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화이트헤드) 날 짜 (Date): 1998년 8월 29일 토요일 오전 10시 01분 00초 제 목(Title): 백낙청/새로운 전지구적문명에 관하여 새로운 전지구적 문명을 향하여 --한국 민중운동의 역할 백낙청 새로운 전지구적 문명에 관하여 한국 민중운동(들)의 역할에 관하여 덧글 이 글은 지난 4월 25일의 ‘창비 3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 공개강연회에서 기조발제의 형식으로 발표한 내용을 약간 손질하고 보완한 것이다. 다섯 명의 외국 학자들과 최원식 교수의 본격적인 강연 또는 발제에 앞서, ‘새로운 전지구적 문명을 향하여 -- 민중과 민족·지역 운동들의 역할’(Toward a New Global Civilization: The Role of the People and the National/Regional Movements)이라는 대회 주제에 대한 기획자들의 대체적인 인식을 간략히 제시하는 것이 나의 몫이었지만, 결국은 개인적인 견해가 많이 가미될 수밖에 없었다. 또, 부제가 말하는 ‘민중과 민족·지역 운동들의 역할’ 중에서도 한국 민중운동의 역할로 국한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판단했다. 게다가 시간의 제약뿐 아니라 공부의 부족이 뻔한지라, 제대로 논증되지 않은 일련의 명제를 나열하는 형식이 될 것임을 미리 밝힌 바도 있다. 발표들이 끝난 뒤의 질의응답이나 이튿날의 비공개토론회(워크샵)에서 얻은 많은 일깨움과 자극을 제대로 반영하자면 전혀 새로운 한편의 글이 나와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다음 기회로 미루고, 원래의 발제문에 간략한 ‘덧글’을 붙여 그냥 싣기로 한다. 발제문의 경어체도 그대로 두었다. 새로운 전지구적 문명에 관하여 1.‘전지구적 문명’을 말하는 것이 오늘날 여러가지 함정을 수반한다는 점은 일부 발표자들도 지적하겠지만 기획 과정에서도 주지된 사실입니다. 그중에서 ‘전지구적’이라거나 ‘지구화’ ‘세계화’ 등의 담론이 자본주도의 획일화가 진행되는 현실을 미화하기 십상이라면, 최근의 이런저런 문명론들은 이 획일화 과정에서 엄연히 지속되고 심지어 강화되는 부당한 차별들을 옹호하는 수단으로 작용함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지구화’ 또는 ‘문명’의 담론을 기피하는 일은 전술적인 잘못일뿐더러 원칙적으로도 그릇된 것입니다. 어떤 의미의 지구화는 세계적 대세인데다 ‘문명’의 경우는 어느 차원에서는 엄연한 실체이고 또 다른 차원에서는 인간다운 삶에 대한 지향을 장기적이고 거시적으로 생각하는 데 긴요한 담론 방식입니다. 따라서 당연히 지적 탐구의 대상으로 삼아야 옳고 더구나 이들 낱말을 부당하게 이용하는 쪽에 그 담론의 영역을 순순히 양보하는 것은 정치적인 과오이기도 합니다. 2.‘전지구적 문명’이라는 것이 오늘날 존재하느냐라는 물음에 대해서는 그 개념을 정의하기에 따라, 그리고 오늘의 세계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여러가지 답변이 나올 것입니다. 그런데 ‘새로운 전지구적 문명을 향하여’라는 제목을 내걸었을 때 우리는 ① 적어도 하나의 커다란 추세로서는 ‘전지구적 문명’이라 할 만한 것이 이미 있다는 점을 전제했고, ②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추구할 바는 그와 다른, 어떤 새로운 문명이 아닐까라는 물음을 던지고자 한 것입니다. 3. 전지구적 문명이 현재 존재한다면 그것은 ‘자본주의 문명’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입니다.