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atholic ] in KIDS 글 쓴 이(By): kwonyh (님을찾아서) 날 짜 (Date): 2006년 7월 20일 목요일 오전 07시 37분 56초 제 목(Title): 성소이야기 - 친구에게 [2]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그 해 3월에 누님은 결혼을 하셨고, 그 해 4월 에 아버지께서 갑자기 쓰러지신 후 일주일 후 돌아가셨지. 형님은 군대 를 마치고 직장을 가려고 준비하고 있었고, 이제는 아버지도 고생을 어 느 정도 하셨으니, 자식들이 벌어다주는 것으로 조금씩은 그것에 대한 보상을 받을 수 있으리라 나는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일어나기 시작한 때 더 이상 세상에 계시지 않았다. 나는 허공에 대고 외쳤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하는지, 무엇 때문인지, 대답해 보라고. 그러나 아 무 대답도 듣지를 못했다. 안타까울 뿐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 무것도 없음이 더욱 나를 슬프게 만들었다. 세월은 흘러 군대에 갈 나이가 되어 국방의 의무를 하러 군대-일명 K 대- 라는 곳을 갔다. K대에서의 생활은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곳과는 틀린 것이었고, 육체적으로는 힘든 생활이었다. 그러나 채워지지 않는 그 무엇이 있었고 정신적으로는 공허함을 느끼고 생활하고 있었다. 훈 련소에서 종교시간에 천주교 교회를 가서 천주교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그리고 훈련소에서 가톨릭 통신 교리라는 제도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훈병 생활을 마치고 자대에 배치를 받고 나는 본격적인 K대 생활을 시 작하였다. 그리고 훈련소에서 안 가톨릭 통신교리에 편지를 보내고 회 신이 오기를 기다렸지. 한 달 정도 지나자 문제지와 가톨릭을 소개하는 책자가 나에게 왔단다. 나는 무엇에 굶주린 사람처럼 문제지를 읽고서 답을 적어 보내려고 하였지만, 나는 이등병이었지, 계급이. 너도 잘 알 겠지만, 이등병이 내무반에서 책을 보거나 한다는 것은 거의 자살 행위 나 다름없었지. 그러나 나는 그 자살 행위를 무릅쓰고, 문제지를 읽고서 답을 써 내려갔다. 그러나 그 당시의 분위기에서는 조금 아니 많이 힘 들었던 일이 아무 문제 없이 잘 되어 한 달에 한 번 정도의 서신 왕래 로 한 10개월 정도에 걸려서 통신 교리를 끝마칠 수 있었다. 또한 나는 가톨릭에도 불교에서와 같은 스님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였지. 수녀 님들이 있는 것을 알고 있었고, 신부님들도 계시다는 것을 알았지만, 남 자도 막연하게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가톨릭 성소국에 편지를 보내서 불교의 스님처럼 사는 남자들이 있는지 알아보았단다. 답신에서 는 그들을 수도자라고 부르며, 수사들이라고 한다는 말과, 입회를 하려 면 영세 후 3년정도가 지나야 된다고 했지, 나는 그때 세례를 받기 전 이었단다. 나는 그런 곳이 있다는 것을 안 것으로 만족하고, 통신으로 교리를 배우며 군 생활을 보냈다. 별로 가톨릭 신자를 만나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나는 정말로 운이 좋 았다고 해야 할 것 같구나. 신자들을 많이 만났으니 말이다. 부대에서는 일주일에 한 번씩 종교행사를 한 두 시간 정도씩 가졌지. 일요일을 제 외하고 말이다. 나는 훈련소에서부터 종교 시간에 가톨릭 행사를 찾아 갔지, 어떤 종교인지 알아 볼 셈으로 말이다. 수요일 저녁에 하는 종교행사에서 나는 우리 내무반장이 신자이고, 또 한 열심한 신자들이 많음을 알게 되어, 수요일을 기다리며 살았다고 해 도 과언(?)이 아니었다. 