년대 중반까지는 경공업 제품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으나, 1930년대 후반부터 1944년까지와 1960년대 이후부터는 중화학공업 제품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중화학공업 제품 중에는 기계 등 자본재가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큰데, 이를 통하여 막대한 기술이 도입된 것이다. 한국의 경제발전이 수입된 기계와 부품에 얼마나 크게 의존하고 있는지는 다 아는 사실이므로 이에 관해서는 더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소농사회와 농민·자본가·노동자층의 성장 자본주의적 세계시장에 노출되어 있는 모든 저개발국에 후발성의 이익을 누릴 수 있는 기회가 다같이 주어진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모든 저개발국이 자본주의적 세계시장에 노출되어 있다거나 개방체제를 갖추는 것만으로 경제성장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 또한 객관적인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저개발국에서 후발자본주의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개방체제로 후발성의 이익을 흡수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하는 것에 더하여 이 후발성의 이익을 흡수할 수 있는 주체적인 조건이 갖추어져야 한다. 이 주체적 조건이 어떻게 갖추어지느냐에 따라 한 나라에서의 자본주의적 경제발전의 성패는 좌우되었다. 독일·이딸리아·일본 등의 19세기 자본주의는, 앞에서도 말한 대로 기본적으로는 자본주의의 자생적 발전의 길을 걸었으나, 후발자본주의적 측면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자본주의적 세계시장에 노출된 초기에는 대외종속의 위기를 맞기도 하였으나, 이미 자본주의의 자생적 길을 걷고 있었다는 주체적 조건이 있었기에 식민지로 전락할 위기를 극복하고 후발성의 이익을 흡수하면서 선진자본주의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20세기 중엽에 성립한 중진자본주의는 그러면 어떠한 주체적 조건이 갖추어졌기 때문에 중진자본주의로 발돋움할 수 있었는가. 아시아에 한정해서 보면, 20세기 중엽에 중진자본주의로 발돋움한 나라는 한국·대만·홍콩·싱가포르인데, 이들은 모두 중국계가 아니면 한국계이다. 즉 이들은 중국, 일본 및 한국으로 구성되는 동아시아 3국의 역사적 전통을 공유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이들은 20세기 후반기에 경제발전을 시작한 아세안(ASEAN) 제국과는 차이가 있으며, 또 우리는 아세안 제국의 발전에서 화교(華僑)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면 동아시아 제국은 그 전통사회에 있어서 아세안 제국과 어떠한 점에서 차이가 있었는가. 지금까지의 역사연구에 따르면, 근본적인 차이의 하나는 소농민경영(小農民經營)의 자립도에 있음이 확인되었다. 그 차이를 사탕수수 재배를 예로 들어 구체적으로 설명해보기로 한다. 세계적으로 사탕수수 재배는 플랜테이션경영이었는데, 동남아시아의 사탕수수 재배방식도 예외는 아니었다. 동남아시아의 사탕수수 재배가 플랜테이션경영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소농경영의 자립성이 매우 취약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만에서는 사탕수수 재배에서 플랜테이션경영이 예외적이고 소농경영이 일반적이었다. 소농경영이 플랜테이션경영보다 생산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이 점은 일반적으로 대규모 경영이 소규모 경영보다 생산성이 높다는 우리의 고정관념을 깨어줄 뿐만 아니라, 2차대전 이후의 토지개혁에서 두 지역간에 왜 차이가 있었는지도 설명해준다. 동아시아의 토지개혁은 모두 성공적이었으나, 동남아시아의 토지개혁은 그렇게 성공적이지 못했다. 