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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요키에로타)
날 짜 (Date): 1998년 10월 28일 수요일 오전 10시 35분 13초
제 목(Title): 박명림/브루스커밍스와 한국전쟁사연구



이 글은, 정치보드에서 ryuch님이 소개해주신 사이트에서 
퍼온글입니다. 

3.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와 한국전쟁 연구;전환과 향상 
1980년대를 현실사회와 정신의 영역 모두에서 하나의 전환기였다고 할 때 정신과 
지적 영역에서의 전환을 가져오게 한 주요 존재들을 편견에 치우치지 않고 
말한다면 맑스주의-레닌주의와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 연구가 대표적일 
것이다. 김일성과 주체사관 역시 한때 큰 영향을 끼쳤으나 이들의 영향과 
겹쳤거나, 이들에 비해 학문적 영향이 크게 미약했다. 이들의 이론이 현실에 
영향을 미치고, 역으로 현실의 격렬한 변동은 이들 이론의 국내적 심화, 또는 
재검토를 가져왔다. 커밍스의 연구는 특히 현대한국에 대한 관심의 복원과, 그것이 
80년대 지적 도전의 진앙으로 기능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커밍스의 한국전쟁 연구들註 1)은 한국전쟁과 현대한국 연구에 대한 이정표적 
대작이라고 불릴 만큼註 2)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수준 높은 이론과 방대한 
사실발굴, 날카로운 분석에 근거한 그의 저작으로 인하여 한국전쟁 연구는 한 수준 
도약을 이루었으며 비로소 세계학계의 중심 연구 주제의 하나가 되었다. 커밍스가 
등장하기 이전까지 한국전쟁은, 역사적으로는 냉전시기 동안의 중심적인 
사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학문적으로는 변방적인 주제로만 취급되어 왔었다. 
해외학계에서 그것은 정치학과 역사학, 사회학의 중심 주제로서보다는 다만 
외교·안보정책의 성공과 실패를 탐구하는 사례 정도로 여겨왔다.

오늘의 시점에서 이해할 때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 1·2권은 다음과같은 몇 
가지 점에서 중요한 학문사적 의미를 지닌다. 첫번째는 연구수준의 비약적인 
향상이라고 할 수 있다. 커밍스 이전에 한국전쟁 연구를 포함한 한국학은 
중국학이나 일본학에 비해 너무 낮게 평가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저작으로 인하여 한국학은 세계적 수준의 스칼라십에 도전할 수 있게 되었다. 비록 
현대한국의 여러 주제중 이 주제에 대한 연구가 가장 중요하고 또 논쟁적으로 
다루어져온 효과의 측면을 고려하더라도 이는 그의 연구가 지닌 압도적인 수준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이 사건의 연구사에서 그의 연구가 갖는 의미는 
이 사건이 현대한국에서 차지하는 위상만큼이나 전환적이었던 것이다.

두번째는 주제와 시기, 영역의 대폭적인 확장이다. 그의 연구로 인하여 우리는 
비로소 한국전쟁이 단순히 군사전선을 사이에 둔 1950년 6월 25일부터 53년 7월 
27일까지의 무력충돌과 쟁투의 의미를 훨씬 넘어, 많은 점에 대해 구조적 역사적 
지평에서 접근되어야 하는 사건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일제시대, 농민의 
존재조건과 인식의 문제, 지방인민위원회, 집합행동, 남한과 북한체제의 성격, 
게릴라투쟁, 토지문제, 45년 종전 이전 민족해방투쟁과 이후 국가건설문제의 
연속성, 세계체제적 시야와 민족해방적 시야의 접점의 확보시도 … 등 그의 
연구에서 발견되는 주제와 영역의 확장은 이전 연구에서는 사소하게 취급되었거나 
거의 다루어지지 않던 것들이었다. 문제가 없는 사람에게 문제는 존재하지 않는 
것, 즉 나타나지 않는 것이라는 점에 비추어 그의 연구는, 우리가 그의 시각을 
동의하든지 비판하든지, 우리를 학문적으로 자극하고 문제의식을 유발시키는 
수많은 문제들로 가득차 있다.

