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요키에로타) 날 짜 (Date): 1998년 11월 5일 목요일 오전 11시 02분 46초 제 목(Title): 신용하/식민지근대화론에 대한 비판 ‘식민지근대화론’ 재정립 시도에 대한 비판 신용하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머리말 ‘근대화’의 개념과 일제 식민지정책 일제 식민지정책의 본질 일제 ‘토지조사사업’ 시혜론(施惠論) 비판 일제 ‘토지조사사업’의 토지수탈 방법의 사례 일제 ‘식민지근대화론’부활시도:‘토지조사사업’의 경우 일제 토지조사사업의 본질: 토지수탈 맺음말 1. 머리말 최근 일본제국주의의 한국에 대한 1910~45년의 ‘식민지정책’을 놓고 이를 ‘근대화정책’ ‘개발정책’으로 재정립하려는 소위 ‘식민지근대화론’이 재대두하고 있다. 그들은 일본제국주의의 한국에 대한 식민지정책을 본질적으로 ‘수탈’이라고 보는 관점을 ‘수탈론’이라고 비판하겠다고 하면서, 일제의 식민지정책은 ‘수탈’을 넘어선 ‘개발’ 또는 ‘근대화’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들은 이 ‘근대화’ ‘개발’의 관점의 틀에서 ‘식민지시대’ 역사를 새로 정립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그뿐 아니라 현대 한국의 고도성장이 가능했던 기원도 일제의 식민지정책에서 찾고 있다. 그들은 이것을 새로운 시도라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들이 시도하고 있는 소위 ‘식민지근대화론’ 또는 ‘개발론’은 일제와 그 집행기관의 하나인 구일제 조선총독부와 일제의 식민지관료들이 1910~45년에 식민지 ‘조센징(朝鮮人)’들에게 귀가 따갑도록 설명하고 설득하며 주입하던 이야기들이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한국 민족과 사회는 역사적으로 한번도 제대로 독립국가를 영위해본 적이 없는 ‘타율성’이 지배하는 민족이며, 정체(停滯)되어 스스로는 ‘근대화’ ‘개발’ ‘발전’할 능력이 없는 ‘정체성(停滯性)’이 지배하는 민족이고 사회인데, 일본이 식민지로 품어 안아서 ‘근대화’ ‘개발’시켜준 ‘은혜’를 베풀고 있으니, 이 ‘시혜’를 감사히 생각해서 ‘자주독립’하려는 ‘민족주의를 극복’해야 하며, 일본의 식민지지배를 받기 때문에 개발되고 있는 ‘행복’에 감사해야 한다고 설명하고 설득하였다. 해방후 50여년간 한국 학계는 일본제국주의자들의 위와 같은 설명을 ‘일제 식민주의사관’으로 보아 그 거짓되고 황당무계함을 비판하고 극복해왔다. 한국학계는 자기민족의 역사를 실증적·과학적으로 새로이 정립하는 연구작업들을 수행하면서,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주의사관’을 비판·극복하는 작업들을 수행하여 상당한 성과들을 내었다. 또한 해방후 현대 일본정부의 각료들이 일제가 한국을 식민지정책으로 ‘근대화’시켜주었느니, ‘개발’시켜주었느니 하는 발언을 하면, 한국 국민들과 신문·방송들은 즉각 이를 ‘망언’이라고 규탄하고, 외교문제화되어서, 망언을 한 일본 각료들이 ‘사과’하거나 ‘사임’하는 일이 되풀이되어왔다. 그런데 최근 일본도 아닌 한국에서, 일제 ‘식민주의사관’을 극복하려 하는 노력에 대항하여 비판하면서, 일부에서 새삼스럽게 옛날 조선총독부와 식민지관료들이 떠들던 주장들을 학문의 이름으로 바꾸어 학술연구 또는 논문의 형식을 빌려 재정립할 필요는 어디에 있으며, 그 동기와 목적은 무엇일까? 2.'근대화’의 개념과 일제 식민지정책 일제 ‘식민지정책’에 의해 과연 ‘근대화’가 이루어졌는가를 엄격히 학술적으로 검토하기 위해서는 먼저 ‘근대화’의 개념의 골격만이라도 사회과학적으로 논의하여 기준을 설정할 필요가 있다.註1) 세부적으로는 ‘근대화’ 개념의 합의가 어렵겠지만, 그 주요 기본개념에는 합의가 있을 수 있다. 이 경우에 ‘근대화’란 정치적으로는 독립한 국가가 전제군주제를 입헌대의국가로 근대국가로의 체제변화를 하는 것이다. 경제적으로는 중세적 경제조직과 생산방식으로부터 산업자본주의의 공업화를 달성하는 것이다. 사회적으로는 전근대 신분제사회로부터 시민권을 가진 국민들의 근대시민사회로 변화하는 것이다. 문화적으로는 특권귀족층 중심의 귀족문화로부터 일반평민·국민 중심의 근대 민족문화로의 변혁적 발전을 성취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위의 개념을 기초적 기준으로 하여 일제의 식민지정책을 약간 분석적으로 고찰해보기 시작할 필요가 있다. 정치적으로는 일제의 식민지정책에 의해 독립국가의 입헌대의정치가 수립되기는커녕 독립국가 그 자체가 말살되었으니, 정치적 ‘근대화’ 그 자체가 말살된 것이었다. 정치적 근대화가 임시적으로라도 일부 달성된 것은 독립운동가들에 의해 중국 상해에서 1919년에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의해서이다. 상해 임시정부는 헌법을 제정하여 의회(의정원)를 구성하고 민주공화제로 수립됨으로써 외국에서 임시적으로나마 부분적으로 한국 역사상 최초로 정치의 근대화를 실현하였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일제의 식민지정책은 한국인의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주적(主敵)으로 규정하여 이를 파괴하려고 온갖 노력과 공작을 전개했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에서도 일제 식민지정책이 한국의 근대화를 실현해주기는커녕 도리어 한국의 근대화를 적으로 규정하여 파괴하는 정책을 강행했음을 알 수 있다. 경제적으로는 일제의 식민지정책에 의하여 한국인의 산업자본주의 공업화가 확립된 일이 없을 뿐 아니라 사회경제적 수탈이 극대화되었다.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에 의하여 한국에서 처음으로 토지사유제(토지제도의 근대화)가 확립된 것이 아니라, 한국에서는 이미 15세기부터 토지사유제가 확립되기 시작하여 구한말에는 이미 토지사유제에 의하여 토지의 사적 매매가 자유롭게 성행하고 있었다.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은 토지수탈을 목적으로 시행되어 한반도 전국토의 약 50.4%를 일제 총독부 소유로 무상약탈하고 한국농민의 권리를 소멸시킨 토지약탈정책이었으며, 토지개혁의 성격은 전혀 없는 식민지의 사회경제적 수탈정책의 하나에 불과했다. 이 위에 일제는 반봉건적 지주소작제도를 1945년 8·15까지 총독부 권력으로 적극 옹호하고 한국농민들의 반봉건적 지주제도 개혁운동을 가혹하게 탄압하였다. 일제 식민지시대의 경제를 연구할 때 특히 무엇보다도 주의해야 할 것은 ① 민족별 구분(한국민족과 일본민족의 구분)을 분명히해야 하고, ② 비교는 한국민족이 ‘독립했을 때의 발전과 식민지로 전락했을 때의 발전’을 비교해 보아야지, 1910년의 지표와 1945년의 지표를 맹목적으로 비교하는 것은 과학적 고찰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일제치하의 ‘일본제국주의 식민지정책 부문’과 ‘한국민족 부문’은 실제로 갈등·대립관계가 대부분이었으므로 반드시 민족별 구분을 설정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민족별 구분을 하지 않으면 일제의 반대와 탄압과 박해를 받으며 한국민족이 투쟁하여 쟁취한 성과도 일제의 식민지정책의 업적으로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공업부문을 보면, 1920년 ‘회사령’ 철폐 이전까지는 회사의 설립과 존폐를 총독부의 허가제로 만들어 한국산업자본의 발흥을 권력과 무력으로 억압하였다. ‘회사령’ 철폐 후에 일본자본은 한국에 들어오기 시작했으나, 한국의 산업자본은 일제의 식민지정책과 통제로 제대로 발흥할 수가 없었다. 