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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conomics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화이트헤드)
날 짜 (Date): 1998년 8월 23일 일요일 오전 03시 03분 45초
제 목(Title): 美日경제전쟁사활건역전드라마/윈 




권말부록 / 美日경제전쟁 제 40호 1998.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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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日경제전쟁-사활건 역전 드라마 




이재광 이코노미스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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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히로시마. 2차대전의 종전을 알리는 조종처럼 원폭이 투하되고 일본은 
미국에 무조건 백기를 들었다. 50년이 지난 85년 뉴욕 플라자호텔 2층. 미국은 
무역적자의 늪에서 벗어나기 위해 선진5개국 재무장관에게 달러화의 평가절하에 
협조할 것을 요청했다. 서명된 ‘플라자합의’의 성공 여부는 5개국 중 일본이 
쥐고 있었다. 절치부심, 경제전쟁의 칼을 갈았던 일본은 드디어 미국을 무찔렀다고 
환호했다. 

1:1의 스코어에서 일본은 80년대 말부터 미국의 자존심을 구기며 부동산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쌍둥이 적자에서 벗어나지 못한 미국은 속수무책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90년대 들어 패권의 방향이 바뀜을 알리는 조짐이 일기 시작했다. 일본은 
부동산·채권·주식 등의 거품이 빠지기 시작하며 휘청거렸고, 미국은 구조조정, 
기업의 인수·합병 등으로 기업의 몸집을 조절하며 순발력과 경쟁력을 키워나갔다. 
그 결과 일본은 구조적 불황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반면 미국은 일찍이 겪지 못했던 
장기호황을 누리고 있다. 
상황이 다시 역전된 것인가. 45년 이후 역전에 역전을 거듭한 미·일간의 드라마는 
어떻게 진행됐는가. 엔화폭락세를 면치 못하는 일본은 미국에 ‘다시 노(No)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다하라(田原)군, 드디어 일본이 미국을 추월한 모양이야.” 
1985년 플라자합의를 마치고 귀국한 다케시타 노보루(竹下登) 당시 대장상은 
떨리는 목소리로 젊은 경제평론가 다하라 소이치로(田原總一郞)에게 감동의 
메시지를 전했다. 무역적자에 허덕이던 레이건 행정부가 일본에 엔화 평가절상을 
요청했다는 것이다. 다케시타 대장상은 이를 미국이 무릎을 꿇고 항복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수출이라는 ‘무기’를 앞세워 파죽지세로 몰아붙인 끝에 
일본이 마침내 미국과의 무역전쟁에서 승리했다는 해석이었다. 

다하라는 지난 4월 발간돼 일본에서 화제를 뿌리고 있는 야마다 
아쓰시(山田厚史)와의 대담집 “다시 패배한 일본”에서 이같이 밝혔다. 그러나 
그는 “지금 생각해 보면 대단한 착각이었다”는 꼬리표를 달아놓았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후 오직 미국을 이기겠다는 일념으로 달려온 지 꼭 40년. 
일본이 무역적자로 코너에 몰린 미국의 협조요청을 일찌감치 항복의 ‘백기’로 
받아들이려 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일본에 미국은 어떤 나라인가. 
아직 자본주의라는 용어조차 몰랐던 19세기 중반 미국은 일본을 세계경제에 
편입시켰고,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엽까지 일본이 아시아의 맹주로 성장한 데는 
미국의 도움이 결정적이었다. 그러다 45년 히로시마 원폭 투하로 일본은 미국에 
‘무조건 항복’ 문서를 바쳤다. 사무라이의 나라 일본으로서는 영원히 씻기 
어려운 치욕이었다. 이같은 역사를 겪다 보니 일본에 미국은 언제나 넘을 수 없는, 
그러나 반드시 넘어야 할 벽으로 남아 있었다. 
일본은 무역적자를 줄이기 위해 달러값을 내리는 데 협조해 달라는 미국의 요청을 
‘살려달라’는 애원으로 받아들이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닌게 아니라 80년대 후반 일본은 쇠퇴일로에 있던 미국으로부터 헤게모니를 
이어받을 강력한 후보였다. 마침 87년에 발간된 역사학자 폴 케네디의 저서 
“강대국의 흥망”은 이같은 패권 이동의 거부감을 줄여줬다. 역사적으로 
패권국가들은 부침을 거듭했으니 미국의 쇠망도 자연스럽다는 것이었다. 5백년의 
자본주의 역사에서 헤게모니는 15∼16세기 스페인·포르투갈로부터 네덜란드로, 
네덜란드에서 프랑스와 영국으로 이전했으며 2차 세계대전 이후에야 비로소 
미국으로 이전됐다고 케네디 교수는 밝혔다. 

“강대국의 흥망”에서 일본의 헤게모니 시인(?) 

케네디 교수는 이 책에서 일본의 헤게모니 ‘접수’를 어느 정도 시인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줬다. 그는 “미국이 지나치게 패권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보다 
부드러운 ‘연착륙’을 추구하는 것이 올바른 전략”이라는 충고까지 덧붙였다. 
어려운 역사·학술서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급부상하던 당시의 사회 분위기는 이 
책을 베스트셀러의 위치에 올려놓았다. 

이같은 분위기에 적극 편승했던 것이 10여년 전 일본의 모습이다. 일본은 수출을 
줄이겠다며 미국이 만들어낸 엔고의 힘을 역이용해 미국으로부터 헤게모니를 
받아들이겠다는 자세였다. 일본은 우선 절반값으로 떨어진 달러 약세를 이용해 
미국의 세계적 기업과 부동산을 사들였다. 컬럼비아영화사, 록펠러센터, 
페블비치골프장 등 87년부터 90년 사이 무려 2백90억달러를 미국의 부동산과 기업 
사재기에 쏟아부었다. 그러고도 돈이 남았다. 미국 국채에 주식, 심지어 
미술품까지 싹쓸이하겠다고 나섰으니 일본에 대한 미국인들의 반감과 두려움을 
이해할 만했다. 

게다가 강해진 엔의 힘으로 부동산 매입, 대규모 설비투자 등 아시아지역을 
강타했으니 ‘재팬머니’는 바야흐로 전세계를 사들이는 공포의 대상으로 
급부상했다. 전후 40여년동안 단 한차례도 미국의 뜻을 거스른 적이 없었던 일본이 
마침내 미국에 ‘노’(No)라고 말함으로써 극(克) 미국의 기운은 바야흐로 탈(脫) 
미국으로 전환하는 조짐을 보였다. 바로 8년 전인 90년의 일이었다. 

그러나 지난 6∼7년 사이 상황은 너무나 큰 변화를 보이고 있다. 90년대 초만 해도 
미·일 양국은 모두 경기후퇴에 몸을 사려야 했다. 일본의 경우를 보자. 89년 
12월29일 증시 종가액은 사상 최고치인 3만8천9백15엔87전. 그러나 90년 들어 1년 
사이 두차례의 커다란 폭락을 경험하며 일본은 기나긴 불황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90년 4월2일 주가는 2만8천2엔7전. 89년 말의 정점과 비교하면 무려 
28.05% 폭락한 수치다. 

그러나 이것은 끝이 아니었다. 90년 10월1일에는 더 큰 폭락을 경험한다. 당일 
종가는 2만2백21엔86전으로 그해 정점이었던 7월17일의 종가 3만3천1백72엔28전과 
비교할 때 무려 39.1%나 떨어진 것이다. 이날 하루동안 도쿄주식시장의 주가총액 
중 2백70조엔 이상이 공중으로 사라졌다. “뉴스위크”가 ‘암흑의 월요일’(Black 
Monday)로 불렀던 이날은 80년대 후반 일본을 흥청거리게 했던 이른바 
‘버블경제’가 종식을 고하는 날이었다. 

미·일 모두 경기후퇴로 90년대 출발 

90년 초반의 미국 역시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80년대 내내 미국을 짓눌렀던 
쌍둥이 적자는 전혀 해소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경기는 침체 국면을 벗어나지 
못했다. 여기에 문을 닫는 은행까지 속출함으로써 전문가들은 미국의 21세기를 
암담하게 그리고 있었다. 비록 주가폭락으로 어두운 길을 헤매고 있었지만 아직 
세계를 지배하려는 힘의 관성을 갖고 있던 일본에 완전히 패한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가 미국사회 전체를 지배했다. 

91년 5월29일 미국 상무성 발표를 보면 당시 상황을 알 수 있다. 90년 4분기의 
실질성장률은 -1.6%, 91년 4분기 실질성장률은 -2.6%라며 “91년 초입부터 
미국경제는 경기후퇴 국면으로 돌입했다”고 선언했다. 미국과 일본 모두 
비틀거리며 90년대를 시작한 셈이다. 금융기관들의 도산이 줄을 이었고 부동산과 
주식값은 떨어지기 시작했다. 

90년대 초 양국 모두 주식·채권·통화의 이른바 ‘트리플 약세’를 겪었다. 일부 
전문가들은 쓰러져가는 양국경제가 세계를 대공황으로 몰고갈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 그러나 지나고 보면 이때는 미·일 양국이 향후 승패를 
가리는 절대적인 갈림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약간의 거리를 두고 달리던 두명의 
주자가 경기장에서 동시에 쓰러지려는 형국. 누가 완전히 넘어져 충격을 크게 받을 
것인가, 누가 먼저 쓰러진 몸을 추스르고 다시 달릴 것인가. 21세기를 맞는 20세기 
마지막 10년을 넘겨야 하는 승패의 관건이었다. 

결과적으로 승자는 분명 미국이다. 일본을 따라가던 미국은 쓰러져가던 몸을 다시 
곧추세워 달렸다. 완전히 넘어지지 않은 상태여서 충격도 적었다. 일본은 정반대. 
완전히 주저앉아 충격도 컸을 뿐 아니라 아예 넘어져 일어설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직 미국이 저만치 뒤에서 뛰어오는 듯한 착각에 빠졌고 마음만 먹으면 더 빨리 
달릴 수 있다는 교만이 있었다. 7~8년이 흐른 지금 그 차이는 역력하게 드러난다. 
일본이 구조적 불황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반면 미국은 일찍이 보지 못했던 
장기호황을 누리는 것이다. 올 들어 발표된 일본과 미국의 몇몇 경제지표가 이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일본을 보자. 일본경제는 90년대 초 거품 붕괴 이후 8년째 계속되는 불황을 겪고 
있다. 그리고 해가 갈수록 상황은 더욱 악화되는 것으로 보인다. 여간 문제가 
심각한 것이 아니다. 지난 한해동안 1만6천개의 기업이 문을 닫아 86년 이래 
최대규모를 기록했으며 개인파산 신청자는 사상 최고인 7만여명에 이른다. 또 
지난해 실질GDP성장률은 0.9%로 마이너스성장을 코 앞에 둔 실정이다. 올해 
발표되는 수치도 비관적인 것뿐이다. 일본은행은 지난 5월21일 금융경제월보를 
통해 ‘생산·소득·지출의 모든 부문이 마이너스로 돌아섰다’고 발표했다. 4월중 
도매물가지수는 2.3% 떨어졌고 도매물가의 하락은 곧장 기업의 수익을 
압박함으로써 고용과 생산에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기업들이 
투자마인드를 가질 리 없고 당연히 은행대출도 줄어들었다. 

3월 말 현재 총 대출잔고는 4백98조7백19억엔.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4% 줄어든 
수치다. 지난 4월의 실업률은 50년대 이래 가장 높은 4.1%에 이른다. 환율도 
마찬가지다. 엔화가 언제 1백50엔대를 돌파하느냐가 초미의 관심사일 정도다. 나쁜 
것은 최고, 좋은 것은 최저를 기록한 셈이다. 총리가 바뀌었어도 상황이 호전될 
것으로 보는 이는 적다. 

90년 초 거품붕괴 시작한 일본, 다시 달린 미국 

미국은 이와 반대다. 올라야 할 것은 오르고 떨어져야 할 것은 떨어졌다. 지난해 
경제성장률은 3.8%로 9년만에 최고치를 경신했다. 올 1분기 성장률은 이보다 높은 
4.2%를 기록해 ‘성장’이 올 들어 가속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실업률은 
4.9%로 24년만에 최저로 떨어졌다. 지난 4월의 실업률은 4.3%. 실업자도 
지속적으로 줄어들고 있다. 일손이 달려 대졸자를 입도선매하거나 원서제출 때 
경품을 주는 일까지 속출한다. 무엇보다 재정면에서 미국의 활황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무려 30년만에 재정이 흑자로 돌아선 것이다. 정부는 최근 9월 말로 
끝나는 올해 회계년도 재정흑자 규모가 무려 3백90억달러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다. 
최근 다소 불안한 모습을 보이기는 했어도 월 스트리트는 하루가 멀다하고 
경신되는 ‘최고’의 신기록 행진에 바쁜 줄을 몰랐다. 
지난해 미국인들의 주택 구입건수는 모두 5백만건. 68년 이후 최고치다. 
지난 4월 덴버에서 개최된 G8회의에서 클린턴 대통령은 잘나가는 미국경제를 
홍보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한수 배우라는 태도였다. 90년대 들어 수년 사이 
미·일 경제전쟁에서 일본이 완전히 패했다는 선언적 의미를 갖는 모임이었다. 
양국간에 극적인 ‘대역전 드라마’가 이뤄진 셈이다. 

도대체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이같은 일이 언제부터 어떻게 일어난 것일까. 
90년대 들어 양국 경제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어도 크게 일어났음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같은 ‘대역전의 드라마’가 이뤄졌을 리 없다. 어쩌면 그 
기간은 3∼4년, 혹은 1∼2년 사이 일어난 것인지도 모른다. 아직 ‘진행중’인 
상황이라 섣불리 단언하기 어렵다. 많은 의견들이 개진되고 있지만 아직은 
‘설’이나 ‘가설’에 불과할 뿐이다. 거의 예상치 못했던 일이어서 아직 학계의 
치밀한 연구를 찾아보기 어려운 실정이다. 그저 언론이나 관변학자들이 만들어낸 
‘주장’만 난무한다. 도대체 각양각색의 주장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지난 
10여년 혹은 그 이상의 시간을 소급하는 ‘역사적’ 이해가 없다면 자국의 이해에 
맞춰 터져나오는 주장들에 현혹되기 쉽다. 이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아무래도 
발걸음을 85년 뉴욕의 한 호텔로 옮겨야 할 것 같다. 

85년 9월. 갓 출범한 레이건 행정부의 경제정책을 책임지고 있던 베이커 
재무장관은 비밀리에 선진5개국(G5) 재무장관과 국립은행장들을 뉴욕으로 
불러들였다. 미국의 베이커 장관과 볼커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은 물론 
일본의 다케시타(竹下) 대장상과 스미타 사토시(澄田智) 일본은행 총재도 이곳에 
있었다. 85년 9월22일 뉴욕의 플라자호텔 2층. 이들은 이후 세계경제를 
지각변동으로 몰고가는 역사적 합의에 서명한다. 

