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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ineArt ] in KIDS
글 쓴 이(By): cara (Red)
날 짜 (Date): 1998년 8월  6일 목요일 오후 05시 31분 42초
제 목(Title): 미술의 신화로부터.....가나아트 1997/1 


미술아, 미술아. 난 너를 잊었단다. 너를 잊기로 했단다. 잊다가 생각나더라도 
다시는 널 돌아보거나, 전화하지 않기로 맹세했단다. 하기야 내가 아무리 이렇게 
단호하고, 비장하게 결별선언 한다고, 네가 콧방귀라도 뀔 턱이 있겠느냐. 넌 
언제나 그랬듯이 눈 깜짝 안할 것을 너무도 잘 알단다. 그럴 땐, 한 때나마 널 
사랑했던 내가, 그리고 이렇게 궁상맞은 편지를 쓰고 있어야 하는 내가 한심하고, 
또 미워진단다.

‘잊는다고? 그게 잘 될까? 전에도 그랬던 게 한 두 번이니? 내 서랍 속에 
던져놓은 편지만도 열 통은 되겠다’ 하고 넌 또 말하겠지. 그래, 내가 왜 이래야 
하는지… 난 내가 생각해도 너무 촌스럽다. 21세기를 코 앞에 둔 마당에…

돌아보면 나도 지금보다는 훨씬 잘 나갈 수 있었는데… 이현세나 박재동 만큼은 
아니라도, 어디 성인만화잡지나 대본소 만화라도 그리며, 혼자만은 행복하게 
여기며 살고 있을텐데…  왜, 내가 얘기했었지? 국민학교 고학년 거의 3년내내 
남들 하는 공차기도 안하며 하루 예닐곱 시간씩 줄곧 만화만 그렸었다는거. ‘얘가 
커서 뭐가 될려나’ 하고 엄마가 만화가란 직업이 먹고 살 만한 건지 아닌지 
알아보고 다녔잖아. 그리고나서 중학교에 들어가서는 만화와는 연을 끊고, 그림을 
했잖아. 그래도 그 때까지는 괜찮았는데, 고등학교 가서는 그마저 중단하고 
남들처럼 공부를 했지. 근데 거기까지도 좋았어. 결정적으로 틀어진 건, 대학교 
2학년 때 과를 선택하면서 미학과로 가게된 거지. 뭐, 어느 과도 비슷했겠지만, 
혹시 알아? 취직시험 준비해서 어디 기업체라도 들어가 꼬박꼬박 월급이나 받으며 
잘 지내고 있을지.

그런데, 미학과 선생님들이 이 얘길 들으면, ‘지 못난 줄 모르고 엄한 과 탓하네. 
누가 오라고해서 왔나? 다 제가 선택한 게지’ 하고 꾸짖으실 거야. 그건 맞아. 
사실은 졸업하고나서도 3~4년까지는 미학과 간 거 쬐끔도 후회 않했으니까. 
그리고, 따지고 보면, 어디 내가 미학과 수업 들어서 널 알게 됐냐? 민중미술 
한다고 수업 빼먹고 화가들이랑 인사동에서 어울려 다니다 그렇게 된거지. 
미술가의 사회적 책임 어쩌구 하면서… 그러니 어쨌든 이건 순전히 내 탓이다. 

미술아, 어쩌면 너랑 나랑 사이가 벌어진 건, 내가 평론이니 뭐니 한답시고 너에 
대해 떠들고 다녔던 때부터인지도 몰라. 그러느라 네 얼굴도 자주 못보고, 오히려 
평론하는 선배들한테서 너에 관한 나쁜 얘기만 들었으니까 말야. 차라리 그럴 
시간에 한 번이라도 더 전화하고, 널 불러내고, 잘 꾀어 잠자리라도 같이 했으면 
지금하곤 달랐을거야. 그런데, 누가 평론하고 싶어서 했니? 그림 못 그리고, 미대 
안나왔으니까 했지. 이제나마 사과하는데, 한 때 내가 너에 대해서 한 말, 네 맘 
상하게 했다면 정말 미안해. 널 잘 몰라서 한 말이야. 

