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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요키에로타)
날 짜 (Date): 1998년 10월 26일 월요일 오전 05시 01분 57초
제 목(Title): 이코노/미대공활탈출 도와준 일군국주의의 




문화 / Culture 제 458호 1998.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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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보는 세계경제사 
美대공황탈출 도와준 日의 眞珠灣 기습 
‘대동아공영권’내세워 美國에 도전…패망의 길 택한 日本군국주의 



이재광 기자·leej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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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Tora, Tora, Tora(1970)
감독:리처드 플레이셔, 간지 후카사쿠, 도시오 마스다
주연:마틴 발삼, 조셉 커튼, 야마무라 소, 도노 에이지로
비디오배급:폭스비디오  
 누가 1930년대 세계를 대공황에서 구원해 준 것일까. 많은 역사가들은 이를 세계 
전쟁이었다고 단언한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미국을 비롯한 세계경제는 기나긴 
불황의 터널을 빠져나왔다는 것이다. 미국이 전쟁에 직접 끼여든 것은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기습에서부터. 일부는 루스벨트가 ‘태평양전쟁’으로 불리는 
이 전쟁을 유도했다고 주장한다. 참전의 여론을 조성할 필요가 있었다는 말이다. 
이른바 ‘루스벨트 음모론’으로 당시 미국으로서는 그만큼 전쟁에 대한 갈망이 
컸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구로자와 감독 미국 주도권으로 영화 제작 포기 

태평양전쟁 발발 30주년을 코앞에 둔 1969년. 일류 배우들을 이끌고 미국을 
방문했던 일본이 낳은 세계적 거장 구로자와 아키라(黑澤明) 감독은 몹시 화를 
내며 바로 일본으로 돌아왔다. 미국과 일본이 합작으로 진주만 기습에 관한 영화를 
제작하자는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지만 정작 미국측이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애초 계획은 시나리오를 공동 집필하고 일본과 미국이 3대 1의 비율로 제작 경비를 
내겠다는 것. 구로자와 감독은 영화 제작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을 것으로 봤지만 
시나리오는 의도대로 만들어지지 않았고 이니셔티브도 미국측이 잡고 있었다. 결국 
일본측 연출진으로는 후카사쿠와 도시오 등 두 젊은 감독이 선정됐다. 

제작사인 미국 폭스사가 당황했던 것은 물론이다. 문제를 무마한다는 차원에서 
폭스사는 영화의 ‘중립성’을 강조했고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제작될 것”을 
암시했다. 여기에 일본 관객들에 대한 배려도 엿보였다. 타이틀부터 일본어로 
제작됐고 배우도 일본측을 먼저 소개했다. 언어 역시 영어와 일어를 공통으로 
사용함으로써 최소한 겉으로는 공동제작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같은 ‘예우’는 당시 정치적으로도 중요했다. 베트남전쟁이 한창이던 
1960년대 말 미국은 소련과 중국에 일본과의 관계가 돈독함을 과시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자니 무엇보다 ‘과거사’의 해묵은 감정을 해소할 필요가 있었고 
영화는 그같은 ‘의도’의 하나로 풀이됐다. 30년 전 양국이 벌였던 대규모 전쟁을 
긍정적으로 보자는 취지였다. 

그러나 결과는 실망적이었다. 양국 모두로부터 따돌림을 받았던 것이다. 영화인은 
물론 역사가나 정치가들 모두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반응이었다. 
일본측에서는 미국의 희생과 일본의 공격적 성향을 지나치게 강조했다며 불만을 
드러냈고 미국측에서는 일본의 전쟁 책임이 모호하고 전쟁의 주역이었던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五十六) 사령관이 미화됐다고 지적했다. 역사해석이 다른 만큼 
평가가 다른 것은 당연했을지도 모른다. 

전쟁 책임 부분 모호하게 묘사 
 
▲1930년대 일본의 광적인 전쟁열을 취재한 라이프지 표지.  
 
