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economics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요키에로타) 날 짜 (Date): 1998년 11월 27일 금요일 오후 05시 52분 49초 제 목(Title): 이코노/이장우 실리콘벨리역사 2 해외 / Overseas 제 463호 1998.12.01 인물로 본 실리콘 밸리② 프레더릭 터만·윌리엄 쇼클리 ‘두 天才’가 西쪽으로 간 까닭은? 상아탑 安住 싫다…연구기술의 상업화 성공시킨 이들 덕택에 비약적 발전 이장우 경북대 교수(현 스탠퍼드 방문교수) 프레더릭 터만(Frederick Terman) 교수는 실리콘 밸리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받고 있다. 그 이유는 이 지역의 잠재력을 일찍부터 알아 보고 대학에서 기술창업을 부추기고 유기적인 산학협동 체제를 구축하는 데 선구자적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특히 터만은 실리콘 밸리 기술발전의 원동력이 된 스탠퍼드산업단지(Stanford Research Park)를 만드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이를 통해 그는 휴렛팩커드, 베리안, 워킨스-존슨, 록히드사 등 세계적인 하이테크 회사들로 성장한 기업들이 초기에 사업발판을 마련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프레더릭 터만은 1900년 스탠퍼드 대학의 유명한 심리학자인 아버지 밑에서 출생했다. 그의 아버지 루이스 터만 교수는 평소 루소의 자연사상에 심취해 있었기 때문에 그의 아들을 정규학교에 보내지 않고 집에서 교육시켰다. 그러나 터만은 처음 정규 학교에 입학한 스탠퍼드 대학에서 2년만에 화학과 공학부문에서 두 개의 학위를 취득했고 또 다시 MIT에서 2년만에 박사학위를 획득했다. MIT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그 곳에서 교편을 잡으려 했으나 결핵으로 인해 고향으로 돌아와야 했다. 요양하는 동안 오늘날 전자공학이라 불리는 무선공학을 공부하게 되었고 이것이 계기가 돼 스탠퍼드 무선공학과 교수로 뛰어난 업적을 남기게 된다. 그는 자신의 유능한 학생들이 좋은 직장을 찾아 모두 동부로 떠나는 것을 보고 이것이 대학재정과 지역경제 취약성의 주원인임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먼저 자기 제자들 중 가장 유능한 인재로 지목한 휴렛과 팩커드로 하여금 창업을을 개발하는 기업체들과 유기적인 산학협동체제를 구축했다. 특히 터만 교수가 평소 강조했던 지론은 기술집약적 산업의 육성을 위해서는 우수한 대학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대학을 중심으로 소위 ‘기술자들의 공동체’를 형성해 대학 주변에 위치한 첨단 산업체들과 이 산업체의 동향에 민감하게 움직이는 대학이 서로 강한 협력관계를 구축할 때 첨단산업과 대학이 동시에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터만 교수는 원래 일벌레로 유명했다. 가끔 즐기는 카드게임 외에는 전혀 취미생활을 즐기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1주일 내내 일만 하고 휴가조차 가지 않았다. 그의 학생들은 지칠줄 모르고 연구에만 몰두하는 터만 교수를 보고 혀를 내둘렀다. 이러한 주위의 반응에 대해 터만 교수는 “일이 이렇게 재미있는 데 따로 취미생활을 즐길 필요가 있나?”라고 대꾸했다고 한다. 윌리엄 쇼클리(William Shockley)는 그의 동료와 함께 트랜지스터를 발명함으로써 20세기에서 가장 중요한 기술의 하나를 창조해 낸 인물로 유명하다. 그는 그 공로로 1956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1955년 그가 샌타클래라에 세운 쇼클리반도체연구소는 반도체 산업이 태동한 모태가 되었으며 실리콘 밸리라는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뿌리가 되기도 했다. 쇼클리 박사는 엔지니어인 아버지와 광물 연구자인 어머니 밑에서 태어났으며, 스탠퍼드 대학이 위치한 팰러 알토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1936년 California Institute of Technology에서 물리학 학사를 취득했으며 4년 후에 MIT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박사학위 취득 후 벨연구소에 근무하던 중 자신의 발명을 상업화하기 위해 사표를 내고 매사추세츠에서 트랜지스터 제조회사를 설립하려 했다. 그러나 그 곳에서의 창업이 여의치 않게 되자 고향인 팰러알토로 돌아와 쇼클리반도체연구소라는 회사를 차렸다. 그는 터만 교수의 권유로 스탠퍼드산업단지로 회사를 다시 옮기고 트랜지스터에 관심있는 당대의 엘리트 과학자들을 고용해 연구에 몰두했다. 그러나 그는 뛰어난 과학적 재능과 연구의욕에도 불구하고 사람 다루는 기술과 경영능력이 크게 부족했다. 경영에 관해 아는 것이 전혀 없다는 평을 들을 정도였다. 또한 연구원들을 어린애처럼 다루었으며 심지어는 정보를 유출한 사람을 찾기 위해 거짓말 탐지기를 사용하기도 했다고 한다. 1957년 쇼클리의 경영방식에 참지 못한 8명의 엔지니어들은 연구소를 뛰쳐나와 패어차일드(Fairchild)라는 새로운 회사를 차렸다. 이들은 훗날 ‘8명의 반란자’라는 호칭을 받았으며 그들이 세운 패어차일드는 실리콘 밸리 반도체 산업의 원류가 된다. 쇼클리 박사는 터만 교수와 마찬가지로 일이 인생의 전부이다시피 했으며 집에서 종종 밤을 샐 정도로 연구에 몰두했다. 그러나 가끔은 등산과 항해를 즐기는 여유도 있었으며 사회적 이슈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열성을 보였다. 하지만 쇼클리는 인종차별적 세계관으로 말미암아 주위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했다. 평소 그는 유전학적으로 열성 인자들이 지나치게 재생산을 많이 함으로써 사회가 나쁜 방향으로 진화한다는 견해를 피력한 것으로 알려졌다. 모두 지독한 일벌레들 터만 교수와 쇼클리 박사는 모두 지독한 일벌레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그들의 기술혁신에 대한 애착과 노력은 오늘날 세계 첨단기술을 선도하는 실리콘 밸리의 기술적 모태가 되었다. 특히 그들은 학문적으로 당대의 최고 이론가이면서도 결코 상아탑에 안주하지 않고 기술지식의 현실적용에 앞장 섰다. 예를 들자면 터만은 유기적인 산학협동 체제를 구축함으로써 대학의 이론과 산업의 현실이 긴밀하게 상호작용하도록 했다. 또한 쇼클리는 노벨상이란 학문적 업적에도 불구하고 대학강단보다는 기술의 상업화에 더 관심이 있었다. 터만과 쇼클리가 없었다면 과연 오늘의 실리콘 밸리가 존재하였을까라는 질문에 많은 사람들이 부정적인 답변을 할 것이다. 터만이 결핵에 걸리지 않아 MIT에서 교수생활을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반도체 산업을 이 세상에 탄생시킨 주인공인 쇼클리가 동부에서 창업에 성공해 팰러 알토로 건너오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이 두 역사적 인물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매우 크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획기적인 산업발전이나 실리콘 밸리와 같은 첨단기술 밀집지역의 발달 과정속에 우연히 개입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터만과 쇼클리의 이야기를 통해 우연의 영향력을 실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산업발전 과정속에 나타나는 우연적 요소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산업육성 전략에 반영해야 하는 것일까? ▲ 제463호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 "활쏘기는 군자의 덕성과 비슷한 바 가 있으니, 활을 쏘아 과녁을 벗어나더라도 오히려 그 이유 를 자기 몸에서 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