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fineArt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화이트헤드) 날 짜 (Date): 1998년 9월 13일 일요일 오후 01시 22분 06초 제 목(Title): 이가림/ 모딜리아니와 장 콕토 미술과 문학의 만남[6] 모딜리아니와 장 콕토 자유와 무한에 매혹된 파란 영혼들 이 가 림 (시인·인하대 교수) ------------------------------------------------------------------------------- - 다방면에서 화려한 성공을 거둔 시인 장 콕토와 궁핍과 고독 속에서 살다간 불우한 화가 모딜리아니. 서로의 인생 명암은 달랐지만 그들은 동시대를 살아가면서 서로의 예술을 이해하고 자유와 무한의 이상을 꿈꿨던 예술가들이었다. 내귀는 소라껍질 / 바다 소리를 그리워한다” <귀>라는 제목으로 잘 알려져 있는 장 콕토(Jean Cocteau, 1889~1963)의 이 2행 시는 원래 <칸느(Cannes)> 연작 단시 중 제5번 시이다. 부유한 가정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콕토는 소년 시절 해마다 겨울철이 되면 감청 색 바다가 출렁이는 지중해의 아름다운 도시 칸느에서 지내곤 했다. 물론 그가 태어난 곳은 파리 근교 메종 라피트(Maisons-Laffite)이지만, <칸느·6>에서 노래한 것처럼, ‘여기도 나의 고향’이라고 칸느를 제2의 고향으로 부르고 있다. 이 짧은 시는 귀와 조개껍질과의 시각적 유사점에서 출발하여, 그 조개껍질이 파도 소리로 이어지고, 다시 그 파도 소리로부터 자연스럽게 귀로 되돌아오는 원환적(圓環的) 구성을 이루고 있다. 짤막한 말이 메아리쳐 감동의 울림을 낳고 무한한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킨다. 1906년 열일곱 살 때 페미나 극장에서의 ‘콕토 시 낭송의 밤’을 개최함으로써 조숙한 몽상의 시인으로 데뷔한 이래, 콕토는 시인으로서, 소설가로서, 문학비평가로서, 배우로서, 극작가로서, 연출가로서, 화가로서, 영화제작자로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폭넓은 활동을 했다. 그러나 무슨 일에 매달리든지 간에 콕토는 본질적으로는 시인이었다. 그가 쓴 소설은 시인의 소설이며, 그가 쓴 평론은 시인의 평론이며, 그가 만든 영화는 시인의 영화인 것이다. 그 자신 이러한 점을 명확히 의식하여 자기의 작품을 명명할 때도 반드시 시·소설의 시·평론의 시·각본의 시·회화의 시라는 말을 사용했으며, 간단히 시·소설·희곡·평론·회화 등으로 부르지는 않았다. 예술적 끼를 자랑했던 ‘천의 얼굴’장 콕토 콕토의 시는 그야말로 입체파 시의 전형이라 부를 만하다. 그의 시는 일종의 마술사의 재주와도 같은 멋진 솜씨로 동일 공간에 쌓아올린 구조를 지닌다. 물론 나무 조각들을 여러 가지 모양으로 쌓아올리는 장난감, 즉 집짓기 놀이의 나무 조각들처럼 짜맞추어 쌓는 것과는 크게 다르다. 말하자면 콕토 시의 경우, 첫째 시구와 둘째 시구 사이의 관계는 마치 손과 장갑과의 관계처럼, 또는 겉과 속이 서로 겹쳐 있는 양배추처럼 조화롭게 어울려 있다. 그것은 형태론적 차원에서나 감각적 차원에서 그리고 의미론적 차원에서, 이중 삼중으로 겹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콕토의 시에는 알맹이가 없다고도 말할 수 있는 동시에 껍질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즉 전체가 다 알맹이이고, 또 전체가 다 껍질이기도 한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양배추 구조의 시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콕토 이전에는 그 어떤 시인도 이러한 양배추 구조의 시를 쓴 적이 없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프랑시스 카르코(Francis Carco)는 《몽마르트에서 라탱 구(區)까지》에서 지나치게 현란한 변신을 거듭하며 다방면에 걸쳐 재주를 자랑하는 콕토의 모습에 퍽 못마땅해 했다. 