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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conomics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요키에로타)
날 짜 (Date): 1998년 11월  6일 금요일 오후 11시 24분 03초
제 목(Title): 강준만/ 손정의, 그 드라마틱한 성공 


손정의,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한 성공

/강준만
 
 

전율과 감동을 주는 손정의 이야기?

 

[중앙일보] 96년 7월 26일자 1면엔 <일 세번째 부자는 한국계:소프트방크사 손정의 
사장 보유 주가 폭등 3조원 돌파>라는 제하의 박스 기사가 실려 있다. 참으로 
신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재일 교포가 일본에서 세번째 부자라니 그 얼마나 
자랑스러운가. 그래서인지 적어도 그때 이후 우리 언론은 손정의에 관한 보도에 
결코 인색하지 않았다. 그래서 손정의라는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나도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하나다. 나는 손정의에 관한 책들을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 그의 삶 자체가 한 편의 흥미진진한 드라마다. TV 드라마 PD들이 그 
책들을 읽었다면 결코 그냥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지금 그 드라마 줄거리를 
독자들께 소개하고자 한다. 가치 판단은 잠시 보류하자. 약육강식의 자본주의 
경쟁에서 도박사의 기질로 승리한 것이 무어 그리 아름다운 일이냐고 항변할 
독자들도 있을 것 같아서 하는 말이다. 그런 구조의 문제를 떠나서 '인간 승리'의 
재미를 어찌 포기할 수 있으랴. 

 

 

내가 읽은 책은 모두 7권이다. 언론인 권도홍이 엮은 [그래 내가 
한국인이오](청산, 97년 1월)를 제외하곤 모두 일본에서 나온 책들의 번역서다. 
[손정의 경영 스토리](평범사, 96년 12월), [멀티미디어왕국 건설의 꿈 
손정의](민예당, 97년 4월), [손정의 야망과 불안](평범사, 97년 7월), 

그리고 부분적으로 손정의가 다뤄진 책으로 손정의와 소니 회장 오가 노리오의 
대담을 책으로 엮은 [감성의 승리](중앙일보사, 97년 2월), [디지털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사나이들:손정의·루퍼트 머독·제리 양의 야망](평범사, 97년 
3월), [정보 경영자 5인의 인터넷 예언](평범사, 97년 6월) 등이다. 

이 책들엔 같은 내용의 이야기들이 많이 중복되긴 했지만 다른 내용도 많아 모두 
다 읽을 만한 가치가 있었다. [감성의 승리]를 번역한 언론인 이규행은 이 책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데, 좀 과장된 게 아니냐는 생각이 들면서도 
손정의가 놀라운 인물이라는 데엔 기꺼이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을 받아든 순간 나는 어떤 전율 같은 것을 느꼈다. 그리고 책을 놓을 수가 
없었다. 때마침 점심 시간이었는데도 식사하는 것마저 잊고 단숨에 끝까지 읽었다. 
그만큼 이 책은 마력(魔力)을 지녔고, 나를 감동의 늪 속으로 빠져들게 했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도 아마 나와 같은 감동과 경험을 하게 되지 않을까 짐작해 본다."

 

아버지와 싸워 아버지를 울게 만든 초등학교 3년생

 

잘 알려져 있다시피 손정의는 찢어지는 가난 때문에 일본으로 건너가 광부가 된 
한국인 3세다. 그의 이런 출신 배경이 그의 성공을 더욱 드라마틱해 보이게 만드는 
것 같다. 그는 96년 가을 일본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종합잡지 [문예춘추]가 뽑은 
일본의 대표적 경영인 1백 명 가운데 1위를 차지했으며, 3개월 후 유력 경제지 
산케이가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 조사에서도 '당신이 선택한 미래의 
리더' 가운데 경제 분야 1위를 차지했다. 97년 미국 시사 주간지 [타임]도 
'1997년의 세계를 움직일 인물'로 그를 꼽으면서 '멀티미디어 사업의 
나폴레옹'이라는 평가를 내렸다. 이제 그의 성공의 여정을 살펴보자. 

손정의는 1957년 8월 11일 일본 남단의 큐슈 사가현 도스시에서 태어났다. 번지도 
없는 기차길 옆 판잣집에서 태어났다고 하니 그야말로 우리 동요에 나오는 '기차길 
옆 오막살이'에서 잠들고 있던 아기였던 것이다. 그의 일본 성씨는 
야스모토였는데, 유치원에 다닐 때 어느 일본인 아이로부터 돌로 머리를 얻어맞은 
뒤로 출신을 숨겨 왔다고 한다. 

네 아들 중 둘째로 태어난 손정의는 어릴 때부터 어른들 입을 딱 벌어지게 만드는 
외골수에 독종이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부자간에 할머니의 일로 언쟁을 
한 적이 있었는데, 손정의는 아버지 옷을 거머쥐더니 놓아 주질 않아 아버지가 
"내가 잘못했다"고 울면서 빌었다고 한다. 