그 근본적인 원인이 소농민경영의 성숙도의 차이에 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면 동아시아 3국에서 이 자립적 소농경영은 언제부터 형성되었는가. 지금까지의 연구에 따르면 중국은 15세기, 일본은 16세기, 조선은 17세기가 아닌가 추측되고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조선에서는 16세기 후반에 재지(在地)지주층에 의하여 토지가 개발되고 보()를 중심으로 하는 수리시설이 보급되어 종도법(種稻法)으로서 이앙법이 보급된다. 이앙법은 위험한 농업이라 하여 조선정부가 금지하는 바였으나, 17세기 전반기부터는 임진왜란으로 인한 인구의 급감으로 전국적으로 보급되었다. 왜냐하면 이앙법은 직파법(直播法)보다 중경제초(中耕除草)에 들어가는 노동력을 크게 절감시켜 농사일을 대폭 덜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토지생산성을 높이고 호당(戶當) 경작가능면적을 늘려주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표현에 따르면, 이앙법은 사반공배(事半功倍)였다. 이앙법은 또 벼농사에 들어가는 노동력을 크게 절약함으로써 노동력 부족으로 지금까지 소홀히했던 밭농사에 힘을 쓸 수 있게 했다. 한국에는 고려시대에 이미 면화가 도입되어 있었으나, 면화재배가 전국적으로 보급된 것은 17세기 이후부터이다. 이와 더불어 배추·무·파·마늘 등의 소채도 널리 재배되고, 담배와 고구마 등 새로운 작물이 도입되어 널리 재배되기에 이르렀다. 18세기 후반에 이르면, 가삼(家蔘)이 전업적으로 재배되고, 양잠의 중요성이 새로이 인식되기에 이른다. 요컨대 조선후기에는 주곡(主穀)생산에서 집약경영이 이루어질 뿐만 아니라 상품작물이 널리 보급되어갔던 것이다. 곡물생산의 집약화와 상품작물의 보급은 다각경영(多角經營)을 가능케 함으로써 농가경영의 안정성을 크게 제고시켰다. 이러한 농업생산력의 발전은 조선후기 상품경제의 발전을 가능케 하였던 조건이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연구에서는 이러한 농민경영과 상품경제의 발전전망에 관하여 서로 다른 두 가지의 견해가 제시되었다. 하나는 농민층의 양극분해를 통하여 농민경영 중의 선진적 경영은 자본주의적 경영을 지향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종래의 비자립적인 농민경영이 경영 안정성의 제고로 대농경영과 영세농경영의 비중이 줄어들면서 중농으로 농민경영이 균등화해갔다는 것이다. 개항 이후의 농민경영이 자본주의적 경영을 지향했던 것이 아니라 지주제하에서 중농경영으로 균등화해갔다는 사실로 볼 때, 조선후기 농민경영의 발전방향도 후자 쪽이 아니었던가 추측된다. 조선후기에는 소농경영의 자립화에 대응하여, 가족제도에서도 변화가 일어났다. 결혼 후 남자의 거주형태가 처가거주(妻家居住)로부터 본가거주(本家居住)로 변했으며, 상속제도는 남녀간 차별이 없는 분두분할상속(分頭分割相續)으로부터 남자 우대, 장남 우대의 상속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이러한 가부장적 가족제도는 우선 양반층으로부터 형성되고, 18세기에 들어서는 일반서민층으로까지 확대되어갔다. 이것은 소농경제의 자립도가 높아짐에 따라, 그 경영주체로서의 가(家)가 점차로 안정성과 영속성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기초한 것이었다. 또 이러한 변화는 주자학의 보급에 의하여 촉진된 측면도 있다. 조선시대는 신분제사회였으므로 재지지주층의 양반들이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서 유업(儒業)을 지키는 것이 아주 중요했으며, 그를 위한 교육기관도 보급되었다. 유업은 본래 과거제도와 관련하여 중요시되었으나, 조선후기에는 농업경영과 관련해서도 중요시되기 시작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조선후기에는 관직에 나아갈 수 없는 재지양반층이 두텁게 형성되는데, 그들 중에는 학문을 자기의 농업경영에 응용하는 경우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일례로 정다산가(丁茶山家)는 논 80두락과 밭 20일경(日耕)을 가지고 있는 재지소지주였는데, 『계경(鷄經)』 『농가월령(農家月令)』 『종축회통(種畜會洞)』 등을 저술하여 유업을 잇는 동시에 자가의 농업경영에도 이바지했던 것이다. 