일제의 1930년 이후의 소위 ‘공업화’라는 것도 민족별로 구분해보면, 일제가 대륙침략을 위한 병참기지를 함경남도 장진호·부전호 부근에 설치했기 때문에 전체 통계에만 공업생산량 증가로 잡아 처리한 것에 불과했다. 이것은 한국 민족사회의 공업화가 전혀 아니라 일제의 대륙침략을 위한 군수(병참)공업에 불과했다. 한반도 내 일본자본의 중핵인 이 함경남도의 군수공업 시설은 일본의 군수공업 시설로서,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전리품(일본의 군수공업이었기 때문에)으로 간주되어 소련으로 뜯겨 실려갔다. 민족별로 구분해보면, 1941년 현재 한국 내의 공업자본의 약 94%가 일본자본이었고, 한국자본은 약 6%에 불과하였다. 일제하에서 한국 민족경제의 산업혁명은 있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몇개의 공업시설도 일제의 군수공업이 대부분이었고, 한국인의 공업부문은 전체 경제의 산업자본주의 확립이나 공업화 달성의 훨씬 이전의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또한 여기에 농촌·농업부문에서는 반봉건적 지주제도가 지배하여 일제에 의해 엄호되고 있었으니, 일제하의 한국 민족경제는 ‘근대화’가 달성되기는커녕 일제에 의해 근대화가 저지된 것이었다. 일부에서 해방후 1960년대부터의 한국경제의 고도성장의 기원을 일제식민지 경제정책에서 구하는 것은 전혀 근거없는 어불성설의 것이다. 일제의 한반도 내 공업시설은 대부분 군수공업으로서 북한지역에 있었고, 남한지역에 있던 몇개 공장도 1950~53년 한국전쟁 시기에 모두 파괴되어버렸다. 1960년대 이후 한국경제 고도성장의 주역 2000개 기업을 뽑아서 일제의 기업을 계승한 것이 있는가 실증조사를 해보라. 해방후 한국인이 새로 시작한 기업이 99%이고, 일제에 연결된 기업은 단 1%도 안 됨을 바로 알게 될 것이다. 1960년대 이후 한국경제의 고도성장과 일제의 식민지정책 사이에는 단속성(斷續性, discontinuity)이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한 사회적으로는 일제의 식민지정책에 의하여 시민권을 가진 근대시민이 육성되고 시민사회가 수립되기는커녕 가장 기초적인 시민의 기본권마저 철저히 탄압당했다. 시민의 기본권인 생명과 신체의 자유권, 재산의 자유권, 언론의 자유권, 집회의 자유권, 결사의 자유권, 출판의 자유권, 시민저항권, 평등권, 국민주권, 국민참정권 등 어떠한 권리도 일제하의 한국인들은 갖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이들을 가지려는 한국인의 사상과 행동은 일제에 의해 독립운동으로 간주되어 가혹한 탄압을 받았다. 사회신분제는 구한국정부에 의해 이미 1894년의 갑오개혁 때 폐지되었고 시민사회로 급속히 변동해가다가 일제의 침략과 식민지정책이 이를 저지하여 시민권의 신장이 저지되었을 뿐 아니라, 이미 가졌던 시민권마저 박탈당하여, 일제치하의 한국인은 무권리한 노예상태로 떨어지게 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일제의 식민지정책은 한국사회의 근대화를 달성해주기는커녕 도리어 한국사회의 근대화를 적극적으로 저지했던 것이다. 문화적으로는 일제의 식민지정책에 의해 민족문화의 근대화가 실현되기는커녕 민족문화 말살정책이 강행되었다. 일제치하에서 약간의 근대문화가 극히 부분적으로라도 창조·성취된 부분은 3·1운동에 의해 쟁취한 약간의 공간을 활용하여 한국인들이 일제의 검열과 탄압을 받아가며, 일본에 대항하여 투쟁하면서 한국인들이 창조한 것이었다. 즉 일제하에서 ‘근대화’가 성취된 부문의 대부분이 ‘한국민족 부문’에서 일제 탄압에 대항하여 민족운동을 하면서 성취한 것이었고 일제는 이를 탄압했었다. 즉 일제의 식민지정책은 시종일관 한국문화의 근대화를 저지하려고 온갖 검열과 탄압을 자행한 것이었다. 일제하에서 간행된 출판물들에 무수히 남아 있는 ‘검열’ 불통과의 흔적들이 그 명백한 증거가 될 것이다.註2) 일제의 식민지정책이 한국인의 교육을 진흥시켜준 것처럼 주장하는 것도 전혀 사실이 아니었다. 한국의 근대교육이 크게 발흥한 것은 구한말이었다. 이때 3천여 개의 사립학교들과 수 개의 전문학교들이 설립되어 신교육 구국운동이 크게 불타올랐었다. 일제는 한국을 식민지로 강점하자 1911년 9월 소위 ‘조선교육령’을 공포하여 한말에 애국계몽운동의 일환으로 한국인들이 설립한 사립학교들을 빼앗았다. 일제의 ‘조선교육령’은 ① 보통학교(소학교)는 사립학교를 인정하지 않고 모두 관공립 보통학교로 하며, ② 4년제 고등보통학교와 2~3년제 실업학교는 사립학교를 인정하되 일본국민이 될 성격을 함양·교육시켜야 하고, ③ 조선에는 4년제 전문학교만 인정하고 대학교 설립과 대학교육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교과서는 모두 총독부가 편찬하거나 인정한 것만 사용하도록 엄격히 규제하였다. 이 법령과 정책에 의거하여 일제는 2250개에 달하는 한국인의 사립학교와 각종 학교를 식민지 통치권력으로 빼앗아 접수하여 관공립 보통학교로 개편했으며, 대학은 설립하지 못하도록 엄격히 규제하고 식민지노예교육을 실시한 것이었다. 3·1운동 후 한국민족이 1920년부터 일제의 조선교육령을 부정하고 6개의 단과대학을 가진 종합대학교를 설립하기 위한 조선민립대학 설립운동을 치열하게 전개하여 성공 직전에 이르자, 일제는 이를 저지하기 위하여 식민지 한국에 이주한 일본인 자제들의 교육과 식민지 관리양성을 목적으로 1924년에 경성제국대학 예과를 설치하여 한국인도 일부 입학시키겠다고 했는데 이는 한국민족운동에 일제가 밀린 데 불과한 것이었다. 일제 식민지정책의 교육부문은 한국인의 근대교육을 발흥시키기는커녕 도리어 구한말부터 거세게 불타오른 한국민족의 신교육열을 억압하여 끄면서 교과서와 교육과목·교육내용의 통제를 통하여 한국민족 말살정책의 한 부문을 집행한 것이었다. 이와같이 조금이라도 분석적으로 보면 일제 식민지정책은 한국의 근대화에 저지적인 정책이었다. 일부 일본학자들과 한국학자들이 주장하는바, 일제 식민지정책이 ‘공업화’를 해주었다고 하는 그 1930년대 이후에 한국민족은 도리어 1인당 미곡소비량이 격감하고 식량을 일제에게 약탈당하여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했으며, 남편·아들·딸들을 일제에게 징용·징병·정신대·종군위안부 등으로 빼앗기고, 일제의 온갖 탄압과 착취 속에서 시민권은커녕 완전히 무권리한 상태로 아사(餓死)의 지경을 헤매고 있었다. 이것이 ‘근대화’ ‘공업화’ ‘개발’이란 말인가? 일제하에서 파편적으로 ‘근대화’가 추진되었던 부분은 근대화에 대한 일제의 탄압·저지정책에 대항하면서 한국인들이 민족의 소멸을 방지하려고 투쟁하여 이룬 부분적 성과였다. 일제하에서 일본의 식민지정책이 식민지상태로나마 한국을 근대화시켜주고 개발시켜주었다는 소위 ‘식민지근대화론’은 일본 제국주의자들과 그후 일제 옹호론자들, 신팽창주의자들과 그 추종자들이 주장하는 이데올로기적 허구에 불과한 것이다. 역사적 진실은 일제의 식민지정책이 한국의 근대화를 저지한 것이었다. 3. 일제 식민지정책의 본질 민족말살정책 그러면 일제 식민지정책은 어떠한 본질과 내용을 가졌었는가? 이 문제를 자세히 설명하려면 책을 쓰는 분량이어야 하지만, 간단히 요점만 지적한다면 ① 동화(同化)정책이라는 이름의 한국민족 말살정책과 ② 사회경제적 수탈정책이 일제 식민지정책의 양대 골간이었다.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정책은 한국민족에 대한 ‘사회경제적 수탈’과 함께 한국민족을 지구상에서 영구히 소멸시켜 일본인의 심부름을 하는 총체적 천민계층으로 만들려는 ‘민족말살정책’을 채택한 것이 서양 제국주의의 식민지정책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었다. 