손정의는 중학교에서 1학년 1학기를 마치자 후쿠오카로 이사를 갔다. 이건 순전히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를 떠올리게 만드는, 손정의의 교육을 위한 이사였다. 
큰 물에 나가야 일류 학교에 갈 수 있다는 그런 계산으로 말이다. 그런 노력이 
헛되지 않았는지 손정의는 큐슈의 명문 구루메대학 부설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손정의는 1학년을 다 채우지 않고 학교를 중퇴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영어 연수를 위해 캘리포니아대학 버클리 캠퍼스를 간 게 화근이었다. 평소 어린 
나이에도 일본 사회의 폐쇄성에 질려 있던 손정의가 미국 사회의 개방성에 홀딱 
빠져 버린 것이다. 그는 미국 유학을 결심했다. 때마침 아버지는 건강이 나빠 
병원에 입원하고 있었으니 가족들이 찬성했을 리 만무였다. 특히 어머니는 
사랑하는 아들을 미국에 빼앗기는 게 아닌가 하여 미국에 가지 말라고 눈물로 
호소하였다. 그러나 아들은 그 어린 나이에도 어머니의 눈물을 뿌리치고 매정하게 
미국 유학 길에 오른다. 다만 어머니에겐 공부를 마치면 일본에 꼭 다시 
돌아오겠노라는 약속을 던지면서. 

 

스스로 '천재'라고 생각하게 만든 세뇌 교육

 

이만저만한 독종이 아니다. 그러나 그건 아버지가 그렇게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재일 한국인으로서 온갖 차별에 대해 얼마나 한이 맺혔겠는가. 그는 손정의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손정의에게 천재의식을 주입시켰다. '손정의, 너는 천재야'라고 
세뇌를 시켰던 것이다. 물론 그건 아버지의 희망 사항이었을 뿐이지만, 그 어린 
아들은 아버지의 주문(呪文)을 뼛속 깊이 간직하고 있었다. 

손정의는 그 어린 나이에도 아버지보다 현실 파악에 더 뛰어났다. 도쿄대학을 나와 
정치가가 되라는 게 아버지의 꿈이었지만 재일 한국인이 두각을 나타낼 수 있는 
분야는 사업밖에는 없다는 게 손정의의 생각이었던 것이다. 

손정의는 이미 그때부터 세인의 상식을 초월하는 당찬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168cm라는 비교적 작은 키로 인해 그의 그런 똑 소리 나는 이미지는 더욱 강렬한 
느낌을 주었다. 그가 미국에 가자마자 고등학교를 3주일만에 졸업했다는 그 전설 
같은 신화도 손정의가 명석한 두뇌와 깡으로 똘똘 뭉쳐진 독종이라는 걸 잘 말해 
주고 있다. 

손정의는 성격이 급하다. 아니 급하다기보다는 자신의 인생 스케쥴을 세워 놓고 그 
스케쥴에 따라 살려고 하기 때문에 그에겐 시간의 단축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보통사람 같으면 고등학교 1학년 때 미국 유학을 갔으면 제대로 따라가는 
것만도 감지덕지하면서 영어 공부나 열심히 할 터인데, 그는 교장을 찾아가 수업 
내용이 싱겁다며 고등학교를 빨리 졸업할 수 있는 방법이 없겠느냐고 물었다. 
교장은 대학 입학 자격 검정 시험을 추천했다. 

손정의는 벼락 공부를 해 그 시험에 도전했다. 그러나 손정의가 아무리 천재일망정 
영어가 익숙치 않아 그 시험은 애초부터 무리였다. 그러나 손정의는 시험관에게 
당돌한 이의를 제기한다. 시험 문제를 일본어로 번역해 달라는 것이다. 누군 
모국어로 시험 보고 누군 외국어로 시험 보는 게 공정치 않다고 따진 것이다. 
손정의는 황당해 하는 시험관에게 주 정부의 교육 책임자와 직접 이야기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요청한다. 이런 걸 보면 미국은 참 괜찮은 나라다. 손정의의 당돌한 
요청이 받아들여졌으니 말이다. 손정의는 결국 시험장에 영어 사전을 갖고 
들어가고 2주일간에 걸쳐 시험 문제를 푸는 특전을 얻어 시험에 합격했다. 이제 
겨우 16살 먹은 녀석의 솜씨가 그리 대단하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앞으로 내내 이런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LSI 확대 사진을 보고 받은 충격과 감동

 

손정의는 캘리포니아 주립대 버클리 분교에 진학했다. 그는 일본에서 빼앗긴 성과 
이름을 되찾았다. 야스모토 마사요시가 손정의가 된 것이다. 대학생이 된 손정의는 
우연히 '충격적인 사건'에 접하게 되었다. 보통사람들에겐 전혀 충격적인 일이 
아니니까 독자들께선 행여 충격받지 마시기 바란다. 

손정의는 1974년 봄 과학 잡지인 [파퓰러 일렉트로닉스]를 보다가 미래의 지도 
같은 사진을 발견했다. 그건 바로 LSI(Large Scale Integration:고밀도집적회로) 
확대 사진이었다. 나이는 손정의보다 두 살 위이지만 학번은 같았던 빌 게이츠도 
바로 이 잡지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는데, 이건 아무래도 천재들만이 받을 수 있는 
충격인가 보다. 도대체 어떤 충격이었는지 손정의의 말을 직접 들어 보자. 

