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envirOnment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김 태하 ) 날 짜 (Date): 2001년 10월 30일 화요일 오후 05시 02분 42초 제 목(Title): 장회익/ 생태적 사고와 인류의 생존 생태적 사고와 인류의 생존 장 회 익* 천년 후까지도 인류가 살아남을 것인가? 우리가 지금 던져 볼 수 있는, 그러나 그 누구도 아직 공개적으로 거론해 보지 않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는 앞으로 천년 후 인류가 이 지구상에 살아남아 있을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 질문은 물론 두 가지 가능한 해답을 주고 있다. 인간이 살아남으리라는 가능성과 그렇지 못하리라는 가능성이다. 만일 이 두 가지 가능성 가운데 어느 하나가 결정적으로 우세하다면 이 물음에 대해 우리가 특별한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없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물음에 대해 그 어떤 확신을 가지고 50 대 50 이상의 긍정적 가능성을 제시할 사람이 그리 많지 않으리라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이 문제를 조금 더 세분화해 보면 미래의 가능성은 다시 4개의 시나리오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천년 후 지구상에 체중 1킬로그램 이상의 고등동물이 전혀 살아남지 못할 가능성이며, 둘째는 인간을 제외한 일부 고등동물이 생존하여 동물 세계의 복원 가능성을 남기는 가능성이다. 셋째는 인간이 생존하기는 하나 장기적인 생존을 전혀 보장할 수 없는 극히 불안정한 상태로 생존을 이어갈 가능성이며, 넷째로는 생태계의 안정을 복원하여 인류의 장기적 생존 가능성이 확보된 가운데 살아가게 될 가능성이다. 위에서 보듯이 첫째 시나리오와 둘째 시나리오는 모두 인간이 살아남지 못하는 상황을 말해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다시 여타 동물들이 생존하게 될 가능성과 그렇지 못한 가능성으로 나누어 보는 것은 인간의 책임이 단순히 인간만의 생존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만일 인간이 자신이 이미 저지른 여건으로 인해 도저히 더 이상의 생존이 불가능하리라고 판단한다면 여타의 동식물들에게나마 그 생존권을 넘겨주고 사라지는 것이 최소한의 도리를 지키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아마도 이러한 최소한의 도리마저 지키지 못하고 멸종할 가능성이 더 크지 않을까 생각된다. 인간이 멸종의 위기에 몰리게 된다면, 이것이 전혀 예측할 수 없는 급작스런 상황에 의한 것이 아닌 한, 자신의 생존을 위해 최후까지 버티면서 여타 동식물들의 생존 조건까지도 모두 유린한 후 자신도 결국 멸종하게 될 가능성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동시에 인간이 앞으로 천년 간 요행히 살아남는다 하더라도 이미 대부분의 자연 생물종들을 멸종시키고 극히 인위적인 생물종 몇몇 만으로 생존을 유지하면서 어느 순간에 최후를 맞이할는지 알지 못하는 불안정한 상황 속에서 살아가게 될 가능성 또한 배제할 수 없다. 이것 또한 그다지 달가울 것이 없는 선택지임에 틀림없다. 그렇게 생각해 본다면 이 네 가지 시나리오 가운데 여기서 우리가 선호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넷째 경우만이 될 것이며, 인류의 장래에 대한 긍정적 전망 또한 그만큼 더 축소되어 아마도 25% 이상의 가능성을 점치기 어렵지 않을까 생각된다. 일견 매우 혐오스럽고 불경스럽기까지 한 이 질문을 굳이 던지게 되는 것은 이러한 가능성의 많은 부분을 우리는 주체적 노력과 결단 여하에 따라 바꾸어 나갈 수도 있으리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생존해 온 그 어떤 생물종과도 달리 인간은 이제 주어진 여건만에 따라 숙명적으로 생존을 영위해나가는 존재가 아니라 의식적이고 주체적인 판단에 의해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고 책임져나가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인간은 자신의 생존에 관계된 문제를 스스로 진단하고 대처할 지적 능력을 지니고 있으며, 필요한 경우 상황을 물리적으로 전환해낼 기술적 능력 또한 아울러 보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물론 오늘날과 같은 안이한 상황 대처 자세 속에서 가능한 일은 아니다. 이를 위해서는 새로운 차원의 포괄적 사고가 요청되며, 이를 일러 이 글에서는 '생태적 사고'라 부르기로 한다. 그러므로 인류의 생존은 이제 우리가 가장 적절한 생태적 사고를 해내느냐 그렇지 못하냐 하는 데에 크게 좌우되는 상황이라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이 글에서 이러한 생태적 사고의 일환으로 인류가 생존 위기에 몰리게 되는 원인을 살펴보고 이에 적절한 대처 방안이 있는지를 찾아보기로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먼저 인류의 장기적 생존을 어렵게 하는 요인들이 무엇인지부터 살펴나가기로 하자. 인류의 장기적 생존을 어렵게 하는 요인들 인류의 장기적 생존을 어렵게 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인은 인간이 유전적 그리고 문화적으로 물려받은 성품적 특성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은 오랜 진화과정을 통해 마련된 생존 전략과 함께 인류의 생존 경험을 통해 축적된 문화 유산을 전수받아 인간 특유의 성품을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인간이 물려받은 이러한 성품 속에는 오늘 인류가 당면하고 있는 생태적 위기를 헤쳐나갈 지혜는 많이 담겼다고 말할 수 없다. 인류와 인류의 그 어떤 선조 생물종들도 오늘 인류가 당면한 바와 같은 인위적 환경 여건이나 과잉된 풍요로 인한 생존위기를 겪은 경험을 가지고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인류가 물려받은 유전적 그리고 문화적 정보의 저장고 속에는 가혹한 환경과 궁핍한 여건을 헤쳐나가기에 적합한 정보들이 각인되어 있어서 이들이 본능적 정서적 성품으로 발현되고 있다. 따라서 이들은 본능적으로 풍요와 안락을 추구하고 투쟁과 포획을 탐하는 반면, 이것이 가져 올 위험에 대해서는 적절히 대처할 능력을 부여받고 있지 않다. 