다른 민족의 의사도 물어보지 않고 다른 민족을 자기 민족에게 ‘동화’시키겠다는 것도 그 자체가 ‘민족말살정책’일 뿐 아니라, 일본제국주의의 한국민족에 대한 소위 ‘동화정책’은 한국민족을 일본민족과 대등하게 ‘동화’시키겠다는 것이 아니라, 차등과 차별을 두어서 민족으로서의 ‘한국민족’을 지구상에서 소멸시키고 목숨이 붙어 있는 한반도에 거주하는 ‘조센징’은 일본제국과 일본민족에 예속시켜 차별받는 노예적 천민층으로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일제는 ‘민족말살정책’을 강행하면서 한국인에 대한 ‘차별’을 공식적으로 제도화하였다. 한국인은 이 때문에 ‘조센징’이라는 이유만으로 모든 식공활동에서 극심한 차별을 당했다. 이것은 사회·정치 부문만이 아니라 경제부문에까지 적용되어, 예를 들면 한국인은 동일한 직장에서 일본인과 완전히 동일한 시간과 양과 질의 작업이나 노동을 하고서도 봉급이나 임금은 공식적으로 일본인의 약 50%밖에 받지 못하였다. 일제의 한국민족에 대한 ‘민족말살정책’의 강행 때문에, 각종의 간악한 근대 제국주의 식민지정책 중에서도 일제의 식민지정책이 가장 극악한 것이었으며, 한국민족의 고통도 ‘사회경제적 수탈’뿐만 아니라 ‘민족말살정책’ 때문에 그만큼 더욱 컸었다. 민족이란 “언어·지역·혈연·문화·정치·경제생활·역사를 공동으로 하여 공고히 결합되고 그 기초 위에서 민족의식이 형성됨으로써 더욱 공고하게 결합된 역사적 범주의 인간공동체”이다. 한국민족이 다른 민족과 구분되는 하나의 독자적 민족으로서 민족됨은 독자적인 언어·지역·혈연·문화·정치·역사의 공동과 한국민족에 공속(共屬)되어 있다고 하는 민족의식을 갖고 있을 때 성립되는 것이다. 일제는 1910년 8월 무력으로 한국을 강점하자 한국민족의 이러한 민족 구성요소들을 소멸시킴으로써 한국민족을 말살하려는 식민지정책을 실시하였다. 일제는 무력으로 한국민족의 지역〔國土〕을 빼앗고, 정치〔主權〕를 빼앗아 소멸시켰으며, 경제생활을 예속시켜 빼앗고 착취하였다. 한국민족 구성의 나머지 요소들인 ‘한국어〔民族語〕’ ‘한국 민족문화’ ‘한국 민족역사’ ‘한국 민족의식’을 소멸시키면 한국민족은 지구상에서 소멸되고, ‘혈연’의 공동성은 목숨을 잇는 것으로 전락하여 이제는 생물학적으로 목숨은 붙어 있어도 일본의 노예와 같은 예속 천민층으로 되고 민족으로서의 한국민족은 지구상에서 소멸되는 것이다. ① 한국어·한국문자 말살정책: 일제의 식민지정책은 한국민족을 소멸시키기 위하여 ‘한국어 말살과 한국문자 말살정책’을 강행하였다. 일제는 1910년부터 일본어를 ‘국어’로 하도록 강제하고 ‘한국어’를 박해하다가 1930년대에는 학교에서의 한국어 교육과 사용을 엄금하였다. 1937년부터는 농민들을 포함한 모든 한국인들의 일상생활에서의 한국어 사용을 엄금하고 일본어만 전용하도록 강제하였다. 농민은 우편물을 발송하려 하거나 면사무소에서 서류를 제출하려 해도 일본어를 전용하지 않으면 접수조차 해주지 않았다. 심지어 일제는 철모르는 초등학교 학생들이 부지불식간에 한국어를 한마디 사용하는 경우에도 매질을 하고 벌칙을 적용하였다. 일제는 1910년 한국을 병탄하자마자 한국어로 된 신문·잡지들은 모두 탄압하여 폐간시켰었다. 일제는 1919년 한국민족의 3·1운동으로 식민지통치에 대타격을 받고 할 수 없이 한국어 신문·잡지들의 발행을 일부 허용했다가, 1930년대에 들어서자 다시 이의 폐간 정책을 강행하여, 1936년에는 『신동아』를 폐간시켰으며, 1940년에는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 모든 한국어 신문들을, 1941년에는 『문장』 『인문평론』 등 모든 한국어 잡지들을 폐간시켰다. 1942년에는 한국어를 지키는 씨앗까지 없애야 한다고 하면서 한글연구 학술단체인 조선어학회를 강제로 해산시키고 그 회원들과 학자들까지 체포하여 투옥하였다. ② 한국민족문화 말살정책: 또한 일제는 ‘한국민족문화’의 말살·소멸정책을 강행하였다. 그들은 일제 기관을 동원하여 한국의 고유한 민족문화와 문화재를 조사해서 민족문화유산과 미풍양속들을 정책적으로 파괴하였다. 또한 수많은 문화재들은 일부는 파괴하고 일부는 약탈하여 일본으로 실어갔다. 일제는 식민지교육을 통하여 한국의 고유한 문화는 모두 ‘열등한’ 것이라고 거짓의 교육을 주입하였다. ③ 한국성명 말살정책: 일제의 한국민족문화 말살정책은 한국민족의 고유한 ‘성명(姓名)’을 말살시키려는 소위 ‘창씨개명(創氏改名)’의 강요에까지 이르렀다. 이것은 ‘혈연’ 공동의 의식을 소멸시키려 한 것임과 동시에 개인의 민족성 자체를 소멸시키려고 한 것이었다. ④ 한국역사 왜곡·말살정책: 일제는 또한 ‘한국 민족역사’를 왜곡하고 식민주의사관에 의하여 역사를 날조함으로써 한국 민족역사를 사실상 소멸시키려고 하였다. 일제는 조선총독부 안에 1916년 조선사편수회(처음 이름은 조선반도사편찬위원회朝鮮半島史編纂委員會)를 설치하여 조직적으로 한국역사를 왜곡하고 소멸시키는 작업을 강행하였다. 그리하여 일찍이 고대 고조선 때부터 국가를 건립하여 찬란한 선진 민족문화와 문명을 창조해서 후진 일본에게 가르쳐준 한국민족에 대하여, 한국민족은 고대부터 중국과 일본에 예속된 민족이라는 둥, 신라와 백제가 일본에 문명을 가르쳐준 것이 아니라 일본의 지배를 받았다는 둥, 일본이 고대에 김해 지방에 ‘임나일본부’를 두어 일대를 직접 식민지통치하고 신라와 백제와 고구려의 조공을 받았다는 둥, 일본민족은 일본의 신인 천조대신(天照大神)의 적자이고 한국민족은 그 서자로서 일선동조(日鮮同祖)·동조동근(同祖同根)이라는 둥 허무맹랑한 낭설을 지어내어 한국 민족역사를 왜곡하고 날조하였다. 일제는 고대역사뿐만 아니라 근대역사까지도 철저히 왜곡하고 날조하였다. 일제의 경제사학자 후꾸다 토꾸조오(福田德三)는 심지어 한국민족은 1902년까지 고대사회의 가족경제 단계에 정체되어 있던 민족으로서 일본역사와 대비하면 10세기 후지와라(藤原)시대에 해당하는 정체된 민족과 사회이며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은혜’를 입고 비로소 일본의 식민지정책으로 인하여 정체성을 탈피하여 발전할 수 있게 되었다고 주장하였다.註3) 일제의 이러한 주장은 모두 황당무계한 거짓이었고 역사 왜곡이었으나, 학교교육을 통하여 체계적으로 주입되었기 때문에 그 해독과 영향은 막심하였다. ⑤ 민족의식 소멸정책: 일제는 한국민족을 말살하기 위하여 이상과 같이 민족 구성의 객관적 요소들을 소멸시키려고 획책했을 뿐만 아니라 주관적 요소인 민족의식을 철저히 소멸시키려고 획책하였다. 일제는 이를 위해 한국 민족역사를 사실상 소멸시켜 일본역사에 편입해서 일본역사를 자기의 역사로 삼고 한국 민족의식을 버리도록 교육하였다. ⑥ 일본종교 숭배정책: 일제는 한국인들에게 한국 민족의식을 소멸시키고 일본민족에의 공속의식을 주입하기 위하여, 집집마다 일본 귀신을 모신 카미다나(神棚)를 만들어 세워 매일 아침 여기에 절을 하도록 강요하였다. 또한 그들은 한반도의 전국 각지의 구릉에 신궁(神宮)이나 신사(神社)를 세우고 한국인들에게 일제의 관제미신(官制迷信)인 신사참배(神社參拜)를 강요하였다. ⑦ 일본숭배사상 주입정책: 일제는 또한 1937년부터는 한국인들에게 매일 일본 천황이 있는 동쪽을 향해 최경례(最敬禮)를 하는 소위 ‘동방요배(東方遙拜)’라는 것을 강요하였다. 또한 1937년부터 그들은 모든 한국인들에게 한국인은 일본제국과 일본왕의 신민(臣民)으로서 충성을 다하겠다고 큰소리로 맹세케 하는 ‘황국신민의 서사(誓詞)’라는 것을 복창케 하였다. 사회경제적 수탈정책 또한 일제의 ‘사회경제적 수탈정책’으로서는 한국을 ① 일본 경제발전을 위한 식량공급지로 개편하고 ② 일본의 공업발전에 소요되는 원료 공급지로 만들며 ③ 일본제품의 판매를 위한 독점적 상품시장으로 만들고 ④ 일본의 자본수출에 따른 식민지 초과이윤의 수탈지로 만들며 ⑤ 일본의 생산비를 절하하는 노동력 공급지로 만들고 ⑥ 일본의 대륙침략을 위한 병참기지로 만드는 것이 대표적 정책이었다. 이 위에 1930년대 이후 제2차 세계대전중에는 ⑦ 백주에 식량과 물자를 지정해서 강탈해가는 ‘공출제도’ ⑧ 노동력의 강제동원인 ‘징용’ ⑨ 한국청년들을 일제 침략전쟁의 총알받이로 투입한 ‘징병’ ⑩ 12~40세까지의 한국여성에 대한 여자 정신대·종군위안부 징발의 악랄한 식민지정책을 자행하였다. 