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화이트헤드) 날 짜 (Date): 1998년 10월 1일 목요일 오후 12시 51분 05초 제 목(Title): 이코노/ 아편전쟁 문화 / 영화로 보는 세계 경제사 제 456호 1998.10.05/12 ------------------------------------------------------------------------------- - 제국주의와 中華사상... 東西 대충돌 19세기 영국의 아편수출로 촉발된 淸나라의 경제적 고통과 반격 이재광 기자·leejk@joongang.co.krleejk@ ------------------------------------------------------------------------------- - ▲아편전쟁은 태평천국의 난 등 중국을 대혼란으로 몰고 갔다. 사진은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는 유럽연합군 지난해 세계 최대의 핫 이슈는 홍콩의 중국 반환이었다. 세계 언론들의 시각은 구(舊)시대를 마감하고 21세기의 새 지도를 그리는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 켠에서 꿈틀거리는 불안을 감추지 못했다. 새로운 제국으로 다시 탄생한 중국이 세계를 지배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홍콩의 중국 반환으로 한창 들떠 있던 지난해 7월1일. 한 편의 영화가 세계적 화제로 떠올랐다. 정치·경제적 ‘대사건’에서 한 걸음 물러서 있던 문화계 소식이어서 일견 신선하기도 했다. 영화 ‘아편전쟁’. ‘부용진’을 만들어 일약 세계적 감독으로 떠오른 셰진 감독이 홍콩 반환 첫 날 전세계에 동시 개봉한 영화다. 홍콩의 중국 반환을 기념한다는 의미도 있었지만 역사적으로 참혹한 일들을 많이 당했던 중국이 뒤늦게 세계를 향해 ‘일성(一聲)’을 고한 것이어서 더 관심을 끌었다. 중국 정부는 이 영화에 적지 않은 지원을 표명해 개봉 전부터 화제가 됐던 영화다. 중국 정부가 이 영화를 홍콩반환을 기념해 개봉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또 그 영화의 주제가 하필 아편전쟁이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어느 정도 역사에 대한 지식이 없다면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당시 영화계는 중국정부가 중국 근현대사의 기원을 1840년 아편전쟁으로 보고 “이제 구시대는 갔다”는 선언으로 받아들였다. 아편전쟁의 기원은 아무래도 1513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겠다. 유럽인들이 아프리카를 돌아 처음 중국에 도착했던 해다. 이때부터 중국과 유럽 사이에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대규모 무역이 성사된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중요한 역사적 이해가 요구된다. 모든 유럽인들은 3백년 이상 중국의 철저한 통제를 받아야 했다는 점이다.‘중화사상’을 고수하던 중국의 입장에서 이들은 야만인이었으며 중국의 물자를 필요로 하는, 시혜의 대상이었고 조공국 ‘백성’이었을 뿐이다. 중국 茶가 역사 변동의 주역 그러나 18세기 말에 접어들자 상황이 바뀌었다. 중국에서 산출되는 ‘차(茶)’때문이다. 18세기 초만 해도 진품(珍品)에 사치품으로 귀족들이나 맛볼 수 있었던 차는 세기 말에 이르러 범국민적 대중 음료가 돼버렸다. 1784년 수입관세가 1백19%에서 12.5%로 무려 10분의 1 수준으로 떨어지자 급속히 일반인에게 파고 든 것이다. 1784∼86년의 3년간 1천4백만 파운드였던 영국의 차 수입액은 1834∼36년 4천1백만 파운드로 3배 증가했다. 그럼에도 중국은 영국 상품 중 아무 것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한 마디로 중국인에게 유럽 상품은 필요가 없었던 것. 1793년 영국의 조지 3세는 청의 여섯번째 황제인 건륭제에 통상을 확장하자고 요청했지만 “귀국의 대사도 직접 봤겠지만 우리에게는 없는 것이 없습니다. 기묘하다는 물건은 우리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고 귀국의 제품들은 별 쓸 곳이 없습니다”라며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 세계를 정복한 영국으로서는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여기에 영국은 인도문제까지 겹쳐 있었다. 19세기 들어 영국은 인도 전역을 점령하고 영국 면직물의 최대 시장으로 만들어 놓기는 했지만 이는 곧 새로운 문제를 일으켰다. 