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요키에로타) 날 짜 (Date): 1998년 11월 5일 목요일 오전 10시 56분 24초 제 목(Title): 정태헌/수탈론의 속류화속에 사라진 식민지 수탈론의 속류화 속에 사라진 식민지 정태헌 고려대 강사, 한국사. 저서로 『일제의 경제정책과 조선사회』가 있음. 비판의 초점이 된 토지조사사업의 수탈론 수탈론의 부정을 위한 핵심적 실증 내용 경제학의 ‘마술’에 사라진 식민지 끝내면서 1. 비판의 초점이 된 토지조사사업의 수탈론 조선토지조사사업(이하 ‘사업’)은 일제가 조선에서 원활한 식민정책을 수행하기 위해 각종 제도의 ‘정비’ 가운데 가장 먼저 착수했고 8년이나 걸려 시행한 큰 사업이었다. 그러나 그 중요성에 비해 ‘사업’에 대한 실증적 연구의 역사는 사실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대한제국의 광무양전지계사업(光武量田地契事業)과 일제의 ‘사업’에 대한 두툼한 실증연구서가 최근에 출간된 것은 대단히 반가운 일이다.註1) 기존 연구에 대해 매우 공격적인 이 책의 저자들은 ‘사업’을 둘러싼 기존 학설에서 극복되어야 할 ‘세 고비’로서 ① 일제의 토지수탈론, ② 전통적 식민지반봉건사회론, ③ 근대적 토지개혁으로서의 광무양전론 등을 거론한다. 이 가운데 저자들이 중점적 비판대상으로 설정하고 또 성공적으로 넘었다고 자부하는 부분은 수탈론註2)이다(이영훈①, 6~7면). 이 글은 이 부분에 초점을 두고 서평 형식을 빌려 저자들이 수탈론을 부정하는 밑바탕에 깔린 논리와 역사관에 대한 소회를 쓴 것이다. 각 방면의 좀더 깊이있는 실증 논쟁이나 역사관의 문제는 해당연구자들이 다뤄야 할 과제라고 생각한다. 2. 수탈론의 부정을 위한 핵심적 실증 내용 ‘사업’의 과정과 의의에 대한 저자들의 주장을 김홍식의 글을 참고하면서 정리하면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사업’의 과정에서 수탈성은 없었다. “역사적 의의를 규정”(이영훈③, 539면)할 만한 국유지(토지) 약탈도 없었고, ‘사업’ 기간에 미가(米價)가 4배나 올라 지세의 실질부담도 오히려 절반 정도로 줄었다. 박문규(朴文圭) 이래 인정식(印貞植)·이재무(李在茂)·신용하(愼鏞廈)에 이르기까지 토지수탈에 대한 억측이 확산되어온 것은 민족의 집단 심성구조가 이를 수용했기 때문이다(김홍식, 22면).註3) ‘사업’을 “영구병합”(거창한 수준의 수탈)의 꿈을 가진 침입자가 말단모리배와 결탁한 토지사기극으로 이해하는 것은 우리 민족이 봉착한 총체적 위기의 본질을 호도하고 왜소화시키는 무책임한 작태이다(김홍식, 31~33면). 실제로 조선 후기까지 높은 수준으로 발전해온 토지사유권에 대한 폭력적 수탈은 곤란했다. 물권적 권리가 아닌 경작권은 부정되었더라도 수탈대상으로 규정할 수 없고, 국유지에서 물권적 권리로 성립된 도지권(賭地權)의 경우는 매수방식을 통해 민유지화되었기 때문에 수탈을 거론하기 힘들다. 분쟁지 처리에서 민족별 편기(偏奇)도 없었고 민유처분에 관대했다(이영훈③·조석곤①). 둘째, ‘사업’은 근대적 개혁이었다. 전국적 범위에서 인민의 사적 소유를 근대적 규정으로 법인화하고 증명제도를 구비하여 근대적 소유제도 및 지세제도를 확립했다. 토지 파악의 측면에서는 ‘사업’이 상당히 철저하게 이루어진 광무양전과 계승관계에 있지만, 소유자 파악의 측면에서는 광무양전이 불철저했고 ‘사업’을 통해 비로소 완결될 수 있었다(미야지마·조석곤②·이영훈③). 셋째, 농촌주민 또는 일반인민은 ‘사업’의 성과를 즐거워하고 협조했다. 실지(實地)조사나 분쟁지 처리에서 엄정한 공정성을 강조한 임시토지조사국처럼 강하고 효율적인 관료군이야말로 근대국가의 본질적 구성요소이다. 조선 후기까지 사적 토지소유제가 발달되어 있어서 신고주의는 그에 조응한 효율적인 소유자 파악방식이었으며, 유씨가(柳氏家) 사례를 보면 신고주의에 대한 대응도 대한제국기의 양전이나 과세지 조사 때와 크게 달랐다(박석두). 