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dolp (달밝때춤) 날 짜 (Date): 1996년10월11일(금) 22시25분42초 KDT 제 목(Title): [From comeng]이순신의 전사는 자살이었다. 글쓴이: janjaki (장자기자가자가) on 'DuksungW' 글제목: 이순신의 전사는 자살이었다... 날짜 : Thu Oct 10 16:50:55 1996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실수도 모르고 계실수도 있겠기에... 다음의 글은 충남대학교 교지인 '보운'에 실렸던 글입니다. 1958년 11월 19일, 그 역사의 수수께끼, 그리고‥‥ 김용범(사학과 교수) 충무공 이순신의 죽음은 단순한 전사가 아니고, 실제는 자신이 스스로 취한 죽 음-의도적으로 적의 공격을 받아 죽는 방식의 자살-이라는 설이 있다. 이것은 후대에 새롭게 제기된 문제가 아니고 이미 이순신이 죽은 당시부터 있었던 얘 기이다. 왜 그와 같은 의문이 제기되는 걸까? 그것은 다음과 같은 정황때문이 다. 첫째, 전쟁일 지휘하는 총사령관이 어이없게도 배의 맨 앞 갑판에서 적탄에 직 접 맞아 전사했다는 점이다. 적의 소총에 직접 맞아 군사령관이 사망했다는 것 은 형편없이 무능한 장군이 아니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는 세계 전사 (珽史)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희귀한 일이다. 그런데 이순신이 누구인가? 누가 보아도 이길 수 없는 거의 절망적 상황하에서도 고도의 심리전과 지형지물 등, 자연조건을 기가막히게 활용하여 단 한번의 패전도 하지 않은 뛰어난 전술·전 략가가 아닌가. 그의 뛰어난 용병술은 세계 해전사에서도 일찌기 볼 수 없던 훌륭한 것으로, 일본의 해군에서조차 그를, 불세출의 영웅 나폴레옹을 격파한 영국의 넬슨 제독과 비견하고 있다. 그런 그가 마지막 전쟁에서, 그것도 엄청난 승이를 거둔 전쟁에서 선두로 배를 적진속으로 몰고가 맨 앞에 서서-마치 나를 빨리 쏘란 듯이 우뚝 서서-지휘를 하다가 우연히 적탄에 직접 맞았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이다. 둘째, 「갑옷을 벗고 싸웠다」는 면주(巫胄)의 문제이다. 그가 지휘한 마지막 전쟁인 노량해전은 살을 에일 듯한 동짓달의 새벽바람이 몰아치던 때였는데(노량해전은 1598년 11월 18일부터 다음날 19일 새벽까지 진행되었다), 어째서 그날만은 그가 구태여 갑옷을 벗었는가가 의문이다. 더군다나 최고의 사령관이 친히 북채를 잡고 맨몸으로 배의 맨 앞머리에 서서 선발로 적진속으로 돌진한 것은 아무리 달리 해석을 해보아도 그것은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는 행위로 밖에는 이해되지 않는 것이다. 더우기 이미 전날 밤의 싸움에서 적의 전함을 태반이나 격침시켜 승리는 눈 앞에 와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그가 그날 새벽에 한 행위는 참으로 무모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이순신의 정치적 후원자였던 당시의 영의정 유성룡의 「징비록」에는 "이순신 은 낮에는 물론이고 한밤에도 반드시 경계를 소홀히 하지 않았으며 평시에도 절대로 갑옷을 벗는 일이 없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그러 한 그가 전투를 선두에서 지휘하면서 갑옷을 벗었으리라고는 상상할 수가 없 다. 날씨가 매우 추웠다는 사실은 차치한다 하더라도 사령관이 사병들 앞에서 군장을 풀고 전투를 지휘한다는 것은 민간인 복장으로 지휘하는 것과 똑같은 데, 언제나 원칙을 고수하며 빈틈없는 방식으로 전쟁을 지휘하는 그가 즉흥적 으로 그렇게 했을까? 그의 이같은 행위는 분명 평소와는 다른 것임에 틀립없 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행위는 이미 마음속으로 죽기를 각오한 것으로 밖에 볼 수 없는 것이다. 