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요키에로타) 날 짜 (Date): 1998년 10월 30일 금요일 오전 10시 56분 23초 제 목(Title): 한/장준하의 삶과 은관훈장(사설) . [사설] 장준하의 삶과 '은관훈장' ▶프린트 하시려면 월간 <사상계> 발행인이었던 고 장준하 선생에 대한 문화훈장 추서가 무산됐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5.17 쿠데타와 관련해 유죄선고를 받은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의 훈장은 유지하는 쪽으로 정부의 최종 입장이 정해졌다고 한다. 독립운동과 민주화에 일생을 바친 이의 훈장은 말썽이 생기고, 군사독재자들의 훈장은 유지된다 하니 이로 인해 생기는 도덕적 혼란감을 주체하기 어렵다. 장준하 선생의 삶은 고난의 한길이었다. 그의 일생은 항일 독립과 반독재 민주화, 그리고 민족통일을 위해 바쳐졌다. 갓 결혼한 장준하 선생은 학병으로 끌려간 뒤 부인에게 남긴 약속대로 일제의 병영을 탈출했다. 그가 임시정부를 찾으며 죽음과 여러차례 대면한 경험은 그 뒤 그가 산 원칙적 삶의 기본적 양식이 되었다. 광복군으로서 게릴라 훈련을 받아 한반도 침투를 눈앞에 두고 해방을 맞았다. 또한 그가 지난 53년 4월에 창간한 월간 <사상계>는 해방된 조국의 `자유'와 `민권'을 신장시키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사상계>를 통한 언론인으로서의 혁혁한 업적으로 그는 62년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막사이상' 언론부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박정희 정권의 군사독재에 맞서며 9차례나 투옥을 거듭한 것은 그 뒤의 일이다. 그는 유신독재에 맞서 치열하게 민주화운동을 벌이던중 75년 8월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정부는 애초에 은관문화훈장 추서 방침을 정하고 `잡지의 날'에 이를 수여하려고 했으나, 금관이 아닌 은관의 훈격이 고인에 대한 예우가 아니라며 유족들이 거부했다. 정부는 재검토에 들어갔으나 잡지 공로자에게 최고훈장을 수여한 적이 없다는 관례를 뛰어넘지 못했다. 정부는 나름대로 원칙을 내세우지만, 정부의 거부 이유는 설득력이 별로 없어 보인다. 잡지 공로자에게는 왜 최고훈장을 주어서는 안되는 것인지 납득하기 어렵다. 장준하 선생에게 주는 훈장을 잡지에 대한 기여로 굳이 좁힌 것도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또 문화부문만을 살피더라도 금관문화훈장을 받은 사례는 최근에도 있다. 언론에 기여한 것을 고려했겠지만 언론사 사장들이 금관문화훈장을 받았는데, 그렇다면 장준하 선생이 언론에 끼친 공적이 누구못지 않게 크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은 듯이 보인다. 어느 나라나 빛나는 도덕적 역사와 그 정신을 창조적으로 계승하지 못한다면, 그 나라가 참다운 미래를 향해 나아가지 못한다. 장준하 선생의 일생은 우리가 보고 배워야 할 대상으로, 특히 자라나는 세대들이 귀감으로 삼을 만하다. 의혹에 쌓인 그의 죽음에 대한 진상을 명확히 밝히기 앞서, 그가 사랑한 조국이 그에게 정중히 예우를 하는 일은 필요하며 그것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 "활쏘기는 군자의 덕성과 비슷한 바 가 있으니, 활을 쏘아 과녁을 벗어나더라도 오히려 그 이유 를 자기 몸에서 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