최근에 이러한 자립적 소농경영으로 구성되는 농촌사회를 소농사회(小農社會)로 파악하는 매우 주목할 만한 연구가 나왔다. 동아시아의 중세에서는 서유럽의 중세와는 달리 영주에 의한 대규모 경영이 없고, 오히려 지배층의 대경영 해체를 통하여 균질적인 소경영이 보편적으로 성립하는 것이 특징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소농사회의 성립은 동아시아사를 2분(二分)하는 획기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 획기성은 동아시아를 전근대와 근대로 구분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현대 동아시아사회를 밑으로부터 떠받치고 있는 기초적 제도인 촌락구조나 가족제도 등이 이 소농사회의 성립과 더불어 형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동아시아사회의 민중의 균질성이나 주민의 교육열 등도 조선후기 소농사회의 특성에서 연유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소농사회는 동아시아 근대사회의 모태라고도 할 수 있다. 일본의 경우에는 본래 소농사회 내부에서 자본주의의 자생적 발전이 있었기 때문에, 서구자본주의로부터 도전을 받았을 때 자본주의로의 자기변신이 가능했다. 그러나 중국과 한국의 경우는 소농사회 내부에 자생적 자본주의의 발전이 없었기 때문에, 밖으로부터 자본주의의 도전을 받았을 때 자본주의로의 자기변신이 불가능했고, 그 결과 자본주의 제국에 종속국이나 식민지로 포섭되었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한국근대사 연구에서는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로 포섭된 이후, 농업은 피폐되고 민족자본은 몰락해갔으며 노동자는 비숙련공 및 토건업의 자유노동자로 퇴적되어갔다는 견해가 강했다. 그러나 최근의 실증연구에 의하면, 그러한 견해는 객관적인 사실이 아니라 제국주의 비판을 위한 이데올로기임이 밝혀졌다. 일본의 식민지체제하에서도, 특히 1919년 3·1운동 이후 비록 초등교육에 한정되는 것이지만, 한국인의 근대교육에 대한 열기는 매우 높았다. 식민지하에서 한국농민은 농사개량이나 수리시설의 보급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였다. 식민지하에서 민족자본은 몰락해간다는 것이 종래의 견해였으나 사실 조선인의 근대공장은 1차대전의 호황에 힘입어 1916년 이후 꾸준히 발전하였는데, 1940년에는 조선의 총 공장수 7142개의 60.2%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필자의 연구에 의하면, 조선인 노동자 중에는 비숙련공과 자유노동자가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사실이었으나, 이들은 공업화가 진행됨에 따라 숙련공·기능공으로 향상되어갔다. 그런데 식민지적인 억압과 착취하에서 이러한 일이 어떻게 가능했는가. 식민지체제는 억압과 착취를 함과 동시에 식민지개발을 위한 근대적 개혁도 단행하였다. 식민지적 착취와 개발은 동전의 양면으로, 개발 없는 착취는 공공연한 고대 중세적 약탈일 뿐이다. 식민지시기의 한국인은 식민지적 개발사업에 말려들어갔다. 식민지권력이나 일본인 자본에 봉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그러한 과정에서 조선인들은 농민·자본가·노동자 등 자본주의 경제발전의 담당주체로 활발히 성장해갔는데, 그들이 그렇게 성장해갈 수 있었던 것은 소농사회에서 이미 그 기초적 자질이 갖추어지고 식민지기의 자본주의체제하에서 자본주의에 적합하도록 변용(變容)됨으로써 가능했던 것이라 생각된다. 