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economics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화이트헤드) 날 짜 (Date): 1998년 9월 21일 월요일 오후 12시 21분 11초 제 목(Title): 매경/ 케인즈경제학 1998년 9월 21일자 ] [케인스 경제학 부활하는가] [전병준] "불황이 온다. 케인스가 되살아난다" 1년여 전부터 시작된 아시아 금융대란이 세계경제를 침체로 몰고갈 조 짐을 보이면서 30년대 대공황 탈출의 이론적 해법을 제시했던 케인스경 제학이 새롭게 조명을 받고있다. 이른바 `불황 경제학'으로 불리는 케인스의 `비책'이 60년이라는 시간 을 뛰어넘어 전후 최대의 불황으로 신음하고 있는 지구촌을 살릴 `비상 약'으로 다시 기대를 모으고 있는 것이다. @ 일반이론과 전후 세계경제 부흥 1936년에 발간된 불후의 명저 `일반이론'으로 완성된 케인스의 경 제해법은 기존 경제학자들의 사고방식에 대해 일대 혁신을 불러왔다. 경제학자들은 대공황이 진행되는 와중에서도 "경제가 항상 완전고용 상태를 향해 움직인다'는 신고전학파 이론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기업이 물건을 만들어내기만 하면 당연히 팔릴 것이라는 전제( 세이의 법칙)가 깔려 있었고 따라서 경제정책은 무엇을 얼마만큼 생 산해 내느냐는 공급측면에서 다뤄졌기 그것이 팔릴 것이냐는 수요측면에 서 전혀 다뤄지지 못했다. 하지만 30년대 유럽과 미국을 필두로 세계를 휩쓴 대공황은 이같은 기 존이론을 유명무실한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공장에서는 각종 제품들이 엄청나게 생산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물건들은 팔리지 않은 채 공장 의 뒷마당에 산처럼 쌓여만 갔다. 많은 근로자들이 실업자 대열로 낙오 됐고 존 스타인백의 `분노의 포도'에서 리얼하게 묘사된 참상이 끝없이 전개됐다. 경제정책가 나 경제이론가들은 이런 미증유의 사태에 속수무 책이었고 문제해결을 위한 아무런 해법도 제시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같은 위기속에 `구원의 전도사'처럼 케인즈경제학은 극적으로 출현 하게 됐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케인스 혁명'이라는 표현까지 사용 한다. 케인스는 신고전파 경제이론의 불변의 진리였던 `완전고용'가정에 일대 메스를 가한다. 그는 "시장에서의 완전고용은 특수한 케이 스일뿐 대부분의 경우 불완전고용이 일반적인 상황이다"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유효수요진작을 통한 고용창출이 급선무다"라고 갈파했다. 종래 공급중시의 사고로부터 일대 전환을 요구한 것이다. 어찌보면 경제의 공급과 수요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지만 유효수요창출이라는 수요중시이론은 당시로서는 코페르니쿠스적 발상전환 이었다. 30년대 초반 스웨덴 독일 일본 등이 부분적으로 케인스식 공공투자를 벌였지만 미국 루스벨트대통령이 뒤늦게나마 뉴딜 정책을 채택한데는 케 인스의 공이 크다. 케인스 경제학의 성가는 2차대전 후에 더 두드러졌 다. 케인스적인 사고는 미국이 원조한 서유럽 부흥정책인 마셜플랜의 이론 적 지주역할을 했고 전후 브레튼우즈체제의 기초가 됐다. 또 `자본주의 황금기'라고도 불리는 50-60년대의 고도성장을 뒷받침하기도 했다. @ 케인스경제학의 성공과 퇴조 그러나 역설적으로 케인스경제학의 성공은그 몰락으로 이어졌다. 월남전 을 거치면서 야기된 미국의 방만한 재정적자는 70년대 들어 중동의 석유 파동과 겹쳐 급속한 물가상승 속에 경기가 침체하는 소위 `스태그플레이 션'을 유발시켰다. `대공황'시절과 마찬가지로 문제해결을 위한 새로운 페러다임을 요구 하는 목소리로 이어졌고 프리드만 등으로 대표되는 통화주의자의 반격 이 시작된다. "어떠한 경우에도 시장에 손을 대는 것은 안대느니만 못 하다"는 통화주의자들의 주장은 특히 80년대 들어 미국의 레이건, 영국 의 대처정부등의 경제정책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해 줬다. 고전파의 자유주의와 구별해 신자유주의로 불린 이같은 흐름은 규제완 화와 작은정부를 기치로 90년대 들어 세계경제에서 `개입'을 일소하는 위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이런 반전은 어찌 보면 케인스가 예견한 것이었다. 케인스는 자신의 이론이 불완전고용상태에서 완전고용상태로 경제를 옮기는데 필 요한 것이고 완전고용이 달성되면 자유주의적 처방이 필요하다고 얘기한 바 있다. 케인스 경제학의 실패라고 보였던 것은 완전고용상태가 됐는데 도 계속 케인스처방을 썼기 때문에 나타난 부작용이라 볼 수도 있다. @ 케인스 경제학의 부활 그러나 70년대 초반 `과잉국가'가 케인즈를 삼켰듯이 이번에는 `과잉자 유'가 신자유주의를 삼키고 있다. 