"그때 너무나 감동한 나머지 눈물이 나왔습니다. …… 엄청나게 흥분해서 잠시 
동안 눈물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 저는 그 사진을 오려서 투명한 파일에 끼워 
넣어 껴안고 잤습니다. 6개월이나 말이지요. …… 어쨌든 저에겐 그 일이 19세기 
말 일본인이 처음으로 외국 배를 본 것 같은 충격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인류가 
발명한 것 중에서 최고 최대의 발명이다, 어쩌면 인류는 드디어 스스로의 지적 
생산 활동을 뛰어넘을 가능성을 연 것은 아닌가, 그런 감동에 
빠졌습니다."([감성의 승리]) 

그 충격을 받고 나서 결심한 건지 아니면 그 이전부터 결심한 건지 그건 알 수 
없으나 손정의는 하루 1건을 발명하겠다는 계획을 세운다. 이건 널리 소개된 
이야기이므로 긴 말 않겠다. 손정의는 후일 발명과 창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는데, 이걸 보면 그가 매일 발명에 매달렸다는 소리가 괜한 말은 아닌 것 
같다. 

"나중에 제 나름대로 발견한 것은, 발명에는 세 가지 패턴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문제 해결법입니다. 세상에 어떤 문제가 있다면 그것을 해결하면 되는 
것입니다. 둘째 수평적 사고법입니다. 이것은 둥근 것을 사각으로 해 본다든지, 
하얀 것을 빨갛게 해 본다든지, 큰 것을 작게 만들어 본다든지, 어쨌든 다른 
방향으로 생각하면 됩니다. 셋째는 조합법입니다. 예를 들어 라디오와 카세트를 
조합하면 카세트 라디오가 되고, 오르골(자명금)과 시계를 조합하면 자명시계가 
됩니다. 그런 조합법입니다. 그런 식으로 자기 나름대로 패턴화하는 방법을 
발견해서, 그것을 파고들어가는 것이죠. 이렇게 하면 아주 쉽게 발명의 힌트가 
자꾸자꾸 나옵니다. 자신의 창조력을 자극하는 것이죠."([감성의 승리])

 

'손정의의 빛나는 눈빛은 다른 사람과 달랐어'

 

그런 노력 덕분이었는지 손정의는 대학 재학 시절 '음성 장치 부착 다국어 
번역기'를 발명해 큰 재미를 보았다. 이건 이야기하고자 하는 내용을 일본어로 
키보드에 입력하면 기계가 번역해서 영어로 말하는 포켓 컴퓨터인데, 손정의는 
이미 이때부터 기업가적 능력을 발휘한 것일 뿐 발명을 직접 한 건 아니다. 그러나 
중요한 건 기술적인 것보다 그런 착상과 그걸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추진력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그걸 손정의의 최초 발명품이라고 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손정의는 그 번역기를 만들기 위해 생면부지의 버클리대 교수들을 설득했다. 내가 
이런 아이디어가 있는데 당신이 좀 만들어 달라고 설득을 한 것이다. 돈도 전혀 
주지 않으면서 교수들 돈으로 그걸 만들어 달라고 요청을 한 것이다. 돈은 나중에 
그걸 팔아서 주겠다는 것이다. 도대체 이게 말이 되나? 그러나 그게 말이 되게 
성사시켰으니 손정의라는 인물의 비범함이 바료 여기에서 유감없이 드러난다. 

손정의는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번역기를 78년 여름방학 때 일본으로 가지고 가서 
회사들을 찾아다녔다. 처음에야 이곳저곳에서 퇴짜를 맞았을 게 뻔하다. 그 
이야기는 생략하고 결론만 말하자. 손정의는 샤프사와 계약을 성사시켰는데, 
계약금만 1백만 달러를 받았다! 사실 더욱 놀라운 건 이제 21살 먹은 애송이를 
그렇게 상대해 준 샤프사의 전무 사사키 마사라는 인물이다. 후일 사사키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눈을 보면 알 수 있지. 그의 빛나는 눈빛은 다른 사람과 
달랐어."

손정의는 그렇게 해서 받은 1백만 달러를 밑천으로 79년 2월 버클리대학 근처에 
'유니언 월드'라는 회사를 설립했다. 종업원을 30명이나 거느린 이 회사는 컴퓨터 
소프트웨어를 개발해서 일본의 메이커에 팔았다. 또 손정의는 일본에서 중고 
인베이더 게임 기계를 미국으로 수입해서 커피숍에 위탁 설치해 짭짤한 재미를 
보았다. 그렇게 운영한 게임 기계가 1백 대나 되었다고 한다. 

손정의는 그 즈음 미국에서 오랫동안 연애해 온 2년 연상의 여자와 결혼했다. 
상대는 버클리대학에 다니던 일본 유학생 우미였다. 늘 시간이 모자라는 손정의는 
주로 대학 도서관에서 연애를 했다고 하는데, 첫 데이트에서 청혼을 해 우미를 
까무라치게 만들었다고 한다. 16살짜리가 18살짜리에게 청혼을 하다니, 이 정도면 
손정의가 얼마나 전광석화(電光石火)형 인간인지 알 만하다. 