식민지체제하에서도 활발하게 발휘되었던 이러한 한국인의 활동양상이 독립후 한국에서 더욱 활발히 발휘되었으며, 그것이 1960년대 이후 경제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정부의 역할 경제발전에서 정부의 역할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경제발전을 위한 제도개혁이고, 다른 하나는 경제개발정책이다. 우선 제도개혁에 관해서 보면, 한국정부에 의한 최초의 큰 경제정책은 갑오개혁 이후의 재정개혁과 광무양전(光武量田)이라고 생각된다. 근대국가의 건설을 위한 재원을 마련하는 데는 재정개혁이 필수적인데,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단행된 재정개혁은 여러가지 다른 요인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황실재정이 재정의 핵심을 틀어쥠으로써 실패했다. 그리고 광무양전은 조세수입의 대종(大宗)을 차지하는 지세의 안정적 확보를 위한 토지소유권 조사가 그 목적이었으나, 옛것을 근본으로 하고 근대적인 것을 참고로 한다〔舊本新參〕는 원칙하에서 단행되었기에 국가적 토지소유를 원칙으로 하는 결부제(結負制)를 기본제도로 채용함으로써 근대적 토지소유제도를 수립하는 데 실패했다. 결국 구한국정부는 근대적 개혁에 실패했던 것이다. 1905년 러일전쟁 이후 일본의 식민지권력은 ‘화폐정리사업’과 ‘재정정리사업’을 단행하여, 화폐제도로 엔통화제도를 구축해 종래의 문란했던 동전체제(銅錢體制)를 정리했을 뿐만 아니라 안정적인 화폐를 공급하는 동시에, 궁중(宮中)과 부중(府中)을 분리하고 정부재정에 황실재정을 편입시킴으로써 근대적 재정제도를 수립했다. 또 1910~18년에는 토지조사사업을 행하여 근대적 토지소유권제도를 확립하는 한편, 토지소유자를 명확히함으로써 안정적 지세수입을 확보하고 재정제도를 뒷받침했다. 이 시기의 제도개혁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는 여러가지 논란이 있지만, 그 제도들의 일부가 지금까지 기본적으로 시행되고 있다는 점은 유의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해방후의 중요한 제도개혁으로는 농지개혁과 적산불하를 들 수 있다. 농지개혁에 대해서는 그간 여러가지 평가가 있었으나, 그것은 지주제도를 철폐하고 자작농체제를 구축하여 농업발전에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적산불하는 이승만정권의 자유주의 정책의 결과인데, 시장경제체제의 수립에 크게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해방 직후에는 사회주의자가 아니더라도 평등과 국유에 대한 지향성이 매우 강했는데, 자유주의 정책의 원칙하에 적산을 불하한 것은 시장경제체제의 수립을 위한 매우 큰 제도개혁이었다. 지난 100년간에 가까운 경제성장을 위해서 여러가지 경제정책이 시행되었으나, 그중에서 중요한 것으로는 다음의 세 가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1920~34년에 걸쳐 시행된 산미증식계획인데, 이 계획은 농사개량사업과 토지개량사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토지개량사업은 수리시설의 확보가 그 중심적인 사업이었으므로 농업기반 구축사업이었고, 농사개량사업은 품종개량과 시비방법의 개선 및 농사기술의 개량 등이 그 내용이었으므로 소농경영의 합리화를 도모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산미증식계획은 미곡의 대일반출(對日搬出)이 기본목표였음에도 불구하고, 농업기반을 구축하고 농사방법을 크게 개선함으로써 한국농업을 한 단계 발전시킨 것이다. 둘째는, 1930~45년에 걸쳐 시행된 식민지공업화정책인데, 이것은 한국인에게 역사상 최초의 공업화경험이었다. 식민지공업화는 1937년 중일전쟁 이전에는 농업정책이 막다른 골목에 처하여 소극적으로 장려하는 수준에 그쳤으나, 중일전쟁 이후에는 일본의 대륙침략을 위한 ‘대륙전진병참기지정책’의 일환으로 추진되었기 때문에 자금계획은 물론 물동계획에까지 이르는 그야말로 ‘국가총동원체제’의 일환이었다. 그러므로 식민지공업화정책은 징용과 징병을 비롯한 악명높은 인력의 강제동원과도 관련되는 것이며, 한국인을 총체적으로 전쟁과 전쟁경제에 휩쓸어넣은 것이었다. 