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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화이트헤드)
날 짜 (Date): 1998년 9월  3일 목요일 오후 05시 09분 58초
제 목(Title): 최원식/세계체제의 바깥은 없다 


 


  세계체제의 바깥은 없다 
  --소국주의와 대국주의의 내적 긴장 



  최원식(崔元植) 



분단체제의 위기 
IMF사태를 둘러싼 분분한 논의들 
소국주의와 대국주의 
아시아적 가치  


  
  
  
  1. 분단체제의 위기 
  
  지난 12월 대선을 통해서, 쿠데타의 위협 없이 정권교체라는 지난한 과제의 
하나를 해결함으로써 한국민주주의는 새로운 역사적 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물론 
4월혁명 직후 자유당 독재의 붕괴와 함께 민주당이 집권한 역사적 경험이 있지만, 
이번처럼 선거에 의해 평화적으로 여야의 정권교체가 비교적 순조롭게 이루어진 
경우와는 차별된다는 점에서, 15대 대선의 의미는 각별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무엇이 각별한 것인가?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기대하는 일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가 피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 자유당 시절, 어느 외국기자의 이 방자한 
야유를 통쾌하게 뒤집어서인가? 그런 측면의 기쁨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15대 
대선 결과는 여당의 불패신화를 거의 보증해온 분단체제가 위기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음을 알리는 징후라는 점에서 더욱 주목되는 것이다. 알다시피 세계적인 
냉전체제의 종결에도 불구하고 동아시아에서는 전후(戰後)가 아직도 지속되고 
있다. 세계 4강의 이해가 교차하는 한편, 적대적인 듯 상호의존적인 두 정부가 
마주한 한반도는 그 결절점의 핵심이라고 할까. 따라서 한반도 분단상태의 해소는 
동아시아 전후의 지혜로운 종결을 위한 선차적 과제의 하나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냉전의 해체에도 여전히 완강했던 분단체제가 최근 극히 유동적인 상황으로 
진입하였다. 북한의 식량위기에 이은 남한의 금융위기로 한반도 전체가 총체적 
난국으로 급속히 빠져드는 작금의 사태를 조망컨대, 그 와중에서 이루어진 남한의 
정권교체는 더욱, 분단체제의 균열이 심화되는 한 중대한 고비를 가리키는 
지표로서 다가오는 것이다. 
  그러나 여권 속으로 들어가 문민정부를 탄생시킨 김영삼정부가 그러하듯이, 
이탈한 구여권을 싸안아서 정권교체에 성공한 김대중정부의 출현도 변칙적이라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어찌 보면 이 변칙성이야말로 기로에 봉착한 
분단체제가 자기를 관철하는 독특한 방식의 하나인지도 모른다.) 양자 사이에는 
미묘한, 그럼에도 주목할 만한 질적 차이가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되지만, 
김대중정부가 21세기로 가는 한국의 최선의 선택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것 또한 
명백히할 필요가 있다. 물론 미리 한계를 긋고 비판만 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그런 일이 주관적인 선의에도 불구하고 자칫 김대중정부의 개혁작업의 전진을 
가로막는 수구적 책동에 놀아나는 꼴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종당에는 수구의 
포위를 뚫지 못하고 좌절한 김영삼정부의 전철을 상기하면, 취약한 정권기반을 
두터이 보호하는 범개혁세력 대통합을 위해 대국적 입장에서 조력하는 고도의 
정치적 지혜가 요구되는 때라는 점이 더욱 고려되어 마땅하다. 그렇다고 해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한갓 정부만 쳐다볼 것이 아니라, IMF관리체제에 대응하여 
출범한 김대중정부의 개혁작업을 새로운 수준의 진보운동의 이론과 실천을 
모색하는 본격적 계기의 하나로 삼아야 할 필요가 절실해진다. 
  
  
  2. IMF사태를 둘러싼 분분한 논의들 
  
  영국의 『더 타임즈』가 마침내 무릎을 꿇은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정부들을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영혼을 판 파우스트로 연민하는 가운데,註1)한국정부는 1997년 
12월 3일 IMF에 전면 항복하였다. 한국이 갑자기 IMF관리체제 아래 편입된 이 
특단의 사태를 놓고 나라 안팎에서 논의가 분분하다. 한국경제에 대한 IMF의 
강력한 구조조정 요구에 대해 미국기업과 싸우는 한국대기업을 견제, 무력화하려는 
미국자본의 음모로 보는 시각이 있다. 뉴매카서(New MacArthur)프로그램으로 
불리는 미국중심의 IMF지배체제가 경제적일 뿐만 아니라 군사적인 체제임을 
상기시킨 정성기(鄭成基)는 지난해 11월 24일 미국의 한국 조기지원 결정을 
