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화이트헤드) 날 짜 (Date): 1998년 10월 3일 토요일 오후 03시 02분 35초 제 목(Title): 뉴스+/재야역사학자, 이이화 강영희의 인물탐구 「재야 역사학자 이이화선생 『民衆의 생명력이 곧 역사』 그는 팔삭둥이로 태어났다. 중일전쟁 시절, 빈민촌에 살면서 제대로 먹지 못한 어머니가 팔개월만에 그를 낳은 것이다. 그는 자신의 삶이 온통 비정상(非正常)으로 가득차 있으며, 아마도 그쯤 어딘가에 언젠가는 쓰게 될 자서전의 주제도 있을 거라고 했다. 우선 왼손잡이에 키도 작고 못 생겼으며, 집에서 한문공부만 하다 열다섯에 가출해 비로소 신학문에 접했을 뿐 아니라 어렵사리 징검징검 다니던 학교마저 생활고 때문에 중단해야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고아원과 여관 보이를 전전하는 거친 생활에도, 닥치는 대로 읽는 난독(亂讀)이나마 결코 책에서 손을 놓지 않았다. 40여년간 초지일관 독학으로 뚫어온 한국사 연구의 구비진 외길은 그를 손꼽히는 재야(在野)사학자로 자리잡게 했다. 요즘은 그간의 연구 성과를 토대로, 어느 누구도 엄두내지 못할 스물네 권의 통사(通史) 「한국사 이야기」를 써내려가는 중이다. 이쯤이면 「비정상」을 「비범」으로 바꾸어 말해도 되지 않을까. 부인의 표현을 빌면 그는 대단히 「까시라운」 사람이다. 사람에 대해 좋고 싫고가 너무 분명해서 「낯가림」을 할 뿐 아니라, 어쩌다 비위에 맞지 않는 사람과 마주치면 반드시 「탈이 난다」는 것이다. 그는 5공화국 시절 모연구원 재직중 백과사전에 유신(維新) 항목을 넣는 문제 때문에 모처럼 얻은 안정된 직장을 박차고 나오기도 했다. 이같은 그의 성벽(性癖)에 비추어, 비위에 안맞는 인간군상이 수없이 등장할 역사(歷史)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각별히 「까시라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과연 역사를 보는 그의 관점은 민(民)과 민족 주체의 자리에서 초지일관 현실비판적인 태도를 취한다. 그의 아버지는 주역(周易)의 대가인 이달(李達)선생으로서, 세상에서는 그들의 무리를 「주역패」라고 불렀다. 그는 주역을 통해 운명론적 인간학 대신 후천개벽(後天開闢)을 가르쳤다. 선천괘가 후천괘로 뒤집어지면 형세가 일변(一變)하듯, 빈부격차·신분차별·남녀차별 없는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는 우주론적 혁명관이다. 그는 가출하기 전까지 아버지로부터 주역과 사서 등을 배웠고, 후에도 민족문화추진회나 규장각에 근무하면서 한학(漢學)을 계속한다. 그가 그토록 광범위하고 방대한 분량의 역사에 도전할 생각을 낸 것도, 한편으로는 든든한 한문실력에 바탕한 사료(史料)해독 능력에 기대서일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배운 한학은 단순한 지식이자 수단이었을 뿐 유교적인 교양에 젖어든 적은 없었다고 거듭 강조한다. 이것은 아마도 그가 차별적인 신분질서를 고착화하고 사대의식과 중화주의를 강화한 사상사적 주범으로 지목하는 주자학의 역기능을 드러내면서, 그 잔재를 「깨부수는」 데에 주력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기존의 한국학 논문에 불만을 느끼고 「내가 한번 써보겠다」고 마음먹은 그는 척사위정론과 북벌론을 비판하는 글을 『한국사 연구』와 『창작과 비평』에 발표하면서 재야사학자로 「등단」한다. 이들이 사수하려 한 것은 진정한 한국적 주체가 아니라 주자학적 정통 또는 중화에 불과했다는 게 논문의 주제였다. 그렇다면 그가 염두에 두고 있는 진정한 한국적 사상은 무엇일까. 이같은 질문에 대해, 그는 어쨌든 유교사상에서 그것을 찾아서는 안된다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그는 아마도 허균이나 정약용, 박지원 같은 이들에 기대는 듯했고, 그들의 사상을 주자학 쪽에다 결부시켜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물론 현실비판적일 뿐 아니라 개혁지향적이기도 한 그들의 민(民) 사상은 곧바로 그 자신의 것과 닮아 있다. 흥미롭게도 그는 도무지 전범으로 삼은 역사책이나 사숙한 학자가 없었노라고 말했다. 필자의 질문은 그저 우문(愚問)이 되어 돌아왔을 뿐이다. 이것은 아마도 그의 날카로운 비판정신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사관(史觀)은 무엇인가. 