한마디로 오늘 인류가 당면한 위험은 인류가 유전적 문화적으로 물려받은 성품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해당한다. 둘째로, 인류의 장기적 생존을 어렵게 하는 보다 현실적인 요인은 인간의 기술적 능력이 신장하는 것에 비해 이의 적용이 가져 올 결과를 예상하기에 적합한 과학적 이해가 부족하다는 점이다. 현대 문명이라고 하는 것은 한 마디로 풍요와 안락을 추구하는 인간의 성품과 이를 가능하게 해 줄 과학기술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데서 이루어진 결과이다. 그러므로 이것이 지닌 위험을 제어할 기제가 우리의 성품 속에 들어있지 않다면, 최소한 이를 객관적으로 파악할 지성을 통해 그 위험에 대처해야 할 것이나, 현실은 거기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생태계를 파멸시킬 기술적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생태계의 건강에 대한 과학적 이해를 지니지는 못하다. 현대 과학은 그 특성상 부분적 확실성을 기하는 일에는 매우 효과적인 반면 전체적 연관성을 살피는 일에는 적용되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과학은 지금까지 구체적인 기술적 활용에는 큰 위력을 발휘해 왔으나 인류의 장기적 생존 문제와 같은 종합적이고 거시적인 시각을 확보하는 일에는 상대적으로 많은 기여를 하지 못했다. 더구나 지금까지의 주된 관심사가 자연 환경의 극복과 활용을 통한 생존 여건의 개선에 있었으므로 이러한 목적에 적합한 형태의 지식을 추구하는 데에 주된 노력을 기울인 반면 자연과 인간에 대한 포괄적 이해는 오직 부차적 관심사에 머물러 왔다고 할 수 있다. 셋째로, 인류의 장기적 생존을 어렵게 하는 또 하나의 요인으로 인간이 지니고 있는 가치관 문제를 생각할 수 있다. 인간에게 보편화되어 있는 일차적 가치는 각 개인들이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개체적 생존 가치이다. 그러므로 개인의 생존 가능성을 넘어서는 인류의 생존 문제는 그다지 절실한 과제로 느끼지 않는 경향이 있다. 한 두 세대도 아닌 천년 이후의 문제를 논의한다고 하면 아예 하품부터 하고 나올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물론 우리의 힘이 닿지 않는 먼 미래의 일을 생각하는 것은 한가한 지적 유희에 해당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천년 이후 인류의 생존 문제는 우리의 힘이 미치지 않는 일이 아니다. 이들의 생존은 바로 오늘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의해 크게 좌우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말하자면 현 세대야말로 인류의 생존에 결정적 영향을 줄 첫 세대라고 할 수 있다. 다행히 인간의 가치관은 자기 중심적인 개체적 생존 가치를 넘어서는 측면이 있다. 그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공동체적 이해를 개체적 이해에 우선하는 것이며, 이를 다시 승화하여 종교적 가치로 나가기도 한다. 그러나 아직 인류의 장기적 생존에 관한 현대인의 가치의식은 상대적으로 그리 높지 않은 것이 사실이며, 이는 인류의 장기적 생존을 위해 풀어야 할 하나의 숙제가 아닐 수 없다. 마지막 네 번째로 사회적 문제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인간은 본래 협동을 통해 환경의 어려움을 극복해낸 사회적 동물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인간은 많은 경우 지나친 집단주의 아래 적지 않은 개인적 희생을 감수하며 생존해 온 것이 사실이다. 비교적 최근에 이르러 이른바 민주주의의 기치 아래 개인의 권익이 크게 신장되었으며, 이제는 이것이 사회적으로 보편화되어 가고 있다. 이와 함께 그 동안 눌려 있던 인간의 개인주의적 성향이 크게 대두되고 있다. 이는 어느 면에서 인간 본성에로의 회귀라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은 그 본성에 있어서 본능적으로 개인주의와 소집단주의의 경향을 지니고 있으며, 아직도 미래 세대까지를 아우르는 범인류적 이해에는 익숙하지 않다. 더구나 인간을 넘어서는 타 생물종들에 대한 연대적 감성을 지니는 상황에 이르는 길은 요원한 실정이다. 이러한 개인주의적 성향과 더불어 앞서 언급한 인간의 상황 개선 욕구 그리고 근대 과학의 기술적 활용이 결부하여 이루어낸 사회 체제가 이른바 자유민주주의라 하는 자본주의 체제이다. 이는 기본적으로 개인의 수익을 목표로 하는 경쟁적 경제 활동을 보장함으로써 인간의 소유 및 경쟁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동시에 과학기술을 비롯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생태계로부터 가능한 최대한의 재화를 이끌어내게 함으로써 인간의 부를 축적시켜나가는 사회·경제 체제이다. 사회적 불평등 등 수 많은 내적 모순을 함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지배적 체제로 군림하고 있는 이유는 전체적인 부의 창출에 대해 이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른바 부의 창출이 곧 생태적 착취를 의미한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생태계를 파괴시켜 인류의 장기적 생존에 부정적 결과를 초래하는 가장 위험한 사회적 장치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지구 생태계에 관한 몇 가지 개념 정리 인류의 장기적 생존을 위협하는 이러한 여러 점들을 생각할 때 우리가 얻게 되는 가장 중요한 결론은 인간이 특별한 의식적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는 파국적인 결과를 회피하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라는 사실이다. 인간이 이미 전수받은 유전적 문화적 성향을 비롯하여 현재의 지배적 사회 체제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갖추고 있는 모든 상황적 여건은 이를 극복하기보다 오히려 조장하는 방향으로 작용할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우리에게 요청되는 것은 무엇보다도 선명한 문제 의식을 가지고 상황에 대한 과학적 이해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는 일이다. 