월가(街)가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에 비유한 점을 지적한다.註2)이 음모론은 최근, 
IMF가 중심이 되어 90년대 초반에 작성한 워싱턴 컨쎈서스(Washington 
Consensus)의 존재가 알려지면서 더욱 힘을 얻은 형편이다. 냉전이 종식된 이후 
국제금융자본은 신자유주의적 경제질서의 전지구적 관철을 집행하기 위해 한국 및 
개발도상국가들의 시장개방을 핵심으로 하는 구조조정을 강제하는 다양한 계획을 
수립한바, 한국정부가 이들의 치밀한 작전에 말려 ‘IMF신탁통치’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註3) 
  도대체 IMF란 무엇인가? “IMF는 1945년 미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한 연합국들이 
2차대전 이후의 국제경제질서를 구축하기 위하여 맺은 브레튼우즈 협정에 의해 
세워진 기관이다. IMF의 원래 목표는 국제경제체제의 질서를 회복하는 데 있었으며 
특히 국내 및 국제 경제체제의 규제에 있어 정부가 핵심적 역할을 맡아야 한다는 
일반적 합의가 있었다. 그러한 합의의 이론적 근거는 1930년대의 케인즈혁명에 
의해 주어졌다. 1929년의 세계대공황에 따른 대량실업과 사회적 혼란 그리고 
이로부터 비롯된 각국의 보호무역주의, 블록경제와 군비확장 등이 2차 세계대전을 
야기시켰다는 반성에 토대를 두고 전후 국제경제질서 구축에 있어 각국 정부가 
적극적 역할을 맡아야 한다는 인식이 확고했던 것이다.”註4)이처럼 정부의 역할을 
강조하면서 출범한 IMF는 1970년대 중반 이후 선진자본주의가 만성적인 경기침체로 
빠져들면서 사회민주주의 또는 케인즈주의 정책의 실패가 도드라지자 미국을 
중심으로 한 다국적기업과 국제금융자본의 이해에 기초한 신자유주의로 대전향을 
감행했던 것이다.註5)신자유주의 프로젝트는 냉전 종식 이후 더욱 가속화하여, 
급기야 급부상하는 아시아를 주요 타격목표로 삼기에 이르렀으니, 미국의 
대한(對韓)정책이 미묘한 변화의 양상을 보였던 터다. 북한과의 관계개선을 
추구하는 미국은 사회주의에 대한 자본주의의 우월성을 전시하는 진열창으로 
특별대우했던 한국을 하나의 경계대상으로 간주, 미국의 자유시장 개념에 맞게 
한국경제의 재편을 강력히 요구하면서 한국의 위기가 초래되었다는 
것이다.註6)이러한 국제적 흐름의 변화에 둔감한 채, 내부 개혁은 중도폐기하고 
OECD가입을 무리하게 추진하며 북한에 대한 강경기조를 밀어붙이다가 IMF의 덫에 
스스로 빠진 김영삼정부는 과대망상에 빠진 ‘우물 안 개구리’ 꼴이 아닐 수 
없다. 과연 IMF는 미국자본의 이익을 전지구적 차원에서 관철하는 도구다. 이 
점에서 음모론적 시각에 대해서도 한결 괄목상대해야 하지만, 그럼에도 정부의 
무능과 함께 정경유착 속에 일그러진 한국자본주의의 실상에 비추어 볼 때 남의 
탓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금융위기의 원인이 구조적인 것이 아니라 갑작스레 조성된 
심리적 공황(panic)에서 말미암았다는 희한한 논리도 있지만, 이 또한 우리에게 
위안이 되지 못한다. 심리적 공황론보다는 정보통신원죄론이 오히려 흥미롭다. 
정보통신의 발달로 투자자들이 주어진 정보에 대한 검증 없이 이리저리 급속히 한 
방향으로 쏠리는 기울기에 따라 한 나라 경제의 사활이 좌지우지된다는 것이다. 
실제 월가의 딜러들은 전자게임하듯 금융거래를 하고 있다니, 소련이란 ‘위협’이 
사라진 대신 이익을 따라 정처없이 세계를 떠도는 자본이 새로운 요괴로 등장한 
우리 시대는 일종의 총체적 위험사회로 진입한 것인지도 모른다. 하여튼 세계금융 
개편을 위한 투쟁에서 막강한 일본 대장성과 한국 재경원이 일거에 위용을 
잃어버리는 최근 사태의 추이를 바라볼 때 유일권력으로 부상한 IMF와 월가의 
전자게임, 그 무서운 위력을 새삼 실감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함께 97년 7월 타이의 바트화 폭락으로 촉발된 아시아 금융위기를 
세계대공황의 서주로 보는 논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철기(高喆基)는 
국제금융시장을 교란시키는 투기성 자금의 거대화와 1930년대 대공황에서 회복된 
이후 다시 허약해질 대로 허약해진 실물부문으로 상징되는 최근 자본주의의 실상을 
직시할 때, 1930년대 대공황을 야기한 조건들이 점차 성숙하고 있다고 
지적한다.註7)금번 금융위기는 주변부와 반주변부에 국한되어 있기는 하지만, 
선진자본주의 여러 나라들, 일본은 물론이고 독일을 비롯한 유럽, 심지어 최근 
최고의 호황을 구가하는 미국경제도 겉으로는 양호한 듯하나 내면으로는 결코 
낙관만 할 수 없다는 관측도 적지 않다. 70년대 이후 사멸하는 공룡에 비유되면서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경제의 추격에 초조히 쫓기던 미국이 창조적 파괴론을 내세워 
내부 구조조정을 다그쳐 경제부활에 성공했음에도 실제로 미국경제는 “파괴된 
것은 고용안정이고 창조된 것은 저임금”이란 비판을 받을 만한 약점(물론 
단기적으로는 이 약점이 대외경쟁력 측면에서 강점이기도 하지만)을 안고 있는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역사적으로 공황은 부의 세습이 이루어지는 30년을 
주기로 반복되고, 이를 피하면 다음 30년, 즉 60년을 주기로 대공황이 내습한다는 
라비 바트라(Ravi Batra)의 대공황설은 그럴 듯하다.註8)한국 재벌들이 대개 2세 
경영으로 넘어간 시점에 금융위기가 발생했다는 공교로운 사실도 참고할 만하다. 
