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ealthNdiet ] in KIDS 글 쓴 이(By): fidelis (성격파란) 날 짜 (Date): 2001년 10월 15일 월요일 오전 11시 01분 59초 제 목(Title): [퍼옴]2001년 다시 그곳에 서리라 조영관(종근당 해외사업본부) 내 경우, 마라톤 대회에서 가장 기분 좋은 순간은 출발 직전이다. 스탠드에서 출발 시간을 기다리다, 서서히 향연에 뛰어 들 준비를 할 때가 가장 좋았다. 반창고를 젖꼭지에 붙이고, 마찰이 심할 곳에 바세린을 바를 땐, 마치 의식을 치르듯 경건히 한다. 그리고 최근에 구입한 심박계를 찬다. 가장 원시적인 운동을 위하여 가장 현대적인 장비를 활용하는 것이다. 나와의 싸움이긴 하지만, 치열한 전투에 대비해 만전을 기하는 무사의 심정과도 같아 좀 우쭐해지기도 한다. 출발 지점인 트랙에 내려서서 낯 익은 분들과 반가운 인사를 나누며 서로의 건투를 빌었다. 고적대의 흥겨운 음악, 장내 아나운서의 흥분한 듯한 높은 목소리, 하늘의 경비행기와 헬리콥터의 굉음, 스탠드에 남아 있는 가족들의 함성, 형형 색색의 유니폼, 빈 곳 없이 빽빽이 둘러 쳐진 각종 동호회의 플래카드와 격문 등이 트랙의 주자들과 스탠드의 가족들을 한껏 고조시킨다. 이윽고 대포 소리와 함께 출발 신호가 떨어지자, 주자들은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일제히 팔을 높이 치켜 흔들며 환호를 올렸다. 스탠드의 가족들도 모두 일어나 화답했다. 선두의 등록 선수들은 앞뒤 가릴 것 없이, 오직 한가지 일념으로 뛰쳐 나가는 바로 그런 순간이겠지만 우리 아마추어들은 완주에의 각오를 자신과 가족들에게 다지며, 그러면서도 이 순간이 있기 까지의 역정에, 약간은 까닭 모를 감상과 감동에 젖기도 하면서 서서히 발걸음을 떼기 시작하는 것이다. 스탠드의 아내는 그 많은 주자들 속에 파묻혀 제자리 뛰기를 하듯 걸어 나가는 나를 놓치지 않고 계속 응시하고 있었다. 손을 흔들며 혼잣말을 했다. ‘ 갔다 올께. ’ 아내는 항상 좀더 표현력이 풍부하지 못한 날, 자상하지 못한 탓이라고 원망했지만, 이 정도가 나의 한계인 것 같다. 내 말을 들을 순 없었겠지만, 내 감정이 이입된 듯 아내도 자리에서 일어나 두 팔을 힘차게 흔들었다. 평상시엔 볼 수 없었던 아내의 행동이었다. 아마도 남편의 삶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게 된 것과 대회의 분위기가 아내마저도 일상에서 벗어나게 한 것 같았다. 출발한지 1키로 못돼 펼쳐지는 고갯길이 전체 레이스 운영에 큰 영향을 끼친다는 걸 직감하고 의식적으로 속도를 낮추었지만 심박계가 순식간에 170을 넘어 버린다. 오르막에서 시간을 지체한 듯하여 내리막에선 속도를 높였다. 그러나, 어디 선가 4시간대 페이스 메이커와 그를 따르는 일단의 무리들이 ‘와’ 하는 함성과 함께 눈 깜짝 할 사이에 나를 추월해 나간다. 목표가 3시간50분인데, 초반부터 4시간 페이스 메이커에게 추월을 당하다니 어이가 없었다. 심박계의 경고음을 무시하고 그들을 쫓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비교적 많은 연습량과 언덕이 없는 둔치길에서의 기록을 과신하여, 너무 무리한 목표를 세웠던 것이다. 과학적인 기기를 휴대하고도 그것의 객관성 보다는 혹시나를 기대해 보는 어리석음도 보였다. 결국 평소 보다 힘든 레이스를 펼치고도 기록은 저조한 좀 실망스런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개개 주자들이 초반 오버페이스를 하든 말든, 어떤 목표와 사연을 가슴에 안고 달리든, 의암호의 그 맑고 깊은 녹색의 자태는 여전하였다. 우리가 흘린 땀 이상을 꿈꾸는 것이 얼마나 덧없고 어리석은 것인지를 조용히 타일러 주면서, 다시 이곳으로 돌아 온 주자들을 잔잔한 미소로 맞이해 주는 것만 같았다. 