특히 생태계에 관한 우리의 과학적 이해가 매우 불충분한 상태에 놓여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사실의 파악을 위해 이것 이외에 더 신뢰할 만한 것이 없으므로 일단 이를 기준으로 출발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사실 현대 과학은 우리 생태계에 대해서도 많은 중요한 지식들을 축적해 놓고 있다. 우리가 아직 충분한 과학적 이해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은 이러한 지식의 소재가 부족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이들을 엮어 하나의 의미 있는 그림을 그려내지 못하는 데에 있다고 봄이 옳을 것이다. 우리가 지구 생태계에 대해 고려해야 할 매우 중요한 한가지 사실은 인간의 생존은 지구 생태계가 겪어 온 긴 역사적 과정 가운데 비교적 짧은 특정 시기에 이루어진 대단히 특별한 여건 아래에서만 가능하다는 점이다. 지구 생태계가 변화해 나가는 시간 축 위에서 보자면 지구 생태계 또한 시간에 따라 지속적으로 변해왔으며 또 변해가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과정 안에서 인간은 특정 시기의 지구 생태계 상황 안에서만 생존이 가능하며, 만일 생태계가 너무 급격히 변하거나 인간이 너무 급격히 변해 인간과 생태계 사이의 친화적 관계가 상실되면 생존이 불가능해진다. 예를 들어 인간이 만일 지금부터 20억 년 전의 생태계에 놓이게 되면 생존이 전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 때까지만 해도 지구 대기 안에는 산소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떠한 생태계가 인간의 생존을 위해 적절한 것인가? 이 점을 논의하기 위해 우리는 생태계 자체의 안정성과 특정 생물종에 대한 부양 가능성에 관련된 몇 가지 개념들을 정의할 필요가 있다. 먼저 생태계가 '안정'하다는 것은 생태계 내외에서 일정한 충격이 가해졌을 때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원래의 상태 또는 이에 유사한 상태로 복귀함으로써 이것이 함유하고 있는 생물종들에 대해 비교적 큰 타격을 주지 않는 상황을 가리키는 것으로 규정할 수 있다. 그리고 인간에 대한 생태계의 부양 가능성을 나타내는 개념으로 '인간 부양성 안정' 개념을 도입할 수 있는데, 생태계가 '인간 부양성 안정'을 지녔다고 하는 것은 이것이 그 안에서 인간의 생존을 가능하게 하면서 안정을 유지하고 있는 상황을 의미한다. 반면에 '인간 비부양성 안정'을 지녔다고 하는 것은 이것이 안정하기는 하나 그 안에서 인간을 부양할 여건은 구비하고 있지 않은 상황을 말하는 것으로 규정할 수 있다. 그리고 다시 '인간 한계부양성 안정'이라는 개념을 정의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생태계 용량 전체가 인간의 부양을 위해 활용되면서도 안정한 상황을 유지하는 경우를 지칭하는 개념이다. 우리는 또한 생태계의 '불안정' 상황도 규정할 수 있다. 이는 물론 안정하지 못한 상황을 의미한다. 이와 함께 생태계가 장기적 생존이 가능한 새 생물종들을 정상적으로 산출할 때 '생산적'이라 부르기로 하며, 한 생태계가 생산적이며 동시에 안정할 때 이를 일러 '건강'하다고 말하기로 한다. 생태계의 몇몇 특성에 관한 이러한 규정과 아울러 우리는 이제 우리 지구 생태계가 지닌 성격에 대해 고찰해 보기로 한다. 우선 우리 생태계는 35억 년 전 원초 생태계로 출현한 이래 대략 지난 300만 년 전 인간이 출생할 때까지 수 십 억년 간 '인간 비부양성 안정'을 지녀 왔고 인간 출생 이후 대략 지난 1만 년 전까지 '인간 부양성 안정'을 유지해 왔고 말할 수 있다. 특히 '인간 부양성 안정'을 지녔던 지난 수 백만 년 이후 최소한 1만 년 전까지의 생태계는 매우 생산적이고 건강한 존재였음을 알 수 있다. 지구 생태계는 이 기간 동안 성공적으로 생존을 유지해 왔을 뿐 아니라 인간과 같은 놀라운 존재까지도 그 안에서 산출해낼 만큼 활발한 생산력을 가진 존재였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에게 관심사가 되는 것은 '인간 한계부양성 안정'을 지닌 생태계의 모습이다. 위에서 정의했듯이 '인간 한계부양성'이라 함은 생태계 용량 전체가 인간에 의해 활용되는 상황을 의미하는데, 인간의 경우 대체로 지난 4∼5만 년 이래 지구의 주요 서식지 대부분을 점유한 상황이었으므로 이 시기로부터 '문명'에 의해 생태계에 급격한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한 대략 1만 년 전까지의 시기를 '인간 한계부양성 안정'을 지녔던 시기로 보는 것이 적절할 듯하다. 특히 지난 4∼5만년에서 1만년에 이르는 대략 3∼4만 년에 걸친 기간 동안 인류는 대략 400만 정도의 인구를 유지하며 지구의 거의 전 지역에 퍼져 수렵, 채취 등 원시적 형태의 삶을 영위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들의 인구가 이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일정한 수준을 유지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우리 원시 생태계가 특별한 변화 없이 인간 규모의 생물종을 이 정도의 숫자로 부양하면서 생태적 균형을 유지하는 한계상황에 있었음을 강하게 암시해준다. 만일 이 이상의 수용 능력이 있었다면 인간의 숫자가 더 늘어났을 것이고, 또 이것이 무리였다면 인간이 줄어들었거나 혹은 다른 큰 변화를 초래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손에 의한 특별한 변형이 없는 한 우리 생태계는 대략 400만의 인구를 부양할 능력을 가지는 존재이며, 이후의 인구 증가는 생태계 자체의 변화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라는 가설을 설정할 수 있다. 즉 이 시기 이후의 변화는 종의 생물학적인 성격에는 큰 변화 없이 오히려 인간에 의해 생태계 자체가 변형됨으로써 인간의 부양 능력을 키워 온 것이라 말할 수 있다. 문제는 이렇게 변형된 생태계가 과연 그 건강을 지탱해나갈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위에 규정한 바와 같이 여기서의 생태계 건강은 파국적인 붕괴의 위험이 없이 생물종들의 자연스런 생멸과정을 포함한 진화의 기본 질서를 유지해 가는 상태를 의미한다. 우리 생태계는 건강한가? 그러므로 우리가 관심을 가지게 될 일차적 과제는 현재의 우리 생태계는 얼마나 건강한가를 파악하는 일이다. 