  과연 아시아 금융위기는 세계대공황의 서주인가? 1931년과 1997년의 금융위기를 
비교한 박복영(朴馥永)은 중앙유럽에서 시작하여 곧장 국제금융의 중심부 영국으로 
비화, 세계금융질서 자체를 전복해버린 전자에 비해 아시아에 국한된 후자는 그 
강도가 훨씬 약하다고 진단한다. 그럼에도 순수자유시장이라는 정통교리의 
파산으로 주어진 30년대 대공황을 케인즈혁명에 의해 극복했던 역사적 교훈을 
망각하고, 97년 아시아 위기를 신자유주의적 처방으로 막으려는 IMF의 기도가 
일시적으로는 위기의 중심부 파급을 저지한다 할지라도 근본적으로는 아시아 
위기를 심화시킴으로써 대공황으로 발전할지도 모른다고 조심스럽게 전망한다. 
“1931년 국제금융위기는 대공황의 종결을 유도한 위기였던 반면, 1997년 
국제금융위기는 세계적 불황을 야기하는 위기가 되지 않을까 우려되는 것이다. 
금융위기를 겪고 난 지금의 동아시아는, 전간기(戰間期)에 비유한다면 금융위기 
이후의 1930년대가 아니라 대공황을 향하고 있는 1920년대에 해당하는 시점에 서 
있는 느낌이다.”註9) 
  금번 아시아 위기가 대공황의 시작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현재로서는 촉빠른 
진단일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무한관철이 심각한 사태를 초래할 가능성은 언제든지 
남아 있다고 보아도 좋지만, 설령 이번 사태가 세계대공황으로 번진다고 하더라도 
자본주의의 대파국으로 귀결되리라고 보기는 어렵다. 알다시피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위기를 먹이로 새로운 형태로 부활을 거듭해왔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도 
역사적 체제인만큼 언젠가는 작동을 멈추게 되겠지만, 자본의 활동력은 아직 
왕성하다고 판단된다. 그렇다고 대공황론을 그저 폐기할 일은 아니다. 이 사태를 
야기한 우리 사회 내부의 약점들, 즉 무분별한 중복투자로 문어발식 확장에 급급한 
재벌경제, 재경원 정책에 의존한 관치금융체제, 이와 얽혀 있는 낙후한 정치구조 
등을 개혁하는 중단기적 과제는 그것대로 해결해나가면서, 이 위기를 기회로 삼아 
우리가 딛고 사는 자본주의에 대한 좀더 근원적인 성찰 작업이 더욱 절실해지는 
것이다. 
  
  
  3. 소국주의와 대국주의 
  
  금번 아시아 금융위기의 진전과정을 살펴볼 때 우선 눈에 띄는 특징의 하나는 
중심부의 위기가 반주변부·주변부로 내리먹었던 이전과 달리, 이번의 위기는 
주변부 동남아에서 발원하여 반주변부 한국으로 역진하고, 다시 중심부, 
일본·유럽·미국으로 파급할 가능성이 잠재되어 있다는 점이다. 물론 아직 
중심부가 위기로 함몰한 것은 아니로되, 사태의 진전 여하에 따라서 그 가능성이 
완전히 닫혀 있다고 보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근원을 따지면 단순한 
역진만은 아니기는 하다. 가령 아시아 외환위기가 3년 전 중국이 단행한 
위안(元)화의 33% 평가절하에서 시작되었다는 분석에 의하건대,註10)잠자는 사자 
중국이 시장경제에 뛰어든 충격도 한몫을 한 것 같다. 자주 거론되듯이 
아시아지역에 거대한 거품을 수출해놓곤 정작 위기가 닥치자 “아시아 위기의 
구세주를 아시아 내부에서 찾기는 어렵다”며 꽁무니를 사리는 일본의 책임 또한 
무겁다. 그런데 일본의 항변에도 일리가 없지 않다. 최근 심각한 장기불황에 
빠져든 일본경제의 약체화는 이른바 일본적 씨스템의 구조적 문제가 
근인(根因)이겠지만, 한편 일본의 대미(對美) 무역흑자로 말미암은 미일 
경제마찰에서 미국의 요구에 굴복한 나까소네(中曾根)정권의 규제완화정책도 
일조를 했기 때문이다. “엔고(高)불황과 일미 경제마찰 타개의 방책으로서, 
구조개혁정책과 내수확대가 쎄트로 실행”된 결과, “금융시장과 부동산시장에서 
거품이 발생하고 그 붕괴를 계기로, 일본경제는 심각한 사태로 빠졌던 
것이다.”註11)요컨대 아시아 금융위기의 근원에는 역시 미국을 비롯한 구미자본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중세의 방랑기사단처럼, 또는 초원의 제국 몽골의 
유목군단처럼, 이윤을 찾아 온세상을 자신의 말굽 아래 정복하는 구미자본의 
진군이야말로 아시아 금융위기의 진정한 원인제공자다. “안팎의 사회주의와 
대치하면서 사회개혁을 실행해온 것이 자본주의 성공의 원인”註12)임을 상기할 
때, 냉전의 종식과 함께 그나마 사회주의체제의 견제로부터도 자유로워진 자본의 
전지구화는 역으로 위기의 전지구화를 초래하고 있으니, 세계는 한발 재겨 디딜 
틈조차 없이 상호의존(interdependence)의 촘촘한 그물망 속에 갇혀버렸다. 정말로 
“얕게 통합된 국제체제에서 깊게 통합된 지구적 체제로”註13)변모한 현재 
세계경제지형을 실감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 어느 나라도 자본주의 세계체제로부터의 탈각이 거의 완벽하게 불가능한 
시대로 들어섰다. 이 점이 이번 사태 최대의 교훈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세계체제의 바깥은 없다. 다시 말하면 자본주의 세계체제 안에서 비자본주의적 
