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화이트헤드) 날 짜 (Date): 1998년 9월 4일 금요일 오후 04시 05분 17초 제 목(Title): 박명규/20세기한국의 역사적성취와 한계 20세기 한국의 역사적 성취와 한계 박명규(朴明圭) 세기말과 위기 20세기 한국의 변동과 역사적 성취 역사적 성취의 한계와 이중개혁의 과제 21세기를 바라보며 주제토론 1. 세기말과 위기 1998년은 여느 해와 달리 매우 우울하게 시작되었다.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경제발전의 성공사례로 자타가 인정하던 한국경제가 하루아침에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고, 실업의 공포와 사회적 불안을 느끼면서 맞이했던 1998년은 아마도 오랫동안 우리 머릿속에 아픈 기억으로 남을 것 같다. 한국의 경제위기는 우선 그 갑작스러움 때문에 충격이 매우 컸다. 국내외의 일부 지식인들이 한국경제의 한계나 세계화의 위험성을 지적하기도 했지만 불과 한두 달 사이에 이처럼 급격한 위기가 도래할 것을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註1) 한때 많은 외채 때문에 관심을 끌었던 종속이론도 종적을 감추고 한국의 비약적인 경제성장을 설명하는 이론들이 사회과학계의 핵심 쟁점이 되고 있던 바로 그 시점에 느닷없이 찾아온 위기는 경제적 어려움 못지않은 정신적인 당혹과 충격을 안겨주었다. IMF사태로 불리는 경제위기가 아니었다면 지금쯤 우리는 21세기를 바라보며 20세기의 의미와 성취를 정리해보느라 바빴을 것이다. 식민지, 분단, 전쟁, 독재와 저항 등 파란만장했던 20세기가 저물고 21세기가 목전에 다가온 지금 지난 발자취를 정리하고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려는 마음다짐이 없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해외에서의 여러 논의들, 예컨대 탈냉전·세계화·문명충돌·탈근대 등의 쟁점들이 활발히 소개되면서 새로운 토론거리들을 만들어냈던 것도 그에 근거하여 우리 자신의 과거와 미래를 조망해보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경제위기에 눌려서인지는 몰라도 정작 한국사 20세기를 본격적으로 검토하는 작업은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다. 이 글에서는 세기말의 상황과 경제위기의 상황이 동시적으로 부각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해보려 한다. 물론 이것은 별다른 의미를 부여할 필요조차 없는 우연의 소산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한 세기를 마감하는 시점에서 우리 자신의 지난 역사를 조망해보아야 할 과제와 다급한 사회경제적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는 과제가 함께 주어져 있다는 사실은 그렇게 예사로이 보아 넘길 일이 아니다. 오히려 양자의 긴밀한 연관성을 생각할 때 비로소 미래지향적인 대응책도 모색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한국사 자체로 보든, 세계사적으로 보든 오늘의 위기는 20세기 역사의 변화와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우선 이 위기가 냉전이 끝나고 세계화가 외쳐지던 시기에 도래했다는 점, 그리고 외환위기로부터 유래했다는 점으로부터 생각의 실마리를 풀어보자.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체제가 공존하면서 국민경제의 독자적 권역이 국가권력에 의해 보호된 것이 냉전체제의 성격이라면 WTO체제 이후 진전되는 세계경제는 전세계를 단일한 자본 및 상품 시장으로 예외없이 결합시키는 질적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그런 점에서 탈냉전은 20세기 세계사의 종언을 뜻하는 사건이었다. 한편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이 모두 외환위기로 인해 경제위기를 맞았다는 사실에서도 시대적 특징을 읽어낼 수 있다. 외환(外換)이란 자국의 화폐가치가 세계시장에서 평가되는 값으로 국민국가의 통제권 아래 있는 국내화폐와 그 통제를 벗어나는 기축통화(基軸通貨) 간을 연결시키는 고리인 셈이다. 바로 이 부분으로부터 경제위기가 급속히 파급되었다는 사실은 금융자본에 대한 국가권력의 통제력, 국민경제 단위의 분절성이 현저하게 위축되고 있음을 반영한다. 이러한 현상의 배후에는 탈냉전 이후 전세계적으로 확장된 국제금융자본의 엄청난 팽창, 그리고 정보통신 분야의 획기적인 기술발전으로 가능해진 유동성의 증대 등이 작용하고 있다. 한마디로 최근 한국사회가 겪는 위기는 탈냉전·세계화라는 시대적 환경변화와 무관한 것이 결코 아니다. 또한 20세기적 조건 속에서 한국사회가 추구해온 변화의 모델과도 매우 깊이 연관되어 있다. 따라서 이 위기는 20세기 말 세계사적 조건과 함께 한국사회의 구조적 특성을 동시에 고려해야만 설명이 가능한 것이다. 또한 이것은 경제적인 위기에서 그치지 않고 사회 전반의 위기를 뜻하는만큼 총체적인 이해와 접근을 요한다는 점에서 20세기 단위의 역사를 검토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2. 20세기 한국의 변동과 역사적 성취 20세기 한국사를 한마디로 규정하기는 어렵지만 그 이전과 대비할 때 가장 큰 특징을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세계사와의 상호연관성의 심화이다. 20세기 이후 한국사회의 변동은 일국사적인 요인, 내재적 변인만으로는 전혀 설명될 수 없다. 실제로 한국사의 중요한 사건들, 예컨대 러일전쟁, 한일강제합병, 만주사변, 제2차 세계대전, 해방과 분단, 한국전쟁, 대외지향적 산업화 과정 등 어느 하나 세계사적인 흐름과 무관한 것이 없다. 그만큼 한국인들은 지난 한 세기 동안 독특한 형태로 세계사와 더불어 생활해온 셈이다. 두번째는 20세기를 거치면서 한국사회가 보편적 의미에서의 근대적 사회로 전환했다는 사실이다. 20세기 초만 해도 전형적인 농업사회였으나 약 1세기 만에 세계적으로도 주목받는 산업사회로 변모하였다. 사회 각 부문의 분화가 급속하게 진전되었고 사회구성원간에 작용하는 사회통합 방식도 크게 달라졌다. 의식주 형태는 물론이고 삶의 목적과 가치관에도 심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한마디로 20세기 초반과 세기말의 한국사회는 놀랄 정도로 상이한 구조를 보여준다. 이 두 가지 특징은 상호간에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20세기 한국의 근대화는 상당한 정도 세계사적 조건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또 외부적 요인의 영향을 강하게 받으면서 진행된 것이었다. 물론 이 말은 근대화 과정의 타율성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사적 조건과의 연관 속에서 근대로의 이행이 이루어졌음을 말한다. 한국사 20세기는 세계사적 차원에서 외부적 영향이 개입하고 작용한 역사임과 동시에 그에 대한 강한 도전과 저항의 역사이기도 했다. 외부로부터의 충격과 뒤이은 급속한 변동은 특정 영역의 이상 비대를 가져오기도 하고 일부 영역의 자연스런 변화를 억압하기도 하였다. 국가기구의 이상 비대화나 경제성장에 걸맞지 않은 시민사회의 위축현상은 이미 여러 학자들에 의해 지적된 바 있다.註2) 쉽게 바뀌지도 않고 잘 포착되지도 않는 문화나 심성의 영역에 이르면 그 불일치의 정도는 더욱 커진다. 근대화 과정에서 사회 제(諸) 영역들간의 불일치는 어느 사회에서나 보편적으로 지적되는 것이지만 한국과 같이 압축적이고 급속한 변화를 경험한 사회에서는 매우 두드러진 특성으로 부각된다. 이 글에서는 20세기 세계사적 조건의 변화에 주목하면서 국가형성·산업화·문명화의 세 영역을 중심으로 한국의 변동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국가간체제와 국가형성 20세기 한국사의 최대 과제는 근대적 국민국가 형성이었다. 개항 이후 근대국가로의 전환이 모색되던 시기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가장 중요한 정치적 목표로 제시되었던 것들, 즉 개화자강·독립·통일 등의 과제가 한결같이 근대국가를 형성하려는 노력들이라 할 수 있다. 국가간체제 속에서 한 민족을 단위로 하는 독자적인 정치공동체를 구성함으로써 자율적인 주권을 행사하려는 노력은 20세기 역사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이는 세계사의 흐름과도 맥을 같이하는 것이다. 월러스틴(I. Wallerstein)은 지난 150년간의 세계사를 국민국가를 통해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프로젝트였다고 지적한 바 있다.