인도의 면직물 산업 붕괴가 곧장 소비시장의 붕괴를 초래한 것이다. 식민화된 인도의 재정은 극도로 궁핍해져 영국이 떠안아야 할 부담이 커졌다. 그렇다면 영국은 인도를 먹여 살리려 했을까. 물론 아니다. 영국 정부는 본국의 도움 없이 자체적으로 식민지를 운영할 방안을 모색하도록 지시했던 것이다. 아편…對中 무역적자 ‘해결사’로 바로 이때 ‘해결사’로 등장한 것이 아편이었다. 인도산 아편을 중국에 갖다 팔면 인도의 소비시장과 재정이 강화될 것은 물론이요 영국에서 빠져나간 은(銀)을 되찾아 올 것으로 보였다. 1781년부터 시작된 영국 동인도회사의 아편무역은 정부의 지원으로 19세기 들어 급속하게 증가하기 시작했다. 한 연구에 의하면 1800∼1804년 3천5백62상자에 불과했던 중국의 아편 유입량은 1835∼39년에 이르면 무려 3만5천4백45상자로 10배 가량 증가했다. 이제 고통은 중국의 것이었다. 국민건강도 문제였지만 은(銀)의 유출로 인한 경제문제는 정말 심각했다. 은의 유출은 곧 은값(銀價) 상승을 유발했고 은본위 제도로 운영되던 중국의 화폐제도 하에서 이는 곧 물가와 지가의 상승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아편은 급속한 인플레의 원인이었던 것이다. 1830년대 지가상승에 따른 세금은 이전 10년에 비해 2배씩 뛰었다는 조사 결과가 있을 정도다. 이제 양국의 충돌은 불을 보듯 뻔한 상황이 됐다. 영화 ‘아편전쟁’은 1838년 황제의 명을 하달하는 긴박한 장면에서 시작된다. 아편을 막아야 할 주역은 호광총독 린쩌쉬(林則徐). 총독이 되기 전부터 아편근절을 위해 혼신의 힘을 쏟고 황제에 아편금지를 요청했던 인물이다. 심지어 20번씩 같은 편지를 베껴 놓고 유럽으로 돌아가는 배만 보면 빅토리아여왕에게 “자발적으로 아편을 금지해 줄 것”을 부탁하기도 했다. 이를 위해 그는 당시 국제법의 교과서였던 에머릭 드 바텔의 저서 ‘국제법’(Le Droit des Gens)까지 숙독했다. 영화가 이같은 인물 묘사를 상당 부분 생략했다는 것은 유감이다. 어쨌거나 광저우(廣州)로 달려간 린쩌쉬는 그야말로 ‘대쪽’의 자세로 아편을 막았다. 그러나 그가 싸울 적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돈에 눈이 멀어 동족을 아편소굴에 팔아먹는 중국 상인들, 이들과 한 통속이 되어 정보를 팔아 먹는 관료들, 이들을 이용해 버젓이 아편을 밀무역하는 영국의 상인들…. 말 그대로 ‘총체적 부패’가 그의 앞을 가로 막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강력한 아편 저지는 곧 영국 정부·상인과의 충돌을 막을 길이 없었다. 1840년 4월 10일. 영국 의회는 중국에 대한 군사력 파견에 대한 표결에 들어갔고 마침내 의회는 중국과의 전쟁을 선포하게 된다. 역사 영화는 역사와 마찬가지로 자국의 이해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자국의 치부가 드러날 역사적 사건이라면 아예 취급조차 하지 않는다. “역사는 승자의 편”이라고 하지 않던가. 대중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큰 영화이기에 어쩌면 역사학계보다 더 심할지 모른다. 아편전쟁도 마찬가지. 미국이나 유럽에서 아시아와 관련해 많은 영화를 만들었다고는 하지만 아편전쟁을 다룬 것은 없다. 20세기의 승자 유럽의 치부를 드러내는 아편전쟁은 아예 영화사에서 사라진 것이다. 이런 점에서 개봉 당시 아시아 영화계가 ‘아편전쟁’에 걸었던 기대를 이해할 수 있다. 유럽 중심으로 그려진 숱한 역사영화들을 보며 아시아의 지식인들은 얼마나 심한 가슴앓이를 했던가. 비록 중국인의 애국심을 고취시킨다는 진부한 내용이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고는 하지만 셰진 감독의 ‘아편전쟁’은 영화계에서 사장된 역사를 되살렸다는 의미를 갖는다. ▲ 제456호 ------------------------------------------------------------------------------- -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 "활쏘기는 군자의 덕성과 비슷한 바 가 있으니, 활을 쏘아 과녁을 벗어나더라도 오히려 그 이유 를 자기 몸에서 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