심지어 콕토를 겉으로만 화려한 마술사·사기꾼·잔재주꾼·코미디언 … 이라고까지 혹평했다 이는 카르코가 시인·소설가·극작가·초상화가·삽화가·포스터 디자이너·도자기 제조자·벽화 장식가·장식용 융단 제조자·영화 연출가·재즈 연주가 … 등 천의 얼굴로 변신하는 콕토를 유난히 아니꼽게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콕토가 레종 도뇌르 훈장 수여, 옥스포드 대학 명예박사 학위 수여, 아카데미 회원, 아메리카 아카데미 회원, 프랑스 헝가리 협회 명예회장, 칸느 영화제 명예회장 등 세속적인 의미에서의 명예를 좋아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일정한 틀에 얽매이기를 거부하는 모험의 시, 거기에 생의 내기를 걸어 기어이 아름다운 잠과 꿈의 세계에 다다르고자 했던 고독한 시 정신의 소유자였음을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철저한 고독 속에서 36세로 요절한 화가 장 콕토가 이처럼 다소 사치스런 내면적 고독을 산 시인이었던 데 비해, 모딜리아니(Amedeo Modigliani, 1884~1920)는 평생 가난과 술과 아편, 그리고 병(결핵)에 시달리는 그야말로 처절한 고독 속에서 살다가 쓰러진 불우한 화가였다. 1884년 이탈리아 리보르노(Livorno)에서 출생한 모딜리아니는 1906년(콕토가 17세의 나이에 조숙한 시인으로 데뷔한 해) 파리로 나와 몽마르트에서 살기 시작했다. 1908년 처음으로 앵데팡당전에 회화 6점을 출품함으로써 정식으로 화가로서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게 된다. 그러나 매일매일의 빵을 걱정해야 하는 극도로 궁핍한 생활에 허덕이게 된다. 1909년 콘스탄틴 브랑쿠시를 만나 그의 격려에 힘입어 한 동안 조각을 시도하기도 하고, 세잔느의 대전람회를 보고 깊이 감명을 받아 <거지> <첼로 연주> 같은 작품을 그리기도 한다. 1913년부터는 몽파르나스에 거처를 정하고 키슬링·수틴·피카소 등과 친교를 맺는다. 이 무렵부터 모딜리아니 특유의 스타일을 개발하여 이색적인 작품을 선보이기 시작한다. 1918년에는 라피트 거리의 베르트 베이유(Berthe Weill) 화랑에서 최초의 개인전을 연 뒤, 방종한 생활과 음주·아편 등으로 악화된 결핵을 치료하기 위해 니스로 간다. 1919년 파리로 다시 돌아왔으나 중태여서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받던 중, 이듬해 1월 25일 36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몽파르나스 시대의 친구인 시인 앙드레 살몽(Andre Salmon)은 《모딜리아니의 정열적 생애》에서, 모딜리아니를 가리켜 “한 사람의 외톨이”, 또는 “지극히 내성적인 사나이” 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이는 젊은 날의 모딜리아니가 잘 생긴 얼굴 덕분에 여자들에게 인기가 있었으며, 음주와 기행의 숱한 에피소드들로 이루어진 전설 속의 주인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는 가장 치열한 예술과의 투쟁을 벌인 고독한 내면적 존재였음을 뜻하는 것이다. 똑같은 유태인이며 몽마르트 시대 이래의 예술적 동지였던 막스 자콥 또한 말년의 모딜리아니에게서는 웃음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고 진술한 바 있다. 그렇지만 모딜리아니는 인간 자체를 혐오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인간에 대해 뜨겁고 깊은 애정을 한없이 기울인 드문 화가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줄곧 초상화를 그렸고, 한 장의 초상화를 완성하기 위해서 하루에 1백 장도 넘게 데생을 했다고 한다. 모딜리아니의 재능이 데생과 조각과 유화의 세 부문에 걸쳐 빼어난 창조성을 보여주고 있음은 누구나 다 인정한다. 