난 군 생활하러 군대에 갔는지, 종교 생활을 하 러, 아니 종교를 알아보려고 군에 갔는지, 생각은 안 해 보았지만 말이 다. 그렇게 지내던 중, 나는 상급 부대로 전출을 가게 되어, 이제는 육 체적으로 더욱 편한 생활을 하게 되었고, 그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한 번의 통신 교리를 더 했다. 역시 그것을 하는데도 한 10개월 정도가 흘 렀다. 그러던 중 기회가 찾아 왔다고 할까, 타 중대에 행정병이 있었는데, 대 신학교를 졸업하고 군에 온 것이었다. 그 신학생과, 먼저 생활하던 중대 의 열심한 신자가 가까운 동네의 성당에 찾아갔다. 그리고 우리의 상황 을 알리고 미사를 봉헌 할 수 있는지 여부를 알아보았다. 그 본당의 보 좌 신부와 중대의 행정병이 서로 신학교에서 선후배 사이로 학교에 같 이 다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쉽게 한 달에 한 번씩 주일 미사를 봉 헌하러 오게 되었지. 나는 그 미사에 꼭 참여하면서, 통신 교리를 두 번 마칠 수 있었다. 그리고 외출이나 휴가를 나가면 나는 성당에 가서 수 녀님을 만나 뵙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때 나는 자유스럽게 내무반에서 소설을 볼 수 있는 시기였고, 그때 본 책 중에 기억나는 것이 「휴거」와 「하늘 끝까지」라는 소설이었 다. 휴거는 착한 이들(?)이 휴거된 후에 지상에서 잘 살려 하다가 악마 의 꼬임에 넘어가 '666 코드'를 머리에 받아야 하는데도 양심상 머리에 받지 않고 손에 받아 고통당하고 왜 받았는가를 고민하면서 살아가는 어느 남자의 이야기였다. 두 번째 책 「하늘끝까지」는 A.J. 크로닌 씨 의 작품으로 살인 누명을 쓴 아버지의 누명을 벗기는 아들의 노력을 그 리고 있었다. 나는 두 번째 책을 재미있고 감명 깊게 읽었다. 그런데 성 당에 수녀님을 만나러 갔을 때 수녀님은 나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 셨고 아주 재미있고 감명 깊게 읽어 보았다. 아직 네가 안 읽었다면 한 번 읽어 보기를 권한다. 참, 이야기가 주변으로 흘러갔구나. 그리고 세 례를 받을 수 있는지 여부도 알아보았다. 내가 세례를 받을 수 있음을 확인하고는 기쁨과 설렘 그리고 두려움이 교차되었다. K대 생활에서 A.J. 크로닌을 만난 것이 나에게는 행운이었다. 이 소 설로 말미암아 나는 가톨릭에 대하여 그리고 신부님들의 삶을 어렴풋이 알 수 있었으니 말이다. 세례를 받을 준비를 하면서 나는 기쁨을 맛보았다. 그것은 세상 어느 것에서도 맛볼 수 없는 그런 기쁨이었다. 나는 대부가 되어줄 사람을 찾았고, 쉽게 우리 내무반에서 찾을 수가 있었다. 열심히 생활하며 부대에서 미사를 할 수 있도록 도와 주던 신 자는 이미 제대를 하여서 그를 대부로 하기는 힘이들었다. 그렇게 해 서 나는 1989년 9월 17일 세례를 받게 되었다. 가톨릭에는 세례를 받을 때 세례명이 있는데, 나는 세례명을 무엇으로 할까 고민도 많이 했지, 신학생이 준 인명 사전을 보고서, 세례 날짜로 정할까, 아니면 생일, 등등 고민을 하다가, 내가 되고 싶은 사람 중에서 세례명을 골라야 하겠다고 생각했을 때, 바로 은수자 안토니오를 발견 하게 되었다. 그 책자에는 수도자의 아버지, 수도 생활의 시초라고 설명 을 하고 있었지, 나는 보물을 발견한 듯이 그 이름으로 세례명으로 삼 고 세례를 받았다. 그렇게 해서 K대 생활을 하면서 세례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K대 생활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나의 종교 생활은 결코 쉽지 않았 다. 어머니는 내가 성당에 나가는 것을 싫어하셨다. 어머니도 예수님을 좋아하셨던 것 같은데, 그리스도인들이 하는 말과 행동은 별로 좋아하 시지 않으셨던 듯싶다. 어머니는 단호하게 나에게 말씀하셨다. 당신과 같이 사는 동안에는 그럴 수 없다고 말이다. 난 거역할 수 없었으며, 성 당에 나가지 않기 시작하였다. -- 계속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