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서양문명에서 배태되었고 서구 열강의 세계제패를 통해 그 지구화가 실현된 것이 사실이지만, 처음부터 ‘자본주의적 가치는 곧 서양적 가치다’라는 전제에서 출발하지 않는한 오늘날 자본주의 세계경제에 수렴되고 심지어 일본처럼 그 중심부의 일원이 된 온갖 비서양 지역과 문화들을 ‘서양문명’의 다양한 형태로 규정하기는 힘들 듯합니다. 한가지 가능한 해법은 ‘문명’과 ‘문명적 유산’을 구분하여, 오늘날 현실로서 기능하는 문명은 자본주의 문명 하나뿐이고 나머지 ‘문명’들은 과거에는 문명으로 기능했지만 지금은 다소간에 파편화된 문명적 유산으로 기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서양문명의 경우는 자본주의 문명의 터전이 된 만큼이나 그 유산도 비교적 순탄하게 보존되고 세계체제 속에서 그 유산이 발휘하는 힘도 강력하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새로운 전지구적 문명을 향하여: 한국 민중운동의 역할특집: 새로운 전지구적 문명을 향하여 4. 이러한 전지구적 자본주의 문명을 설정하는 데 따르는 심각한 지적 과제는 한두 가지가 아니겠지만, ① 자본주의 문명이 서양문명을 모태로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후자와 구별되는 것이라면 그 기준은 무엇이며 실제 역사에서 양자의 구별이 요구될 만큼 그 중첩상태가 희박해지는 시점은 언제부터인가, ② 마찬가지로 동아시아문명, 이슬람문명, 인도문명 등이 더이상 ‘문명’이 아니고 ‘문명적 유산’으로 전락하는 지점은 언제이며 어떤 경로를 통해서인가라는 질문도 만만찮은 것들입니다. 5. 이러한 난제 앞에서 자본주의는 ‘생산양식’에 해당하고 ‘문명’은 그와 차원이 다른 -- 예컨대 중국문명의 경우처럼 통시적으로 여러 다른 생산양식을 포용해온 동시에 오늘날에는 자본주의라는 단일 생산양식에 포섭되는 여러 문명 중의 하나가 되기도 하는 -- 개념이며 따라서 ‘자본주의 문명’을 말하는 것이 논리적 엄밀성을 결한 것이라고 답한다면 이론상으로는 명쾌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생산양식’을 ‘문명’에 값하는 생활 전반의 문제와 따로 떼어 특정한 경제활동이나 제도들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축소한다면 모를까, 구체적인 문명의 형태와 주어진 생산양식의 현실적 전개과정을 별도로 고려한다는 것은 관념의 유희로 끝나거나 지적인 혼란을 자초할 따름입니다.(역으로 한 문명에 대한 논의가 그 생산양식의 분석을 생략하는 것도 마찬가지겠지요.) 특히 자본주의의 전지구화에 따르는 서양문명 자체의 변질, 나아가 인류문명 전체에 대한 위협 같은 절실한 문제들은 ‘자본주의 문명’의 개념을 천착하고 그에 따른 난제들과 씨름하는 가운데서만 제대로 인식될 수 있을 것입니다. 6. 그러므로 ‘자본주의 문명’이 논리적으로 혼란스러운 개념이라는 주장보다는 그것이 현실적으로 하나의 형용모순(oxymoron)에 해당한다는 발상이 오히려 진지한 검토를 요합니다. 즉 자본의 끝없는 축적 그 자체를 추구하는 자본주의가 그 본질상 반문명적인 것이 아니냐는 문제제기입니다. 