언덕길 아래와 호수 건너편까지 진출한 주자들이 숫자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삼악산 자락의 주로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춘천에서 마라톤에 도전하는 사람들에겐 쉽게 잊혀질 수 없는 인상적인 장관이긴 하지만, 어느새 저렇게 수많은 주자들이 저토록 까마득히 앞섰는가를 보게 되면 열린 입을 다물 수가 없게 된다. 매년 느끼는 것이지만 춘천 대회의 가장 매력적인 점은 시민들의 자발적이고도 따뜻한 협조와 응원이었다. 교통통제에 묶인 차 안의 승객들도 주자들에게 못마땅한 표정을 짓기는 커녕, 차량 밖으로 몸을 내밀어 열렬히 박수를 쳐준다. 이러한 시민들에게 일일이 감사의 뜻을 전하는 것은 마스터즈 런너들의 몫이다. 연세가 드신 분이나 부인들에겐 고개를 숙여 목례를 하고 어린이들과는 하이파이브를 하였다. 급수대 요원들에 대한 트레이닝도 잘 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맡은 바 임무를 효율적으로 수행하였고, 나아가 어떻게 해서든 주자들에게 힘을 실어주려는 듯 성과 열을 다하여 응원도 했다. 주로 곳곳에 간이 화장실을 설치한 조직 위원회의 세심한 배려도 돋보였다. 깨끗해 보이는 간이 화장실 앞에서 순서를 기다리는 외국인 여자 주자에게 외국에서 배운 눈인사를 했다. 하프 지점 못 미쳐서 허벅지 근육의 피로감이 조금씩 느껴졌다. 4시간대 페이스 메이커를 따라 잡을 가능성이 없어진 것은 확실했다. 기록 갱신은 또 다음 기회로 미룰 수 밖에 없다. 기록에 대한 미련을 접어 두고 대신, 한번도 쉬거나 걷지 않는 2차 목표를 위하여 속도를 조금 줄였다. 20키로와 30키로 지점에서 보충식을 지급해 주었지만 물만 마시고 지나쳤다. 초등학교 시절 교통사고로 오른 발의 새끼 발가락과 그 언저리의 뼈가 심하게 부서진 적이 있었는데, 일상 활동에선 아무런 문제를 일으키지 않지만 30키로 이상을 달릴 때면 거의 언제나 자기를 잊어선 안 된다는 신호를 보내 온다. 평소엔 관심을 둘 필요가 전혀 없던 신체 부위라도 마라톤의 막바지에선 얼마나 심각한 장애가 될 수도 있는지 마라토너는 다 알 것이다. 춘천 시가지에 들어 서면, 소위 도시의 잿빛이 의암호와 삼악산의 녹색 풍광을 대체하면서, 이젠 마라톤의 마냥 유쾌하기만 했던 시간은 끝났고, 마라톤의 벽을 넘기 시작해야 할 때가 되었다는 걸 알려준다. 앞서고 뒷 선 주자들의 서로가 서로에게 자극이 되고 격려가 되는 무언의 눈빛과 응원으로 마라톤 벽을 뛰어 넘는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고행의 길을 들어서는 구도자의 마음으로 스스로를 믿고 격려하며, 또 타이르기도 하면서 벽을 넘는다. 37키로를 넘어 서면서 단조롭게 쭉 뻗은 넓은 직선 도로가 내겐 가장 힘들었다. 시간은 이미 출발한지 3시간 40분이 넘었다. 그날 새벽 아내에게 한 말이 생각 나 기진해 있는 가운데도 피식 웃음이 나왔다. 청량리 역을 향하는 택시 안에서 아내에게 3시간50분 쯤에 도착할 테니 늦어도 3시간 45분에는 도착 라인에 대기하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아내가 액면 그대로 내 말을 따를 경우, 남편의 영웅적인 골인 장면을 놓칠 수도 있겠다는 노파심에서 한마디 덧 붙였다. “ 그런데 말이야, 컨디션이 좋으면 3시간 40분쯤에 들어 올지도 모르니까, 대략 3시간30분부터 결승점을 지켜 보라구. 아무래도 3시간 30분 이내는 못 들어 올 테니 그 전부터 지루하게 기다릴 필요는 없고 … 그런데 또 모르지. 무슨 일낼지도. 다른 할 일도 없을 테니 그냥 출발한지 3시간부터 지켜 봐, 응? ” 기다리는 걸 싫어하는 나는 남이 나를 기다리는 것은 더 참을 수가 없는데, 아내를 기다리게 해야 하다니. 4시간30분대 페이스 메이커를 놓치고는 조금은 실망해 있던 중, 어디 선가 또 한 팀의 4시간30분대 페이스 메이커가 뒤에서 달려 오는 걸 보니 다시 힘이 솟구치는 듯 했다. ‘새끼 발가락아, 너만 믿는다. 