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화이트헤드) 날 짜 (Date): 1998년 8월 29일 토요일 오전 09시 23분 36초 제 목(Title): 브루스커밍스/비교론적 시각에서 본 시민사 비교론적 시각에서 본 시민사회와 민주주의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 들어가는 말 시민사회의 자기추구 비판 한국에서의 민주주의와 그 불만 세력들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들어가는 말 내가 처음으로 한국 음식을 맛보고, ‘안녕하십니까’를 발음하려고 혀를 억지로 굴려보고, 한국의 경험과 중국·일본의 경험을 구별해본 것은 정확히 30년 전이었다. 그로부터 18개월 후, 나는 미평화봉사단(U. S. Peace Corps)의 일원으로 영어를 가르치기 위해 서울에 도착했고, 그후의 인생을 바꾸어놓을 만큼 내 생각을 극도로 뒤흔들어놓은 경험을 하게 되었다. 당시 미국은 권력이나 영향력 면에서 전후 최정점에 올라 있었고, 한국에 와 있던 미국 기관의 여러 구성원들은 자신들의 정당성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미 대사관은 미국이 대한민국을 민주주의로 나아가도록 지도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으며 (1967년에 선거가 있었다), 미8군은 우리의 한결같은 우방 대한민국 군대와 어깨를 나란히 공산주의의 침략을 막아내고 있었다. 국제개발처(Agency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 AID)는 근대화이론에 깊이 의존하면서, 로스토우(Rostow)註1) 가 말한 ‘이륙’(take off) 단계에 진입하는 발전계획을 도입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할 일은 많았다. 우리가 평화봉사단 교육에서 들은 바에 의하면 한국사회는 병적인 상태였고, 미국인들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예의범절 중 전부는 아니더라도 대부분을 갖추고 있지 않았으며, 정치 면에서는 자발적 결사(結社)나 정당들, 확고한 지도력 등이 종종 결여되어 있고, 따라서 다원주의적인 민주주의 자체가 없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시민사회의 대표기구인 국회도 폭동까지는 아니지만 종종 난장판이 되어버리는데, 이것 또한 한국의 사회적 병폐의 징후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들었다. 그로부터 꼭 1년 뒤, 전후 미국 체제는 종말까지는 아니더라도, 쇠퇴의 징후를 분명히 드러내고 있었다. 미국은 베트남전쟁에서 그 모든 의도와 목적에서 패배했다. 마틴 루터 킹과 로버트 케네디는 암살되었다. 미국의 내로라 하는 대학들이 모두 학생들의 저항운동으로 들끓었다. 린든 존슨 대통령은 베트남에서의 전쟁과 국내의 빈곤과의 전쟁에서 모두 패배하여 재출마를 포기했다. 유럽에서의 달러화 지불청구 쇄도는 브레튼우즈 통화체제(Bretton Woods monetary system)의 종말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한국에 대해 조금 알게 되었고, 한국에 대한 내 첫 인상은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나와 함께 살던 어떤 학교 선생님의 가족은 내가 미국의 가정생활에서 연상하게 되었던 병폐들을 거의 보이지 않았다. 내가 가르치던 학생들은 지성과 기율에서 모범적이었으며, 종종 밤늦게까지 공부하곤 했다. 여가시간에 나는 다방에 앉아서 많은 시간을 보내곤 했는데, 당시에는 길모퉁이마다 다방이 있었으며, 다방은 생생한 정치토론으로 활기에 차 있었다. 서울 사람들은 서로 누가 누구인지 다 아는 것처럼 보였고, 그들은 모두 자기 의견 -- 종종 권력층의 정치인들을 심하게 비난하는 -- 이 있었다. 나는 정치에 관한 소문에 그토록 깊은 관심을 보이는 데 놀랐고, 모든 사람들은 무슨 강박관념을 가진 것처럼 열심히 신문을 읽는 것 같았다 -- 신문을 살 돈이 없는 사람조차도 서울 곳곳에 나붙은 벽보들을 열심히 보는 것이었다. 학생들은 길에서 나를 불러세우고 이런 질문을 하곤 했다. “아서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에서 지하실에 있는 호스는 무슨 의미죠?” 평화봉사단 교육에서 우리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던 여성은 토마스 하디 소설의 열렬한 애독자였다. 한국에 들어온 미국의 존재에 대한 내 견해도 바뀌었다. 서울에 있는 거의 모든 미국인들은 담장이 쳐진 이태원의 주거지역 내에 살았는데(한국인은 통행증이 없으면 들어갈 수 없다), 그곳은 60년대에는 변두리였으나 지금은 종잡을 수 없이 팽창해가는 이 도시의 한가운데 들어앉은 언덕배기에 자리잡고 있었고, 미국 농가 스타일의 주택들과, 차가 두 대씩 들어가는 차고와 수영장·골프장이 있었으며, 이 모든 것은 군대를 통해서 재빨리 계층상승을 하려는 노동계급 혹은 중하류층의 미국인들을 위한 것이었다. 그들에게 이태원은 말하자면 교외의 컨츄리 클럽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이 미국인 거주지에는 군인, 장성, 외교관, 국제개발처 관리와 다양한 뜨내기 들이 살았다. 그들 대부분은 점잖고 인간적이며 견실한, 공식적으로 파견된 미국인들이었으며, 누구를 착취한다는 것은 꿈도 못 꿀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 누구의 의도도 아니었건만, 식민문화와 인종차별주의적인 교만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들의 교만은 한국인들의 어처구니없는 면에 대한 끝없는 이야기들에서 드러났다. 인종차별주의적인 생각을 가진 그들은 내게 한국인들의 이상한 행동 -- 흔히 한국인들에 대한 수많은 중상모략적 상투형으로 둘러싸인 언어로 이루어진 이상한 점들에 대해 얘기해달라고 요구하기까지 했다(왜냐하면 나는 한국인들과 함께 살고 있었고, 그들은 소위 ‘경제’활동을 하러 나다니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일본의 식민지배에 비하면 불완전한 지배였다. 왜냐하면 우리의 제국주의적 기초는 바로 그와 반대되는 개념 즉 자유주의 이론으로 채워지고 그에 의해 정당화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한국에 온 것이다, 우리편 한국인은 선량한 민주주의자들이거나 그러한 방향으로 가는 중이고, 저쪽편 한국인은 사악한 독재자(최근 맥조지 번디MacGeorge Bundy註2) 의 말에 의하면 “포악한 전체주의자들”)이며, 미국인들은 절대로 제국주의자일 리가 없으며, 우리는 한국인들이 스스로 날아다닐 수 있을 때까지 이타주의적으로 이들을 도와주는 것이다, 기타 등등. 웃기는 얘기다,라고 나는 생각하게 되었다. 달리 말하면, 30년 전에 나는 그 깊이나 급속함에서 지금 생각해도 아찔할 정도로 엄청난 정도의 사고의 전환을 겪었다. 그리고 현대 세계를 한국과 미국이라는 이중 초점의 렌즈로 바라보는 일이라고 부를 법한, 평생에 걸친 탐구가 시작되었다. 내 글이나 강의에서 무엇인가 사람들이 쓸 만하다고 여길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러한 이중의 시각에서 나온 것이다. 한국 현대사를 자세히 살펴보는 가운데 나는 거기에서 세계체제 자체에 관해 알아야 할 것을 전부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1996년 현재 나는 미국의 몰락에 대해 과거만큼 확신하지는 않지만(일차적으로는 지난 10년간의 기술혁명 때문에), 한국에서 미국이 전개해온 전후(戰後) 기획의 실패나, 그러한 미국의 기획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또 그 기획 때문에 지속되어온 한국적 르네쌍스의 깊이에 대해서는 여전히 확신하고 있다. 이런 말로써 나는 『창작과비평』 30주년을 축하하는 머리말을 대신하고자 한다. 이 모범적 잡지는 한국의 르네쌍스와 한국의 생기 넘치는 시민사회 그리고 그 앞에 놓인 과업들 -- 사회정의, 진정한 민주주의, 진정한 지적 자유 그리고 무엇보다도 통일 -- 에 대한 가장 차원 높은 징표이다. 이 글에서 나는 미국과 남한의 시민사회와 민주주의의 문제들을 검토하고자 한다. 첫 부분에서 나는 시민사회의 이론을 펼친 (하버드의 이론가인 로버트 퍼트넘Robert Putnam과 마이클 쌘델Michael Sandel 및 위르겐 하버마스Ju¨rgen Habermas 등을 포함한) 다양한 사람들의 작업을 검토하면서 그들의 강점과 약점 -- 그들 논의의 서구 편향과 본질주의를 포함하여 -- 을 짚어보고자 한다. 두번째 부분에서는 맑스주의와 가톨릭 우파에서 나온 시민사회 비판 두 가지를 한편으로는 맑스(Marx)와 그람시(Gramsci)를 중심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얼래스데어 매킨타이어(Alasdaire Macintyre)와 로베르토 웅거(Roberto Unger)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그러고 나서 나는 한국의 민주주의 문제, 즉 1993년에 특이한 슘페터(Schumpeter) 식의 민주주의를 만들어낸 대중들의 투쟁과 엘리뜨층의 반응, 깊이나 과감함에서 세계에 비할 것이 없는, 권위주의에서 민주주의로 이행되고 있는 현재의 위기(1993년의 체제를 위협하기도 하지만 또한 변화시킬 수도 있는 위기) 그리고 한국의 민주화 과정에서 남아 있는 과제들에 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마지막으로 ‘민주주의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미국과 한국의 경험에 비추어 살펴보려고 한다. 