그런데 평론 얘기가 나왔으니까 말인데, 그거 나처럼 순진한 사람 할 짓이 못 
돼더라. 이 눈치 저 눈치 보는 것도 신경쓰이지만, 내가 하는 말에 나 스스로도 
확신할 수 없었으니까. 근데 말이란 게 그렇잖아. 자꾸 명료한 걸 요구하는데, 
그걸 비껴 갈려니까 결국 요리조리 피하는 법만 배우게 되더라고. 이것은 
이러저러한데 이 점이 아쉽다, 그렇지만 어쩌구 저쩌구... 요걸 잘해야 하는 거야. 
그 배합을 말야. 그런데 생글생글 웃어줘봤자, 뒤로는 욕만 먹는게 또 평론 
아니겠어? 한 달 내내 한 이백매쯤 초인적으로 써제껴야 단돈 백만원을 넘기 힘든 
노동치고는 대가가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 안해?

난 그래도 화가들은 살기가 났다고 생각해. 우직단순하게 한 우물만 파다보면 쨍할 
날도 있겠지 하고 희망은 갖고 살 수 있잖아? 뭐, 아니라고 말해도, 결국은 
경력란에 한 줄 덧붙이는 재미로 팔리지도 않는 그림 자기 돈 들여가며 내거는 게 
아니겠어? 화가들은 목표가 있어서 좋겠다. 설령 생전엔 못 이뤄도 작고 뒤에라도 
기회가 있잖아? 그리고 뭐니뭐니 해도 예술가는 자유인이잖아. 자기 하나만 
생각하면 되고… 그러니까 머리도 덜 복잡할 테고… 내가 이렇게 말하니까, ‘누구 
성질 긁을 일 있냐, 모르는 소리 작작 해라’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는 것 
같구나. 

우리 나라 전체 작가들의 평균 소득과 평론가들의 평균소득을, 소요비용을 
제외하고서 계산해봐라, 그래도 너희들은 개인전 서문 몇 개만 써주면 남들 한 달 
일한 만큼 벌지 않냐? 남들은 화가라 하면 그리는 대로 돈이 되고, 크게 그리면 
크게 그린 만큼 면적에 비례해서 값이 올라가고, 물질적 풍요와 정신적 자유를 
동시에 지닌 존재들인 줄 알지만 뚜껑을 열고 보면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소리다. 
그런 화가들 전체의 1%도 아니다… 등등 말이야. 하기야 피장파장인 것 같아. 말해 
뭣 하겠니? 잘 나가는 화가는 잘 나가는대로 고뇌가 있는 법이니… 글쎄, 어떤 
유명 화가는 그닥 크지도 않은 그림 한 점에 수 천만원씩 하는 화가였는데, 자기가 
자기 그림을 제맘대로 팔 수 없었대. 왜냐하면, 엄처되시는 분이 그림값을 
통제하시느라 당신의 허락없이 그림을 샀다간 누구건 혼쭐을 냈다나. 그래서 술 
생각이 날 때마다 엽서 만한 그림을 몰래 그려가지고 나와설랑 그걸 감쪽같이 
팔아서 술을 마셨다는 거야. 믿거나 말거나.

미술아, 난 아직까지도 널 잘 모르겠어. 언젠가 타타르키비치란 아저씨가 너네 
집안에 대해서 “예술은 사물 재생, 형식 조성, 경험 표현의 의도적인 
인간활동으로서 어떤 환희나 정서 혹은 충격을 유발시키는 것”이라고 정의한 말 
생각나니? 내가 왜 너한테 말해주며 웃었잖아? 그럼, 너네 식구 아닌 게 뭐냐. 
얘도, 쟤도, 쟤도 다 너네 식구겠네 하고 말야. 그런데 그건 딱 한 사람 너희 
아버지만 아는 사실일 것 같아. 너희 아버지가 아무나 데리고 와서 얜 우리 
식구다, 하시면 식구인 것이고, 얜 아니다 하시면 아닌 것이고. 너희 아버지가 
예술사이고, 예술개념이고, 또 달리 말해 제도 바로 그 분이신 셈이니까. 예술처럼 
보이는 사기와 사기처럼 보이는 예술, 예술이 아니라고 말하는 예술의 사기와 
사기라고 말하는 사기의 예술 따위를 구분하실 수 있는 분이 제도말고 또 누가 
있겠어?

