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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reeeXpression ] in KIDS
글 쓴 이(By): jtlee ( - 레나 -)
날 짜 (Date): 1995년01월21일(토) 03시13분37초 KST
제 목(Title): 나는 왜 여자였던가


"오우, 나의 레나!!"

방문을 발길로 걷어차고 들어온 경미는 술에 몹시 취한 듯,
책상에서 공지영의 [고등어]를 읽고 있던 내게 느닷없이 내
이름을 부르짖었다.  ING인 그녀가 이렇게 들떠있는 모습을
보니, 아마도 누군가 반가운 사람을 만나고 돌아온 것 같다.
경미는 차가운 겨울바람 냄새가 배어 있는 코트를 아무렇게나
던져 버리곤 침대에 털썩 하고 앉았다.  나는 책읽는 것을 잠시
중단하고 의자를 침대쪽으로 끌고 가, 아직 술기운이 떠나지
않은 그녀의 빠알간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어디 갔다 오는거야?  눈이 초롱 초롱 빛난다."

경미는 후~ 하고 한숨을 내쉬곤 미소를 띄우며 대답했다.
"호프집에 갔었어.  장똘이라는 사람이랑.  flyers라는 아이디를
갖은, 너도 알거야.  말도 별로 안 하구 좀 무섭게 생겼어.
저녁을 먹고 나서 연구실에 앉아 있는데 갑자기 전화가 온거야,
포항에 내려왔다고.  무작정 만나자는 거야.  첨엔 장난인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란걸 알았지.  육감이란 것, 있잖니.  그래서
얼떨결에 만났는데, 글쎄...  만나고 나니깐, 좀.. 음... 뭐라고
해야 하나..."

"괜찮았나 보구나."

"그래, 괜찮더라구.  오히려 내가 두근거렸다니깐.  어딘지
모르게 끌리는 데가 있는거 있지.  음, 음, 전경미, 오늘은
멋있었어!"

경미의 눈빛이 순간 파란색으로 반짝였을까, 팔을 쭉 피고 뒤로
드러누운채 깔깔깔 하고 웃는 그녀의 모습은 왠지 아무런 걱정도
미련도 없는, 발랄하고 희망을 간직한 소녀와도 같았다.  나는
그런 경미를 보며 어쩌면 질투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흐흐흐, 근데 이게 올마만이냐.  디따 퍼 마시긴 퍼 마신신것
같다.  근데 먹은게 하나도 없어서 속이 벌써 쓰리네.  히히,
그래도 기분은 좋다...  참, 너 근데 자꾸 우리들의 사생활을
키즈에다 올려야겠니?"  경미는 갑자기 짜증스러운 투로 말했다.
"어제 연구실에 있는 사람들이 나보고 뭐라고 그러는줄 알아?
나보고 정말 아다가 아니냐고, 내가 너랑 정말로 같이 자냐고,
막 그러는거야, 기가 막혀서.  첨엔 무슨 말인지 몰라서 뭐가
뭔지 몰랐는데 나중에 말하더라구, 가비지란에서 읽었다고.
교수님도 읽었다고 그러더구나.  분명 누군가가 일러바친거야,
비겁하게.  그나 저나 사람들은 왜 아직까지도 아다를 간직해야
한다는 그런 낡아 빠진 고정관념속에 사로 잡혀 있는걸까?  암튼
내일 교수님 방으로 끌려가게 생겼는데 저번때 처럼 무작정 가서
제가 뭘 잘못했는지 압니다, 앞으로 잘하겠습니다, 뭐 그렇게
비는 수 밖에.  근데 걱정된다.  이번엔 이렇게 꾸짖는게
아닐까, 경미 너가 챗이나 톡하는거에 대해 별로 신경 안쓴다,
그냥 니가 공부만 하라는거도 아니고 놀기도 하는거 괜찮다,
하지만 너의 그 문란한 성생활만은 자제하라고."