시민사회의 자기추구 1990년대 중반 미국에는 우파에서 좌파에 걸쳐 모두가 미국 시민사회에 관한 매우 상반된 관심들로 가득차 있다. 모든 논평자들이 똑같은 증상을 지적한다. 즉 공적인 공간(도시들)에서의 병폐와 위험, 더욱더 전반적인 도덕의 붕괴 가운데 증가하는 범죄율, 핵가족의 해체, 투표에 대한 시민들의 무감각과 무관심, 정치체제에 대한 냉소주의, 공개토론의 질 저하(특히 이러한 토론을 전달하는 주된 매체인 텔레비전에서 더욱 심각하다), 정치적·국가적 지도력의 결여 등이다. 1994년 2월에 발간된 갤럽 조사에 따르면 미국인들 가운데 80%는 정부가 올바른 일을 하리라고 신뢰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75%는 정치적 과정이 운용되는 방식이 불만스럽다고 했으며, 비슷한 수의 사람들이 정부는 모든 사람의 이익이 아니라 소수 거물급의 이익만을 위한다고 했다. 1992년이나 1994년과 마찬가지로 올해도 야당의 정치가들(로스 페로Ross Perot, 패트릭 뷰캐넌Patrick Buchanan, 뉴트 깅리치Newt Gingrich 등)은 이러한 불만을 토대로 하여 유권자들을 또다시 동원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들은 주로 1950년대가 미국에게는 모든 일이 잘 풀리던 황금시대였다고 주장한다(깅리치는 1955년이 미국 체제의 절정이었다고 내세운 바 있다). 이와 동시에 우리 시대의 영향력있는 문필가들은 시민사회는 기본적으로 서구의 개념이며 잔존하는 공산주의 사회에는 없고, 또한 구공산권 국가에서 창출해야 할 가장 긴요한 요소이며, 동아시아 국가 -- 권위주의적인 싱가포르건, 민주주의의 일본이건, 남한이나 대만 같은 신흥공업국이건 -- 에는 대체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하버드대학의 쌔뮤얼 헌팅턴(Samuel Huntington)은 탈냉전시대의 지구촌 정치를 위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내고자 한 『문명의 충돌』(The Clash of Civilizations)에서 이러한 견해를 악명높게 드러내 보였다. 그러나 카렐 반 볼페렌(Karel van Wolferen)의 『일본 권력의 수수께끼』(The Enigma of Japanese Power)註3) 야말로 동아시아가 시민사회나 계몽주의 없이 산업화되었다는 주장의 가장 좋은 최근의 예일 것이다. 이것은 미국의 각계각층에 그렇게 영향력을 끼치지 않는다면 단지 각주(脚註)에 한번 언급될 정도의 가치밖에 없을 책이다. 1993년말에 반 볼페렌은 『뉴 레프트 리뷰』(New Left Review)와 『포린 어페어즈』(Foreign Affairs), 『내셔널 인터레스트』(The National Interest)지에 동시에 논문을 발표하여 좌파에서 우파까지 모든 지식인층의 의견을 일괄처리해버리는 성과를 올린 바 있다. 『뉴욕 타임즈』의 편집자는 그에게 몇번이나 의견란을 개방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저작에 기초를 둔 사설들을 쓰기도 했다. 그들 생각에는 그의 저작이 자본주의도 공산주의도 아닌 제3의 체제, 이름하여 동아시아 체제를 밝혀냈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반 볼페렌에게 ‘서구’란 “사회적 명령이나 집권자의 법령 같은 세속적인 현실을 초월한 독립적이고 보편적인 진리 혹은 불변의 종교적 믿음”의 장이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초월적 진리의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는 정치문화 속에서” 사람들이 신념을 그때그때 상황에 맞추어 조정한 것이다. ‘동양’에 관한 19세기의 논의에서처럼 반 볼페렌에게 일본은 신비로운 ‘체제’가 이끌고 있으며, “그 나름의 어떤 모호한 목표를 추구하는 데 정신이 팔린” 이해하기 힘든 하나의 수수께끼다. 일본의 체제는 “개인주의를 체계적으로 억압하고 있으며”, 일본인들은 ‘그리스인’들에게서 연원을 찾을 수 있는 서구적 논리나 형이상학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반화된 설명을 증명하는 ‘결정적인 요소’는 “(일본에는) 어떤 상황에서도 항상 적용될 수 있는 진리·규칙·원칙·도덕이 완전히 결여되어 있다는 점이다.”註4) 한국인도 일본에 대해 똑같은 생각을 할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반 볼페렌은 어떠한 동아시아의 정치체제도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다. “일본·한국·대만의 경험으로 보면 정치경제학에서 서구형과 공산주의형 이외에 제3의 범주가 존재할 수 있음이 드러난다.” 이 국가들은 “대체로 이제까지 공인된 바 없는 어떤 경제적, 사회-정치적 범주”를 대표하는 것이다.註5) 현재 미국에서 아주 흔히 볼 수 있는 이러한 담론에서 미국 시민사회의 질병과 병폐는 묘하게도 자취를 감춘다. 물론 동아시아 국가들이 미국 도시의 거의 모든 거리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사회적 병폐를 지녔다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또한 최근 대만에서의 선거는 미국의 선거보다 훨씬 높은 투표율과 활발한 참여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 모든 문제는 서구 시민사회의 이상화된 모습, 즉 동아시아의 제한적인 민주주의, 권위주의적 체제, 보편적인 반(反)자유주의 -- 싱가포르에서 마이클 페이(Michael Fay)를 태형에 처한 일이나, 더 뚜렷하게는 일본 통치체제의 지속적인 위기에서 흔히 예시되는바 -- 와 대조적으로, 지성을 갖춘 시민들이 보편적인 진리를 추구하고, 어떤 두려움이나 편파적인 호의 없이 중요한 정치문제나 훌륭한 삶에 대하여 토론할 수 있는 그러한 사회의 모습을 부각시키는 일에 밀려 잊혀지고 있다. 이제 미국에서의 시민사회 논의에 관해 좀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다. 보수주의자들은 미국 문제가 정부나 혹은 국민 자체에 있다고 생각한다. 복지제도, 복지수혜권리, 거대한 정부, 60여년에 걸친 ‘자유주의적 엘리뜨’들의 영향 등이 미국병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혹 그게 아니라면 국민들 자신이 덕성을 갖추지 못해서라는 것이다. 80년대에 보수주의자들은 미국경제 쇠퇴의 원인을 노동윤리의 붕괴에서 찾았고, 90년대에 전반적인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병폐가 존속되자 그 원인을 시민적 덕목의 부재에서 찾는다. 예를 들어 워싱턴에 있는 자유지상주의적 단체로서 종종 웬만한 두뇌집단보다 더 사려깊은 생각을 하는 카토연구소(The Cato Institute)는 출판물을 광고하는 1996년판 광고책자에 “시민사회의 진보에 기여하는 법”이라는 제목에다 표지에 토머스 제퍼슨의 흉상을 넣었다.註6) 그 책자의 첫부분은 이렇다.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우리는 관료주의적 제도로부터의 자유가 인간 본성과 일치할 뿐만 아니라 인류 진보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정부 기구들이 사회적 배치를 구성한다는 낡은 패러다임은 무너지고 있다. 이 연구소는 자신의 임무가 “제퍼슨식 철학”을 통한 “시민사회의 확대”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시장 자유주의”라고 부르는 것이 가장 적절하겠다.註7) 그것은 기업정신과 시장의 작용 및 낮은 조세를 중시하는 관점을 시민의 자유에 대한 엄격한 존중 및 복지국가나 대외 군사 개입의 이득에 대한 회의적 시각과 결합한 것이다. (이 마지막 항목은 카토연구소가 왜 워싱턴의 어떤 집단보다 더 야단스럽게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하는가를 설명해준다.) 카토식 자유지상주의(libertarianism)에 대한 자유주의(liberalism) 측의 대척점은 『티쿤 매거진』(Tikkun Magazine)의 ‘윤리와 의미를 위한 재단’(Foundation for Ethics and Meaning)으로, 이 재단은 지난 3월에 열린 워싱턴 ‘정상회담’의 후원자이기도 하다.註8) 이 ‘정상회담’은 “미국의 경제적·정신적·윤리적 위기에 대처할 진보적인 대안”을 만들어내는 데 이바지할 것이라고 한다. 이 정상회담의 성명서에 따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회정의가 구현되고, 연대와 상호존중과 윤리적·생태론적 의식을 장려하는 사회에서 살고 싶은 욕구를 가지고 있다.” 『티쿤』의 프로그램은 최근의 몇몇 정치이론 연구의 바탕이 된 시민사회 갱생에 대한 깊은 관심의 좀더 보편적인 표현이다. 