이러한 일제의 식민지 ‘민족말살정책’과 ‘사회경제적 수탈정책’의 융합의 결과로, 일제의 한국민족에 대한 식민지정책은 각종의 근대 제국주의 식민지정책 중에서도 가장 간악하고 가장 잔인무도하며 가장 야수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정책으로 한국의 ‘근대화’는 일제에 의해 저지당했다가 1945년 8·15 광복으로 다시 ‘근대화’가 전개되기 시작한 것이다. 4. 일제 ‘토지조사사업’ 시혜론(施惠論) 비판 일제의 한국에 대한 식민지정책을 ‘근대화’ ‘개발’ ‘시혜’라고 주장하는 일부는 일제 식민지정책의 맨 처음 대종(大宗)의 하나였던 ‘토지조사사업’이 수탈정책이 아니라 근대적 토지제도를 만들어준 ‘근대화’ ‘개발’ ‘시혜’라고 주장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토지조사사업의 ‘수탈’을 부정할 수만 있다면, 일제 식민지정책이 모두 ‘근대화’ ‘개발’ ‘시혜’라는 주장을 정립하기가 용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처음 대두한 것은 아니다. ‘토지조사사업’의 실시 직전과 종료 직후에, 예컨대 이 ‘사업’의 실무책임자였던 ‘조선총독부’ 총무과장 겸 분쟁지조사위원장 와다 이찌로오(和田一郎)는 이 ‘사업’의 ‘공로’와 ‘시혜’를 주장하기 위하여 조선에서는 종래 토지제도가 문란하고 토지사유제가 확립되지 못했던 것을 사유제를 확립하여 ‘근대적 토지제도’를 수립한 큰 공로를 세웠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예컨대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메이지(明治) 43년 10월 조선총독부가 설치되자, 토지조사사업은 한국정부의 기도를 계승하여 바로 그 실행계획을 확립해서, 토지소유권의 사정(査定)과 함께 토지등기제도를 개시하고, 지세제도의 쇄신, 지형측량의 완성과 맞물려서 조선통치의 일대 시기를 획하기에 이르렀다. 조선에 있어서 근세적 토지제도는 실로 토지조사의 완결로써 비로소 그 서광을 나타내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註4) 토지조사사업을 ‘근대화’의 ‘시혜’라고 평가 상찬한 사람은 당시 한국인 중에서도 존재했다. 그 대표자가 이완용(李完用)이다. 이완용은 토지조사사업의 종료에 대해 이것이 ‘조선의 발전’을 일으켰다고 ‘개발론’으로 다음과 같이 찬양하였다. 반도의 발전은 이것(토지조사사업)으로부터 수레바퀴가 출발했으며, 종래 비정(秕政)의 밑에서 신음하고 있던 서민은 오히려 그 실력을 휴양하고 더욱 행복을 증진시키며 모국(일본 ― 인용자)으로 하여금 서고(西顧)의 근심을 없게 했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삼가 오직 황상폐하(일본왕 ― 인용자) 지극한 덕치(德治)가 신부(新附)한 적자(赤子)의 산업의 안전을 염려하여 인정(仁政)을 강계(疆界)로부터 시작해서 토지조사사업을 행하였다. 또한 총독각하의 지도가 의당함을 얻고 토지조사국 직원이 예의려정(銳意勵精)하여 백난을 극복하고 각각 그 직을 다해서 ‘사업’의 성취를 빠르게 하여 조선의 발전을 일찍 일으킨 것을 신부인민(新附人民: 조선인 ― 인용자)은 충심으로 감사하여 영구히 잊지 않아야 할 것이다.註5) 그러나 와다 이찌로오와 이완용의 평가와는 전혀 달리, 실제로는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은 일제가 한국의 토지를 수탈·약취·약탈함을 무엇보다도 제1차적 목적으로 하여 그 목적을 달성한 사업이었다.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을 실증적으로 자세히 검토해보면, 그 진행순서는 ① 1907년부터 먼저 농경지에 대하여 ‘국유지’(역둔토)를 강제 창출해서 확보하며 ② 다음에 1910년부터 사유농경지(私有農耕地)에 대해서는 신고(申告)해서 재법인받도록 하고 그밖의 모든 농경지를 ‘국유지’(=조선총독부 소유지)에 강제 편입했고 ③ 임야(미간지 포함)에 대해서는 관문기(官文記)의 증빙서류를 첨부하여 신고(申告)해서 심사를 받도록 하고 그밖의 모든 임야를 ‘국유림’(=조선총독부 소유림)으로 강제 편입했으며 ④ 농경지와 임야 이외의 기타 특수토지들을 모두 ‘국유지화’(=조선총독부 소유지화)하였다. 이 과정을 통하여 일제는 종래의 무주공산(無主空山)·무주한광지(無主閒曠地)·관유지(官有地)·황실유지(皇� 鮑寀�, 宮庄土, 皇室有林 등)를 ‘국유지’(=조선총독부 소유지)로 강제 편입해서 약탈했을 뿐 아니라, 일제에 의해서도 명백하게 사유농지(私有農地)이며 사유림(私有林)이라고 추정된 농경지 약 96,700정보와 임야 약 3,375,662정보, 합계 3,472,362정보의 사유지(私有地)를 약탈해서 조선총독부 소유지에 강제 편입하였다.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이 일단 종료된 1918년말의 ① 사유농경지(私有農耕地, 垈 포함) 면적이 4,428,966정보註6) ② 사유림(민유림)의 면적이 6,610, 684정보, ③ 합계 11,039,650정보이었다. 이 사유지 면적 11,039,650정보는 당시 국토 총면적 22,246,523정보의 약 49.6%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이에 비해 일제가 ‘국유지화’(=조선총독부 소유지화)한 면적은 ① 농경지 등(대垈 등 포함) 272,076정보,註7) ② ‘국유림’이 9,557,586정보 ③ 기타 ‘국유지’ 1,377,211정보 ④ 합계 11,206,873정보에 달하였다. 이것은 당시의 국토 총면적의 약 50.4%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이것을 농경지 등과 임야로 구분하여 보면, 일제는 ‘토지조사사업’을 통하여 전국 농경지의 약 5.8%, 전국 임야의 약 59.1%, 종합적으로 전국토의 약 50.4%를 자본의 지출이 전혀 없는 식민지 강점의 무력과 권력에 의거하여 무상으로 약탈한 것이었다. 5. 일제 ‘토지조사사업’의 토지수탈 방법의 사례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에 의한 이러한 조선총독부 소유지로의 토지수탈 중에서 조선총독부 소유지(소위 ‘국유지’)와 관련된 농민소유지의 약탈방법의 몇가지 사례를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일제는 종래의 ‘무토역토(無土驛土)’ ‘무토둔토(無土屯土)’ ‘무토목장토(無土牧場土)’ ‘제언답(堤堰畓)’ 능원묘(陵園墓)의 ‘내외해자(內外垓子)’ 등을 조선총독부 소유지(소위 ‘국유지’)에 강제 편입시켰다. 여기서 ‘무토’라 함은 토지의 소유권은 민인(民人)이 갖고 오직 지세(地稅)만을 토지를 소유한 백성이 국가 대신 국가가 지정한 역(驛)이나 관아(官衙)나 군영(軍營) 등에 납부하는 사유지·민유지를 의미하였다. 이러한 ‘무토역둔토(無土驛屯土)’에서는 소유권이 백성들에게 있었기 때문에, 즉 민유지였기 때문에, 역·관아·군영이 백성들(농민들)로부터 징수한 것은 ‘소작료’가 아니라 ‘지세’뿐이었다. 주목해야 할 것은 ‘무토역토’에 대하여 가까운 시대의 예를 들면 갑오개혁(甲午改革) 때 독립된 조선정부는 무토역토에 대하여 “결세인즉 공수전으로서 보산역에 붙이옵고, 토지인즉 각각 논주인이 있어서 500여년간 서로 매매돼오던 토지이라”註8) 고 하여 역공수전(驛公須田) 등 무토역토는 백성들의 사유지이고 결세(結稅)만 특정 역에 납부해온 민유지임을 재확인하였다. 둔토(屯土) 등 기타 아문둔토(衙門屯土)의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였다. 그러므로 갑오개혁 때 조선왕조 정부는 종래의 역참제도(驛站制度)를 폐지하고 근대적 교통·통신제도를 채택함과 동시에 민유지인 ‘무토역토’는 이를 백성들에게 돌려주고 관유지(官有地)인 ‘유토역토(有土驛土)’만을 농상공부(農商工部)·군부(軍部)를 거쳐 탁지부(度支部)와 궁내부(宮內府)에서 관장하게 하였다.註9) 그러나 일제는 소위 ‘국유지’에 대한 ‘토지조사’를 하면서 이러한 ‘무토’의 역둔토를 그것이 ‘무토’(즉 토지소유권이 백성에게 있는 토지)라는 사실을 외면하고 그 다음에 종래 ‘역둔토’라는 명칭이 붙어 있었다는 것을 구실로 하여 모두 소위 ‘국유지’에 편입시켜서 일제 조선총독부의 소유지로 약탈해버렸다. 