그것 외에는 달리 어떻게 해석할 방법이 없다. 셋째는 난중일기를 비롯한 임난 중의 그의 어록과 그가 마지막 전쟁을 앞두고 그 전날 밤에 수행한 의식 때문이다. 그는 마지막 전쟁을 앞둔 전날 밤에 「이 원수를 멸한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라고 다짐을 하였다. 단순히 일기장에만 그렇게 쓴 것이 아니라 '향을 피우고 하늘에 맹세하는"의식을 병향하였는데, 이 것은 승리에 대한 필사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어딘지 죽음을 앞 둔 비장의 행위로 비쳐진다. 이순신은 결국 다음날 새벽에 전사함으로써 이 말 은 한결 더 여운을 남겨준다. 더우기 이 노량해전은 왜군이 마지막으로 철수하는 상황에서 치러진 전쟁으로서 이순신이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하지 않아도 되는 전쟁이었다. 왜냐하면 이번 전쟁은 도망가는 왜군을 몇명 더 죽이는 전과를 올리는 것 외에는 국면을 전환시킨다든지 하는 중요한 의의가 있는 정쟁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굳이 그가 죽음을 불사하며 맹서하는 의식도 어색하고 실제로 도 그렇게 죽음을 내던지면서 싸워야 했겠느냐이다. 다시 말해 그는 싸우지 않아도 되는 전쟁에서, 또 지휘부에 앉아서 지휘를 해도 이미 절반의 승리가 담보된 전쟁을 앞두고 죽음의 맹서, 즉 유서를 쓴 셈이 되는 것이다. 물론 최후까지 승리를 쟁취하려는 자세를 갖는 것이 당연한 것이긴 해도, 그렇다고 승리가 예고된 전쟁종식의 마지막 전투에서 스스로 목숨을 내던지면서까지 전쟁을 해야만 했을까? 그것으 그가 스스로 죽기를 작정을 한 다음에나 가능한 것이다. 넷째는 당시의 정치상황과 관련해서이다. 불행하게도 조선시대는 당쟁과 시기 의 음해, 비방과 모략이 판을 치는 시대였다. 다소의 차는 있을지 모르나 이것 을 완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시대는 그 어느 시대 보다도 인재의 수난시대였다. 투옥, 유배, 처형, 옥사가 거의 끊이지 않았으며, 그로 인해 은둔하는 선비가 유독 많던 시대이기도 하였다. 때문에 조선시대 내 내 정치와 군사방면에서 대부분의 인재들은 하나같이 정쟁(政爭)에 휩쓸려 비 운의 생으로 마감을 하여, 이 시대는 사심없고 능력있는 자들이 국민의 신망을 받으며 설만한 공간이 없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한 나쁜 정치행태는 임난 중이 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임진왜란 중에 의병장으로 이름을 날린 김덕령 장 군의 전기(傳記)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의병을 일으킨 김덕령 장군이 끝내 무고를 당하여 체포되어 생사의 갈림길에 서게 되었을 때 여러 장수들이 그를 옹호하기는 커녕(능력이 있는데다 공이 높기 때문에) 그를 커리고 질투하였던 바이고, 또한 권세있는 사람들이 조정안에서 그같은 상황을 더욱 조장하여 마침내는 죽음을 면치 못하고 말았다.‥‥장군이 죽은 이후부터는 임난에서 공을 세운 여러 장수들이 모두 자신의 처치에 회의를 품었고, 또 상당수가 제 몸을 보전하지 못하였던 바 곽재우는 드디어 군사를 해산시키고 은둔했으며 이순신도 싸움에 임하여 갑옷을 벗고 탄환에 맞아 죽었으니 호남과 영남의 父子와 忽弟들이 의병은 되지 말라고 서로 경계하였다.」 구국의 일념으로 의병을 일으킨 김덕령 장군이 모략으로 체포되었다가 누명을 벗고 간신히 석방되었으나, 후에 다시 참소로 투옥되었다가 끝내 옥사하고 말 았는데, 그 주요한 원인은 그가 공을 많이 세웠을 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신망 이 두터웠기 때문이었다. 김덕령의 죽음은 설마 하던 많은 의병장들을 동요시 켜 가장 공을 많이 세운 장군 중 한명인 곽재우 장군까지도 군대를 해산시키고 산속으로 들어가 죽을때까지 은거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정쟁(政爭)을 일삼는 자들은 전쟁이 끝나고 나면 상대방에 대한 비방과 제거음모를 더욱 활발히 전개하게 마련이다. 