하버드의 정치학자 로버트 퍼트넘은 최근의 저서 『민주주의의 운용』(Making Democracy Work)으로 그간 미국에서 좌파로는 『네이션』(Nation)에서 우파로는 『이코노미스트』(Economist)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정파에 걸쳐 골고루 찬사를 받아왔다.註9) 이것은 시민사회 일반론과, 각론으로는 이딸리아에 관한 연구로 이루어진 저서로서, 공공제도와 민주주의의 가능성에 대한 미국에 널리 퍼져 있는 절망의 논의로 시작하여, 북부 이딸리아의 모범적인 시민적 덕성과 그것이 남부 이딸리아에는 결여되어 있음을 거론하고, 다음과 같은 비관적인 어조로 끝을 맺는다. 시민적 계약의 규범과 네트워크가 없는 곳에서는 집단행동의 전망이 암울하게 나타난다. 메쪼지오르노(Mezzogiorno)의 운명은 자치를 향해 불안하게 나아가는 오늘날의 제3세계와 유라시아의 구공산권 국가들의 미래를 위한 타산지석이 될 것이다.註10) 퍼트넘은 아먼드(Almond)와 버바(Verba)의 『시민문화』(Civic Culture)를 되살리면서 그것이 토크빌(Toqueville)의 『미국의 민주주의』(Democracy in America)와 같은 맥락에서 “근대적 고전”이라고 말한다.註11) 퍼트넘 자신의 이론은 아먼드와 버바가 사용한 베버/파슨즈식(Weberian/Parsonian) 패턴의 변수들에 대폭 기대고 있으며, 단지 그것을 “시민 계약의 규범” “협동의 사회구조” 등등으로 다시 이름붙인 것이다. 마키아벨리(Machiavelli)는 한 시민집단의 성격은 그 “시민적 덕성”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고, 퍼트넘에 따르면 이 “공화주의 학파”야말로 잘 돌아가고 있는 시민사회와 민주주의 사회에 대하여 가장 잘 설명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는 시민적 계약, 정치적 평등 그리고 공동체를 위한 개인적 추구의 완화, “연대·신뢰·관용”, 시민적 혹은 2차적 집단의 네트워크 등에 의존한다. 실로 “시민사회성”의 가장 중요한 지표는 “단체생활의 활기”라는 것이다.註12) 자유주의적 공동체주의 입장이 가장 정교하게 드러난 것은 하버드의 정치이론가 마이클 쌘들의 신간이다.註13) 그는 미국의 가장 큰 걱정거리 두 가지를 제시하면서 논의를 시작한다. 하나는 우리가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힘들에 대한 제어력을 상실해가고 있다는 공포이다. 또다른 하나는 가정에서 이웃, 국가에 이르기까지 공동체의 도덕적인 짜임새가 주변에서 온통 흐트러지고 있다는 느낌이다. 쌘들은 이러한 문제들이 합쳐져서 “우리 시대의 불안을 규정하고 있다”고 말한다. 쌘들의 주장은 시민사회의 병폐가 개인의 권리를 일면적으로 강조하고(즉 자유지상주의) 그에 대응하여 공화주의 -- 즉 퍼트넘이 북부 이딸리아에서 발견했던 시민적 덕성 -- 라 불리는 미국적 자유주의의 또다른 형태가 몰락해가는 데서부터 생겨난다는 것이다. 첫번째 경향의 원조격인 이론가는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이며, 두번째 경향의 원조격인 이론가는 카토연구소가 선호하는 토머스 제퍼슨이다. 쌘들과 카토연구소 자유지상주의자의 핵심적인 차이는 미국 시민사회에 대해 우려한다는 점이 아니다. 그들은 둘다 미국사회가 시급한 치유를 필요로 한다는 데 동의한다. 차이점은 쌘들의 경우 시장에 우선권을 주지 않고 공동체적인 강제를 통해서 시장자본주의의 최악의 결과를 억제할 수 있는 자유주의를 과거로부터 살려내고자 한다는 것이다. 공화주의적 전망은 시민활동·자치·공동체의 ‘도덕적 결속’ 등의 매개적인 효과를 통해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데 중점을 둔다. 공화주의는 개인주의 대신 시민적 덕성을 내세우며, 개인권을 보장하는 절차적 정치체제 대신 덕망있는 시민들을 만들어낸다는 본질적인 목적을 실현할 그런 정부를 추구한다. 쌘들의 주장에 따르면 공화주의 전통은 그러므로 “우리의 피폐해진 시민생활에 대한 구제수단을 제공해주며”, 심지어는 “민주주의의 기반이 되는 시민생활을 치유한다.”註14) 쌘들은 미국의 공영역(public sphere)의 병폐에 대해 정곡을 찌르는 지적을 한다. 물론 도시지역 공립학교의 몰락을 비롯해 다른 낯익은 일련의 문제들을 가지고 있는 비교적 오래된 미국 도시들이 뚜렷한 예이다. 그러나 쌘들은 현재 대부분의 미국인이 (주로 도시에서 탈출하기 위해서) 거주하는 교외지역도 더이상 열린 공간, 외부인을 환영하는 공간이 아니라, 문을 달아 걸어잠근 닫혀진 ‘안전지대’라고 지적한다. 교외의 주거지역과 쇼핑 몰을 지키는 민간 보안 써비스가 널리 퍼져 있어서 이제는 그러한 안전요원의 수가 미국의 전체 경찰관 수보다 많다. 심지어 ‘진보의 시대’(the Progressive Era)에 처음 개발된, 아이들을 위한 공용운동장도 이제 시간당 4.95달러를 내고 들어가는 교외의 ‘유료’ 운동장에 자리를 내주고 있다.註15) 교외는 한때 공동체와 시민사회의 장이었으나, 오늘날 교외는 소위 도시생활의 ‘현대성’을 패러디하는 도시와 여전히 전원적인 덕성과 과거 ‘읍내 모임’식의 시민적 책임감에 대한 미국적 신화의 원천이 되는 조그만 마을 사이에 어정쩡하게 걸쳐진, 뒤로 물러나 고립된 아노미 상태의 장이다. 위르겐 하버마스는 공영역(O¨ffentlichkeit)에 관한 세계적인 이론가이며, 그의 저작에서 쌘들이나 퍼트넘과 같은 사람들의 관심사는 가장 높고 정련된 수준에 도달하게 된다. 하버마스는 반동주의자나 포스트모더니스트와는 반대편의 입장에 선다. 그의 사고는 전적으로 계몽의 기획, 인간 이성의 효용, 진보의 유효성과 풍성한 결과 그리고 (아직 실현되지 않은) 근대의 유토피아적 가능성 -- 요즘 세상에 그 가능성을 믿는 일이 아무리 힘들지 몰라도 -- 에 관한 믿음에 의해 형성되었다. 퍼트넘과는 달리, 그러나 쌘들과 비슷하게 하버마스 역시 무제한적인 개인주의에 관해서는 매우 비판적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의 모든 저작에 걸쳐서 “원동력이 되는 사고”란 다음과 같은 것과 연관된 것이다. 분열된 근대성의 화해 그리고 문화적·사회적·경제적 영역에서 근대성이 가능케 한 분화를 저버리지 않으면서도 자율성과 의존성이 비적대적인 관계로 접어들 수 있는 공생의 형식을 찾을 수 있다는 생각, 퇴행적인 형태의 공동체가 가지는 미심쩍은 성질을 떨쳐낸 어떤 전체 속에서 개인으로도 당당하게 걸을 수 있다는 생각.註16) 이러한 관심으로 인해 하버마스는 아주 자연스럽게 시민사회의 영역 -- 혹은 그가 공영역이라 불렀던 것, 미국의 한 이론가에 따르면 “민주주의를 규정하는 제도”의 문제로 옮아간다. 공영역이란 개인들이 참여하여 공동의 관심사에 관해서 강제나 의존(불평등) 없는 분위기에서 토론할 수 있는 장을 말한다.… 하버마스의 제도적인 관심은 목소리에 힘을 부여하고 민주주의적 장 내의 다른 집단적 판단수단들 -- 강제력·시장·전통 등 -- 을 무력하게 만드는 것에 집중된다.註17) 공영역은 결코 국회나 신문처럼 정치토론을 위해 공동으로 지정해놓은 장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또한 그것은 절차상의 민주주의 -- 특히 기본적인 인권과 정치적 자유를 보장하는 -- 와 집단간의 다원주의에 기초한 거대한 (이론적으로는 보편적인) 의사소통의 네트워크이다. 자율적인 공영역은 수많은 사회집단들이 스스로 조직되어 서로 도덕적·정치적 관계에 참가하여 평등주의적이고 개방적이며 강제되지 않는 토론을 낳을 때 형성되는 것이다.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은 서로 평등해야 한다. 그 영역은 완전히 개방되어 있어야 하며, 참가하는 데 아무런 장벽도 없어야 한다. 그 결과로 나온 토론은 그 자체로서 정치적인 동시에 도덕적인데, 이는 하버마스에 따르면 적어도 토론과 결정의 영역에서 사실과 가치, 혹은 정치와 도덕은 구분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버마스가 관심을 둔 ‘신사회집단’은 독일의 녹색당, 여성해방운동 조직들, 다문화적인 교육 혹은 80년대의 반핵운동 같은 환경론적이고 대안적인 정치세력들이다. 그러나 1994년 깅리치의 의회운동 같은 것은 좋은 예가 아닌데, 그것은 단지 이미 지배력을 가진 백인 남성 전문직 인사들의 저항운동이지 헤게모니를 바꾸려는 운동 혹은 해방적인 운동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버마스의 이상적인 공영역은 경제학자들이 말하는 시장, 즉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들어와서 자기의 이해관계와 수요-공급에 따라 어떤 강제나 규제 없이 거래하는 시장과 공통점이 많다. 어떠한 폭력이나 권력기관에 의한 개입은 필연적으로 민주주의 공영역에 필요한 협의 과정을 단락(短絡)시켜버린다. 비판 이 모든 텍스트들 -- 자유지상주의자들, 『티쿤』, 하버드의 이론가인 퍼트넘과 쌘들, 하버마스 학파 -- 의 가장 중요한 공통점은 시민사회에 대한 급진적이고 대안적인 건설 논의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컨대 우리는 레이먼드 윌리엄즈(Raymond Williams)로부터 쌘들이 말하는 공화주의의 전면적인 재건이 본질적으로 시골과 도시에 관한 시대착오적인 담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공업도시에 대한 제퍼슨의 경멸은 산업화 초기에 “집합의 과정 자체 가운데 사회적 해체”를 목도하고 다른 숱한 비평가들도 비난을 퍼부었던 바, 산업화와 동시에 새로이 구성된 질서와 통제할 길 없는 혼돈에 대한 저항인 것이다.