이것은 피식민지민의 가혹한 시련이라는 의미뿐만 아니라, 한국인에게는 최초의 자본주의적 고통에 대한 경험이라는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한국인은 이러한 시련과 고통을 통하여 나름의 근대적 변신을 꾀해갔던 것이다. 셋째는, 1960년대 이후의 수출지향 공업화정책인데, 이 공업화모델은 동아시아의 신흥공업국(NICs)이 그 경제발전의 경험을 통하여 창안해낸, 저개발 나라들의 경제발전에 일반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정책모델인 것이다. 중국을 비롯한 구사회주의 나라들의 개혁·개방정책도 기본적으로는 수출지향 공업화정책을 본뜬 것이다. 저개발 나라들은 개발 초기에 국민경제 자체만으로는 자본·기술·시장 등 모든 면에서 부족하여 경제개발의 애로에 부딪친다. 그러한 애로를 돌파하는 방법은 우선 개방체제를 구축하는 것인데, 이 개방체제를 매개로 외국에서 부족한 자본과 기술을 도입하여 조립·가공산업을 일으켜 생산물을 해외시장에 수출함으로써 국내시장의 협소와 외화부족을 타개해나가는 것이다. 한국은 이 과정에서 후발성의 이익을 흡수함으로써 압축성장을 달성, 30년 남짓한 사이에 저개발국으로부터 선진국의 문턱에까지 이른 것이다. 중진자본주의가 그 짧은 기간 안에 큰 희생 없이 자본주의화를 달성한 것은 인류역사상 최초의 경험인 것이다. 4. 새로운 패러다임 앞에서 필자는 한국 경제성장의 장기추세와 그 역사적 조건들을 살펴보았다. 경제발전이 한국의 핵심적인 현대사적 과제라는 인식에 입각하여 조선후기, 일제시대, 해방 이후를 경제발전이라는 시각에서 일관되게 고찰하였는데 이러한 시각의 제시는 한국근현대사학계에서 일종의 파천황(破天荒)일지도 모르겠다. 일제시대의 식민지사를 경제성장사적 맥락에서 고찰하는 것은 ‘민족정기’를 크게 훼손하는 작업임에는 분명하지만, 한국근현대사가 ‘민족정기’라는 이데올로기로부터 해방되지 않는 한 과학으로서 성립할 수 없다는 것 또한 분명할 것이다. 한국근현대사에서 ‘순수한 것’ ‘전통적인 것’ ‘민족적인 것’만을 남기고 그 이외의 모든 것을 제거한다면, 한국근대사는 아마 완전히 공중분해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국근현대사를 구성하는 요소들이 ‘한국적인 것’인가 ‘외래적인 것’인가를 문제삼을 것이 아니라, ‘한국적인 것’으로써든 ‘외래적인 것’으로써든 우리가 우리의 근현대적 삶을 어떻게 개척하고 있는가를 고찰의 중심축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현대 한국인의 새로운 삶의 개척에서는 당분간 역시 경제발전이 그 중심축으로 될 것이다. 필자가 한국현대사의 핵심적 과제가 경제발전이라 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이제는 앞의 논의들을 기초로 현재 한국근현대사 연구의 중심적인 패러다임을 비판적으로 고찰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해보기로 한다. 내재적 발전론 현재 한국근현대사 연구의 중심적 패러다임은 내재적 발전론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 내재적 발전론은 ‘정체사관’ 및 ‘타율성사관’에 대한 안티테제로 등장한 것으로, 제국주의의 침략이 없었더라면 한국도 스스로 자본주의사회로 발전했을 것이라는 가설에 입각해 있다. 그러므로 남북한 및 일본의 한국사학계에서의 조선후기 자본주의 맹아의 발생·발전에 관한 연구가 내재적 발전론의 출발점이었으며, 독립운동사·민족자본론·민족경제론 등은 자본주의 맹아론의 전개형태라 할 것이다. 내재적 발전론에 의하면 발전적 계기는 내부에서 주어지는 것이며, 외부적인 것은 침략이나 수탈의 계기로 치부되기 일쑤다. 오늘날 한국에서 식민지시대의 사회경제사 연구를 하는 경우 ‘수탈론’적 입장으로 쏠리게 되는 것도 그 배후에는 내재적 발전론이 있기 때문이다. 식민지사의 두 축은 역시 ‘수탈과 개발’이므로 식민지사에 관한 수탈사적 연구도 당연히 필요하다. 그러나 수탈사 일변도는 역사의 실상을 왜곡하는 것이며, 민족주의적 의식을 고취한다는 의의는 있지만, 사회경제사 연구의 본래 목적인 사회경제 변화의 다이나미즘에 관한 연구는 찾아볼 수 없게 한다. 