아마도 후천개벽을 말하며 차별적인 인생관을 갖지 않았다는 부친에게서 일찌감치 물려받은 정신, 그러니까 언제부턴가 그의 가슴에 신념(信念)처럼 자리잡은 민중이 그것을 대신하고 있지 않을까 싶다. 『내가 가진 역사관은 민중(民衆)인데, 민중들이 어떻게 살아갔나를 보고, 역사 속에서 민중이 핍박받으면서도 끊임없이 저항하며 차별적인 데서 벗어나고자 평등을 추구하고 때로는 개혁도 한, 그런 역사를 보는 거죠』 그가 역사를 쓰는 태도 가운데 특기할 만한 것은 「신하가 임금에 대적하거나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는」 난신적자(亂臣賊子)가 철저하게 매도되는 춘추필법을 뒤집는 것이다. 「동학농민전쟁 인물열전」이나 「이야기 인물한국사」 같은 책을 통해 역사의 그늘에 가려지거나 굴절된 인물들을 새롭게 조명하는 작업을 계속한 까닭이 여기 있을 터이다. 「이야기」라는 제목이 곧잘 붙는 그의 글은 무엇보다 쉽고 재미나다. 고은(高銀)은 「만인보(萬人普)」에서 그를 「긴 밤 화롯불 식었다/옛이야기로서의 역사/아니 서사(敍事) 담론으로서의 역사가 나의 역사였다」라고 읊었다. 민(民)에게 민의 역사를 되찾아주는 것이 그의 사관임을 돌이킨다면, 그가 이같은 문체를 선택한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그래서 그의 역사서술의 많은 부분은 민중생활사에 할애된다. 중국에 가서 목화씨 열 개를 가져와 버들개지 이불이나 나무 베개 대신 편안한 솜이불과 솜베게를 사용할 수 있게 한 문익점은, 어떤 정치가보다도 큰 공로를 세웠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 민족이 끊임없는 외세의 침략 속에서도 민족의 고유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를, 적어도 후기신라 이후부터 독자적인 생활습관이나 풍습을 갖추었다는 사실에서 찾았다. 하지만 그는 민족성이 「위대하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고 했다. 유목민족 아닌 농경 정착민족으로서, 삶의 터전에서 형성된 풍습에 강하게 집착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 민족이 비교적 인간의 생명을 존중하는 평화로운 심성을 가진 것도 같은 맥락이다. 산속이나 바닷가에 가면 산나물이랑 물고기, 꼬막, 굴 따위를 얼마든지 잡을 수 있는 천혜의 자연환경 덕택에 「부담스럽게」 남의 나라를 침략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벌이나 닭, 돼지같은 토종(土種) 생물이 외래종과의 생존경쟁에서 밀리는 것처럼, 상대적으로 풍요로운 우리의 자연환경은 우리 민족을 그리 강(强)하게 단련시키지 못했다는 데까지 이야기가 닿았다. 그러자 그는 토종꿀, 까만 돼지는 진짜배기로 맛있지 않느냐고 하면서 「힘은 약해도 생명력은 굉장히 강인하다」는 알쏭달쏭한 말로 답을 대신했다. 하지만 이 모호한 말은 또한 그것대로 속뜻을 새길만하지 않은가. 어쩌면 이것이 바로 그의 민중사관의 핵심일 것이다. 하지만 이제 세상은 많이 변했으며, 한바퀴 더 굴러 한층 복잡해진 현실 속에서 「민중이 역사의 주체」라는 민중사관의 해맑은 얼굴은 사실상 제자리 걸음을 하며 조금씩 뒤로 밀리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다소간 뉘앙스를 바꾸어, 말하자면 「거품을 빼고」 그것을 차분한 일상 속의 현실적 과제로 받아들이는 것은 어떨까. 어쩌면 그가 「한국사 이야기」를 쓰는 것도 그래서일른지 모른다. 이이화(李離和) 1937년 대구 출생. 역사문제연구소 소장, 「역사비평」 편집인. 동학농민전쟁 100주년 사업을 주도함. 저서로 「동학농민전쟁 인물열전」 「이야기 인물한국사」 「조선후기 정치사상과 사회변동」 「역사와 민중」 「한국의 파벌」 「허균」 「우리겨레의 전통생활」 등이 있다. 요즘에는 스물네 권으로 쓰여질 「한국사 이야기」의 집필에 전념하고 있으며 고려시대까지의 여덟권을 막 탈고했다. 강영희 / 문화평론가 ------------------------------------------------------------------------------- - Copyright(c) 1998 All rights Reserved. E-mail: newsroom@mail.dongailbo.co.kr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 "활쏘기는 군자의 덕성과 비슷한 바 가 있으니, 활을 쏘아 과녁을 벗어나더라도 오히려 그 이유 를 자기 몸에서 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