가장 완벽하게 자유를 누리고 있는 금 융부문에서 위기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세계경제는 이제 디플레이션 징후를 보이며 불황의 시기로 다시 접어 들고 있다. 케인즈가 다시 조망되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물론 80∼ 90년대에도 케인즈 경제학이 아주 사라졌던 것은 아니다. 각국 정부는 끊임없이 미세조정을 하고 경기변화에 적극 대응하면서 경기변동의 진폭 을 크게 줄였다. 따라서 케인즈에 대해 고조되는 관심을 부활로 지칭하는 것은 적절치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동안 세계경제의 조류는 분명 개입에 반대하 는 신고전파였다. 케인즈는 `보완재'에 불과했다. 신고전파의 시대는 이제 시장내부의 문제로 현재 심각한 불균형에 빠 져 있다. 70년대의 변화된 현실이 신고전파를 선택한 것 처럼 수요부족 에 직면한 현재 위기는 케인즈를 다시 고대하고 있는지 모른다. 의견.제보 : economy@mk.co.kr [케인스이론의 구조] 저금리.적자재정으로 침체 탈출 [신장섭 기자] 케인즈 경제이론의 핵심에는 `3대 심리법칙'이 있다. 첫째는 소비성향이다. 개인들이 소득을 소비와 저축으로 일정부분씩 나 누는 심리이다. 이 비율은 단기적으로 갑자기 변하지는 않지 만 경제여 건에 따라 장기적으로 변화한다. 둘째는 투자심리이다. 기업인들은 미래에 대해 예상을 하고 이에 따라 투자를 한다. 미래에 대한 계산을 정확히 하는 것을 불가능하기 때문에 기업인들의 `동물적 본능(animal spirit)'이 투자에 결정적 역할을 한 다. 세째는 유동성선호심리이다. 개인이나 금융기관들은 금리가 낮다고 생각하면 아예 현찰을 들고 있으려 한다. 이에 따라 금리가 일정수준 밑 으로 떨어지기는 어렵다. 고전파 경제학에서는 이 세가지 심리가 이자율을 매개로 긴밀히 연결 되어 있다고 봤다. 저축이 이자율에 의해 결정되고, 투자도 기대수익률 과 이자율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생각하고 유동성선호심리는 전혀 고려하 지 않는다. 이에 따라 경제가 자연스레 완전고용 상태의 균형으로 복귀 하는 힘을 갖는다. 이자율이 높으면 투자는 적게 하려는 반면 저축은 더 많이 하려고 하기 때문에 이자율이 다시 떨어져 `정상'수준의 경제활동 이 계속 유지된다는 것이다. 반면 케인스는 3가지 심리가 각각 별도의 법칙에 의해 움직이기 때문 에 3가지 잘 맞아 떨어져 경제가 완전고용상태로 가는 것은 오히려 `우 연'이라고 보았다. 케인스는 특히 저축은 이자율이 아니라 소득수준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저축은 어차피 번 돈을 쓰고 남은 것 이니만큼 이자율을 갑자기 올린다고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소득이 많아 지면 자연히 늘어난다는 것이다. 이자율과 관계없이 투자수익률 전망이 너무 나빠 투자하지 않는 경우 도 있다. 유동성선호가 커지면 왠만한 금리에서는 돈을 은행에 오래 맡 겨두기보다 현찰로 들고 있으려 한다. 케인스는 이 세가지 심리를 그대 로 놔두면 자본주의 경제는 장기적으로 불황의 길로 걸어가는 경향을 보인다고 생각했다. 근로자들의 임금소득보다 부유층의 금리소득 등이 늘어가는 속도가 더 빠르고 유동성함정 등에 의해 금리인하가 억제되기 때문이다. 케인 스는 따라서 정책수단을 활용해서 자본주의 경제가 이렇게 자꾸 불황에 빠지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케인스는 우선 `소비가 미덕'이라 고 강조했다. 개인들 입장에서 볼 때는 수입이 줄어들 때 소비를 줄이는 게 합리적이지만 그로 인해 내수가 위축되고 물건이 안 팔려 실업이 늘 어나 다시 소비를 줄이는 악순환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케인스는 불황기에 소비를 늘릴 수 있는 주체로 정부를 첫손에 꼽았 다. 예산을 활용하고 국채를 발행해서라도 자금을 조달해 정부가 공공사 업 등을 일으키면 일자리가 생기고 소비위축도 막게 된다는 것이다. 케인스는 이와 함께 저금리정책이 필요하고 주장했다. 무엇보다도 투 자는 저금리하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또 저금리로 소비성 향이 낮은 부유층의 소득은 감소하는 반면 소비성향이 높은 근로자들의 소득은 늘어 경제 전체적으로 소비가 확대되기 때문에 경기를 부양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의견.제보 : economy@mk.co.kr [ 1998년 9월 21일자 ] [케인스의 보호무역론] 자유무역과 보호무역처방 [신장섭 기자] 케인스는 고금리가 놀고 먹는 이자소득자들의 수입만 올리고 생산적 투자를 위축시켜 경제를 불황으로 몰고 간다며 고금리의 폐해를 역설했다. "고금리는 자본주의 경제의 근본적 약점 중 하나" 라고까지 지적했다. 