따라서 수탈론으로는 사회경제사적 연구가 부진해질 수밖에 없고, 일제시대사에 관한 연구가 주로 독립운동사에 관한 연구로 경도(傾倒)되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자본주의는 본래 속성상 대외지향적이다. 맑스가 말했듯이 무역 없는 자본주의는 역사상 있어본 일이 없다. 그런데 내재적 발전론은 내부지향적이다. 민족경제론이나 민족자본론도 예외는 아니다. 따라서 내재적 발전론에 의하면 지향목표는 자립경제론, 더 나아가서는 자력갱생론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 내재적 발전론은 필연적으로 사회주의적 자립경제론과 친화력을 가지게 되고, 내재적 발전론자들의 사실상의 역사적 전망은 사회주의적 자립경제의 건설밖에 없게 된다. 오늘날 일국사회주의의 현상(現狀)이 어떤가를 보게 되면, 내재적 발전론이 얼마나 비현실적인가를 알게 될 것이다. 경제발전론 필자는 여기에서 한국근현대사 연구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경제발전론을 제기하고자 한다. 한국근현대사를 통틀어 볼 때, 1960년대 이래의 경제발전이야말로 한국근대사의 총결산이며 한국현대사의 유일한 전망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총결산이라는 의미는 다음과 같은 뜻이다. 우리는 그간 이러저러한 한국근현대사의 전망을 가져보았다. 그러나 그것들은, 경제발전을 제하고 나면, 단순한 우리의 희망에 불과했거나 그렇지 않으면 잘못된 선택이었다. 1960년대 이래의 경제발전이 아무리 모순에 가득 차 있고 우리의 소망 수준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더라도, 그것은 한국근현대사의 유일한 객관적 발전방향이었다. 경제발전이 한국근현대사의 객관적 발전방향을 이미 제시한 것이라면, 한국근현대사 연구방향에서 지금까지의 방황도 이제는 끝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지금까지의 한국근현대사 연구가 과학적 탐구가 되지 못하고 주관적 희망이나 이데올로기로부터 해방될 수 없었던 것은 한국근현대사의 객관적 발전법칙이 명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제야 한국근현대사의 과학적 탐구가 가능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유일한 전망이라는 것은 다음과 같은 뜻이다. 남북한을 통틀어 이제 한국현대사의 발전방향은 한국경제의 중진화로부터 선진화로의 방향밖에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이상(理想)으로는 여러가지 발전전망을 구상해볼 수 있겠으나, 이제 사회주의가 자기 본래의 체제원리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해진 이상, 한국현대사의 전망으로는 자본주의적 선진화밖에 선택의 길이 없는 것이다. 물론 자본주의적 선진화라고 하더라도 거기에는 여러가지의 변종(變種)이 있을 수 있다.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변종으로는 자유민주주의와 사회민주주의가 있다. 그 어느 쪽을 선택하는가 하는 것은 우리에게도 가능한 일이지만, 어느 쪽을 선택하든 중진화로부터 선진화로의 이행은 우리들이 달성해야 할 필수과제이다. 현재 우리들에게 임박한 통일의 과제도 한국의 선진화라는 맥락 속에서 검토되어야 올바른 해결방향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경제발전론을 한국근현대사 연구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받아들인다면, 연구시각에서도 근본적 변화가 있어야 한다. 내재적 발전론은 일국사적 시각이었다. 내재적 발전론은 그 방법론으로 ‘세계사의 기본법칙’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내적 동인에 의한 한 나라 역사의 단계적 발전이 중요시되며, 대외관계는 소홀히 취급된다. 그러나 앞에서도 보아온 바와 같이 한국의 경제발전은 일국사적 시각만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한국의 경제발전은 한국 내부에도 발전의 동인이 있음으로써 가능했지만, 자본주의적 세계시장으로부터 후발성의 이익을 흡수함으로써 가능했던 것이다. 