발전의 길은 없다고 할 수 있겠다. 미완의 근대성을 온전히 성취하는 일의 
중요성이 다시 부각되는데, 문제는 근대의 완성이 근대 이후로의 이행가능성을 
봉쇄하는 측면이다. 청년 그람시(A. Gramsci)는 러시아혁명을 맑스의 『자본론』에 
대한 혁명이라고 환영한 바 있는데,註14)영구혁명론의 폐기와 함께 단계론의 
함정을 어떻게 넘어서는가? 이것이 문제다. 그런데 우리가 프랑스혁명이나 
러시아혁명 같은 모델만을 염두에 두어서 그렇지 앞으로 그 이행의 모델은 다양할 
것이다. 이 점에서 루이 보나빠르뜨의 제2제정 성립을 그후 위로부터의 혁명의 
선구로 본 엥겔스의 시각이 흥미롭다. 그러고 보면 독일 및 이딸리아의 통일운동과 
일본의 메이지유신 등 일련의 후발국 근대화혁명이 모두 19세기 후반에 
이루어졌다는 점이 주목된다. 루이 보나빠르뜨와 비스마르크 같은 “1848년 혁명의 
무덤파기 일꾼들이 그 유언 집행자로 되었다”는 엥겔스의 역설에 의하건대, 
위로부터의 혁명이 가지는 복합성에도 새삼 유의할 필요가 있다.註15)또한 혁명을 
꼭 그 폭발의 시점에만 국한하지 말고 전후 사정을 함께 고려하는 지속의 관점에서 
파악하는 훈련도 필수적이다. 가령 1848년 봄 민중혁명의 요란한 폭발 직후, 여름 
가을의 민주주의자들의 개혁적 운동을 재평가하는 시각도 매우 
흥미롭다.註16)세계적인 차원에서 지배의 기술이 점점 정교해지고 있는 오늘날 
광범한 대중이 참여하는 아래로부터의 혁명은 거의 불가능해졌다. “아래로부터의 
혁명은 국가기구가 현상을 유지하거나 위로부터의 혁명을 추진할 능력을 상실했을 
때만 가능”註17)한 것인데, 세계체제에서 이제 약한 고리는 거의 없다고 보아도 
좋다. 요컨대 위로부터의 혁명과 아래로부터의 혁명을 결합하는 제3의 길, 너무나 
불가역적(不可逆的)인 폭력을 제한하고 갈등을 비파괴적으로 또는 창조적으로 
이용하는註18)쌍방향성 또는 순환성의 회복에 기초한 새로운 모델을 우리 사회의 
현실에 즉해서 여하히 구성해내는가, 이것이 더욱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 지점에서 나는 소국주의를 숙고할 필요가 절실하다고 판단한다. 중국문명의 
거대한 흡인력, 북방 유목민족과 일본의 끊임없는 침략에 시달려온 전근대에는 
물론이고 세계자본주의체제에 강제로 편입된 근대 이후 더욱, 한국사회는 우리가 
딛고 살아온 소중한 터전 한반도로부터 내적 탈주를 기도하며 민족주의의 이름 
아래 대국주의(부국강병에 기초한 대국지향의 민족주의)를 꿈꿔왔다. 물론 이 
강렬한 저항적 민족주의는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힘든 한국사의 중첩된 간난을 
뚫고 민족을 보위하고 민중의 생명력을 보존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해온 셈이다. 
그런데 대국주의의 꿈이 현실로 나타날 기미를 보이자 우리 역사를 이끌어온 
긍정적인 원천의 하나인 민족주의는 그 모든 폐단을 한꺼번에 노정하기에 
이르렀으니, 어찌 보면 오늘날 IMF사태를 초래한 병통이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새로운 건국기를 맞이한 한반도에 신자유주의의 화신인 작은 정부가 아니라 작지만 
단단한 나라, 민족의 존엄과 민중의 권익이 민주적으로 지켜지는 나라를 세우는 
일을 분단체제 극복의 핵심으로 삼을 만하다. 소국주의의 추구는 기존의 왜곡된 
중앙-지방 2분법을 극복하는 데에도 크게 기여할 것이다. 대국주의가 부추기는 
한반도로부터의 내적 망명은 지방으로부터의 심리적 탈주와 긴밀한 연쇄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신판 소중화론이 아니냐는 비판이 나올 수 있지만, 병자호란 
이후의 조선 지배층이 추구한 소중화론은 어디까지나 정권보위의 현상유지책이란 
점에서 진정한 소국주의와 차별된다. 
  한국사를 한반도 중심으로 다시 보자. 모든 사실을 한반도 안으로 꾸겨넣은 
김부식(金富軾)도 문제지만, 뭐든지 압록강 너머 대륙 또는 바다 건너 일본에다 
끌어붙이는 국수주의도 산통이다. 고조선이고 고구려고 백제고 신라고 발해고, 
중원땅이 아니라 아름다운 한반도가 종착지요 중심이었으니, 한반도 사람으로서의 
자각이 지금보다 절실히 요구되는 때는 드물 것이다. 영국 역사상 가장 인기없는 
결지왕(缺地王, Lackland) 존(재위 1199~1216)의 노르망디 실지(失地)가 오히려 
영국인의 정체성을 확립케 함으로써 마그나 카르타로 상징되는 민주주의의 
이정표를 건립하는 데 기여했다는 역설은 극히 시사적이다. 존의 아버지 헨리 
2세는 영국뿐 아니라 프랑스 서부 전역을 영토로 거느려 재위 35년간 영국에서 
지낸 기간은 겨우 13년뿐이었고, 1158년부터 1163년까지 줄곧 프랑스를 떠나지 
않았으니, “영국을 하나의 속국으로밖에 보지 않는 황제”처럼 처신했던 
터다.註19)프랑스 땅의 상실이 영국에는 오히려 약이 되어, “마그나 카르타에의 
서곡” 역할을 했던 것이다.註20)이 점에서 신라의 통일 이후, 더 늘려 잡아서 
발해의 멸망 이후, 대륙의 고토를 상실한 일을 애통해만 할 것은 아니다. 