같은 맥락에서 케인스는 지금 국제통화기금(IMF)처방과 같이 고금 리 정책에 의해 공급과잉을 해소하는 것에 대해서도 극도의 거부감을 보 였다. 그는 금리수준이 투자의 예상수익률보다 낮아서 나타나는 신고전 파적 과잉투자는 현실에서 별로 나타나지 않는다고 본다. 경기활황기에 생기는 대부분의 과잉투자는 종전 금리수준에서도 수익 을 내지 못할 정도로 상황판단이 잘못된 과오투자(misdirected investment)인 만큼 금리를 높여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고금리는 오히려 다른 건전한 투자까지 위축시켜 경제를 더 침체상태로 몰아넣는 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케인스의 경제관은 국제무역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그는 고전학파가 비판했던 중상주의이론이 더 현실적이고 타당성이 많다고 주장했다. 중상주의자들은 경상흑자와 저금리를 유지하기 위해 수입에 대해 규제도 하고 `고리대금법(usury law)'도 만들어 강압적으로 금리를 낮췄다. 케인스는 중상주의자들의 처방은 상대국의 보복을 불러 일으킬 위험은 있지만 국내적으로 실물경제를 지탱하면서 경상수지를 개선할 여지를 갖 고 있기 때문에 경제를 완전고용상태로 이끌어 가는 동력을 내부에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반면 자유무역론은 경상적자가 발생할 경우 바람직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자유무역론에 입각하면 경상적자를 보는 나라는 자금부족이 일어나기 때문에 금리가 올라간다. 금리가 오르면 수입이 줄고 금리차 때문에 해 외로부터 자금이 유입돼 경상적자 문제가 해결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고금리 때문에 실물경제가 타격을 받고 경제가 축소균형의 악순환에 빠 진다. 이런 맥락에서 케인스는 그의 제자 해로드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 다. "... 따라서 나는 국가간 경제적 관계를 되도록 많이 갖자는 사람 들보다 되도록 적게 갖자는 사람들의 의견에 찬동한다. 사상 지식 예 술 여행 등은 본질적으로 국제적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생산품은 무리 없이 그리고 편리하게 가능한 경우에는 국산이 되도록 하자. 그리고 무 엇보다도 자금조달은 주로 국내에서 하도록 하자." 의견.제보 : economy@mk.co.kr [브레튼우즈체제] 케인스 구상 바탕 세계시장 확대 틀 [이종현] 역사의 변화는 늘 그에 대응하는 이론과 정책을 새롭게 택 한다. 이는 정치경제사회의 안정을 위해 필수적인 것으로 과거에 대한 반성을 통해 진행된다. 케인즈의 구상이 대폭 관철된 전후 브레튼우즈체제도 공황과 전쟁을 부른 과거체제를 비판하면서 성립됐다. 브레튼우즈 체제는 외환금융시장 의 안정과 실물의 자유화를 축으로 하고 있다. 외환금융부문의 안정을 위해 `달러본위'의 고정환율제가 채택됐으며 국제통화기금(IMF)이 설 립됐다. 이는 외환시장의 안정을 위해 고정환율환율을 중심으로 하되 변 동환율제의 탄력성을 보완한 제도이다. 고정환율과 변동환율을 오가며 공황과 전쟁으로 연결된 이전의 환율제도를 극복하기 위한 것이다. 실물부문에서는 이전의 블럭화와 보호무역이 전쟁으로까지 이어졌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 관세무역일반협정(GATT)체제를 성립시켰다. 이는 자유무역을 국제교역의 원리로 정착시키기 위한 것이다. 브레튼우즈 체제는 이처럼 IMF와 GATT를 양대 축으로 성립된 제도이다. 브레튼우즈체제는 그러나 70년대 들어 사실상 종료됐다. 달러의 금태 환이 정지되고 고정환율제가 폐지되면서 체제의 한 축이 무너진 것이 다. 다만 실물부문에서는 90년대 들어 GATT가 더 강력한 자유무역질 서인 세계무역기구(WTO)체제로 확대 강화됐다. 변동환율제와 자유무역질서는 금융과 실물의 파트너로 70년대 이후 세계경제를 발전시키는데 나름대로 기여했다. 그러나 변동환율제 이후 금융혁신이 일어나면서 금융은 실물을 압도하는 영역으로 성장했다. 금 융은 통제를 거부하며 공룡으로 성장 했다. 그리고 변동환율제의 혼란 은 양상은 다르지만 케인즈 시대의 외환불안정과 유사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더구나 금융의 문제에서 시작된 위기는 현재 디플레이션 국면으로 치닫고 있다. 의견.제보 : economy@mk.co.kr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 "활쏘기는 군자의 덕성과 비슷한 바 가 있으니, 활을 쏘아 과녁을 벗어나더라도 오히려 그 이유 를 자기 몸에서 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