註3) 국민국가 단위로만 세계사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이 지금까지 국가간체제의 성격이었다. 국가소멸을 부르짖던 사회주의권조차 결국은 국가를 단위로 변혁을 추진했던 것이 20세기적 조건이었다. 한국은 매우 오랫동안 독자적인 정치단위를 형성해온 역사적 민족이었다. 중국에 사대의 예를 갖추었던 조선왕조도 명실상부한 독립적인 정치단위였다. 문제는 근대적인 국가간체제, 만국공법적 질서 속에서 독립국가의 지위를 인정받고 근대국가로서의 기능을 수행하는 일이었다. 당대의 지식인들은 오랜 역사를 가진 정치공동체로서의 조선왕조를 대외적으로 ‘인정’받음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김옥균(金玉均)은 청국에 대한 사대관계를 끊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보았고 유길준(兪吉濬)은 증공국(贈貢國)으로서도 명실상부한 국가가 될 수 있음을 논증하려 했다. 대한제국의 성립은 이러한 국가의식의 대내외적 표명으로서 입헌군주국 또는 절대왕정의 형태로 근대적인 전환을 모색하려던 노력의 결과였다. 그러나 권력의 구조, 민중의 정치사회적 역할에 대한 근본적인 개혁이 동반되지 않은 상태에서 왕권의 강화만으로 근대국가로 전환한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당시의 국가간체제에서 대외적 자주성의 문제는 실질적인 국가의 능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고 그것은 다시 대내적인 권력의 정당성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대한제국의 성립은 전통적인 조선왕조체제를 변혁하고 국가간체제에 새로운 형태로 대응해야 한다는 사실을 자각하기 시작하였음을 보여준다. 일본의 침략과 강제합병은 이러한 방향으로의 발전을 차단한 것이었다. 식민지가 되었다는 것은 정치단위로서의 독자성을 강제적으로 부정당한 것을 의미하며 국가간체제를 특징으로 하는 20세기 세계사에 주체적으로 참여할 기회와 자격이 상실됨을 뜻하였다. 그러나 한국은 낮은 문명수준과 분절적인 사회구조를 지닌 채 식민지가 되었던 일부 제3세계권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즉 한국은 오랜 역사적 경험의 공유, 비교적 높고 동질적인 문명, 그리고 독자적 정치단위로서의 왕조체제 등 매우 강한 정체성이 강제적으로 부정된만큼 식민지체제에 대한 거부감과 저항의식이 유달리 강하였다. 일제의 가혹한 식민통치, 특히 민족적 정체성을 말살하려는 동화정책 아래서도 강렬한 저항의식과 독립의지를 내면적으로 심화시켜올 수 있었던 것도 민중적 차원에서 자리잡고 있던 이러한 힘 때문이었다. 해방이 민족적 저항의 결과로 이해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해방은 해방투쟁의 산물로서가 아니라 연합국들의 전후처리 과정의 산물로 이루어진 것이었고 따라서 국제정치적 제한을 심대하게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해방이 분단으로 귀결된 것도 이러한 한계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한국과 일본이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상이한 단위임을 연합국측이 인식하게 된 것은 수많은 민중들의 저항과 해외 독립운동가들의 끈질긴 투쟁의 결과였던 것이다. 비록 분단된 형태일지라도 해방 이후 근대국가체제가 수립된 것은 매우 소중한 역사적 성취라 할 수 있다. 한국과 한국인의 존재가 세계적으로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알려지는 경우에도 일본의 일부로서 이해되었던 식민지 상황에 비추어 볼 때 독립국가의 구성원으로서 자기존재를 떳떳하게 인식할 수 있는 현재 상황을 대견하게 평가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남북한이 각기 냉전체제의 양축인 미국과 소련의 강력한 통제 내에서 분단국가체제를 구축하게 된 사실 때문에 우리는 국가형성의 의미보다는 분단의 아쉬움에 더욱 주목하는 경향이 있다. 비록 분단국가체제의 문제점이 매우 많긴 하지만 근대국가를 형성하려는 오랜 노력이 불리한 세계사적 조건 속에서 제한된 형태로 실현된 결과였다는 사실은 주목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더욱이 식민지하에서의 민족운동, 해방 직후의 대립과 갈등, 전쟁의 고통을 겪으면서 국가라는 것이 결코 단순한 역사공동체가 아니라 통치기구와 이데올로기, 헌법적 규정을 지닌 특수한 정치조직이라는 점을 명확히 깨닫게 된 것은 무시 못할 역사적 경험이었다. 민주주의의 원리와 국가의 이념을 둘러싼 논쟁과 갈등은 정치세력의 통합을 방해한 부정적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했지만 국가권력의 성격이 무엇이며 국가와 개인 간의 관계가 어떠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성찰의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가 있었다. 개인의 권리를 바탕으로 구성되는 민주적 정치공동체로서의 국가를 이념적으로 표방하게 된 것 자체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성취인 셈이다. 60년대 이후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추진될 때 국가의 강력한 힘이 행사될 수 있었던 것도 국가가 매우 뚜렷한 역사적 정당성을 부여받았기 때문이었다.註4) 박정희정권이 강력하게 추진한 권위주의적 산업화는 국가의 작용범위와 역할을 강화시켰고 빈곤의 퇴치를 최우선의 국가 기능으로 내세운 논리 역시 대중적 동의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그 결과 국가는 가족의 생계와 활동을 전적으로 책임지면서 통제하는 엄격한 가부장 같은 위치에서 자본과 물자를 배분하고 시장을 관리·제한·통제하는 주체로서 기능하였다.註5) 많은 학자들이 이 시기의 국가를 발전국가(developmental state)라고 개념화하는 데서도 볼 수 있듯이 국가는 자본축적을 지원·유도하고 노동자들의 저항을 억압함으로써 부르즈와계급을 중심으로 하는 수출지향적 산업화의 추진체로 작용하였다. 현재도 한국사회에서 국가는 매우 강력한 힘을 행사하는 주체이다. 지나치게 강력한 국가의 힘 때문에 시민사회의 자율적 공간이 발달하지 못한다는 점이 지적될 정도이다. 한국의 국가가 매우 강한 헤게모니를 갖게 된 데에는 여러 역사적 경험이 작용하고 있다. 우선 한말과 식민지시대를 겪으면서 역사적·문화적 공동체로서의 민족과 정치공동체로서의 국가가 불가분의 관계를 이루게 되었던 사실이 중요하다.註6) 여기에 분단과 건국, 전쟁의 결과로서 냉전적 이데올로기의 수용과 정착 또한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뒤이은 국가 주도의 발전 경험은 국가의 가부장적인 지위를 강화시켰다. 대내적으로 반공을 국가의 기본이념으로 규정하면서 자본주의 체제를 지키는 진영적 정체성을 강화시킴에 따라 한국의 국가는 비판이나 논쟁의 대상이 되는 것으로부터 상당 정도 자유로울 수 있었다. 이러한 조건하에 국가는 자본과 노동 어느 세력보다도 우위에 서서 자원의 배분과 통제에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였고 계급적 갈등을 해결하는 주체로서 기능하였다. 최근 경제적 위기와 계급적 대립이 격화되면서 박정희정권에 대한 향수가 터져나오는 것도 바로 이런 가부장적 발전국가에 대한 복고적인 기대가 일부 반영되어 있는 것 같다. 강력한 국가의 형성은 20세기 한국의 역사적 성취임은 분명하지만 이로부터 상당한 한계가 나타나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20세기 자본주의와 산업화 국가건설이라는 문제 못지않게 한국의 20세기를 특징짓는 것이 산업화이다. 세계로부터 한국이 관심의 대상이 된 이유도 급속한 산업화 때문이며 우리 스스로 자부심을 가졌던 것도 가난으로부터 이만한 부를 성취했다는 자신감에 기인한 바 크다. 우리가 물질적 가치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취하든간에 한국이 20세기에 성취한 경제적 성장의 의의는 높이 평가해도 좋을 것이다. 20세기를 통틀어 한국인들에게 물질적인 향상, 가난으로부터의 해방은 그 무엇보다도 강력한 목표였다. 산업화는 국가형성 못지않은 집합적 욕망이었고, 그만큼 강렬한 힘을 동원할 수 있었다. ‘잘살아보세’라는 천박해 보이는 구호가 국가의 목표로 설정되고 실제로 민중들에게 먹혀들었던 것은 가난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열망 때문이었다. 따라서 빈곤에 안주하는 빈곤문화 대신 가난을 떨쳐버리려는 민중적인 집념과 의지가 조직적으로 동원될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탈빈곤의 지향은 한국의 산업화에 필요한 초기의 노동윤리를 제공해주었고 동원화의 문화적 기반이 되었다. 