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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dolp (달밝때춤)
날 짜 (Date): 1996년10월16일(수) 11시11분38초 KST
제 목(Title): [From comeng]이순신의 죽음은 자살~~(2)


글쓴이:    janjaki (장자기자가자가) on 'DuksungW'
글제목:    이순신의 죽음은 자살이었다(2편)
날짜  :    Tue Oct 15 12:49:27 1996


너무 내용이 길고 이 글을 쓰신 김용범 교수님의 양해를 사전에 구하지 못한탓에

242번에 올린 글은 전체 내용중 일부였었습니다.

오늘 아침 교수님께 허락을 받고 글의 전문을 모두 올립니다.

앞에 올린 부분은 이순신의 자살설에 관련된 내용이었고 이제부터 올리는 글은

위장자살설 및 전체 결론입니다.


1958년 11월 19일,
           그 역사의 수수께끼, 그리고‥‥ 
                                            김용범(사학과 교수)

                                   -  Ⅱ  -

이순신의 자살설과 함께 대두되는 것이 위장 자살설이다.
즉 일부의 논자들에 의해 제기되는 이순신의 생존설 혹은 전사 위장설이다. 이
것은 어떠한 이유에서 나온 의문인가?
첫째는 이순신이 자신의 최후의 전투에서 그의 맏아들과 조카를 동행시켰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순신은 적탄에 맞아 죽으면서 그의 조카에게 "내가 죽었다는 
말은 내지 마라"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의 죽음은 비밀에 부쳐진 채 그의 조카
가-그것도 20세에 불과한-대신 북채를 잡고 전쟁이 끝날때까지 독전을 하였으
며, 그의 시신은 그의 아들이 아무도 모르게 지켰다는 것이다. 마치 그의 조카
와 아들이 이순신의 죽음을 사전에 알고 각자의 역할을 맡기 위해 승선한 듯하
다. 정말로 그는 아들·조카와 함께 최후의 일전을 맞이하기 위해 그들을 동승
시킨 것일까. 아니면 다른 까닭이 있어 승선시킨 것인가? 이순신이 아들 하나
를 왜군에게 잃고 매우 통곡을 하며 애달파 한지가 바로 얼마전 일이다. 그런
데 또다른 아들 하나를 죽음이 아른거리는 전쟁의 선두에 태워 적진속으로 돌
진할 수 있을까? 이순신이 만용을 부릴 위인이 결코 아니라고 볼 때 이것은 정
말 의문이다.
아울러 문제가 되는 것은 이순신의 죽음을 목격한 사람들에 관한 기록이 모두
가 다르다는 점이다. 하나는 가장 일반적인 것으로 그의 아들과 조카뿐이라는 
것이고, 두번째는 손문욱이라는 장교가 이순신의 아들을 제지하고 이순신의 시
신을 뒷처리하였다는 것이고, 셋째는 이순신의 북채를 받아 쥔 사람이 그의 ㅈ
카가 아니고 군관 송희립이라고 하는 등 기록마다 제각각이다. 비록 싸움이 한
창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이미 갑판 위에는 수많은 병사
들이 있었는데 대장군의 죽음을 오직 그의 아들과 조카만이, 혹은 한두 사람만
이 목격했다는 것이 얼마만큼 타당성이 있는 것일까? 그리고 등장하는 인물들의 
한자(漢字)가 책마다 다르게 되어있는 것은 왜일까? 이러한 의문에 대하여 
이순신이 실제는 죽지 않았는데 억지로 전사처리하다 보니 들쭉날쭉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순신이 약간의 상처를 입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죽을 정도는 