 

손정의의 마력에 걸린 사람들

 

손정의는 80년 3월 버클리대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돌아왔다. 미국에서 번 돈은 
거의 대부분 사원들에게 넘겨 주고 빈 손으로 새로운 사업을 구상했다. 한동안 
백수 노릇을 하느라 마음 고생이 심했다 하니 IMF 시대의 젊은 백수들은 너무 기 
죽지 마시기 바란다. 손정의와 같은 천재도 그럴진대!

손정의는 퍼스널 컴퓨터 시대가 올 것을 확신하고 소프트웨어 판매점과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하우스 사이를 연결하는 전문 유통업에 뛰어들 결심을 하게 
된다. 소프트웨어 기업은 부침이 심하지만 소프트의 유통 채널을 만들어 인프라를 
제공하면 영속성 있는 사업이 되지 않겠느냐는 계산을 한 것이다. 

손정의는 81년 9월 자본금 1천만 엔으로 단 2명의 사원을 데리고 일본 
소프트뱅크를 설립했다. 회사를 시작한 그 날 그는 사과 궤짝을 엎어 놓고 그 위에 
올라가 '1조 엔 매출 목표'를 역설했다. 아르바이트 사원 2명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입을 크게 벌렸고 이때 받은 충격 때문인지 2달 후에 회사를 그만두었다. 
'손정의 드라마'의 이 부분이 가장 드라마틱하면서도 코믹하다고 생각한 때문인지 
이 이야기는 인구에 널리 회자되었다. 그래서인지 [손정의 야망과 불안]의 저자 
무라사와 다카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항간에서는 그때 손 사장이 올라섰던 상자가 사과 상자가 아니라 귤 상자였다는 
설도 있는데 어느 쪽이든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귤 상자는 골판지로 만들어진 것이 
대부분이고 사과 상자는 나무로 만든 것도 있으므로 사과 상자가 맞겠다는 
추측이다."

손정의는 81년 12월 오사카의 조신전기로부터 오사카의 전자 상가인 니혼바시에 
퍼스널 컴퓨터 전문점을 개점했으니 소프트웨어를 모아서 납품해 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여기서 놀라운 것은 손정의가 기요히로 사장을 설득해 독점 계약을 
맺었다는 점이다. 손정의는 하여튼 사람을 감동시켜 믿게 만드는 데에는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인물인 것 같다. 

손정의는 전국에 흩어져 있는 소프트웨어 하우스를 찾아다니는 것이 너무나 
비효율적이라는 생각이 들자, 일본 최대의 소프트웨어 메이커와 독점 계약을 
맺고자 하는 또다른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하여 최대 메이커인 하드슨의 사장 
고토 하로시와 만나 담판을 벌였고 이 또한 성공을 거두었다. 

손정의는 주문은 여기저기서 많이 받았지만 상품 구입 대금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제일권업은행의 고지마치 지점장인 고기다니를 찾아가 또 한 번 담판을 벌인다. 
지점장 전결 대출액이 2천만 엔인데 손정의는 1억 엔을 요청했다. 여기서 손정의는 
이미 자신이 감동시킨 바 있는 사람들을 보증인으로 내세우는 놀라운 솜씨를 
발휘한다. 조신전기의 보증을 받아냈는가 하면, 샤프사의 전무 사사키는 자신의 
자택까지 담보로 잡히며 보증을 서 주었다고 하니 두 손 들지 않을 수 없다. 이건 
선배의 집까지 저당잡혀 대출을 받아냈다는 한국의 김우중 왼 뺨 오른 뺨 다 치는 
이야기가 아닌가. 

그러나 그런 보증이 있었다곤 하지만 여기서 또 놀랍게 생각해야 할 사람은 역시 
고기다니다. 냉정하게 거절하면 그만인 일을 오히려 자신이 힘을 보태 가면서 
손정의에게 대출을 해 주다니 그게 놀랍지 않은가. 후일 고기다니는 "손씨의 
마력에 걸렸었다"고 회고했다. 순진, 성실, 열정이 흘러넘치는 손정의의 친화력이 
사람을 확 돌아 버리게 만든다는 거다. 

해마다 5월 2일은 소프트뱅크사가 쉬는 날인데, 이 날은 '감사의 날'이라고 한다. 
즉, 손정의의 마력에 걸려 손정의에게 큰 도움을 준 은인들에게 감사하는 날이라는 
것이다. 물론 지금까지 이야기한 인물들은 모두 다 소프트뱅크에서 은인으로 
대접받고 있다. 

손정의는 기회 있을 때마다 미국의 기업 환경과 비교하여 일본의 경직되고 
폐쇄적인 기업 환경을 비판하지만, 그의 성공 과정을 살펴 보면 우리로서는 일본의 
기업 환경 정도도 꿈 같은 이야기다. 손정의가 아무리 사람을 녹이는 마력을 갖고 
있다지만 그게 한국에서라면 통했을까?