그러나 그의 화가로서의 천재성이 뚜렷이 드러나는 것은 초상화 부문에서이다. <서 있는 나부> <팔을 들어올리고 누워 있는 나부> <앉아 있는 나부> <긴 의자에 앉아 있는 나부> 등 일련의 나부 그림들은 넓은 의미에서의 초상화라고 할 수 있다. 1918년 남불 니스에서 요양할 때 여러 점의 풍경화를 그린 적이 있지만, 그의 회화 작업 과정에 있어서 특별히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정물화는 거의 그리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눈과 혼과 손으로 재구성한 초상화 모딜리아니는 얼굴을 길쭉하게 늘여놓기도 하고,불균형을 강조하기도 하고, 눈을 도려내기도 하고, 목을 길게 늘여놓기도 한다. 이런 모든 것이 그의 눈과 혼과 손에 의해 재구성되는 것이다. 쉼없이 사람들의 얼굴을 그리면서 그는 사람들을 판단하고, 간지하고 사랑하고, 또 비난하기도 한다. 그의 데생은 말없는 대화인 것이다."(장 콕토) 1906년 파리에 왔을 때, 모딜리아니는 몽마르트와 몽파르나스에서 만난 예술 동지였던 시인과 화가들, 키슬링·막스 자콥·수틴·앙드레 살몽·호안 그리즈·피카소·블라맹크·블레즈 상드라르 … 등의 초상화를 그렸다. 이러한 초상화들 가운데 <장 콕토의 초상>(1917)이 있다. 이 초상화 속에서의 시인은 프록코트를 입고, 나비 넥타이를 매고, 가슴에 하얀 행커치프를 슬쩍 꼽고 있는 약간 뽐내는 듯한 포즈를 취하고 있다. 확실히 콕토라는 시인에게는 이러한 멋부리기의 아니꼬운 점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초상화에서 인상적인 것으로 보이는 것은 시인의 나비 넥타이와 행커치프가 아니다.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시인의 손이다. 왠지 연약하게 느껴지지만, 모든 신경과 감각이 한 곳에 집중되어 있는 것 같은 ‘길다란 손’의 모습. 이른바 보들레르가 데생에 대해 정의하면서 ‘위대한 의지’ 와 ‘섬세성’(<1845년의 살롱>)이라고 말했을 때, 그리고 막스 자콥이 데생을 가리켜 하나의 ‘형태의 의지’ 라고 말했을 때의 바로 그 ‘의지’와 ‘섬세성’이, 모딜리아니가 묘사하고 있는 콕토의 섬세하고 신경질적인 손에 표현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콕토는 모딜리아니에 관하여 <몽파르나스의 모딜리아니>라는 제목으로 짤막한 에세이를 썼다. 거기에서 콕토는 조셉 바라 거리에 있는 키슬링의 아틀리에에서 작업에 몰두하던 모딜리아니가 “유채로 나의 초상을 그려 주었던 시기에 우리들은 더욱 깊은 관계를 맺게 됐다.”(<몽파르나스의 모딜리아니>)고 회상하고 있다. 시인은 화가를 위해서 3시간이 넘게 포즈를 취하고 있었고, 화가는 시인의 특징적 인상을 예리하게 포착하여 그려 나갔던 것이다. 콕토는 모딜리아니의 데생에 대해 이렇게 칭찬했다. “모딜리아니의 데생은 최고의 엘레강스이다. 그는 우리들 모두의 귀족이다. 마치 유령의 선(線)처럼 보이는 핏기 없는 그의 선은 결코 서투름에 빠진 적이 없다. 그의 선은 샴 고양이의 부드러움으로 서투름에서 벗어난다. 모딜리아니는 얼굴을 길쭉하게 늘여 놓기도 하고, 불균형을 강조하기도 하고, 눈을 도려 내기도 하고, 목을 길게 늘여 놓기도 한다. 이런 모든 것이 그의 눈과 혼과 손에 의해 재구성되는 것이다. 라 로통드 카페의 테이블에 앉아 쉼 없이 사람들의 얼굴을 그리면서(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많은 초상이 있는 것이기에) 그는 사람들을 판단하고, 감지하고, 사랑하고, 또 비난하기도 한다. 그의 데생은 말없는 대화인 것이다.” 모딜리아니는 병과 빈곤과 알콜중독으로 신음하면서도 몽파르나스에서 군림했던 정신적 귀족, 마지막 보헤미안이라 할 수 있다. 그의 파란만장한 생활의 에피소드들은 로맨틱한 전설을 만들어 내고, 애수에 젖게 하는 소설 같은 감동적 이야기를 낳게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자신은 그런 허황한 전설을 꾸며 낸 호사스런 자들을 혐오하고 경멸했을 것이다. 콕토의 말에 의하면, 그는 고객을 찾아다니며 즉석에서 비슷비슷한 초상화를 그려서 파는 그런 화가가 아니고 “객석에 앉아서 손금을 보는 존엄한 집시”로서 주문에 의한 초상화 따위는 한 장도 그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의 눈과 혼과 손 안에서 이루어지는” 데생은 ‘말없는 대화’를 나누게 한다. 