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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설운도)
날 짜 (Date): 1998년 10월 12일 월요일 오전 05시 13분 32초
제 목(Title): 책/주강현 조기에 대한 명상 


황금조기 신화를 아는가 
사라진 조기의 자취 좇은 민속학자 주강현… 서해안 민중의 생명력 오롯이 담아 

 (사진/황해의 신화도 조기와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조기의 집산지였던 연평도에서 
1930년대에 조기잡이배들이 그물을 말리는 모습.) 

“우이∼우이∼.” 처음엔 뒤꼍의 대숲을 핥고 지나가는 바람소리로 흘려버렸다. 
장마비가 쏟아지는 초여름 밤, 토담을 넘어 들려오는 개구리떼의 합창소리 같기도 
했다. 1801년 처형의 땅이라 불리던 절해고도 흑산도로 유배돼 온 자산 정약전. 
새벽녘이면 어김없이 바다에서 들려오는 괴이한 소리가 환청처럼 그의 귀에 
쟁쟁거렸다. 그 수수께끼 같은 환청은 수억마리 조기떼가 토해내는 울음소리였다. 
조기 울음소리가 준 영감 때문이었을까. 자산은 조기(석수어)를 자신의 책 
<자산어보> 첫머리에 올려놓았다. “큰놈은 한자 남짓된다. 모양은 민어를 닮았고 
몸은 작으며, 맛 또한 민어를 닮아 아주 담담하다.….” 


조기는 유일하게 신화를 가진 물고기 


 

200여년이라는 시간의 간극을 훌쩍 뛰어넘어 한 민속학자도 조기울음 소리의 
환청에 사로잡혔다. <우리 문화의 수수께끼> 저자 주강현씨. 1년 동안 서해안 일대 
50여개의 섬을, 조기울음 소리를 쫓아 몽유병 환자처럼 돌아다녔다. 너무나 흔해 
빠져 아무도 챙겨보지 않았던 것. 그랬기에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것. 우리의 
밥상과 제사상은 이미 ‘중국조기’가 점령해 버리지 않았던가. 그가 이미 솟대, 
똥돼지, 장승 등 하찮은 우리문화의 흔적을 찾아나섰듯, 이번에도 사라진 조기의 
자취를 더듬으며 다리품을 판 것이다. <조기에 관한 명상-황금투구를 쓴 조기를 
기다리며>(한겨레신문사 펴냄)는 그 결실이다. 

뭉퉁하고 불쑥 튀어나온 가분수형 머리, 빼곡하게 알이 차서 더부룩한 배. 
한마디로 이 못생긴 물고기가 뭐그리 대단할까. 서해안의 민중들에게 조기잡이는 
최대의 생계수단이었다. “조기의 회귀는 어촌마다 파시를 형성하면서 어촌생활을 
뒤흔들었으며 조기의 일거수 일투족에 의해 당대의 어업생산력 수준이 
결정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탓에 민중들에 의해 조기는 유일하게 신화를 가진 
물고기로 승격했다. 배꾼들은 조정에서 역적으로 내몰은 임경업을 ‘조기의 
신’으로 환생시켰고, 굿당에 모신 임경업 장군에게 풍어를 기원하는 고사를 
지냈던 것이다. 조기에는 이처럼 어촌의 경제와 생활, 문화와 신화가 씨줄과 
날줄처럼 촘촘히 얽혀 있다. 


<조기에…>에서 지은이의 시선은 카메라 렌즈처럼 남쪽 흑산도에서 북쪽 연평도에 
이르기까지 조기군단의 행로를 따라간다. 황해를 무대로 펼쳐지는 한편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먼저 흑산도. 동지나해의 따스한 물 속에서 
겨울잠을 자듯 조용한 나날을 보내던 조기떼는 철쭉꽃이 떨어질 무렵이면 어김없이 
자신들의 고향인 서해안 흑산도에 나타난다. “날씨가 차면 홍어생각, 따뜻하면 
굴비생각”이라는 식담도 조기떼의 이런 속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봄빛 바다가 
조기들의 울음으로 시끄러워지면 흑산도 어부들의 손놀림도 바빠지기 시작한다. 
누룩을 진하게 타 농주를 빚고 화목과 양식을 배에 실은 뒤 겨우내 고대하던 
조기잡이 출정에 나서는 것이다. “곡식은 귀하기 때문에 밥은 살살 퍼주고, 
농주는 물에 타 지게미처럼 먹는” 고단한 선상생활이 시작된다. 

 

(사진/황금조기.)