하지만 이런 발상에도 단순화의 위험은 있습니다. ① 자본주의적 근대가 그 파괴적 속성에도 불구하고 -- 아니 부분적으로는 그 파괴성에 힘입어 -- 인류문명에 뚜렷한 공헌을 해온 바를 간과해서는 안되며, ②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서양문명을 비롯한 과거 여러 문명들의 유산을 어떻게 계속 활용하고 있는가를 통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때 떠오르는 하나의 가설은, 자본의 논리 자체는 반문명적일지라도 바로 그 논리가 완벽하게 관철되지 못한 현실이야말로 자본주의 문명의 성립근거이자 현존자본주의의 생존기반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 세계체제는 기존의 여러 문명적 유산들을 탕진해가는 체제인 동시에 바로 그 과정이 미진한 상태, 즉 아직도 미진한 전지구화 덕분에 존속하고 있는 체제인 셈입니다. 역설처럼 들리지만 ‘자본주의 문명’보다는 ‘자본주의의 (완전한) 지구화’야말로 형용모순이 된다고 하겠습니다. 7. 그렇다면 오늘의 자본주의 문명이 자본주의로서의 자기완성 겸 문명으로서의 자기부정에까지 가기 전에 아직 남아 있는 문명적 유산들을 총동원하여 새로운 지구문명을 건설할 필요성이 한층 긴박해집니다. 그리고 이들 다양한 문명적 유산은 한편으로 자본주의적 세계화가 추진하는 획일화를 거부하는 힘이 되면서, 다른 한편 자신을 낳은 과거 문명들과 현존자본주의 문명의 온갖 부당한 차별을 철폐할 새로운 전지구적 질서에 맞도록 갱신되어야 할 것입니다. 한국 민중운동(들)의 역할에 관하여 1. 영어 제목(Toward a New Global Civilization: The Role of South Korea’s Popular Movements)에 명시되었듯이 저의 부제가 말하는 ‘민중운동’은 복수의 민중운동입니다. 이는 80년대의 수많은 급진적 운동가들이 제각기 자기네의 통일조직을 강조함으로써 오히려 분열과 소모적 갈등을 조장했던 데 대한 비판을 담은 표현입니다. 그러나 한걸음 더 나아가,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월러스틴이 말하는 ‘열국체제(또는 국가간체제)’(interstate system)를 비롯한 다양한 장치를 통해 작동하고 유지되는 복잡하고도 유연한 체제이니만큼 일국단위의 통일된 조직이 해낼 수 있는 일의 한계가 엄연하다는 인식을 담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민중운동의 목표가 자본주의 문명의 획일화에 저항하는 것이라면 전세계적 민중연대가 실현되더라도 그것은 다양한 민중운동들의 연합 형태를 취해야 마땅합니다. 이러한 통찰은 ‘세계체제 분석’에 굳이 의존하지 않더라도, 분단현실에 일국단위의 분석을 적용하는 데 따르는 이론적·실천적 어려움을 통해 충분히 실감할 수 있는 것이었고, 한국의 민족문학운동은 그러한 실감을 전달하고 강조하는 데 일찍부터 기여해왔다고 자부하는 터입니다. 2. 그러나 80년대 일부 민중운동권의 잘못에 대한 반성이 지나쳐 우리의 운동이 여전히 민중운동이어야 함을 잊어서도 안될 것입니다. ① 근년의 한국에서 이루어진 민주화 및 개혁작업의 진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노동자들을 포함한 다수 대중이 소외된 극히 한정되고 불안정한 민주화요 개혁에 불과하기 때문이고, ② 이것이 정권담당자의 성향이나 능력 문제만이 아니고 한반도의 일견 상반되고 철저히 단절된 두 부분을 망라하는 ‘분단체제’의 한 속성이기 때문이며, ③ 심지어 통일이 되더라도 이 분단체제의 상위체제인 세계경제의 논리가 관철되는한 크게 변할 수 없고 오히려 심화될 수 있는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3. 실제로 90년대 한국의 상황은 -- 80년대 일부 운동권이 내세웠고 오늘날 일부 시민운동권에서도 암암리에 동조하는 ‘민중운동 대 시민운동’의 양분법을 고집하지 않는다면 -- 다양한 민중운동들이 예전보다 훨씬 널리 퍼진 상태입니다. 한국 민중운동의 활력은 선진자본주의국이나 극빈국, 또는 그 중간에 위치한 여타의 ‘신흥공업국’ 등 가운데 그 어디에 비하더라도 못하지 않다고 봅니다. 