 

빌 게이츠, 루퍼트 머독과 같이 놀다

 

손정의는 1년 안에 전국의 수천 개에 달하는 판매점을 조직화하는 데 성공했는데, 
82년엔 사원이 35명 매출액이 35억 엔에 이르렀다. 이때부터 몇 개월마다 사무실을 
옮겨다니는 일이 벌어졌다. 물론 더욱 넓은 사무실로 옮겨다니는 거다. 그만큼 
소프트뱅크의 성장 속도가 빨랐다는 걸 의미하는 것이다. 

손정의는 소프트뱅크가 취급하는 소프트웨어 상품의 판매 촉진을 위해, 퍼스널 
컴퓨터 관련 잡지의 출판과 소프트웨어 유통을 쥐고 있던 아스키의 퍼스널 컴퓨터 
잡지에 광고를 게재하려고 했으나 경쟁자라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그렇다고 물러설 
손정의가 아니다. 그는 82년 5월에 [Oh! PC]와 [Oh! MZ] 라는 두 잡지를 동시에 
창간해 성공시켰다. 

그러나 손정의는 1983년 B형 간염으로 병원에 입원하는 불운에 처하게 된다. 그는 
치료에 전념하기 위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병실에 퍼스널 컴퓨터, 팩시밀리, 
전화를 설치해 놓고 이른바 '원격 조종 경영'에 들어갔다. 그는 3년 넘게 병마와 
싸웠는데, 그 기간 동안 4천 권의 책을 읽었다고 한다. 그는 29세인 86년 5월에 
완치되어 사장직에 복귀했다. 이후 소프트뱅크는 다시 초고속 성장을 맞게 된다. 

손정의는 해외 사업이 활발해지자 90년에 '일본 소프트뱅크'에서 '일본'이란 
이름을 떼고 '소프트뱅크'로 회사 이름을 바꾸었다. 91년엔 미국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바 있는 업계의 거물 로스 페로와 제휴해서 시스템뱅크를 만들기도 했다. 

손정의는 94년 기업 공개 후 미국에서 본격적인 M&A를 시작함으로써 지금과 같은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된다. 세계 최대의 컴퓨터·전시 출판회사인 집데이비스사의 
전시 부문인 '인터롭'을 시작으로 하여, 1년 8개월 동안에 손정의가 집어삼킨 
미국의 첨단 기업은 모두 7개에 이르렀다. 유통과 출판 부문 장악을 꿈꾸는 
손정의는 21억 달러로 집데이비스 커뮤니케이션스사의 출판 부문까지 먹어삼킨 뒤 
당시 발행하고 있던 80종의 잡지를 10년 내에 1천 종으로 늘릴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는 이미 1백 개 국가에 30권의 잡지 판권을 판매했다. 

손정의가 매수한 전시회 부문은 만만치 않은 '권력'이다. 그는 집데이비스의 
인터롭을 2억 달러에 사들인 이후에 인터페이스 그룹의 전시회 부문인 '컴덱스'를 
8억 달러에 사들였다. 컴덱스는 세계 최대의 컴퓨터 견본시인데, 그는 인터롭과 
컴덱스를 운영함으로써 미국의 컴퓨터 관련 전시회 시장의 80%를 장악한 셈이 
됐다. 이는 그가 치열한 업계 정보 전쟁에서 독보적인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다는 
걸 의미한다. 막말로 빌 게이츠도 그를 무시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까? 95년 12월 초 손정의는 마이크로소프트사의 빌 
게이츠로부터 소포 하나를 받았는데, 그건 게이츠의 첫 저서인 [The Road 
Ahead]였다. 이 책의 속 표지에는 '당신은 나와 같은 승부사'라고 적혀 있었는데, 
이는 게이츠로선 손정의에게 보내는 최대의 찬사인 셈이다. 물론 둘은 
싸우기보다는 상호 협력할 수 있는 관계인지라 그런 찬사도 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게이츠는 소프트웨어 장악을 꿈꾸고 있고 손정의는 유통망 장악을 꿈꾸고 
있는지라 나중에야 어떻게 될망정 지금에야 서로 싸울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둘은 서로 죽이 맞아 96년엔 퍼스널 컴퓨터용 게임 소프트웨어를 개발 
판매하는 게임뱅크사를 공동으로 설립했다. 게임뱅크를 창립한 뒤 게이츠는 일부러 
일본을 방문해서 기자회견에 손정의와 동석해 손정의의 기를 살려 주었고, 또 
손정의는 기자들로부터 자신을 게이츠와 비교하는 질문만 받으면 자신은 게이츠와 
같은 거물의 발끝에도 못 미친다는 식으로 겸손을 떠니, 이건 뭐 완전히 '형님 
먼저, 아우 먼저'다. 

손정의는 96년 6월엔 세계적인 언론 재벌 루퍼트 머독과 같이 아사히방송의 주식 
21.4%를 사들여 또 한 번 세상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세계적인 지명도를 갖고 
있는 머독의 파트너로서의 지위를 유감없이 세계 만방에 과시한 것이다. 손정의는 
디지털 위성방송인 J스카이 B의 원활한 운영을 위해 소프트웨어의 조달 거점을 
만드는 데에만 의미를 둘 뿐 일본 방송계를 넘볼 생각은 전혀 없다고 강조했지만, 
일본 방송계는 의혹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고 손정의에게 태클을 가하기 시작했다. 
일본의 방송은 대부분 신문들이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신문들이 앞장서서 태클을 
가해 대니 당해 낼 길이 없었다. 손정의는 그런 방해 공작 때문인지 97년 3월 
머독과 함께 사들인 지분을 매입 가격에 다시 넘기겠다고 발표했다. 작전상 후퇴를 
한 것인가? 좀더 두고 지켜볼 일이다. 