합의의 골자는 세계 각국의 국제수지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한 환율 조정. 말이 
좋아 ‘국제수지 불균형 해소’요 ‘환율조정’이지 실상 이 합의의 목적은 
뚜렷했다. 무역적자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미국을 구해내기 위해 달러의 
평가절하를 달성한다는 것이었다. 미국은 아직 막강한 군사력을 배경으로 세계 
중요국들의 협조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반강제적인 것이었음은 물론이다. 아예 
목표수치와 시장개입을 위해 필요한 액수까지 할당했다. 그동안 외환시장 불개입을 
정책기조로 삼았던 것에 비춰보면 일대 전환이 아닐 수 없었다. 

미국이 공표한 목표는 달러의 10∼12% 절하. 시장개입을 위한 구체적 방안까지 
하나하나 제시했다. 향후 6주간 1백80억달러 규모로, G5가 공동으로 외환시장에 
개입해야 하며 이 자금은 각국이 분담한다는 내용이었다. 분담액은 미국과 일본이 
각 30%, 서독이 25%, 프랑스가 10%, 영국이 5%. 미국과 일본의 분담액이 전체의 
50%를 넘는 것이어서 결국 이 계획의 성공 여부는 전적으로 일본의 손에 달려 
있었다. 물론 일본은 적극적으로 미국에 협조할 뜻을 비쳤다. 그러나 일본이 밝힌 
협조의 이면에는 또다른 의도가 있었으니, 그것은 이후 드러나겠지만 바로 세계의 
‘엔제국’ 건설이었다. 수년 후 강해진 엔화는 날카로운 비수가 돼 미국의 
옆구리를 찔렀고 미국은 일본을 치기 위해 ‘새로운 칼’을 준비해야만 했다. 

세계경제 뒤흔든 85년 플라자합의 

어쨌거나 합의 다음날인 9월23일(월요일) 내용이 전격 발표되면서 세계외환시장은 
큰 충격에 휩싸였다. 세계의 리딩그룹인 G5국가의 경제책임자들이 전격합의했다고 
하니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뉴스거리였다. 지금은 G5의 경제책임자회의가 
공공연히 보도돼 새롭게 들리지 않지만 85년까지 이 모임은 철저한 비공개로 
진행됐다. 일반 대중들은 G5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몰랐을 정도다. 이날 발표로 
G5의 경제책임자모임이 처음 실체를 드러낸 것이다. 

외환시장은 즉각 요동치기 시작했다. 합의 직전인 20일 뉴욕외환시장에서의 종가는 
달러당 2백38엔, 도쿄외환시장 종가는 2백42엔이었다. 발표 당일 뉴욕시장에서 
엔화는 달러당 2백26엔으로 하루만에 12엔 올랐고 다음날 24일 도쿄시장에서는 
달러당 2백30엔에 거래돼 역시 12엔이 상승했다(발표 당일 일본은 추분(秋分) 
축제휴일로 휴장). 세계외환시장의 대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시장개입은 계속됐다. 달러는 지속적으로 시장에 나왔으며 연일 하락세를 
멈추지 않았다. 9월의 마지막날인 30일, 합의 발표 후 8일만에 도쿄외환시장에서는 
달러당 2백16엔에 거래됨으로써 엔화는 급격한 상승세를 유지했다. 81년 12월 이후 
3년10개월만의 최고치였다. 전문가들의 견해로는 미국이 요구했던 ‘10∼12% 
평가절하’의 목표가 달성된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미국은 합의내용이 완전하게 
이행된 것으로 보지 않았다. 아직 마르크·파운드·프랑화와의 환율을 안정시킬 
필요가 있었다. 만일 여기서 손을 놓는다면 달러는 다시 오를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날 기자회견에서 스미타 일본은행 총재는 “엔고는 아직 충분하지 않다”며 
“엔화가 더욱 높아지기를 희망한다”고 말해 시장개입이 끝나지 않았음을 
시사했다. 

10월 들어서도 G5의 ‘달러값 떨어뜨리기’는 여전히 강행됐다. 지휘자로 남아있던 
미국은 10월 이후 직접 시장조정에 나섬으로써 대미를 장식하고자 했다. 10월10일 
뉴욕의 은행들이 도쿄시장에서 처음으로 엔화를, 싱가포르에서는 마르크화를 
매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당연히 엔화의 상승은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10월21일 
도쿄시장에서 거래된 엔화는 달러당 2백14엔. 합의 이후 1개월만에 엔화는 30엔 
가까이 치솟은 셈이었다. 그리고 10월 말 세계시장 조작을 위한 G5의 ‘작전’은 
막을 내린다. 미국은 ‘적정선’에서 달러값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따라서 가중되는 무역적자도 줄어들 것으로 예상했다. 이 6주 사이 G5가 
쏟아부었다고 추정되는 돈은 모두 1백억달러를 넘는다. 일본은 경쟁국이자 맹방인 
미국을 구출하기 위해 엄청난 돈을 투자한 것으로 여겨졌다. 

‘공급주의 경제학’이 80년대 파탄의 주범 

세계외환시장에 대한 개입은 일단 성공한 것으로 보였다. 10월 말 엔화 대비 
달러는 10% 이상 평가절하됐다. 세계시장을 멋대로 교란시킨다는 다른 국가들의 
비난을 감수하면서도 G5는 목표를 달성한 것이다. 물론 그 중심에는 미국이 
있었다. 세계 최강국 미국의 필요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면 이같은 ‘대작전’은 
성공은커녕 생각조차 하기 어려웠음이 틀림없다. 

최근 아시아 위기를 맞아 엔화를 아시아지역의 국제통화로 하자거나 아시아 기금을 
마련하자는 일본의 제안이 전혀 먹혀들지 않는다는 것만 봐도 국가의 힘이 어느 
정도 중요한지 알 만하다. 엔저 방지를 위한 일본의 노력이 미국의 도움 없이는 
절대 가능하지 않다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해관계가 상반될 수 있는 나머지 
강국들의 협력을 끌어내기란 결코 쉽지 않은 문제다. 

사실 미국은 당시 어떤 무리를 해서라도 달러를 내릴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아니, 
달러를 평가절하하는 것만이 미국이 겪고 있던 위기를 탈출할 수 있는 마지막 
방법으로 여겨졌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여기에는 세계 패권을 강화하고 국내 
경기를 ‘공급’으로 해결하겠다는 레이건 대통령의 경제정책, 이른바 
‘레이거노믹스’가 자리잡고 있다. 레이거노믹스가 불러일으킨 그 유명한 쌍둥이 
적자, 즉 재정적자와 무역적자로 레이건 행정부는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리고 
있었으며 달러의 강압적 평가절하와 그를 통한 수출확대가 마지막 카드로 남아 
있었을 뿐이었다. G5의 경제수뇌들을 비밀리에 한 호텔에 불러모을 수밖에 없을 
만큼 미국이 안고 있던 문제는 심각했다. 

레이건 대통령은 81년 2월 취임과 거의 동시에 대국민 담화를 발표했다. 그것도 
TV를 통한 생방송이어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일이었다. 담화 내용은 “미국은 
대공황 이래 최악의 상태다. 여러분들은 이 사태를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비관적인 것이었다. ‘강한 미국’을 강조하며 애국심을 고취하던 레이건 대통령의 
어투에는 비장감마저 실려 있었다. 2차대전이 끝난 이후 지속적인 활황이 73년 
오일쇼크로 막을 내린 이후 80년대 들어서도 미국경제는 여전히 휘청거렸다. 
오일쇼크의 영향으로 2∼3년간 불황에 시달리더니 78년 이후에는 돌연 인플레가 
기습한 데다 재정·무역적자는 불안한 모습을 연출했다. 레이건 대통령의 연설을 
들으며 국민들은 뭔가 새로운 경기대책이 나올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이 위기를 타파하기 위해 가장 적극적으로 뛴 것이 언론이었다. 특히 “월스트리트 
저널”은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해 레이건 정부의 정책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당시 
“월스트리트 저널”의 편집위원 로버트 버틀리. 그는 자신이 신봉하던 
‘공급측면의 경제학’을 정책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언론을 총동원하다시피 했을 
정도다. 이 주장의 핵심은 감세를 통해 적자재정을 해소한다는 것이었다. 
개인소득세를 줄여 노동자의 근로의욕 및 소비를 증가시켜 재정을 확충할 수 
있으며 법인세를 낮춰 투자를 촉진하면 역시 재정수입을 확충할 수 있다는 논리다. 
지난해부터 미국이 일본에 요구했던 소득세 및 법인세에 대한 영구, 대규모 감세와 
같은 논리다. 

대통령에 당선된 레이건은 이 논리를 채택했다. 어떻게 보면 아마추어들의 
논리였고, 지금도 일부 경제학자들은 레이건 정부의 ‘무지’를 탓한다. 어쨌거나 
학자들이 주도한 경제정책이 실패로 끝나자 신정부는 경제 관련 논객들의 말에 
귀를 기울인 것이다. 공급주의 경제학은 즉각 효력을 발휘하는 것으로 보였다. 
취임 다음해의 경제성장률은 비록 마이너스에서 헤어나지 못했지만 취임 3년째인 
83년부터 미국경제는 뚜렷한 회복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정부가 세율을 인하하자 소비가 높아졌고 금리도 낮아졌다. 주가가 오르고 
산업계가 활기를 띠기 시작한 것은 당연한 일. 83년 실질성장률 3.6%에 이어 
84년에는 6.4%까지 수직상승했다. 경기가 회복되면서 실업률이 낮아진 데다 
인플레마저 보이지 않았으니 그야말로 전형적인 ‘3각 선순환’이었다. 당시 
석학이었던 다니엘 벨 교수는 “서독과 일본에 비견되는 미국의 ‘경제기적’이 
벌어졌다”며 레이건 행정부에 대한 예찬을 아끼지 않았다. 

80년 초 미 호황 아래 ‘쌍둥이 적자’ 가속화 

그러나 이 호황의 그늘 아래 다른 주요 경제부문이 썩고 있었다. 바로 재정과 
무역이었다. 감세가 궁극적으로는 재정확대를 가져올 것이라는 주장은 전혀 현실로 
드러나지 않았다. 82년의 재정적자액은 1천3백7억달러. 한해 전과 비교하면 무려 
80%가 증가한 액수다. 그러나 83년 재정적자액은 한술 더 떴다. 이해 재정적자는 
1천8백99억달러를 기록함으로써 가계부문의 순저축액 1천7백82억달러를 넘어섰다. 
물론 여기에는 ‘강한 미국’을 재건하기 위해 4천억∼6천억달러를 쏟아부었던 
군사비도 한몫을 했다. 

무역부문도 마찬가지여서 레이건정부 등장 이후 미국은 엄청난 적자에 허덕여야 
했다. 많지는 않아도 그런대로 흑자를 유지하던 미국의 무역수지는 70년대 들어 
적자와 흑자를 오르내리더니 마침내 76년 이후 적자를 벗어나지 못하는 상태가 
계속됐다. 레이건 정부 등장 이후 이 폭은 더욱 컸다. 3백억달러 선에서 유지되던 
적자폭은 레이건 정부 출범 직후 급전직하, 매년 적자의 ‘신기록’을 깨기 
시작했다. 82년만 해도 6백억달러를 넘지 않았던 무역적자는 83년 1천억달러를 
넘어섰고 레이건정부 2기째를 맞은 85년의 무역적자는 무려 1천6백억달러에 근접, 
상상을 초월하는 액수로 커졌다. 어쨌거나 이제 조금만 상황을 늦추면 무역적자는 
손을 쓸 수 없을만큼 커질 테고 세계 최강 미국의 위상은 땅에 떨어질 것이라는 
우려가 일기 시작했다. 

“일본이 미국 무역적자의 원흉” 시각 득세 

그렇다면 무역적자의 원인제공자는 누구인가. 미국정부는 일본을 노려봤다. 65년 
시작된 대일무역적자는 고작 수억달러 수준이어서 크게 우려할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80년대 들어 상황은 크게 반전했다. 80년대 들어 대일무역적자가 급속하게 
커졌기 때문이다. 84년 일본에 대한 무역적자액은 3백31억달러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달성하게 된다. 전체 무역적자액의 30%에 해당하는 액수였다. 81년 
행정부의 경제전문가 프랭크 바고는 90년에 들어서면 대일무역적자가 5백억달러에 
이를 것이라며 ‘미국의 위기’를 설파하는 전도사 역할을 자임하고 나서기도 
했다. 그러나 상황은 더욱 악화돼 그의 예상보다 5년이 단축됐다. 85년 상반기를 
넘어서자 그해 무역적자가 5백억달러를 넘을 것이라는 전망이 전 산업계를 
불안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특히 85년 9월의 대일무역적자는 사상 최대를 
돌파했다. 일본에 대해 뭔가 조처를 취하지 않으면 안될 시점이었다. 

물론 미국이 처음부터 강압적인 환율‘조작’을 생각한 것은 아니다. 일본시장을 
개방시켜 수출을 강화한다면 문제는 쉽게 해결될 것으로 보였다. 대일무역적자 
해소를 위해 가장 먼저 나선 것은 정부가 아닌 산업계와 의회였다. 80년대 초부터 
의회에서는 일본에 대한 보호무역주의가 기승을 부렸다. 무역수지 적자가 일본의 
지나친 수출정책에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일본이 시장을 개방하지 않는다면 
미국도 보복조치에 적극 나서야 한다는 분위기가 고개를 들었다. 또 더이상 미국의 
과학기술을 일본에 내주어서도 안된다는 의견이 팽배했다. 일본이 과학기술 
측면에서 ‘무임승차’를 계속하고 있다는 지적이었다. 

81년 개시된 미·일 자동차협상을 보자. 이는 일본의 대미수출을 줄이고 미국의 
대일수출을 늘려 적자를 해소하자는 대표적 사례였다. 일본 자동차의 미국 진출로 
어려워진 자동차업계가 총대를 맸다. 80년 미국의 자동차 판매대수는 2년 전에 
비해 무려 21%나 감소, 미국의 자동차 4대 메이커는 총 40억달러의 적자에 
빠져들어갔으며 노동자의 25%는 해고당해 실직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반면 미국시장에서의 일본자동차의 약진은 눈부셨다. 80년 일본의 대미 자동차 
판매대수는 모두 1백91만대. 2년 전보다 무려 55만대가 증가한 수치다. 미국에서의 
자동차시장 점유율은 21%로 2년 전에 비해 2배나 시장을 파고든 것으로 나타났다. 
당연히 업계는 강력하게 반발했고 일본의 시장진출 제재를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81년 5월 자율규제를 통해 미국에 대한 자동차 수출을 1백68만대 이내로 
줄이겠다는 일본의 약속은 일단 미국 자동차업계의 승리로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대일무역적자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빠른 속도로 커졌다. 이 정도 
정책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자동차와 가전부문에서 일본은 좋은 제품으로 
빠르게 미국시장을 잠식했다. 

