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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요키에로타)
날 짜 (Date): 1998년 10월 18일 일요일 오전 01시 12분 29초
제 목(Title): 주간조선/ 북한답사기 평양성 고구려혼 



10/14(수) 16:25  

 [북한 답사기] 평양성 곳곳에 고구려혼 "생생" 


1천5백년 된 황룡산성 지금도 '굳건'…동명왕릉 성역화 . 
♧ 연변대 조선문제연구소 서일범교수는 지난해10월과 올해 6월 두차례에 걸쳐 
김일성 종합대학 역사학부 초청으로 약 90일간 북 한 지역의 고구려 유적·유물을 
답사했다. 이미 만주의 고구려 유 물·유적을 답사한 바 있는 그의 북한 고구려 
유적 답사기를 싣는 다. (편집자). 

고구려가 427년(장수왕 11년) 압록강 연안의 통구(지안)에서 천도한 이후 대동강 
유역의 평양은 2백41년간 고구려 정치, 군사, 문화의 중심지였다. 

중국 지안(집안)과 더불어 고구려 문화를 생생하게 호흡해볼수 있는 귀중한 
유적들이 집중돼 있는 곳이다. 

평양 주변의 대표적인 고구려 유적으로는 평양성, 대성산성,안 학궁 등을 들 수 
있다. 안학궁과 대성산성은 고구려 후기 수도 평 양의 왕궁과 그 왕궁을 방위하는 
수도 방위성으로 천도 이후 건설 한 최초의 대형 건축물이다. 

안학궁은 성벽 기초와 건물 초석들이 또렷하게 남아 있어 성의 윤곽과 규모, 궁궐 
배치 형태를 지금도 완벽하게 알 수 있다. 이 궁성이 1천5백여년전 고구려 
전성기의 장수왕이 거주했던 곳이다. 

수도 방위성인 대성산성은 국사봉, 소문봉 등 6개의 봉우리와 두개의 골짜기를 
에워싼 둘레 7km의 대형 산성. 성벽이 거의 무너 져 흔적만 남은 것을 지난 78년에 
일부 복원했는데 인근에서 고구 려 무덤들도 발견되어 이곳이 한때 고구려 통치의 
중심이었음을 실감케 하는 곳이다. 

안학궁과 대성산성을 중심으로 1백여년간 통치해온 고구려는 6 세기 후반에 오늘날 
평양 중심부인 모란봉 일대에 새로운 도성을 쌓고 궁궐을 옮기게된다. 이것이 
평양성인데 도성 방위를 위한 고 구려인의 지혜와 오랜 군사경험이 녹아 있는 
걸작이다. 

당시까지 도성은 주로 궁성과 산성을 분리하여 일단 외적이 쳐 들어오면 산성으로 
피난하여 방어하는 식이었다. 하지만 이런 방 식을 따르면 평지의 궁궐과 민가는 
그대로 적에게 유린될 수밖에 없었다. 평양성은 이와같은 단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고안해낸 것 으로 이른바 평지성과 산성을 하나로 연결한 평산성이다. 

둘레가 무려 16Km에 달하는 이 거성은 북쪽으로 금수산의 모란 봉에 의지하고 다른 
3면의 낮은 지역은 대동강과 보통강이 해자를 이루어 그 자체가 하나의 천연적인 
요새였다. 

북성, 내성, 중성, 외성 등 4개 부분으로 구성된 성의 구조도 치밀했는데 북성에는 
궁궐 호위 부대, 영명사와 같은 왕실 절간이 위치해 있었고 내성에는 궁궐, 
중성에는 관청, 그리고 외성에는 일반 백성들이 이방을 이루어 살았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구려 전성기의 도성 인구는 무려 21만여호에 달했다고 한다. 

고구려가 멸망한 후에도 평양성은 서북 지역의 중요한 성으로 조선말까지 
이용됐다. 이 때문에 성곽 시설 중에는 후세에 개축된 것이 많긴 하지만 내성 
북문인 칠성문과 을밀대 축대, 대동강에 연한 동남쪽 성벽들은 석재의 다듦새나 
축조 방법 등에서 고구려 적인 정교함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이밖에도 둘러본 황룡산성, 장수산성, 태백산성, 통주성 등 10 여개 고구려성의 
보존 상태는 대부분 양호했다. 남포시 용강군 옥 도리 오석산의 황룡산성은 만주의 
환도산성, 평양의 대성산성과 더불어 전형적인 고로봉식 산성으로 성문, 치, 옹성 
등 성곽 시설 들이 거의 원형대로 남아 있었다. 넓은개활지를 가로막은 남쪽 성 
벽은 10m높이에 성가퀴까지 촘촘이 남아 있어전혀 1천5백년 지난 폐성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산성 주위에는 기름진 옥도벌과 중산벌 등이 있어 거기에 수많은 
고구려 민가들이 위치해 있었을 것임을 짐작케했다. 

절간 유적으로는 392년 광개토왕이 창설한 평양 9사 중의 하나 로 알려진 광범사, 
금강사, 영명사 등이 있는데 아쉽게도 금강사 와 영명사터는 외국인이 접근할 수 
없었다. 