다만 충분치는 못한 정도임은 분명하고, 앞으로 남한 경제의 고도성장이 지속된다거나 반대로 급격히 둔화될 경우 이 정도의 활력마저 상실할 가능성도 전적으로 배제하지는 못합니다. 필요한 것은, 다양한 운동들이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변혁에 대한 장기적 전망을 갖고 분단체제극복이라는 중기적 목표를 공유하면서 남한에서의 그날그날의 단기적 개혁작업을 제각기 감당해나가는 지혜입니다. 여기에는 각각의 요구에 걸맞은 국제연대가 당연히 수반할 터인데, 특히 우리의 경우에 중요한 것은 ‘국제적’도 아니지만 ‘국내’랄 수도 없는 범한반도적 민중연대의 움직임입니다. 어느 지점에선가 이러한 운동(들)에 불이 붙을 때 한국의 민중운동은 그야말로 불퇴전의 힘을 갖게 될 것입니다. 4. 이 과정에서 ‘문명’의 담론이 빠질 수 없는 까닭은, 우선 일반론의 차원에서 대안체제에 대한 모색이 곧 대안문명에 대한 모색일뿐더러 문명 그 자체의 보존을 위한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구체적으로 한국 민중운동의 경우 통일을 위한 ‘민족의 동질성 회복’이라든가 동아시아 지역의 문명적 자산의 보존과 활용이라는 것이 반드시 민족주의자 또는 복고주의자의 목표만이 아님을 말해줍니다. 문명유산 및 문화적 연속성의 유지는 그 창조적 활용을 통해서만 가능한 법인데 분단체제와 세계체제의 변혁이 바로 그러한 활용 여하에 달린 것입니다. 이런 인식은 또한 동아시아문명뿐 아니라 서양문명, 이슬람문명, 아프리카문명 등등의 유산이 모두 대안문명의 창출에 긴요하며 그 창조적 보존이 바로 우리 자신의 일이라는 ‘세계화된’ 시각을 제공하기도 합니다. 5. 이 문명사적 임무를 감당해내는 한국의 민중운동은 분단체제를 극복함으로써 새로운 (복합)국가 모형과 (다국적) 민족공동체의 모형을 창출함은 물론,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틀 안에 불가피하게 머물면서도 비자본주의적 기풍과 제도가 확대된 공간을 한반도에 건설함으로써 대안문명 창조의 핵심적 기지와 유능한 인재들을 인류를 위해 제공하게 될 것입니다. 이 과정은 학문·예술 등 ‘고급문화’의 영역에서도 그동안 자본주의 문명을 지탱하는 데 복무해온 보편주의(실제로는 서구중심주의) 이데올로기를 극복할 실력을 요구할 터인데, 그 점에서도 동아시아와 한국의 문명적 자산을 최대한 살리면서 세계 곳곳의 유사한 창조적 노력에 대해 개방적인 민중운동의 기여가 필수적이라 하겠습니다. 덧글 비공개토론회에서 페리 앤더슨 교수는 ‘전지구적 자본주의 문명’의 존재를 내가 과감하게 주장했고 문명이라는 것이 “어느 차원에서는 엄연한 실체”(영역문에서는 “an indisputable reality on a given definition”)라고 언명했는데 과연 어떤 차원에서 어떤 정의에 따라 오늘의 자본주의 세계가 ‘문명’에 해당하는가라는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곧이어 자신의 물음에 스스로 답하여, ‘문명’이라고 하면 통상적으로 물질적 생활과 제반 사회관계와 문화적 가치들의 포괄적인 총체를 일컫는 것이고, 오늘날 ‘자본주의 문명’의 경우 첫째, 전세계적으로 퍼진 그 소비의 양상, 둘째로 커뮤니케이션 기술이 매개하는 문화(및 이에 따른 고급문화/저급문화 구별의 철폐), 셋째로 전대미문의 도시화가 보여주는 바와 같은 공간적 환경의 변모 등을 들 수 있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내놓았다. 