 

손정의의 종교는 '디지털'

 

손정의의 종교는 무엇일까? '디지털'이다. 종교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그는 디지털 
혁명의 미래에 대해 환상적인 설계도를 스스로 그려 내고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저는 메이지 유신이나 자동차 혁명보다도 지금의 이 디지털 정보 혁명이 더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류 생활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후 가장 큰 혁명입니다. 그런 대혁명의 와중에 있다는 것은 실로 
행복하고 통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한 번밖에 없는 인생에서 이 생명을 
어디에 불태울 것인가, 늘 생각해 왔습니다. ……"([감성의 승리])

그는 97년 8월 서울에서 열린 '컴덱스 코리아 97'에 참석해 행한 기조 연설에서도 
"20년 뒤 컴퓨터는 인간처럼 감정을 느끼고 스스로 사고하며 창작 활동을 벌이는 
수준에 이를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컴퓨터가 인간과 대등한 수준에 이르게 되면 
양자의 관계가 중요한 문제로 등장할 것"이라며 "인간의 노예로 사용되었던 
컴퓨터가 잘못 사용되어지지 않도록 친구나 비서·선생님·상담원 등 인간과 
공존의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말도 했다. 디지털에 대한 그의 신앙심이 만만치 
않다는 걸 웅변해 주는 대목이다.(손정의의 컴덱스 기조 연설은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한다. 컴덱스 코리아는 조국에서 열리는 첫번째 이벤트라 연설을 
했다는 것이다. 이건 손정의의 네번째 한국 방문이었다. 그는 미국 유학 수속을 
밟는 동안 난생 처음으로 할머니와 함께 대구 근처 시골의 친척집을 찾아 본 적이 
있으며, 그 후 95년에 이어 지난 97년 2월에도 방한한 바 있다.)

손정의의 그런 신앙심은 '거대화' 또는 '확대지상주의'로 표출된다. 그는 자신의 
비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소프트뱅크의 본업을 소프트웨어 도매업이라고 못박는다. 그건 사람들이 
고정관념을 갖고 보기 때문이다. 나는 소프트웨어의 도매를 인생의 생업으로 삼아 
살아가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다. 기술이 더욱 발달되면 디지털 정보를 
전자적으로 전달시키는 인프라를 네트워크로 제공하게 될 텐데 그때 과연 
소프트뱅크를 '도매업'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 학자 비슷한 사람들이 'Small 
is beautiful'(작은 것이 아름답다)이라고 하면서 양적 확대에 대해 비관적이지만 
그런 사람은 기업의 사장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경영자인 이상 확대 균형을 
지향하지 않는다면 그건 거짓말이라고 생각한다. 기업이란 강해야 되고, 또한 
리더는 확대 균형을 늘 생각하지 않는다면 발전적인 경영을 할 수 없을 
것이다."([그래 내가 한국인이오])

언론 매체에 많이 인용되는 그의 어록엔 '대담한 발상'이란 말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는 짧은 시간 내에 거대화를 이루기 위한 조건이기도 하다. 

"사업을 성공시켜 확대하기 위해선 위험부담을 이겨 내는 경영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30%의 위험부담률이라면 감히 맞서는 그런 경영을 하고 싶다. 
말하기 뭣 하지만 고용 사장으로선 30%의 위험부담에 맞서서 일을 벌이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나는 소프트뱅크 주식 70% 정도를 보유하고 싶다."([그래 
내가 한국인이오]) 

 

'대기업병'을 막아야 산다

 

속전속결식 M&A에 의해 거대화된 기업군이 잘 돌아갈까? 많은 사람들이 이걸 
궁금하게 생각할 것이다. 소프트뱅크는 이미 20개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지 않은가. 
손정의도 그 문제를 직시하고 있다. 그는 '대기업병'을 막아야 한다고 외친다. 
이는 우리 대기업과 공무원 사회도 귀담아 들어야 할 대목이다. [손정의 경영 
스토리]의 저자 에도 유스케의 말을 들어 보자. 

"기업이 어느 정도 규모에 올라서면 사원이나 경영자 양 쪽 모두 회사가 망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머리에서 지워 버린다. 말하자면 죽느냐 사느냐 하는 생존 법칙에 
둔감해져 버리는 것이다. 그 특징으로 제일 먼저 나타나는 현상이 '내가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나는 거대한 기업을 굴러가게 하는 작은 톱니바퀴에 불과한 
존재다. 회사가 커진다고 해서 내게 어떤 보상이 돌아오는가?'라는 사원들의 
안이한 자세와 의욕 상실이다. 이것이 경영자가 경계해야 할 가장 무서운 내부의 
적이라고 손 사장은 말한다. 그래서 소프트뱅크에서는 경영자 자신부터 죽느냐 
사느냐 하는 위기의식을 항상 느끼고 있고 사원들에게도 똑같은 위기감을 심어 
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손 사장이 내린 대기업병에 대한 처방전은 노력한 만큼 
보상을 해 주는 것이다."