언젠가 어떤 조각가가, ‘조각가들은 자신이 예술가가 아니라 조각가라고 생각하며 
작품을 한다, 그게 한국 조각의 문제다’라는 요지의, 물론 내 식대로 요약한 
것이지만, 아무튼 그런 비슷한 얘기를 했는데, 곱씹어봐도 역시 옳은 말이란 
생각이 들어. 근데 나는 이런 생각도 해. 예술가들은 자신이 그냥 사람이 아니라 
예술가라고 생각하며 예술을 한다, 그것이 문제다! 예술가라고 생각하는 그 순간, 
그러니까 직업의식이나 직업적 사명감을 갖는 순간, 여지없이, 제도의 손바닥 
안으로 끌려들어와 버린다는 거지. 그 손바닥에서는 아무리 초음속에, 광속에, 
심지어 초광속 공간이동을 해봤자 결국은 부처님 손바닥이라니깐! 아방가르드건, 
아방가르드의 아방가르드건, 아방가르드의 아방가르드의 아방가르드건, 여기엔 
예외가 없다고 믿어, 의심치 않아.

그러면 뭐냐, 어쩌겠다는거냐, 하고 물으신다면, 난 이렇게 대답하고 싶어. 
‘예술가인 듯 아닌 듯하게 예술인 듯 아닌 듯한 것을 하며 살아가는 거다.’ 난 
실제로 그런 ‘화가인 듯 아닌 듯한’ 분을 알아. 그 분은 그러니까, 밖에서 보면 
화가가 아닌 것 같은데, 가까이서 보면 화가이고, 더 가까이서 보면 화가가 
아니고, 또 화가라고 생각하며 보면 화가가 아닌 것 같고, 화가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보면 화가인 것 같고… 좌우간 알쏭달쏭, 긴가민가한 화가이자 비 
非화가인 분이야. 난 그 분이 백남준보다 더 위대한 ‘21세기형’ 아방가르드라고 
생각해. 

음, 내가 21세기형 아방가르드라고 부르는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어. 
하이젠베르크란 아저씨가, 나도 직접 들은 건 아니지만, 이런 얘기를 했대. 
“예술가인지 아닌지는 한 마디로 얘기할 수 있는 게 아니니라. 오직 어느 
정도까지 예술가인지를 확률로서만 얘기할 수 있을 뿐이느니라”라고 말야. 
그러니까 어떤 사람을 예술가이다, 아니다라고 잘라 말할 수 없고, 다만 이 사람은 
50% 예술가다, 67% 예술가다, 혹은 86.765% 예술가다라는 식으로 밖에 말할 수 
없다는 거지. 예술과 비예술은 서로 다른 게 아니라 하나의 ‘예술이자 아닌 
것’이 보여주는 동시적이고도 완전히 합치되는 양면성이다! 이름하여 양자론적 
예술론, 확률적 예술론이라나? 아직까지 이 분의 예술관을 받드는 미학자들은 많지 
않지만, 원래 혁명적인 미학은 자리를 잡는 데 시간이 걸리는 법이니까, 늦어도 
21세기 중반쯤에는 새로운 이론으로 추앙받으리라 믿어.

미술아, 널 안 본지 꽤 오래 되었구나. 넌 지금 내 얘기 어떻게 생각하니? 대꾸할 
가치도 없는 얘기라고? 횡설수설에 혹세무민하는 사이비 교주 같다고? 나랑 
헤어지고나서 약간 어떻게 된 거 아니냐고? 까짓, 네가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어. 
꼭 네가 들어야 하는 얘기도 아니고. 하지만 이것만은 알아다오. 네 무관심과 
도도함과 친절하지 못함과 알 듯 모를 듯 종잡을 수 없음과 잡힐 듯 안 잡힐 듯 
멀어짐의 모든 안타까움 속에 너는 존재했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점. 
마지막으로 딱 한 마디만 충고하는데, 너 제발 그러지마. 꼭 나만 생각해서 하는 
얘긴 아니야.

미술아, 너와 헤어지고나서 멀티미디어인지 아닌지 하는 것을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지내는 동안, 그 멀티미디언지 아닌지 하는 것들 속에서 순간 순간 네 모습을 
발견할 때가 있었어. 그런데 그것이 진짜 네 모습인지, 아니면 과거에 널 보았던 
내 기억 속의 잔상인지, 혹은 속된 말로 미련이란 건지 확실힌 모르겠어. 그래, 널 
잊는 게 쉽지는 않을 거라 생각해. 하지만 미술아! 그래도 난 널 잊을란다. 그러니 
너도 혹시나 전화하지 마. 전화하지…마! (삐삐도 치지마!)

<이유남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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