이것은 일제가 식민지 통치권력과 무력으로 한국 농민들의 사유지를 강제 약탈하여 일제 조선총독부의 소유지로 편입시킨 것이었다. 물론 일제의 이러한 민유지의 약탈은 그것이 ‘무토’의 역둔토이며 민유지임을 알지 못해서 그러한 정책을 실시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잘 알면서도 고의로 일제 조선총독부의 소유지 면적을 ‘무상’으로 확대하기 위하여 민유지의 약탈정책을 실시한 것이었다. 둘째로, 일제는 ‘제1종유토역토(第1種有土驛土)’ ‘제1종유토둔토(第1種有土屯土)’ ‘제1종유토목장토(第1種有土牧場土)’ ‘능원묘위토(陵園墓位土)’ 등 ‘제1종유토역둔토’를 ‘국유지’에 강제 편입시켰다. 여기서 ‘유토’역둔토란 것은 토지의 소유권을 특정의 역·관아·군영이 가진 역둔토를 의미하였다. 즉, ‘유토’란 관아의 입장에서 관아의 ‘소유권이 유(有)한 토지’의 내용을 축약한 의미이었다. 그러나 갑오개혁 때에 이르면, 이 ‘유토역둔토’는 다시 ‘제1종유토’ 역둔토와 ‘제2종유토’역둔토로 구분되었다. ‘제1종유토’역둔토란 특정의 역·관아·군영이 그 토지의 소유권을 가지고 농민들로부터 소작료〔賭租〕를 징수하던 토지였다. ‘제2종유토’역둔토란 ‘무토’역둔토와 마찬가지로 민유지에 역둔토를 설정했다가 또는 처음에는 유토역둔토였던 것이 그후 민유지화해버림으로써 소유권은 백성에게 있고 특정의 역·관아·군영은 소작료가 아니라 지세를 농민들로부터 징수하던 토지였다. 일제의 ‘제1종유토’역둔토에 대한 소위 국유지조사에는 두 가지 처리 방향과 방안이 있을 수 있었다. 그 하나는 이러한 ‘제1종유토’역둔토에서는 이 토지에서 소작농의 도지권(賭地權)과 경작권(耕作權)이 크게 성장하여 소작료율도 총생산량의 25~33%로 절하되어 있었으므로 소작농의 이 권리들에 기초하여 ‘제1종유토’역둔토를 소작농민의 소유지로 개혁적으로 처리하는 방법이었다. 실제로 황해도 황주군(黃州郡)의 일부 농민들은 일제의 소위 ‘국유지조사’에 당하여 ‘제1종유토’둔토의 자기들에게의 불하를 요청하기도 하였다.註10) 다른 하나는 일제가 조금이라도 ‘국유지’(=조선총독부 소유지)를 더 많이 착출(搾出)하기 위하여 이러한 ‘제1종유토’역둔토를 ‘국유지’에 편입시키는 처리방법이었다.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은 처음부터 조선총독부 소유지(‘국유지’)의 착출을 그 가장 기본적인 목적의 하나로 삼았으므로, 이러한 ‘제1종유토역둔토’를 ‘국유지’에 편입한 다음, 이 토지들에서의 소작농의 도지권과 경작권을 부정하고, 소작료를 일반 소작지에서와 같이 총생산량의 50% 이상으로 인상시켰다. 그 결과, 조선왕조시대에 이러한 ‘제1종유토역둔토’에서 도지권과 경작권을 가지고 있던 한국인 소작농은 그 권리들을 잃었을 뿐 아니라 소작료를 총생산물의 25~33%로부터 50% 이상으로 인상당하게 되었다. 이 사실은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에 토지개혁적 성격이 전혀 없었음을 단적으로 증명해주는 것이며, 도리어 그 역이 진실임을 증명해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일부 연구자들이 아직도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을 토지개혁·토지변혁의 일종으로 고찰하는 것이 얼마나 사실과 배치되는 것이며 황당무계한 것인가를 여기서 잘 알 수 있게 된다. 셋째로, 일제는 ‘제2종유토역토’ ‘제2종유토둔토’ ‘제2종유토목장토’ 등 ‘제2종유토역둔토’를 약탈하여 ‘국유지’에 강제 편입시켰다. 이 ‘제2종유토역둔토’는 본래 민유지에 대하여 특정 관아의 징세권을 설정한 것이거나, 또는 본래는 ‘유토’였으나 그 변천과정에서 매수 등 각종 경로를 통하여 갑오개혁 무렵에는 이미 사전화되고 민유지화되어버린 토지였다. 이것은 갑오개혁 때의 자료인 『결호화법세칙(結戶貨法稅則)』이 ‘제2종유토’를 설명하여 “관(官)으로부터 혹 민유지(民有地)를 한(限)하야 그 세금(稅金)을 여(與)하는 자를 말함”註11) 이라고 한 곳에서도 재확인할 수 있다. 이 토지들에서는 조선왕조 정부의 특정 관청은 소작료가 아니라 지세만을 징수하고 있었다.註12) 따라서 갑오개혁 때의 조선왕조 정부는 이 토지를 민유지·사유지로 처리하여 ‘제2종유토면세결(有土免稅結)’이라는 이름을 붙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국유지’에 대한 토지조사를 하는 경우에, 이 ‘제2종유토역둔토’는 토지조사의 주체가 누구이든지간에 당연히 백성들의 사유지로 처리되어야 할 민유지였다. 갑오개혁 때 조선왕조 정부는 이 ‘제2종유토역둔토’를 백성들의 사유지로 처리했던 적이 있으므로, 만일 그후 토지조사가 독립된 한국정부에 의하여 실시되었으면 이 ‘제2종유토역둔토’는 으레 민유지·사유지로 처리될 토지였다. 그러나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은 이미 민유지로 확립된 ‘제2종유토역둔토’를 모두 조선총독부 소유지(‘국유지’)로 강제 편입시켜버렸다. 이것은 일제가 식민지 통치권력과 무력에 의거하여 한국농민의 민유지를 공공연히 약탈한 것이었다. 넷째로, 일제는 궁장토(宮庄土)를 약탈하여 국유지에 강제 편입시켰다. 궁장토는 ‘궁방전(宮房田)’이라고도 부르던 것으로 궁중경리기관인 내수사(內需司)와 왕실의 일부 및 왕실로부터 출합(出閤)한 궁방(大君·公主·王子·翁主·後宮 등)의 경비에 충당하기 위하여 설정된 토지 및 수세지를 총칭한 것이었다. 갑오개혁 때 조선왕조 정부는 궁장토에 대하여 ‘유토’ ‘무토’를 막론하여 종래의 ‘면세’를 폐지하고 일반 농지와 마찬가지로 국가가 지세를 징수했으므로 종래 지세를 국가 대신 궁방에 납부하던 ‘무토궁장토’는 자동적으로 소멸되고 ‘유토궁장토’만 남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갑오개혁의 추진자들도 그렇게 추정했던 것으로 보인다.註13) 또한 일제의 조사자료도 갑오개혁에 의하여 모든 ‘면세지’가 폐지됨으로써 ‘무토궁장토’도 자연히 폐지되었다고 주장하였다.註14) 그러나 갑오개혁 이후에도 ‘무토궁장토’는 상당히 광대하게 남아 있었다. 광무 양전사업 때의 자료인 『각궁방절수무토면세결총수(各宮房折受無土免稅結總數)』라는 규장각도서에 의하면 갑오개혁 후 광무연간에도 약 13,527결 58부의 ‘무토궁장토’가 존재하였다.註15) 이것을 갑오개혁 때의 ‘무토궁장토’의 면적과 비교하면 7,899결 11부 7속이 감소된 것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무연간에도 13,500여 결의 광대한 면적의 ‘무토궁장토’가 존속한 것이었다. 일제는 이 사실을 잘 알면서도 이 13,500여 결의 ‘무토궁장토’를 그것이 백성들의 사유지임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모두 약탈하여 조선총독부 소유지(‘국유지’)로 강제 편입시켜버렸다. 다섯째로, 일제는 일사구궁(一司九宮)의 ‘제1종유토궁장토’는 황실을 존중하는 경우에는 모두 황실의 사유재산으로 처리해야 했을 토지였는데 구궁의 궁장토 중에서 7궁(壽進宮·明禮宮·於義宮·龍洞宮·祥宮·宣禧宮·景祐宮)의 궁장토는 모두 이를 ‘국유지’(=조선총독부 소유지)로 강제 편입시켜버리고 말았다. 여섯째로,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은 또한 역토·둔토·궁장토·목장토 등에 농민들이 정부로부터 부담을 경감하기 위하여 자기의 소유지를 형식상 투탁한 ‘투탁지(投托地)’와, 조선왕조 정부관리의 착오에 의하여 서류상으로 잘못 처리되어 관유지와 궁방전에 잘못 혼입되고 고의로 탈입된 ‘혼탈입지(混奪入地)’ 등을 ‘국유지’(=조선총독부 소유지)로 강제 편입시켜버렸다. 지금까지 지적한 바와 같은 방법으로 일제가 약탈한 ‘국유농경지’(=조선총독부 소유 농경지) 면적은 농경지에 대한 일제의 소위 ‘국유지조사’가 제2단계까지 끝난 1910년 9월 현재까지 128,800여 정보에 달하였다. 