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요키에로타) 날 짜 (Date): 1998년 10월 25일 일요일 오전 02시 46분 07초 제 목(Title): 역비/ 3.1운동 민족대표33인 서론 우리가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에 있어서, 올바르게 비판적인 시각에서 보기보다는 사실을 은폐하고 왜곡하는 경우가 많다. 자신의 역사를 속이는 사회에서는 더 이상 의 진보와 발전을 기대할 수가 없다. 우리가 자신을 가지고 왜곡된 역사, 굴절된 역사를 진실 그래도 바라볼 때, 역사는 그만큼 성숙된 역사로 나아가며 올바른 정 신의 양식을 제공할 것이다. 여기서는 한국사에 있어서 왜곡되어온 여러 가지 사실들 중에 하나를 다시 점검 하고 생각해 보는 기회로 삼고자 한다. 본론 33인에 대한 '대표'성 시비 우리 나라 국민이라면 누구나 1919년에 일어난 3.1운동 때의 일에 대해 알고 있 다. '민족 대표'로서 존경을 받는 33인(또는 48인)이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을 한일. 파고다공원(지금 탑골 공원)에서 학생들과 시민들이 용감하게 "독립만세"를 부르고 유관순 열사가 독립을 외치다 순국한 일등. 이미 70여 년이 지난 일이지만 3.1운동 에서 표출된 민족해방의 의지는 아직도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서 분단된 채 살고 있는 한, 겨레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슴 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과연 3.1운동의 전체상과 성격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있을까. 대 한민국 헌법 전문에 한국이 3.1운동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음을 밝히고, 매년 정부 주최로 3.1운동 기념식을 거행하고 3월 1일을 국경일로 기리고 있지만, 그렇다고 하여 3.1운동에서 온 민족이 염원했던 민족 자주화와 민주주의의 정신은 얼마나 잘 계승되고 있을까? 친일, 친미세력에 의해 세워진 제1공화국은 권력의 정당성을 내세우기 위해 3.1운 동을 끌어들였다. 3.1운동의 정신을 계승한 것이 상해임시정부이고, 남한정부는 이 상해임정의 법통성을 계승했으니 당연히 이승만 정권은 민족해방운동사의 정통성 을 이어받은 정당한 정권이라는 논리였다. 하지만 이승만 자신은 친미활동을 지나 치게 하다 상해임정에서 축출된 인문이었고, 쇠약해진 상해임정을 그나마 끝까지 지킨 김구 세력은 남한정권의 수립과정에서 철저히 제외되어 버린 역사적 사실을 생각해 볼 때 3.1운동의 정신이 얼마나 권력층에 의해 훼손되고 왜곡되었을지 짐작 하기 어렵지 않다. 제1공화국 이후 역대 독재정권 역시 이 점에서는 전혀 다를 바 가 없었다. 이들이 역사학자들을 동원하여 3.1운동사를 왜곡한 부분은 한두 군데가 아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을 당시 운동의 지도자로서 높이 추켜 세우고 이들을 '민족대표'로 예우한 경우이다. 33인이 운동을 준비하고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으며 자신들의 종교조직을 이용하 여 운동을 확산시키는데 기여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이 보여준 모습은 그들 을 '민족대표'라 부르기에는 너무나 나약하였다. 33인을 '민족대표'라 한다면 그들의 사상과 지도활동이 바로 3.1운동의 정신이어야 한다. 