한국의 자본주의적 산업화와 관련하여 역사학계에서는 조선후기 이후의 내적 변동에 주목한 바 있다. 한국의 자생적 발전가능성을 부정했던 일제의 식민사관에 대항하여 한국사 연구자들이 공유했던 내재적 발전론의 문제의식은 조선후기에 이미 자본주의적 발전의 ‘싹’이 존재했고 일정하게 진전되었다는 것이다.註7) 이 시각은 일국사적 시각의 한계와 실증의 취약함이 비판받기도 하지만, 한국사를 보편적 세계사의 한 영역으로 끌어올리고 일제의 식민사관을 비판하는 근거를 제공하였다는 중대한 의의를 지닌 것이다. 산업증진을 통해 부국강병을 꾀하려던 개화파의 희망이나 갑오개혁 이후 대한제국 정부의 각종 제도정비도 실현되지는 못하였지만 그러한 방향으로의 전개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19세기까지의 경제적 변화는 그 속도나 수준에서 현저한 것이라 보기 어렵다. 동력과 근대기술의 투입으로 공업생산 비중이 높아지고 그에 따라 급속한 사회변화가 야기되는 산업화는 아무래도 20세기 이후의 일이다. 특히 1960년대의 공업화와 도시화의 진전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계기였다. 보릿고개로 지칭되던 절대빈곤이 사라지고 농업부문의 비중이 현저하게 낮아지는 본격적인 산업사회의 도래는 지난 수십년간에 이루어진 현상이었다. 물론 공업화현상은 식민지시기에 일정하게 진전된 바 있다. 특히 1930년대 군수공업화의 결과 산업도시가 발달하고 공업인구가 크게 증대하였다. 최근 이 점을 강조하는 일부 학자들은 식민지하에서도 상당한 정도의 자본주의적 경제성장이 이루어졌다는 주장을 내놓고 있다.註8) 이와 유사한 논지들을 담은 해외의 연구들도 식민지공업화를 부각시키는 데 일조하고 있으며 일부는 한국의 산업화가 식민지공업화로부터 기원한 것으로 설명하기도 한다.註9) 이러한 견해들은 그동안의 통설, 즉 식민지지배는 한국 국민경제의 자생적 발전가능성을 파괴하고 이를 일본경제의 일부분으로 예속시킴으로써 산업화에 최대 장애를 가져왔다는 논리에 대해 비판적이다. 그러나 식민지공업화는 그 실질적인 수준에서도 제한적일 뿐 아니라 한국의 국민경제, 물질적 성장이라는 점에 비추어 매우 심각한 폐해를 남겼다. ‘척식(拓植)’이라는 이름으로 추진된 초기의 식민지 개발정책이나 공업화의 기치를 내건 1930년대 후반의 변화 모두가 실질적 의도는 어디까지나 일본자본주의의 발달을 위한 것이었고 한국의 경제성장 또는 한국인의 물질적 풍요는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었다.註10) 오히려 군수공업화가 진전된 이후 혹심한 통제와 자원수탈, 그리고 민족말살의 고통을 더욱 크게 겪었던 것이 현실이었다. 대부분의 자산과 이익은 일본자본의 수중에 귀속되었고 전체적으로는 자원과 부의 식민모국으로의 유출이 현저하였다. 식민지공업화의 더 큰 문제는 경제부문이 정치 및 사회 영역과 맺게 되는 관계의 내용에 있다. 식민지하에서의 공업화는 결국 식민지체제의 정치경제적 조건과 타협하거나 그 체제를 지지하는 결과를 가져오기 쉽다. 경제적 축적을 위해서는 정치적인 보호와 지원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러한 행위는 사회적·민족적 차원에서 정당성의 심각한 위기를 수반한다. 자본가의 경제행위가 헤게모니적 정당성을 갖추지 못할 때 정치와 사회 영역에서의 탈식민지적 지향이 자본주의적 성장논리와 유기적으로 연결되기 어려울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註11) 해방 직후 많은 사람들에게서 막연한 형태로나마 반자본주의적 지향이 강하게 나타난 것과 이후 자본가의 사회문화적 헤게모니가 약한 것도 이러한 현상의 반영이라 하겠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해방후 국민국가적 틀 안에서 경제성장·산업화를 주요 목표로 설정하고 이를 추진하게 된 것은 그 의의가 크다. 한국의 현재와 같은 고도성장과 경제발전은 1960년대의 산물이었다. 60년대 이후 한국의 급속한 경제성장이 가능했던 요인으로는 흔히 박정희정권의 출현과 세계체제의 분업구조 개편을 든다. 우선 박정희정권의 등장이 경제성장을 설명하는 하나의 변수임은 분명한데 최근 박정희정권을 독재정권으로서가 아니라 발전국가로 개념화하는 경향에서도 그러한 점이 확인된다.註12) 국가가 강력한 통제력과 동원논리를 통해 사회 전반의 자원과 인력을 경제성장이라는 단일가치에 결합시켰고 이후 30여년에 걸친 한국적 발전, 국가주도형 경제성장을 가능케 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 권위주의적인 국가의 통제하에서 재벌 중심의 자본주의적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자본에 대한 권력의 지원과 노동에 대한 강압적 통제가 불가분의 정책으로 자리잡았다. 농촌 노동력의 값싼 공급에 의한 저임노동에 기초하여 수출지향적 공업화 정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었고 사회의 모든 부문이 경제적 목표 달성을 위해 동원되고 이용되는 방식으로 재편되었다. 60년대 이후 한국의 산업화가 진행된 배경에는 세계체제의 변화도 중요한 조건의 하나로 작용하였다. 냉전적 대결의 최전방으로서 한국은 사회주의 진영에 대해 자본주의체제의 정당성을 과시하고 증명하는 곳이었고, 그만큼 서방세계 공동의 관심이 되었다. 커밍스(B. Cumings)가 말하는 삼각협력주의, 즉 미국·독일·일본을 잇는 서방세계의 정치경제적 연계구조가 냉전의 기본구조로 자리잡은 가운데 한국은 서방진영으로부터 정치경제적 간섭과 함께 일정한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註13) 뿐만 아니라 이 시기 세계자본주의가 포드주의적 축적체제로 이행하면서 국제분업이 재편되었고 그 틈새를 이용한 한국의 수출지향적 산업화가 가능할 수 있었다. 이런 맥락을 강조하는 이들은 한국의 산업화를 ‘초청’에 의한 발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초청만으로 가능했던 것은 물론 아니지만 2차대전 후 세계자본주의의 구조변동을 염두에 두지 않고서 한국의 경제발전을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은 분명하다. 결국 한국의 산업화는 가난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대중적인 열망을 조직화한 권위주의적 발전국가의 성장전략이라는 국내적 요인과 냉전체제하의 국제분업구조 변화라는 국제적 요인의 독특한 결합에 의한 것이었다. 이 결합의 구체적 형태가 60년대 이래 공업화의 견인차였던 ‘수출’이었고 고도성장의 모델이었다. 이 모델에 의한 산업화·경제성장은 20세기 한국사가 얻어낸 중요한 성취의 하나라 할 수 있겠다. 서구문명의 유입과 문명화註14) 한국의 20세기는 한국인들의 사고방식과 태도, 생활양식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난 시기였다. 이 전환은 서구적인 가치관과 세계관의 수용을 주된 내용으로 한 것인데 이에 따라 오랫동안 유교문화를 중심으로 하던 전통적 요소들이 크게 약화되기에 이르렀다. 서구문명의 수용이 개인의 자율성을 억압하던 당시의 현실을 비판하고 계몽된 자아, 각성된 주체로서의 성숙을 강조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해도 좋을 것이다. 물론 서구문명의 수용만이 근대적인 인간을 형성시킬 수 있었다는 주장은 아니다. 실제로 현재 우리 생활양식을 구성하는 상당 부분이 금세기 들어 외부로부터 수용되어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는 것들이다. 태양력과 요일체계, 서구식 의복문화, 관료제적 통제, 사회적 이동과 동원, 근대적인 규율과 훈련, 서구적 의료체계 등 일상생활의 현재적 틀이 이 시기에 도입·확산된 ‘문명’이다. 또한 우리가 자신과 타자, 인간과 세계를 인식하기 위해 사용하는 대부분의 지적 도구들, 예컨대 국가·민족·사회·개인·정부·경제·세계 등도 이때 본격적으로 수용된 후 지금까지 인식의 기본도구가 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전환은 밖으로부터 밀려들어오던 서세(西勢)의 불가피한 귀결이기도 했지만 자신들의 고루함을 벗어나려던 적극적인 문명개화 노력의 결과이기도 했다. 개화 지식인들은 서양의 힘의 원천을 그들의 문명에서 찾았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註15) 척사론적 저항이 있었고 동학사상 같은 독자적 모색이 없지 않았으나 거대한 세계사적 흐름 속에서 격변을 경험하던 한국사회에서 영향력을 지닐 수 있었던 것은 개화론이었다. 문명의 뜻이 동양문화권 내에서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고 하지만 ‘개명’의 의미가 사회적으로 뚜렷한 성격을 갖게 된 것은 20세기에 들어와서였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 시기에 수용된 서구문명은 크게 가족과 전통보다 개인의 가치를, 정신적인 요소보다 물질적 성장을 중시하였다. 