손정의가 채택한 인센티브제는 적어도 일본에서는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독보적인 것이다. 손정의는 스톡옵션제가 금지돼 있는 일본에서 변칙적인 
스톡옵션제를 해 가면서까지 사원들에게 강한 자극을 준다. 그는 미국 사원과 일본 
사원의 차이를 말하면서 인센티브제의 절대적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역설한다. 

"미국인 사원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단호하게 그만두는 등 회사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일반론입니다. 
인센티브만 주면 미국인은 대단히 열심히 일을 하니까요. 실제로 우리 회사에 
근무하는 미국인 사원 중에는 한 달에 2∼3일만 집에 가고 회사에 틀어박혀 일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특히 윗사람일수록 업무에 푹 빠져 있으며, 그들은 숫자의 
세부 내용까지도 자세히 알고 있습니다. 왜 미국인이 열심히 일하느냐 하면, 
이익을 올리면 그것이 보수로 돌아오는 구조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인센티브의 구조만 명확히 밝혀 두면 그들은 이익 제조 기계가 되어 맹렬히 
노력합니다. 이것은 일본인 이상입니다. 따라서 회사를 새로 일으키는 일은 
일본보다 미국이 더 쉬울지도 모릅니다. 일본과 달리 여러 가지 면에서 기업가에 
대한 저항이 없기 때문이죠. 좋은 조건만 제시하면 얼마든지 유능한 사원을 모을 
수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유능한 사람은 대기업이나 관공서에서 일하고 싶어하기 
때문에, 벤처 기업에서 우수한 사원을 모으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감성의 
승리])

'대기업병'을 막기 위해선 불확실성을 제거하는 것도 중요할 것이다. 스스로 
'디지털 인간'임을 자처하는 손정의는 애매한 것을 싫어하는데, 이는 조직 
운영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그는 팀제를 운영하면서 그 수를 10명 이하로 
제한했는데, 그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손가락 수를 한 번 헤아려 보세요. 한 개라도 결손이 되면 금세 알 수 있지요. 
그러나 지네 같은 벌레는 발이 많으니까 한두 개 없어져도 모르고 기어 가겠지요. 
이처럼 사업 단위가 10명 이하일 땐 어떤 작은 변화도 당장 알아차릴 수가 있지요. 
가령 한 사업 단위가 적자일 때 어느 정도의 금액을 초과하면 자동적으로 그 팀은 
해산되지요. 그렇게 하면 자기도 모르게 끝없이 피를 흘려, 아차 하고 정신차렸을 
땐 출혈 과다로 쓰러지는 일은 결코 일어날 수 없지요. 말하자면 일종의 안전 
밸브인 셈이지요."([그래 내가 한국인이오]). 

 

'손정의 신화'의 미래

 

[중앙일보] 97년 11월 12일자엔 <잘 나가다 흔들리는 '손정의 신화'>라는 제하의 
기사가 실려 있다. 주가 하락과 엔 약세 여파로 순익이 34%나 감소했다는 
소식이다. 그러나 그로부터 얼마 후 [조선일보] 98년 7월 20일자엔 <'황금알' 낳은 
'야후' 주식:소프트뱅크 손정의 회장 2년만에 26억 불 벌어>라는 제하의 기사가 
실려 있다. 

이건 무얼 말하는가? 소프트뱅크의 미래는 꼭 손정의에게만 달려 있는 게 아니다. 
소프트뱅크는 자기 덩치보다 더 큰 기업들까지 M&A 하면서 무한 질주를 해 오는 
동안 많은 빚을 졌다. 금융 시장이 제대로 돌아가면 아무 문제가 없을 수도 
있지만, 그게 삐끗하면 소프트뱅크까지 삐끗한다. 세계 금융 환경이 소프트뱅크의 
장래를 결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내가 잘 아는 한 경제 전문가는 컴덱스와 같은 전시회 사업도 갈수록 위력을 잃어 
가고 있어서 전망이 밝지 않거니와 손정의의 재산은 환율이 역전하고 주가가 
폭락하면 단칼에 날아가는, 매우 취약한 것이라고 말한다. 손정의가 일본과 미국 
업계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만드는 '모험'을 즐겨하는 건 그의 피에 녹아 있는 
한국인 특유의 '기마이' 기질이 아닌지 모르겠다는 말도 했다. 

손정의는 그간 개인적으로는 일본인 기업가들로부터 많은 은혜를 입었지만, 그의 
'튀는' 스타일로 인해 앞으로 집단적 차원의 박해가 가해질 수 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손정의는 니혼게이자이신문이나 아사히신문 같은 언론이 아예 그를 
전담하는 기자를 둘 정도로 일본 언론의 주목을 받는 스타이지만, 그걸 꼭 좋게만 
볼 건 아니다. 이미 그를 부당하게 비난하는 책까지 출판된 바 있으며, 그가 
아사히방송 주식 매입과 관련해 후퇴를 한 것도 그럴 가능성을 말해 주고 
있다.(물론 그것도 고도의 전술이라는 평가도 있지만.) 흥미롭게도 역학 
칼럼니스트 김광일이 [윈] 97년 11월호의 '관상 칼럼'에 쓴 다음과 같은 말은 
일본인들이 손정의의 맹활약을 내내 곱게만 보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을 시사해 
준다. 