  또한 한국사를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 즉 침략과 저항의 역사로만 보는 
단선성을 이제 극복할 필요가 있다. 당장 위에 든 노르만 정복왕조가 영국사에서 
차지하는 의의를 상기해도 그러하거니와 몽골의 지배 이후 러시아사의 전개과정을 
살펴보면 더욱 침략의 양면성에 주목하게 된다. 물론 러시아사는 이 시기를 
‘몽골의 멍에’라는 용어로 부정하지만, 실상을 살피건대 그 멍에에서 벗어난 
이후 눈부시게 발전한 러시아제국은 동서 초원지대를 일통한 몽골제국의 유산을 
고스란히 계승한 셈이었던 것이다. 1237년에 개시된 몽골의 러시아 침략은 
공국(公國)들로 나누어진 루스지역을 통일시켰다. 물론 이는 효율적 지배를 위한 
일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러시아의 통일된 힘으로 몽골지배를 구축(驅逐)하는 데 
기여함으로써 러시아제국은 몽골의 유산이라는 역설이 성립하는 것이다. 몽골의 
침략 이전 보잘것없던 모스끄바공국이 몽골제국에 굴종하면서 성장하여 루스지역의 
맹주 노릇을 해온 끼예프공국(우끄라이나)을 제치고 러시아의 중심으로 발전하는 
과정에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는 몽골의 중국 침략에서도 다시 확인된다. 
몽골은 장성 밖의 탕구트(西夏), 중국 북부의 금(金), 중국 남부의 송(宋)을 
차례로 자신의 판도 안에 거둠으로써 중국을 통일했으니, 결국 몽골을 몰아내고 
원(元)을 계승한 명(明)의 건국을 초래하였다. 그런데 이 한족 정권은 청(淸)의 
흥기를 위한 에피쏘드에 지나지 않는다. 동양의 로마제국 당(唐)의 멸망 이후는 
북쪽 유목민족의 시대였으니, 몽골에 멸망당한 바 있던 금의 후신, 청의 흥기 역시 
몽골제국의 유산이었다. 또한 몽골의 지배에 의해 형성된 중국이 현대중국의 
근본적 골격으로 유지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면 몽골의 유산, 그 굉대한 영향력에 
감탄하게 된다. 
  팍스 몽골리카(pax mongolica)는 중세 유럽에도 심대한 충격을 선사하였다. 중세 
유럽을 강타한 몽골의 침략이 결과적으로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탄생에 기여했다는 
월러스틴(I. Wallerstein)의 지적과, 동서결합을 촉진한 몽골제국의 붕괴가 동양의 
몰락과 서양의 흥기를 초래했다는 아부-루고드(Abu-Lughod)의 분석을 고려할 때, 
몽골제국의 세계사적 사명이 얼마나 막중한 것이었는지 실감하게 된다.註21) 
  왜 고려는 러시아나 중국이나 서구처럼 되지 못했나? 이 점에서 팍스 몽골리카의 
붕괴와 함께 성립된 조선왕조의 개국을 재음미할 필요가 있다. 하여튼 
항몽사관만으로 이 시기를 파악하는 단선성에 대한 반성註22)을 진지하게 
물어봄직하다. 저 치열했던 항몽전쟁의 기억을 소중하게 갈무리하면서도, 몽골이 
고려를 솔롱고스(Solongos) 즉 무지개의 나라로 불렀다는 사실도 아울러 참고할 
일인데, 한국사를 세계사적 시야에서 파악해가는 훈련이 절실하다. 
  이런 관점에서 식민지시대를 둘러싼 최근의 논쟁을 다시 볼 필요가 있다. 일제의 
조선침략에도 +개발과 -수탈의 양면성이 어김없이 나타난다. 가령 통감부 설치 
이후 일제가 구한국정부에 강제했던 사법개혁의 과정을 살피건대, 한국 사법제도의 
골격이 그때 마련되었음을 확인하게 된다.註23)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전근대적 
인치(人治)를 대신한 근대적 법치의 합리성이 일정하게 진전한 점도 눈에 띈다. 
그럼 일제가 추진한 식민지근대화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이에 대해 당시 통감 
이또오 히로부미(伊藤博文)는 명확히 대답하고 있다. “한국의 정치개선은 즉 
한국에 있어서의 일본의 세력확장이라는 점이다.”註24) +개발과 -수탈은 둘이 
아니라 바로 하나인 것이다. 근본적으로 조선의 효율적 지배를 위해서 강제로 
추진된 일본에 의한 식민지조선의 근대화는 “밀봉된 관 안에 조심스럽게 
보관되어오던 미라가 바깥 공기와 접촉할 경우 분해를 피할 수 없는 것”註25)처럼 
조선의 전통사회 처처에서 균열을 야기하게 된다. 그런데 이는 망외의 효과를 
산출하기도 한다. 분해에 저항하는 강력한 민족주의와 분해에 힘입은 공화주의가 
조선사회 안에서 동시에 전진하면서 전세계 피압박민족 해방운동의 한 기념비로 
되는 3·1운동이 폭발하였던 것이다. 