또한 조선적인 것을 중시하는 특수주의적인 가치 대신 모든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원리들을 강조하였다. 한말의 개혁 지식인들은 문명이라는 개념을 통하여 계몽적 존재로서의 각성을 강조하고 과학기술과 산업의 중요성을 부각시켰다. 약육강식의 사회진화론이 수용되면서 경쟁과 힘의 논리가 강조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한마디로 서구문명의 수용 과정 그 자체가 20세기적 세계질서에 적응해가는 과정의 한 단면이었다. 그런데 한국사의 특징은 바로 이러한 문명화 과정이 식민지 및 분단의 역사와 깊숙이 맞물려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그 결과 문명화 과정은 양면성 내지 모순성을 강하게 지니게 되었는데 특히 식민지하에서 더욱 그러했다. 일제는 식민지지배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 서구문명의 특정한 내용들을 선택적으로 수용·적용시켰다. 신작로·철도·관료제·학교·경찰·재판소·은행 등의 조직과 기구들이 이 시기에 본격적으로 출현하였는데 그 사회적 기능은 식민지지배의 효율성과 정당성을 높임과 함께 한국인의 자기정체성을 폄하하려는 것이었다. 실제로 식민지지배하에서 서구문명의 수용은 더이상 개인이나 민족의 자율성·주체성을 강조하는 것이 될 수 없었고 다만 ‘충량한 신민’, 즉 정치적 권리와 주체성을 포기한 수동적 인간이면서 동시에 기능적 요건을 갖춘 인간형의 주조를 목표로 한 것이었다. 특히 1930년대 이후 민족말살정책으로까지 진행된 내선일체·일본주의는 인간의 정체성을 강압적으로 부정하는 것이었고 그런 점에서 소외의 극대화 현상이 초래되었다.註16) 그렇지만 이러한 조건 아래에서도 새로운 문명적 요소들의 영향력은 점차 확대되었다. 특히 3·1운동 이후 열린 이른바 문화정치 상황에서 활발하게 전개된 각종 사회·문화활동은 한국의 근대적 사유와 지식의 형성에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조선·동아 양대 신문의 창간이나 새로운 회사 및 공장의 설립은 민족적 자각과 사회의식을 증대시키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민족주의 사상과 서구 모더니즘의 요소들이 한국인의 주체적인 자아인식에 직접·간접으로 끼친 영향도 적지 않았다. 또 사회주의적 사상의 발달과 조선학의 진전 역시 식민지적 조건 아래에서 얻어진 문화적 성취의 일종이라 할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식민지성의 한계 속에서 근대문명의 효과를 내재화해가는 노력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해방은 식민지적 조건이 부과한 모순적인 성격을 제거하고 문명화의 과실을 좀더 높은 차원에서 발전시킬 계기였다. 식민지하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하던 일본적인 요소들은 식민지 권력의 해체와 함께 상당 부분 약화되었지만 ‘문명’의 이름으로 수용되었던 서구적 가치와 행동양식, 세계관은 미군정의 영향 아래 더욱 강화되었다. 60년대는 급속한 산업화가 권위주의적으로 추진되는 가운데 서구적 근대주의가 기능적인 차원에서 더욱 강조되었다. 박정희정권은 세계시장으로의 적극적 진출을 위해 외자를 도입하고 산업화를 최고가치로 내세우며 ‘부끄러운 역사’를 내던질 것과 ‘잘살아보세’를 강조하였다. 미국으로 표상되던 선진국의 기술과 산업은 장차 한국이 따라가야 할 모델이었다. 해방후부터 쓰이던 단기(檀紀)가 60년대초 서기(西紀)로 바뀐 것도 그러한 전환의 상징이었다. 전반적으로 박정희정권기는 문명화의 효과를 경제적 효용성과 기능성의 관점에서 제한적으로 인정하려 했지만 과학기술분야를 비롯하여 여러 영역에서 그 변화는 매우 분명하였다. 근대적 군사조직을 관리하던 획일적인 관료제적 원리와 효율성을 가장 중요한 평가기준으로 삼은 기능주의적 사고, 그리고 기술적 효과를 위해서 적극적으로 서구의 제도나 지식을 수용하고자 했던 노력 등이 이 시기의 큰 특징이었다. 광범위한 지역이동과 계층이동을 동반했던 이 시기에 기능적 지식체계와 물질주의적 가치관은 매우 확고하게 자리잡았다. 80년대 이후 특히 민주화가 진전되면서 오랫동안 억눌렸던 서구문명의 또다른 측면들, 즉 개인의 다양한 가치와 지향을 인정하려는 민주적 원리가 확산되었고 자율적이고 자발적인 활동의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이러한 힘은 민주주의와 평등주의에 대한 강한 태도에서 잘 드러나는데 상당 정도 근대적 교육과 문명적 각성의 결과라 할 것이다. 동시에 최근 대량생산과 대중소비가 일반화되면서 이전과는 사뭇 이질적인 행동양태들도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 결과 한편에서 “정형화되고 획일화된 자본주의 문명이 그 모습을 확연하게 드러내”는 반면註17) 다른 한편에서 탈근대적 지향과 새로운 가치에의 모색이 이루어지는 상황이라 하겠다. 3. 역사적 성취의 한계와 이중개혁의 과제 20세기적 성취의 내적 한계 특정한 시기의 역사적 성취는 새로운 시대로의 이행에서 족쇄가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나는 현재 한국사회의 위기가 20세기 역사적 성취의 성격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우선 20세기의 역사적 성취라 할 만한 한국의 근대국가는 그 성격과 형태 양측면에서 적지 않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먼저 분단국가의 형태, 그것도 매우 적대적인 형태로 존재하는 현재의 체제는 부자연스러울 뿐 아니라 근본적으로 불안정한 것이다. 남북한은 각기 상대방에 대한 부정과 대립 위에 정권의 정당성을 세우고 있으며 이 적대적 대립이 역사 속에서 일정한 체제로까지 일컬어질 만큼 질서잡힌 모습을 드러내고 있지만註18) 보편적인 국가의 형태에서 볼 때 불안정한 구조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남북한은 공히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를 자신의 영토로 간주하는바 결국 영토의 절반과 국민의 상당수가 헌법의 영향이 미치지 못하는 ‘미수복’ 상태로 파악되는 셈이다. 뿐만 아니라 식량난과 경제난에도 불구하고 막대한 국방비를 지출하지 않으면 안되는 구조를 재생산하고 있다. 가장 적대적인 대치상태로 공존하는 남북한은 여전히 국가간 관계도 아니고 그렇다고 국내적 관계도 아닌 ‘특수적 관계’에 놓여 있다. 우리가 분단국가라고 부르든, 결손국가라고 부르든 현재 한국의 국가는 세계적으로도 매우 부자연스러운 정치공동체로 남아 있는 것이다.註19) 이러한 형태적 조건 이외에 한국의 국가는 그 기능면에서 더 큰 문제에 부딪치고 있다. 국가는 지금까지 한국사회의 모든 부문과 영역을 관할하고 조정하는 주체로서 강력한 힘을 행사해왔는데 국가의 엄청난 규정력 자체가 새로운 문제들을 낳고 있는 것이다. 국가의 신성한 지위와 강력한 영향력은 20세기 한국사의 자연스런 결과였다. 식민지로부터 해방되고 전쟁의 공포로부터 벗어나며 가난의 고통으로부터 탈출하려는 노력은 하나같이 강력한 국가의 건설을 희구하게 했다. 비록 분단국가라는 제한으로 인해 여러 문제들이 따르기는 했지만 사회의 제반 영역에 대한 국가의 개입은 정당성을 얻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바로 이 구조로부터 거대한 부패와 비효율의 관행들이 동시에 성장했다. 국가는 각종 인허가와 자원배분의 과정에 개입하여 관료적 수탈을 조장하는 총체적 부패의 고리를 만들어내고 이를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註20) 이른바 일본적 모델의 특징이라고도 불리는 정경협조체제가 오늘날 아시아 위기론의 주요 원인으로 꼽히는 정경유착의 부패구조로 변질되는 것은 매우 손쉬운 일이다. 최근의 경제위기 역시 한국적 산업화가 추진해온 방식과 무관하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듯이 한국의 산업화는 냉전체제의 틀 안에서 권위주의적 국가의 강력한 지원을 배경으로 한 재벌중심의 수출주도형 고도성장정책으로 특징지어진다. 이러한 모델은 기본적으로 국가의 강력하고도 효율적인 개입을 전제로 하며 수출을 통한 고도성장을 지속하기 위해 끊임없는 자본과 시장의 확대를 필요로 한다. 그렇지만 국가개입과 시장경제는 근본적으로 긴장을 내포할 수밖에 없다. 국가의 재벌보호정책은 짧은 시간에 거대한 자본의 형성과 대규모 투자를 가능케 했지만 동시에 시장논리가 작용하기 어려운 정경유착의 구조 속에서 방만한 경영과 경쟁력의 약화를 초래하였다. 또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진전에 따라 불가피하게 나타나는 계급관계 역시 국가가 조절·통제해오던 구조였는데 이 역시 계급적 질서가 안정되지 못하는 주요한 요인이 되고 있다. 