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freeeXpression ] in KIDS 글 쓴 이(By): Convex (4ever 0~) 날 짜 (Date): 1996년04월17일(수) 07시28분29초 KST 제 목(Title): [퍼온글] 소승적인 신앙과 대승적인 신앙. Posted By: namsan (오두방정) on 'Religion' Title: [종교 단상] 소승적인 신앙과 대승적인 신앙.. Date: Mon Apr 15 12:12:04 1996 라이프 보드에서 `영접'과 `선행'에 대한 토론이 있어서 거기서 쓴건데 여기도 올려 놓습니다. [종교 단상] 소승적인 신앙과 대승적인 신앙 종교에 대한 두가지 구분은 모든 종교에서 일반적으로 논해지는 분류가 되는데 `자신의 구원'이냐 `이웃을 위한 선행'이냐 하는 점은 기독교에서도 `하나님을 믿는' 소승적인 믿음과 `이웃을 내몸과같이 사랑하는' 대승적인 예수의 계명으로 아주 중요한 두 태도이며 불교에서도 자신의 해탈을 위한 소승적인 `번뇌로부터의 해탈'과 이웃 중생들을 위한 `보살행의 희생'이라는 대승적인 두 종교적인 자세가 있습니다. 종파에따라 또는 교파에따라 두가지가 분리 강조되는 수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이 두가지 태도는 한번의 스트록에 의해 동시에 두 현의 음이 나타나는 바이얼린 소리처럼 상호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동시적으로 수행되는 종교의 모습이기도 하여 구태여 분리하는 것은 각 종교에 있어서 `덜 경전적'이 되는 신앙이 되기 쉽습니다. 즉 기독교에서 소승적인 `중생(重生)'을 위한 믿음이나 `주의 영접'만을 내세우고 `이웃 사랑'의 또하나의 계명을 무시하고서는 그 `구원'의 완성은 힘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완성한' 예수라할지라도 다시 `세상 구원'을 위하여 `재림'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일부가 너무나 `주의 영접'만을 강조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유대교 구약주의의 영향으로 보기도 합니다만 많은 기독교에서 이웃을 위한 사랑, `무조건적인 아가페'의 사랑은 대단히 중요한 기독교신학과 신앙의 한 근본적인 면모이기도 합니다. 이웃을 위한 사랑이나 사회를 위한 선행이 한갖 조건적인 개인 자신의 `구원의 방편'으로서만 행해진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위선적인 것이 될 것이며 이미 순수한 종교적인 선행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 `주를 영접했다'는 기독교인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다시 세속화하거나 심지어 사회적인 범죄에 가담하여 물의를 일으키는 수가 있기도 한 것은 막연히 `진정으로 덜 영접' 했다고 치부할 것이 아니라 `믿음'과 `선행'의 균형있는 종교심을 성취하지 못한 결과라고 봐야할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일반적인 종교적인 모습은 `모든 선행은 그 자체가 하나의 종교이다'라는 명제하에서 파악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특정 종교의 신이나 믿음이 기반되지 않고선 전혀 `어떠한 선행도 무용지물'이라고 하는 지극히 배타주의적인 종교관을 가진다면 오늘날의 중동의 종교전쟁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세계를 만들고야 말 것입니다. 기독교 신학자 중에서도 변선환 교수같은 분은 `세상을 위해서 선한 일을 한다면 불교 등 기독교 밖에서도 구원이 있다'고 강조하여 많은 신학생들에게 추앙을 받기도 하였는데 이것은 서남동의 `민중신학'과도 맥을 같이하고 있는 종교관입니다. 문제는 각자 개인이 믿는 종교적인 믿음이 너무나 선행에 있어서 배타적으로 흐르지 않도록 해야만이 `믿음가지고 원수만들기'를 면할 것이란 것입니다. 모든 선행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우주적인 종교인 것입니다. 소승적인 교파의 극단적인 교리들을 제외하고는... 모든 종교의 교조들의 근본적인 가르침은 `우리 모두 이웃만들기'일 것입니다. 오두방정(namsan) *** 퍼오기 끝 --,--`-<@ 매일 그대와 아침햇살 받으며 매일 그대와 눈을 뜨고파.. 잠이 들고파.. Till the rivers flow up stream | Love is real \|||/ @@@ Till lovers cease to dream | Love is touch @|~j~|@ @^j^@ Till then, I'm yours, be mine | Love is free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