그러나 이를 논의하기에 앞서 우리 생태계가 그간 인간에 대한 부양 능력을 얼마나 신장시켜 왔느냐 하는 점을 먼저 간단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오늘 우리 생태계는 자그마치 60억의 인구를 부양하고 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60억이라고 하는 개체 수 그 자체가 아니다. 생물 종 가운데에는 이 정도 이상의 개체 수를 지닌 종들이 얼마든지 있다. 문제는 인구 400만으로 이미 '한계부양적' 상황에 있던 생태계가 이후 줄곧 생태계 자체의 변형에 의해 그 개체 수를 이만큼 증가시켰다는 데에 있다. 이는 이른바 '문명'이라 불리는 생태계의 변형을 통해 400만에서 60억으로 1,500배의 부양 능력을 키웠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런데 이것은 단지 개체 수 즉 인구에만 국한되는 일이 아니다. 오늘의 한 개체 즉 한 사람이 주변 생태계에 주고 있는 영향이 만 년 전의 한 사람이 주변 생태계에 주어 온 영향과 동일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문명 이전의 사람은 하루에 대략 8.5-20 MJ의 에너지를 소모하고 살아감에 비해 현대 기술사회 사람은 970 MJ의 에너지를 소모하고 살아간다. 물론 현대의 모든 사람이 기술사회 기준의 에너지를 소모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평균으로 보더라도 원시사회에 비해 일인당 10배 이상의 에너지를 소모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며, 이를 감안한다면 인간이 생태계에 미치고 있는 부하량은 1,500에 다시 십여 배를 곱한 정도에 이를 것이다. 인간이 생태계에 부하를 늘여나가는 이러한 경향은 최근에 이를수록 더욱 급격히 증대되고 있다. 지난 100년간 세계의 총생산량은 미화 2.3조불(1900년)에서 39조불(1998년)로 17배 증가했고, 금속재료 사용량은 년 간 2천만 톤에서 12억 톤으로 60배, 석유 사용량은 일당 수천 배럴에서 7,200만 배럴(1997년)로 수 만 배, 자동차 대수는 수 천대에서 5억대로 수 십만 배가 증가했다. 즉 지난 100년 간 인구가 4배로 증가했을 뿐 아니라 인구 일인당의 생산량 또한 4배 이상이 증가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많은 사람들이 그저 경이의 눈으로만 보고 있는 이러한 경향은 결코 우리 생태계가 일으키고 있는 그 어떤 기적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오직 지구의 생태계 파손이라고 하는 대가를 통해 얻어지고 있을 뿐이다. 대체불가능한 자원의 소모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대체가능한 자원의 일부로 생각되어 온 생태적 요소들조차 속속 회복 불능의 상황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지하수 수위의 하강, 산림면적의 감축, 수산자원의 감소, 그리고 엄청난 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생물종의 대규모 멸종이 바로 그것이다. 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에 따르면 이러한 멸종의 속도는 정상적인 멸종 속도의 천 배 내지 만 배에 해당하는 것으로 일년 간 멸종되는 생물종이 아무리 줄잡아도 대략 27,000 종에 이른다고 한다. 이러한 추세로 멸종이 계속된다고 하면, 현재 지구상의 총 생물종 수가 1,000만 종을 좀 웃도는 정도인 것으로 추산되므로 대략 천 년 후가 되면 지구상의 모든 생물이 멸종하고 만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와 함께 우리가 우려해야 할 또 한가지 중요한 점은 요즈음 관심도가 높아지고 있는 이른바 광역환경변화(Global Environmental Change)의 문제이다. 이는 지구상의 이산화탄소(CO2) 농도와 지구의 평균 기온 등이 급격히 상승하고 있으며, 이것이 지구 생태계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리라는 것이다. 지구 기온 상승의 주된 원인이 인간의 활동 특히 이산화탄소의 과잉 배출 때문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다소의 논란이 없지 않으나, 이것이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고 있으며 인간의 산업 활동이 이를 악화시키는 데에 크게 한 몫을 하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우리 생태계가 당면하고 있는 이러한 여러 징후들은 생태계 건강의 주된 기준인 안정성에 커다란 문제가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다시 말해 오늘의 생태계는 '인간 한계부양성 안정' 상황이 아닌 '인간 한계부양성 불안정' 상황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생태계가 안정된 상황에 있던 대략 만 년 전 이후 어느 시점에 이르러 이것이 '안정' 상황에서 '불안정'의 상황으로 넘어섰음에 틀림이 없는데, 우리에게 특히 중요한 것은 역사의 어느 시점에 이러한 전환이 이루어졌는가를 규명해 내는 일이다. 만일 우리가 이를 규명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이 시점의 생태계를 목표로 우리 생태계를 복원시키는 노력을 펼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물론 이미 변형된 생태계가 과거의 생태계로 퇴행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안정성을 해치지 않고 생태계가 감당할 수 있는 최대부양의 용량을 가늠해내고 이에 따라 생태계에 가해지는 부담을 조정함으로써 생태계의 자연적인 치유를 유도하기 위함이다. 