현재 한국의 재벌이 처해 있는 외형적 화려함과 내실의 빈곤함은 이러한 한국적 산업화의 현주소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서구적 가치와 기술, 과학지식의 수용을 중시하였던 문명화의 효과 역시 단기적인 효용성에도 불구하고 문명적인 차원에서 매우 허약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인간과 자연에 대하여 단기적인 효용성과 기술합리성의 측면에서만 접근했던 결과 이제는 제한된 지식수용을 넘어서는 창조적 혁신을 이루어내기가 어렵게 되었다. 개인의 인격에 대한 절대적인 인정 없이 창조적인 사고와 다양성이 꽃피기 어려운 법인데 서구적 문명의 가치를 기능적 차원에서만 활용하고자 했던 노력이 일정한 수준에서 한계에 부딪치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이미 전통적 문명은 퇴색할 대로 퇴색했고 문화간의 상호교류와 서구문화의 유입이 더욱 심화되는 상황에서 ‘도’(道)에 대한 관심이 없이 ‘서기’(西器)에만 치중하는 교육과 문화의 현주소는 이러한 한계를 잘 보여준다. 한마디로 20세기 한국사는 짧은 기간에, 그것도 식민지와 분단이라는 악조건 속에서 서구적 기준에서도 매우 놀랄 만한 근대적 성취들을 이루었지만, 바로 그 압축적이고도 급속한 발전을 가능케 했던 제반 요소들이 곧 새로운 한계로 작용하고 있다. 그리고 이 점은 사회구조에서만이 아니라 개개인의 생활태도에서도 그대로 드러나는 특징이라 할 것이다. 사회통합방식의 한계와 국가개혁 근대적인 사회일수록 사회의 제반 영역들이 각기 자율적인 단위로 분화되는데 이때 각 부문영역들간의 조정과 통합이 새롭고도 어려운 과제로 제기된다. 더구나 각 영역에서의 변화가 상이한 속도와 방향으로 진행되는 경우 사회통합의 문제는 매우 중요한 과제가 된다. 20세기 전시기를 통해 한국의 다양한 사회영역들은 국가권력을 매개로 통합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식민지 권력은 말할 것도 없고 해방후에도 국가권력은 사회의 모든 부문을 권위주의적으로 통합시켜왔다. 시장에서조차 국가의 힘은 매우 강력하였는데 자본의 형성과 퇴출, 수출지원이나 국내시장의 보호, 계급적 행위의 제한등 금융·상품·노동시장의 전영역에 국가는 매우 큰 힘을 행사하였다. 바람직한 문화와 생활태도, 가치관과 습관 등에도 국가의 강권력은 미쳤고 국가의 허락 없는 사회적 자율성은 제대로 발달할 수 없었다. 그 결과 한국사회의 제반 부문영역들이 자율적인 방식으로 질서와 통합을 이루는 사회적 원리를 발전시키지 못하였다. 최근 논의되는 낮은 신뢰성, 사회적 합의의 어려움, 사회집단의 무책임성, 실업의 사회적 영향력에 대한 인식 부족 등은 모두가 국가주도적 통합방식의 부정적 결과라 할 만하다. 그런데 세계화의 진전에 따라 점점 국가의 개입과 통합의 능력은 한계에 부딪치고 있다. 국가는 더이상 예전과 같이 금융시장에 직접적인 개입을 하기 어렵고 상품의 수출입에도 조정의 힘을 발휘할 수 없다. 또한 실업자들을 포함한 사회적 약자에 대한 사회보장적 기능의 수행에서도 현재 한국의 국가는 매우 취약하다. 안팎으로 국가의 통합능력은 상당 정도 약화될 수밖에 없는 현실인 것이다. 현재 이에 대한 대안으로 시장에 의한 통합을 주장하는 견해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 신자유주의로 지칭되는 이러한 견해들은 시장이야말로 국가개입의 비효율을 극복하면서 사회 각 부문들을 통합하는 유일한 기제임을 강조한다. 국가개입을 최소화하고 시장주체들의 합리적 선택에 맡김으로써 효율과 통합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논리는 국가의 과도한 권한으로 인해 야기되는 부패와 불투명성을 비판하는 점에서 그 적실성이 있다. 그러나 문제는 시장 역시 한국적 상황에서 형성된 역사적 제도공간이라는 사실이다. 현재 한국의 시장은 재벌중심적 산업화의 결과 상당히 왜곡된 구조를 드러내고 있다. 다양한 경제주체들의 자발적이고도 합리적인 선택이 이루어지는 곳이라기보다는 기존의 독점적이고 불합리한 거래관계가 아무런 제약 없이 재생산될 가능성이 많은 곳이 시장이다. 실제로 투기자본의 급속한 유동성 증대로 세계시장 자체의 불안정성이 점차 증대되는 실정이다.註21) 뿐만 아니라 산업정책이나 노동시장 관리, 나아가 사회통합의 문제 등은 시장경제의 안정과 발달을 위해 필수적으로 전제되어야 할 조건들이다. 그렇다면 궁극적인 사회통합의 열쇠는 누가 갖고 있어야 할 것인가? 나는 ‘시민사회에 의해 감시되는 국가’가 결국 그 책임의 주체가 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이 말은 일단 국가의 일차적인 기능과 역할을 강조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기존의 관료 중심, 정치권력층 주도의 국가가 아닌, 다양한 사회세력들이 참여하고 감시하며 개입하는 형태의 국가로 변모해야 함을 의미한다. “위기의 해결책은 성장중인 능동적 국가를 내팽개치는 방식이 아니라, 국가와 민간부문 간의 관계를 좀더 투명하게 하고, 공적 책임성을 강화하고, 정부와 기업에 대한 민주적 감독을 증대하는 방향으로 재정립될 때 가능해진다”는 웰든 벨로우(W. Bellow)의 지적은 적절하다.註22) 국가의 무조건적인 약화가 아닌, 국가의 성격과 기능을 근본적으로 전환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문제는 현재의 상황에서 이러한 국가개혁을 이루어내기가 매우 어렵다는 데 있다. 특히 국가의 개혁은 그 절박한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강제할 힘이 존재하지 않는 한 보장할 길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특정한 정치인이나 정치세력에 의해 일순간에 국가개혁이 이루어질 것을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적합하지도 않다. 권력구조의 혁명적 변화는 또다른 의미에서 절대적 권력중심을 만들어내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시민사회의 여러 영역들로부터 끊임없이, 동시다발적으로 제기되는 비판과 감시를 통해 국가의 기능 자체가 수정되고 변화되는 과정을 중시해야 한다. 국가가 개개인의 일상생활과 떨어진 상태에서 절대적인 권력을 유지하는 한 진정한 국가개혁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국가가 독점해온 상징적·이데올로기적 자원의 탈신비화와 분권화에 대한 시민사회적인 재해석의 노력이 요구된다. 이 지점에서 발전국가의 성격에 대한 성찰과 분단체제 극복의 과제가 주요한 쟁점으로 부각된다. 사회의 각 영역에서 국가중심적 발전론과 냉전적 반공이념의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드러내고 비판하는 작업이 꾸준히 진행될 필요가 있다. 이런 속에서 우리가 추구해온 발전전략의 근본적인 성찰과 함께 분단국가의 구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에 대한 발본적인 사고전환이 가능해질 것이다. 전세계적으로 국민국가의 기능과 존립방식에 적지 않은 변화가 야기될 것이 분명한 21세기에 남북한이 어떠한 국가형태로 통합될 수 있을 것인가는 단순한 분단극복이 아닌, 제2의 건국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중대한 일이다. 세계사의 흐름을 예민하게 파악하면서 동시에 국가의 형태와 기능에 대한 좀더 다양하고 유연한 사고를 수용해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하겠다. 생활개혁과 사회운동 한국사회는 매우 강력한 사회운동의 전통을 지니고 있다. 애국계몽운동에서 시작하여 일제하의 민족해방운동, 분단 이후의 통일운동, 민주화운동과 최근의 환경·여성·주민운동에 이르기까지 사회운동의 역사는 결코 짧지 않고 그 영향력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실제 그 대중적 기반, 자발적 참여의 폭은 그다지 넓지 못했다. 한국의 근현대사는 간헐적인 ‘광기의 순간’에 거대한 민중적 힘이 분출하고 그 결과는 기존세력들에 의해 수용되어 수동혁명을 가져오는 형태로 진행되는 경향이 많았다.註23) 이러한 형태의 사회운동은 한계도 분명한데 꾸준한 관심에 근거한 지속적인 운동이 되지 못하고 누적된 불만이 한꺼번에 폭발하는 대중동원의 방식으로 진행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집합적 열광’은 예측하기 어렵고 때때로 현실적인 대응능력보다는 감정적인 분출이 앞서며 결과적으로도 바람직한 개혁보다는 사회전체가 정서적인 반응에 지배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열광이 분출할 만한 촉발요인이 제공되지 않으면 오랫동안 불만과 모순이 화약처럼 누적되어 사회적 불안을 증대시킨다. 바람직한 형태는 사회운동이 각성한 주체들의 자발적인 결합과 행동으로 다양한 영역에서 지속되는 것이다. 