세번째는 미국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말함으로써, 비록 본인의 주장은 급진주의적 
시각으로 경도되었다는 한계를 안고 있었지만, 그로 인해 균형적인 이해가 
가능하도록 안내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는 미국의 외교정책·대한정책에 대해 
강한 비판을 제기함으로써 후대에 상이한 두 시각이 갖고 있는 간극과 심연을 
극복할 수 있는 지적 긴장을 제기해 주었다. 그의 연구가 없었다면 시각적 균형을 
고뇌하기 이전에 하나의 일방적인 연구경향에 매몰되어 있었을지 모른다.註 3) 
스칼라십에 의해 뒷받침되는 날카로움의 충격이란 다른 어떤 것보다도 크다는 
사실을 그의 연구는 유감없이 보여 주었다.

네번째는 연구방법과 이론의 영역에서의 기여라고 할 수 있다. 이 분야에 대한 
우리의 학적 고민은, 그의 방법에 대한 비판까지 포함하여, 사실 커밍스로부터 
유래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단순히 사실을 들어내고 배열하는 데서 
벗어나 그것들을 연결하고 의미를 추출하며 해석하기 위한 정교한 이론적 기초를 
구축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그리고 그에 근거하여 거대한 역사적 구조물을 
축조하고 있다. 우리가 한국전쟁을 연구하는 데 있어 많은 이론을 공부하고 그것의 
적용 여부에 대해 고뇌하였다면 그 자극은 커밍스로부터 나왔던 것이다. 어떤 
이론이든지 한 개인의 노력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그의 연구의 이론적 기초는 
서구 사회과학이 도달한 수준을 반영한 것이라는 점은 의심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을 한국전쟁이라는 구체적 사건에 적용하여 하나의 피조물을 빚어낸 것 또한 
그의 손을 통해서였다는 점 역시 부인할 수 없다.

끝으로 그의 연구는 자료의 거의 무한대적인 발굴과 정리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의 
연구는 당시의 시점까지는 가장 많은 자료를 본 연구였다. 물론 오늘날 새로운 
자료의 공개와 함께 그의 연구는 많은 한계와 자료편식을 노정하고 있으나 그 
시점에서 그의 연구가 포괄하고 있는 자료는 거의 무한대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그의 연구는 이후 사실 하나의 발굴과 확인, 반박을 위해서는 그 이상 노력해야 
한다는 반성을 던져주었다. 그 이상 자료를 보지 않는다면 수정주의 이후의 
한국전쟁의 총체적 재구성은 사실 불가능한 것처럼 다가왔던 것이다.

이상의 이유들에서 한국전쟁 연구사에서 그의 연구의 위치와 영향은 일본사상사 
연구에서 오규 소라이(荻生徠)와 그의 학문을 두고 히라타 아쯔타네(平田篤胤)와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가 오래전에 말했던 바를 연상케 한다. 어떤 반역도 
마찰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 한 학파의 학설에 대해서 이처럼 논란과 공격이 
집중된 것은 일본사상사에 있어서 일찍이 그 유례가 없던 일이었다. … 수많은 
소라이 반박서들도 실은 어느 정도까지는 소라이적인 사유방식에 의거하고 
있었다(마루야마 마사오), (소라이로부터 영향을 받은 학자들은 물론) 
그들(소라이를 비판하는 자들;인용자)조차 모두 소라이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비로소 소라이 학설이 지닌 잘못을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히라타 아쯔타네).註 
4)

커밍스 이후의 한국전쟁 연구는 그를 비판하거나 그를 옹호하거나 모두 그를 
통과하지 않고는 연구 자체가 불가능하였다. 80년대 한국의 젊은 지식인들에게 
있어 커밍스는 그들의 학문적 열정을 자극시킨 공통의 기원인 동시에, 한국내의 
훈련된 스칼라십에 의해 극복되어야 할 하나의 지적 벽이었다. 수많은 커밍스 비판 
작업들도 실은 그로부터의 영향을 자인하고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커밍스의 
저작은 (그때까지의) 그 영역의 거의 모든 책들을 낡고 빛바래게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연구였다.註 5)