이 중에서 ‘국유지’(=‘관유지’)로 간주될 수 있는 ‘제1종유토역둔토’(제1종유토궁장토 포함)가 약 32,100정보였으며, 일제가 한국 농민의 민유농경지·사유지를 식민지 통치권력과 무력으로 약탈하여 ‘국유지’(=조선총독부 소유지)로 강제 편입시킨 농경지 면적이 약 96,700정보에 달하였다.註16) % 일제가 ‘토지조사사업’에 의하여 강제창출한 ‘국유농경지’(=조선총독부 소유농경지) 면적은 ‘역둔토분필조사’가 끝난 1919년 2월에는 더욱 증가하여 137,224.6정보에 달하게 되었으며,註17) ‘국유농경지’(=조선총독부 소유농경지)의 소작농은 307,800여 호에 달하게 되었다.註18) 이것은 1911년의 총 농가호수의 13.9, 1918년의 총 농가호수의 10.7%에 달하는 것이었으며, 당시의 순소작농가호수의 28.7%에 달하는 방대한 비율의 것이었다.註19) 일제 조선총독부는 소위 ‘토지조사사업’에 의하여 농경지에 대해서만도 137,224.6정보의 소작지와 307,800여 호의 소작농을 수취하는 국내 최대의 지주가 됨과 동시에 식민지 통치권력에 의거하여 가장 조직적이고도 무력적으로 한국 소작농을 착취하는 식민지반봉건 부재지주가 된 것이었다. 일곱째로, 일제는 방대한 면적의 미간지(未墾地)를 약탈하여 조선총독부의 소유지로 강제 편입하였다. 미간지의 면적은 1910년 4월 현재 약 1,200,397정보에 달하였다.註20) 이것은 당시의 추산된 농경지 면적인 1,806,327정보의 66.5에 해당하는 광대한 면적의 것이었다. 이 미간지 면적은 ‘무주한광미간지(無主閒曠未墾地)’와 ‘민유미간지(民有未墾地)’로 나누어 추산해보면, ‘무주한광미간지’가 약 595,400여 정보였고, ‘민유미간지’가 약 605,000여 정보였다. 1908년 1월 ‘삼림법’의 제정·집행을 통하여 일제는 무주한광지 약 595,000정보를 모두 ‘국유지화’하여 약탈했을 뿐 아니라, 민유미간지 605,000정보 중에서도 약 425,000정보를 약탈하여 ‘국유지화’하였다. 이때 ‘삼림법’에 의하여 민유미간지로 신고되어서 접수된 것은 약 18만 정보에 불과하였고, 일제가 국유미간지로 점탈한 것이 모두 약 102만 정보에 달하였다. 여덟째로, 일제는 ‘삼림법’ ‘삼림령’ ‘삼림산야급 미간지 국유사유 구분표준(森林山野及未墾地國有私有區分標準)’을 제정·공포하여 방대한 면적의 임야를 약탈해서 조선총독부 소유지로 강제편입하였다. 일제가 1908년 1월 21일 대한제국 정부의 이름을 빌려 공포한 ‘삼림법’의 특징은 삼림산야의 소유자는 ‘삼림법’ 시행일부터 3년 이내에 ‘관문기(官文記)’ 등의 증빙서류와 지적도를 첨부하여 농상공부대신에게 신고하도록 하고 기간 내에 신고하지 않은 삼림·산야는 모두 국유로 간주토록 했다.註21) 일제는 ‘삼림법’을 공포한 직후인 1910년 3월부터 8월까지에 걸쳐 그들 나름대로 사전에 ‘임적조사(林籍調査)’를 실시했는데, 그에 의하면 ① 무주한광지가 7,268,001정보, ② 사찰림(寺刹林)이 165,402정보 ③ 사유림이 7,380,843정보 ④ 국유림이 1,035,373정보로 추산되었다.註22) 일제의 추계에 의해서도 1910년 8월 현재 사유림의 면적이 7,380,843정보에 달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일제 ‘삼림법’의 앞서 든 바와 같은 제한조치의 규정으로 말미암아, ‘삼림법’의 소정기한인 1908년 1월 21일부터 1911년 1월 20일까지 ‘신고’되어 접수된 사유림은 약 220만 정보에 불과하였다.註23) 이것은 일제가 추계한 사유림 7,380,843정보에 대하여 29.8%에 불과한 것이었다. 일제의 추계에 의해서도 ‘삼림법’에 의하여 일제는 약 5,180,843정보의 한국농민의 사유림을 약탈하여 소위 ‘국유림’(=조선총독부 소유림)에 강제 편입해버린 것이었다. 일제는 1911년 6월에 ‘삼림법’을 폐지하고 그 대신 ‘삼림령(森林令)’을 제정·공포하였다.註24) ‘삼림령’은 ‘삼림법’에 의하여 대폭 축소 승인된 220만 정보의 민유림 이외의 더이상의 추가신고를 금지하면서 임야와 미간지에 대한 식민지 약탈정책을 더욱 강화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일제의 가혹한 무력탄압 밑에서도 ‘토지조사사업’ 도중에 임야와 미간지의 소유권 분쟁이 폭발하자, 일제가 임야와 미간지의 소유권 분쟁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하여 제정한 법규가 1912년 2월 3일에 일제 조선총독부 훈령 제4호로 공포된 ‘삼림산야급 미간지 국유사유 구분표준’이었다. 이 훈령은 ‘삼림법’ 제19조에 의하여 사유로서 신고된 220만 정보(이 중에서 미간지는 약 18만 정보)의 임야와 미간지에 한해서 다시 ‘국유·사유’를 재심(再審)하는 의미를 가진 것이었지, 그때에 신고에 누락되거나 ‘문기’가 없거나 ‘관문기’의 증빙서류를 갖추지 못하여 사유림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조선총독부 소유림(소위 ‘국유림’)으로 강제 편입된 임야의 신고를 받아 재심한 것이 아니었다. 일제의 이러한 임야와 미간지 약탈은 사유림의 실상과 너무 다른 것이어서 일제는 임야 약탈을 위하여 1917~24년에 걸쳐 별도로 소위 ‘임야조사사업(林野調査事業)’을 실시하였다.註25) 그 결과를 보면 일제의 소위 ‘국유림’이 9,557,586정보, 사유림이 6,610,684정보였다.註26) 그러나 일제의 소위 ‘임야조사사업’의 결과 인정한 사유림 면적은 일제가 1910년 3~8월에 조사한 임적조사(林籍調査) 때의 사유림 면적보다 약 770,159정보가 축소된 것이며, 일제가 1916년 현재 사유림이라고 추정했던 818만 정보보다 약 157만 정보가 축소된 것이었다. 일제는 ‘임야조사사업’ 때 한국인의 사유림 중에서 관문기가 없는 사유림 3,375,662정보를 ‘연고자 있는 국유림’으로 강제 편입했는데, 대체로 이 임야면적이 바로 일제가 ‘임야조사사업’을 통하여 한국인의 민유림을 일제의 조선총독부 소유림(소위 ‘국유림’)으로 약탈한 면적이었다. 일제는 이러한 정책과 방법으로 한국 전체 농경지의 약5.8%, 전국임야의 약 59.1%, 당시 국토총면적의 약 50.4%를 일제 조선총독부소유지(소위 ‘국유지’)로 약탈한 것이었다.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이 제1차적으로 토지수탈정책이었음은 증명되고 또 증명되는 불과 같이 명백한 사실인 것이다. 6. 일제 ‘식민지근대화론’부활시도: ‘토지조사사업’의 경우 광복 후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에 대한 조선총독부의 입장과 견해를 부활시켜서 일제의 ‘식민지근대화론’을 ‘토지조사사업’ 부문에서 재정립하려 시도한 것은 일본의 미야지마 히로시(宮嶋博史)였다.註27) 미야지마는 조선총독부 총무과장 겸 토지조사 분쟁지처리위원장 와다 이찌로오의 한국토지제도관을 높이 평가하여 옹호하고, 일제 토지조사사업에 비판적 견해를 가진 한국사연구 학자 하따다 타까시(旗田巍) 교수의 견해를 한국측 견해의 영향을 받은 견해라고 비판하면서, 자기의 토지조사사업관을 와다의 견해에 결부시켰다. 미야지마는 그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첫째,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은 종래 조선에서 확립되지 않았던 근대적 토지소유제도·지세제도를 확립한 역사적 의의가 있다. 둘째,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은 광무양전(光武量田)·지계사업(地契事業)이 내재적으로 근대적 토지제도를 확립하려고 시작했다가 완료하지 못한 것을 계승하여 수행한 근대적 토지개혁의 성격을 갖고 있다. 셋째, 총독부 토지조사사업을 계기로 ‘조선사회의 커다란 변동’ ‘커다란 사회변동’을 수행한 데 역사적 의의가 있다는 것이다. 