사회운동은 개인들의 생활개혁운동과 연관될 때 지속성과 영향력을 강화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의 공적 문제에 관심을 갖고 능동적으로 참여하려는 일상적 생활세계에서의 작은 개혁들이 조직적 사회운동의 기반이 되어야 한다. 생활개혁은 미시적인 부문에서의 변화로 그치지 않는다. 그것이 단순한 생활개선 차원이 아니라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결단과 결합되는 것일 때 사적인 생활개혁은 공공의 쟁점과 견결히 결합되게 마련이다. 쓰레기와 주변 생태에 대한 생활상의 태도 변화는 환경오염 문제에 눈을 뜨게 하며 환경운동의 튼실한 지지기반이 된다. 북한주민의 경제적 위기를 돕는 운동은 동포애를 증진하는 정도를 넘어서서 남북한의 다양한 접촉과 상호교류의 물꼬를 트는 일이 될 것이다. 부패의 관행을 바로잡으려는 개인적 노력은 서로 고리를 형성하고 있는 부패의 연계를 파괴하고 나아가 정경유착의 고질적 한계를 추방하는 운동을 활성화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한국의 20세기에서 찾아볼 수 있는 두 가지 전통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첫째는 민주주의적 가치와 사회적 정의를 함께 생각하는 전통이다. 우리는 사회운동에서 민주적 ‘정신’의 중요성에 깊은 관심을 갖지 않았다. 인간에 대한 애정과 사회에 대한 관심이 공존하기 어려웠던 우리 역사의 부정적 경험에 사로잡혀 이 부분을 주목하는 데 소홀했기 때문인데 실제로 그러한 정신을 좀더 부각시키고 발전시켜야 할 것이다.註24) 둘째는 물질적 영역 이외에서 삶의 가치와 만족을 누릴 줄 알았던 문명적 태도이다. 물론 이것은 가난과 수탈로 고통받았던 전근대 한국인의 실상을 낭만적으로 미화하려는 것이 아니며 또 일부 양반층의 유한계급적 여가생활을 부러워함도 아니다. 다만 물질적 부를 절대적 가치로 여기지 않고 주어진 조건에 대응할 수 있었던 정신적 풍요함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 서면 무한정한 성장문화에 길든 생활양식들의 변화가 가능해진다. 기업이나 가계, 개인 모두가 고도성장을 정상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데 익숙해 있고 그러한 성장을 가능케 하기 위한 각종 부패와 반칙, 편법의 관행을 몸에 익혔음을 인정해야 한다. 퇴보나 정체에 대한 고려가 없었음은 물론이고 저속성장에 대한 인내심도 매우 약하다. 또한 자원과 환경에 대한 적절한 고려가 매우 부족하다. 이러한 생활태도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는 곧 생태학적인 인식을 우리 삶의 핵심 부분으로 끌어들이는 것을 의미하며 한말 이래 무의식적으로 내재화한 ‘부국강병’적 발전전략에 대한 문명론적 성찰과도 연결될 것이다. 현실적으로는 물질적인 결핍과 부족함에 의연히 대처할 수 있는 태도를 키움으로써 위기에 대응할 문화적인 힘을 갖추는 일이기도 하다.註25) 스스로 책임있는 시민으로 자율적인 존재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이 공공의 쟁점에 무관심할 수는 없는 일이다. 결국 생활양식의 근본적인 변화를 지향하는 새로운 ‘삶의 정치’의 출현이 필요한 것이다.註26) 부패가 제도화된 한국사회에서 내면적 윤리와 사회적 관행의 괴리, 주체적 자아와 상호작용의 협잡성 사이에서 일상적으로 갈등을 경험하는 것이 모든 구성원의 딜레머가 아닐까 싶은데 이 구조를 근본적으로 변혁하는 일은 결국 국가개혁과 생활개혁이라는 이중개혁을 사회운동이 동시적으로 추진해낼 수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해질 것이다. 4. 21세기를 바라보며 아무래도 경제위기는 상당 기간 지속될 것이 분명하며 세기말의 음울한 분위기를 강화시킬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경제위기에서 그치지 않고 우리 사회의 안전과 질서를 뿌리로부터 흔들 사회적 위기가 도래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우리의 어려움에는 아랑곳없이 세계화의 흐름은 여전히 빠르게 진행되고 우리의 선택폭도 여러모로 제한될 것이다. 손쉬운 희생양이라도 찾아 그 책임을 묻고 어디선가 기발한 해결책을 가져와 단시일에 어려움이 해결될 수 있기 바라는 심정을 모두가 갖고 있기 쉽다. 그럴수록 이 위기가 단시간에, 특정한 한두 요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님을 인식하는 것은 중요하다. 오늘의 상황을 김영삼 전대통령이든 PK이든, 또는 재벌이든 심지어 IMF든 특정한 요인 탓으로만 이해해서는 장기적인 대책은 물론이고 단기적인 처방에서도 졸속을 면하기 어렵다. 현재의 상황은 탈냉전 이후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변화와 국가주도 성장정책의 산물인 한국자본주의의 상호작용이 초래한 것이다. 단기성 국제투기자본이 외부의 한 요인이었음을 보지 못해서도 곤란하지만 그것에 극도로 취약한 구조를 만들어온 한국의 금융 및 경제체제, 나아가 이를 추동해온 분단된 발전국가의 내적 한계가 또하나의 중요한 요인임을 무시해서도 안된다. 사회통합과 자원배분의 최고사령탑이던 국가의 부패와 비효율, 불투명성이야말로 근본적인 개혁의 대상이 되고 있다. 동시에 국가개혁은 곧 시민사회의 제반 영역, 나아가 지금까지의 생활양식에 대한 전면적인 성찰과 생활개혁을 동반할 때 비로소 결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경제성장의 과실에 탐닉하며 우리 자신의 생활을 성찰하지 못했던 비윤리성·부패성·천박성 등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또한 기존 성장모델의 한계와 내적 모순, 성장과 더불어 나타나는 자기파멸의 위기구조에 민감하지 못했던 우리 사회의 지식체계도 부끄러운 고백과 함께 새로운 자기변신을 모색해야 한다. 그만큼 복합적이고 다차원적인 과거가 농축적으로 결집해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인만큼 대응의 방식도 매우 총체적이고 전면적이지 않으면 안된다. 아무래도 21세기는 분단체제의 극복과 성찰적인 발전모델의 구축, 그리고 주체적이고 도덕적인 개인들의 성장을 보장하는 문명화가 동시적으로 추구될 때 회망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경제성장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다. 다른 요소들의 변화 없이는 경제성장 자체도 더이상 불가능할지 모른다. 강력한 국가의 보호막과 부패의 유착구조 속에서 개인적 이익과 사회적 성장을 함께 챙기려는 방식은 통용되기도 어렵거니와 위기만 더욱 가중시킬 것이다. 기존의 국가기능 자체가 안팎으로 도전을 받고 있으며 실제로 그러한 도전에 과거 같은 방식으로는 효율적 응전이 불가능하다. 국가개혁과 생활개혁이라는 이중 과제를 시민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주체적으로 실천해가는 노력이야말로 그러한 문제에 대응하는 바람직한 자세가 아닐까 싶다. 일상의 위기가 심화되는 시기에 총체적인 성찰과 개혁을 요구한다는 것은 너무 ‘큰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러나 개인의 삶과 세계적 변화가 직접적으로 연결된 이 극도의 ‘시공간 압축’의 시대에 그러한 사고와 판단, 각오 없이 미래의 개척을 기대할 수는 없다. 21세기에는 우리가 좀더 자유롭고 다양한 삶을 살 수도 있겠지만 그만큼 세계적 변화로 인한 외부적 조건변화에 예속될 수도 있다. 이미 탈냉전의 세계사적 조건은 우리에게 근대한국사가 남긴 역사적 한계로부터 벗어날 가능성과 함께 그 구조에 근거하여 추진해온 지금까지의 발전전략과 생활양식을 위태롭게 하는 위험성도 동시에 가져다주고 있다. 그 미래가 어떻게 진행될지는 열려 있는 것이고 다만 총체적이고 긴장된 대응과 창조적인 응전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음은 분명하다. 20세기의 역사적 성취를 바탕으로 하되 그 한계를 직시하고 새로운 변화를 시도해야 한다. 사회구조적 변화와 함께 인간의 변화를 동시에 모색해야 하며 아마도 그것은 궁극적으로 자본주의 이후의 문명을 모색하는 큰 꿈과 연결될 것이다. ------------------------------------------------------------------------------- - 주제토론 권태억(權泰檍)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조태은(曺泰恩) 동국대 사회학과 교수 권태억 한국사회사를 전공하는 박명규 선생님이 한국사의 문제를 총체적으로 분석해주셔서 도움이 많이 됐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사회의 20세기 변동을 국가형성, 산업화, 서구적 문명화라는 세 가지 부문으로 분석한 대목에서는, 그런 변동의 결과로 나타나는 현재 한국사회의 각 부문에 조응한 해결방안이 제시되지 않아서 아쉬웠습니다. 