3. 경제학의 ‘마술’에 사라진 식민지 기존 연구에 대한 임의적 규정과 수탈론의 속류화 저자들의 논리는 세 단계로 구분된다. ① 식민지적 수탈을 약탈론으로 속류화시킨다. ② 일제의 수탈을 근대의 보편적인 자본주의적·계급적 수탈로 제한하여 각종 제도와 기구의 ‘정비·이식’을 통한 조선경제에 대한 수탈의 실체와 개념을 형해화시킨다. ③ 총독부를 근대의 계급적 특징을 지닌 ‘근대국가’로 인식한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저자들은 먼저 기존의 수탈론이 “일제의 수탈을 자본주의적 수탈이 아니라, 지리상의 발견시기에나 있음직한 원시적 약탈로” 오해한 채 “본가(本家)의 자부심”을 지키는 데 급급하여 “타 학문분야의 연구성과에 대해 배타적으로 대응”한다고 비판한다(조석곤③, 356~57면). 어떤 연구든지 특정한 시각과 그에 따른 논의의 수준 및 독자성은 일차적으로 기존 연구에 대한 점검 수준에서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저자들의 주장을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 기존 연구는 식민지경제를 자본주의적 시각에서 바라보지 못했는가? 물론 이를 부정하던 인식틀(식민지반봉건사회론이나 식민지반봉건사회구성체론 등)이 존재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식민지자본주의론’--필자의 외람된 규정이지만--시각의 연구가 조기준(趙機濬)·홍성찬(洪性讚) 등 경제사학자들에 의해 일찍부터 제시되었다. 이들의 연구는 “근대(자본주의)는 선(善)이었다”(조석곤③, 357면)는 낙후된 의식에서 식민지경제를 보지도 않았고, “식민지시대를 반봉건사회로 볼 것인가 아니면 근대자본주의 사회로 볼 것인가”(이영훈①, 7면)라는 제한 아래 후자로 볼 수밖에 없다고 도식화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근대적’ 제도와 기구의 이식이라는 객관적 조건하에서 “근대자본주의” 일반과 다른 ‘식민지자본주의’의 역사성을 해명하는 데 관심을 기울인다. 정작 이러한 연구성과가 나오고 있을 때에도 저자들(의 그룹)은 조악한 논리의 식민지반봉건사회구성체론을 수용했다. 이제 저자들은 중진자본주의론을 수용하게 된 배경에 대한 성의있는 설명도 없이註4) 이전과 달리 식민지경제를 “근대자본주의” 시각으로 단순화시키고 “침략-개발론”을 거론한다. 이는 결코 새로운 시각도 아니려니와 오히려 이미 제기된 문제의식으로부터의 퇴행 또는 반동이라고 볼 수 있다. 둘째, 기존 연구의 식민지상에 대한 인식수준이 약탈론에 불과한가? 식민지반봉건사회구성체론을 비롯하여 기존의 식민지상이 일정하게 약탈론에 제약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사업’ 연구에 국한해 보더라도 1980년대 중반 이후 역사학계의 연구성과註5)는 약탈론과 전혀 다른 인식틀을 모색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저자들도 강조하듯 특히 배영순의 연구는 신용하 이후 ‘사업’에 대한 본격적인 첫 성과였다. 이 때문인지 배영순과 조석곤에 의해 수탈론의 오류와 “실증적 근거는 모두 사라졌다”(김홍식, 30면)면서, 입론근거가 다른 배영순의 논거를 자신들과 비슷한 시각으로 소개하고 있다. 이러한 오독은 그 연구자에 대한 실례이다. 배영순의 논거는 다음과 같다. ‘사업’에 의한 근대적 소유권 및 지세제도의 확립은 구한국정부가 수행하려던 지주적 개혁(광무양전)의 지향을 완결하는 의미를 갖는데, 이는 두 사업에 반영된 계급관계가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의미는 완전히 다르다. 구한국정부가 근대화의 축적기반, 즉 개혁의 물적 토대로 장악하려던 지주제 및 지세수입은 일제의 저미가·저임금 정책의 기초로, 식민통치의 재정기초로 장악되었다. ‘사업’은 근대화를 위한 축적기반이 아니라 일제의 조선농업 착취공간, 잉여이전 메커니즘으로 전화되는 계기였다. 