미야지마의 저서는 일제 토지조사사업이 한국 국토와 농민의 토지를 약탈한 사실에는 일언반구도 논급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일제 토지조사사업이 조선에 ‘근대적 토지제도’ ‘근대적 토지변혁’을 확립했음을 강조하고, 이것을 ‘근대화(近代化)’라는 용어 대신 ‘조선사회의 커다란 변동’ ‘커다란 사회변동’으로 우회하여 표현하였다. 이 저서 간행 직후에 박명규(朴明圭)교수註28) ·윤수종(尹秀鍾) 교수註29) 등 한국의 소장학자들은 즉각 미야지마의 이러한 견해는 토지조사사업의 약탈성을 호도하고 신식민주의적 사관을 표출한 것이라고 날카로운 비판을 가했다. 그후 미야지마와 한국인 연구자 김홍식(金鴻植)·이영훈(李榮薰)·박석두(朴錫斗)·조석곤(趙錫坤)·김재호� ⓓ榧곽친� 등은 공동연구로 『조선토지조사사업의 연구』(민음사)를 1997년 4월에 간행하고, 그 내용의 일부를 조석곤 교수가 『창작과비평』 제96호에 게재하였다. 조석곤 교수의 논문의 목적은,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을 보는 수탈론은 ‘청산해야 할 환상’이라고 주장하면서, “이재무, 권영욱으로부터 본격적으로 제기된 이러한 관점은 김용섭, 신용하에 의해 체계화되어, 이후 ‘사업’에 관한 주류적 학설로 자리잡았다. 이하 ‘사업’과 관련되어 ‘수탈론’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들에 의해 확립되어 현재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주류적 위치에 있는 ‘사업’에 관한 이해방식을 지칭한다”註30) 고 스스로 밝혔다. 조석곤의 논문은 토지조사사업의 토지약탈을 부정하고 일제 토지조사사업이 ‘근대적 토지제도’를 확립한 정책이라는 미야지마의 견해를 따른 것이었다. 일본에서는 『창작과비평』에 이러한 관점의 논문이 게재되어 일제 식민지정책에 긍정적 견해가 확산됨을 환영하는 입장이었는지, 『산께이(産經)신문』이 1997년 8월 14일자에 이를 보도했고, 국내에서는 『동아일보』가 이를 취재하여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한국내 ‘식민지 근대화론’ 대두 ― 日 산케이紙 보도. “최근 한국 내에서 과거 일본의 식민지통치 결과를 긍정적으로 평가하자는 ‘식민지근대화론’이 대두하고 있다고 일본의 대표적인 보수계 일간지 산께이(産經)신문이 14일 서울발로 보도했다. 산께이는 또 일본 내에서 역사교과서 개정을 주장하는 이른바 ‘자유주의사관’(과거 일본의 군국주의 등을 미화하는 역사관) 움직임이 확대되는 데 대해 한국의 민족주의파 사이에 위기감이 높아지고 있다고 전했다. 다음은 『산께이신문』 보도의 요약이다. 한국의 진보적인 문예학술지 『창작과비평』 여름호는 지금까지 한국 학계 및 언론계의 주류였던 민족주의사관을 비판하는 특집을 게재했다. 이 잡지에서 연세대 조혜정(趙惠貞) 교수는 “한국도 자주적으로 근대화할 힘이 있었는데도 일본지배가 이를 방해했다는 ‘내재적 발전론’과 ‘일제 수탈론’ 등은 피해자의 비원(悲願)의식과 상처입은 자존심 회복을 위해 현실을 정확히 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또 일본 지배하의 토지조사사업은 한국 근대화에 도움이 됐다든지 식민지시대의 공업화를 높이 평가하는 조석곤 상지대 교수의 논문도 게재했다. 한국에서는 “일본의 식민지지배가 좋은 일도 했다”는 일본측 발언이 ‘망언’으로 규탄받고 있으나, 일본시대 재평가론은 실증적인 젊은 경제학자를 중심으로 조용히 확산돼 종합잡지에도 이러한 주장이 당당하게 등장하는 변화가 나타났다.註31) 이어서 『창작과비평』 제97호에는 미야지마 등의 『조선토지조사사업의 연구』를 비판하는 정태헌(鄭泰憲) 박사의 서평형식의 논문이 게재되었다. 이 논문에서 요약한 이 책(『조선토지조사사업의 연구』)의 요점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첫째, ‘(토지조사)사업’의 과정에서 수탈성은 없었다. “역사적 의의를 규정”(이영훈, 539면)할 만한 국유지(토지)약탈도 없었고, ‘사업’ 기간에 미가(米價)가 4배나 올라 지세부담률도 오히려 절반 정도로 줄었다. 박문규 이래 인정식·이재무·신용하에 이르기까지 토지수탈에 대한 억측이 확산되어온 것은 민족의 집단심성 구조가 이를 수용했기 때문이다(김홍식, 22면). ‘사업’을 ‘영구병합’(거창한 수준의 수탈)의 꿈을 가진 침입자가 말단 모리배와 결탁한 토지사기극으로 이해하는 것은 우리 민족이 봉착한 총체적 위기의 본질을 호도하고 왜소화시키는 무책임한 작태이다(김홍식, 31~33면). (…) 분쟁지 처리에서 민족별 편기(偏倚)도 없었고 민유처분에 관대했다(이영훈, 조석곤). 둘째, ‘사업’은 근대적 개혁이었다. 전국적 범위에서 인민의 사적 소유를 근대적 규정으로 법인화하고 증명제도를 구비하여 근대적 소유제도 및 지세제도를 확립했다. 토지파악의 측면에서는 ‘사업’이 상당히 철저하게 이루어진 광무양전과 계승관계에 있지만, 소유자 파악의 측면에서는 광무양전이 불철저했고 ‘사업’(일제 토지조사사업―인용자)을 통해 비로소 완결될 수 있었다(미야지마·조석곤·이영훈). 셋째, 농촌주민 또는 일반민중은 ‘사업’의 성과를 즐거워하고 협조했다. 실지(實地)조사나 분쟁지 처리에서 엄정한 공정성을 강조한 임시토지조사국처럼 강하고 효율적인 관료군이야말로 근대국가의 본질적 구성요소이다(박석두).註32) 정태헌 박사는 저자들이 총독부를 ‘국가권력’으로 이해하면서 ‘국가권력(총독부)’의 식민주의적 성격을 빼어버리고 ‘근대성’에 집착하고 있는 민족에 대한 부정적 경향을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다. 일반인민이나 농촌주민이 호응했다는 ‘국가권력(총독부 ― 인용자)’에 동의하지 못하는 3·1운동이 ‘사업’ 직후 전국적으로 일어난 일도 불가해한 일이려니와, ‘근대적 국가권력’(총독부 ― 인용자)에 대항하여 싸우다 죽어간 수만명의 의병은 참으로 생각없는 사람들이었다. 필자가 보기에 이는 사소한 표현상의 문제가 아니라 저자들이 애초부터 식민지성에 대한 관념이 없었고 ‘국가권력’(총독부 ― 인용자)에 대한 ‘근대적’ 의미 부여에 몰두한 반증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민족을 기본단위로 그 역사를 모두 설명할 수는 없다”(이영훈, 574면)는 주장은 인식영역을 넓혀야 한다는 충고로 이해되지 않고 ‘민족’ 개념이 인식대상에서 사라졌거나 희미해진, 나아가 부정의 대상으로 설정된 것으로 다가온다.註33) 7. 일제 토지조사사업의 본질: 토지수탈 필자가 일찍이 『조선토지조사사업연구(朝鮮土地調査事業硏究)』(1979)를 간행하여, 이 문제를 전문적으로 다루었으므로, 위의 제기된 문제에 간단히 논급하려 한다. 첫째,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은 ‘토지수탈’이 그 제1차적 본질이었다. 앞에서 이미 통계를 제시했듯이 일제는 토지조사업에 의해 한국 전국토의 약 50.4%를 조선총독부 소유지로 약탈했는데, 이 속에는 방대한 규모의 일반국민의 사유지인 농경지와 미간지와 임야가 약탈되어 포함되어 있음은 앞에서 밝힌 바와 같다. 미야지마 등의 책의 저자들이 어느 군 어느 면의 ‘토지대장’을 실증연구해보니 토지약탈이 나오지 않더라는 주장은 실증의 미숙이거나 왜곡이다. ‘토지대장’은 사정(査定)이 모두 끝난 후 사후에 만들어지는 것인데, ‘과정’의 토지약탈이 기재될 리 없다. 더구나 지방 면 일부의 ‘토지대장’은 전국 토지의 약탈성 문제의 증명자료는 처음부터 될 수 없는 것이다. 반증을 하고 싶으면 전국분쟁지조사위원회의 분쟁사례의 원자료들을 찾는 것이 좋다. 주의를 환기시키고 싶은 것은 일제 조선총독부도 토지소유권 분쟁이 총독부 수탈지(소위 ‘국유지’)에 많았음을 인정하여 “조선에서 토지사유권에 대한 분쟁은 그 수가 극히 많으며, 특히 그 대부분이 국유지(國有地) 또는 궁방·내수사·권세가·호족〔宮司權豪〕이 소유한 토지에 대한 것이라는 사실은 달리 그 예를 볼 수 없는 특이한 현상인 것이다”註34) 라고 인정했다는 점이다. 또한 일제의 현장에 나갔던 식민지관료들도 미야지마 등 이 책의 저자들의 일제 식민지정책 미화만큼은 미화시키는 못했다는 점이다. 