영화 ‘도라 도라 도라’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전반부는 야마모토 
사령관 취임식에서 1941년 10월께까지를 그리고 있다. 도쿄와 워싱턴, 하와이, 
베를린을 오가며 태평양전쟁의 배경을 설명하기에 분주하다. 영화 후반부는 
12월7일의 진주만 기습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그리고 있다. 일본은 기습을 어떻게 
준비했으며 미국은 왜 참혹하게 당했는가를 냉정하게 분석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영화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미국측 해석이 올바른 것으로 보인다. 전쟁에 대한 
책임이 모호하다. 지나치게 도죠 히데키 당시 총리 개인과 ‘어쩔 수 없었다’는 
일본의 ‘상황’으로 돌려진다. 야마모토 사령관은 “이미 결정된 일이니 돌이킬 
수 없다”는 투로 책임이 회피되고 있으며 “천황은 반대”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일본측의 입장을 살린 ‘왜곡’이다. 아마도 전쟁이 일어나게 된 배경을 제대로 
설명했더라면 전쟁의 책임 소재는 분명하게 드러났을 것이다. 

1930년대 일본은 극심한 절망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1920년 3월 도쿄 증시의 
대규모 폭락으로 자본주의 체제에 편입된 이후 처음으로 ‘공황’의 공포를 느낀 
데다 간신히 위기에서 탈출한 듯 보일 때 1929년 미국의 대공황이 일본을 찾은 
것이다. 일본은 일찌감치 공황의 탈출 방법으로 ‘전쟁’을 택했다. 사무라이 
국가가 취할 수 있는 쉬운 길이었다. 1931년 만주사변으로 시작된 중·일전쟁은 
이같은 공황 탈출 정책의 일환. 그러나 전쟁을 통한 공황의 탈출은 더 해결하기 
어려운 난제를 일으킨다. 전쟁과 식민지 정복 없이는 결코 유지될 수 없는 경제 
체계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1937년 7월7일, 일본은 마침내 중국과의 전면전을 
치르며 끝없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말려들어가고 이후 여러 해 동안 국가 전체가 
‘전쟁병’에 시달려야 했다. 

1939년 유럽의 전쟁은 군국주의 일본에 또 다른 ‘기회’를 제공했다. 그해 봄 
독일이 순식간에 네덜란드와 프랑스를 점령하자 일본은 호시탐탐 노려오던 
동남아시아에 손길을 뻗친 것이다. 일본은 전쟁으로 유럽 국가들이 빠져 나간 틈을 
타 1940년 6월 프랑스령이었던 베트남을 침공했고 3개월 후인 9월에는 독일, 
이탈리아와 3국 군사동맹을 체결했다. 영국과 프랑스 등 유럽 국가들과 
‘적대국’의 길을 가겠다고 선언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해 8월1일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磨) 수상은 그 유명한 
‘대동아공영권’을 천명한다. 말이 ‘공영(共榮)’이지 실은 자국의 세력권을 
크게 확장하겠다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 전쟁 중이었던 동북아는 물론 새로이 
점령을 개시한 동남아, 뉴기니, 호주, 뉴질랜드, 인도, 동시베리아 등을 일본의 
세력권으로 선포한 것이다. 말 그대로라면 태평양의 3분의 2가 일본 것이 된다는 
의미였다. 

당연히 태평양을 두고 마주 보는 미국과의 이해가 충돌했다. 유럽에 이어 미국과도 
적대국의 관계로 돌입한 것이다. 질 것이 뻔한 미국과의 전쟁을 수행할 것이냐 
아니면 중국과 태평양에 대한 권리를 포기할 것이냐. 일본은 절대절명의 결정을 
내려야 할 상황이었고 결국 일본 군국주의는 전쟁으로 치닫고 만다. 

 ▲
제45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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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께서 말씀하셨다 : "활쏘기는 군자의 덕성과 비슷한 바 
가 있으니, 활을 쏘아 과녁을 벗어나더라도 오히려 그 이유
를 자기 몸에서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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