배영순의 논지가 토지약탈론과 거리가 먼 것(이영훈③, 544면)은 사실이지만, ‘사업’을 통해 수탈구조의 체제적 정착과 식민정책의 관계를 파악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사업’의 의의를 근대적 소유관계라는 제도사적 시각으로 제한해서 보는 저자들의 주장과는 다르다. 기존 연구에 대한 편의적 규정과 진지한 성찰의 결여는 다른 연구자들이 저자들의 “연구성과에 대해 배타적으로 대응”한다는 반론의 설득력과 논쟁의 생산성을 크게 떨어뜨린다.註6) 또 그 이면에 존재하는 “보다 많은 수의 연구자들”에 대해 자신들의 주장이 언제나 새롭고 주류였다는 자의식은 때로 “자본주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론적으로 이해하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註7)고 이견을 깔아뭉개는 방식으로도 표현된다. 역사상이 변화·발전되듯이, 다른 연구자들도 식민지경제가 어떠한 구조 속에 있었으며 한국경제사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가에 대해 고민한다. 이를 ‘식민지자본주의’, 나아가서 ‘식민지적 근대’에 대한 문제의식이라고 정리하고 싶다. 이는 자본주의화에만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제국주의의 ‘개발·수탈’에 내재된 총체적 의미를 역사적·과학적으로 해명하려는 것이다. 註8) 여전히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은 이 문제는 자국사와 자기 정체를 구체화시키는 이론화작업에 성공적이지 못했던 한국의 인문사회과학자들에게 남겨진 큰 몫이라고 할 수 있다. 수탈론의 형해화 저자들은 식민지적 수탈의 개념을 속류화할 뿐 아니라 그 실체의 형해화(形骸化)를 시도한다. 즉 식민지경제를 일국사 범주와 동일하게 설정하여 수탈 개념을 계급적 수탈 범주로 제한하고, 일제가 각종 ‘근대적’ 제도와 기구를 ‘정비·이식’함으로써 가능했던 조선경제에 대한 수탈을 인식대상에서 배제한다. 이를 위해 저자들은 정치·경제·문화의 각 수준을 인위적으로 구분·해체시킨다. 그래서 ‘사업’이 정치적 수준에서는 “결국 수탈적”이었지만, 경제적 수준에서는 “영구병합이라는 고차원의 엄청난 수탈을” 위해 “저차원의 폭력적 수탈을 행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정치·경제·문화의 여러 수준이 구조화된 총체”적 수탈성에 대해서는 동감하지만, “개별 수준에서는 비수탈 심지어는 시혜조차 동반”된다는 것이다. 나아가서 ‘사업’으로 “유의미한 정도의 지세·토지·경작권의 수탈이 동반되지 않았다는 매우 거북스러운 역사의 아니러니를 직시할 수 있는 문화적 수준”이 필요하다고 충고한다. 정치적 수준에서 주곡(主穀)의 관세주권 박탈, 미곡이출의 수탈성을 논할 수 있겠지만, 경제적 수준에서는 대일 수출시장에 관여한 농민·지주·상인은 유리한 시장조건으로 오히려 이득을 보았다고 강조한다. 이 점에서 “‘사업’이 지닌 경제적 수준의 의의를 분명히하는 작업의 중요성”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이영훈③, 545~47면). 결국 기존 연구에서 이미 통설화된 부분, 즉 ‘사업’의 본질상 당연한 결과인 지주층의 이익을 기준으로, 그리고 ‘근대’의 불가피한 계급적 특징을 지닌 ‘근대국가’ 총독부의 의지에 초점을 두어 ‘사업’이 경제적 수준에서는 ‘시혜적’이었음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사업’의 수탈성을 부정하는 근거로 지세문제를 거론하는 것(이영훈③)과 상통한다. 