연구사란 간단하게 말해 문제사라고 할 수 있다. 문제의 초점에 따라 문제의식이 
달라지면 규명해야 할 초점은 당연히 달라지게 된다. 그러할 때 가장 중요한 두 
가지의 문제는 새로운 어떤 것을 말하려면 무엇을 비판과 저항의 대상으로 
삼느냐는 문제와註 6) 무엇을 목적으로 하여 그러한 연구를 진행하느냐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가지는 문제사의 영역에서 새로움을 추구할 때 항상 직면하는 
요체이다. 커밍스의 연구는 전통주의에 대한 전면전을 추구한 것이었기에 그의 
연구를 수정주의로 명명하든 안하든 그것이 두 연구전통에서 수정주의에 
접근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오늘의 한국전쟁 연구는 이 두 전통 모두로부터 합리적 핵심을 배우되, 또 이 둘 
모두를 극복의 대상으로 삼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시각과 자료, 
내용, 자료면에서 실은 그것들을 대체할 새로운 어떤 것은 내놓지 못하고 있는, 
비판은 하되 새로운 것은 제시하지 못하는 지점에 서있다. 사회주의의 붕괴와 
냉전의 해체, 북한의 위기와 남한의 민주주의 발전, 그리고 소련과 중국 
비밀자료의 공개라는 일거에 몰려든 학문외적 환경의 변화가 없었더라도 우리가 
과연 학문적인 이유로 커밍스를 넘어 새로운 패러다임과 방법을 제시할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다. 커밍스의 연구 하나의 극복에도 힘에 겨웠던 원초적 부실을 
자성한다면, 우리는 지금 치열한 학문적 탐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외적 조건의 
변화로 인한 상황에 편승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문해야 할 지점에 서있는지 
모른다.

기준이 학문적 수준에 놓인다면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학문적 기준으로 
접근한다면 특정 연구와 시각이 다르다고 해서 그 연구를 자의적으로 비난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닐 것이다. 이념의 같고 다름에 따라 하나의 연구를 평가할 때는 
이념이 조금만 다르면 인정하지 않는 편견을 정당화시켜 주기 때문에 점점 더 자기 
정당화와 타인 비난의 나락으로 빠져들게 된다. 퍼스펙티브와 사실해석의 모든 
점에서 자기와 동일한 연구를 발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또 그럴 필요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시각이 다르면 연구의 수준과 수많은 발견점, 기여조차 인정하지 
않는 현상을 종종 발견한다. 그러할 때 비판과 대안을 통한 건전한 학문발전은 
시도될 수도 이루어질 수도 없다. 연구의 퍼스펙티브와 방법, 사실해석이 완전히 
동일하다면 그러한 연구들은 반복되어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기실 모든 개별 연구의 존재이유는 기존의 연구와는 다른 어떤 것을 추구할 
때에-그 성공과 실패 여부를 떠나-비로소 확보된다. 동일한 수준의 반복과 
이념적 비난으로도 높은 수준의 연구가 극복될 수 있다면 그것은 서구 
정치사회학의 이론과 연구수준을 너무 무시한 자존적 피해의식이 아닐 수 없다. 
그럴수록 우리의 연구수준은 누적적으로 저락하게 된다. 문제를 정면으로 
도전한다는 것은 동일한 문제를 같은 이론적 수준에서 대응하려는 문제의식의 
소산이지 다른 어떤 부분적 약점을 갖고 비난하는 데에 있지 않다. 더욱이 우리 
문제를, 우리가 이념문제를 포함하여 정면으로 맞서지 않는다면 우리가 도달해야 
할 수준은 요원하다 할 것이다.