註18) 그런데 지나가버린 농경사회의 질서에서 탄생한 시민사회의 개념에 호소하는 것은 우리 시대에 그것을 되살릴 수 없다는 것을 무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질서가 존재했을 당시에 엄존했던 불평등, 즉 농장과 촌락의 고립과 무지, 여성, 뜨내기 노동자들, 온갖 종류의 이단들에 대한 억압, 서부 개척에 희생된 엄청난 규모의 사람들 등을 무시하는 것이다. 윌리엄즈가 말하듯이 전원적 이상은, 그것이 20세기에 불가능하기에 바로 그만큼 진실되고 감동적인 것이다.註19) 쌘들의 시대착오는 시민사회와 민주주의에 대한 퍼트넘의 신(新) 토크빌적 논의와 맞아떨어진다. 설사 어떤 부유한 지역(수십억 달러의 관광 수익이 쏟아지는 베니스나 플로렌스 같은 항구도시)의 이딸리아인들이 참여자이자 시민운동가일지는 몰라도, 1840년대 미국인들이 자발적 결사(結社)에 가입하고 정치에 참여하고자 하는 경향을 보인 것에 대한 토크빌의 설명은, 수지타산을 맞추기 위해 두 개나 그 이상의 직업을 갖고 일하고 지친 몸으로 의자에 무너지듯 쓰러져 넋놓고 텔레비전이나 보다가 기나긴 노동일을 다시 시작할 수 있을 만큼의 잠을 자려고 애쓰는 ‘축소된’ 부부들에게는 거의 해당되지 않는 얘기이다. 이러한 최근 문헌에서 최소한 나에게 가장 거슬리는 측면은 시민사회와 공동체적인 민주주의를 으스대면서 서양과 동일시하는 것이다. 즉 이러한 것들이 서유럽에서 비롯되어 북미와 영연방으로 옮겨갔으며 다른 곳에는 거의 전파되지 않았다는 식이다. 서양이 아닌 사회는 시민사회나 공화주의적 민주주의에 적합한 배경이 도저히 못된다고 퍼트넘은 암시한다. 일찍이 미국의 자신감이 가장 드높았던 1963년에 나온 『시민문화』에서는 이러한 서구의 자만심이 직설적으로 드러났다. 이 책의 저자는 오직 미국과 영국에서만이 “안정된 민주적 절차를 지탱할 수 있는 정치적 태도의 패턴과 그 기저에 놓인 사회적 태도”를 찾아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들이 연구한 다른 국가들(서독·이딸리아·멕시코)에서는 “이러한 패턴이 덜 뚜렷하게 드러났다.”註20) 이보다는 좀더 생각이 깊다고 해야 할 하버마스 역시 그가 말하는 ‘공영역’과 그 궁극적인 이행뿐만 아니라, 그 현재적 문제틀이 비롯된 장소로서 서구를 우선적으로 꼽는다. 그는 ‘근대성’에 대한 그의 한 저서를 다음과 같이 끝맺고 있다. 그 전통과 통찰력과 에너지와 용기있는 비전을 가지고 … 체제유지와 체제확장의 맹목적인 충동의 전제들 … 이 우리의 심성을 형성하지 못하도록 그 힘을 박탈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이끌어낼 수 있는 존재가 유럽 말고 또 누구이겠는가?註21) 이것은 하버마스에 있어서 유독 노골적인 부분이긴 해도 결코 이례적인 강조는 아니다. 그의 모든 저작은 때로는 명백하고 때로는 숨겨져 있는 독일 역사에 관한 담론(내 생각에는 바로 이것이 그가 전후(戰後)의 서독에서 분명히 드러나는, 그러나 바로 전후 역사에서만 드러나기 때문에 그 지속력에서 일시적이고 불안정할지도 모르는 정치적 상호작용의 규범을 특권화하도록 만든 요인이다)과, ‘제3세계’의 비서구적 경험을 일종의 반(反)헤게모니적인 실천으로밖에 볼 줄 모르는 명백한 무관심과 더불어, “현대의 서구가 -- 그 모든 문제에도 불구하고 -- 합리성과 민주주의의 가치를 “가장 잘 구현하고 있다는 주장”으로 가득차 있다.註22) 그러므로 그는 그가 소중히 여기는 선구자 막스 베버(Max Weber)와 똑같은 편견을 가지고 있으면서도(하버마스는 무엇보다도 베버주의자이다), 베버의 열정적이고 지적인 비교론적 기획은 갖고 있지 못하다. 또한 베버라면 분명히 자신의 국지주의(provincialism)를 인정했을 그러한 시대에 와서도 그는 여전히 “오직 서구만이……”라는 식의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헤겔의 저작과 그에 대한 맑스의 비판을 통해서 국가와 시민사회에 대한 서구의 고전적인 논의로 돌아가보면, 우리는 동아시아의 형세가 서구의 어떤 특정한 경험과 아주 밀접한 유사성을 지니며, 따라서 결코 아시아 고유의(sui generis)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이제까지 시민사회에 관한 앵글로색슨의 담론을 살펴보았고, 심지어 독일인인 하버마스도 이와 일치하는지 살펴보았다. 이제 19세기 중반 유럽 대륙의 담론을 살펴보자. 근대의 첫번째 대의제(代議制) 국가는 또한 19세기에 주도권을 행사하던 국가 즉 영국이었다. 산업에서 영국의 1차적 경쟁상대였던 독일은, 맑스에 의하면 자유주의 국가의 헛되고 희미한 반영 같은 것밖에는 만들어내지 못했다. 그리하여 실제로 독일은 미약한 시민사회의 이면이라 할 수 있는 강력한 국가 즉 ‘혼합된 국가’(fused state)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이론의 차원에서 독일은 앵글로색슨 지배에 대한 우아하고 숭고한 대체물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 시대의 어떤 영국 사상가보다 뛰어난 헤겔이었다. 맑스는 헤겔이 대의제 국가의 모범적 이론가라고 보면서, 곧이어 그에게 평가의 잣대를 들이댔다. 헤겔의 작업이 아무리 뛰어나도 그것은 단지 진보한 경제대국들에 대한 독일의 위상을 재현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독일의 현상태는 구체제의 노골적인 절정기이며 그 구체제는 근대국가의 숨겨진 결함이다. 독일의 정치적 현재와의 투쟁은 근대 민족국가들의 과거와의 투쟁이다. … 현재 독일의 체제는 … 시대착오이며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공리에 파렴치하게도 위배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독일에서는 프랑스와 영국이 막 마무리지으려고 하는 그 지점에서 시작해야 한다. … 이는 근대적 문제들의 독일적 형태의 좋은 예이며, 이제까지 우리의 역사가 마치 풋나기 신병처럼 다른 나라의 과거에 속하는 낡아빠진 관례를 답습하는 데에 얼마나 갇혀 있었던가를 보여주는 예인 것이다. 헤겔의 경우 그는 그에 대응하는 아무 실체도 없는 그런 관념성을 공급해주었다. 우리 독일인들은 관념 속에서, 철학 속에서 우리의 미래 역사를 살아왔다. 우리는 철학적으로는 현재와 동시대인이지만, 역사적으로는 동시대인이 아니다. … 선진국에서는 근대의 정치상황에 대한 실천적인 싸움인 것이, 그러한 상황이 아직 존재하지 않는 독일에서는 그것이 철학에 반영된 상태에 대한 비판적인 싸움이 된다. 여기서 나는 천재성에서 나온 것이며 따로 강조할 필요도 없는 그런 예지를 보여주는 맑스의 가장 중요한 진술을 빠뜨렸다. 즉, 영국과 프랑스에서 “그것은 해결의 문제이지만, 여기서는(독일에서는) 단지 충돌의 문제”라는 말이다.註23) 왜 충돌인가? 온실 속에서 자라난 중산계급은 예컨대 기나긴 ‘실제’ 역사의 흐름 속에서 형성된 계급인 프로이쎈의 융커 같은 반동적인 적들에 대해 피어린 투쟁을 치르지 않고서는 결코 헤게모니를 장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독일은 근대 세계의 ‘문명화된 결함’과 구체제의 ‘야만적인 결함’을 함께 가지고 있었다. 어떻게 그런 나라가 단숨에 “그 자신의 한계뿐 아니라 근대국가의 한계까지” 극복할 수 있겠는가?註24) 역사의 대답은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맑스와 헤겔은 둘다 독일이 처한 곤경에 대해 더이상 그럴 수 없을 만큼 명시적으로 말했다. 맑스에게 있어서 독일의 곤경은 독일이 “근대국가들과 같은 시기에 정치적 해방의 여러 중간 단계를 거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註25) 헤겔은 물론 낙관론자였으므로, 독일의 무기력을 극복하는 것이 바로 국가의 임무였다. 중산계급을 육성하는 것이 국가의 일차적 관심사이다. 그러나 이는 국가가 유기적 통일체일 때에만 이루어질 수 있다.… 즉 상대적으로 독립성이 있는 특정한 이해관계 영역들에 권위를 부여하고, 그러한 권위있는 기구들에 의해 개인적인 자의성이 상쇄되는 일군의 관리들을 지명함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이다.註26) 이것은 ‘후발’ 국가형성의 이론이며, ‘후발’ 민주주의의 이론이다. 헤겔이 독일의 국내정세를 이념형의 희박한 공기 가운데서 그려내고 문제를 관료들에게 떠맡겨버린 반면, 맑스는 세계체제의 시공간 속에서 독일 국내정세를 자리매김하고 그 과업이 절망적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므로 독일의 ‘국가학’(Staatswissenschaft)에서 혼합된 국가의 개념은 프랑스혁명의 후유증을 겪던 와중의 정세적 불안과 정치 현실의 특정한 어떤 지점에서 탄생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그 혁명의 무질서를 보고 그것을 ‘민중의 의지’에 관한 새로운 생각과 연결시키고, “자, 이게 무슨 쓸모가 있는가?”라고 결론을 내리는 일은 순식간에 이루어진다. 좀더 적나라하게 표현하자면 “산업화를 위한 경쟁에서 시민사회가 무슨 가치가 있는가?”라는 것이다. 독일인들은 산업화시대의 여명에서 자유·평등·박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19세기 중반의 제2산업혁명의 문제들과 더 중요하게는 영국을 따라잡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혼합된 국가’라는 것을 만들어냈다. 