  토지조사사업의 경우도 양면성은 분명하다. 근대적 토지소유권의 확립이 
전통사회에 행사한 분해력은 가위 혁명적이라고 해도 좋다. 흔히 전통적 
양반지주가 식민지 지주로 거의 이행했다고 보지만, 대한제국의 붕괴를 즈음하여 
상당한 정도의 신분교체가 이루어진 것 같다. 최찬식(崔瓚植)의 소설들이 잘 
보여주듯이 전통적 신분의 주변부에서 근대교육을 통해 부르즈와지로 상승하거나, 
채만식(蔡萬植)의 『태평천하』에서 보듯이 토지조사사업과정을 전후해서 지주로 
상승한 평민들이 식민지 지주의 전형으로 자리잡는 한편, 양반과 일반 농민은 
급속한 추락의 길을 걸었던 것은 아닐까? 미야지마 히로시(宮嶋博史)는 
재지(在地)양반층의 동족부락이 식민지시기에도 강고히 존속하다가 도시화가 
본격화하는 1960년대 이후 해체의 길로 들어섰다고 지적한바,註26) 이는 조금 과장 
같다. 재지양반층은 재경(在京)양반층에 비해 형편이 나았겠지만, 그럼에도 
양반층의 분해는 식민지화를 전후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60년대 이후는 해체의 시작이라기보다는 그 종언이기 십상이다. 하여튼 
폴라니(K. Polanyi)가 시장경제에서 일어난 이상한 일 세 가지(화폐·토지·노동의 
매매) 가운데 하나로 꼽는 토지매매가 바로 이 사업을 통해 확립되었다는 점을 
염두에 둘 때, 본래 자연의 일부인 토지의 상품화가 얼마나 치명적인가는 오늘날 
한국자본주의의 왜곡에서 차지하는 토지투기를 상기하면 족할 것이다. 
일본제국주의의 조선지배를 생각하면서 맑스의 인도론을 음미할 필요가 있다. 
“문제는 아시아 사회상태의 근본적 혁명 없이 인류가 그 사명을 다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영국이 저지른 죄가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그러한 혁명을 
일으킴으로써 영국은 역사의 무의식적 도구 노릇을 하였던 것이다.”註27) 
  식민지근대화 논쟁은 박정희 개발독재에 대한 평가와 맞물려 있기도 하다. 
식민지근대화가 60년대 이후 남한 공업화의 기반이라는 점에 대한 비판도 만만치 
않다. 가령 히라까와(平川 均)가 지적하듯이, 북부의 공업화와 남부의 농업 
중심이란 구도에 기반한 식민지조선의 상황을 상고할 때, 남한이 공업화에 
성공했다는 역설註28)을 설명하기 어렵고, 해방과 6·25라는 총붕괴의 상황에 대한 
분석을 생략한 채 60년대 경제개발과 직접 연결하는 무리를 비판한 
야마무로(山室信一)도 일리가 있다.註29) 그런데 이러한 비판은 조금 지엽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박정희의 근대화 추진은 일제의 방식, 특히 일제말 총동원체제와 
유사하다는 점에 주목하고 싶다. 생각을 더 밀고 나가면, 유격대국가(和田春樹) 
또는 농성체제(白樂晴)의 북한의 발전전략 역시 그 변형일지도 모른다. 한국적 
근대의 특수성뿐 아니라 서구적 근대 자체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심화하면서, 
이제는 그 유효성이 거의 탕진된 남과 북의 발전모델에 대한 발본적 재검토가 
절실하다. 대국주의의 꿈을 공유하고 있는 이 모델들을 어떻게 넘어서는가? 민중의 
고통 위에 구축된 대국주의의 꿈을 버리고 소국주의와 대국주의의 긴장을 
견뎌나가는 일의 긴절성을 자각하고 싶다. 
  
  
  4. 아시아적 가치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경제의 부상과 함께 홍콩 반환으로 아시아의 세기가 
열리는가 싶더니 반환의 축제무드가 채 가시기도 전에 아시아 주가가 폭락하였다. 
아시아모델의 우등생 한국이 IMF에 항복하고, 급기야 그 모델의 맹주 일본에서 
대장성으로 상징되는 관치금융에 대한 서구 다국적 금융자본의 공격에 유수한 
은행과 증권사 들이 연쇄도산하자, 월가는 “사요나라 일본주식회사, 굿바이 
한국주식회사”를 외치며 아시아적 가치의 폐기를 자축했다. 지난 20년간 
일본모델과 미국모델의 우열론에 시달리던 미국은 아시아의 공포로부터 해방되어 
아시아 관료주의 신화를 해체한 시장의 승리를 기쁘게 선포했던 것이다. 물론 
일본의 제조업 경쟁력은 여전히 세계 최고라는 사실에 근거하여 일본불패론을 
고수하는 저항적 논의가 들려오지만, 어딘지 허장성세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과연 아시아적 가치는 초상집 개 신세로 굴러떨어졌는가? 만약 그것이 일본모델 
및 그 변형인 박정희식 개발독재모델을 포함한 유교자본주의를 뜻한다면, 대체로 
수긍할 수밖에 없다. 그럼 경제적 자유의 확대(규제완화)와 국제분업의 
추진(구조조정 및 구조전환)을 축으로 하는 서구식 신자유주의에 일방적으로 
적응하는 것만이 만병통치약일까? 물론 아니다. 이미 지적했듯이, 신자유주의의 
무한관철은 근본적으로 더 큰 위기로 가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종국에는 지구 
전체를 파멸로 이끌 신자유주의 시장을 민주적으로 통제할 공평한 규제, 즉 시장의 
특권이 아니라 공익을 수호할 규제를 여하히 구성해내는가가 핵심인데, 
유교자본주의를 넘어서 진정한 아시아적 가치를 숙고하는 문제가 더욱 절실하다. 