그러나 3.1운동의 전 과정에서 보여준 '3.1정신'은 33인의 나약한 모습과는 전혀 다른 철저한 비타협적 투쟁이었 다. 3인 개개인을 존경하는 것은 자유이지만 이들이 마치 '민족대표'로서 3.1운동을 지도한 것처럼 인식한다면 이것은 오히려 3.1운동에서 표출된 전 민족의 숭고한 민 족 해방의 의지와 정신을 손상해 버릴 수 있다는 것이 대다수 국민의 존경을 받는 33인에 대해 새삼 문제를 제기하는 연유이다. 33인의 한계와 이탈 1910년대의 '무단정치' 아래에서는 어떠한 정당도 대중적 사회단체도 존재할 수 없었다. 따라서 당시 우리 나라에서 종교단체들이 가지고 있던 사회세력과 대중동 원능력은 무시할 수 없었다. 더욱이 천도교, 기독교, 불교의 지도자 33인은 당시 독 자적으로 독립선언을 준비하고 있던 학생조직을 전민족적 공동투쟁의 대의를 내세 워 끌어들임으로써 명실공히 3.1운동을 지도할 수 있는 유일한 조직체로서의 조건 을 갖추고 있었다. 이러한 조건 아래 33인이 3.1운동을 준비하고 자금을 공급하였으며 독립선언서를 작성.배포하여 3.1운동이 발발하는데 기폭제의 역할을 하였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33인은 실제 민중의 움직임이 자신들의 생각을 뛰어넘어 과열될 우려가 있자 스스 로 운동의 지도권을 포기하였다. 33인이 자포자기하게 되는 것은 운동이 시작되기 전에 이미 그들 본연의 한계에 서 노정 되었다. 본래 거국적인 민족운동이었던 3.1운동이 끝까지 지도할 수 있을 정도의 투철한 이념과 결단력을 가지지 못하였던 것이다. 33인의 한계는 첫째, 당당한 독립'선언'과 민족의 주체적인 힘에 의한 민족해방이 아닌 일본과 미국,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을 '청원'하는 식의 타협적.외세 의존적 독 립방법론에 입각해 있었던 점이다. 이들에게 독립'선언'은 단지 외국에게 우리 민족도 독립을 원한다는 사실을 밝히 는 과시용에 지나지 않았다. 독립의 청원인가 선언인가는 33인의 자주성 여부를 가 름하는 시금석이라 할 터인데, 이들은 청원과 선언을 동시에 말하면서도 청원을 근 본으로 하면서 선언은 청원의 효과를 더욱 높이는 수단으로 생각했다. 이 점은 손 병희 밑에서 3.1운동의 실무를 맡았던 최린의 말에 잘 요약되어 있다. 이를 (독립운동을) 수행하는 데는 동지를 규합하여 조선민족의 의사를 발표함으로써 일본정부의 반성을 촉구하는 한편 세계각국의 동정을 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였다.그리고 그 방법으로서 는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는 한편 일본정부에 대하여는 청원서를 제출하고 목하 개최되고 있는 파 리 강화회의의 각국 대표자와 미국대통령 '윌슨'에게는 그들의 성원을 의뢰하는 취지의 문서를 발 부하도록 한 것이다.([최린 취조서]. 이병헌 편, {3.1운동 비사}. 1959, 579~580쪽) 사실 천도교 지도자들은 애당초 '독립청원'만을 계획하였다. 손병희가 처음 독립운 동을 위해 접촉한 인물들은 박영효, 한규설, 윤용구, 김윤식, 윤치호 등 구한국관료, 친일파들이었다. 그는 이들을 독립청원을 위한 대표로 내세우려고 하였으나 이들이 거부함으로써 실현하지는 못하였다. 당시 천도교 지도자였던 손병희는 갑오농민전 쟁(동학농민운동)때 동학 북접의 지도자로 농민봉기의 시초에는 농민군을 탄압하다 가 이들의 저력이 의외로 강한 것을 보고 농민군의 지도자로 변신하였던 인물이다. 또한 그는 러일전쟁 때 "일본이 패망하면 동양이 파멸이라고 생각"하여 일본측에 "군자금 1만원을 헌납한 일이 있으며, 경부선.경의선을 놓을 때 일본에서 그는 찬 성도 반대도 아닌 "중립의 태도"로 있었을 뿐이다.