문명이 “어느 차원에서는 엄연한 실체”라고 말할 때 내가 뜻했던 바는 적어도 과거에는 앤더슨이 말하는 ‘포괄적인 총체’(a comprehensive totality)로서의 문명들이 동아시아를 비롯한 여러 곳에 엄연히 존재했다는 점이었지 현시점에서 전지구적 자본주의적 문명의 존재를 ‘과감하게’ 주장할 생각이 아니었다. 엄연한 실체에 미달하더라도 ‘긴요한 담론 방식’임에는 틀림없는한 문명의 담론을 피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으로써 일단은 족했던 것이다. 따라서 자본주의 문명이 ‘문명’으로 인정받는 데 해당될 조건에 관해서는 별다른 연마가 없었고 앤더슨이 제시한 세 가지는 대체로 수긍할 만한 것이었다. 물론 앤더슨 자신도 엄격한 정의를 내린 것은 아니어서, 가령 그의 ‘포괄적인 총체’만으로는 ‘문명’과 ‘원시사회’를 구분할 기준이 미흡하다든가 그러한 ‘포괄적인 총체’가 존속하는 일정한 기간을 설정할 -- 또는 브로델처럼 좀더 적극적으로 그 시간적 성격을 ‘장기지속’(la longue dure′e)으로 규정하는 식의 -- 필요성 같은 것은 남는다. 그러나 이런 세세한 논의를 펼칠 계제는 아니었고, 또한 고급/저급(또는 대중)문화의 구별 철폐라는 것이 어디까지나 하나의 경향성으로 존재할 따름이라든가 자본주의 문명에서의 이러한 철폐가 참다운 의미의 대중적인 -- 즉 대중의 능동적이고 창의적인 참여에 의한 -- 문화의 형성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앤더슨도 쉽게 동의할 터이므로 굳이 토를 달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내가 전지구적 자본주의 문명의 존재를 ‘과감하게’가 아니라 (토론장에서도 해명했듯이) ‘지극히 조심스럽게’ 제기했다는 점은 중요하다.(“전지구적 문명이 현재 존재한다면 그것은 ‘자본주의 문명’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입니다”가 정확한 인용이다.) 이런 조심성은 나 개인의 공부가 모자란다거나 이 문제에 관한 실증적인 자료의 축적이 전반적으로 부족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유독 자본주의 문명만이 갖는 특성이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고 이에 관한 어떠한 명쾌한 진술도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발제에서 나는 ‘자본주의 문명’과 ‘자본주의의 (완전한) 전지구화’가 둘다 각기 다른 의미로 형용모순일 가능성을 언급했는데, 이러한 언설이 단순한 말장난의 수준을 넘어 진지하게 적용될 수 있는 유일한 역사적 사례가 바로 자본주의시대가 아닐까 한다. 즉 한편으로 이제까지의 모든 문명들이 그나름의 파괴성을 지녔었지만 그 주도원리 자체가 본질상 반문명적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 것은 자본주의 문명이 처음이고, 그런데도 어쨌든 ‘전지구적 문명’에 해당하는 것을 건설할 실력을 갖춘 이제까지의 유일한 예 또한 자본주의체제인 것이다. 바로 그런 까닭에 나는 자본주의에 의한 생산력의 엄청난 증대와 과학기술의 비약적 발전 등을 ‘물질개벽’의 차원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보며, “자본주의 문명이 자본주의로서의 자기완성 겸 문명으로서의 자기부정”을 향해 치닫고 있는 이 시기가 역사상 다른 문명 또는 체제들의 흥망성쇠와는 차원이 다른, 인류 전체의 일대 파국이냐 아니면 미증유의 자기쇄신이냐라는 갈림길에 해당한다고 믿는 것이다. ‘자본주의 문명’이라는 용어는 바로 이러한 시대인식·현실인식을 일깨우는 화두가 되어야 마땅하다. 그러한 인류의 자기쇄신을 위해 동아시아문명과 민족문화의 자산을 어떻게 활용하며 현시점에서 동아시아(또는 동북아시아)의 어떤 지역연대를 추구할 것인가라는 문제 역시 이 화두를 젖혀두고는 풀릴 수 없다. 