따라서 한국근현대사를 올바로 연구하기 위해서는, 일국사적 시각과 더불어 세계체제론적 시각을 가져야 하며, 이러한 두 가지 시각을 가지고 행해진 연구결과를 종합함으로써 한국근현대사의 전체상을 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5. 맺음말 마지막으로, 1980년대 이후 한국의 성공적 경제발전이 점점 명백해지면서 등장한 일제 식민지시대에 관한 연구시각인 ‘수탈과 개발’ 또는 ‘침략과 개발’과 필자의 시각이, 어떤 점에서 같으며 어떤 점에서 다른가를 밝혀두고자 한다. 여기에서는 내재적 발전론과 그 논리적 계(系)로서의 수탈론도 아울러 비교·검토하는 것이 좋겠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필자의 시각을 좀더 분명하게 드러내주기 때문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수탈과 개발’이나 ‘침략과 개발’은 6,70년대에 세계학계를 풍미하던 종속이론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등장한 것이다. 정통적 종속이론에 의하면, 세계경제는 중심과 주변으로 양분되어 있고, 주변으로부터 중심으로 끊임없이 잉여가치가 유출되기 때문에, 주변은 중심과의 관계를 끊고 비(非)자본주의적 발전을 도모하지 않는 한, 국가의 독립은 물론 자립경제의 수립도 불가능하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수탈론은 종속이론의 하나의 변종임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수탈과 개발’ 또는 ‘침략과 개발’의 시각이 제기한 문제는, 신흥공업국(NICs)의 경제발전을 기초로, 종속이론의 기본명제를 부정함과 동시에, 자본주의적 세계시장의 형성이 전자본주의적 제지역에 대하여 가지는 역사적 영향에 대한 고전적 명제, 즉 ‘자본의 문명화 작용’과 ‘자본의 문명파괴 작용’을 균형적으로 파악해보자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식민지체제가 피식민지민의 정체성(正體性)을 부정함으로써 문명파괴 작용을 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지만, 식민지화의 과정이 피식민지 사회구조를 자본주의적으로 개변시키고 피식민지민을 근대적으로 변신시킴으로써 독립 후의 자본주의적 발전을 위한 약간의 조건을 마련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이처럼 ‘수탈과 개발’ 또는 ‘침략과 개발’의 시각은 제국주의사적 입장에서 제국주의가 저개발 제지역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는가를 중심적으로 고찰한다. 필자의 경제발전론적 시각은 이러한 시각과 정반대이다. 경제발전론적 시각은 저개발 나라들에서의 중진자본주의의 발달이라는 입장에 서서 중진자본주의 발달의 국내적·국제적 제조건을 역사적으로 연구하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이나 식민지유제의 청산이라는 과거지사(過去之事)에 연연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살아있는 한국현대사의 핵심적 과제인 선진화와의 논리일관성하에서 식민지사를 연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연구를 위해서는 피식민지화의 경험에 대한 열등감이나 분노를 극복하고, 나라와 세계의 장래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독립국가의 시민적 자세가 요망되는 것이다. ------------------------------------------------------------------------------- -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 "활쏘기는 군자의 덕성과 비슷한 바 가 있으니, 활을 쏘아 과녁을 벗어나더라도 오히려 그 이유 를 자기 몸에서 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