([손병희 취조서], 이병헌 편, 앞 의 책, 85~86쪽). 그는 일제의 통치정책에 실망하게 되면서 독립을 희망하게 되지 만, 그가 처음 구상했던 것은 이러한 타협적 독립청원방식이었을 뿐이다. 이승훈을 비롯한 개신교 지도자들이 천도교와 접촉하기 전의 회합에서 합의한 운 동방식 역시 독립의 '청원'이었다. 청원의 형식은 독립허가청원을 일본정부, 조선총 독부, 그리고 평화회의 등지에 보내자는 정도였다. 이들 종교 지도자들은 민족자결주의의 소식을 듣고 독립의 '선언'을 구상하는 데 까지 진전하였지만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독립청원의 기조는 버리지 못하였던 것 이다. 33인의 두번째 한계는 그들의 외세 의존적 성향에서 비롯된 국제정세에 대한 몰 이해였다. 1918년 윌슨의 민족자결선언을 접한 종교 지도자들은 민족자결주의가 패 전국의 식민지에만 적용되는 승전국의 식민지 재분할정책임을 간파하지 못하고 조 선에도 이 원칙이 적용될 수 있으리라는 환상에 사로잡혀 파리강화회의와 미국의 윌슨 대통령에게 조선의 독립을 부탁하였다. 이 점에 대해 신용하는 ①33인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패전국식민지에만 적용 되고 우리 나라에는 적용되지 않는 원칙임을 잘 알고 있었으며, ②그럼에도 불구하 고 33인이 독립선언을 하고 파리강화회의에 우리 나라의 독립을 요청한 것은 어디 가지나 이것을 기회로 포착하여 독립운동을 일으키고 고양시킴으로써 그것을 승전 국의 식민지에까지 적용하도록 변화시키려고 한 것으로서, 결국 이들의 운동은 국 제정세의 변화를 주체적이고 능동적으로 포착하여 자기 민족의 독립운동에 유리하 게 활용한 것이었다는 '기회론'을 주장하여 33인을 옹호하였다. 신용하는 그 근거로 서 신한청년당, 2.8독립선언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서춘, 33인 가운데 손병희, 오세 창, 한용운 등이 민족자결주의의 한계를 사전에 잘 알고 있었다는 점을 방증하는 여러 사료를 제시하였다.(신용하, {3.1독립운동의 사회사}, 현암사, 1984). 그러나 신용하의 견해는 사료 자체를 잘못 해석했을 뿐만 아니라 '기회론'이라는 애매한 논지를 전개하여 33인에 대한 평가의 기준을 흐려 놓았다. 그가 예로 든 사람들 중 불교의 한용운은 "지금 민족자결은 구주전란 결과 주권 을 상실한 나라의 민족이나 또는 직접 전란에 참가한 구주 내의 일부분의 민족에 관한 문제이므로 조선과 같은 것은 그 범위 밖의 일로 알고 있는데"라는 취조관의 질문에 "민족자결이라는 것이 그런 구역을 정했는지는 모르나 전세계적으로 병합 한 나라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조선도 그 운동을 하면 독립이 될 줄 알았다"고 하 여 민족자결주의의 적용범위에 우리 나라가 포함된다고 생각하였음을 분명히 밝혔 다.([한용운 취조서], 이병헌 편,앞의 책 612~613쪽). 천도교의 손병희 역시 어째서 독립이 될 줄 알았느냐는 취조관의 질문에 파리강 화회의에서 일본이 조선의 독립을 승인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고 진술하였다. 그것은 목하 파리에서 개최중인 강화회의에 일본은 5대국의 일원으로서 동회의에 열석하고 있었 다. 동회의에서는 민족평화 등의 권리를 줄 것을 의제로 하고 있는데 동열석중에 일본은 당연히 조선의 안녕질서를 보지하기 위하여 조선에 독립을 승인할 것이라고 생각하였고 또 지금 영국에 서는 애란을 독립시키는 것을 신문으로 보았다. 이런 것으로 보아 일본은 당연히 조선독립을 시 키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였다.