이때 전제가 되는 것은 일제(국가권력)에 대한 저자의 의식을 반영하여 총독부의 재정수입이 일본으로 유출되지 않는 한, 조선에서의 사용처는 불문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재정 면에서 보충금 등으로 일본에서 조선으로의 유입자금이 많은 “독특한 유형”의 식민지였고 ‘사업’ 기간에 지세가 증징되었지만 곡가로 상계(相計)하면 실제 부담은 오히려 줄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식민지 말기까지 거의 고정액으로 매년 유입된 보충금이 일본인 관리의 조선근무수당〔加俸〕에 소요되었고, 註9) 나머지 본봉 전액과 수당의 일부는 고스란히 조선재정의 부담이었다는 점만 지적하겠다. 보충금을 폐지하여 조선통치비용을 줄이려는 일본정부의 의지와 달리 식민지 말기까지--1920년대 이후에는 보충금의 대(對)세입 비중이 극히 미미해졌지만--보충금이 계속 들어온 것은 총독부가 식민통치에 대한 시혜인식을 부각시키기 위해 “정치적 의미”의 중요성을 강력하게 고집한 결과였다. 결국 ‘사업’ 기간에 조세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 ‘근대적’ 지세는 조선사회를 위해 생산적으로 사용되었다기보다 일본인 관리의 봉급 부담 등 식민통치비 조달에 크게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註10) 몇몇 연구의 지적대로 지세 부담이 일본보다 크게 낮았던 것은 사실이다. 이는 총독부권력의 ‘시혜성’을 반영한다거나 “비정통성”과 “도덕적 결함”이라는 추상적 이유 때문이 아니었고, 조선이 일본을 위한 저렴한 미곡 보급기지로 규정된 식민정책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일본인(자본)을 조선의 토지로 유인하고 식민지 지배의 계급적 기반인 지주층을 ‘육성’하기 위해서도 지세율은 일본보다 크게 낮아야 했다. 세율이 낮았고 지세가 일본으로 유출되지 않았으니 수탈성을 거론할 수 없다는 단순논리는 “경제학의 상식”을 속류화시킨 견해가 아닌가 한다. 특정 시기에 특정 계층의 이익을 통해 총독부권력의 ‘근대성’이나 ‘시혜성’을 논하는 것 역시 부자연스럽다. 특정계층(의 이익)은 일제 본국의 이해와 요구를 보장하기 위한 선택 대상이었지, 국가기구를 통해 자기 이해를 관철시키는 주체가 아니었다는 점에서 근대국가의 현상과 조응하지도 않는다. 저자들의 논리를 좇는다면 경제적 수준에서 일제는 “영구병합”을 통한 반대급부를 전혀 기대하지 않은 채 각종 비용을 치른 극히 비경제적인 계산을 한 셈이다. 더구나 저자들이 거론하는 정치적 수탈, 즉 “영구병합”을 위한 “거창한 수준의 수탈”이나 민족의 “총체적 위기의 본질”은 수사적 표현일 뿐 저자들에게 사실 관심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점이다. 일제가 조선민족을 일본민족과 평등하게 만들려는 의도가 없었던 바에야 엄청난 품이 들어가는 “영구병합”을 기도할 때에는 뚜렷한 목적이 있는 것이지 저자들이 “거창한 수준의 수탈”로 명명하는 “영구병합”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실제로 일제는 특히 전시체제로 접어들면서 수탈과 지배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이전까지 정착시킨 제도나 기구를 통해, 그리고 식민지적 ‘개발’을 통한 ‘성장’에 힘입어 자금·물자·인력에 대한 최대한의 수탈을 자행했다. 저자들은 통계적 추출이 결코 어렵지 않은 ‘성장’의 지표만 주목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그 결과와 의도를 둘러싼 실증과 역사적 해석에 대한 이론화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경제논리는 과연 정치적 환경에서 자유로울 만큼 구분되는 것일까? 각 층위를 구분하는 저자들의 의도는 무엇일까? 