일제의 임시토지조사국 측량과장 쯔찌야(土屋)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사실은 안외(案外)에도 조선인간에 있어서 토지소유권 분쟁이나 경계지의 분의(紛議) 등은 거의 없고, 때때로 있는 것은 민유지 대 국유지(총독부수탈지 ― 인용자)이든가, 내지인(일본인 ― 인용자) 대 조선인 간의 경계분쟁 등이다. 내지인이 일부러 경계의 애매함을 기화로 인접지를 침입하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은 민망한 일이다.註35) 둘째, 근대적 토지제도란 본질적으로 토지사유제도를 골간으로 하는 것이고, 한국역사에서 토지사유제도는 15세기에 확립되기 시작하여 19세기까지는 토지대장인 ‘양안(量案)’과 토지소유증명인 ‘문기(文記)’가 이미 확립되어 있었다. 이 토지사유의 근대적 재법인은 대한제국 정부가 양지아문(量地衙門)·지계아문(地契衙門)을 설치하고 미국으로부터 측량기계와 측량기사를 도입하여 1898년부터 실시한 양전·지계사업에 의하여, 토지측량을 시행하고 지계사업에 의해 소유권 증명등기와 발급을 실시해서 전국적으로 차례차례 실시되다가, 일본 제국주의가 1904년 2월 러일전쟁을 도발하고 일본군이 사실상 한반도 각 곳을 군사점령한 상태에 들어가자 중단되었다. 일제는 순조롭게 진행되던 대한제국의 양전·지계사업을 중단시키고 ‘을사5조약’ 강요 후 완전식민지로의 한국강점을 전제로 해서 한 조각이라도 미리 총독부 수탈지를 더 확보하려고 토지조사를 1907년 소위 ‘국유지조사’부터 먼저 시작하다가, 1910년 완전 병탄 후에 민유지조사로 확대한 것이었다. 따라서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은 독립된 대한제국 정부가 잘 시행하던 ‘양전·지계사업’을 중단시키고 이를 가로채어 식민지 토지약탈성을 선행시킨 토지조사사업이었다. 그러므로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은 정책적·구조적인 토지약탈성이 그 특징이며, 근대적 토지제도는 그에 앞서 조선왕조 후기와 대한제국 시기에 증명양식까지 근대적 제도가 이미 제정된 것이었다. 이것은 비유하면 마치 호구(戶口)대장에 등재된 구한말 성명 김광수(金光洙)를 일제의 요구에 의해 카네무라 미쯔로오(金村光郎)라고 소위 ‘창씨개명(創氏改名)’을 해서 호적대장에 등재한 후, 김광수는 전근대적 성명이고 카네무라는 근대적 성명이라고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카네무라 미쯔로오가 근대적 성명이라면 김광수도 근대적 성명이며, 단지 본래의 근대적 성명 김광수를 말살당하고 카네무라의 일본식 성명이 호적대장에 등재된 것뿐이었다. 이때는 카네무라를 근대적 이름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는 김광수의 ‘빼앗긴 이름’으로, ‘일본식 이름’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토지대장의 기재양식과 소유권 증명양식이 광무양전(1898~1904년)과 다른 일본식 양식이라고 해서 대한제국식은 근대적인 것이 아니고 일제 총독부식은 ‘근대적’인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셋째, 농촌주민과 일반민중이 일제 토지조사사업의 성과를 즐거워하고 협조했다는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그 역(逆)이 진(眞)이다. 물론 농촌에서도 일부 특정지주나 친일파 유지는 이에 협조했겠지만 이것은 극소수이고, 절대다수의 농민과 주민은 일제 토지조사사업에 저항하였다. 이 사실은 일제 총독이 스스로 인정하여 조선농민의 저항을 일제 경찰력으로 동원해서 사전방지하라고 다음과 같이 지시한 곳에서도 잘 알 수 있다. 근래 국유지 편입, 소작료 징수, 어업권의 허부 및 토지권리 관계 등에 관하여 지방민이 분요(紛擾)를 일으키고 다중(多衆) 집합(集合)하여 관청에 청원하고, 심하면 다액의 비용을 소비해서 연(延)하여 부락의 피폐를 초래하는 것도 적지 않다. (…) 이들에 대해서는 경찰이 상당 취체(取締)를 하고 있을지라도 지방관은 항상 이에 주의하여 필요한 경우에 있어서는 경찰관에 명하여 될 수 있는 한 사(事)를 미발(未發)에 방지하도록 기하라.註36) 일제가 미리 총독부 소유지로 약탈하기 위하여 ‘역둔토실지조사’를 할 때에는 의병들이 조사원들을 공격했기 때문에 그들은 일본군 또는 일제 경찰관헌의 엄호를 받아야만 하였다.註37) 일제는 이에 조사원들에게 “각지 주재의 수비헌병대(守備憲兵隊) 및 경찰관헌(警察官憲)에게 대하여 직접간접의 보호원조방(保護援助方)을 의뢰하고 동시에 각 조사반장에 대하여는 도처에 이들 관헌과 항상 원만히 연락을 확보하여 신변의 위험을 예방하고 실지에 관련한 행동의 민활을 가기(可期)하도록 훈유(訓諭)함”註38) 이라고 지시하였다.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은 일본군 무력의 엄호하에 진행된 토지수탈정책이었으며, “그것은 비유하면 한 손에 피스톨을 들고 다른 한 손에 측량기를 들고 강행된 토지점유정책이었다”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닌 식민지 수탈정책이었다. 8. 맺음말 제한된 지면이 이미 훨씬 넘쳐서 더 쓸 수 없어 멈추지 않을 수 없다. 결론적으로 다시 강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일제의 식민지 수탈정책을 절대로 ‘근대화’ ‘개발’ ‘시혜’ 정책으로 합리화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일제 식민지정책의 본질이 수탈정책이라는 사실을 증명해주는 자료는 산적해 있다. 이 ‘참 사실’ ‘진리’를 탐구하는 것이 ‘학문’이고 ‘학술연구’이지, 외국에서 누가 이런 말을 하고 이러한 주장들이 대두하니까 우리도 그에 따르자고 하는 것은 진리탐구의 자세가 아니다. 특히 일본에서 신팽창주의가 대두하여 과거의 침략전쟁을 ‘해방전쟁’이라고 주장하고 과거의 ‘식민지수탈’을 ‘근대화’ ‘개발’ ‘시혜’라고 주장하면서, 이러한 주장을 과거 식민지로 강점했던 나라들과 지역에 보급하고 서양 사람들에게 퍼뜨리기 위하여 뒤에서 각종 재정조달을 하는 추세 속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물론 우리의 소장학자들이 그러할 리가 없겠지만, 우리가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에 대해서도 진실을 탐구해야지, 일제 식민지 관리 와다 이찌로오가 1919~20년대 초에 주장한 ‘식민주의사관’에 입각한 설명을 오늘날 다시 부활시켜 토지수탈정책을 ‘토지근대제도 수립정책'으로 둔갑시킬 필요는 전혀 없다. 일제시대는 일제가 한국민족의 주권을 강탈하고 수탈한 시대이고 한국민족의 뛰어난 인사들이 독립운동가가 되어 일제에 대항해서 혈투를 전개한 시대이기 때문에, 자유사회에서 무슨 말을 해도 학문의 이름으로는 자유롭다 할지라도 일제 신식민주의자들과 신팽창주의자들의 주장에 부화뇌동하여 일제의 침략이나 식민지정책을 합리화하거나 미화하는 일은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이다. 일본 신팽창주의의 파고가 아무리 우리나라에 높게 불어올지라도, 우리는 진실 그대로 민족역사를 굳게 지키고 진실을 밝혀야 할 것이다. 진실의 태양을 손바닥으로 가릴 수는 없는 것이다. ------------------------------------------------------------------------------- -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 "활쏘기는 군자의 덕성과 비슷한 바 가 있으니, 활을 쏘아 과녁을 벗어나더라도 오히려 그 이유 를 자기 몸에서 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