([손병희 취조서], 81쪽)/ 신용하의 주장과 달리 33인은 민족자결주의를 주체적으로 활용한 것이 아니라 민 족자결의 대의에 비추어 조선도 요청만 하면 독립을 선사 받을 수 있으리라 오해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낙관론을 가진 이유는 ①미국을 제국주의국가가 아닌 민주 주의국가로만 피상적으로 이해하여 미국의 '호의'를 얻을 수 있으리라는 환상, ②독 립의 달성이 조선인 자신의 힘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패배의식 때문에 외교를 통해 독립을 얻어볼 수 있지 않을 까 하는 외세 의존적 성향 때문이었다. 33인의 민족자결주의에 대한 환상을 단지 당시의 정보부족 때문만이 아니라 그들의 본질 적인 친미의식과 외세의존성향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물론 33인 모두가 이러한 환상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오세창은 유일하게 민족자 결의 원칙이 "전란에 관계되는 나라에서는 실행되고 기타의 나라에서는 어려울 것"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주체적인 독립운동의 의사를 가졌 던가는 의문이다. 그가 독립선언에 서명한 이유는 "시세의 풍조를 생각할 때 전세 계적으로 민족이라는 것이 소동하고 있는데 홀로 조선만이 가만히 있느니보다 실 행은 안된다 하더라도 역사에 남기기 위해 조선인도 민족자결의 의사가 있음을 발 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때문"이었을 뿐, 반드시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는 의사 는 희박하였던 것이다. 타협성, 외세의존성과 함께 33인의 세번째 한계는 민중에 대한 심한 불신, 즉 반 민중성이었다. 본래 33인은 3월 1일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기로 약속하였다. 그러 나 거사 하루 전날 회합에서 손병희는 "누가 우리들의 계획을 누설"하여 공원에 학생들이 모이게 되었는바, "학생들이 다수 집합하면 소동이 일어날 염려가 있으 니" 독립선언식을 명월관 지점 태화관에서 하기로 방침을 변경하였다. 거사 당일 33인을 기다리던 학생들은 때가 되어도 이들이 오지 않자 태화관에 쫓아가 권총으 로 위협까지 하였으나 군중이 두려운 33인은 끝내 요리점에서 나오지 않았다. 결국 전민족적 민중운동의 도화선이 된 역사적인 파고다공원에서의 시위는 33인과는 독 자적으로 독립시위를 준비하던 학생들, 그리고 시민들에 의해 33인의 지도 없이 자 체적으로 추진되었다. 그러면 이 때 33인은 태화관에서 무슨 행동을 하였는가. 고등학교 국정교과서에는 "33인이 민족대표의 이름으로 독립선언서를 배부, 낭독하고 독립을 선포하였다"고 씌여있으나 사실은 그렇지 못하였다. 33인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지도 않고 한용운 의 간단한 취지설명 후 축배를 들고 일경에 통고하여 자수해버리고 말았다. 33인이 독립선언 장소를 파고다공원에서 태화관으로 옮긴 사실은 단지일시, 장소 의 문제가 아니라 3.1운동에서의 그들의 민중관을 평가하는데 결정적인 의미가 있 다. 이들은 일제의 취조과정에서 한결같이 "사의천박한 학생과 군중이 모였으니 어 떤 일이 일어날지 몰라"(손병희), "무식한 자가 불온한 일을 할지 알지 못하여"(박 희도) 장소를 변경하였다고 답변하였다. 