저자들이 인위적으로 층위를 구분한 것은 식민지적 수탈을 부정하기 위해 연관성이 설정되지 못한 개념을 나열한 것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 지주제 사례연구에 따르면 조선인 지주들은 ‘사업’ 이전에 이미 대지주로서의 발판을 마련했다. 조선의 거래관행에 익숙하지 못하고 토지집적에 장애를 느낀 이들은 일본인이었다. 저자들이 전혀 주목하지 않은 부문이지만 ‘사업’의 ‘성과’ 중 하나가 광무양전 때까지 유지된 일본인(외국인)의 토지소유 금지조항을 해제한 것이었다. 실제로 ‘사업’은 식민지 권력을 배경으로 한 일본인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경제환경을 제공했다. 해방후 남한의 경우 과거 일본인소유(신한공사) 농지가 26.9만 정보(경작지의 12.3%)나 되었고, 신한공사 경지의 52%가 기름지고 수익성 높은 전라도에 집중되었다.註11) 그만큼 조선인 중소지주들이 몰락한 셈이다. 이러한 현상은 저자들의 논리에 따르면 자본주의적 경제논리의 결과일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경제환경과 결과를 가능케 한 시발은 바로 ‘사업’이었다. 저자들은 경제논리가 식민지적 환경과 식민정책에 규정된 범주 안에서 제약된 틀이라는 점을 인위적으로 무시한다. 한편 일제하 자금·물자의 수탈과 유출을 거론한 필자의 글註12)에 대해 “경제학의 상식을 뛰어넘는 (수탈론의) 마술”에 불과하다는 이들의 비판註13)을 보면, 식민지적 수탈을 약탈론적 의미로 속류화·형해화시키면서 외면·부정하려는 의도가 잘 드러난다. 이들의 비판은 필자가 사용한 개념이나 통계 추정을 둘러싸고 있을 수 있는 문제는 거두절미한 채 ‘4/5’(수탈액/국내총생산 비율)라는 수치만 드러내어, 그렇다면 1911~38년의 경제성장률 3.7%는 불가능했을 것이고 조선인은 “굶주려 멸종했을 것”이라는 수사어를 동원한다. 결국 ‘경제학의 마술’에 따르면 ‘성장’을 보인 조선경제에 대한 수탈은 성립되지 않거나, (조선으로의) 유입자금이 (일본으로의) 유출자금보다 많거나 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필자가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진 동기는 식민지 ‘경제성장’의 이면에 무엇이 있을까 하는 초보적 의문이었지만, 구체적으로는 한일간에 (조선으로의) 유입자금이 (일본으로의) 유출자금보다 훨씬 많은 유입초과(43억 2,200여만엔)를 기록하여 식민지 지배가 조선의 발전에 기여했다는 「총괄수지표」를 접하면서였다. 註14) 필자는 경제학적 수지표 작성을 목적에 두지 않았던 그 글에서 ① 통계 추정의 한계, ② ‘유출’ 개념을 한일간 국경으로 제한하지 말고 식민지경제의 본질적 측면에서 식민지 ‘개발’의 결과 조선사회가 보유하게 된 생산력이 유실된--조선(인)을 위한 생산적 사용이 아니라는 점에서--점까지 고려해야 한다는 전제를 달았다. 註15) 따라서 이러한 ‘유출’ 개념에 따라 추계한 수탈액은 군사비·공채원리금·일본국채구입비 등처럼 바로 일본으로 유출된 부문만 집계한 것이 아니었다. 이 외에도 일본인 관리 봉급 등 조선 내에서 지출되었지만--일본인을 위해 지출되고 일본인 상권을 중심으로 회전된 부문, 일본인에게 대출된 미회수자금, 일제의 패전 직전·후에 일본인에게 긴급인출된 자금 등이 포함된다. 비교의 편의상 이 규모가 국내총생산의 55% 정도였다고 지적한 것이다. 註16) 그리고 저자들이 강조하는 ‘경제성장’ 기간(1911~38년)과 필자가 거론한 수탈의 집중기간(1937년 이후)이 일치하지 않아 비판의 초점도 어긋났지만, 이 차이를 논외로 친다면 전시(戰時)의 집중적 수탈은 일정하게 ‘성장’을 기초로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인식대상에서 사라진 식민지 저자들은 식민지에서 자본주의가 발달했다고 하면 “근대(자본주의)가 선(善)하다”는 발상을 가진 수탈론자들이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는 식민지 미화론으로 간주한다고 비판한다(조석곤③, 357면). 