84년 마침내 미국 의회는 일본에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한다. 미·일 정상회담이 
끝난 후 상원은 일본에 대한 무역보복조치를 만장일치로 채택한 것이다. “일본의 
시장개방 성과가 가시화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 표면적 이유. 4월2일 
재정위원회는 ‘대일보복 결의 및 법안’을 통과시킴으로써 이제 그 책임을 
레이건정부에 떠넘겼다. 이 법안은 결과적으로 본회의를 통과하지 못해 무산됐지만 
당시 미국이 일본에 대해 가졌던 감정이 어떤 종류였는지 알게 해준다. 매우 
이례적이며 공격적인 이 법안으로 미국과 일본이 본격적으로 경제전쟁을 치르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시장개방정책 실패로 低달러정책 선회 

결과적으로 미국은 정부·의회·기업 등이 무역적자를 해소하겠다며 총체적으로 
일본시장 개방에 나섰지만 불행하게도 그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경제학자들이 ‘해결사’로 전면에 등장했다. 이른바 
‘환율론자’들이었다.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높아진 달러가치를 무역적자의 
원흉으로 꼽았다. 레이거노믹스의 일환으로 채택한 고금리·고달러정책은 달러의 
가치를 하늘 높은 줄 모르게 치솟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자국의 
돈값이 비싸면 국제시장에서의 상품경쟁력은 떨어지게 마련이다. 미국 의회에는 
당시 일본이나 유럽 상품과의 가격경쟁이 어렵다는 기업들의 하소연이 줄을 잇고 
있었다. 경제학자들은 달러당 2백45엔인 달러의 가치를 2백엔까지 낮추면 대부분의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수입은 줄고 수출경쟁력이 살아나 
대일무역적자는 물론 전체 무역수지를 정상궤도에 올려놓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달러의 가치를 높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이를 미국 혼자만의 
힘으로 달성할 수 있을까. 한마디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적자투성이의 
미국으로서는 쉽게 나서기 어려운 일이었을 뿐 아니라 감당할 수도 없었다. 게다가 
시간도 없었다. 더이상 시간을 끌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를지도 모를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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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말부록 / 美日경제전쟁 제 40호 1998.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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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日경제전쟁-사활건 역전 드라마 




이재광 이코노미스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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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경제 패권 장악 위해 엔고 밀어붙인 일본 

마지막 선택으로 미국은 달러값을 내리기 위해 선진4개국에 협조를 요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일 달러값이 떨어진다면 일본은 물론 독일이나 영국의 수출은 줄어들 
것이다. 그러니 이들의 협조를 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미국이 갖고 
있던 막강한 정치·군사적 지위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미국경제의 파탄은 
세계경제의 파탄을 의미한다는 것이 강요의 논리였다. 세계 강대국의 경제분야 
최고책임자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을 수 있는 미국은 여전히 최강국이었다. 
플라자호텔에서의 합의는 이렇게 이뤄진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 이 합의는 분명 미국이 자신의 국익을 위해 강압적으로 관철시킨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일본이 피해를 본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부분이 많다. 
일본의 입장에서는 경제의 생명줄과도 같았던 수출에 치명적인 타격을 줄 수도 
있는 전략이었다. 심지어 일본내에서 “제3차 세계대전을 유발할 수도 있다”는 
협박성 비판이 제기되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에서는 다케시타의 
말처럼 “미국을 이겼다”는 자축 분위기가 강했던 것 역시 사실이다. 일본경제의 
파상적인 수출 공세에 미국이 무릎을 꿇었다는 해석이다. 오죽 다급했으면 그토록 
비합리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겠는가 하는 의견까지 나왔다. 나아가 
엔을 강화시킨 후 차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미국을 제치고 세계경제를 
장악할 수 있을 것으로 봤다. 강한 통화만이 기축통화가 되어 세계를 품에 안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본은 미국의 요구에서 한걸음 더 나아갔다. 10월 말이면 달러의 환율은 
미국이 요구했던 10∼12%를 채우고도 남았지만 일본은 엔고를 계속 밀고 나갔다. 
미국측 역시 손해볼 것이 없었다. 달러값이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무역수지 
적자폭은 그만큼 적어질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11월6일 스미타 일본은행 
총재는 기자회견을 통해 “엔고정책은 계속 추진중”이라고 밝혔다. 미국도 
맞장구를 쳤다. 베이커 미 재무장관은 6일이 지난 11월12일 의회가 주관한 
국제통화회의에서 “달러의 평가절하를 위한 선진국간의 협조는 결코 일시적인 
것이 아니다”라고 강조하며 “세계경제의 지속적 성장과 보호무역주의 철폐를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하다”는 의견을 밝혔다. 

11월25일 마침내 달러당 엔화는 2백엔을 돌파, 1백99엔을 기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미타 총재는 “엔고가 정착됐다고 하기에는 아직 이르다”며 
엔고정책을 계속 진행할 뜻을 내비쳤다. 다케시타 대장상도 마찬가지. “달러값이 
지속적으로 내리기를 기대한다”며 “경제정책을 전환할 생각은 없다”고 밝혔다. 
속마음은 달랐을지언정 표면적으로 달러값을 내린다는 미·일 양국의 통화정책은 
여전히 일치하는 것으로 보였다. 

플라자합의 이후 엔화는 그야말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엔화상승이 
계속될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세계외환시장의 큰손들은 엔화 매입에 적극 나섰다. 
금과 석유값이 바닥을 기고 있어 여기에 들어갈 돈마저 엔화로 쏠렸다. 많은 
국제경제학자들은 금융시장이 본격적으로 실물경제를 벗어난 시점을 이 시기로 
보기도 한다. 실물경제에서 유리된 투기자본, 금이나 석유를 사야 할 돈이 
무더기로 외환시장으로 몰려 엔화의 값을 올려놓고 있었다. 86년 3월 엔화는 
달러당 1백80엔을 돌파했고 하반기 들어서는 1백50엔대를, 87년 상반기에는 
1백40엔대를 위협하게 됐다. 

엔고는 즉각 효력을 발휘했다. 처음에는 부정적인 것으로 보였다. 플라자합의가 
있은 지 2개월이 지나면서 일본의 수출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사실 
달러당 2백40엔이었던 엔화값이 1백40엔대로 높아진 이상 일본상품이 국제시장에서 
경쟁력을 갖는다는 것은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미국에서 대당 가격이 
6백∼7백달러 수준이었던 소니의 컬러TV는 아무리 낮춰잡아도 8백∼1천달러는 
받아야 채산성이 맞았다. 각종 전자제품과 자동차 역시 거의 마찬가지 수준이었다. 
이제 바이어들은 제품의 질은 다소 떨어지더라도 값이 훨씬 싼 제품을 찾아다녀야 
하는 상황이었다. 한국이나 대만 등 중저가 제품을 만들어내는 국가들이 결국 
엔고의 덕택을 톡톡히 봤다. 고래 싸움에 새우들이 득을 본 셈이라고나 할까. 
일본측으로서는 뭔가 획기적인 정책을 만들어내지 않는 한 당분간 수출전선에 
끼어있는 먹구름은 사라질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엔고로 일본경제 방향 급선회 

따라서 일본은 몇가지 점에서 일본경제의 물줄기를 바꿔버렸다. ‘엔고’ 극복을 
위한 것이었다. 우선 수출주도형에서 내수주도형으로의 급선회가 그것. 
플라자합의가 있은 지 2개월만에 채택한 신속한 정책전환이었다. 그런데 여기에는 
금리문제가 가로놓여 있었다. 플라자합의를 통해 달러값을 내리려는 미국이 일본에 
요구했던 것은 시장개입 외에 미국과 일본의 금리 격차 해소. 당시 미국의 
장기금리는 10.8% 수준으로 일본의 5.8%에 비교할 때 약 2배 수준이었다. 미국이 
금리 차이를 줄이도록 요구한 이유는 해외자금의 유입으로 달러값이 높아질 것을 
우려해서였다. 85년 연말에 이르자 미국은 9.8%로 금리를 1%포인트 낮췄고 86년 
여름의 미국금리는 7.3%까지 내려갔다. 

그러나 일본은 금리에 관한 한 미국의 요구를 거부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11월 
수출이 감소한 것이 확인되자 12월 들어 일본정부는 미국과 약속한 금리협상을 
포기했다. 미국이 달러가치를 낮추기 위한 정책의 하나로 요구했던 금리격차 
해소를 뒤로 하고 금리를 인하하는 쪽으로 갈피를 잡은 것이다. 엔고로 
일본기업들이 밖에서 입은 손실을 금리를 인하함으로써 안에서 보상해주겠다는 
전략이었다. 12월18일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총리는 경제심의회 총회에서 
“미국과의 협조 아래 금리인하를 실현시킬 때가 왔다”며 금리를 내릴 뜻을 
강력하게 시사했다. 

80년대 후반 일본은 달러 ‘블랙홀’ 

이같은 금리인하 정책은 86년 해가 밝자마자 즉각 현실화됐다. 1월 29일 마침내 
스미타 총재는 재할인율을 5.0%에서 4.5%로 낮추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 
정도로는 기업들의 손실을 보전해줄 수 없었다. 향후 계속될 금리인하 조처의 
시발의 의미를 지녔을 뿐이었다. 1년동안 일본은행은 무려 다섯차례나 금리를 
인하해 87년 초 재할인율은 2.5%에 이르렀다. 세계경제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초저금리의 신화’를 창출한 것이다. 

큰 부담과 비판을 무릅쓰고 반강제적인 플라자합의를 이끌어냈다고는 하지만 
엔고로 무역수지 적자를 해소하겠다는 미국의 의도는 거의 달성되지 못했다. 
결론적으로 무역수지 측면에서 미국의 엔고전략은 완전히 실패로 끝난 것이었다. 
일본의 수출이나 흑자규모는 계속 커져만 갔다. 엔고에 따른 원자재 가격의 
대폭적인 저하가 국제시장에서 일본기업들의 경쟁력을 강화시켜 준 것으로 당시 
전문가들은 해석했다. 이제 세계의 모든 돈은 일본으로 흘러들어갔고 일본은 이 
돈을 자국의 영향력을 증진하는 방향으로 흘려보냈다. 아무도 그것을 막지 못했다. 
85년 2백58억달러였던 일본의 대미무역흑자 규모는 86년 5백14억달러, 87년에는 
5백21억달러를 기록함으로써 90년께로 예상했던 5백억달러 규모를 5년이나 앞당겨 
달성했다. 88년과 89년에는 대미무역흑자가 다소 줄기는 했어도 여전히 
4백50억달러를 넘나들었다. 

88년 일본의 자동차 생산대수는 1천2백70만대로 미국을 앞질러 세계 1위 생산국의 
지위를 차지했고 88년 한해동안 혼다 혼자만의 힘으로 북미지역에서 무려 89만대의 
자동차를 판매했다. 엔고마저 일본이 갖고 있던 ‘신기’(神技)의 상술을 막지 
못했던 셈이다. 

미국의 환율정책은 단순히 실패로 끝난 정도가 아니었다. 엔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모습으로 세계를 강타했다. 비싸진 엔화를 무기로 일본은 세계를 사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의 공격으로 만들어진 ‘엔고’는 이제 부메랑이 돼 미국을 
초토화하는 형국이 됐다. 일본의 연도별 대외투자액은 이같은 현실을 그대로 
반영했다. 84년 일본의 대외 직접투자 및 증권투자 잔액은 각각 3백79억달러와 
8백76억달러. 85년 플라자합의 이후 이 액수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해 90년에 
이르면 각각 2천14억달러와 5천6백38억달러로 모두 5배 가량 증가했다. 당시 
미국의 한 경제학자는 “일본은 세계 달러를 집어삼키는 ‘블랙홀’이다. 세계의 
돈이 일본 1국에만 유리하게 움직이고 있다. 이대로 가면 세계경제는 엄청난 
재앙을 만날 것”이라고 경고했다. 미국은 자신이 만든 덫에 스스로 빠진 
셈이었다. 

일본이 요리한 달러 중 상당액이 아시아로 흘러들어갔다. 엔고로 일본 내부 
생산으로는 도저히 채산성을 맞출 수 없게 되자 싼 저임노동을 찾아간 것이다. 
말레이시아에 대한 직접투자액을 보자. 86년 1억6천만달러 수준이었던 투자액은 
88년 3억9천만달러로, 90년에는 7억2천5백만달러로 4년 사이 5배 가량 늘어났다. 
90년의 아시아 직접투자액은 대만 4억5천만달러, 홍콩 18억달러, 태국 12억달러, 
싱가포르 8억4천만달러, 인도네시아 11억달러 등 동남아시아에만 60억달러를 
넘어섰다. 아시아는 점차 미국과 멀어지며 급격하게 ‘일본땅’으로 변했다. 92년 
8월5일자 “뉴스위크”의 특집 ‘사요나라 아메리카’는 제목부터가 일본에 대한 
미국의 아쉬움과 두려움을 잘 드러냈다. 현재까지도 일본은 아시아 국가들의 
채무액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동남아시아에 대한 투자로 일본은 언제든 이 지역에서의 엔블록 구축이 
가능해졌다. 사실 일본의 투자로 만년후진국을 벗어나게 된 동남아시아 국가들에 
일본은 ‘은인’이었다. 이들 국가의 경제성장률은 80년대 후반 이후 
수직상승한다. 물론 일본 돈에 힘입은 바 크다. 85년 7백55달러에 불과했던 태국의 
1인당 GDP는 90년 1천5백34달러로 5년만에, 87년 1천7백23달러였던 말레이시아의 
1인당 GDP는 95년 3천5백19달러로 8년만에 두배를 기록했다. 

이들 국가가 스스로 일본을 중심으로 한 아시아 경제블록을 제창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새로운 ‘대동아공영권’의 발상이 이번에는 과거의 식민지 국가에서 
직접 터져나온 셈이다. 구미 학자들은 이를 가리켜 20세기 후반 들어 일본에 의해 
새로운 제국주의, 즉 ‘우호적 제국주의’(Friendly Imperialism)가 등장했다며 
강한 비판을 제기했지만 과거 제국주의로 부강해진 국가들의 비판에 귀기울일 
일본이 아니었다. 