우리 생태계에 대해 이러한 전환의 시점을 정확히 규명하는 것은 물론 쉬운 일이 아니겠으나, 굳이 한 가지 기준을 제시한다면 주요 변화들에 대한 생태계의 반응이 '억제적 되먹임'의 상황에서 '상승적 되먹임'의 상황으로 전환되는 시점을 고려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이를 수학적 용어로 표현하자면 생태계의 주요 지표가 (-) 지수함수적 반응에서 (+) 지수함수적 반응으로 전이되는 시점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느 생물종의 개체수를 인위적으로 감소시킬 경우 이 생물종의 개체수 증가 속도가 더 빨라지면 안정성을 유지하는 것이나, 이것이 오히려 개체수 증가의 속도를 감소시키는 상승작용으로 나타나면 이를 불안정의 징표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물론 어떤 생물종을 지표로 삼아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 등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적지 않지만, 이것이 생물종들의 대규모 멸종 사태가 시작된 시점과 대략 일치하리라고 보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점을 인정한다면 오늘의 대규모 멸종이 시작된 시점을 찾아내어 최소한 그 시기로의 복원을 서두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지난 리우 환경선언 이래 이른바 "환경적으로 건전한 지속 가능한 개발"에 합의한 바 있으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미 '불안정'에 들어선 현재의 상황을 '지속'시키는 것으로는 파국적 결과를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적어도 생태계가 안정을 되찾을 때까지 부하량을 경감시키면서 지속적인 복원의 노력을 기울여 나가는 일이다. 우리는 물론 과거의 생태계를 되찾을 것으로 기대할 수는 없다. 그리고 우리는 아직 우리 생태계가 어떠한 형태로 안정을 되찾게 될는지를 확신할 수 없다. 우리는 오직 이를 위해 지속적인 연구를 수행해나가야 할 것이지만, 그 어떤 뚜렷한 결론에 이르기까지는 최소한 대규모 멸종 이전의 생태계 상황을 목표로 삼아보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이는 물론 우리의 문명을 원시의 상태로 되돌려야 함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 시기 생태계에 준하는 건강의 회복과 함께 그 안에서의 조화로운 삶을 이룰 수만 있다고 하면, 그 위에 수준 높은 창조적 문화를 전개해 나가는 것은 얼마든지 허용될 수 있으며 또 허용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설혹 현시점에서 이러한 최종적 목표에 대한 구체적 그림은 그려내기 어렵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우리가 지향해야 할 실천 방향이며 이러한 마음의 지향이 오늘의 당위가 되어야 한다는 점에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의 현실적 삶과 어떤 연관 아래 놓여있는가 하는 점에 대한 절실한 새로운 이해가 결여된 상태에서 이를 위한 강력한 실천의지를 이끌어내기는 어렵다. 따라서 우리는 이 문제가 우리의 주체적 삶과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가를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이며 이를 위해서는 다시 생명과 인간에 대한 폭넓은 이해가 요청된다. 생명과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 현대과학이 밝혀주고 있는 바에 의하면 지구상의 생명은 긴밀한 시간공간적 연계를 통해 구성되는 하나의 정합적 체계를 이루고 있으며, 우리가 기왕에 알고 있는 모든 개별 생명체들은 모두 이 하나의 정합적 체계를 이루는 부분들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본질적으로 이 한 전체적 생명에 의존하여 한시적인 생존을 유지해 가는 성격을 지닌다. 그리고 이 모두를 포괄하는 정합적 체계로서의 전체 생명은 태양과 지구 사이의 에너지 흐름을 모태로 대략 35억 년 전에 탄생했으며, 이후 지속적인 성장과 번영을 이룩하면서 최근에는 '인간'과 같은 영특한 존재까지도 발생시켜 이의 중요한 한 부분을 이루게 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한 총체적 생명을 '온생명'이라 부를 수 있으며, 이와 구분하여 이 안에서 의존적 한시적 생존을 유지하는 낱낱의 생명체들을 개체 혹은 '낱생명'이라 부를 수 있다. 이들은 모두 온생명이라고 하는 큰 틀을 떠나 독자적으로 생존해 나갈 수 없으며, 오직 온생명의 한 부분으로서 온생명의 여타 부분에 의존해서만 생존할 수 있는 존재들이다. 한편 온생명은 낱생명들로만 구성된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낱생명들이 형성됨으로써 존재하게 되는 것이며, 또 이들의 소멸과 함께 소멸될 수도 있다. 이러한 점에서 낱생명을 위한 온생명의 중요성 못지 않게 온생명 또한 낱생명들의 성공적 생존에 그 존재성을 의존하게 된다. 이렇게 마련된 낱생명들은 그 자체로서 유한한 생존 기간 동안 상당한 독자성을 부여받아 활동하면서 이른바 자연선택이라 불리는 온생명내적 기제를 통해 더욱 정교한 새 형태로 지속적으로 발전해나간다. 그리고 이러한 낱생명들은 다시 자신들 간의 일정한 유기적 관계를 형성함으로써 보다 높은 질서의 구현체인 상위의 개체를 이루어 나가기도 한다. 예컨대 대표적인 하위 개체인 '세포'들이 모여 상위의 개체인 '유기체'를 형성할 수 있으며, 다시 유기체들이 모여 더욱 상위의 개체라 할 수 있는 '사회'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정신이라든가 문화와 같은 보다 고차적인 질서는 다시 이렇게 이루어진 상위 개체들인 유기체나 사회를 바탕으로 가능해진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지금까지 우리가 논의해 온 지구 생태계는 온생명 신체의 주요 부분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지구 생태계의 건강 문제는 곧 온생명의 건강 문제라 말할 수 있으며, 따라서 지구 생태계의 건강을 논의하기 위해서는 온생명의 생리를 바로 파악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아직 가이아 이론 등 일부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생태계의 건강 문제를 온생명의 관점에서 논의해 온 사례는 거의 없으며, 이것이 바로 생태계의 건강 문제가 확고한 이론적 기반을 위에서 논의되지 못하고 있는 원인이기도 하다. 그러나 온생명과 관련하여 우리의 특별한 관심을 끄는 점은 온생명 안에서 차지하고 있는 인간의 위치이다. 인간 역시 온생명 안에서 생존해 가는 하나의 낱생명이어서 인간의 생존 방식 또한 여느 낱생명이 지니는 생존양상과 크게 다를 바 없으나, 여타의 낱생명들과는 달리 인간은 자기 스스로를 의식할 뿐 아니라 최초로 자신이 속한 생명의 전모 즉 온생명까지를 파악할 수 있는 존재가 되고 있다. 인간은 '나'라는 것 즉 자신의 정체성을 의식하는 거의 유일한 존재이며, 이를 바탕으로 높은 수준의 정신 세계를 펼쳐 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의 정신 활동이 개체 수준의 '나'에 그치지 않고 온생명에까지 이르게 될 때 자신의 정체성에 관한 새로운 문제에 부딪치게 된다. 