혼합된 국가란 시민사회를 포괄할 뿐 아니라 시민사회를 건설하려는 -- 물론 이것이 산업화에 방해가 된다면 하지 않는 --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이는 앵글로색슨의 초기 산업화론자들이 민중의 의지, 민주적인 대의제, 공적인 것 대(對) 사적인 것, 혹은 국가 대 시민사회 등의 거창한 문제에 골몰하던 고민을 머나먼 미래로 연기시키는 후발국가의 정치이론인 것이다. 20세기에 활동한 안또니오 그람시는 시민사회가 단지 토론과 논쟁과 정치활동의 영역(즉, 지식인의 영역)만이 아니라 국가를 이루는 지배집단들과 그 사회 내의 정상적이고 상식적인 일상생활의 일과(日課) 사이의 거대한 공간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시민사회의 개념을 확장했다. 국가와 사회가 만나는 것이 바로 이 공간 안에서이며 그 만남의 결과는 확정되지 않은 상태이다. 그 만남의 결과는 하나는 모두를 위하고 모두는 하나를 위하는 유기적 통일체일 수도 있고, 어쩔 수 없이 모인, 자기 이익만을 위하는 개개인 사이의 날카로운 균열일 수도 있다. 시민사회가 적법성을 갖추기 위해서 혹은 그나마 효율적으로 움직이기 위해서는, 지배적인 집단의 목표들이 개개인의 일상적인 현실에 맞게 번안되어야 하며, 그래서 시민적·정치적 행위가 습관화되어 더이상 의식적인 성찰의 문제가 되지 말아야 한다. 헤게모니에 대한 그람시의 유명한 정의는 바로 이러한 논리에서 나온다. 시민사회는 어머니의 젖이나 우리가 숨쉬는 공기의 비유들을 통해서 그 주요한 관념들을 가르치는 유기체이다. 그것은 더이상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에토스(ethos)이다. 이러한 헤게모니의 매개가 없다면, 국가가 강압적인 지배 형태로 시민사회 위에 군림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국가와 시민사회는 기묘한 제로-썸(zero-sum)의 관계에 있다. 시민사회가 그 본연의 기능을 못하면 못할수록 이러한 결함을 치유하기 위해서 국가의 세력은 커진다. 지식인들은 자의식적인 시민사회의 일차적인 담당자이며, 그러므로 근대적인 시민사회 개념의 발달과 함께 지식인들이 18세기 프랑스의 쌀롱을 채워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람시에 따르면 현대사회는 지식인들이 자신의 보호받은 영역을 포기하고(이는 암묵적으로 다른 사람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기본적인 자유를 국가가 보장해주는 데에 기초하고 있다) 스스로를 민중의 유기적 일부로 만들어감으로써 건전해질 수 있다. 이것이 그람시에게는 유일하게 받아들일 만한 ‘혼합된 국가’인 것이다.註27) 맑스로부터 우리는 시민사회가 초기 산업화론자들이 만들어낸 것이며, 발육부진의 혼합된 국가는 후발 산업화의 산물로 잃어버린 시간을 벌충하고 잃어버린 역사 진화를 대치하려는 정치적 실체임을 알게 되었다. 그람시는 진화되지 못한 시민사회를 국가가 대치하게 된다는 역사적 경험을 이해했지만, 시민사회가 지식인의 기득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공동 소유가 될 때만이 현대사회가 건전해진다고 주장했다. 앵글로색슨적인 시민사회 담론에 대한 우파 혹은 가톨릭 전통에서의 비판은 얼래스데어 매킨타이어의 영향력있는 저서 『미덕을 찾아서』(After Virtue)와 로베르토 웅거의 『지식과 정치』(Knowledge and Politics)에서 찾아볼 수 있다. 매킨타이어는 미국이 공영역에서 도덕의 문제를 결정내릴 수 없다는 사실에서 논의를 시작한다. 도덕적·정치적 논란은 많지만 해결되는 법이 없다는 것이다. 그 논란들은 끝날 줄을 모른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도덕적 합의를 확보할 합리적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註28) 예를 들면 낙태에 관한 토론에서 ‘생명의 권리’ 대(對) ‘선택의 권리’의 대립은 그러한 수많은 해결 불가능한 문제들의 일부일 뿐이다. 매킨타이어와 웅거는 이러한 문제의 기원을 앵글로색슨의 실증주의와 사실과 가치의 분리, 객관적 지식과 규범적 선호의 분리에서 찾는다. 하버마스는 시민사회에서 기능적인 관계와 간주관적(intersubjective) 관계의 구분을 확립(주로 관료주의의 기술적인 합리성과, 진정한 정치적 공동체의 피아(彼我) 관계의 대조로 드러난다)하는 한편, 매킨타이어는 가치와 사실의 분리가 미국 시민사회에서 도구적인 관계 이외에 아무것도 남지 않게 만들어버렸다고 주장한다. 너는 너 나름의 도덕적·정치적 선호가 있고, 나는 나대로 내가 선호하는 것이 있는데, 가치들 가운데서 선택을 할 때 이성은 침묵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의견이 맞지 않는다는 데 의견을 같이할 수밖에 없으며, 실질적인 목적에는 관여하지 않는 절차에 의한 정치를 만들어내야 한다. 이 정치는 상반되는 도덕적·정치적 입장 사이를 중개해준다. 매킨타이어는 이렇듯 “생긴 그대로의 인간”에만 관심이 있는 절차의 체제와 “인간이 그 본성을 실현한다면 다다르게 될 어떤 상태의 인간”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적 개념을 대비한다. 누군가가 어떤 일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동시에 어떤 류의 행동이 … 인간의 진정한 목적으로 이끌며 또한 법이 무엇을 … 명하는가를 말하는 것이다.註29) 매킨타이어에게 있어서 정치란 인간이 인간의 진정한, 본질적인 성질을 실현하는 영역을 말한다. 문제는 “내가 어떤 종류의 인간이 될 것인가?”이다. 자유주의자들은 이러한 질문을 피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무엇이 인류에게 있어서 선(善)을 구성하는가 하는 질문 앞에서 이성은 침묵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그 대신 자유주의자는 “우리가 어떤 규칙을 따라야 하는가”, 어떤 절차가 우리로 하여금 상반되는 권리주장 사이에서 대체로 정의(正義)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하는가라고 묻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어떤 종류의 인간인가 하는 물음에서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매일매일 우리는 우리의 실천 가운데에서, 우리가 영위하는 삶을 통해서 이 물음에 대답하고 있다. 그러므로 매킨타이어는 어떤 시민사회라도 그 전제는 반드시 “덕의 실행과 선의 성취”여야 한다고 주장한다.註30) 자유주의와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입장의 이러한 대조를 통해 매킨타이어와 웅거는 미국에서의 시민사회의 가능성에 대해 다음과 같은 신랄한 결론에 도달한다. 우리는 간주관적인 정치적 공동체(하버마스의 이상)를 이룰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공동체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할 뿐 아니라, 이미 그러한 문제를 제기하지 않기로 동의했기 때문이다. 웅거는 이렇게 표현한다. 자유주의 정치이론은 공동체적인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 공동체적인 가치의 존재를 인정하기 위해서는 개개인보다는 집단을 사회생활의 인식가능한 일차적 단위로 받아들이는, 사회생활의 기본적 상황에 대한 시각에서 출발하는 일이 필요하다.註31) 매킨타이어의 주장대로 “현대의 자유주의적 정치사회는 방어라는 공동의 목적을 위해 모여 있는,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시민들의 집합으로만 보인다.”註32) 쌘들의 공동체주의적인 생각은 바로 우리가 정치적 참여를 통해서 자신을 실현해야만 하며, 또한 이러한 실천을 통해서 시민적 덕성을 획득한다는 것이다. 그는 집단이나 공동체적인 삶이 어떻게 개인주의를 초월한 어떤 것이 될 수 있는가 혹은 되어야 하는가에 대해 자유주의적인 전망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는 우리에게 왜 우리가 그런 일을 해야 하는지 말해주지 못하며, 이 공동체가 추구해야 할 목적이나 목표에 대한 개념도 전혀 갖고 있지 않다. 이는 결정적인 한계인데, 왜냐하면 “정의의 개념에 대한 실천적인 동의가 없는 공동체는 또한 정치적인 공동체의 필수적인 기초가 없는 공동체이기 때문이다.”註33) 매킨타이어는 나아가 시민공동체가 단일하고 지배적인 덕성의 개념에 의해 규정되지는 않는다고 주장한다. 사람들이 그들의 일상적 실천 속에서 인간 공동체의 실질적인 목적에 대한 자신의 개념들을 진지하게 주장한다면, 불가피하게 갈등이 생겨나게 된다. 그러한 갈등을 해결할 수 없는 규범적 문제라고 덮어버리는 대신 시민사회는 ‘갈등의 장’이 되어야만 한다. 우리가 “우리의 목적과 목표가 무엇인지 알게 되는 것”은 “갈등을 통해서이며 때로는 오직 갈등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註34) 그러나 한 공동체가 도덕적인 혹은 실제적인 목적에 도달하는 방식으로 무엇을 선택하든, 공동체는 반드시 그것을 실현해야만 하며, 그렇지 않으면 단지 일관성 없는 개개인들의 집단으로 떨어질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어떤 사회에서든 정부가 시민들의 도덕적인 공동체를 표현하거나 대표하지 못하고 진정한 도덕적 합의가 없는 사회에 관료화된 통일성을 부과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일군의 제도적인 장치에 불과한 곳에서는, 정치적 의무의 본질이 구조적으로 불분명하게 된다.