조기떼가 북상하면서 흑산도 윗바다에 진을 쳤던 어장은 법성포 앞 칠산바다로 
이동한다. 정초부터 굿판을 벌이며 조기를 맞을 준비를 하던 이 지역 어부들은 
조기떼를 만난 기쁨을 구성진 타령으로 풀어냈다. “황금같은 내조기야 어낭청 
가래질이야/ 어디갔다 인제왔냐 어낭청 가래질이야/ 만경창파 너른바다 어낭청 
가래질이야/ 질을 잊어 인제 왔냐 어낭청 가래질이야” 조기를 잡느라 70여일 동안 
배 안에서 꼼짝도 할 수 없는 생활. 어부들의 몸에는 이가 득실득실했다. 하지만 
농주와 노동과 노래가 거방지게 한데 어우러지면서 고단함은 이내 사라지고 
배꾼들의 가슴은 만선에 대한 기대감으로 부풀어오른다. 


흑산도에서 연평도까지의 조기행로 살펴 


 

(사진/서해안의 전쟁영웅 임경업 장군. 임 장군이 조석의 변화를 이용해 조기를 
잡아 병사에게 먹였다는 전설이 있다.)

만선을 기대했던 것은 배꾼들만이 아니었다. 조기떼에는 배꾼, 돈을 빌려주는 
전줏집, 상인들, 색줏집 등이 굴비두름처럼 엮어져 있었다. 지은이는 조기잡이에서 
퇴역한 촌로들의 기억을 끄집어내 당시의 상황을 재현해 놓는다. “조기가 잡히는 
봄철, 자그마한 포구마을은 돈을 부대에 퍼담을 정도로 흥청거렸고 색줏집도 
즐비하게 늘어서 뱃동서들을 유혹하였다. 술취한 배꾼들은 길거리에서 오줌을 
내갈기며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기도 했고, 술집에서 계집을 사이에 두고 패싸움이 
벌어져 완력을 쓰는 소리에 쇠비명이 터져나왔다.” 젓가락 장단과 배꾼들의 
고단한 취침소리가 익어가는 풍경 속에서 소금에 절인 법성포 조기는 아낙네들의 
손에 의해 줄지어 건조장으로 들어선다. 조기는 ‘영광굴비’라는 새 이름을 
얻는다. 

흑산도에서 시작한 조기떼가 칠산바다를 지나 연평도 앞바다에 도착하면 임경업 
장군과 만나게 된다. 임경업은 여기서 조기의 신으로 다시 생명을 얻는다. 
병자호란 등 외세의 침입으로 가장 큰 고통을 받은 이는 민중이었다. 난국에 
속수무책이었던 나약한 지배층에 신물이 난 민중들은 강력한 카리스마를 원했다. 
돈키호테처럼 동분서주하다 당파세력의 틈바구니에서 억울한 죽음을 맞은 임경업이 
그들의 신으로 떠받들여진 것은 어찌보면 당연했다. 불과 20-30년 전만 해도 
전국에서 수천척의 배가 연평도 앞바다에 몰려와 임 장군이 모셔진 굿당을 향해 
출어 고사를 지냈다. 그 장엄한 광경은 민중의 생명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제의였다. 뱃전 아래가 칠성판이라 할 수 있는 험난한 뱃일, 그 예측할 수 없는 
운명에 내맡겨진 배꾼들에게 신화는 절대적인 희망의 등불이었던 것이다. 


금빛 비늘로 황해 물들여라 


신들린 듯 조기떼의 울음소리를 쫓아가던 지은이의 발걸음은 백령도에서 
멈춰버린다. “조기군단이 지나쳤던 길목엔 기뢰가 둥둥 떠서 대량학살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단지 조기잡이를 위해 북방한계선을 넘었던 기구한 한 늙은 
어부, 그 때문에 지금도 연좌제에 묶여 늘 감시당하는 어부의 얼굴에 분단의 
아픔이 겹쳐진다. 

조기는 사라졌다. 아주 완벽하게 사라졌다. 70년대 이후 ‘과학적인 어법’이 
보급되면서 조기떼를 무분별하게 남획한, 끝없는 탐욕의 대가이다. 조기와 함께 
황해의 신화도 사라지고 있다. “생산력에 대한 물신숭배가 인간 영혼의 
실오라기까지 벗겨내고 만” 것이다. 하지만 지은이는 화려한 금빛 비늘로 황해를 
물들이던 참조기, 그 ‘황금투구를 쓴’ 조기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신화는 “공동체성이라는 특성상 20세기 사람들의 텅 빈 가슴에 어두운 동굴처럼 
잠복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조기에…>는 서해안 민중에 대한 서사시이자 
“신화와 꿈을 잃어버린 이들”에게 바치는 헌사라고 할 만하다. 

이용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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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1998년 07월 23일 제217호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 "활쏘기는 군자의 덕성과 비슷한 바 
가 있으니, 활을 쏘아 과녁을 벗어나더라도 오히려 그 이유
를 자기 몸에서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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