왜냐하면 논공행상을 통해 국민적 신망을 바탕으로 강력한 임눌이 떠오르게 되는 것을 극력 저지시키기 위해서이다. 이순신도 그러한 정치풍토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는 이미 임난 전에도 모함을 받아 파직된 적이 있었고, 다시 복직되어 북쪽의 오랑캐와 싸워 공을 세웠을 때에도 시기하는 무리들의 모함으로 투옥되었다가 겨우 풀려나기도 했었다. 그리고 임진왜란 중에는 전라좌수사로 한산도대첩 등을 이끌어내며 왜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지만, 오히려 그같은 커다란 공으로 말미암아 견제와 시기를 받은 끝에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해 죽음직전까지 몰렸었다. 왕과 중앙의 대신들은 전쟁의 승패를 떠나 국민적 신망을 받는 인물의 출현은 결코 용납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니 이순신의 공이 크면 클수록 더욱 시기하고 모함하는 자들이 날뛰었던 것이다. 다만 임진란이 워낙 불리하게 진행중이라서 화가 그 정도에 머물렀다고 보여진다. 그러니 전쟁이 끝나면 이순신에게 의심없는 토사구팽이 가해졌을 것임은 불문가지라 하겠다. 더우기 당시의 조정인맥도 서인이 장악하여 그들과 관계가 먼 이순신에게는 매 우 불리하였다. 유성룡을 제외하고는 이순신을 변호해 줄 사람이 거의 없었다. 서인은 이순신을 제거하고 자파의 인물을 기용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들이 볼 때 이순신은 공이 만만치 않은 데다 백성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고 있어 제거해 야할 요주의 인물이었다. 김덕령 장군의 옥사가 이를 본증해 주고 있다. 더우기 선조는 명종이 후사없이 죽은 끝에 우여곡절 끝에 왕위에 올라 왕통에 대한 컴플렉스가 있었는데다, 자기의 치세동안 가장 혹독하고 처참한 전란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왕위가 흔들릴 수 있는 요인이다-전란에 대하여는 거의 신경과민을 보였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전쟁의 패배에 대한 백성들의 원성이 일까봐 노심초사하게 되었고, 역사로부터 부덕한 왕 또는 무능한 왕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닐까봐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그러한 때에 백성의 존망을 받는 임난의 영웅이 탄생한다는 것은 결코 달가울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선조는 일반 관료들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이순신을 처형하려고 하였다. 「선조실록」을 보면 선조는 언제나 이순신에 대하여 흔쾌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놀랍게도 선조는 이순신이 전라좌수사에서 파직되어 서울에서 국형을 받을 때 취조관에게 은밀히 조서를 보내어 죄목을 어떻게 꾸며서라도 이순신을 죽이라고 지시하고 있다. 사태의 심각성을 직감한 우의정 정탁 등의 공개적인 구명상소로 말미암아 이순신은 겨우 목숨만을 건질 수 있었다. 이순신은 나라를 위해 뼈와 살을 다 바쳤건만 자신에게 돌아온 것은 울분의 감옥살이 뿐이었다. 이러한 선조의 처사에 대하여 당시의 체찰사(전쟁 순무사)였던 이원익도 「음흉한 사람들이 (이순신에게) 무고가 심했다고는 해도 임금님이 굽어 살피시지 못하니 나랏일을 어찌 하랴」라고 개탄을 하였다. 이순신이 감옥에서 간신히 풀려난 뒤 백의종군하다가, 다시 수군 사령관에 복직되었다고는 하지만 선조를 비롯한 조정에 심한 좌절감을 느꼈을 것이다. 이러한 정국(政局)에서 이순신이 자신의 삶과 역할에 어찌 회환을 품지 않을 수 있으랴! 