대성산성의 서남쪽에 있는 광범사는 고구려 왕실 사찰로 추정 된다. 한국전 당시 
미군 폭격으로 불탔다가 89년 김일성 주석의 지시에 의해 복원됐다고 한다. 
조계종의 안순창 주지를 비롯해 스 님 6명이 기거하며 이 고구려 사찰을 지키고 
있었다. 

북한 유적 답사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역시 동명왕릉이었 다. 평양 중심지에서 
동남쪽으로 60여리 떨어진 이 곳은 일찍부터 10여기의 고분이 발견되어 '평안남도 
중화군 진파리 고분군'으로 알려진 곳. 동명왕릉도 그 중의 하나였다. 

북한학계는 고구려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하면서 시조 무덤인 동명왕릉을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본다. 그러나 실제로 동명왕릉의 천장 사실을 전하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다만 후대의 기록인 '고려사' 지리지와 '증보문헌비고'에 
"동명왕릉이 서경부 동남 중 화지경의 용산곡에 있으며 일명 진주묘라 한다"는 
기사가 보일 뿐 이다. 

여하튼 고려시대 이후로 이곳에 동명왕릉이 있다는 속설은 꾸 준히 전해 내려왔고 
이 때문에 고려, 조선시대의 왕들이 이곳의 동명성제사에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북한은 이런 기록을 토대로 지난 72년 동명왕릉을 발굴했는데 무덤에서는 왕릉임을 
보여주는 연꽃무늬 벽화와 금관 잔편 등이 발견됐고, 인근에서는 왕릉을 지키는 
능사로 보이는 정릉사 터도 발굴됐다. 

그러나 이론도 적지않다. 특히 중국 고고학계에서는 동명왕릉 을 평양으로 
옮겨갔다는 확실한 전거가 없고, 평양 천도 이후에도 역대 왕들이 고구려의 
발원지인 환런(환인)에 있는 시조묘를 매년 참배했다는 사실을 들어 동명왕릉이 
여전히 환런 지방에 있을 것 으로 보고 있다. 필자가 보기에도 동명왕릉은 왕릉급 
무덤인 것은 틀림없어보이나 그것이 꼭 동명왕릉이라고 보기에는 근거가 약해 
보였다. 

그럼에도 북한은 1993년에 대대적인 공사를 벌여 동명왕릉을 개축하고 정릉사의 
주요 건물들도 복원했다. 둘러본 동명왕릉 앞 제당에는 고구려의 건국시조 
고주몽을 그린 화려한 채색화들이 벽 면 곳곳을 장식하고 있어 이 릉에 쏟는 북한 
당국의 정성이 어느 정도인지 느낄 수 있었다. 

이처럼 북한에서 동명왕릉에 특별한 관심을 쏟는 것은 70년대 이후부터 진행된 
주체 사학의 정통 확립과 무관하지 않다. 북한에 서는 우리 민족사의 정통을 
고조선-고구려-발해-고려로 이어진다 고 보고 있다. 남한학계에서 중시하는 통일 
신라는 아예 빠져 있 다. 

이와 같은 역사 인식 속에서 고구려 시조 동명왕릉은 당연히 최대의 관심사가 
됐다. 실제로 동명왕릉 재건 공사는 김일성 주석 이 무려 수십차에 걸쳐 현지 
지도와 교시를 내리는 등 당과 정부 의 각별한 관심 속에 이뤄졌다고 한다. 
이리하여 90년대초에 진행 된 삼대시조릉(단군릉, 동명왕릉, 왕건릉) 개축의 첫 
공사로 동명 왕릉이 재건되었던 것이다. 

해방후 북한학계에서 진행된 연구과정을 돌이켜 보면 대체로 60 년대까지는 고조선 
문제, 70년대에서 80년대초까지는 고구려사,그 리고 80년대 중반부터 90년대 
초까지는 발해사, 그 이후 최근에는 고조선문제로 되돌아온 느낌이다. 종래에 
고조선의 중심지를 요동 지역으로 보는 시각도 지난 93년 단군릉 발굴 이후부터는 
다시 평 양 중심설로 되돌아갔다. 

따라서 최근 들어 북한 학계가 고구려에 쏟는 정성은 많이 줄 었다. 대신 고조선 
중심지에 대한 고고학적 근거를 찾기 위해 평 양 주변에 대한 고고학조사가 
대대적으로 진행돼 성과가 적잖다고 한다. 

북한은 이를 근거로 최근 '대동강 문화설'을 주장하고 있다.즉 대동강 중하류 
지역에 집중적으로 분포된 구석기, 신석기, 고조선 시대의 유적, 유물로 미루어 이 
지역은 고대 문명의 발상지인 동 시에 중심지였다는 얘기도 흘러 나오고 있었다. 
<서일범 연변대 조선문제연구소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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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께서 말씀하셨다 : "활쏘기는 군자의 덕성과 비슷한 바 
가 있으니, 활을 쏘아 과녁을 벗어나더라도 오히려 그 이유
를 자기 몸에서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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