그래도 학생대표가 태화관에 와서 협박을 한 사실이 있고 각 지방에 선언서가 배부되었으니 폭동이 있을 것을 예상하지 않 았느냐는 집요한 일본 사법부의 질문에 손병희는 "폭동이 일어나면 경비가 되고 있어 곧 취조를 받을 모양이고 야소교파에서도 서양의 교를 받고 있으므로 불온한 일은 아니할 줄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변명을 늘어놓았다. 33인에게는 학생, 시민의 일제에 대한 적개심의 표출이 단지 어리석은 행동으로밖 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반민중적 자세에서도 운동의 원칙 중 하나로 '대중 화'의 방침을 세우고, 준비단계에서 각 지방에서의 선언서 낭독과 만세시위를 계획 한 것은 민중의 힘에 기초해 독립을 달성한다는 취지에서가 아니라 미국과 일본에 게 조선인의 독립의지를 알게 하여 열강의 '자비'와 일본의 '이성'에 호소하기 위한 것에 불과하였다. 33인이 운동의 또다른 원칙으로 '비폭력'을 그토록 강조한 이유도 이 점과 관련이 있다. 물론 33인이 '비폭력' 방침을 채택하였다는 것만으로 그들을 비판해서는 안될 것이다. '비폭력' 자체는 '폭력'과 함께 주요한 운동방법의 하나이며, 양자간의 선택 은 운동의 주.객관적 조건에 따라 상황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33인에 게 문제가 되는 것은 단지 이들이 비폭력의 방법을 채택한 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비폭력이 일제와의 타협을 전제로 채택했다는 점에 있다. 이들은 대중이 폭력으 로 나오면 일본이 조선의 독립을 합리적으로 고려하지 않을 것이며 구미열강도 '자 비'를 베풀기 어려울 것이라는 염려에서 비폭력의 원칙을 채택하였고 이 원칙을 대 중들이 파괴할까 걱정했던 것이다. 운동의 지도권은 민중에게로 33인이 타협성, 외세의존성, 반민중성으로 말미암아 파고다공원에서의 독립선언을 포기하고 일개 요릿집에 모인 후 일제에 자수해 버림으로써 3.1운동은 정해진 지도 자 없이 민중의 자발적인 투쟁으로 전개되었다. 이제 3.1운동은 싸움의 전개과정 속에서 스스로 고립성과 분산성을 극복하면서 지 도자들을 만들어 내었다. 제일 먼저 시위를 계획하고 조직화하여 운동을 지도한 쪽 은 다름 아닌 학생들이었다. 학교는 종교단체와 함께 1910년대에 합법적으로 존재 할 수 있던 전국적 조직체였다. 동경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으로 자극을 받은 국내 학생들은 이미 3.1운동 전부터 독자적으로 독립운동을 모의하여 자체적으로 독립선 언서를 기초하였으며, 모색단계에 머물고 있던 기성 지도층들을 자극.격려하여 3.1 운동의 준비를 촉진하였다. 학생들은 비록 운동의 '일원화'라는 대의 때문에 33인을 '민족대표'로 인정하였지만 대중의 선두에 서서 운동을 지도해야 할 33인이 운동에 서 멀어진 순간부터 일반대중의 시위운동을 조직.지도하여 33인이 의도한 타협적 독립선언식의 형식을 넘어서서 운동을 비타협적 민중적 투쟁으로 발전시켰다. 도시에서 학생들과 함께 점차 지도부로 떠오른 사람들은 변호사.의사.교사.하급 종 교지도자 등의 전문직업 종사자, 제조업종사자.상인.지식인 등 소부르주아지, 민족 부르주아지로 범주화할 수 있는 세력들이었다. 이들은 1910년대 '무단정치' 아래에 서의 비밀결사운동의 경험을 이어받아 국민회, 광복회, 독립단 등의 결사단체를 조 직하여 독립선언서, 신문들을 작성.배포하고 시위를 지도하였다. 농촌에서는 식민지지배 아래 급속히 몰락해 온 재지 부농, 중농, 서당교사, 학교 졸업생 등 향촌질서 속의 유력층이 일반 농민의 운동을 지도하였다. 민중이 운동의 전면에 나서고 그 속에서 운동 지도부가 자발적으로 건설되면서 운동은 33인의 한계를 극복하였다. 첫째, 민중은 투쟁과정에서 33인의 '비폭력' 타 협주의의 한계를 극복하여 비타협적 투쟁을 전개하였다. 