註35) 이러한 통찰로부터 우리는 미국인들이 투표를 하는 간단한 일부터 사람들 사이의 도덕적 유대이기도 한 정치적 공동체를 형성하는 좀더 중요한 임무에 이르기까지, 스스로에게 아무런 의무가 없다고 가정하게 되는 경향을 이해할 수 있다. 가톨릭 우파로부터 우리는 자유주의가 스스로 타고난 권리로 앞세우는 그 시민사회를 바로 자유주의 자체의 본래적인 전제 때문에 만들어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매킨타이어와 웅거는 시민공동체가 개인과 개인의 자유를 넘어서는 가치여야 한다는 쌘들의 주장에는 의견을 같이했지만, 그러한 공동체는 그 공동체의 실질적인 목적 -- 다름 아닌 그 공동체가 지닌 선의 개념을 실현하는 인간을 만들어내는 것인 -- 에 대한 합의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우리가 ‘젊은 하버마스’라고 부를 수 있는 어떤 사람이 이미 이 모든 것을 생각해냈음이 드러난다. 1961년 저서인 『공영역의 구조적 변형』(The Structural Transformation of the Public Sphere)은 18세기에 제한적이나마 활기찬 시민사회였던 자유주의(혹은 부르조아의) 공영역이 어떻게 관료주의화되었고 그러면서도 어떻게 소외된 공적 공간이 시민적 덕성에 관한 프랑스 철학의 이상의 깃발 아래 여전히 행진하게 되었는가에 관한 뛰어난 분석이다.註36) 여기서 우리는 하버마스가 본질적으로는 그람시가 말했던 것처럼 시민사회가 국가와 일반 대중 사이에 존재한다고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8세기에 발달한 시민사회는 신문, 잡지, 쌀롱, 커피 하우스 등이 널리 퍼지면서 자유주의자들이 그래야 마땅하다고 항상 주장하는 그러한 이상적인 정치 공간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19세기 말이 되면서 그것은 오늘날과 같은 모습, 즉 “대중들은 그 진행에서 배제한 채로 그들끼리 혹은 정부 관리들과 협상하고 타협하는”註37) 여러가지 이해관계들 간의 경쟁의 장이 되었다. 자유주의적인 공영역은 그렇게 하여 역사의 특정한 시기로 제한되고 말았고, 시민사회 자체의 역사적 발전과 동의어라고 할 수 없게 되었다. 하버마스는 오히려 헤겔이 “시민사회내의 공영역이라는 관념에서 이(齒)를 빼버렸다”는 주장에서 맑스와 견해가 같다. 헤겔에 대한 맑스의 신랄한 비평은 “공영역의 관념이 기대고 있던 모든 허구들을 때려부수었”고, 하버마스에 의하면 그 공영역은 “모든 사람이 접근할 수 있다는 그 자신의 원칙에 위배되는” 영역이었다. 그것이 독일의 ‘때늦은’ 발전 때문이든, 영국의 도시들로 수많은 노동자가 몰려든 때문이든, “공영역에 대한 부르조아의 자기 해석은 상식적인 개량주의를 택하며 그 역사철학적 형식을 포기했다.”註38) 달리 말하면 부르조아 공영역도 있지만 또한 정치적 무대에 대중들이 등장함 -- 예를 들어 로베스삐에르(Robespierre)와 그의 추종자들 같은 -- 을 보여주는 새로운 “서민(庶民) 공영역”도 있는 것이다. 하버마스는 그러나 차티스트운동(the Chartist Movement)은 공영역의 새롭게 변화된 상황에서 나온 특수한 대의명분이었고, 이는 바로 그 때가 조직된 노동세력이 처음으로 산업현장에서 분출된 순간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후의 부정과 회피는 노동자·여성·(미국)흑인 들의 선거권 요구라는 형태를 띤 ‘길거리의 압력’에 대한 존 스튜어트 밀의 반응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그는 무엇보다도 금전과 성(性)과 피부색에 의한 귀족정치에 항거하는 모든 종류의 운동에 단연코 호의적이었다. 밀의 주장에 의하면 그들은 모두 선거권을 가져야 마땅했다. 그러나 이 소란스럽고 갖가지 의견을 가진, 새로이 물밀듯 밀려오는 공영역 역시 밀에게는 시민사회의 특징이어야 할 공개적이고 비폭력적인 성격을 위반하는 새로운 종류의 ‘강제력’으로 비쳐졌고, 그래서 그는 ‘여론의 굴레’와 새로운 다수가 빚어낼 위험이 있는 ‘순응에의 강압’에 대해 개탄하기 시작했다. 또 토크빌이 이러한 점을 표현한 것을 살펴보면 (밀과 완전히 같은 의견인데) 다음과 같다. 민주사회에서 여론은 이상한 힘이다.… 그것은 그 신념을 펴나가기 위해 설득을 하기보다는, 개개인의 지성에 모두의 생각이라는 강력한 정신적 압박을 가하여 자신의 생각을 강요한다. 이제 밀은 민중의 권익을 옹호하는 호민관에게 현존하는 권력에 참여하거나 그것을 비판하라고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관용 -- 대개 이제는 그 층이 얄팍해진 지식인 즉 자유주의적 공영역의 엘리뜨들의 관용을 호소했다. 토크빌은 억제와 균형을 이용해서 정치적 공영역을 분할하고 권력을 분리하며, 지도자와 피지도자들을 매개하는 자발적 결사(結社)들을 장려한 미국 건국자들의 천재성을 이해하게 되었다.註39) 이렇듯 은밀한 부정과 회피, 이렇듯 밀과 토크빌에 의해서 역사적으로 형성된 ‘그렇다’와 뒤이은 ‘아니다’는 벤틀리, 다알, 아먼드와 버바, 퍼트남을 거쳐 70년대 미국의 “민주주의의 소란”에 대한 헌팅턴의 분노에 찬 비판에 이르기까지 직접적으로 이어진다. 그중 어떤 사람들은 공영역에서의 민주주의를 지지한 사람도 있었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 하버마스는 자유주의 공영역의 해체에 대한 자신의 설명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맑스는 재산이 없고 교육받지 못한 대중들의 전망을 공유했다.… 그들은 헌정국가에서 제도화된 공영역의 발판을 이용하되 그것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자유주의자들이 항상 그렇다고 주장해온 그 어떤 것으로 만들고자 했다. 그러나 현실에서 공영역을 무산대중이 점령한 것은 국가와 사회를 서로 맞물리게 만들었고, 이는 공영역에 새로운 기초를 부여하지 않은 채로 이전의 기초를 제거해버렸다.註40) 한국에서의 민주주의와 그 불만 세력들 우리가 이와 비교하여 한국의 시민사회와 민주주의로 관심을 돌리면, 우선 눈에 띄는 것은 반세기에 걸친 민주주의 출현의 기나긴 과정이 정확히 매킨타이어가 말하는 ‘갈등의 장’에 위치한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민주주의 투쟁은 일본이 항복한 1945년 8월 그날부터 시작되어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註41) 1940년대의 민중세력은 민주주의와 사회정의, 즉 일본제국주의의 영향을 씻어낼 청산혁명을 동시에 원했다. 북한에서는 청산작업은 있었으나 민주주의가 없었고, 남한에서는 청산도 미약하고 민주주의도 미약했으며, 엄청나게 파괴적인 내전을 겪은 후에는 완전히 갈라져 분해된 나라만이 남았다. 약간의 좌익 성향이 사형까지는 아니더라도 곧장 징역을 의미했던(진보주의자 조봉암은 별다른 이유도 없이 1958년에 처형되었다) 이승만 정권(1948~60) 시기의 억압적인 정치상황 속에서도 지식인층을 위한 공간은 열려 있었고, 그래서 학생·교수·지식인들은 비록 제1공화국의 지도자는 이제 끝나가는 참이었고 미국은 그의 하야를 원하던 시기에서나마, 제1공화국 전복의 선구자가 될 수 있었다. 미온적인 야당은 취약한 내각제를 통해서 제2공화국을 조직했고, 1년 동안(1960년 4월부터 61년 5월까지) 자유주의적 모형을 따른 시민단체들이 급속도로 생겨났다. 이때 남한은 인구비율로 볼 때 대학생 수가 영국보다 많았고, 인구당 신문 독자의 수가 거의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많았으며, 마치 빠리처럼 행정·상업·산업·교육의 에너지가 하나의 커다란 수도에 집중되어 있었다.註42) 매우 활기찬 쌀롱의 모임들이 수도 서울에 생기를 불어넣었고(서두에 말한 다방들), 출판사에서는 완전히 다시 쓴 한국 근현대사를 펴냈으며, 학생들은 북한과의 통일에 있어서 선구자가 되겠다는 생각을 시작하고 있었다. 박정희 장군은 헤겔적 개념의 혼합된 국가가 한국에 실현되도록 한 동인이었다. 그는 1961년의 꾸데따와 3년간의 비상임시정부를 통해 시민사회를 폐쇄하고 국가를 고전적인 유형의 ‘후발’ 산업화의 발기인이자 안내자이자 재정가의 위치에 놓았다. 케네디 정부가 이끄는 미국의 강력한 압력 때문에 박정권은 즉각적인 중공업 위주의 산업화 계획을 포기하고, 군복에서 민간인 옷으로 갈아입은 후 선거에 나섰고(1963년), ‘수출주도형 발전’과 내가 1967년에 와서 처음으로 만났던 미약하게나마 논쟁적인 공영역을 만들어냈다. 닉슨 행정부는 괌 독트린과 1971년 8월에 나온 닉슨의 신중상주의적인 ‘신경제정책’(New Economic Policy)을 통해서 한국의 자율적 영역을 확대했고, 그에 힘입어 박정권은 1971~72년에 워싱턴으로부터 불평 한마디 듣지 않은 채 시민사회를 폐쇄할 수 있었다.註43) 나는 바로 그해 서울에 있었으며, 1971년 10월의 ‘위수령’에서 1972년 가을의 유신체제와 계엄령에 이르는 그 광범위하고 잔혹한 정치의 압살에 대한 지울 수 없는 기억을 갖고 있다. 그 길고 피비린내 나는 이야기를 간단히 줄이자면, 우리는 박정희가 한국의 공영역이 가진 잠재력과 원숙해가는 추세를 오판했다고 말할 수 있다. 한국의 공영역은 경제력에 비하면 그 이상으로 발달한 상태였지만, 점점 확대되어가는 유신국가의 편재(偏在)하는 기관들에 비하면 그다지 발달되어 있지는 못했다. 