“일본이 미국의 영혼을 산다” 

그러나 일본의 아시아 통합이라는 원대한 구상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환일본경제권’ 구축. 동해(일본식 표기는 일본해)를 주축으로 일본을 비롯한 
러시아·중국·북한 등을 포함한 단일경제체제를 만든다는 내용이다. 91년 
후반부터 일본은 유럽공동체(EC)의 시장통합이나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에 
대응하기 위해 비밀리에 아시아 경제통합정책을 신중하게 검토하기 시작했다. 
‘일단 아시아를 집어삼키고 이후 세계를 향해 뻗어나간다’는 전형적인 일본식 
세계화전략이었다. 30년대 일본의 이같은 전략의 힘이 강한 군사력에서 나왔다면 
80년대 후반의 힘은 단연 강해진 ‘엔화’였다. 

일본 달러의 유입은 아시아 지역에만 국한하지 않았다. 아시아에 들어간 것보다 더 
많은 돈이 미국으로 흘러들어갔다. 미국의 기업과 부동산 사재기에 나선 것이 바로 
이때다. 미국으로서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 추진했던 강압적인 정책으로 일본의 
직접적인 대역습을 받은 꼴이었다. 플라자합의 이후 일본의 북미투자액 추이는 
전체적인 변화의 모습을 한눈에 보게 해준다. 86년에서 90년까지 5년동안 
북미지역에 대한 일본의 직접투자액은 3백26억2천만달러. 이 금액은 51∼85년 
35년동안 북미에 투자했던 77억1천만달러의 4.2배에 해당하는 살인적인 것이다. 
실로 미국 전체를 공포에 몰아넣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이 기간 북미 투자액이 
전체 투자액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절반이 넘는 57%. 51∼85년까지의 비중 32%를 
훨씬 능가한다. 미국에 대한 일본의 총공세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일본의 기업 인수와 부동산 매입은 그 규모면에서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매입기업과 부동산의 면면을 보면 “일본이 미국의 영혼을 
산다”는 얘기가 나올 만도 하다. 소니는 미국 영화업계의 상징인 컬럼비아사를 
매입했고 세존그룹은 인터콘티넨탈 호텔을 사들였다. 여기에 89년 미쓰비시가 
미국의 상징물 록펠러센터의 지분 51%를 매입하자 전 미국이 경악했다. 그러나 
아무도 막을 수 없었다. 미국 스스로 일본 돈을 원했고 일본 돈 없이 미국경제는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80년대 후반이 되자 하와이는 완전히 일본땅이 되는 
기색이 역력했다. 와이키키 해변의 호텔 3분의2가 일본인 소유였으며 88년 
한해동안 와이키키 해변에서 팔린 맨션 1천9백채 중 절반인 8백15채를 일본인이 
구입했다는 통계도 나와 있다. 

일본은 나아가 미국의 핵심기술까지 넘봤다. 미국의 안전보장에 긴밀하게 관련된 
기업마저 인수의사를 내비친 것이다. 86년 후지쓰의 페어차일드사 매수사건은 
미국이 어느 정도 일본 노이로제에 빠져 있었는지를 알려주는 단적인 사례. 
후지쓰는 86년 10월 페어차일드의 모회사 슈른베르주와 미국 내 합작회사를 설립한 
후 페어차일드사를 매수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이 의도는 무산되고 만다. 
상무성과 국방성이 미국의 반도체 관련 방위산업체를 외국기업이 인수한다는 것을 
용납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페어차일드의 방위산업 부문을 별개 회사로 독립시킨 
후 경영진을 미국측에 위임하겠다는 양보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계획은 결국 
없었던 일이 되고 말았다. 

이런 상황이니 미국인의 반일감정이 드높을 수밖에 없었다. 이 감정은 한편으로 
패배감과 자괴감이었다. 89년 하반기 어느날 뉴욕의 라디오방송국 WABC가 방송한 
일본특집은 당시 미국인의 감정이 어떠했는지 알려주는 좋은 사례로 곧잘 
인용된다. 뉴욕의 한 여성 대담자는 “일본인이 하와이 땅을 사들인다는 소식을 
들었다. 정말 질투를 느낀다. 나의 생활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는데 일본인들이 
하와이에서 편안하게 먹고 놀다니 정말 참을 수 없다”며 불만을 토로했는가 하면 
한 뉴욕 시민은 “일본이 매일 3백만달러를 미국에 들여온다는 얘기를 듣고는 
우리가 일본과의 경제전쟁에서 정말 패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며 실망감을 
드러냈다. 

80년대를 마감하며 미국으로서는 뭔가 새로운 대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안됐다. 
경제전쟁에서 패배한 미국정부에 어느 국민이 표를 찍어주겠는가. 
상황이 뜻밖의 모습으로 변하고 일본의 공격이 오히려 강화됐으니 미국으로서는 
여간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제 달러의 가치하락만으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환율론자들은 자취를 감췄다. 이들은 “달러값이 더 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일본이 ‘엔고’의 파도를 타고 미국 본토에 무차별 공습을 가하는 
만큼 더이상 설득력을 갖기란 어려웠다. 80년대 후반 미국은 일본을 죄는 새로운 
방식을 개발해 낸다. 일본의 시장개방을 위해 파상적인 공격을 가하는 이른바 
‘일본 패주기’(Japan Bashing)다. 

수정주의자들, “일본정부는 머리 없는 괴물” 

사실 플라자합의 이전부터 미국의 대일본 무역수지 문제를 달러의 가치와는 별개로 
찾는 주장이 있었다. 일본이 시장을 묘하게 왜곡해 자국 시장을 보호하려는 
보호주의정책을 펴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플라자합의 이후 엔고화 전략이 
실패로 판정되자 곧 세력을 확장했다. “일본은 근대화 이후 서구를 닮아가고 
있다”는 주장을 반박하며 “근대화를 달성했다고 해도 일본은 결코 자신의 모습을 
바꾸지 않았다”고 말한다. 이를테면 전통적인 이론을 수용하지 않고 일본의 
‘특이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89년 미국의 경제전문지 “비즈니스 위크”가 
이들을 ‘수정주의자’로 명명한 이래 미국에서는 지금도 이같은 주장들을 
‘수정주의’로, 일본에서는 ‘일본특이론’으로 부른다. 

비록 수정주의자는 아니지만 세계적으로 저명한 경제학자 피터 드러커가 일본 
비판의 선봉에 나섰다. 86년 “포린 어페어즈” 지에 실린 ‘일본의 선택’이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그는 “일본은 적대적 무역을 통해 엄청난 무역흑자를 거두며 
서구국가들의 산업을 파괴하고 있다”며 “책임있는 국제적 역할을 다하라”고 
강변했다. 이어 찰머스 존슨과 캐럴 월페런 등 수정주의자들의 원색적 비판이 
더해졌다. 

찰머스 존슨의 말을 들어보자. 그의 말에 따르면 “일본은 세계자본주의에 속해 
있지 않다.” 또 일본은 “세계경제와 격리시켜도, 세계경제에 통합시켜도 
어쨌거나 불안한 존재”다. 일본경제는 추구하는 목표가 없기 때문에 어디를 
향하는지 알 수 없는 “19세기 후반의 독일과 유사한 중상주의 국가”라는 
것이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또 일본이 스스로 변하기 어렵다는 시각이다. 집단주의 
지향이어서 일단 목표가 설정되면 누구도 그것을 바꾸려 하지 않는 ‘기이한’ 
특성을 갖고 있는 존재다. 월페런은 “일본을 움직이는 것은 개인도 정부도 아닌 
시스템”이라며 “권력은 권력을 나누어 가진 반(半) 자율적 집단의 미묘한 균형에 
의해 성립되어 있다”고 본다. 결국 책임질 사람도, 주체세력도 없이 혼자 스스로 
움직이는 집단인 셈이다. 오죽했으면 일본의 권력집단을 ‘머리 없는 
괴물’(Headless Monster)로 규정했을까. 

또한 이들 수정주의자들은 이같은 시스템을 역사의 소산으로 본다. 이른바 
‘회사주의’의 원인을 역사에서 찾는 것이다. 이들의 결론은 무엇인가. 특이한 
역사적 배경을 갖는 일본은 책임지지 않는 권력구조를 만들어냈으며 스스로는 변할 
수 없다는 내용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결국 19세기 도쿠가와 시대처럼 일본을 강압적으로 
‘개국’시켜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환율론자들의 정책이 실패로 
돌아가자 80년대 후반 이들은 힘을 얻었다. 논리도 논리지만 정책결정자들의 
시각으로는 무엇보다 받아들이고 싶은 이론이었다. 85년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미국의 환율정책의 실패가 미국 자신이 아닌 일본의 특수성으로 원인이 
돌려지는 것이니 마음이 편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어떤 정책으로 이같은 일본의 
특수성을 깨느냐는 것이었다. 

슈퍼301조. 미국이 자신의 의지가 관철되지 않는다 싶을 때 마치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하는 최강의 경제무기. 이제 미국은 강경한 어조로 일본을 대했다. 
더이상 말로 하지 않겠다는 ‘으름장’이었다. 미국의 무역대표부(USTR)는 
수입장벽을 두는 국가와 관행을 선정해 그 장벽의 폐지를 요구하고 해당국이 3년 
이내에 이 철폐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반드시 보복조치를 발동한다는 
내용이다. 

88년 2월 미국 의회는 대외무역의 불균형을 시정한다는 목표 아래 
불공정무역관행국에 대한 보복조치와 절차를 규정한 ‘88종합무역법’을 
통과시켰다. 누가 보아도 일본을 겨냥한 입법 조치임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이 
법안은 일본을 집요하게 물고늘어졌다. 

미·일 대충돌, ‘구조조정 협약’ 

89년 5월25일 워싱턴 정가에서는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다. 당일 아침 
무역대표부측이 세계 각국의 특파원들에게 “오전중 힐스 대표의 기자회견이 
있다”고 통고하고는 12시까지도 구체적인 시간이나 장소를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행위에 이제나 저제나 노심초사 기다리던 
기자들은 오후 2시가 조금 못돼 새로운 통고를 받았다. 2시부터 기자회견이 있으니 
USTR 근처 빌딩의 지하 회견실로 와달라는 것이었다. 외교가나 언론계에서는 발표 
사안의 내용을 대충은 알고 있었다. 일본을 비롯해 독일·브라질에 슈퍼301조를 
적용하겠다는 것이었다. 

사안의 중요성에 비춰봤을 때 기자들의 관심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고도 남음이 
있다. 일본 기자단은 물론이요, 한국이나 대만을 비롯한 특파원 2백여명이 
회견장을 가득 메웠다. 그러나 회견은 또 예정된 시간에 열리지 않았다. 
홍보담당자는 기다리던 특파원들에게 시간과 장소가 또 한차례 바뀌었음을 
알려왔다. “오후 8시 국제무역위원회 홀에서 개최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례적으로 8시간을 기다리게 한 것도 그랬지만 발표내용도 선뜻 이해하기 
어려웠다. 힐스 대표는 “일본의 슈퍼컴퓨터 등 3개 품목, 인도와 브라질의 3개 
품목을 우선교섭분야로 지정한다”고 발표한 것이다. 이는 ‘우선교섭상대국을 
정해 개선을 요구한 후 요구가 관철되지 않을 때 구체적인 무역 분야를 
지정한다’는 슈퍼301조의 조문과 명백하게 상치하는 것이었다. 교섭상대국보다 
무역 분야를 우선 강조했으니 이에 대해 기자들의 질문이 쏟아졌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법률에 기초한 우선교섭상대국으로 지정된 국가는 없나”하는 의문이 
강력하게 제기됐던 것이 당시 상황이었다. 하지만 힐스 대표는 법률적 부문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답변 없이 같은 말만 되풀이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날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은 단지 슈퍼301조의 적용뿐이 아니었다. 더 
이상한 발언이 힐스대표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이후 미·일 양국 관계에 큰 상처를 
남긴 구조조정협약(SII)의 의도가 처음 드러난 순간이었다. 힐스대표는 “부시 
대통령의 주도로 일본과의 관계에서 무역상의 구조장벽을 배제하기 위해 협의를 
요청한다. 이는 슈퍼301조와는 별개로 시행되는 것이며 일본측은 이 협의에 
응해주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 발언은 사실 대단히 중요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동석했던 세계의 특파원들은 상세하게 다루지 않았다. 아직 미국의 
의도를 충분히 파악하지 못했던 탓이다. 

‘No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 드디어 등장 

나중에 밝혀진 것이지만 세계 특파원들을 8시간 동안 기다리게 하며 이곳 저곳으로 
장소를 옮겨다니게 한 이유는 미국이 수정주의자들의 주장을 대폭적으로 받아들인 
한 협약의 처리가 문제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미·일구조협약’(Structural Impediment Initiative·SII)이었다. 이 협약의 
발표수위를 둘러싸고 정부와 의회, 무역대표부간에 의견조율이 이뤄지지 않았던 
것이다. 미국과 일본간에 숱한 협상이 있어왔지만 이처럼 생소한 이름은 처음이다. 
이름만큼이나 내용도 기막히다. 그 내용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정식 용어가 등장한 
후 1개월만에 드러났다. 그것도 일본측에서 보면 아주 비정상적인 경로를 
통해서였다. 

89년 6월 하순 일본 외무성의 대미교섭 담당자는 대장성으로부터 받아들이기 
어려운 전화 한통을 받는다. “7월께 미국과의 구조협의를 위한 예비회담이 개최될 
예정인데 가능한가”라는 것이었다. 통상 외무성이 대장성에 해야 할 전화를 
반대로 받은 것이다. 외무성은 물론 ‘불가’를 통지했다. 대외창구가 
외무성이어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미국측은 이미 일본의 대장성을 
파트너로 잡은 상태였다. 거시경제정책이 우선시돼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미국측 
설명이었다. 

내용을 보면 하나같이 기막힌 것들이다. 정부의 공공투자를 늘려라, 땅값을 
낮춰라, 소비재 수입을 제한하는 유통체계를 고쳐라, 일본회사들의 
반(反)경쟁적·배타적 행태를 시정하기 위해 독점금지법을 강화하라, 주식 매각 
장벽을 없애라는 등 요구조항은 무려 2백개를 넘었다. 양과 질에서 일본정부와 
의회를 경악시키기에 충분했다. 한마디로 “일본의 문화나 사회제도는 구미와 
다르기 때문에 일본은 구조적으로 불공정관행을 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일본은 
문화와 사회제도를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국내 경제정책을 두고 
미주알 고주알 따지는 내정간섭이 분명했다. 당시 일본언론은 53년 4척의 배를 
이끌고 내항했던 페리 함대를 빗대 ‘구로부네’(黑船)의 역습에 비유했을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측 입장, 특히 의회의 입장은 강경일변도였다. “만일 
구조협약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을 경우 슈퍼301조를 적용할 수밖에 없다”는 
보커즈 의원의 말은 이같은 노선을 그대로 담고 있다. 