3월 하순이래 민중시위는 더욱 폭력화하여 3월 상순에 폭력투쟁이 전체의 33%였던데 비해, 4월 상순에는 전 체의 47%가 폭력투쟁이었다. 특히 농민들은 독립을 위하여 면사무소, 헌병파출소, 순사주재소, 우편국, 금융조합사무소 등 일제의 말단기구를 습격하였다. 둘째, 민중의 비타협투쟁은 단지 일제의 운동탄압에 대한 반발에서가 아니라 제국 주의의 폭압적 본질을 민중이 피부로 느끼고 외교를 통한 청원이나 자치가 아니라 투쟁을 통해서만 절대 독립될 수 있다는 독립쟁취의식의 발로였다. 민중 역시 민족 자결주의에 대해 크게 기대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은 궁극적인 독립은 조선인 스 스로의 힘으로만 달성될 수 있다는 점을 한말이래 깨닫고 있었다. 이들은 "만세 불 러봤자 소용없다", "조선 전도에 걸쳐 일제 봉기하여 최후의 목적을 달성"하자고 주창하고 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해 나감으로써 33인의 외세 의존적인 한계를 극 복하였다. 셋째,민중과 이들의 지도세력은 낮은 정치의식에도 불구하고 운동과정에서 그들의 사회경제적 처지를 반영하여 맹아의 형태로나마 공화주의, 사회주의 사상을 수용해 갔다. 총독부 경무국의 민정보고에 "대통령이 선출되면 국민 전체에 걸쳐 재산의 균분을 하게 될 것이라고 칭하여 자못 공산주의적 언사를 농하는 자가 있다"든가, 어떤 농민이 "조선이 독립하면 국유지는 소작인의 소유가 되니 이때 만세를 부르 는 것이 득책이다"라고 선동한 사실들이 있는 것을 보면 민중의 전통적인 '균산 주 의'가 점차 불어오는 사회주의를 수용하는 내부 토대를 만들어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3.1운동에서는 33인의 추상적인 근대 공화제론을 뛰어넘어 반제국주의 반 봉건투쟁의 싹이 자라고 있었다. 결론 33인의 역할에 대한 역사적 평가 33인이 없었으면 아마 3.1운동은 일어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33인이 3.1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했음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또한 우리는 33인 개 개인이 1910년대의 '무단정치' 아래에서 독립을 선언하는 결단을 내린 용기를 높이 평가하는데 인색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이 점과, 33인이 3.1운동을 지도하였는가의 문제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 이다. 앞의 문제가 역사 속의 개인의 평가문제라면, 뒤의 문제는 3.1운동의 성격을 평가하고 나아가 민족해방운동의 전체 상을 밝히는 역사적 평가의 문제이다. 이런 점에 비추어 '민족대표'로 불리는 33인은 자신들의 타협성, 외세의존성과 반 민중성을 극복하지 못하여 운동의 발발시점부터 지도를 포기함으로써 민중 스스로 투쟁과정에서 지도부를 만들어 나갈 수밖에 없도록 운동을 방치하였다는 지적을 면하기 어렵다. 33인의 한계는 한국 민족해방운동에서의 부르주아 민족운동의 한계 를 집약적으로 드러낸 것으로 이후 1920년대의 운동은 3.1운동을 통해 전면에 등장 한 민중과 그 지도부가 새로운 단계의 운동을 모색하면서 새롭게 출발한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 "활쏘기는 군자의 덕성과 비슷한 바 가 있으니, 활을 쏘아 과녁을 벗어나더라도 오히려 그 이유 를 자기 몸에서 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