유신국가의 속성은 거대한 행정적 관료제, 거대하게 확장된 군사력, 광범위한 경찰력, 잠재적인 저항세력이 있을 법한 모든 곳에 요원을 깔아놓은 중앙정보부, 강압에 밀려 진행되는 산업화의 미명하에 모든 대안적인 정치이념을 이데올로기적으로 덮어버리는 것이었다. (오늘날 1970년의 한국을 방문하고 싶으면, 중국에 가면 똑같은 현상을 볼 수 있다.)註44) 그리하여 박정권의 혼합된 국가는 시민사회의 끊임없는 위기를 조성했으며, 결국 이 위기는 1979년 10월의 부마사태로 절정을 이루어 그 며칠 뒤 박정희는 자신이 임명한 중앙정보부장에게 살해되고, 이는 다시 그 해 12월 전두환과 노태우가 주도한 ‘꾸데따적 사건’과 1980년 5월의 광주라는 대단원으로 이어졌다. 1980년에서 1987년 사이의 시기는 운수 나쁜 ‘조카’(전두환)가 처치된 ‘아저씨’(박정희)를 대변하여 내내 감옥과 채찍을 사용했지만 결국은 (나뽈레옹까지는 아니더라도 실로 한국의 비스마르크였던) 박정희의 비극을 소극(笑劇)으로 만들어버린 고전적인 브뤼메르적 시기로 기록될 것이다.註45) 물론 진짜 비극은 광주에서 일어났다. 광주에서는 각성되고 스스로 조직된 간주관적인 시민층(즉 일군의 폭도나 무뢰한이 아닌)이 전두환이 발표한 계엄령 체제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려 필사적으로 애쓰다가 무참히 학살당하였다. 시민사회는 1985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다시 깨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87년 6월에는 중산계급이 뒤늦게나마 상당 규모로 합류하면서 다시 한번 각성되고 스스로 조직된 간주관적 시민층이 주요 도시의 거리를 차지하여 결국 전두환을 물러나게 했다. 몇 개월 후 늘 미온적인 야당은 다시 분열되었고, 또다른, 조금 더 영악한 ‘조카’(노태우)가 통치하는 잠정적인 체제의 출현을 허용하고 말았다. 그 체제는 처음에는 이제 강력한 노동세력(1987년에서 88년 사이에 한국 역사상, 아니 어떤 나라의 역사에서도 유례없이 많은 파업과 노조활동이 있었다)까지 포함하는 새로이 활력을 얻은 시민사회를 수용하려 하다가, 나중에는 억압했다. 1990년 노태우 정권은 민주주의의 압력에 대해 일본식의 해결책을 만들어내려고 했다. ‘민자당’(일본 자민당을 거꾸로 쓴 것이다)은 김영삼 및 부산을 근거로 한 그의 정치조직으로 나타나는 야당 온건파를 포괄하여 그들을 1961년 이래 대한민국을 지배해온 대구-경북(TK) 엘리뜨의 휘하에 넣어주면서 앞으로 오래도록 -- 최소한 다음 세대까지 -- 통치할 단일 정당의 민주주의제를 형성하고자 했다. 일군의 분석가들은 (그중 물론 서울의 미대사관측도 있다) 엘리뜨 집단 내의 강경파와 온건파 간의 ‘협정’ -- 이는 1980년대 라틴아메리카의 민주주의적 이행을 흉내낸 것 같았다註46) -- 을 나서서 찬미했다. 이는 활기에 넘쳐 성장하고 있는 시민사회가 제기하는 문제들에 대한 슘페터식의 해결이었다. 오스트리아의 귀족이던 슘페터는 대중민주주의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는 고전적인 엘리뜨주의자였다. 그는 정기적인 선거를 통해서 엘리뜨들을 순환시키고, 은행과 국가가 중개하여 사업을 지속할 수 있는 충분한 기금을 제공하고, 사업체들은 정치가들을 만족시킬 만큼 충분한 현금을 제공하고, 또한 정치가들은 대중들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가끔 써커스를 여는, 그 이상은 아닌 그런 한도의 민주주의 제도를 가치있게 생각했다. 일본 자민당은 1955~92년 기간 동안 이러한 모델을 철저히 따랐고, 1993년에 권력을 (일시적으로?) 잃은 것을 보면 어쩌면 너무 철저히 따른 모양이다. 민자당도 같은 패턴을 따랐다(물론 아무도 민자당이 그러한 써커스를 제공할 것이라고 상상하지는 않았지만). 오늘날 민자당은 사라지고 TK 그룹의 민정계열과 김영삼 계열로 이루어진 신한국당만이 남았다. 민자당식의 해결책은 오래 지속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일본의 체제와 달리 민자당 체제는 노동세력을 배제했고(현재까지도 한국의 거대한 노동자계급에 뿌리를 둔 정당은 없다), 전후 한국사의 해결되지 않은 위기(특히 광주 문제)들을 청산하는 데 실패했으며, 정치적 엘리뜨 내부의 날카로운 분열을 단지 가려놓는 데 불과했고 -- 특히 호남지역의 대표들을 서울과 국가 전체의 정치 무대에서 배제했고, 뿐만 아니라 진지한 좌익의 기미가 보이는 어떤 것도 (국가보안법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억압했으며 강력한 국가 규제를 계속 실시함으로써 재벌그룹을 초조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註47) 1995년에는 일련의 활동과 사건이 겹치면서 분명 당시에는 예상하지도 못했을 결과를 낳게 되었다. 1961년부터 한국사회를 지배해오던 군부독재자와 그 유산들에 대한 대담한 공격이 진행되고 있는데 이러한 청산과정은 지난 10여년간 우리가 전세계에서 보아온 그 어떤 권위주의로부터의 이행도 뛰어넘는 그러한 성과다. 이는 (종종 미국 정치학자들의 강요에 의해서) 새로운 정권이 지난 일을 그냥 과거지사로 덮어두거나 군부를 다시 막사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 고작이던 라틴아메리카의 사례를 뛰어넘는 것이며, 또한 조야한 약식재판으로 차우세스쿠를 처형했지만 그가 구축한 체제의 많은 부분은 건드리지 못한 루마니아의 경우도 뛰어넘는 것이며, 호네커가 투옥되었지만 서로 다른 두 시민사회가 공론을 형성하며 합쳐지기보다는 서독이 구동독의 체제를 흡수해버린 동독의 사례도 뛰어넘는 것이다. 대부분의 논평들은 지난 몇년간 김영삼 대통령의 정책과 활동에 집중되어 있다.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그가 한결같이 진정한 개혁가였으며 이제는 현대 남한 역사의 잘못을 바로잡기를 원한다고 주장하고, 그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그가 집권당 내부에서 TK그룹의 영향력을 누르는 데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에 전두환과 노태우를 뇌물수수로 기소하는 것을 허용했으며 ‘비자금’ 스캔들이 자신에게도 너무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에 지난 11월에는 두 사람을 1979년 12월의 꾸데따로 기소하는 것을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내 생각에 좀더 중요한 것은 막 교육을 받고 성년이 되었을 당시의 시민사회의 투쟁에 의해 형성되었고 이제 ‘법의 규율’에 의해 그들의 적이었던 독재자들을 영리하게 추적하는 신세대 검사들의 출현이다. 전-노씨는 이제 재판중이며 결말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확신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몇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첫째, 앞서 말한 이유들로 말미암아 어떠한 ‘자민당식’ 해결도 소용이 없었고, 따라서 우리는 다시 전후 한국사에서 늘 그러했던 것처럼 지역 당기구와 후원자-고객의 유대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특출한 정치지도자들(소위 ‘3김’)을 중심으로 모인 정당체제로 되돌아왔다는 것이다. 둘째, 통치 연합에서 노동자가 배제되고 있으며, 국가보안법 하에서 어떠한 비폭력적인 좌익도 지속적으로 억압받고 있다는 점 때문에 대한민국은 여전히 일본이나 미국 식의 민주주의와 시민사회의 모델에 못 미치고 있다. 셋째, 비자금 파문에 관한 전면적인 언론보도(특히 국가와 재벌그룹을 매우 비판적으로 조명하면서)와 아울러 집권세력 일부의 이탈과 전-노씨의 재판은 시민사회에 대한 또다른 주장으로 가는, 또한 아마도 한국에 오래 전부터 있었어야 마땅한 우호적이며 간주관적인 공영역을 가져다주는 민주주의로 가는, 라틴아메리카나 구소련·동유럽·필리핀註48) 등에서 볼 수 있는 불안정하고 일시적이며 엉성하게 만들어진 취약한 민주주의로의 이행을 뛰어넘는 정치로 가는 길을 열어주고 있다. 어쨌건 남한은 현재 미국 초창기의 외국인 및 선동 금지법(Alien and Sedition Act)의 위기와 비슷한 위기를 맞고 있으며, 이 위기가 어떻게 판가름날 것인가에 따라 앞으로 오랫동안 한국 민주주의의 미래가 결정될 것이다.註49) 우리는 최근의 한국 역사에 대한 이 간략한 검토에서 저항운동이 한국의 민주주의에 기여한 바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그것은 “투쟁 속에서 만들어진 … 사회에 대한 새로운 전망이 지니는 문명화의 힘”註50) 을 보여주는 고전적인 사례이다. 서유럽과 미국에서 비중있는 학생운동은 1960년대에 등장하여 약 5년간 전성기를 누렸다. 한국의 학생들은 1940년대 후반부터 해방정국에 있어서, 또한 이승만 정권의 전복과 1960~61년의 장면 정권에서,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 반대에서, 1971~88년간 박정희와 전두환 정권에 대한 저항에서 중심적인 운동세력이었다. 특히 1980년대에 민중 이념과 그 실천을 매개로 하여 한국의 학생과 노동자, 청년 들은 특이하고 독창적이며 자율적인 정치적·사회적 저항운동을 공적인 공간으로 가져왔으며,註51) 그것은 미국의 패권과 군부독재의 구조를 여러 차례 기저에서부터 위협했다. 