아니었는데 당시의 정쟁과 모함에 자기의 운명을 미리 알고 최후의 전쟁에서 
죽음을 가장하고 숨기위해 고의로 전사설을 흘렸다는 것이다. 그 비밀스런 역할을 
맡기기 위해 아들과 조카를 동승시켰다는 것이다. 실제 이순신의 빈소에 나아가 
많은 사람들이 조문을 ㅎ으나 그 시신만큼은 그의 아들 외에는 아무도 보지 못했다 
하니 궁금증을 주기에는 족하다. 특히 이순신이 최후에 남긴 "내가 죽었다는 말은 
내지 마라"라는 말은 이미 준비된 연극대사 같이 들리고, 그의 죽음이 그 배안에 
탄 사람들에게도 비밀에 부쳐졌다는 것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둘째는 앞에서 잠깐 언급되었던 면주의 문제이다. 유성룡의 증언대로 이순신이 
'평시에도 절대로 갑옷을 벗는 일이 없었다'라는 말이 사실이라면, 그가 전투를 
선두에서 지휘하면서 갑옷을 벗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다. 그것은 당시의 
혹독한 날씨와 연계해서도 물론이다. 그래서 당시의 기록에 이순신은 왜군의 
유탄을 가슴에 맞고 그 유탄이 등을 관통하였다고 하는데, 전문가들에 의하면 
당시의 왜군이 사용한 조총의 탄알은 납으로 되어 있어 그 유탄이 철갑으로 된 
갑옷을 뚫고 들어와서 다시 가슴까지 관통할 수는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두가
지 가설만 성립한다. 즉 앞에서 얘기한 대로 갑옷을 입지 않았다면 그것은 틀
림없는 자살책이고, 갑옷을 입었다면 그의 죽음상의 유탄기록은 틀린다는 점이
다.
셋째는 이순신의 묘지문제이다. 이순신이 남해에서 죽은 날이 1598년 11월 
19일이었으며 그의 고향인 충남 아산으로 시신을 옮긴 것은 12월이 되어서이다. 
그런데 장례를 치른 날은 다음해 2월 1일이므로 죽은 후 무려 80일이 경과한 
것이며, 그로부터 다시 15년후에 산소를 600m떨어진 곳으로 이장을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상례(喪禮)는 당시의 예법과 맞지 않는다. 또 장례를 치루지 않은 이순신의 
빈소에 악취를 무릅쓰고 조석으로 상식을 올렸다고 했는데, 이러한 기록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이러한 요인들 때문에 이순신이 죽었다는 것은 꾸며낸 말에 
불과하고, 실제는 이순신은 살아 있었으며 그가 마땅한 정착지를 찾는 기간이 
길어져 어쩔수 없이 그렇게 된 것이라는 것이다. 또 이장의 문제인데, 일이 있으면 
이장을 하는 것이 우리네의 풍습이라고 해도 80일이라는 충분한 날을 두고 
택지하였을 산소를 15년 뒤에 다시, 그것도 얼마 떨어지지도 않은 그 옆으로 
이장한 진짜 이유가 무엇인가이다. 그것에 대하여 처음의 묘는 허묘에 불과하고, 
은거하던 이순신이 15년 후에 죽자 이장의 방식을 빌어 그때 진짜 장례를 치른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것을 밑받침해주는 중요한 근거로, 덕수 이씨의 
족보를 든다. 즉 산소의 이장문제는 족보상의 기록에서 매우 중요한 일인데, 
어찌된 일인지 덕수 이씨의 족보상에 이순신의 묘지 이장 사실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로 말미암아 이순신의 전사로 죽음을 위장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  Ⅲ  -