"치열이 고르지 못하고 관골이 약해 사업 이외에 정치 분야에 진출하면 도리어 
날아가고 봉황의 다리에 바윗돌을 매단 격이 되니 오로지 사업에만 신경을 써야 
한다.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손 사장의 얼굴에는 47세에 정치쪽으로 유혹을 받을 
수 있는 운명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만 주의하면 그는 큰 거부로서 세계 
속의 자랑스런 한국인으로 깊이 기억될 상을 가지고 있다."

손정의가 사업에서 계속 성공하면 아직 생존해 있는 아버지의 꿈을 이뤄 주기 위해 
정치에까지 진출하지 말란 법은 없겠다. 그러나 손정의가 정치에 진출해 
실패한다면, 그건 관상 때문이라기보다는 '한국인 출신'이라는 한계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이 점은 누구보다도 손정의가 이미 어린 시절에 깨달은 것이 
아닌가. 

 

'궁극적인 자기만족은 이기(利己)가 아니라 이타(利他)에 있다'

 

손정의는 오랫동안 온갖 불이익을 감수하면서도 한국 국적을 지키다가 몇 년 전 
여권 만들기가 번거롭고 시민으로서의 권리도 가지고 싶다는 이유로 일본 국적으로 
바꾸었다. 여기에도 재미있으면서도 감동적인 에피소드가 있다. 손정의는 
플래카드를 들고 차별 폐지를 외치는 것도 휼륭한 일이지만, 자기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아이덴티티를 갖기로 했다면서 자신이 겪은 일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였다. 

"법무성에서 손이라는 성으로는 일본 국적을 받을 수 없다고 하는 겁니다. 일본의 
인명사전에도 없고 선례도 없다며 개명하라는 것이었어요. …… 그래서 저는 
아내에게 협조를 구했습니다. 아내는 일본인이고, 일본 국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국의 경우 부부가 각자 본래의 자기 성을 사용하기 때문에, 아내는 오노라는 
결혼 전의 성을 그대로 쓰고 있었지요. 그래서 법원에 신청해서 아내의 성을 
손으로 바꾸었습니다. …… 그러고 나서 제가 법무성으로 갔습니다. 일본인 국적을 
가진 사람 중에서 손이라는 사람이 정말로 없느냐, 만약 한 사람이라도 선례가 
있다면 인명사전에 있는 걸로 인정하기로 한 지난 번 이야기를 상기시켜 주었지요. 
담당자는 조사하고 와서는 '딱 한 사람 있습니다. 바로 당신 부인입니다.'라고 
하더군요. (웃음) 그렇다면 나는 두번째이니까 괜찮지 않느냐, 라고 해서 겨우 
인정을 받았습니다. …… 법을 어기지 않는다, 법에는 항상 따른다, 법의 정신을 
존중하지만 방법은 유연하게 대처한다, 어긋난 짓은 하지 않는다, 이것이 제 
신조입니다. 저는 어떤 일을 해도 정의(正義)니까요. (웃음) …… 제 이름대로, 
손해를 볼 때라도 정면으로 당당하게 인생을 걸어가고 싶습니다. 제 이름을 
생각하면 잔재주나 기교로 세상을 살아갈 필요는 없다, 정의를 관철하다가 상처를 
받으면 그것은 명예로운 부상이다, 그러면 상처도 사라진다, 하는 기분이 
듭니다."([감성의 승리])

우리 한국인은 어쩔 수가 없나 보다. 이 대목에 이르면 나도 약해진다. 손정의 
멋쟁이! 사업가의 말이라는 게 정치가의 말 이상으로 액면 그대로 믿을 건 못 
되지만 손정의의 다음과 같은 말은 그대로 믿고 싶어진다. 물론 그가 꿈꾸는 
디지털 세계에 대한 낙관적 평가는 유보한 채 그의 진심만큼은 말이다.(다만, 과연 
그에게 진정한 이타(利他)를 실현할 시간이나 있는지 의문이 들긴 한다. 한국 
시장까지 넘볼 게 아니라 한국을 위해 무언가 보여 줘야 하는 것 아닌가?)

"돈이란 어디까지나 하고 싶은 사업을 이루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궁극의 
자기만족이란 이기(利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타(利他)에 있다. 컴퓨터 산업은 
사람들의 지혜와 지식을 보다 넉넉하게 만든다. 그런 일을 진정 하고 싶다."([그래 
내가 한국인이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 "활쏘기는 군자의 덕성과 비슷한 바 
가 있으니, 활을 쏘아 과녁을 벗어나더라도 오히려 그 이유
를 자기 몸에서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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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 즈 는 열 린 사 람 들 의 모 임 입 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