“노(No)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 방식이나 내용면에서 굴욕감을 느낀 일본의 
반발은 오히려 당연한 것이었다. 일각에서는 ‘구조협의’가 아닌 
‘일본개조계획’이라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았다. “미국은 아직도 일본이 
미군정하에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비난도 서슴지 않았다. 이 분위기를 
가장 극적으로 드러낸 것이 바로 “노(No)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이었다. 

문인 출신이자 중의원 의원으로 일본의 대표적 우익 정객인 이시이 
신타로(石原愼太郞) 의원은 구조협의가 나오기 직전인 89년 상반기에 이 책을 
펴내며 일본의 반미정신을 부추겼다. 일본은 결코 미국의 첨단기술에 무임승차한 
일이 없다, 미국의 부동산 구입은 미국기업의 요청에 한 것이다, 일본이 미국의 
영혼을 샀다면 미국은 자신의 영혼을 팔아먹은 것이라고 주장하며 나카소네정부에 
“카드를 적절히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고 일침을 가했다. 겉으로는 미국과 일본 
모두의 국익을 중시한다지만 명백하게 미국의 주장에 대한 정면도전이었다. 

90년 6월 말많던 구조협약은 양국이 서로 어느 정도 양보하는 선에서 타결됐다. 
그러나 미국의 더 많은 요구와 일본의 더 많은 반발이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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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말부록 / 美日경제전쟁 제 40호 1998.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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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日경제전쟁-사활건 역전 드라마 




이재광 이코노미스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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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 두가지 예측 ‘해는 또 저문다?’ 

사실 미국의 위기가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80년대 후반의 일이 아니다. 
이미 80년대에 접어들면서 미국의 위기가 심심치 않게 거론되고는 했다. 
이전까지만 해도 은밀히 또는 사석에서만 오고가던 말들이었다. 일본 통산성은 
80년 초 발간한 ‘1980년 통산성 정책 전망’에서 “미국은 여전히 세계의 
초강대국으로 남아 있기는 하지만 상대적 지위는 점차 쇠퇴하고 있다”고 진단한 
바 있다. 81년 니코연구서는 정부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미국의 위기가 점증하고 
있으며 일본과의 긴장이 고조될 것”이라며 정부에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그리고 
80년대 중반 이같은 예측은 모두 현실로 드러났다. 

80년대 말에 이르러 세계경제 및 정세의 초점은 일본에 맞춰지기 시작했다. 일본의 
미래에 대한 예측이 성황을 이룬 것이다. 일본은 90년대 들어서도 계속 강세를 
유지할 것인가, 아니면 쇠락할 것인가. 만일 일본이 90년대 들어서도 80년대 
10년과 같은 쾌주를 계속한다면 마침내 미국은 패권을 넘겨줘야 할 것이다. 
‘팍스아메리카’는 종말을 고하고 ‘팍스재패니카’가 막을 올릴 것인가. 아니면 
떠오른 해는 또 저무는 것인가. 80년대 후반 들어 공산주의의 붕괴와 함께 
90년대에 대한 기대가 부풀면서 미국과 일본을 중심으로 한 세계경제의 전망은 
희비가 엇갈리고 있었다. 

21세기를 10년 앞둔 90년 일본 서점가에는 두권의 책이 일찌감치 베스트셀러로 
등극했다. 90년 2월 출간된 “2000년”이 그중 하나. 미래학자로 명성을 떨쳤던 존 
나이스비트는 이 책에서 ‘일본을 중심으로 한 환태평양 지역의 융성이 90년대부터 
21세기에 걸친 거대한 움직임 중 하나’라고 말했다. ‘팍스재패니카’의 도래를 
의미하는 내용이었다. 90년도 정부가 펴낸 “경제백서” 역시 낙관론으로 
일관한다. ‘일본경제는 두번의 오일쇼크와 엔고 및 트리플 약세를 극복하고 
호조를 계속하고 있다. 이는 최근 일본경제의 성과 중 하나가 틀림없다’고 썼다. 

그러나 3월 출간된 “해는 또 저문다”는 전혀 반대의 견해를 피력하며 
베스트셀러의 자리를 차지한다. 도쿄지국장을 지냈던 영국 “이코노미스트”의 
편집장 빌 에머트는 대표적인 비관론자였다. 그는 80년대의 4년간 도쿄에서 생활한 
것을 계기로 일본경제의 성장요인과 그 한계를 명쾌하게 꼬집었다. 그의 결론은 
“자본대국 일본은 어이없게 단명으로 끝맺는다”였다. 90년대 일본은 더이상 
강국으로 존재하기 어렵다는 전망이었다. 그는 이 근거로 일본경제의 투기성과 
일본사회가 갖는 구조적 모순을 꼽았다. 은행 대부의 대다수가 부동산에 투자되는 
위험을 지적하는 한편 고도성장의 혜택을 받은 신세대들의 지나친 소비관습이 높은 
저축률로 유지돼온 일본의 성장을 붕괴시킬 것이라는 예견이었다. 

그러나 90년대 초 이같은 비관론이 자리잡기는 쉽지 않아 보였다. 일본에 대한 
낙관론이 우세했던 탓에 비관론은 오히려 비판의 대상이 되기 쉬웠다. 에머트의 
책도 마찬가지였다. 소비지향의 젊은층, 이른바 ‘신인류’(新人類)의 저축 부재는 
일시적 현상이며 이들 역시 나이가 들면서 높은 저축률을 보일 것이라는 반론이 
상당했다. 게다가 만의 하나 저축률이 떨어진다 해도 구미기업들보다 높은 
생산성을 확보한 기업들에 의해 보완되리라는 것이 대체적인 주장이었다. 

결국 21세기는 ‘일본의 세기’라는 말이었다. 일본의 경제평론가 스즈키는 
에머트의 주장을 일축하며 “해는 아직 높다”는 저서를 통해 ‘일본의 자산대국화 
경향은 앞으로 더 강화될 것’임을 강조하기도 했다. 90년의 경제전망도 장밋빛 
일색이었던 셈이다. 이같은 낙관론이 90년이 시작하자마자 시작된 주가폭락의 
이상징후를 덮어버리고 말았다. 

90년 1월14일 버블의 종말, ‘암흑의 월요일’ 

90년 1월4일 도쿄주식시장의 니케이 평균주가는 3만8천7백12엔. 전년도 폐장일에 
비해 2백2엔 떨어진 수치였다. 개장일의 주가가 하락한 것은 81년 이후 10년만에 
두번째여서 뭔가 출발이 좋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1월14일자 아사히신문은 이에 
대해 경고의 메시지를 담았다. 그러나 아직 그 정도가 강하지는 않았다. “이번 
기회에 투기색이 지나치게 강한 최근의 풍조를 반성하는 것은 어떨까”라며 
“그렇다고 해서 은행경영이나 주가를 염려한 나머지 금융정책의 골격을 
왜곡시키지는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직 점잖은 충고였으며 반성의 계기로 
삼자는 제안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대재앙의 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후 이 
상황은 8년간 계속되는 버블경제 붕괴의 첫시작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개장일부터 떨어지기 시작한 일본의 주가는 90년 내내 하락을 멈추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주가가 한꺼번에 폭락하는 것은 아니었다. 서서히 아주 서서히, 
죽어가는 시장이었다. 90년 봄 도쿄주식시장의 유행어가 바로 ‘조용한 
폭락’이었다. 3월22일에는 마침내 3만엔을 통과한 주가는 4월2일 2만8천2엔까지 
떨어졌다. 이후의 주가는 오르락내리락. 그러나 하반기에는 달랐다. 8월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이 보도되면서 유가가 하루에 24% 뛰는 혼란을 맞자 23일의 주가는 
2만3천엔대로 급락했다. 일본은행은 “지난 1년동안 자유금리예금 규모가 1백조엔 
가량 증가했고 이중 상당액이 주식시장에서 빠져나왔다”고 발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행은 여전히 인플레 요인이 있다며 재할인율을 6.0%로 0.75%포인트 
높였다. 완전한 판단착오였다. 

이 와중에 일본은 악몽의 10월1일, ‘암흑의 월요일’을 맞는다. 아침부터 
‘팔자’ 주문이 쇄도하면서 이날 오후 주가는 2만엔대를 돌파해 1만9천엔대에 
돌입했다. 투자자를 비롯해 일본 전체를 경악하게 만드는 수치였다. 
“나는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계시판의 숫자는 계속 하락을 거듭해 내가 
아는 한 가장 낮은 값으로까지 내려갔다. 니케이 평균주가 2만 이하는 분명 
시대착오적인 것이었다.” 

10월18일자 “뉴스위크”는 도쿄시장의 한 트레이더의 눈을 통해 당시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12월28일 폐장일의 주가는 2만3천8백48엔. 폐장일 주가가 개장일 
주가보다 떨어진 것은 13년만의 일이었다. 시가총액도 전년 말 6백조엔에서 
3백70조엔으로 감소했다. 그러나 아직도 경제전문가들은 일시적 현상으로 보고 
있었다. 91년 6월 일본은행이 발행한 조사월보에서는 “버블의 붕괴가 실물경제에 
주는 영향은 아직 경미하다”고 말했다. 일본은행은 또 실제로 이에 기초해 정책을 
펼쳐나갔다. 한마디로 “아무런 손을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90년대 일본은 세계적으로 세차례 버블 붕괴를 경험한다. 주가하락으로 시작된 
일본 버블의 붕괴뿐 아니라 미국에서 사들였던 부동산도 곧 거품인 것으로 
드러났다. 아시아 통화위기가 일본이 타격을 받은 마지막 버블이었다. 동남아로 
몰려든 달러가 결과적으로 각국의 버블을 일으켰으며 이 버블의 붕괴가 일본경제를 
강타한 것이다. 일본의 경제전문가 다나베 다카노리(田邊孝則)는 “엔고 시절 
만들어놓은 거품이 모두 일본으로 몰려오고 있다”며 이를 일본경제의 
‘대역류’라는 표현으로 썼다. 

경제전문가 마키노 노보루(牧野昇)·다카하시 죠센(高橋乘宣)은 80년대 후반 
일본의 전략은 ‘악마의 선택’이었다고까지 말한다. ‘대역류’든 ‘악마의 
선택’이든 80년대 후반 세계 장악을 위해 자신이 쳐놓은 덫에 빠져든 것이 
틀림없다. 85년 플라자합의 이후 미국이 만든 덫에 미국 자신이 빠져든 것과 같은 
양상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국내 버블의 붕괴였다. 90년대 일본에서는 비단 
주가만 폭락한 것이 아니었다. 땅값의 폭락은 일본경제에 더 큰 상처를 남겼다. 
90년대 지가 폭락은 ‘부동산은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는 이른바 ‘토지신화’를 
붕괴시키는 것이기도 했다. 

‘부동산값 떨어지지 않는다’는 ‘토지신화’붕괴 

80년대 전반을 보자. 이때도 일본의 지가는 이미 꽤 올랐다고 생각됐다. 좁은 땅에 
많은 사람들이 사는 데다 기업들의 돈이 땅으로 몰렸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0년대 후반 땅값은 더욱 기승을 부렸다. 83년부터 서서히 
오르다 버블 생성기인 86년 두자릿수의 상승률을 기록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버블이 확장됐던 87년부터 90년 사이 갑작스러운 폭등을 경험하게 된다. 90년 3월 
6대도시의 주택지는 3년 전에 비해 33.2%, 상업지는 27.7% 상승했다. 집 없는 
도시의 샐러리맨들은 도저히 집을 살 수 없었다. 주택구입의 꿈을 포기한 이들의 
자포자기성 소비가 커다란 사회문제로 대두할 정도였다. 

지가하락은 주가의 뒤를 이었다. 경기후퇴 기미가 확실시되던 90년대 초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부 기업과 개인은 현금을 조달하기 위해 부동산을 내놓았고 
전반적으로 투기를 위한 부동산 구입이 크게 줄었다. 91년 3월 6대도시의 
주택가격은 연간 2.1%, 상업지는 3.3% 상승에 그쳐 지가 상승은 둔화세가 
역력했다. 그러나 이같은 상황에서도 아직 땅값이 떨어질 것으로 생각하는 
전문가는 많지 않았다. 나아가 적지 않은 전문가들이 “잠재수요가 많아 땅값은 
다시 급상승할 수 있다”는 견해를 보였다. 물론 이같은 견해는 오래 가지 않아 
잘못된 것으로 판정났다. 91년 지가상승률의 둔화현상은 곧장 하락추세로 반전된 
것이다. 92년 3월 기준으로 봤을 때 주택지는 17.9%, 상업지는 15.3% 하락했으며 
93년 3월에는 무려 18.7%와 22.4%가 떨어져 2년 연속 두자릿수 하락을 기록했다. 
낙폭이 커 문제는 더욱 심각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제 그 누구도 부동산값의 
반등을 예견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버블 제거과정은 정말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가계·기업·금융 등 모든 경제부문의 
폐부를 관통했다. 이중 은행은 최악이었다. 금융자유화와 BIS 기준율에 허덕거리다 
버블 붕괴의 쐐기를 맞아서였다. 돌이켜보면 80년대 말 일본은행들은 세계 
최강이었다. 87년 예금액 기준으로 봤을 때 세계 10대 은행은 모두 일본은행이 
차지했다. 미국의 최대 은행인 시티 코프는 누가 봐도 세계 10대 은행에 포함될 수 
있었지만 예금액 기준으로는 그렇지 못했다. 50년대 세계 50대 은행에 포함된 
일본은행이 하나도 없었던 것에 비춰보면 그야말로 괄목상대한 성장이 아닐 수 
없었다. 일본은행의 미국 상공업계 대출비중은 87년 11%에서 2년만인 89년에는 
16%로 늘었다. 반면 일본에서의 외국계 은행 대출은 제자리 걸음이었다. 미국의 한 
관리는 “일본은행들은 정부의 지원을 받아 해외의 개방적이고 사실상 규제가 없는 
시장의 혜택을 받고 있다”고 비꼬았다. 