요컨대 우리의 전쟁이었던 한국 학도들의 학문적 자긍의 문제와 관련하여 커밍스가 
세계학계의 한국전쟁 연구에서 오랫동안 독보적일 수 있었던 것은 한국학계의 
풍토, 특히 이념적 풍토와 직결되어 있었다. 그것은 그를 이념적으로 공격하는 
데에 집중하며 만족하고 자위하는 동안 사실과 자료, 내용, 이론과 해석에서 그의 
주장을 극복해보려는 학적 시도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념적 공격과 매도는 
공격자 자신이 자기만족에 빠지는 동안 그 만족이 가져다주는 학문적 퇴보를 
누적시킨다. 즉 극단적인 이념적 연구들은 그 기본 존재이유인 이념적 의도조차 
달성하지 못한다. 그것은 혁명주의나 반공주의나 모두 동일하다. 반공주의를 
강화하기 위한 연구가 그러한 의도를 달성하였다고 평가하기는 어렵다. 북한편향의 
급진연구들이 객관적인 북한이해와 설득에 도움이 되었다는 평가는 거의 반대에 
가깝다. 왜냐하면 그러할 때는 객관의 자에 의한 설득의 과정은 생략된 채 
(자기)이념의 강요가 앞서기 때문이다. 모든 비판은 비판적 자기성찰의 토대 
위에서 수행될 때 설득력있게 받아들여진다.

극단주의적 해석은 단지 현실이 극단일 때에만 존재 가능하다. 연구들은 자주 
현실을 실제보다 더 극단화시키는 데 한국전쟁과 같은 극단적인 이념대립을 띠었던 
역사적 사건은 더욱더 이러한 면을 많이 갖고 있다. 그 동안 자유주의적 해석의 
공간이 좁았던 이유는 여기에 있다. 커밍스 연구의 가장 큰 문제의 하나는 하나의 
편향을 넘어서려는 동안 스스로가 다른 한 편향으로 강하게 경도되었다는 
점이었다. 이 점은 90년대의 연구가 심중하게 유념하지 않으면 안될 요체일 
것이다. 그리고, 엄밀하게 말해 커밍스의 연구의 중심주제는 한국에서의 사태를 
사례로 한 미국외교정책에 대한 급진적 비판에 초점이 놓여 있었다. 이 점에서 
우리 연구의 초점은 해방 직후 한국사회의 조건과 가능, 주체의 움직임에 대한 
반성적 자기성찰로부터 출발하여야할 것이다. 이제 그의 연구가 갖는 위상에 
비추어 그의 연구가 지닌 몇 가지의 문제를 간단하게 짚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먼저 방법과 이론적인 문제를 보자. 그의 연구의 두 기본 출발점은 일제하 
식민시대의 사회적 모순구조와 종전후 미국의 대한정책이다. 그는 일제하에 어떻게 
해서 근본적인 사회적 모순이 형성되고, 형성된 모순들이 해방된 사회의 절반 
북한에서는 해소되고 그렇지 않은 남한에서는 해소되지 않음으로 인해 어떠한 
요인을 거쳐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고 폭발하며 좌절되고, 그것이 또 어떻게 미소 
냉전이라는 세계적 수준의 대립구조와 맞물리며 분단으로 이어지고 결국 
전쟁으로까지 귀결되는가를 한국사회 내부의 갈등과 미국의 정책, 외인과 내인간의 
교직을 통해 하나의 불가피한 사태 연관고리처럼 보여준다.

그러나 우리의 시야를 현재로부터 진행되지 않은 시간범위로 설정하여 접근할 때, 
즉 결정되지 않은 미래로 열어놓을 때 특정 시점에서 결정지워진 도정대로 
진행되는 사태배열(sequence)은 하나도 없다. 어떤 사건도 특정의 시점에서 과거 
반추적일 때는 결정주의적일 수밖에 없지만, 그러나 동시에 미래전망적일 때는 
미결정적이고 불확정적일 수밖에 없다. 운명지워진 도정은 하나도 없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과거 반추적(retrospective) 시야와 미래전망적(prospective) 시야를 
동시에 결합하는 접점의 추출일 것이다. 과거의 사태를 연구하는 모든 탐구는 
기본적으로 일정 정도 반추적일 수밖에 없으나 전망적으로 볼 때는 모든 가능성은 
열려 있으며 대안적 도정에 대한 탐색을 가능케 해준다.