정말 진정한 '나'라고 함은 무엇인가? '나'라고 함은 지난 수 십 년 간 존재해 오면서 그간 경험한 내용들을 개인적 기억장치 속에 담아 온 그 어떤 존재인가, 혹은 지난 35억 년을 지속해 오면서 그간 경험한 내용들을 유전자와 기타 기억장치 속에 담아 온 그 어떤 존재인가? 이러한 문제를 생각하기 위해 우리는 일단 자신의 정체성을 판단할 기준을 자신이 느끼고 있는 의식의 단위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렇게 볼 때에 중추신경계와 연결되어 하나의 통합적 의식을 형성하는 신경세포들이 오직 한 개인의 신체 안에만 퍼져 있으므로 '나'라고 하는 존재 또한 이 신체에 국한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사실 이것이 우리가 일상적으로 느끼고 있는 '나'의 내용이다. 그러나, 바로 똑같은 이유로, 우리 정보의 채널이 온생명의 전 영역에 미치고 있으므로 우리 의식의 단위도 온생명 전체로 확장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우리는 이미 이러한 정보 채널을 마련하고 있으며, 우리의 '문화'라는 것이 이 안에서 중추신경계와 유사한 역할을 실제로 해내고 있다. 우리가 만일 이러한 점들을 인정한다면 온생명 안에서 인간이 차지하는 위치는 인간 신체 안에서 신경세포들이 차지하는 위치와 매우 유사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는 곧 인간 문화에 의해 마련된 이 확장된 의식이 온생명을 바로 자기 자신이라고 파악함을 의미하는데, 이를 다른 각도에서 해석해 보면, 온생명 자체가 바야흐로 자의식을 지닌 존재로 깨어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점에서 인간의 출현은 온생명의 입장에서 볼 때 의미심장한 사건이다. 마치도 인간이 어느 정도 성장하면 스스로의 신경망을 통해 자기 스스로를 의식할 수 있는 존재가 되듯이, 우리 온생명도 생명으로 출생한 이래 35억 년 동안이나 자의식이 없는 존재로 생존해오다가 이제 인간이라는 특별한 존재를 통해 자신을 의식하는 주체적 존재로 깨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여기서 특히 강조해야 할 점은 인간의 이러한 온생명 의식이 객체로서의 온생명 의식 뿐 아니라 주체의 연장선에서 느끼는 온생명 의식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기왕의 주체인 작은 '나'가 그 중심에 놓이면서 자신의 의식을 내부로부터 온생명 전체로 확대해 나갈 수 있기 때문인데, 이 점은 인간이 온생명을 바로 내 '몸'으로 의식하게 되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이러한 점에서 생각해 본다면 지구 생태계의 건강 문제는 곧 내 몸의 건강 문제가 되어버린다. 온생명으로서의 내 몸 또한 하나의 생명체로서 병적인 상황에 놓일 수 있으며 심지어 사멸해버릴 수도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우리 생태계는 현재 건강이 크게 손상되고 있으며, 그 주된 원인이 바로 우리 인간이다. 인간은 자신의 몸에 해당하는 온생명의 정상적인 생리를 심각하게 왜곡시킴으로써 이를 매우 위험스런 불안정의 상황으로 몰아넣고 있는 것이다. 온생명에 대한 이러한 인간 행위는 곧 신체에 대한 암 세포의 행위에 해당된다. 암 세포란 신체에 침입해 온 외부의 침입자가 아니라 바로 자기 신체의 일부이다. 이것은 단지 신체 안에서 스스로를 무제약적으로 증식시켜나가는 성질을 가지는데, 이러한 증식이 신체의 정상적 기능을 가로막게 되고 급기야는 죽음을 불러오는 것이다. 인간 또한 암 세포와 같이 온생명의 주요 부분을 점유하여 서식하면서, 이를 자신의 번영과 증식만을 위해 변형시키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새로운 가치관과 그 실천 의지 우리가 일단 생명의 성격을 이렇게 이해하고 나면 이 안에서 생명가치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추구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우리가 만일 자신의 생명 즉 자신에게 부여된 낱생명을 그 어떤 절대적 의미를 지닌 기본 가치로 인정한다면 이를 포함하는 본원적 생명인 온생명에 대해서는 최소한 이보다 한 차원 높은 상위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마치도 내 손가락 하나의 안위가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내 몸 전체의 안위는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인정해야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와 더불어 우리가 일단 온생명의 본원적 가치를 인정한다면 이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낱생명들의 가치 또한 인정해야 한다. 우리가 온생명이 가치롭다는 판단에 이르는 것이 바로 우리 각자가 지닌 낱생명의 가치를 인정하는 데서 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온생명에 참여하는 것 또한 이 낱생명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므로 온생명의 가치를 인정한다 하여 낱생명의 가치가 결코 줄어드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일단 상위 가치로서의 온생명 가치를 인정하고 나면 개별 낱생명들이 지니는 기능적 차이를 또한 규정할 수 있게 된다. 이들은 모두가 그 어떤 절대적 가치를 공유하고 있음이 사실이나, 그 생존의 방식에 있어서는 온생명 안에서 차지하고 있는 나름대로의 위계와 질서를 따르게 되는 것이다. 예컨대 어떤 낱생명들은 다른 낱생명들의 먹이가 되어주면서도 온생명 안에서 함께 가치로운 것으로 인정받고 생존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일 온생명의 건강한 존재양상 더 나아가 이것의 이상적인 존재양상이 무엇인지를 알고 이를 위한 각 개체생명들의 기여도를 말할 수 있다면 이것이 곧 하나의 좋은 상대적 가치 척도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온생명의 이상적인 존재양상이란 무엇인가? 