BIS 기준율 8%는 일본은행 견제용 

이같은 일본 은행들이 미국 등 서방은행들의 견제를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국제결제은행(BIS)이 자기자본비율을 8%로 끌어올린 데는 분명 이같은 배경이 
있었다. 88년 7월1일 일본을 포함한 12개 가맹국의 중앙은행 총재모임에서 
국제업무를 처리하는 은행들의 자기자본비율을 “91년 3월 이후에는 7.25%, 93년 
3월 이후에는 8%로 상향조정한다”고 결정했다. 사실 서구 금융계는 80년대 이후 
급등한 엔화의 위력을 어느 정도 차단할 필요가 있었다. 일본은행은 대규모 자본을 
상대적으로 낮은 금리를 무기로 전세계에 살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은행들이 박리다매 형식으로 세계자본시장을 주무르고 있다”는 미국과 
유럽계 은행들이 볼멘소리로 불평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자기자본비율의 
제고는 분명 이같은 일본은행의 대출을 견제하는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그러나 늘 그랬듯 일본은 구미금융계의 의도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겉으로는 
동의해도 속으로는 결코 그들의 마음을 흡족하게 만들어주지 않는다. 이번에도 
마찬가지. 대출 축소를 통해 BIS기준을 맞추기보다 주식이나 전환사채를 
발행함으로써 새로운 BIS 기준율에 맞추려 했던 것이다. 세계기업에 대한 대출과 
영향력 증대를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87년 한해동안 일본은행들의 
신주·전환사채 발행액은 1조2천억엔, 88년에는 무려 2조2천억엔에 이르렀다. 89년 
일본 금융기관들의 BIS 기준 자기자본비율은 평균 9.98%. 대출 축소 없이 새로운 
BIS 기준을 채우기에 손색이 없었다. 

80년대 말 불었던 금융자유화 바람 역시 90년대 초 일본은행을 어렵게 만든 
원인이었다. 일본의 금융자유화는 80년 12월로 거슬러올라간다. 
‘신외국환관리법’에 의해 허가제였던 국내외 자본거래는 원칙적으로 자유화되고 
외화에 의한 자금조달과 운용 역시 폭넓게 움직일 수 있도록 만들었다. 금융자유화 
바람은 10년동안 꾸준히 전개됐으며 80년대 말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금리의 
완전자율화라는 목표가 구체적으로 제기되고 있었다. 93년까지 완전 금리자율화를 
실시한다는 생각으로 ‘3단계 금리자율화’의 일정을 그려놓았다. 은행간 경쟁이 
치열해지고 그에 따라 수익성이 악화될 것은 뻔한 이치였다. 90년 들어 평균 
예대차 마진은 2.1%. 5년 전 2.4%였던 것에 비춰보면 0.3%포인트 하락한 것이고, 
은행의 수익은 30% 떨어지는 것으로 추정됐다. 

이같은 상황에서 버블이 꺼지기 시작했으니 일본은행들은 3중고를 경험하는 
셈이었다. BIS 기준율과 금리자율화 일정을 맞춰야 했기 때문이다. 일본은행들의 
고초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우선 주가하락의 효과를 보자. 
은행들은 자기자본에 산입되는 유가증권의 급락을 경험하게 된다. 
신주·전환사채 발행 역시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90년 3월 말 은행들이 갖고 있던 
유가증권은 총 12.8조엔. 그러나 6개월 후인 90년 9월 말 이는 7.1조엔으로 6개월 
사이 무려 5.7조엔이 감소한 것이었다. 90년 9월 말 전체 은행의 BIS 기준율이 
7.68%로 BIS가 제시한 8%를 미달하는 수치였다. 바야흐로 ‘불량은행’의 멍에를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었다. 

그러나 은행에 더 깊은 상처를 준 것은 지가였다. 물론 이는 어느 정도 
일본은행들의 책임이기도 하다. 은행들은 지가하락이 눈에 보임에도 
‘토지신화’에 길든 편견을 버리지 못하고 담보대출을 한층 강화했기 때문이다. 
지가하락은 일시적인 것이고 하락폭 이상 반등할 것이니 땅값이 내렸을 때 
대출해줘야 한다는 것이 당시 은행들의 의견이었다. 92년 3월 말 현재 시중은행의 
부동산담보 융자 잔액은 1년 사이 4.1% 증가한 2백조엔. 같은기간 대출 전체증가율 
2.9%를 능가하는 수치다. 부동산업계에 대한 대출 역시 크게 늘렸다. 89년 말 
41조엔이었던 부동산업계 대출은 91년에는 45조엔으로, 93년 말에는 54조엔으로 
늘어난다. 부동산 담보 대출과 부동산업계에 대한 대출은 지가하락이 가속화하면서 
즉각 부실채권으로 탈바꿈하게 됐다. 94년 3월 시점에 이르면 은행들의 부실채권은 
공개된 것만 13조5천8백엔, 총 추계액은 무려 50~60조엔에 이르렀다. 대출총액 
3백82조7천억엔의 14~15%를 점유하는 비율이다. 아직도 일본은행들이 헤어나지 
못하는 부실채권의 늪은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地價하락으로 일본은행 결정타 맞아 

상황이 이렇다보니 경기후퇴는 불을 보듯 뻔한 이치였고 당연히 소비도 바닥을 
향해 움직였다. 가장 우선적으로 일본 가계의 가처분 소득감소가 눈에 띈다. 91년 
5.3%에서 92년에는 2.1%로, 93년에는 0.9%로 낮아졌다. 노동자 가계의 지출 역시 
90년대 들어 크게 떨어졌다. 91년 4.2%에서 92년 2.1%, 93년 0.7%로 최저수준을 
맴돌았다. 각종 소비재의 지표도 얼어붙은 내수를 반영하고 있다. 80년대 들어 
꾸준히 증가하던 자동차 판매증가율은 88년 14%대로 정점을 이룬 후 90년 중반을 
넘어서며 마침내 마이너스 성장을 하기에 이른다. 전국 백화점 매상고 역시 
마찬가지. 92년 55년 이후 처음으로 마이너스 성장으로 돌아서 93년에는 마이너스 
6.6%까지 떨어졌다. 92년 마이너스로 돌아선 슈퍼마켓 등 중소형 도매상 매출 역시 
93년에는 마이너스 3.2%까지 떨어졌다. 이제 경기후퇴는 분명해졌고 기업 도산과 
실업의 증가가 뒤를 이었다. 

90년대 초 일본이 자만에 빠져 있었다면 미국은 심한 불안을 씻을 수 없었다. 
일본이 세계 최강국이란 미국의 지위를 언제 탈취해갈지 모른다는 불안이었다. 
특히 80년대 후반 들어 ‘융단폭격’과도 같았던 일본의 미국 내 부동산 매입을 
보며 불안심리는 고조됐다. 이같은 우려는 비단 정책담당자나 경제전문가들만의 
것이 아니었다. 미국 전체가 가졌던 불안이었다. 90년 5월 실시된 
“워싱턴포스트”지의 여론조사는 충격적이었다. ‘소련의 군사력과 일본의 
경제력중 어느 쪽이 미국의 안전보장에 더 큰 위협이라고 생각하나’라는 질문에 
응답자 75%가 ‘일본의 경제력’이라고 답한 것이다. 

미국의 정책담당자나 지식인들의 자기각성이 본격적으로 터져나왔음은 물론이다. 
지식인으로는 폴 크루그먼 교수가 첨병에 섰다. 그는 “이 상태가 계속된다면 
미국은 2000년까지 일본과 EC에 이은 제3위 국가로 전락할 것이며 미국 제조업의 
25%, 금융부문의 45%가 외국기업에 점유당해도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며 
정책변화를 요구했다. 물론 당시 대미투자의 추이를 보면 미국기업의 점유자는 
일본이 될 것이 자명한 일이었다. 90년 1월 ‘외국의 대미투자와 관련한 
공청회’에서는 일본에 대한 경계심 일색이었다. 브라이언트 의원은 “일본은 
외국인 투자에 대한 제한을 가하고 있는 동시에 미국에 충분한 정보를 주고 있지 
않다”고 비난했으며 캔벨 의원은 “투자제한이 있는 나라에 대해서는 미국도 
동일한 법안을 마련해 상호주의로 가야 한다”고 일본을 성토했다. 결국 미국 
부동산이나 기업의 자유로운 매수는 허용할 수 없다는 것이 미국 의회의 일본에 
대한 분명한 자세였다. 

90년 이후 미국의 대외정책은 분명한 변화의 조짐을 보였다. 사회지도층의 거센 
비난도 힘을 얻었지만 역사적 상황도 미국에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의 최대방해 세력이었던 소련과 공산권이 붕괴한 것이다. 
이제 중동이나 동남아·아프리카 등 어느 지역을 공략한다 해도 이들은 미국 외에 
의존할 곳이 없었다. 공산주의 견제를 위해 불필요한 지원을 해줄 이유도, 혹시 
친공산주의 국가가 되면 어쩌나 하는 눈치보기도 사라져버렸다. 

“일본의 경제력이 미국 안전보장에 위협이 된다” 

이는 곧 미국의 재정적자를 부추기는 막대한 방위비가 줄어들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연방정부의 군사비 관련 지출을 보자. 89년을 정점으로 96년까지 
10% 이상 삭감됐고 이는 GDP에 대비해 보면 더욱 확연하게 드러난다. 96년의 
방위비는 GDP 대비 3.6%. 40년 1.7% 이래 최저였다. 만일 정점이었던 86년의 
6.2%를 유지했다면 88~96년도의 연방지출액은 무려 8천억달러를 상회했을 것이다. 
방위산업이 주류를 이뤘던 지역에서는 실업의 비명이 들렸겠지만 미국 
전체적으로는 그야말로 세계를 다시 한번 제패할 수 있는 호기였다. 90년대 세계는 
미국을 위한 독무대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미국은 90년대 들어 아주 가벼운 마음으로 경제를 위해 뛰기 시작했다. 
아마 부시 대통령이 그 첫테이프를 끊은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는 92년 도쿄를 
방문했을 때 미국의 자동차회사 중역들을 대거 동행시켰다. 이는 미국의 
외교정책이 대폭 수정됐음을 알린 첫 신호탄이었다. 냉전이 종식되면서 세계질서의 
패러다임이 이른바 ‘파워게임’에서 ‘웰즈게임’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대내외적으로 인식시킨 좋은 사례이기도 했다. 

그러나 부시 대통령의 이같은 ‘세일즈외교’는 뒤를 이은 클린턴정부에 비하면 
그야말로 ‘새발의 피’였다. 클린턴 행정부의 세일즈는 이전 정권에 비해 더 
강력했고, 더 집요했으며, 더 총체적이었다. 94년 브라질의 14억달러짜리 
위성통신사업에서 보여준 클린턴정부의 행태는 경악 그 자체였다. 프랑스 
통송-CSF사와 경합이 붙은 레이시온사를 지원하기 위해 정부는 거의 모든 
핵심부서를 총동원했고 그것만으로도 불안했는지 클린턴 대통령은 브라질 
대통령에게 직접 서한을 보내기까지 했다. 

대통령이 이 정도였으니 관료들의 생각은 안봐도 뻔한 일이었다. 워런 크리스토퍼 
국무장관은 “오랫동안 미국의 국무장관들은 군축과 같은 고상한 정책만 다루면서 
경제문제는 ‘저급하다’고 여겨왔다. 그러나 나는 외교정책에서 경제문제를 
앞세울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변화를 강력하게 시사했다. 이른바 
‘미국주식회사’의 출현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중앙정보부(CIA)의 성격도 
바뀌었다. 대공산권 군사기밀 취급이 주업무였던 CIA는 경제 및 산업정보를 캐는 
첨병으로 역할을 전환했다. 95년 초 미국 CIA요원이 프랑스 국영기업체 직원에게 
돈을 주고 산업비밀을 빼내려다 적발된 사건은 90년대 미국의 대외정책을 
설명해주는 상징적인 것이었다. 

92~93년부터 시작된 이같은 변화의 흐름은 상당한 비판과 방해에도 불구하고 더 큰 
물줄기로 흐르고 있었다. 94년에 이르면 미국 통상정책의 변화는 아주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당시 언론들은 미국 대사들의 세일즈외교를 크게 다루었다. 93년 
언론들은 “제임스 치크 부에노스아이레스 대사가 부임 직후 보인 태도는 
현지인들에게 충격을 줬다”고 보도했다. 그는 아르헨티나 기자들에게 
“미국기업들의 수석 로비스트로 이곳에 부임했다”고 말한 것이다. 이전까지의 
사례에 비춰보면 그야말로 ‘파격’이었다. 그러나 치크대사는 어디까지나 한 예에 
불과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같은 행위는 당연한 일이 되어버렸다. 
제임스 레이니 주한 미국 대사는 94년 6월 자기집 앞마당에서 미국자동차 전시회를 
개최하고 중개인을 방불케 하는 세일즈외교를 펼쳤다. 말레이시아의 존 스톤 울프 
대사. 그는 직접 기업간의 계약에 뛰어들어 맥도널 더글러스사와 제너럴 
일렉트릭사를 위해 수백만달러의 계약을 성사시켰다. 그리고 언론들은 이들을 
‘애국자’로 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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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말부록 / 美日경제전쟁 제 40호 1998.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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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日경제전쟁-사활건 역전 드라마 




이재광 이코노미스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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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 파수꾼 미국 ‘세일즈 외교’로 권위 상실 

미국의 세일즈외교 ‘발진’은 물론 적지 않은 반론과 비판에 부닥쳤다. 미국이 
달러외교를 추구하는 것은 초강대국답지 않은 행동이라는 것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라도 자유주의의 파수꾼인 미국이 스스로 자유무역을 파괴하는 것은 세계 
리더십에 부정적 영향을 준다는 비난이었다. 자칫 다른 국가들의 반발로 
초강대국의 지위를 위협받을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기도 했다. 미국의 리처드 
쿠퍼 하버드대 교수는 그 대표적 인물이었다. “미국이 스스로 ‘세일즈맨’이 
되면서 얻게 된 도덕적 권위 상실은 실로 위험천만한 일”이라며 자유주의의 
수호자 역할을 포기하지 말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그러나 대외협상을 담당했던 관료들의 말은 전혀 달랐다. 미키 캔터 미국 
무역대표부 대표는 “정부에서 적극적인 수출지원책을 펼치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해 동안 미국 노동자들이 고통받았고 기업들은 협상에서 밀려났다. 정부가 
비즈니스를 하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는가”라며 정당성을 역설했는가 하면 제프리 
가튼 국제무역담당 상무차관은 “어쩔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라고 상황을 
묘사했다. 

클린턴정부가 사실 미국이 초지일관 강조했던 자유무역주의 원칙을 깬 것은 
한두번이 아니다. 일본과의 무역협상은 그중에서도 압권이었다. 92년 미국 
신정권의 대통령 경제자문 위원장이었던 로라 타이슨은 수정주의의 대변인. 그는 
환율주의자가 일궈낸 플라자합의나 수정주의자들이 이끌어낸 구조협정 모두 
실패했다고 봤다. 목표를 정확하게 읽지 못한 탓이라는 것이다. 대일무역적자를 
줄이기 위해서는 타깃을 보다 명확하게 하고 보다 강한 어조로 말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논지였다. 