앞에서 ‘식민지자본주의론’ 시각의 연구를 소개하기도 했지만, 이러한 지적은 식민지하에서 자본주의 경제가 양적으로 ‘성장’했다는 사실을 전제로 다음 문제를 고민하는 최근 연구의 논지를 진지하게 파악하지 않았음을 반영한다. 무엇보다 저자들은 ‘근대’의 일반론적 계급모순을 넘어선 ‘식민지적 근대’의 복합성을 도외시한다. 계급논리에 제한되어 인식대상에 포함되어야 할 민족문제와 식민지적 수탈의 실체를 형해화하고 식민지 고유의 모순을 사상한다. ‘근대적’ 제도의 정착과정을 일국사의 ‘근대적’ 발전과정으로 인식할 뿐, 그에 동반된 “거창한 수준의 수탈”의 실체는 사실상 관심대상 밖에 있다. 총독부는 ‘근대적·자본주의적’ 국가 실체로서만 파악되고 인민이 살아 숨쉬는 식민지 사회의 역사성이 사상된 채 ‘순수하게’ 속류화한 경제학적 공간만 부각된다. 저자들의 관심대상은 ‘근대·자본주의’의 현상일 뿐, 내용과 구조, 발전전망의 문제의식은 찾기 힘들다. 해방 전후의 자본주의가 어떠한 물적·인적 ‘발전’ 속에서 연결되는가를 탐구한다는 문제의식은 이해되는데 ‘자본주의’(조선인 자본가) 이상의 답은 없다. 여기에 근대는 우리 힘으로 어려웠고 한국 자본주의의 기원은 일제에 의해 비로소 시작되었다는 강조점이 부가된다. 註17) 결과를 바탕으로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논리 아래 역사를 바라보고 ‘국가권력’(총독부)을 이해한다. 저자들이 수탈론을 부정하는 가장 큰 이유도 ‘국가권력’의 이러한 ‘근대성’에 집착하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저자들도 미야지마의 견해를 빌려 ‘사업’의 식민지성을 지적하기는 한다. 즉 식민지권력의 전제적 지배에 의해 근대적 토지소유제도가 이식되었지만 근대사회의 구성원리, 예컨대 국가권력의 조세부과 행위에 대한 국민의 동의권이 제도적으로 정착하지 못한 불안정한 과도적 체제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주·부르즈와의 절대적 사유(私有)에 기초한 식민지지주제가 식민지경제의 중추로 되어 반민중적·반민족적 특질을 노골화해갈 때, 제도를 넘어 가치로서 근대적 토지소유의 정착은 어려워 ‘농지개혁’을 통해 대다수 국민을 근대적 소유자로 만드는 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이다(김홍식, 50면). 저자들의 논리를 충실히 따른다면 지주·부르즈와적 소유권(‘사업’)에서 ‘국민적’ 소유권(‘농지개혁’)으로 발전한 배경은 근대의 일반적인 계급모순 때문이라고 해야 옳다. 그런데 이를 두고 저자들은 국민적 동의가 없어 근대적 소유권이 “제도를 넘어 가치로” 정착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추상적 이유를 제기한다. 그러나 근대적 계급사회에서 “국민의 동의”라는 표현은 정치적 구호로서는 의미가 있을지 모르나, 과학의 세계에서 이를 액면 그대로 전제한 채 다음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그만큼 저자들이 거론하는 식민지성 개념은 경제논리와 무관한, 이질적 국가권력의 전제성이라는 서술어일 뿐 구체성을 담고 있지 못하다. 저자들의 논리에 비추어 계급적 특징으로서 지주계급의 “반민중성”을 지적하는 것은 일관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에서 아마 유일하게 사용되었을 “반민족성” 개념의 실체는 저자들의 논리체계에 포함되지 않는다. 결국 ‘국가권력’에 대한 식민지성의 지적은 저자들에게 살아 있는 개념이 아니라 식민지미화론이라는 비판을 부정하기 위해 부가된 죽은 수사어에 불과하다. 