전체적으로 거시적인 데 치중하고 미시적인 것에 소홀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국가형성 문제를 거론하면서 강력한 국가의 존재를 말씀하셨는데, 그것을 역사적인 것과 연관시키려면 조선시대 5백년 역사에서 볼 수 있는 강력한 중앙집권적 전통을 강조해야 할 것 같아요. 또하나는 식민지시대에 폭압적인 조선총독부의 통치하에서 한국 사람들에게는 정치적인 권력이라는 것이 거의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의 시민사회가 성립하지 못했다는 것을 상기하고 시민사회를 지원해야 할 것 같습니다. 또 국가의 기반으로서 민족공동체를 말씀하셨는데, 저는 일제 식민지지배에 저항해왔던 반일·반제적 투쟁의 전통을 이어서 해방 이후에도 군사독재정권에 대한 투쟁이 가능했고, 그런 전통이 총체적으로 한국 국가의 성격을 규정짓는다고 생각합니다. 이 점에 대해서 박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그리고 경제문제에 대한 분석은 한국에서 급속한 경제발전을 가능하게 한 요인이 무엇인가 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까 한국 경제구조의 특징에 대한 언급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또 박정희정권이 경제면에서 서구를 추종했다고 하는데 이 추종이라는 의미는 무엇인가요? 서구나 미국의 의도에 맞게 움직였다는 건지 아니면 서구식 발전모델을 따랐다는 건지요? 다음에는 문명화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저는 한국의 근대화·문명화라는 것은 일본이 학습하고 배운 것을 다시 한국 사람들이 배운 것이라는 점이 강조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메이지유신 당시 일본은 중국이나 한국 등을 이웃으로 생각하지 않고 서구와 같은 편에 서서 아시아를 대했는데, 현재 우리도 우리 자신을 일본이나 중국보다는 서양과 일치시키고 있죠. 다시 말해, 박선생님도 말씀하셨지만, 우리의 제도나 말 등에 일본의 식민지 유산이 강하게 남아 있는데 이것을 자각하지 못하고, 다시 서양문화를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겁니다. 이런 상황을 좀더 분명하게 인식할 때 과거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이루어지고 있는 일본에 대한 모방 위에서 또 서방을 모방하는 것을 피할 수 있을 겁니다. 조은 박명규 선생님의 문제제기와 문제인식에는 어느정도 동의하지만 저는 우선 시비걸기부터 해야 할 것 같습니다.(웃음) 물론 토론자의 임무가 트집잡기여서 그렇기도 하지만, 저는 이 발표문을 세 번 읽었는데, 문장마다 옳은 소리가 씌어 있는 것 같은데 전체적으로는 왜 이렇게 쟁점이 될 만한 것들을 쟁점화시키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거든요. 박선생님은 지금 우리가 위기에 처해 있다, 우리가 원하는 공동체의 모습이 갑자기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런 방향성의 상실이 어떻게 해결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우리 국가의 형성과 성격을 파악하고자 했지만 여전히 강력한 국가에 대한 이미지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박명규 선생님의 기조발제처럼 차라리 소국주의로 가자는 식의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고, 뭔가 강력한 국가는 여전히 필요한 것 같은데 그렇다고 그런 강력한 국가의 형태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지도 못하고 있는 듯해요. 그러니까 시장주의에 동조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여전히 강력한 국가상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그 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좀더 민주주의적인 원리와 원칙을 지원해줄 수 있는 국가인가에 대한 의문을 여전히 채워주지 않은 채 강력한 국가의 상에 매달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자본주의적 산업화는 계급구조의 변화를 가져왔는데, 이런 문제는 거론하지 않고 산업화가 가져온 변화 중의 하나인 부국강병을 버릴 것인가에 지나치게 초점을 맞추고 있어요.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부국강병을 버릴 것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부국강병을 추구하면서 생겨난 우리 사회의 여러가지 분화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할 것인가, 왜 우리 선인들의 청빈문화를 회복하는 것이 문명화 과정에서 얻은 결론이자 대안으로 나오게 된 것일까 하는 거지요. 논리적으로 박선생님의 주장을 따라가다 보면 그 대안이라는 것이 강력한 국가를 통해서 시장에 제압받지 않으면서 그다음에 부국강병은 버리지 않으면서,(웃음) 그러면서 우리 선인들의 청빈함 같은 것을 회복하면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이 되나요? 굉장히 규범적이고 옳은 얘기지만 대안에 이르면 많은 의문이 생깁니다. 현재 국가와 시장과 시민사회라는 삼각구도에서 시장은 자본주의 세계시장이고, 시민사회조차도 국가의 틀을 넘어서고 있어요. 이처럼 세계자본과 세계시민사회와의 관계에서 국가가 어떻게 강력한 힘을 발휘할지에 대한 아무런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이런 방법만으로 우리가 원하는 공동체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까요? 저는 ‘창비’가 우리 사회에서 인문학적 상상력을 늘 자극하고 지식인들은 어떤 대응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해오면서 국면적인 정책대안보다는 지적인 실험을 했다고 생각해요. 저도 지금의 상황이 많이 혼란스러워요. 과연 우리 지식인들이 대안을 어떻게 만들어낼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깊어집니다. 마지막으로 지적인 대응을 하자, 그리고 총체적인 대응을 하자고 했는데 박명규 선생님이 생각하는 총체적 대응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박명규 우선 두 분의 좋은 지적에 대하여 감사를 드림과 동시에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던 점들에 대한 송구스러움을 표해야겠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IMF라는 상황을 겪지 않았더라면, 아마 20세기 한국사의 역사적 성취에 대하여 저 자신도 이 글과는 다른 정리를 하게 되지 않았을까라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작년말의 경제위기는 저 개인에게도 상당한 충격이었고, 제가 정말 지금까지 한국사회의 구조적 특성과 앞으로의 변화에 대해 얼마만큼 진지한 물음을 던지고 있었는가 하는 반성이랄까 자괴스러움 같은 것을 많이 느꼈습니다. 이 글은 바로 그러한 제 자신의 내적 도전, 혼란 등을 바탕으로 씌어진 것임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권태억 선생님께서 지적하신 대로 미시적인 쟁점과 내용들에서 건너뛰거나 소홀해진 부분이 많았고 과거 왕조의 중앙집권성, 그리고 총독부 통치기구의 강압성 등도 잘 다루지 못한 측면이 있습니다. 다만 이 글 자체가 20세기라는 시간대 안에서 우리가 경험한 변화에 우선적으로 주목했음을 이해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한말의 지식인들이 조선왕조를 자기의 국가로 쉽게 생각할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가 중앙집권적 왕조체제에 대한 공통의 경험이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의미가 일부 포함되어 있음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총독부 통치방식에 관해서는 최근 일부 논자들이 한국의 강성국가적 기원을 총독부의 강력한 지배력에서 찾으려는 경향이 있는데 이 점에 대해 지적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총독부의 물적·제도적 기반이라는 것도 물론 무시할 수 없겠으나 그것보다는 잃었던 국가를 다시 찾았다고 하는, 일종의 역사적 경험 속에서 상징화되고 때로는 성스러운 것으로까지 표상되던 그같은 국가에 대한 민중적인 지지와 강한 귀일성에서 강성국가의 주요한 기반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 것이지요. 