제갈공명은 한적한 시골에서 밭을 갈며 학업에 매진하던 중 유비의 삼고초려에 
의해 세상에 나오면서 그의 원대한 천하삼분의 계획을 펼치게 된다. 유비는 공
명을 만나 촉을 세워 3국시대의 한 축을 이루는데는 성공했으나 천하통일의 대
업을 완수하지 못하고 세상을 뜨고 만다. 임종의 자리에서 유비는 눈물을 흘리
며 공명의 손을 잡고 "내 자식을 나를 대하듯 도와주시오. 그러나 보필해 주다
가 도저히 재능이 없다고 판단되거든 그대가 그 자리를 차지하시오"라는 유언
을 남긴다. 유비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아들인 유선의 무능함과 공명의 뛰어난 
능력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불안과 기대가 동시에 복합되어 이렇게 
유언을 한 것이다. 즉 비록 그의 아들이 용렬하나 공명의 보필만 있다면 촉나
라를 유지해 나갈 수 있다고 믿는 반면에 공명의 야망과 그 재능으로 말미암아 
여차하면 자신의 아들이 위험할 수 있음을 직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소설이 아
닌 실제 역사인물로서의 공명은 야심이 있는 자로서 유선의 자리를 찬탈할 가능성이 
다분히 있었다. 유비의 말을 듣는 순간 공명의 등줄기에서 식은 땀이 쏟아졌다는 
기록이 이를 말해주는 것이다. 때문에 유비는 미리 공명의 마음을 붙들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역설적으로 말하였던 것이다. 죽어가면서 자신의 아들을 죽여도 
좋다는 말에 어느 누가 그것을 실행할 수 있으랴! 이것이 공명에게는 유비에 대한 
한없는 감동과 은혜, 그리고 자신에 대한 자책감으로 평생을 누르게 된다. 공명이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유비의 시신을 붙들고 그렇게 오랫동안 통곡을 
하였던 까닭이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이제 공명은 자신의 삶을 던져 유비에게 보은하는 길만 남게 되었다. 그 구체
적인 방법은 무엇인가? 유비가 못다이룬 천하통일의 대업을 완수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공명은 촉의 힘으로는 결코 위를 정복할 수 없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그는 전쟁터로 나갔다. 그것은 전쟁에 승리하기 위해서가 아
닌 죽음으로써 유비에 대한 은혜에 보답하면서, 찬위하려 한 간교한 신하가 아
닌 영원한 충신으로 남고자 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유비의 유언은 어쩌면 
역사의 혹평을 받을 수도 있는 공명으로 하여금 영원한 감동의 충신으로 자리
매김해준 명언이 된 셈이다. 공명의 출사표를 읽으면 그것은 단순히 전쟁을 떠
나는 장수의 심사를 표출한 것이 아니라 죽음을 앞둔 비장하고도 통절한 내용
임을 절절이 느낄 수 있다. 그의 출사표가 지금까지 만인의 가슴을 울리게 하
는 명문으로 남아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공명은 전략가요, 역사가요, 뛰어난 통찰력을 가진 정치가이다. 이와 같은 명철한 
그였기에 진정한 역사의 승자는 당대의 승패를 초월하며, 또 어떻게 하는 것이 
영원한 위인(偉人)으로 남는가에 대해 능히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출사표를 
던지며 중원을 정복하러 출전하였던 것이고 결국은 전쟁의 숙영지인 오장원에서 
54세의 길지 않은 생을 마감하였던 것이다. 삼국지를 읽는 사람은 누구나 그의 
죽음장면에서 비감어린 애통함과 슬픔을 억제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그가 전장에서 
최후를 맞음으로써 비록 천하통일의 꿈을 이루지는 못하였지만 나라와 시대를 
초월하여 불후의 명장, 만인의 표상으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공명이 마지막으로 위를 공격하러 나갈 때는 주위에서 한결같이 만류할 정도로 
건강이 나빴었고, 출전해서는 이미 죽기 며칠전부터 음식을 거의 끊은 상태였
다. 당연히 그는 철수하고 귀환했어야 한다. 그러나 그는 끝내 전장에서 죽음을 
맞았던 것이다. 그렇게 된 것은 그가 싸움터에서 스스로 죽기를 작정했기 때문
이다. 그것은 공명의 상대장군인 위의 사마중달의 다음과 같은 말로도 입중된
다. 즉 사마중달은 공명의 건강상태에 관한 정보를 접하고서는 "아니 공명이 
제정신인가? 그렇게 건강이 나쁜데 식사를 하지 않고 어떻게 살기를 바란단 말
이냐. 공명은 반드시 죽는다. 우리는 그때까지 싸움을 하지 않고 오로지 기다리
기만 하면 된다."라고 했던 것이다. 왜 공명은 전쟁터에서 죽기로 한 것인가? 
그것은 역사에 남는 죽음을 택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의 뜻대로 오장원에서 
그가 죽자 촉에서는 물론이고 위와 오에서 조차도 그를 충신의 사표로 받들었
다. 공명은 그렇게 죽음으로써 더욱 천하의 명성을 얻었던 것이다. 죽는 것만 
보아도 공명은 역시 공명이었던 것이다. 공명이 만약 필부의 삶처럼 목숨의 부
지에만 연연하였다면 그는 결코 지금과 같은 인물로 승화되지는 못하였을 것이
다. 불세출의 영웅으로서 영예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이렇게 죽는 방식과 죽
는 장소가 극적이었기 때문이다. 