좀스러운 지적이지만 한 예로서 토지조사 과정에서 “엄정한 공정성”을 띤 관료기구가 수행한 “‘사업’의 성과를 즐거워하”면서 호응한 주체를 지주층이 아닌 “일반인민”(김홍식, 46면) 또는 “농촌주민”(김홍식, 32면)이라고 지칭한 것도 이러한 혼란을 반영한다. 일반인민이나 농촌주민이 호응했다는 ‘국가권력’에 동의하지 못하는 3·1운동이 ‘사업’ 직후 전국적으로 일어난 일도 불가해한 일이려니와, ‘근대적 국가권력’의 ‘진의’도 모른 채 그에 대항하여 싸우다 죽어간 수만명의 의병은 참으로 생각없는 사람들이었다. 필자가 보기에 이는 사소한 표현상의 문제가 아니라 저자들이 애초부터 식민지성에 대한 관념이 없었고 ‘국가권력’에 대한 ‘근대적’ 의미 부여에 몰두한 반증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민족을 기본단위로 그 역사를 모두 설명할 수는 없다”(이영훈③, 547면)는 주장은 인식영역을 넓혀야 한다는 충고로 이해되지 않고 ‘민족’ 개념이 인식대상에서 사라졌거나 희미해진, 나아가 부정의 대상으로 설정된 것으로 다가온다. 최근 세계화 추세를 배경으로 일각에서는 한국사학계의 인식이 민족과 국가라는 좁은 영역에 제한되어 있다고 비판하면서 민족과 국가를 넘어선 세계사를 인식하자고 주장하기도 한다. 한국사학계는 이러한 지적에 겸허할 필요가 있다. 더구나 우리의 입장에서 세계화는 좌정관천(坐井觀天) 격으로 거역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슬기롭게 조응해야만 하는 대세이다. 다른 한편 세계화 논리는 세계경제에서 헤게모니를 쥔 국민경제·민족경제 영역이 확대되는 과정에서 상품과 자본의 좀더 자유로운 이동을 위해 민족국가의 영역을 거추장스럽게 느끼는 특정 주체의 이데올로기라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한국의 인문사회과학은 결코 중심국과 같을 수 없는 우리의 현실을 냉철하게 객관화한 위에서 세계화의 본질과 이를 선도하는 주체의 의도를 진지하게 분석하면서 대응할 수 있는 과학적 논리를 제시해야 하는 중대한 과제를 안고 있는 것이다. 4. 끝내면서 특정 사안에 대한 실증연구에서 세세한 시시비비가 불필요한 때도 있다. ‘사업’뿐 아니라 철도·도로·항만이 건설되고, ‘근대적’ 재정·금융 제도가 만들어졌다는 제도사적 사실에 대해서는 굳이 토를 달 필요가 없다. 문제는 그러한 기구나 제도의 ‘정비·이식’이 갖는 역사적 성격과 의미일 것이고 여기에서 실증의 동기와 내용, 그리고 역사관이 배어난다. 이는 분과학문의 구분을 떠나 역사를 대상으로 할 때 더욱 절실히 요구된다. ‘사업’과 같이 식민정책의 전개과정에서 일제가 주체가 되어 수행한 제도의 ‘정비’는 다음 단계를 위한 시작에 불과할 뿐 결코 끝이 아니다. 그런데 저자들은 그 시작을 ‘순수하게’ 속류화한 경제학적 공간을 통해 침소봉대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실증을 위해 들였을 엄청난 품과 노고에도 불구하고 저자들이 내린 결론과 바탕에 깔고 있는 논리에 동의하기 어렵거니와, 학문적으로 논쟁가능한 범주 안에 있는가 하는 회의도 없지 않다. 이 책 곳곳에서 느껴지는 저자들의 수탈론에 대한 분개를 접하면서 그 실체가 무엇이고, 무엇 때문에 그토록 분개해야 하는지 과문한 필자로서는 납득이 되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이러한 문제들을 떠나 ‘사업’의 제도사적 의미로 국한할 때, 이 책은 기존 연구보다 실증의 외연을 확대한 것은 분명하지만 교과서를 고쳐야註18) 한다는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의문이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 "활쏘기는 군자의 덕성과 비슷한 바 가 있으니, 활을 쏘아 과녁을 벗어나더라도 오히려 그 이유 를 자기 몸에서 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