결국 미국산업의 기초를 형성하는 주요 분야에 대한 경쟁국의 표적화 
전략(Targeting Strateges)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관세무역일반협정(GATT)이나 
세계무역기구(WTO) 등 다면주의 원칙이나 세계적인 무역규칙을 요구하기보다 
1대1로 대응하는 적극적 편무주의(Aggressive Unilateralism)를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나아가 추상적 규칙을 요구하기보다 결과중시형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역설했다. 경쟁관계에 있는 특정국가를 선정해 1대1 공략을 감행하고 
목표를 달성했는지 여부를 최종 확인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미·일 포괄협의’는 클린턴정권이 그동안의 대일본정책의 실패를 거울삼아 
내놓은 새로운 통상정책이었다. 말이 통상정책이지 일본측 입장에서 보면 억지에 
가까운 것들이었다. 단순히 ‘시장개방’이라는 추상적 형태가 아닌 미국의 
주요제품에 대해 일본시장에서 일정수준의 점유비율을 보장하라는 주장이었다. 
주요제품은 자동차부품·판유리·의료기기 등. SII보다 훨씬 강했던 자기중심적 
압력이었다. 

이처럼 ‘말도 안되는’ 주장을 과감히 펼칠 수 있었던 것은 91년 개정된 미·일 
반도체협정에서 결과지향적 협상이 성공을 거둔 것에 용기를 얻은 탓도 있다. 이 
협정에서 일본정부는 일본 내 외국 반도체점유율을 20% 이상으로 늘리겠다고 
약속했으며 93년 이 점유율을 달성한 것이다. 미국은 93년 7월의 도쿄서밋에서 이 
‘포괄협의’의 기본틀을 짜는 데 합의했다. 

‘No’라고 말한 호소카와 내각 

그러나 이번만큼은 일본이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았다. 94년 2월 개최된 
정상회담에서 일본의 이른바 ‘55년체제’를 끝내고 새로 출범한 호소카와 내각이 
‘노(No)’라고 말한 것이다. 단한번도 안된다고 말한 적이 없었던 일본의 외교 
자세에 비춰보면 일대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이같은 일본의 자세는 미국을 
상당히 당혹스럽게 만들었지만 미키 캔터 통상대표를 중심으로 한 미국 협상팀은 
강경자세를 늦추지 않았다. 또 이같은 ‘밀어붙이기’는 어느 정도 성공적인 
것으로 보였다. 모토롤라가 일본내 이동전화사업에 참여할 수 있었고 판유리와 
의료기기에 관한 한 일본측의 수입확대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자동차 및 자동차부품에 관해서는 완전히 얘기가 달랐다. 시장확대에 대한 
미국의 요구를 정면으로 거부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95년 봄 일본산 고급자동차에 
대해 100% 보복관세를 부과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고 일본은 미국의 방침을 WTO에 
제소하기로 결정했다. 마침내 양국간 정면대결이 펼쳐질 양상이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미국이 물러났다. 95년 6월28일 일본에 대한 보복관세 실행 직전 캔터 
통상대표는 미국측이 제시한 목표수치를 철회한다고 밝힌 것이다. 미·일 외교 
50년만에 있었던 초유의 대사건이었다. 

계속된 무역적자에도 미국경제 ‘순항’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같은 클린턴의 무역정책 역시 크게 성공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90년대 들어서도 적자폭은 크게 줄어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시정권하의 
91년 7백억달러였던 무역적자액은 92년 클린턴정부 출범 후에는 8백억달러를 
돌파했다. 미국의 일본에 대한 파상공세가 계속됐던 93년에는 또다시 1천억달러를 
돌파함으로써 미국의 무역적자는 영원히 해소되지 않을 문제로 여겨졌다. 

미국의 무역수지 적자폭은 이후 지속적으로 증가했다. 94년에는 1천6백61억달러, 
95년에는 1천7백35억달러, 96년에는 1천9백12억달러에 이르렀고 지난해 무역수지 
적자는 1천9백89억달러로 마침내 2천억달러 적자를 코앞에 두고 있다. 각종 비난을 
무릅쓰고 강제적인 방식을 썼지만 무역수지에 관한 한 클린턴정부 역시 레이건정부 
시절의 ‘최악’ 기록을 경신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90년대 이후 꾸준한 성장을 거듭했다. 경제지표는 이를 
입증하고도 남는다. 실질GDP성장률을 보자. 91년 -1.0%였던 수치가 92년부터 
플러스 성장을 계속했다. 그것도 2%대에 이르는 높은 수치다. 94년에는 무려 
3.5%의 성장률을 보여 10년만의 최고 성장을 기록했다. 불황의 긴 늪을 탈출했다며 
환호성을 지를 만했다. 

97년의 성장률은 이보다 더 높은 3.8%.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 위기로 세계공황에 
대한 우려를 비웃는 듯했다. 설비투자 역시 마찬가지다. 91년 -6.4%였던 설비투자 
증가율은 92년 플러스로 돌아선 후 점진적으로 증가, 지난해에는 무려 9.9%의 
증가율을 보였다. 경기 활성화에 힘입어 실업도 줄었다. 80년대 후반 
증가일변도였던 실업률은 92년의 7.4%를 정점으로 점차 떨어져 지난해부터는 5% 
아래를 맴돌았다. 전문가들은 거의 완전고용 상태로 보고 있다. 

무엇보다 경이로운 것은 낮은 인플레. 94년 이후 4년간 소비자물가상승률은 불과 
2%대에 머무르고 있으며 지난해에는 더욱 낮아진 1.7%를 기록했다. 그야말로 ‘3각 
호순환’으로 일컬어지는 성장과 실업·물가의 세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은 
셈이다. 지난해 말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발행한 연차보고서는 미국의 
경제운용을 ‘A’로 평가했다. 

어떻게 이같은 일이 가능했던 것일까. 파상적인 무역공세에도 불구하고 무역수지 
적자는 전혀 해소되지 않았는데 미국 경제는 성장에 성장을 거듭, 이제 ‘전후 
최대 호황’이라는 찬사가 붙어다닌다. 아시아의 위기가 가중되는 상태여서 이같은 
활황은 더욱 빛을 발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내수시장에서 미국기업들이 경쟁력을 확보했다는 점에서 설명의 열쇠를 
찾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미국은 세계 최대 시장으로 내수시장만 장악해도 미국 
기업들은 ‘세계 최강’이 될 수 있는 조건을 구비하고 있다. 80년대 일본기업들에 
연패를 거듭했던 미국기업들은 각종 자구책을 내놓으며 경쟁력 확보를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리스트럭처링·리엔지니어링·다운사이징·슬림화 등 우리에게도 
낯익은 경영단어들이 터져나온 것이 이때다. 

기업 구조조정이 성공의 열쇠 

91년 GM은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80년대 정보처리업체인 EDS, 가전업체 
휴즈 일렉트로닉스 등 수많은 새로운 기업들을 인수하며 비자동차부문으로 
사업영역을 확대해 상당한 어려움에 처했기 때문이다. 회사가 살기 위해서는 
과감한 몸집 줄이기가 최상의 방법이었다. 그리고 GM은 성공적으로 구조를 
조정했다. 6백70만대의 생산능력을 갖추었던 북미의 40개 조립공장은 95년 
생산능력 5백40만대에 34개 조립공장으로 과감히 삭감했다. 또 90년 45만명에 
육박하던 직원수를 94년 35만명 수준으로 끌어내렸다. IBM도 구조조정에 성공한 
좋은 사례다. 

SW에서는 마이크로소프트, 반도체 분야에서는 인텔, 컴퓨터 분야에서는 컴텍에 
밀려 설 자리를 잃었던 IBM은 심지어 ‘화석화한 공룡’이라는 불명예까지 
감수해야 했다. 그러나 93년 4월 루이스 거스너 회장을 새로 영입한 후 2년만에 
무려 8만5천명을 감원, 95년에는 역대 최대 매출을 기록할 수 있었다. 

물론 대규모 감원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미 80년대 경쟁력을 상실했던 
미국기업들은 노동자들에 감원의 철퇴를 날린 바 있다. 80~89년 미국의 5백개 
제조업체는 고용총수를 37만명 삭감했다. 전체 인력의 21%에 해당하는 수치다. 
그러나 90년대의 감원은 성격상 80년대의 그것과는 성격이 판이하게 다른 
것이었다. 이전의 감원이 단순한 사업 축소의 성격이 강했다면 90년대는 단순한 
감원의 형식이 아니라 기업조직을 완전히 뜯어고치는 과정의 일환이었다. 80년대 
말부터 시작된 기업의 ‘구조 바꾸기’는 하나의 유행처럼 번져나가다가 90년대 
초반 들어 열풍으로 바뀌었다. 

마이클 해머 박사는 이같은 기업 구조조정의 기수였다. 줄곧 “지금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고 외치던 그는 기업 구조조정의 이론적 기반을 제공했다. 그가 전개하는 
리엔지니어링의 목적은 하나. ‘소비자를 위한 가치를 창조하라’는 것이다. 
20세기 후반 들어 세계경제는 공급초과 현상을 보이고 있으므로 그동안 주류를 
이뤘던 생산자 위주의 기업경영에서 탈피해 소비자 위주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다. 

해머 박사는 이를 위해 비용·품질·서비스 등 주요 부문에서 극적인 변화를 
추구해야 하며 이때 리엔지니어링이 요구된다고 말한다. “경영성과에서 극적인 
개선을 가져오기 위해 비즈니스 프로세스를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하고 혁명적으로 
다시 설계하는 것”이 해머 박사가 제시하는 리엔지니어링의 정의다. 이 과정에서 
인원을 줄이는 ‘다운사이징’은 ‘필수’였다. 해머 박사가 90년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에 처음 소개한 이 개념은 이후 미국을 휩쓴 리엔지니어링 
광풍(狂風)의 서곡이었다. 

기업의 리엔지니어링은 물론 고통스러운 실업을 유발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이것은 ‘일시적’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리엔지니어링은 통상 아웃소싱을 
수반하는 것이어서 도전적인 사람들에게는 신규창업의 좋은 기회였던 것이다. 
이를테면 메릴랜드 주정부는 경제개발 관련직원을 1천5백명에서 3백명선으로 
줄였지만 실직자 8백명 정도는 아웃소싱 자회사로 옮겨 일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 

또 벤처기업을 중심으로 창업을 권장해 새로운 일자리를 만든 것도 미국경제의 
커다란 활력소였다. 93~94년 미국 상·하원은 연달아 ‘국가경쟁력 강화법안’을 
가결시켰다. 국가가 기업의 하이테크 개발을 지원하기 위해 중소기업의 기술기반을 
지원하겠다는 것이 골자. 상무부는 하이테크 산업 5개 분야를 집중지원 대상으로 
선정, 향후 5년간 모두 7억5천4백만달러를 지원하겠다고 발표했다. 이같은 방식에 
의해 새로운 기업과 일자리가 창출된 것이다. 새롭게 창업한 기업은 92년 67만개, 
93년 71만개, 94년 74만개, 95년 77만개로 매년 신기록 행진을 계속했다. 많은 
전문가들은 이같은 리엔지니어링에서 비롯한 생산성 향상이 미국경제의 장기호황을 
이끈 원동력이었다고 본다. 

물론 틀린 말이 아니다. 80년대 후반 미국의 연평균 노동생산성은 2.2%. 그러나 
90년대 들어 생산성은 연평균 3.5%로 대폭 상승했으며 이는 일본(3.0%)과 
독일(2.8%)을 상회하는 것이었다. 95년 해머 박사가 쓴 “리엔지니어링 그후”의 
역자들은 ‘리엔지니어링 이론은 미국기업들의 복음서가 됐고 이 대열에 동참하는 
기업이 줄을 잇기 시작했다. 모두가 미친듯이 리엔지니어링의 물결에 동참한지 
수년만인 94년 미국은 마침내 약 15년간의 굴욕적인 패배를 딛고 일어서서 일본에 
대한 승리를 선언했다. 이것은 전세계 경제전쟁 사상 보기 드문 일대 
드라마였다’고 썼다. 

건전한 ‘몸집키우기’도 미국 경제 활성화에 기여 

그러나 미국기업의 구조조정이 반드시 ‘몸집줄이기’에 그친 것만은 아니다. 
리엔지니어링으로 1차 구조조정을 마친 기업들중 많은 수가 다른 회사를 
인수하거나 합병함으로써 다시 몸집을 키웠다. 세계 최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합리화된 ‘거대조직’이 요구됐기 때문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몸키우기’ 
과정에서 다운사이징이 일어나기도 했다. 기업의 경쟁력과 효율성 극대화를 위해 
물론 몸집 ‘줄이기’와 ‘늘리기’가 동시에 이뤄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80년대 하반기에도 M&A는 있었다. 한때 월스트리트에는 M&A 열풍이 분 적도 
있다. 그러나 90년대의 M&A는 80년대 후반의 그것과 달랐다. 80년대는 ‘기업 인수 
후 분할 매각’이라는 기업사냥꾼들에 의한 것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90년대 들어 
이같은 M&A는 거의 자취를 감췄다. 대신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한 M&A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경쟁력 강화를 위해서는 우군과 적군의 구분없이 무차별적으로 
이어졌다. 90년대 5천건을 돌파한 미국의 M&A는 93년에는 6천건, 95년에는 8천건을 
돌파하더니 지난해에는 급기야 1만5천건을 넘어섰다. 

은행은 아마도 이같은 경쟁력 제고를 위한 M&A의 대표적인 사례가 될 것이다. 
미국정부가 부실채권 문제를 해결하며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은행들의 합병을 
지속적으로 권장한 결과다. 91년 7월 케미컬은행과 하노버은행, C&S소프란과 
NCNB가 거의 동시에 합병한 것을 시작으로 90년대 미국 주요은행들은 모두 
1~2회씩의 합병을 경험했다. 사실 금융분야는 80년대 말부터 자본의 세계화 과정을 
겪으며 가장 몸살을 심하게 앓았던 분야였을 것이다. 

미국도 예외가 아니어서 80년대 말부터 가속화한 저축대부조합(S&L)의 대규모 
파산을 경험했다. 저축대부조합은 단기부채로 장기대부를 하는 특수 금융기관. 
80년대 말부터 시작된 디플레와 함께 부실채권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88년 
한해동안만 모두 2백5개의 저축대부조합이 도산할 만큼 심각한 문제를 일으켰다. 
조합에 융자한 시중은행이 타격을 받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부실은행은 과감히 퇴출시키고 자산·부채승계방식(P&A)으로 은행들의 합병을 
유도한 것이 미국이 일본을 물리치고 세계금융계를 다시 장악하게 된 동인이었다. 
일본이 부실채권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아직 허덕이는 것과 큰 대조를 보인다. 