그럴 때 결정주의적 설명보다는 개연적 설명을 추구하는 것이 더 객관적인 
접근방법이 될 것이다. 결정주의적 설명방식을 채택할 때는 과거의 모든 사태는 
불가피했었다고 보게 된다. 식민시대 기원론은, 현대한국의 역사를 거시적으로 
해석하며 그 구조적 요인을 밝혀내는 데는 탁월한 설명력을 보여준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은, 동일하게 식민경험을 보유하였으되 전쟁을 치르지 않은 
국가와의 차이를 설명하지 못하며, 특히 분단 이후 전쟁으로 이행하기까지 개입된 
새로운 추가요인들에 대해 착목하지 못하게 한다. 따라서 그것은 모든 문제를 
과거의 요인들로부터 출발하여 설명하려는 과거결정주의의 오류(the fallacy of 
retrospective determinism)로 빠져 들게 되고, 그럴 때 모든 과거는 
불가피했었다고 보게 되거나 드러난 현상은 이러한 근본요인의 표출 이외의 다른 
어떤 것이 아닌 것으로 설명하게 된다. 문제는 오히려 이들이 표출될 수밖에 
없거나 표출되는 구체적 과정과 상황이다. 따라서 우리는 개념적으로 대안적 
발전의 가능성을 항상 열어두어야 한다.註 7) 필연으로서의 한국전쟁, 구조의 
발현으로서의 한국전쟁의 도래는 이론적으로나 사실적으로 오늘날 지탱되기 어렵다.

따라서 역설적으로 그의 연구는 전쟁에 대한 연구이면서도 시간이 갈수록 전쟁으로 
치닫는 남북한 사이의 첨예한 긴장도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더욱 조용하고 
고요해진다. 폭발로의 접근에 따른 고요의 심화는 이미 그 기원에 비추어 봤을 때 
전쟁은 필연이었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라는 방법적 전제 때문일지 모른다. 즉 
한국전쟁의 기원 1·2권, 특히 2권은 한국전쟁의 도래라는 핵심으로 다가오면서 
점점 더 긴장도가 떨어지고 이해의 초점을 상실하며, 복잡한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기묘한 이론적 자기충돌을 노정한다. 복잡한 문제, 결정적 계기를 명쾌하게 
해명하여 사물에 대한 인간의 이해를 돕는 것이 이론의 색출적(heuristic) 
기능이라면 그 반대의 기능을 수행하여 미궁으로 안내하는 이론의 역할은 근본적인 
적실성의 문제를 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시간적 수준에서는 한국전쟁 
직전보다는 식민시대나 해방 직후가, 그리고 공간적 수준에서는 38선 부근이나 
서울과 평양관계를 설명할 때보다 워싱턴의 정책과 동아시아 정치경제를 설명할 때 
더 탁월하다. 그의 저작들에 사용된 이론틀은 대부분 전체, 또는 사회의 거대 
변동을 설명할 때 강한 것들이어서 사용되는 이론과 구체적 사실 사이의 부조화는 
피할 수 없어 보인다.

커밍스는 누가 한국전쟁을 시작했는가?라는 물음은 이념적 다이나마이트로서 
제기되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누가 침략자인가를 규명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가정하면서도 기원 2에서 가장 중요하고, 저자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부분의 하나는 이 주제를 다룬 제18장이다. 그러나 이 장을 읽은 뒤의 독자들의 
느낌은 한마디로 미궁이라 표현할 수 있다. 은유와 암시는 있지만 설명과 선택은 
실종된다. 즉 구조에서 미궁으로의 긴 여행이 그의 분석구조인 것이다. 더욱이 
그가 추적하고 있는 음모들은 일차 자료에의해 한국전쟁의 기원 및 발발로의 
연결사실을 증명할 수 없다는 약점이 있다. 숱한 정황적 증거는 댈 수 있지만 
결정적인 증거는 제시할 수 없는 것이다. 이를테면 1950년 6월 25일에 
이르기까지의 미국과 남한―대만―일본의 많은 행위자들의 치밀한 음모를 상상을 
초월하는 사실까지 추적하여 밝혀내고 있으나 정작 그러한 음모들이 한국전쟁을 
가져온 요인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진술하지 않고 있다. 결국 이 핵심적 문제가 이 
대저를 최종적 결론이 없다는 모호성으로 안내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하고 있다. 
이 점은 사실판단과 퍼스펙티브의 문제이자, 방법에서 초래된 문제로서 분명한 
사실을 부정하거나 사소하게 배치해야 하는 논리적 전도의 결과인 것이다.