나는 약간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경미가 취하긴 취한
모양이었다.  자기가 우리들의 첫날밤에 대한 이야기를
가비지란에 올려달라고 부탁한 것이 엇그제가 아니었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언제 그랬냐는 듯 결코 길지도 않는
오리발을 쏙 내밀고 나를 구박하려 드는 것이다.  하나뿐이 없는
룸메이트를.

아무런 댓구를 하지 않는 내가 밉살스러운지 경미는 씩씩거리며
말을 이어갔다.  "아뭏튼 다음에 글을 올릴땐 내 실명 쓰지 마.
블루라던가 왕님이라던가 하는 더 이쁜 이름이 있잖니."

"알았어.  노력해 볼께."  나는 의자를 다시 책상쪽으로 끌었다.
경미, 아니, 블루의 시선이 내 책상위로 옮겨졌다.

"어, 새책이구나!  공지영이 쓴거네..."

아차, 하는 순간 이미 늦어버렸다.  책은 벌써 블루의 손아귀로
넘어갔다.  저번때와 마찬가지로 내게 묻지도 않고 말이다.
블루는 한손으로 책을 읽어가며 다른 손으로 양말이랑 바지를
벗고는 이불속으로 들어갔다.  그래, 어서 잠자코 책이나
읽어라, 하며 내 자신을 위로하는 수 밖에 없었다.

-- 그거 다 읽고 난 참으로 부끄러운 생각을 했어.  내가
여자라는 걸 거의 생각 안하고 살았던거 같애.  나도 마찬가지로
'여자'의 삶을 이해하고 협조할 남자를 노력없이 얻으려하는
'신데렐라'였다는 걸 깨달았고...

[무소의 뿔..]을 다 읽고 블루가 한 말이 생각났다.  어쩌면
블루는 그때 진심을 말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도 뻥을 치니
알수가 있어야지.  아뭏튼 그녀가 [고등어]를 읽고 있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부디 그책 읽고 많이 많이 성숙해 지길 바란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블루 옆에 누워 잠을 청했다.

밤새도록 블루의 슬픈 웃음 소리가 꿈속으로까지 들려왔다.

"낄낄, 깔깔, 흑흑... 훌쩍.."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다음날 일어났을때 블루는 책상앞에 앉아 [고등어]를 아직도
읽고 있었다.  아마도 밤을 샌 모양이었다.  나는 슬리퍼를 끌며
그녀옆에 다가갔다.  블루는 이미 '작가 후기' 쪽을 읽고
있었다.

"빨리도 읽네...  어땠어?"  나는 눈을 부비면서 물었다.

"으응..  주인공이 80년대에 사귀다 찬 여자 있지,
노은림이라고.  걔랑 끝에 가서 다시 붙는데 가엾게도 은림이는
죽게되지.  90년대에도 젊은이가 어의없게 죽어갈 수 있다고
여기 작가가..."

"야아아!!  누가 줄거리를 말해달라고 했어!  난 아직도
중간부분을 읽고 있단 말이야!"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왔다.  잠이 확 깨는 느낌이
들었다.  오늘도 기분이 언짢은 상태에서 하루를 보내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이제 소설이고 뭐고 읽을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피곤한 탓이었을까, 블루는 씩씩 거리는 나를 아랑곳 하지 않고
담배를 입에 물며 말한다.  "고등어를 읽고 느낀점이 있다면.
글쎄...  이건 책이랑은 별로 상관이 없을진 모르지만.  지금은
생각하지, 한때 나는 왜 여자였던가, 하고."  그리고 라이터로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래, 두고보자, 전, 경, 미!


씨익~~ 씨익~~!!


(솔직해 지자.  내가 여기 이렇게 룸메이트에 대해 쓴것은 내
억울한 처지를 하소연 하자는 것이 아니다.  나는 결코 좋지
못한 감정으로 아직 고등어를 읽지 않은 키즈인들에게 여기
이렇게 화풀이겸 고등어의 줄거리를 밝혀 버린 것이다.)


                          - 레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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