                                   -  Ⅳ  -

이순신의 죽음문제를 새삼스럽게 거론한 것은 그것이 우리나라의 역사상에 중
요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고정관념과 선입견을 깨보자는 취지에서이다. 그리고 
역사에 관한 전문가들의 글이 언제나 딱딱하고 난해하지가 않다는 것을 말해주
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역사라는 것이 언뜻 자고 있는 듯 보이지
만 의미를 부여하기에 따라서는 언제라도 우리 앞에서 부활할 수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해서다. 또 역사해석에는 풍부한 상상력과 창의력과 함께 논리가 얼마
나 중요한 것인가를 일깨워주고 싶어서였다. 아울러 역사는 특정인들의 전유물
이 아닌 모든 일반대중이 함께 할 수 있는 재미있고 흥미가 있으며 삶의 지혜
를 실질적으로 얻을 수 있는 분야임을 실증해 주기 위해서였다.
이순신의 죽음이 과연 자살이었느냐? 아니면 전사 위장이냐? 아니면 지금까지 
일반인들이 알고 있는대로 단순 전사냐? 하는 문제는 각자가 판단할 문제에 속
한다. 다만 이순신이 죽기 전에 자주 공명에 대해 언급하였고, 이순신의 신도비
를 쓴 영의정 김육도 "이순신의 죽음은 제갈공명과 같다"라고 하는데서 공명의 
죽음과 연계하여 상당한 시사성을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이순신과 제갈공명의 
죽음이 다같이 스스로 선택한 것이라 하여도 거기에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그것은 또한 우리역사의 부끄러운 단면이기도 하다.
공명은 정치적 역학관계가 내재되지 않은, 평생을 두고 한으로 남을 수 밖에 
없는 유비의 유언에 따른 자책감과 역사를 통한 자신의 판단에 의거하여 죽음
을 택했다고 간주된다. 그는 그렇게 죽음으로써 현실에서는 실패한 인물이었디
만 오히려 충절이 빛나는 영원한 인물이 되었던 것이다. 그가 만일 끝내 살아
서 천하를 통일했다면 그에게 쏟아지는 한결같은 애정과 찬사는 분명 존재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실제 삼국통일을 이룩한 당시의 위대한 인물들을 지금에서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음이 잘 말해주고 있다. 공명의 드라마틱한 죽음이 
천하통일을 달성한 인물들을 도리어 공명의 그림자에 완전히 가려버리게 하였
던 것이다. 어떻게 보면 실패한 인물이 성공한 인물을 이긴 셈이 된다. 이것이 
역사의 묘미이기도 하다.
공명과는 다르게 이순신의 죽음이 자살설과 전사 위장설이 제기되는 것은 
불행하게도 당시의 정국과 관련해서이다. 끝없는 파쟁과 숙청, 계속되는 시기와 
모함 속에서 이순신의 자신의 운명을 예감하고 죽음을 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당시의 정치현실이 그를 죽음으로 몰아갔던 것이다. 그래서 
이순신이, 우리 역사가 슬픈 것이다. 조선시대만 하여도 남이, 정철, 윤선도, 
조광조, 정약용 등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의 인물들의 유배와 옥사가 
반복되었다. 물론 이러한 인재들의 기나긴 유배와 은둔생활로 말미암아 도리어 
지방에 문화를 전파하여 우리의 독특한 유배문화를 꽃피우게 하였고, 그 기간에 
그들이 저술활동에 매진하면서 우리 문화를 한층 더 끌어올렸음도 사실이다. 이런 
것들은 어느 면에서 보면 문화의 폭을 넓히는 역사의 아이러니가 되기도 하였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 역사의 불행을 나타내주는 상징이기도 하다. 우리의 
문화가 한(限)의 문화요, 우리의 역사가 한의 역사가 된 측면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아무튼 이순신은 노량해전에서, 살지않고 죽음으로써 그에 대한 모든 
의심과 질시·모함은 사리지고 진정한 영웅으로서 우리의 역사에 영원히 산자로서 
남을 수 있었다.
이순신의 죽음을 통해서 역사를 읽는 방법과 함께 지나간 우리역사를 다시 한
번 음미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전문은 252번인가에 있으므로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이 글에 대한 질문이 있으신분은 사학과 김용범 교수님을 찾아가시던지
제게 메일을 보내주시면 제가 교수님께 여쭈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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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원하게 바람을 맞았다면 나와함께 춤을춰...      \
되는일이 없다고 투덜투덜 대지말고 춤을 춰...       \
                                                     \
근데 왜 난 신바람이 안나지? 바람맞아서인감??           \
  에이~~ 장자기 자가자가!! 장자기 자가자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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