파란 색의 신비를 찾아 헤맸던 방랑기사들 모딜리아니는 죽음을 눈앞에 보면서 자유와 무한의 색깔인 '파란 색의 신비'와 말없는 대화'를 나누다가 피안의 세계로 떠났다. 모딜리아니와 콕토는 다같이 끝없는 무한의 세계, 파란 색의 신비를 찾아 헤매다가 사라진 몽파르나스의 현대적 방랑기사들이라 할 수 있다. 콕토 또한 이러한 ‘말없는 대화’를 시를 통해서 수없이 시도했다고 할 수 있다. 콕토의 산문시 중에 <파란 색의 비밀>이라는 시가 있는데, 거기서 시인은 무수한 ‘파란 색의 신비’와 대화를 나눈다. 모딜리아니가 <파란 눈>이라는 제목으로 그린 쟌느 에퓌데른느의 초상을 바라볼 때면 즉각적으로 콕토의 이 <파란 색의 비밀>을 떠올리게 된다. “파란 색의 비밀은 잘 감추어져 있다. 파란 색은 피안 저쪽에서 온다. 오는 도중에 그것은 옅어져 산이 되어버린다. 매미가 거기서 운다. 새들도 거기서 지저귄다. 사실상 사람은 아무 것도 모른다. 감청 색이라는 것이 있다. 나폴리에서는 하늘이 물러가고 나면 성모 마리아가 벽 구멍에 머문다. 하지만 여기선 모든 게 신비다. 사파이어도 신비, 성모 마리아도 신비, 사이폰도 신비, 수부의 저고리 깃도 신비, 눈부시게 파란 햇빛도 신비, 그리고 내 가슴을 꿰뚫는 파란 눈빛도 신비다.” (<파란 색의 비밀> 전문) 모딜리아니의 색깔 중에서 유난히 우리의 시선을 끄는 것이 바로 이 ‘파란 색의 신비’이다. <파란 눈의 소녀> <파란 옷의 소녀> <파란 에이프런의 소녀> <파란 상의의 소년> 등, 모딜리아니의 작품에는 왠지 청색을 주제로 한 것이 많다. 특히 <파란 상의의 소년>(1918)에 보이는 연약한 섬세성은 일종의 우아함이 깃들어 있는 비애감을 느끼게 한다. 이것은 또한 그가 죽기 전에 그린 <자화상>(1919)의 눈과 입가에 떠도는 상냥함과도 상통한다. 모딜리아니는 1919년 4월 남프랑스 칸느에서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 “전 지금 행복합니다.”라고 썼다. 그는 또한 친구인 음악가 마리오 바르보리를 그린 데생에서 넘쳐 흐르는 신생(新生)의 희열을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것들이 모두 죽음을 예감한 인간의 환영이었을 것이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아무튼 모딜리아니는 죽음을 눈앞에 보면서 자유와 무한의 색깔인 ‘파란색의 신비’와 ‘말없는 대화’를 나누다가 피안의 세계로 떠났다. 모딜리아니와 콕토는 다같이 끝없는 무한의 세계, 파란 색의 신비를 찾아 헤매다가 사라진 몽파르나스의 현대적 방랑기사들이라 할 수 있다 -장 콕토는 1889년에 태어나 상류 사교계의 환경 속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열일곱살의 나이로 일찍 시단에 등장한 그는 피카소, 디아길레프, 모딜리아니 등과 사귀며 입체파적 미학을 시에 옮겨 씀으로써 새롭고 기발한 환상의 예술 형식을 만들어 냈다. 말년에는 프랑스 아카데미 회원 `시의 왕'으로 추대되는 등 명예를 누리다가 63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시집으로 [평조곡] [시집],소설 [사기꾼 토마] [무서운 아이들],희곡 [에펠탑의 신부] [목소리] [지옥의 기계],평론집 [직업상의 비밀] [살기의 어려움]등이 있다. 모딜리아니 -1925년 파리 갤러리빙에서 열린 모딜리아니 개인전 광경 ------------------------------------------------------------------------------- - ▲ 작품 감상 -[잔느 에퓌데른느의 초상] 캔버스에 유채 91.4X73cm 1918 -[두상] 석재 50.8X16X19cm 1911~12 -[장 콕토의 초상] 캔버스에 유채 100X81cm 1916 -[자화상] 캔버스에 유채 100X64.5cm 1919 -[누드] 캔버스에 유채 60X92cm 1917 -[파란 상의의 소년] 캔버스에 유채 92X73cm 1918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 "활쏘기는 군자의 덕성과 비슷한 바 가 있으니, 활을 쏘아 과녁을 벗어나더라도 오히려 그 이유 를 자기 몸에서 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