제발 조금만 더 버텨다오.’ 언제부터인가 아내와의 공통의 화제나 관심사가 무척이나 단조롭고 무미건조해졌음을 의식하게 되었다. 집 평수를 늘린다거나, 아이들 학교 문제, 이웃의 가십거리 등이 화제의 전부였다. 거창하게 중년의 위기를 운운하진 않더라도 아내가 불만스러운 상태임은 쉽게 감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아내를, 한 여자로써 나의 동반자로써 생각할 정신적 여유가 없어지고 감정이 조금씩 메말라 가는 것은 자연적인 것이며, 아직 그런 것에 연연해 하는 건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큰 애가 대학 2학년인데, 신혼의 분위기를 요구한다는 건 지나치다고 믿었다. 그러나 아내는 달랐다. 현실의 문제에서 좀 벗어난, 우리 둘만의 세계에서 우리 둘만의 언어를 갖고 싶어했다. 아내의 그런 마음을 알았을 때, ‘ 여자들이란…’ 하고 웃어 넘기려 했지만, 우리 부부의 평상을 생각해 보면 아내의 불만도 이해가 되었다. 사실 나 자신도 ‘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른쪽 발의 새끼 발가락과 그 주위의 통증이 점점 더 심해져 발을 내딛는 것 조차 힘들어졌다. 자연히 왼발에 과도한 힘이 가해졌고 그러다 보니 왼발의 관절과 근육의 피로감도 극에 달한 것 같았다. 40 키로 마지막 급수대에서 물을 마실 때, 내 모습을 보고 누군가가 나직한 목소리로 ‘ 724번 힘내세요’ 한다. 그를 보며 고개를 숙여 답례를 했다. 억지로라도 미소는 지을 수 있었으나, 이상하게 ‘ 고맙습니다. 힘 낼께요. ‘하는 목소리가 나오진 않았다. 물 컵을 급수대에 올려 놓고 심호흡을 했다. 비록 스피드는 쑥스러울 정도지만, 어느 호기록의 주자 못지 않는 오랜 경력과 꾸준한 연습량을 쌓은 마스터즈 런너의 품위를 보여 주자고 자신을 달랬다. 달리기 교과서에나 나옴 직한 장거리 주자의 자세를 취하며 연도의 모두에게 웃는 얼굴로 목례를 했다. 대회가 끝나면 항상, 최선을 다하지 않았던 게 아닐까하는 자책감에서, 더 가혹하게 자신을 몰아 부치지 않은 것을 후회하곤 했는데 이젠 더 이상 그런 부질없는 짓은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레이스 순간순간 마다 내 정신 내 육체, 모두가 최선을 다했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아내에게 우리 둘만의 세계, 우리 둘만의 키워드를 ‘달리기’로 하자고 했을 때, 아내의 첫 반응을 잊을 수 없다. 황당해 했다. 아내는 마치 내가 놀리는 줄로 알았다고 했다. 하긴 걷는 것도 싫어하는 아내에게, 달리는 것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함께 즐기며 할 수 있는 재미있고 좋은 것이란 말은 이해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아내의 바람을 그냥 얼버무리며 입막음 해 보려는 의도로 밖에 들리 지가 않았던 것이었다. 그로부터 몇 달에 걸친 설득과 회유를 통해 , 퇴근 후 공원 산책을 함께 하고 그러다 파워 워킹을 해 보게 하고, 그리고 2-3 키로의 달리기를 거쳐 춘천 스타디움까지 데려 오게 되었다. 아직 아내는 마지 못해 달리는 사람들의 세계 언저리에서 서성 거리는 상태다. 오늘 아내가 많은 부부들이 실제로 달리기를 통해 그들만의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나가고 있음을 확인해 보았으면 한다. 그리고 달린다는 것도 즐거워 할 수 있는 대상이고 실제로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고 있음을 보기를 바란다. 