인플레 잡은 미국경제 ‘극찬' 

그렇다면 미국경제는 단순히 성장 자체만으로 평가받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무엇보다 성장과 동시에 인플레를 잡았다는 것이 건전한 미국경제의 상징처럼 
받아들여진다. 경기확장이 눈에 띄기 시작한 94년부터 지난해까지의 연평균 
물가상승률은 불과 2.5%. 특히 ‘거품’이 생기기 시작했다는 지난해 물가는 
1.7%밖에 높아지지 않았다. 높은 물가상승을 수반하는 아시아식 성장보다 더 
각광받는 이유다. 

전문가들은 미국경제의 ‘건전한’ 성장에 대해 여러 가지 이유를 찾고 있다. 가장 
먼저 지적되는 것이 고용비용 절감이다. 고용비용의 가장 중요한 부문인 
임금상승률은 90년대(90~96년) 3.1%로 80년대의 상승률 4.9%를 크게 밑돌았다. 
경기활황으로 이어진 96년과 97년 역시 이 수준을 크게 넘지 않아 미국기업들은 
과거의 임금부담을 줄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사회보험 등 기업이 부담해야 하는 
수당 역시 마찬가지. 96년의 증가율은 1.9%로 임금상승률 3.3%를 밑돌았다. 97년 
상반기의 경우도 각각 2.0%, 3.2%여서 기업은 임금과 관련한 제비용을 줄일 수 
있었다. 

미국 FRB의 금리정책도 한몫한 것으로 본다. 지난 94년 5월 말 FRB의 재할인율 
인상은 인상적이었다. 당시 재할인율을 0.5%포인트 올리겠다는 정책을 발표하자 
정계와 언론에서는 조롱과 야유가 쏟아졌다. 인플레를 억제한다는 예방적 의미의 
결정이었지만 가까스로 얻은 경제성장의 호기를 놓칠지도 모른다는 세간의 
우려에서 나온 것이었다. FRB가 재할인율을 인상할지도 모른다는 얘기가 떠돌 
때부터 정계와 재계에서는 이를 막아야 한다는 소리가 높았다. FRB는 이같은 
외압에도 전혀 흔들림없이 자신의 예측력과 분석력에 기초한 정책을 폈던 것이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지금 이 시점에서 FRB의 판단은 높은 평가를 받는다. 이제 
FRB의 공신력을 의심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지난 95년 활황이 정점에 도달해 
‘연착륙’이 요구된다며 금리를 96년 초 세차례나 인하한 것에 대해 거의 이의 
제기가 없었다는 것이 이를 방증한다. FRB에 대한 신뢰를 입증하기에 충분한 
일이었다. 

그러나 모든 것에는 빛과 그늘이 함께 하게 마련이다. 장기호황을 구가하는 
미국경제에 노동자의 서글픈 삶은 성장의 건전성을 해치는 암적 존재일 수 있다. 
미국경제를 살려낸 리엔지니어링과 다운사이징은 노동자의 삶을 형편없이 과거로 
끌어내렸다. 많은 일자리가 사라지고 더 많은 새로운 일자리가 창출됐다고는 
하지만 질적 측면에서는 예전의 일자리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 

지난해 9월 있었던 UPS의 총파업이 최근 미국경제에 대한 노동자들의 시각을 
그대로 반영한다. 이들은 부업을 갖지 않으면 생활이 어려울 정도의 낮은 임금, 
격심한 업무량과 노동강도에 시달리던 끝에 총파업을 단행, 회사측의 양보를 
받아냈다. 파업의 중심인물이었던 전미노조의장 존 스위니의 말을 들어보자. 

“우리는 늘어나는 임시직, 아웃소싱, 수당과 의료보험 삭감 등 노동자들을 
위협하는 각종 정책과 싸웠습니다. 이번 승리로 다운사이징을 원하며 노동계에 
부정적인 정책을 고수하는 고용주들에게 각성의 계기를 줬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물러설 수 없습니다.” 

미국경제의 그늘… 노조·거품 그리고 유로달러 

연설 내용에서 볼 수 있듯 노동자들은 전문가들이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아끼지 
않는 기업의 구조조정에 동조하지 않는 것이다. 미국경제 성장의 ‘건전성’은 
노동자의 착취에서 비롯한 허울 좋은 말일 뿐이다. 정부의 긴축재정에 보조금을 
받지 못하는 하층 도시민들은 이미 길거리로 나앉은지 오래다. 4명 중 1명은 
의료보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실정이다. 이 상태가 계속된다면 노동자들의 
‘대반란’은 언제든 잘나가는 미국경제의 발목을 잡아챌 것이 분명하다. GM의 
대규모 파업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거품의 붕괴는 미국경제가 갖고 있는 또 하나의 복병. 아직 논란거리로 남아 
있기는 하지만 현재 미국경제에 ‘거품’ 현상이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는 지적이 
강하게 일고 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지는 지난 4월 미국의 거품이 급속하게 
형성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9천포인트를 넘나드는 주가, 천정부지로 오르는 지가, 
게다가 급증하는 M&A조차 공황 직전의 모습과 흡사하다고 봤다. 또 주가상승은 
미국의 개인자산을 급속하게 흡수하고 있다. 현재 추산에 따르면 개인자산 중 
저축은 17%에 불과한 반면 주식은 30%를 차지한다. 거품은 빠른 속도로 
진행중이다. 

만일 일순간에 거품이 꺼진다면? 개인이 받을 타격은 엄청날 것이다. 지난 5월27일 
“뉴욕타임스”지 역시 “주택 매매가 줄고 경제에 대한 소비자의 신뢰가 떨어지고 
있다”며 2분기부터 경기냉각 조짐을 우려했다. 이같은 조짐이 계속된다면 어느 
순간 거품이 빠지며 90년대 초 일본의 악몽을 연상시켜야 할지도 모른다. 

거품이 빠지는 길은 단순히 미국경제에만 관련된 것은 아니다. 유럽이 복병으로 
자리잡고 있다. 만일 내년도에 출범할 유로화가 강세를 드러내며 미국경기가 
조금이라도 위축된다면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 아시아를 떠나 미국에서 이익을 
챙기고 있는 자본들이 급속하게 유럽으로 옮겨갈 것이다. 이같은 일은 아주 
순식간에 이뤄지기 때문에 아무도 손쓸 수 없다. 

최근 미국정부는 97년도 무역적자가 사상 최고를 기록했다는 발표와 함께 
“해외자본 유입으로 전혀 걱정할 것이 없다”고 말했지만 이는 곧 해외자본의 
유출과 함께 순식간에 경제의 붕괴를 맞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미국 
국제연구소는 유로화가 출범하면 세계 각국이 보유 외환 중 5천억 1조달러가 
유로로 전환할 것이고 국제무역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40%까지 높아질 것으로 
전망했다. 91년 걸프전이 장기화 조짐을 보이자 미국 내 해외자본이 급속도로 
유출됐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미국이 엄청난 무역적자에도 불구하고 
‘강한 달러’를 유지하려는 배경이기도 하다. 

일본의 미 국채 매각시 달러는 50엔으로 폭락 

일본의 경우도 마찬가지. “이제 회생이 불가능하다”거나 “세계공황의 시발은 
일본이 될 것”이라는 말들이 나올 만큼 일본은 ‘최악’의 상태지만 여전히 
경제를 살릴 만한 강력한 ‘보도’(寶刀)가 있다. 해외자산과 상품경쟁력이 
그것이다. 이미 많이 팔아먹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일본은 세계 최대 채권국이며 
경제가 어렵다고는 하지만 일본의 제조업은 여전히 세계 최강이다. 
이들은 쓰러져가는 일본경제를 회생시킬 수 있는 보약인 동시에 세계경제를 
위협하는 칼이기도 하다. 최근 일본에서는 이를 무기로 일본이 얻고자 하는 바를 
얻어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하다. 일본의 시사지 “분게이순쥬”(文藝春秋) 5월호는 
지난 1월에 이어 ‘새로운 미·일전쟁’을 다시 한번 특집으로 다뤘고 5월25일 
NHK는 내로라 하는 일본의 논객을 모아 ‘어떻게 미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나’라는 주제로 열띤 토론을 벌였다. 미·일 경제전쟁이 새로운 양상을 보일 수 
있는 상황이다. 

예전에는 늘 수세적 입장에서 미국의 공세를 모면해야 했던 것이 일본이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완전한 입장전환으로 볼 수 있다. 이같은 상황을 예리하게 파고든 
사람이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다. “분게이순쥬” 5월호에 ‘다시 
노(No)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이라는 제하의 글을 기고한 그는 “일본은 
경제에서도 미국에 패배했는가. 아니, 나는 쇠망의 예감에 결코 동조할 수 
없다”며 최후의 승자는 일본이 될 것으로 말했다. 

그가 펼치는 논지의 핵심이 바로 채권과 강한 제조업이다. 그는 “세계 최대 
채권국 일본이 어려운데 세계 최대 채무국 미국이 호강하고 있다”고 현 상황을 
꼬집으며 일본정부에 “미국 채권 매각을 외교카드로 써야 한다”고 강변했다. 
일본이 갖고 있는 미국 채권은 어림잡아 4천억달러. 만일 이를 일시에 
팔아버린다면 미국의 주가와 달러가치 폭락은 불보듯 뻔한 일이다. 일본의 한 
경제전문가는 “일본이 달러의 가치를 달러당 50엔대로 떨어뜨릴 수 있다”고 
장담하기까지 했다. 

일본의 미국 국채 매각은 정말 우습게 볼 일이 아니다. 지난 85년 플라자합의 이후 
환차손을 피하기 위해 주식과 국채를 매각하자 미국 주식과 채권값은 30년대 
불황을 방불케 할 만큼 폭락했다. 86년 당시 일본 생명보험회사들이 보유한 외국 
유가증권은 4조9천억엔. 이것이 모두 달러자산이었다면 이들은 2조엔 이상의 
환차손을 입었을 것이 틀림없다. 87년 10월19일 발생했던 ‘암흑의 월요일’은 
뒤늦게 일본이 주식과 채권을 급매물로 내놓았기 때문에 발생했다는 주장이 있을 
정도다. 

지난해 6월 일본의 하시모토 총리는 미국 컬럼비아대의 한 강연에서 “일본은 미국 
채권을 매각하려는 유혹에 빠져 있다”며 은근히 미국을 위협하기도 했다. 
이시이는 또 “미국의 채권을 매각하지 않아도 미국은 이미 심한 거품경제에 빠져 
있기 때문에 곧 붕괴할 것”이라고 예언하며 “그로 인해 세계불황이 온다면 
살아남을 수 있는 국가는 강한 제조업을 갖고 있는 일본뿐”이라고 보았다. 
“최후의 승자는 일본”이니 결코 현재의 상황만으로 과소평가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지난 6월 미국은 일본과 타협했다. 미국이 엔화 안정을 위해 시장에 개입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엔화하락이 전혀 해로울 것이 없다는 입장에서 급선회했다고도 
볼 수 있다. 미국은 그동안 아시아 경제위기에 대한 일본의 책임론만 강조했을 뿐 
엔화하락에 대해서는 개입의사를 밝힌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엔화가 약세 움직임을 보이자 일본은 올 초 재무성 차관을 비밀리에 워싱턴에 
급파, 도움을 요청할 만큼 다급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지난 6월의 합의가 미·일의 
밀월관계를 유지해줄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미국은 일본을 구제하기보다 
위안화를 평가절하할 수 있다는 중국의 위협에 굴복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클린턴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하기 직전이었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이 주장이 
훨씬 설득력이 있다. 물론 합의 직후 엔화는 급상승했지만 다시 하락세로 돌아서고 
말았다. 게다가 총리가 바뀌어도 엔화 하락은 멈추지 않고 있다. 

엔화하락이 일본에 오히려 유리하다는 해석이 있다. 엔값이 떨어지면 수출이 늘 
테고 그렇게 되면 내수부진에 울고 있는 기업들이 활로를 찾을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는 지나친 것이다. 일본은 이미 외환투기꾼들의 가시권에 
들어가 있다. 

막대한 국내외 자본이 빠져나가는 이상 엔저를 방관할 입장이 아니다. 자칫 달러의 
공세로 80년대 후반 미국꼴을 당할지도 모른다. 이미 미국과 유럽의 기업들은 꽤 
많은 일본기업들을 사들였다. 완전한 역전이다. 달러강세가 더 유지된다면 더 좋은 
가격으로 일본기업과 부동산을 구입할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일본의 지금은 
미국의 80년대 후반과는 거리가 있다. 비록 무역·재정적자로 고통받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당시 미국은 세계 최대 군사대국이었다. 일본은 세계를 위협할 만한 
군사력이 없다. 난감한 일이다. 

“30∼55년동안 극심한 혼란 후 자본주의 소멸” 

물러난 하시모토 내각은 그동안 금기시했던 소비세 감면을 ‘일시’가 아닌 
‘영구’로 하겠다고 발표했었다. 하시모토 내각의 최대목표인 재정적자 해결을 
포기하고 미국의 의도를 받아들이겠다는 뜻이다. 이는 일본의 ‘노령화’에 대한 
대책을 포기하겠다는 의미인데 새 총리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내각도 감세폭을 
더 넓히겠다고 밝혔다. 21세기 노인들은 연금도, 의료혜택도 못받을 운명인지도 
모른다. 모두가 미국의 협조를 구하겠다는 취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엔값은 
오를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일본으로서는 모든 카드를 쓰고도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두려움이 팽배해 있다. 

그렇다면 세계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어느 때보다 미국 뉴욕주립대학의 세계적 
석학 월러스틴 교수의 예언적 연구를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그는 80년대 중반 
세계가 냉전으로 치달을 무렵 사회과학계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사회주의 붕괴의 
필연성을 이론적으로 정립했던 인물. 사회주의의 붕괴와 함께 자본주의 진영이 
승리감에 도취돼 있던 지난 95년 그는 자본주의의 붕괴를 예언한 저서 “자유주의 
이후”를 발간해 이같은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은 적이 있다. 자유주의를 유지할 수 
있었던 다른 한 축인 사회주의가 붕괴된 이상 자본주의 역시 존립이 어렵다는 
것이다. 

그는 “月刊중앙 WIN”(97년 1월호)와의 인터뷰에서 자본주의의 미래에 대해 많은 
의견을 개진했다. 그에 따르면 자본주의 세계체계는 앞으로 30~55년 동안 극심한 
혼란을 거듭하다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21세기 중반 전혀 새로운 체계가 등장하게 
된다. 현재까지는 그의 예언대로 가고 있는 듯 보인다. “혼란기 이후 어떤 체계를 
갖게 되느냐는 전적으로 혼란기를 살아가는 인류의 선택”이라는 그의 말은 더없이 
중요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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