이것은 하버마스가 특징지은 바 “시위와 시민적 불복종, 토론과 축제, 명시적인 자기표현 사이”의 경계선을 무너뜨리는 학생저항운동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고전적인 사례였다.註52) 설혹 한국 공영역의 그 부분이 현재는 전에 비해 잠잠한 편이라 해도, 그것은 1980년대에 한국 민주주의에 지울 수 없는 공헌을 했다. 또 하나 결론적으로 언급해야만 하겠다. 동아시아인들은 인권과 시민권에 대해서 ‘우리’와는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으며, 질서와 심지어는 권위주의적인 방향을 높이 평가하며, 계몽주의와 시민사회를 배제한 채 산업화했으며, “유교문화”가 동아시아인들을 이렇게 만들었고, 앞으로도 항상 그럴 것이다, 운운하는 헌팅턴/리콴유(李光耀)/반 볼페렌 식의 관념은 이제 그만 접어두어야 한다.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미국과 한국의 민주주의에 관한 이 비교론적 탐구에서 나는 미국 정치의 제한된 다원주의가 지난 200여년 간 진행된 근대의 기획 자체의 압력 아래서 시민사회가 제대로 발달되지 못한 결과이며, 정치생활에 있어서 ‘두려움이나 편파적인 감정 없이’ 참여하는 문제에 이르면 평균적인 미국인은 고사하고 저 자주 거론되는 ‘1960년대의 학생들’이라도 한국에서 지난 반세기 동안 민주적 권리를 위해 투쟁했던 대다수 사람들의 발치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모든 것에 선행하는 문제를 아직 제대로 거론하지 않았다. 과연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아담 셰보르스키(Adam Przeworski)에 의하면 민주주의란 집권당 이외의 정당이 선거에서 이길 수 있을 경우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한다.註53) 슘페터 역시 정당 엘리뜨들을 순환시키는 이러한 형식을 선호했다. 미국의 제일가는 민주주의 이론가 로버트 다알도 이러한 견해와 의견을 달리하지는 않을 것이다. 슘페터에 비해서 그는 민주주의를 위한 핵심적인 전제조건으로 정치적 평등을 더 강조하긴 하지만, 다원주의적 민주주의에 대한 그들의 기본적인 도식은 매우 비슷하다. “슘페터-다알의 축은 … 민주주의를 하나의 메카니즘으로, 즉 사회를 통치할 권력을 추구하는 둘 이상의 엘리뜨그룹 사이의 평형을 유지하는 일을 본질적인 기능으로 하는 메카니즘으로 간주한다.”註54) 우리가 쓰는 용어로 하면 이는 단지 절차상의 민주주의에 불과한 것이며, 시민적 덕성을 함양하는 일보다는 시민사회를 제한하는 일에 더 관심을 둔다. 다알의 설명 또한 민주주의란 서구에서 볼 수 있는 것이지 다른 곳에서는 대개 찾아볼 수 없으며,註55) 민주주의는 절차상의 정의에 의해 수동적으로 만족되는 어떤 것이라는 암묵적인 관념에 깊이 침윤되어 있다. 그러면서도 다알은 대부분의 “민주주의로의 이행”을 논하는 문헌들을 만들어내는 정치학자들에 의해 이용되는 주요 이론가이다. 이와 매우 다른 견해를 내세우는 사람은 미찌오 모리시마(Michio Morishima)이다. 최근에 그는 전후 일본이 특혜받은 상층부와 나머지 사람들 사이의 간극으로 인해 (다른 선진 공업사회와 마찬가지로) 전형적으로 비민주적이지만, 이와 동시에 개개인을 동등하게 대우하고 ‘우리 대(對) 저들’이라는 관념이 거의 없도록 하는(즉 계급간의 갈등이 거의 없는) ‘관료적 민주주의’의 덕택으로 서구의 민주주의 국가보다 더 민주적이라고 주장한다. 특히 미국에 비해 비교적 부의 불평등한 분배가 적고 전반적으로 평등한 일본의 상황은 일본이 하버마스적 공영역의 중요한 요구사항의 하나, 즉 사람들이 처음부터 공평하게 공영역에 진입해야 한다는 요건을 만족시키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일본식 모델은 자유시장류의 발전과 서구식 민주주의 양쪽에 대한 도전이 된다.註56) 한국 또한 미국보다 부가 상대적으로 평등하게 분배되어 있고, 내 의견으로는 일본보다 훨씬 더 발달된 시민사회를 지니고 있는 게 아닌가 한다. 그러므로 노동자세력과 좌익까지 체제 내에 포함할 수 있게 되면 한국사회는 미국보다 더욱 민주적인 사회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어도 그것은 아직 우리가 요구하는 민주주의는 아닐 것이다. 또 하나의 특이한 시각은 최근의 뛰어난 저서 『자본주의적 발전과 민주주의』(Capitalist Development and Democracy)註57) 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저자들은 경제적 발전과 다원주의적 민주주의가 적극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씨머 마틴 리프싯(Seymour Martin Lipset)의 유명한 판단에 동의하는 것으로 논의를 시작한다. 그러나 이들은 이 상호관계에 대해 전혀 다른 설명을 제시한다. 즉 발전의 정치적 결과는 다음 네 가지 요소와 연관된다는 것이다. ① 농업 이행의 패턴, ② 산업화를 통한 부수적 계층의 권한획득(중간계급은 물론 특히 노동계급까지도), ③ 국가구조의 유형, ④ 국가간의 권력구조(민주화에 대한 모든 다른 논의에서는 배제된 요소이다). 헤겔이나 맑스와 마찬가지로 저자들 역시 ‘타이밍’, 특히 어떤 ‘후발’국가에서 특정한 농촌적 사회관계, 산업화 패턴, 국가의 역할, 세계체제 내에서의 다양한 위치 등이 상당기간 잔존하는 현상에 대한 감각을 갖추고 있다. 이 책의 저자들에 따르면 자본주의적 발전은 성장의 부산물로 낡은 구조를 무너뜨리며 새로운 구조를 만들어내면서 계급구조를 바꾸기 때문에 민주주의와 연관된다. 그러나 새로운 중산계급은 그들이 민주적으로 대변될 수 있는 지점까지는 싸우지만 그 이상은 싸우지 않는다. 그런 후에 그들은 노동계급의 대표 진출을 억제하려고 한다(달리 말하면 밀이나 토크빌처럼).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남한사회에 노동계급의 대표가 내내 없었던 것과, 일본에 있는 두 ‘노동’당 -- 사회당과 공산당 -- 의 무능함에 대한 적절한 설명을 찾을 수 있다. 미국에서는 1932년부터 1980년대까지 민주당이 노사간 연합체의 기능을 해왔으나, 현재 워싱턴에서 권력을 잡고 있는 ‘신민주당’ 사람들은 그들이 중산계급의 이익에, 그리고 종래의 민주당 연합체가 낳는 지속적인 손실(그래서 페로나 뷰캐넌같이 불만에 찬 노동계급을 동원하려고 하는 대항적인 후보가 나오는 것이다)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이러한 미국의 경험은 중산계급 역시 노동계급의 대표 진출을 저지하려고 한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국제적인 요소에 관해서 저자들은 강대국의 지정학적 및 기타 다른 이해관계들이 억압적인 국가들에 대한 직접 개입과 지지를 낳을 것이라고 적절하게 지적한다. 예를 들어 전쟁 전 일본의 권위주의는 부분적으로 세계경제의 몰락과 미국·영국으로부터의 경제적 압력의 산물이었다(물론 미국이나 영국이 일본의 억압적인 국가기구를 지지한 것은 아니지만). 일본의 전후 민주주의는 미국이 지배하는 안보체제 안에 ‘둥지를 틀고’ 있었다. 미국의 동아시아 안보정책 덕분에 일본은 ‘발전적’일 수 있었으며, 세계 속에서 군사적·정치적 힘을 박탈당한 채 ‘경제 동물’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도 미국측 전략의 명백하고도 의식적인 결과였다. 우리는 또한 1980년대 말까지 남한과 대만을 지배한 (그리고 거의 항상 미국의 지원을 받았던) 권위주의적 체제를 통해 동북아시아에서 일본 중심의 경제적·안보적 영역이 ‘완성’되었음을 볼 수 있다. 어쨌거나 아마도 민주주의 이론가들이 민주주의의 외부적 원천과 민주주의로 가는 길을 막는 외부로부터의 장애물 들에 대해 거의 생각지 않는 경우는 미국뿐인 것 같다. 민주주의에 관한 맥퍼슨의 저작은 실질적인 정의라는 개념으로 가득차 있고, 따라서 맑스, 그람시, 초기의 하버마스, 매킨타이어와 웅거의 비판을 결합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맥퍼슨에 따르면 민주주의란 완전히 실현된 인간, 즉 무엇을 만들어내는 존재로서의 인간 개념에 권위를 부여하는 체제이다. 진정으로 민주주의적인 체제란 모든 사람의 다양한 인간적 능력을 적극적으로 개발해주어야만 한다. 둘째로, 우리 모두가 살고 있는 불평등한 분배의 세계에서 민주주의란 ‘억압받는 자의 외침’과 무관할 수가 없다. 민주주의란 인간의 불평등, 특히 경제적 불평등을 제거하는 수단이며 그렇게 되어야 한다. 이 두 가지가 없다면 정치적 평등이란 대체로 의미가 없는 것이다.註58) 1996년의 동아시아는 그 이전보다 훨씬 민주화되었다. 그러나 소위 민주정치의 가장 좋은 예라고 할 일본도 우리의 민주주의 모델이 될 수는 없다. 대만·한국·필리핀의 새로운 민주주의 체제도 마찬가지이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미국의 다원주의 체제도 민주주의자들이 지향하는 모델이 될 수는 없다. 시민사회란 무엇인가?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그것은 이런 것들을 넘어서는 것, 자민당의 일본이나, 민자당의 한국 혹은 미국의 체제를 넘어서는 것이어야만 한다. 인간의 온전한 발전을 소수가 아니라 다수에게 가능케 만드는 일이 바로 맥퍼슨이 우리에게 권하는 일이다. 〔成恩愛 옮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