  여기서 잠깐 유교자본주의론에 대해 생각해보자. IMF사태를 맞이하기 전, 일본을 
선두로 동아시아 신흥공업국(한국·타이완·홍콩·싱가포르)들이 부상하고, 그 
뒤를 동남아시아의 타이·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가 잇고, 거기에 중국이 
시장경제에 뛰어들어 새로운 경제강국으로 부상하면서, 유교자본주의론은 상종가를 
쳤다. 물론 아시아모델은 값싼 노동력의 양적 팽창에 불과하다는 크루그만(P. 
Krugman)의 강력한 비판이 제기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아시아경제의 실물은 그 
비판을 무색케 하기에 족했다. 이런 배경에서 서구의 프로테스탄티즘과 달리 
유교는 자본주의 발전의 내적 계기가 결여되어 있다는 베버(M. Weber)의 논의를 
비판하는 유교자본주의론이 제기된 것이다. 뚜웨이밍(杜維明)은 일본과 동아시아 
신흥공업국들을 구미 자본주의의 유형이나 소련 및 동구의 사회주의 유형과 
구별되는 ‘세번째 공업문명’이라고 명명하면서, 동아시아모델이 ‘후기 
유가사회’라는 문화적 공통기반에 구축된 점에 주목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동아시아모델을 “시장경제로 대표되는 자본주의적 모델도 아니고 계획경제로 
대표되는 사회주의적 모델도 아”註30)닌 독자적 유형으로 파악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그 독특한 자질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동아시아모델은 근본적으로 
서구자본주의의 아시아적 변종이기 때문이다. 말레이시아의 화교를 연구대상으로 
삼아 그 유가적 요소를 재평가한 바 있는 앨러타스(S. H. Alatas)는 오늘날 
화교들의 경제적 성공에 긍정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유교가 전통 중국에서는 왜 
그러지 못했는가라고 매우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그는 그 매개항으로 
말레이시아를 식민지로 경영했던 영국자본주의의 유산을 설정했으니,註31) 
서구자본주의 세례 없이 동아시아모델의 탄생도 없다고 할 수 있겠다. 더구나 
뚜웨이밍이 강조하는 가족주의와 정치적 영도를 특징으로 하는 동아시아모델이 
내우외환 속에 낙후한 유형으로 저무는 요즘 상황을 돌아볼 때, 그 대안적 
독자성은 심각하게 훼손되었다고 치부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 점에서 유교자본주의론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프랜씨스 푸쿠야마(F. 
Fukuyama)의 「사회적 자본과 세계경제」註32)는 그 정치적 의도에도 불구하고 
흥미롭다. 아시아 금융위기 직전에 발표된 이 글에서 그는 제임스 콜먼(James 
Coleman)의 ‘사회적 자본’ 즉 “특정사회의 성원들이 새로운 단체 및 결사를 
형성할 때 서로 신뢰하고 협력할 수 있도록 해주는 인적 자본 구성요소”를 
키워드로 미국이 주도하는 북미자유무역지대, 유럽연합, 그리고 일본이 주도하는 
동아시아, 세 그룹으로 나누어진 “세계경제의 재래식 지도”를 분해하여 두 
그룹으로 재편한다. 하나는 높은 신뢰를 바탕으로 가족주의를 넘어 법인 형태의 
조직체를 채택하여 전문경영인이 움직이는 거대회사를 갖게 된 미국·일본·독일 
등이고, 다른 하나는 낮은 신뢰 때문에 가족주의적 경영에 바탕을 둔 소기업체 
중심의 프랑스·이딸리아·홍콩·타이완 등이다. 요컨대 그는 지금까지 범박하게 
뭉뚱그려진 동아시아모델을 가족주의적 중국형과 가족주의를 넘어선 일본형으로 
나눔으로써 그 모델의 단일성을 분해해버렸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일본형이 
또다른 의미의 가족주의라는 점이다. 가(家)를 철저히 혈연집단으로 파악하는 
중국과 달리 일본은 혈연을 넘어선 ‘하나의 조직’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혈연적 
가족주의를 극복할 수 있게 되었음은 분명하지만,註33) 조직을 가족으로 삼는 것 
또한 가족주의인 것이다. 하여튼 일본형을 동아시아모델에서 분리, 미국형에 붙여 
구원하고자 했던 푸쿠야마의 노력은, 중국형은 물론이고 일본형 가족주의도 개혁의 
대상으로 전락한 오늘날 거의 허사로 판가름날 운명에 처했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런데 동아시아모델을 유교자본주의로 파악할 때, 그 ‘유교’의 성격을 세심히 
따져야 한다. 이는 왕도론에 입각한 공자시대의 원시유교가 아니라 한(漢)제국의 
국가이데올로기로 채택된 경학시대의 유교, 즉 부국강병의 패도론에 바탕을 둔 
법가의 영향을 입음으로써 중앙집권적 관료제 기구에 적응하는 데 성공한 시대의 
변질된 유교에 가깝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패도론적 대국주의에 입각한 
동아시아모델을 왕도론적 소국주의의 재평가를 통해 근본적으로 교정하는 작업을 
제안하고 싶다. 