경제문제에서 경제구조의 특징에 대한 언급이 없이 산업화라는 측면으로만 서술된 것에 대한 문제제기, 이것은 조은 선생님께서 계급적 분화라든지 산업화가 가져온 내적인 변화를 다루지 않았다고 하는 문제제기와도 연결된다고 생각합니다. 분명한 지적이지만 그러나 이것 역시 20세기 변화의 한 축을 이루는 것으로 축소해서 검토한 결과라고 일단 말씀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산업화의 진전으로 인해 나타나는 계급적인 내부변화라든지 한국형 산업화가 보여준 사회적인 귀결이 실제로 다시 한국사회의 구조에 미친 피드백 효과, 이런 부분을 좀더 충실하게 보완할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서구추종의 의미에 대해서 이것은 특별히 일본 모델이냐, 구미 모델이냐, 이런 의미에서가 아니라 물질적 성장과 부의 축적을 통한 부국강병적 지향이라는 의미에서 말씀드린 것입니다. 서구문명의 유입이 일본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을 저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일본적인 것과 서구적인 것이 혼재하면서 함께 수용되었다는 점이 매우 복잡한 결과를 초래했다고 봅니다. 그 점에서 식민지성과 근대성의 문제를 더욱 천착해야 할 과제는 남아 있는 셈이지요. 조은 선생님 말씀은 모두 중요한 지적인데, 그리고 저 개인적으로 ‘내가 글을 참 못 쓰는구나’(웃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강한 국가를 바라지는 않았고 오히려 그렇게 생각해오던 우리의 태도나 구조를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하고자 했는데 다른 식으로 읽혔다니까 글쓰는 훈련을 다시 해야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아마 그렇게 이해된 것은 국가개혁이라는 표현이나 시장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국가의 일정한 기능이 필요하다는 것이 여전히 국가를 중심으로 대안을 모색하는 것으로 비치기 때문일 것 같습니다. 새로운 국가를 형성해야 한다, 국가를 개혁해야 한다는 주장이 이미 국가를 중심으로 사고하는 틀에서 못 벗어난 것이라는 지적이라면 저로서는 당분간 정치공동체로서의 단위 국가를 떠나서 대안적인 주체나 통합적 제도를 찾기 어렵다는 생각입니다. 문명화 부분도 제가 청빈문화로 돌아가자는 말씀을 드리려 했던 것은 아니고 어쨌든 우리가 겪고 있는 문제들은 우리 자신이 90년대 초반에 향유했던 물질적 과실에 대한 즐거움을 그대로 희구하고 좇아가는 한 이러한 위기를 근본적으로 극복하기란 어렵다는 생각을 말씀드리려 했던 것입니다. 국가개혁을 통해서든 재벌개혁을 통해서든 어쨌든 고도의 물질적 풍요와 소비를 계속 추구해나가려 할 때 현재의 우리 구조가 그것을 뒷받침하지도 못하려니와 결국 현재의 위기도 그런 성장제일주의에 의한 것이 아닌가, 따라서 그런 전제 위에서의 위기극복이란 사실 내적으로 상당한 모순과 한계를 가진 것이 아니냐는 생각을 말씀드리고자 했던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당신의 지적 대응방식은 뭐냐 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현재로서는 정말 성찰의 자세가 요구된다는 점 이외에 달리 드릴 말씀이 없군요. 뾰족한 대안을 말씀드리기에는 사실 버겁기도 하고요. 다만 우리의 지식이 현실상황에 대하여 민감한 연관성을 확보해야 하는데 왠지 추상적인 논의들과 현실의 변화가 따로 놀고 있었다는 부끄러움은 매우 강하게 느껴집니다. 일단은 자기 영역에서 이 상황에 오게 된 우리 사회의 변화과정이나 구조적 특성에 대한 좀더 냉철한 생각, 지금까지의 판단에 대한 성찰의 자세와 노력이 일단 그러한 지적 대응의 첫걸음이 아니냐 하는 말씀으로 답변을 대신할까 합니다. 조은 박명규 선생님이 글을 잘못 쓰신 것이 아니라 제가 잘못 읽었을지도 모르겠는데,(웃음) 도발적이거나 쟁점이 될 수 있는 문제를 정말 이렇게 신사적으로도 쓸 수 있는 건가 하는 의미에서 그 말씀을 드렸던 거고요. 그리고 여전히 국가중심적 사고를 하는 것이 아닌가 지적한 점은 저 역시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인데, 예를 들면 국가의 구조조정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는데 정작 필요한 것은 국가의 구조조정이 아니라 국가에 대한 시각과 관념의 조정이 아닌가, 저는 그렇게 생각을 했고요. 사회과학을 하는 사람들이나 지식인들이 이 문제에 관한 어떤 담론을 구성하고 좀더 적극적으로 입장을 개진해야 할 거라는 얘기를 드리고 싶었어요. 청중 우리가 왜 이렇게 짧은 순간에 IMF라는 위기를 맞았는가에 대한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우리 사회가 소수 엘리뜨, 소수 재벌, 소수 관료, 그러한 하나의 씨스템에 너무나 많은 권한과 책임을 부여했던 것 같아요. 그 소수가 무너져버리자 한국사회 전체가 무너져버린 거죠. 그래서 이런 집중된 힘을 어떻게 파편화시키고 미분화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가 중요할 것 같거든요. 사회운동은 앞으로는 하나의 체계로 구조화하기보다는 다양하고 분화된 네트워크를 만들어나가는 데 고민을 집중해야 할 것 같은데 이 문제에 대해 말씀해주셨으면 합니다. 청중 저는 조은 선생님이 지적하신 문제, 그러니까 국가의 구조조정을 얘기할 단계가 아니라 국가의 개념을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에 대해서 여쭤보고 싶습니다. 박선생님께서는 여태까지 우리나라 근대화 과정에서 국가가 선도자의 역할을 했다면 모든 분야에서 그 한계가 온 것이 아니냐라고 지적하셨는데, 그렇다면 앞으로 국가의 역할은 어떠해야 할까요? 예를 들어 시장에 대한 방패 역할을 해야 하느냐, 아니면 시장과 시민사회, 또는 부국강병 과정에서 도출된 계급문제들을 조절하는 역할을 해야 할 것이냐, 아니면 자유주의적인 시각으로 모든 세계화된 가치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컨베이어 벨트 역할을 할 것이냐, 이런 것 중에 어떤 게 옳을지 묻고 싶습니다. 박명규 첫번째 질문과 관련해서 소수 엘리뜨나 재벌, 또는 소수 지배집단이 지나치게 강한 권력을 지니고 있었다는 지적은 동감입니다. 그런데 제가 생각하는 것은 소수 엘리뜨의 문제, 또는 지배세력의 능력 부족 등의 문제보다는 그와같은 소수가 국가라는 이름으로 모든 영역을 좌우할 수 있었던 우리 사회의 구조가 어떤 조건하에서 창출됐는가 하는 것을 따져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점에서 국가의 거대한 힘을 분산시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지적에 전적으로 동감입니다. 그 방안이 무엇인가에 대해 저로서는 일단 시민사회의 활성화라고 말한 셈인데 시민사회를 어떻게 조직화할 것인가, 다양한 네트워크간의 연대를 어떻게 할 것인가는 좀더 구체적인 차원에서 검토해야겠지요. 또 국가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의 문제는, 국가의 구조조정…… 저도 구조조정이라는 게 그렇게 적절한 표현인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그런 표현을 통해 말하고자 한 바가 있다는 것이지요.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국가를 이론적인 행위자로 보기보다 역사적으로 형성되어 우리 사회에 자리잡고 있는 총체적인 체제로서 파악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고, 그 점에서 우선은 국가에 대한 정치사적 해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이해 위에서 역사적으로 형성되어 있는 한국의 국가를 어떻게 개혁해나갈 것인가를 생각해야 하는데 일단 모든 것을 관할하고 추진하고 결정하는 주체로서의 국가는 더이상 곤란하지 않을까 생각하며 말씀하신 대로 추진자보다는 조절자적 기능을 중심으로 하는 국가로의 개혁이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 -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 "활쏘기는 군자의 덕성과 비슷한 바 가 있으니, 활을 쏘아 과녁을 벗어나더라도 오히려 그 이유 를 자기 몸에서 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