여기에 대한 선험적 해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온생명은 지금까지 풍요롭고 다채로운 생명 현상들을 지속적으로 펼쳐왔으며, 특히 인간과 같이 영특한 지적 존재들까지 빚어내어 이들을 통한 또 하나의 창조작업을 이루어나가는 실로 경탄할 존재이며, 우리가 만일 이 점을 인정한다면 온생명의 바람직한 존재양상이란 최소한 이러한 창조적 다양성을 지속시켜 나가는 방향이 되어야 할 것임에 이견을 가질 수 없다. 생명 가치에 대한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우리는 자연 특히 생태계를 대해야 할 새로운 행동 규범 즉 새로운 생태윤리를 마련할 수 있다. 지금까지는 우리가 인간 특히 인간의 생명을 최상의 가치로 놓고 생태계를 포함한 주변의 환경이 이 가치에 기여한다는 점에서 소중히 생각해 왔다면, 새로운 생태윤리는 온생명을 가치의 중심에 놓고 이를 소중히 보살피는 일을 가장 중요한 과제로 삼게 된다. 이와 함께 우리는 각각의 낱생명들이 지니는 절대적 가치와 함께 이들이 지니게 될 기능적 역할의 기준 또한 마련할 수 있게 된다. 예를 들어 그 어떤 존재가 온생명의 이러한 바람직한 존재양상에 기여하는 방향의 결과를 초래하면 이는 좀더 소중히 보살펴야 할 존재가 되는 것이며, 그 반대의 결과를 초래하게 되면 이는 상대적으로 덜 소중히 여길 대상이 될 수도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불가피하게 제거의 대상으로 삼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설혹 이러한 점들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현실상의 몇 가지 어려움을 예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우선 이러한 상황들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냉철히 판정할 만한 지적 능력을 지니지 못했다는 점이며, 둘째는 이러한 당위적 판정에 대해 충분한 실천 의지를 마련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점이다. 사실 인간이 지닌 이러한 결함들을 보완하기 위해 진화의 과정은 인간에게 사람의 심정이라는 또 하나의 기능을 부여해주고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자신의 신체를 관리할 완벽한 지식이 없고 또 이러한 작업을 수행할 특별한 실천적 의지도 가지지 못했다 하더라도 자신의 몸을 소중히 여기는 심정이 진화의 과정을 통해 마련되었기에 이를 어렵지 않게 지탱해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온생명과 관련된 측면에서는 이러한 심정에 직접적인 도움을 기대하기가 어렵다. 진화의 과정 속에서 우리는 온생명을 상실해 본 경험은 없으며 따라서 온생명을 소중히 여길 심정이 본능 속에 이미 마련되었으리라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기는 하나 우리는 적어도 간접적인 방식으로 이러한 본능을 활용할 수 있다. 즉 온생명이 더 큰 의미에서 자신의 몸에 해당하는 것임을 이지적 사고를 통해 먼저 확인한 후, 자신의 몸을 소중히 여기려는 심정적 본능을 여기에 적용시키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인간은 자신의 가상적 정체성을 인위적으로 조작해 낸 후, 이에 심정적으로 경도되는 묘한 성향을 가지고 있다. 특히 스포츠와 같은 현상에서 이런 성향이 잘 드러나는데, 일단 그 어느 한 쪽을 자기 편(인위적 자기)이라 생각하게 되면 이를 편들려고 하는 성향이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를 들어 자신이 한 민족의 성원이라 생각하게 되면, 그 민족을 더 큰 자신으로 느껴 민족 애호의 심정을 얻게 되듯이, 자신이 온생명의 성원이라 생각하면 온생명을 더 큰 자신의 몸으로 보아 온생명을 아끼는 심정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이러한 점이 특히 중요한 것은 생태계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는 항상 최선의 판정을 시도할 수는 있으나 이것이 최선의 판정이 될 보장은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생태계의 많은 부분에서 피해만을 입히는 해충이 있다고 할 때 우리는 이를 제거하려는 결정을 내릴 수 있다. 이러한 경우, 우리가 만일 생태계를 자신의 몸으로 느끼는 심정을 획득했다고 하면 해충을 제거하는 과정 자체에서 마치 자기 신체 안에서 종기를 도려낼 때와 같은 아픔을 수반하게 될 것이며, 이러한 심정적 장치는 생태계에 대해 우리가 저지를 수 있는 실수를 크게 줄여주는 효과를 가질 것이다. 이와 함께 우리는 과학의 눈을 통해 얻어낸 사실들을 '느낌' 속으로 전환시키는 작업에 대한 좀더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설혹 그 어떤 새로운 지적 인식에 도달했다 하더라도 이를 곧 느낌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이미 오래 전부터 과학의 눈을 통해 우리 지구가 어떠한 모습을 지닐지 잘 알고 있었으나 아폴로 우주 비행사가 지구를 벗어나 외계에서 우리 지구를 직접 육안으로 바라볼 수 있을 때까지는 그 누구도 이것이 "너무도 아름답고 작고 가냘프다"는 느낌까지를 얻어내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만일 충분한 상상력과 감수성이 있었더라면 아폴로 비행사가 직접 육안으로 바라보기 전에 이미 우리는 광막한 우주 공간 안에 외롭게 떠 있는 이 지구의 가냘프고 아름다운 모습을 마음으로 느낄 수 있었을지 모른다. 만일 인간의 생존이 이러한 거시적 이해를 느낌으로 옮겨내는 데에 크게 의존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최대한의 상상력과 감수성을 발휘하여 이를 수행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이와 아울러 우리는 일상적 경험에서 출발하여 우주적 느낌에 이르는 길도 존재한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옛날부터 많은 현명한 사람들 가운데에는 예리한 직관을 통해 일상적 시야를 넘어서는 우주적 연관을 파악해낸 사람들이 적지 않게 있었다. 뛰어난 시인이나 예술가들은 그들의 예술적 직관을 통해 이러한 우주적 연관을 포착하고 표현해 왔다. 