이를테면 한국전쟁의 기원과 도래에서 과연 소련의 영향은 없었을까? 그의 
저서에는 한국전쟁의 도래에 소련과 스탈린의 영향이 있었다고 말하면 그것은 
반민중적이고 반공적이며 비주체적인 역사해석이라는 암묵적 전제가 들어 있다. 
그러나 45년에서 50년 사이의 북한을 전통적 소련괴뢰 시각처럼 해석해서는 
안된다고 해도 소련의 깊숙한 영향을 배제하거나, 또는 한국에서 스탈린이 전쟁을 
개시할 모티프가 없었다는, 따라서 전쟁의 결정에 개입하였을리 없다는 주장은 
더욱 진실이 아니다.註 8) 우선 그것은 해석의 문제를 떠나 기초적 사실에 
배치된다. 스탈린이 처음부터 침략적이었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스탈린이 한국에서 전쟁을 개시할 모티프가 전혀 없었으며 이를 뒷받침할 자료가 
있을 가능성조차 없다는 주장 역시 진실이 아닌 것이다.

퍼스펙티브의 문제와 관련하여 기원의 눈은 가장 낮은 곳부터 출발한다. 기원을 
이정표적 대작으로 만든 장점은 결국 문제를 밑으로부터 본 비판적 관점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굴절과 편향은 심각한 문제로 보인다. 문제는 이 
균형의 상실이 객관성의 상실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민중적 시각, 
민족주의적 시각이 곧바로 대립하는 두 권력주체 중 남한부정과 북한긍정의 등식과 
동일시될 수는 없을 것이다. 왜 북한에 대한 비판은 찾을 수 없는 것일까? 
민중적·민족적 해석과 북한편향의 해석을 분리하는 것은 균형적 해석을 위한 
중요한 요체이다. 한 쪽이 선이면 다른 한 쪽은 악이라는 절대적 선악판정의 
인식론적 고리는 이제 단절되어야 할 것이다. 상호 전가(轉嫁)와 확보, 추궁과 
독점을 추구하는 책임과 무죄의 양분논리는 전통주의와 수정주의를 포함한 
냉전문제 의식의 기본적 출발의 하나였다. 그러나 책임의 전가가 곧 무죄의 확보는 
아닌 것이다. 특별히 냉전의 해체를 유념한다면 코페르니쿠스 이후에도 
프톨레마이오스가 진리라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없는 것이다.

해석의 문제와 관련하여서는 내전적·혁명전쟁적 성격에 대해 짚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38선의 복합적 성격, 전쟁의 결정에 스탈린과 모택동의 깊숙한 개입을 
유념할 때 이 전쟁이 내전이자 시민전쟁이라는 해석은 동의받기 어렵다. 한 가지만 
살펴보자면, 토지문제야말로 남한과 북한 두 사회의 상이성의 표상이었다는 주장, 
즉 북한은 토지개혁이 되었고 남한은 토지개혁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전자는 높은 
탈식민성과 민중성을 갖고 있었고 후자는 높은 식민성과 반민중성을 갖고 있었다는 
주장의 적실성 여부이다. 커밍스는 남한은 경찰국가였고 그것은 지주라는 작은 
계급의 대리기구였다, 1950년 6월 25일까지 단 1에이커의 주인도 바꾸지 않았다고 
진술한다.註 9) 남한은 친일파와 한민당·지주의 국가인 반면 북한은 항일독립운동 
세력과 농민의 국가라는 것이다. 이것은 혁명적 내전으로 한국전쟁을 보는 
커밍스의 중심테제이기도 하다. 이 차이가 한국전쟁의 한 기원이고, 그것의 
시민전쟁적, 계급투쟁적 성격을 함축한다. 그러나 유력한 연구들의 결과에 따르면 
남한 역시 1950년 이전에 이미 토지개혁을 마쳤기 때문에 토지소유구조의 상이라는 
경제적 요인이 전쟁의 원인이었다거나, 때문에 전쟁은 계급투쟁적 성격을 띠었다는 
주장은 지탱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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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많은 연구가 있으나 대표적인 저서로는 역시 Bruce Cumings,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Vol I;Liberation and the Emergence of Separate Regimes, 
1945∼1947. Vol.II;The Roaring of the Catarcat, 1947∼1950 
(Princeton:Princeton University Press, 1981. 1990)의 두 권을 들어야 할 
것이다.