마지막 스퍼트의 고통을 이겨내기 위하여 남은 거리를 가늠해 보는 대신 이것저것 다른 걸 생각해 보려고 필사적이 되어 있던 바로 그 순간, 스타디움 밖, 주로의 라인에 서있는 아내와 눈이 마주쳤다. 골인 지점에서 기다릴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에 스타디움 밖으로 나와 있으리라곤 생각지도 못했었다. 바로 앞을 지날 때까지 아내를 보지도 못했고 듣지도 못했다. 자신과만 대화를 하던 내밀한 세계에서 갑작스레 현실의 세계로 뛰쳐 나온 것 같이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의식의 세계로 돌아 오자마자 내 눈에 처음 들어 온 건, 반가움만이 가득한 아내의 얼굴이었다. 순간적으로 하이파이브를 힘차게 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 그 때 아내를 안아주었더라면 하는 후회가 들기도 하고, 전에 한번도 아내와 해 본 적이 없는 하이파이브를 어떻게 그렇게 정확하고 멋있게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신기한 생각도 든다. 아내와의 하이파이브 감촉이 남아 있는 손바닥을 어루만지며 골인했다. 진행 요원들의 유도로 골인 지점을 벗어 나니 아내가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아내를 안은 것인지 내가 아내 품에 안긴 것인지 분명치가 않다. 달리는 사람은 입문 과정을 거쳐 그 정신적 성숙 단계에 따라 몇 단계의 발전을 한 후, 마지막 최고의 경지에 도달한다고 한다. 최고의 경지에서는, 마라톤의 의미가 단순히 완주를 한다거나 기록을 단축하는 것 이상의 또 다른 무엇에 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는지, 그 이상의 것이 무엇인지 아직은 좀 막연하다. 굳이 말하자면, 마라톤의 출발선 상에 설 수 있기까지의 모든 걸 극복해 나가는 과정에 그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출발선에 설 수 있기 위하여 오랫 동안 달려야 하고, 또 그를 위하여 많은 걸 희생하고 참아야 하고, 그리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출발선에 서서, 그 곳에 설 수 있게 된 자신을 축하하고 누군가에게 감사하는 그런 모든 일련의 과정들에 큰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대회 자체는 그 모든 어려움을 극복 해 내었음을 축하하는 잔치 마당과도 같은 것이다. 춘천대회는 내가 이제껏 참여했던 여러 대회 중에 가장 편한 마음으로 즐길 수 있었고 그리고 감동마저 느낄 수 있었던 최고의 잔치였었다. 막국수로 점심 겸 저녁을 해결하고 어둠이 깃들여진 춘천역사에 도착했다. 춘천역사는 20여년 전의 학창 시절, 아내와 함께 자주 여행했던 동해남부선의 어느 조그만 시골 역사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보이는 것 마다 말하는 것 마다 모든 것이 마냥 즐겁고 좋기만 했던 그 시절을 우리 부부에게 상기시켜 주었다. 그 때의 들떴던 그 모습 그대로 우리 부부는 손에 손을 잡고 역사 안으로 들어섰다. 내년에도 다시 스타트 라인에 서리란 걸 안다. 아니 그러기 위해 최선을 다하리란 걸 안다 . 아내도 10키로의 스타트 라인에 설 수 있을 것이다. 그럴 수 있도록 아내를 도울 것이다. 그 때 그 곳에 있을 수 있는 몸과 마음을 만드는 과정에서 아내와 나는 우리 둘만의 세계를 완성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확신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