  일찍이 메이지유신을 모델로 삼은 급진개화파의 대국주의적 부강론(富强論)을 
비판하고 왕도론적 소국주의의 자강론(自强論)을 내세운 온건개화파 
어윤중(魚允中)은 춘추전국시대가 소(小)전국이라면 자기 시대 곧 19세기 말은 
대(大)전국이라고 규정하였다.註34) 이 말을 흉내낸다면 우리가 사는 20세기 말은 
대대(大大)전국 또는 초(超)전국시대라고 할 수 있겠다. 노골적인 무력침략이 
자제되는 점에서 초전국시대는 대전국시대보다 나아진 측면이 있는가 하면, 바로 
무력의 은폐가 우리의 대응을 한층 곤란하게 만든다는 점에서는 더 고약해진 
시대이기도 하다. 신흥공업국으로 면모를 일신하며, 주변부에서 반주변부로 
신분상승한 한국은 이 고약한 시대에, 한반도 안에서는 흡수통일을, 국제적으로는 
선진강국을 꿈꾸며 비교적 단순한 부국강병의 대국주의로 대처해왔다. 그런데 
속삭이듯 찾아온 금융위기로 일거에 대국주의의 순진한 꿈은 굉음 속에 
붕괴하였다. 
  대국주의의 바탕인 부국강병론의 발본적 재검토가 시급하다. 우선 강병론을 
재조정하자. 무(武)는 그칠 지(止)와 창 과(戈)의 합성이니, 적의 침략을 저지하는 
것, 전쟁 자체의 종식, 나아가 무기의 소멸을 뜻하는 글자다. 바로 무의 본뜻으로 
돌아가 안으로는 민중억압, 밖으로는 외국침략의 유혹에 휘둘리기 쉬운 강병론을 
명예로운 전수(專修)방위론으로 전환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강병론의 재조정은 부국론의 재검토와 짝을 이룬다. 부국론을 폐기하고 중세적 
안빈론(安貧論)으로 복귀하자는 일부의 논의는 아름답지만 공상적이다. 국부의 
일정한 증진 없이 ‘함께 자유로운 사회’의 실현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기존의 재벌중심 부국론도 이미 낙후하였다. 농어업을 부양하면서 지역경제의 활력 
위에 건강한 중소기업정책이 추진되어야 하지만, 타이완형으로 가는 길은 문제가 
없지 않다. 아시아 금융위기에도 바람을 타지 않고 건실한 성장을 거듭하는 
중소기업 일변도(전체기업의 98%가 중소기업)의 타이완 경제는 모범적이지만, 작은 
아이디어로 틈새시장을 파고들어 돈을 버는 타이완 중소기업의 전략이란 기실 
국제분업체제에 겸허히 자기를 적응하는 전형적인 소국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푸쿠야마가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듯이, 타이완의 중소기업 중심은 체질적인 
가족주의에다가 국민당정부의 전략적 배려에 의해 주조되었다. 국민당정부는 당의 
경쟁자가 될 수 있는 대기업 육성을 의도적으로 기피함으로써 결과적으로 타이완 
경제를 중소기업 중심으로 굳힌바, 이는 정치·경제적 불구성의 징표인지도 
모른다. 타이완형 중소기업의 산업연관성 박약을 회피하면서 재벌 개혁을 추진하는 
고도의 지혜가 요구된다. 대국주의를 반성하고 소국주의를 재평가하되, 국제분업의 
주변부에 안분하는 소국주의로 전락하지 않는 것이 요체다. 국민경제의 달성이 
미완의 과제인 한반도의 실정에 비추어 볼 때 더욱 그렇다. 
  소국주의와 대국주의의 내적 긴장을 견지하는 일이 밖으로는 전지구화 또는 
지역화, 안으로는 지방화의 요구에 직면한 국민국가의 미묘한 지위변동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것이라는 점에도 주목해야 한다. “초국적기업이 갖고 있는 
막강한 힘과 지리적 유연성 앞에서, 고정된 경계선 안에 갇혀있는 늙고 가련한 
국민국가”는 이제 “장기판의 졸”인가? 피터 디켄(Peter Dicken)은 
초국적기업들이 개별 국민경제의 일부를 통제하고 있는 현실을 인정함에도, 
“초국적기업과 국민국가는 고도의 상호의존성과 거래가 존재하는 지극히 복잡하고 
역동적으로 상호작용하는 관계 속에 서로 맞물려 있다고 보는 것이 훨씬 현실에 
가깝다”고 판단한다. 기업과 국가가 “협동적이자 동시에 경쟁적이요 
상호지지적이자 동시에 갈등적”이라는 현실인식에 투철할 때, 국가를 불변의 
것으로 실체화하거나 또는 ‘졸’로 보는 편향에서 벗어나, 종래의 국민국가의 
틀을 넘어선 통일 한반도의 유연한 미래상을 구상할 수 있을 것이다. 와다 
하루끼는 동북아시아에는 중국·러시아·중앙아시아·미국 등에 조선족이 널리 
살고 있다는 점에서, 동남아시아가 화교의 세계라면 동북아시아는 조선족의 
세계라고 지적한바,註35) 이는 백낙청의 다민족공동체론과 복합국가론을 
재음미하게 한다. 우리들 하나하나가 한반도의 역사적 운명에 괄목상대하며 
자유시장의 방종을 공익적 차원에서 개입해가는 민주적 통로를 확보하는 새로운 
구상에 지혜를 모아나갈 때, 분단체제의 위기를 그 극복의 단서로 바꿀 새로운 
가능성이 비로소 열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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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께서 말씀하셨다 : "활쏘기는 군자의 덕성과 비슷한 바 
가 있으니, 활을 쏘아 과녁을 벗어나더라도 오히려 그 이유
를 자기 몸에서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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