죽음을 한해 앞둔(1597년) 이순신의 난중일기에는 「다만 어서 죽었으면 한다」「왜 어찌 죽지 않는지!」「일찍 죽느니만 못하도다」「선대의 사당에 가서 울면서 절을 하였다」와 같은 내용이 나온다. 마지막 싸움을 앞두고 그의 일기에는 「죽고 싶다」등의 기록이 무려 8번이나 나온다. 「죽고 싶다」는 말이 반복되는 것은 그의 죽음에 대한 다짐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더욱 그가 죽기 1년 전에는 그렇게도 극진히 모셨던 모친이 사망하기도 하였다. 모친이 살아있다면 효자로 소문난 평소 그의 성품으로 보거나 당시의 의식으로 보거나 그가 자살을 감행할 수는 없다. 말하자면 이제 상황이 변하여 그의 자살에 걸림돌이 없게 된 셈이다. 게다가 조정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알아주고 옹호해 주던 영의정 유성룡이 노량해전 40일 전인 1598년 10월에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마침내 파직을 당하자 이순신의 충격은 이루 형용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유성룡이 파직을 당하기 얼마 전에도 이순신은 조정의 인사정책에 불만과 분노를 표하면서 「이를 어찌하랴, 이를 어찌하랴!」라고 탄식을 하였는데 이제 그 불신은 극에 달했을 것으로 보여진다. 자신에게 언제 무슨 화가 미칠지 가늠할 수조차 없다고 생각했으리라. 그는 당연히 자신의 운명과 죽음의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심사숙고를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 결론이 무었이었을까? 그런데 최후의 전쟁 출진에 앞서 이순신은 그의 부관 유형에게 다음과 같은 매우 의미 심장한 말을 하였다. 「적이 물러가는 그날에 나는 죽을 것이다」라고. 그리고 그는 최후의 전쟁에서 정말로 죽고 말았던 것이다. 이순신이 죽은 후 명나라 수군 제독이었던 진린이 쓴 제문에 「공(公)이 평시에 "이제 오직 한번 죽을 일만 남았노라"하시더니, 어찌 평소의 맹세대로 실천에 옮겼단 말이요.」라는 말이 나온다. 여기에서도 이순신의 죽음에 대해 우리는 강한 암시를 받을 수 있다. 이순신은 단순한 무인(武人)이 아닌데다 신중하고 사려깊으며 역사에도 일가견 이 있는 인물임을 고려할 때에 그는 어느 죽음이 참된 죽음인지를 분명 헤아렸 으리라 본다. 임진란이 끝난 후에 혹시라도 정쟁과 모함에 휘말려 유배를 가서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거나 옥사할 바에야 장군으로서의 최후의 전쟁에서 승리 를 하면서 죽는다면 그보다 더 극적인 죽음은 없을 것이다. 이순신같은 智와 勇을 갖춘 장군이라면 종전이 된 후에 - 그는 노량해전이 끝나면 종전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 자신에게 닥쳐올 온갖 비방과 시련 속에서 구차한 삶을 영위하기 보다는 차라리 장렬한 죽음을 선택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 범용한 인물이라면 몰라도 매우 명예를 소중히 여기는 이순신이 그같은 선택을 했다면 그것은 의아한 것이 아니라 지극히 당연한 것이 된다. 한번 죽어 영원히 사는 역사의 길을 그는 능히 선택할 수 있는 위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순신의 자살설은 이미 위의 김덕령의 전기에서도 나타나듯이 결론을 내리기에 충분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순신이 종종 제갈공명과 그의 죽음을 거론하는데서 그 개연성은 더욱 높아진다. ~~~~~~~~~~~~~~~~~~~~~~~~~~~~~~~~~~~~~~~~~~~~~~~~~~~~~~~~~yoon@aero2.kaist.ac.kr 음과 양이 있어야 방전은 일어나는가? 난......홀로사랑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