이는 발제문에서 유달리 소략하게 다뤄진 대목이기도 한데, 동아시아의 문명적 유산을 활용하는 문제에 관한한 그 일차적인 원인은 나 자신이 말하자면 ‘양학도(洋學徒)’로서 어떤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할 능력이 너무 부족하다는 사실을 들어야 할 것이다. 즉 이 문제와 관련된 본고의 논리전개가 ① 자본주의 세계체제 및 그 하위체제의 하나인 한반도 분단체제 극복의 필요성, ② 이를 위한 민중운동에 문명 담론이 개입할 수밖에 없는 사유, ③ 그에 따른 민족문화 및 동아시아문명 유산의 창조적 활용에 대한 요구, ④ 이 과정에서 한반도 또는 동아시아에 국한되지 않는 온갖 유사한 노력에 대한 연대의식의 발견이라는 수순을 밟아나갔다고 할 때, 나의 ‘전공분야’는 ④ 가운데서도 서양문명, 그중에서도 ‘고급문화’의 유산 활용이 어떻게 남의 일이 아닐 수 있는지를 예증하는 작업과 일치하는 셈이다. 그 방면의 실적 역시 미미하긴 매한가지지만, 동양학도들과의 연대작업, 그리고 나 자신의 경우 민족문학운동에의 참여와 서양문학도로서의 공부가 일치할 가능성 등에 대한 이론적 근거는 얼마간 제시하지 않았는가 한다. 동아시아의 지역연대에 관해서는 나 자신은 공동 문명 유산의 활용, 민중운동들의 국제연대 등의 극히 추상적인 언급에 그친 반면, 최원식 교수는 동아시아적 특성을 살리는 일의 중요성을 좀더 적극적으로 강조했고 와다(和田) 교수는 주로 지정학적 차원에서 ‘조선반도가 중심이 된 동북아시아 공동의 집’에 관한 구상을 밝혔다. 앞으로 두 분 모두가 해당 논의를 더욱 진전시켜주기를 기대하거니와, 토론장에서 내가 덧붙인 점은 지역연대를 추구하는 여러 다른 차원의 방식을 상호배타적인 것으로 보지 말고 오히려 얼마든지 겹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또 그리 되게끔 노력하자는 것이었다. 예컨대 공동의 문명유산 활용을 위한 구 동아시아문명권 국민들의 연대가, 러시아처럼 문명사적 배경이 다른 나라의 참여가 불가피한 지정학적 차원의 ‘동북아’ 구상과 병행되는 것은 가능할뿐더러 필요한 일이며, 다른 한편 현재 아시아에서 일본 자본의 패권적 지배에 효과적으로 저항하려면 (일본을 포함한) 동북아 민중의 연대뿐 아니라 일본(및 남한) 자본의 직접적 피해자인 동남아 민중들과의 연대도 함께 추구해야 마땅한 것이다. 지역의 범위를 넘어 전지구적인 민중연대를 형성하고자 할 때 이런 중첩적인 사고와 실행이 더욱 절실해지면서 복잡해지기도 함은 더말할 나위 없다. 개별국가·지역·세계라는 3중의 틀조차 심한 단순화에 불과하다는 점은 ‘지역’이라는 낱말이 (이번 대회 주제에서 ‘regional’이 그렇듯이) 일국단위를 넘어서는 넒은 뜻일 수도 있고 (흔히 ‘local’이라는 영어로 표현되듯이) 일국 내의 한 지방 또는 지역을 가리킬 수도 있음은 누구나 아는 일인데, 한국인의 경우는 그에 더해 ‘분단된 한반도’라는 또 하나의 결정적으로 중요한 단위가 주어졌다는 것이 현실적인 불행이면서 둘도 없는 공부감이다. 이 공부를 제대로 했을 때 누가 3중이 아니고 4중 또는 5중의 틀을 가지는 것으로 족하다고 말할 것인가. 수많은 차원의 생각과 실천을 동시에 해야 하는 처지일수록 그 많은 것 중에서 일관된 근본은 어디에 두고 목전의 실행은 어디에 맞출지를 올바로 취사선택하는 것이 성패의 열쇠가 아니겠는가. ‘전지구적 문명’을 들먹이는 거창한 담론을 한국 민중운동의 구체적 과제들과 연결시켜본 이 글이 그러한 취사에 다소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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