2) 최장집, 한국현대정치의 구조와 변화(까치, 1989), p,48. 브루스 커밍스의 
저작에 대한 한국에서의 평가는 매우 많았고 또 논쟁적이었다. 그의 연구를 검토한 
글들로 주요한 것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최장집, 한국현대사 연구를 위한 
이론적 고려(한국현대정치의 구조와 변화), pp.48∼49;하영선, 냉전과 
한국(서울대학교 국제문제연구소, 논문집 10, 1986), pp.89∼103;손호철,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 연구비판(실천문학 15, 1989년 가을), pp.295∼330;이삼성, 
한국현대사와 미국대외정책연구방법론(사회와 사상 15, 1989. 11), 
pp.248∼276;미국의 대한 정책과 한국민족주의(한길사, 1993) 
pp.90∼128;전상인,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사·한국사회의 인식(한국과 국제정치 
8-1, 1992년 봄여름), pp.239∼280;박명림,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 
12에 관한 하나의 비판적 논평-이론과 사실의 검토(한국정치연구회, 브루스 
커밍스 초청특별토론회, 1992년 3월 29일 주제발표논문);양성철, 서평-Bruce 
Cumings,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국토통일원, 통일문제연구 1-3, 1989 
가을);Book Review:A Convoluted Approach to the Study of the Korean 
War-Cumings Search for a Red Heering(Korea and World Affairs Vol.17, No.2 
Summer, 1993), pp.316∼323;柳永益, 수정주의와 한국현대사연구(韓國史 市民講座 
20, 1997), pp.58∼78.

3) 신복룡,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서평(고대신문 1996년 8월 26일).

4) 丸山眞男, 김석근 역, 일본정치사상사 연구(통나무, 1995), pp.260∼264.

5) Robert M. MacIver, Foreward in Karl Polanyi, The Great Transformation 
(Beacon Press, Boston;1957), p.ⅸ.

6) H.Stuart Hughes, 황문수 역, 의식과 사회-유럽의 사회사상, 
1890∼1930(홍성사, 1979), p.49.

7) Reinhard Bendix, Nation-Building and Citizenship:Studies of Our Changing 
Social Order(Berkeley and Los Angeles;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77), 
p.16·249;Charles Tilly, Reflections on the History of European 
State-Making, Charles Tilly ed., The Formation of National States in Western 
Europe(Princeton;Princeton University Press, 1975), pp.14∼16.

8) 커밍스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이유에서 소련이 1950년 6월의 공격에 대해 
찬성하였을 가능성을 주의깊게 배제하고 있다. 첫째, 어느 쪽에서이든 
오늘날까지조차(1990년 현재) 그럴듯한 증거가 없을 뿐만 아니라 그럴 가능성조차 
없다. 둘째, 소련은 북한인들 스스로가 원치 않는 공격을 명령할 능력을 갖고 있지 
못했다. 셋째, 한국인들(북한인들)은 중국으로부터 조선족 병사들이 귀환하면서 
독자적으로 공격을 개시할 능력을 갖고 있었다. 넷째, 전쟁의 결과는 NSC68의 
실현을 가능케 하여 미국의 방위비 지출을 세 배로 늘리며, 일본과 서독의 
재무장을 촉진시킬 뿐만 아니라, 전쟁후 수년 동안 세계적 수준에서의 긴장을 크게 
고조시키는 등, 북한의 승리로부터 얻어질 어떤 잠재적 이득들과 비교했을 때도 
모두가 소련에게 불리한 점들일 것이었다.(Bruce Cumings, The Origins, Vol.Ⅱ, 
pp.453∼454).

9) Bruce Cumings, The Origins, Vol.II, p.189·455.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 "활쏘기는 군자의 덕성과 비슷한 바 
가 있으니, 활을 쏘아 과녁을 벗어나더라도 오히려 그 이유
를 자기 몸에서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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