이러한 직관이 반드시 과학의 눈에 잡히고 있는 사실적 세계와 일치하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이들은 때때로 과학의 눈이 잡아내지 못하는 감성의 세계 당위의 세계를 한 눈에 포착해내는 것 또한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는 과학이 보여주는 우주적 영상과 함께 이들이 마련해 주는 지혜를 적절히 엮어냄으로써 인류의 장기적 생존을 위한 소중한 길잡이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사회체제의 모색 일단 이러한 가치관과 실천 의지가 마련된다면 이에 바탕을 둔 새로운 사회체제를 모색해 볼 수 있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현재 지배적 사회체제로 군림하고 있는 자본주의 체제 특히 최근에 세계화의 기치를 달고 전지구적으로 확대되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경제구조는 생산과 소비의 끝없는 상승작용에 의해서만 지탱될 수 있는 파국적 체제이다. 이는 물론 우리 생태계가 아직 한계부양 상황에 도달하지 않았다거나 혹은 무제한적인 잠재적 부양 용량을 지녔다고 한다면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러나 이미 보아 온 바와 같이 우리 생태계는 한계부양 상황을 넘어섰을 뿐 아니라 아직 파국적 결과가 나타나지 않은 것이 오히려 이상하게 여겨질 상황 안에서 이러한 체제가 횡행한다는 것은 인류의 자멸을 스스로 재촉하는 일 이외의 다른 것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태계가 당면한 위험 상황에 대한 이해에 둔감한 대다수의 현대인들에게는 이것이야말로 경제적 기적을 가져다주는 유일한 체제인 것으로 신봉되고 있다. 더구나 이러한 체제를 통해 사회적 기득권을 선취한 국가 및 계층은 온갖 정교한 수단들을 다 동원하여 이를 수호하고 있어서 현재 이를 구조적으로 개혁할 가능성은 그리 커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인류의 장기적 생존을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이를 극복해내어야 할 것이며, 이를 현실적으로 가능하게 해주는 길은 오직 생태적 사고의 대중화를 바탕으로 한 대안적 체제를 모색해내는 일밖에 없는 듯하다. 이러한 체제가 구체적으로 어떠한 모습을 지닐 것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이 글에서 깊이 논의할 수 없다. 다만 이 체제 아래서는 지금보다 훨씬 더 큰 사회적 평등과 생태적 정의가 구현되어야 한다는 점만은 명백하다. 우리가 생태계를 보존하고 복원해나가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낭비를 줄여야 할 것인데 낭비의 가장 큰 요인이 바로 평등하지 못한 분배에서 오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또한 현재 인간이 보유하고 있는 과학기술적 능력은 더 이상 경쟁적 생산을 위해 사용될 것이 아니라, 인간의 기본적 생활 여건을 보장하는 범위 안에서 최대한으로 생태계를 보존하고 복원시키는 구체적 방식을 마련하는 일에 활용되어야 할 것이다. 인류의 장기적 생존은 가능할 것인가? 최근 뉴욕 세계무역센터에서 발생한 참사는 인간의 문명이라는 것이 얼마나 위태로울 수 있는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작은 민간 여객기 하나가 가해준 충격은 강철과 콘크리트로 구성된 백여 층의 마천루를 순식간에 재 가루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가 상상해 볼 수 있는 것은 건강한 자연 생태계를 개조하여 인위적 생태계를 만드는 행위는 마치도 흙과 돌을 모아 수 백 층의 마천루를 쌓아 올리는 것과 흡사하다는 점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이러한 인공 생태계의 마천루 위에 높이 올라와 앉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설혹 지금부터 인류의 장기적 생존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 나간다 하더라도 이것이 가능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러나 인류가 설혹 장기적인 생존에 성공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의 이러한 노력이 전혀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적어도 인간이 아닌 여타의 생물종에게나마 인간이 다하지 못한 생명 개화의 미래를 넘겨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나마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자기 자신만 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생명 진화의 유망한 한 싹마저 잘라버리는 것이 될 것이다. 이제 다시 한번 우리가 앞에서 제기했던 천년 후 인류 생존에 관한 네 가지 시나리오를 생각해 보자. 우리가 만일 충분한 생태적 각성 아래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고 다행히도 이러한 목표에 달성할 기술적 성취를 이루어낸다면 우리는 넷째 시나리오 즉 생태계의 안정을 복원하여 인류의 장기적 생존 가능성이 확보된 가운데 살아가게 될 것이며, 설혹 이러한 각성을 가진다 하더라도 이를 달성할 기술적 성취에 실패한다면 둘째 시나리오 즉 인류는 멸종한다 하더라도 인간을 제외한 일부 고등동물이 생존하여 동물 세계의 복원 가능성을 남기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만일 충분한 생태적 각성을 가지지 않고 오로지 기술적 성취에만 몰두하여 이 기술의 덕분에 요행히 천 년 이내에 파국을 피해나간다면 셋째 시나리오 즉 인간이 천년 이후까지 생존을 하기는 하나 장기적인 생존을 전혀 보장할 수 없는 극히 불안정한 상태로 생존을 이어갈 것이고, 만일 충분한 생태적 각성이 없이 오로지 기술적 성취에만 의존하다가 이것 또한 실패할 경우 첫째 시나리오 즉 지구상에 체중 1킬로그램 이상의 모든 고등동물이 사라지게 되는 최악의 경우를 연출할 것이다. 우리는 물론 이런 엄청난 미래 상황에 대한 섣부른 예언자가 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이러한 물음을 앞에 놓고 현재의 자기 행위가 이 가능성들 가운데 어느 것을 이루는 데에 가장 크게 기여하고 있는지를 한번 진지하게 반문해 보는 것은 매우 유용한 일이다. 행여 자신의 행위는 이러한 결과에 대해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분명히 최악의 시나리오에 기여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최악의 시나리오는 바로 그러한 마음의 자세에서 결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