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atholic ] in KIDS 글 쓴 이(By): SSman (inigo) 날 짜 (Date): 1999년 2월 9일 화요일 오후 06시 32분 01초 제 목(Title): 답답한 종교들의 세계 안녕하세요. 오래간만에 글을 올리는 군요 다음은 이찬수님께서 네티앙에 올리신 글을 무단 복제한 것입니다. ------------------------ 불교 안에서 그리스도교를 보시나요? 그리스도교 안에서 불교가 보이시나요? 가당치도 않다구요? 그 깊이의 세계에서는 그리스도교가 참으로 그리스도교로 남으면서도 불교와 상통하는 모습이 보이고, 불교가 참으로 불교로 남으면서도 그리스도교와 상통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참으로 진실한 그리스도인이면서도 불교의 세계를 느끼고, 참으로 진실한 불자이면서도 그리스도교의 세계를 느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만남, 화해, 일치이겠지요. 만일 궁금하시면, 비록 왕초보의 작품이라 보잘것 없지만, 제 홈페이지 한 번 방문해주세요. http://my.netian.com/~chansuyi 입니다. 그리고 참으로 종교적인 깊이를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 종교를 지독히도 비판해보았습니다. 한번 읽어보시겠어요? <국제한국학회지>(국제한국학회편), 제3권(1998년 발행)에 실었던 글입니다. 답답한 종교들의 세계 이 찬 수 (한양대 강사) 1. 들어가는 말 우리 사회를 묶어주는 통합원리는 과연 있는가? 없다고까지 하기는 힘들어도, 딱히 이것 이라고 지적할만한 것을 찾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 물론 어떤 사회든 하나의 원리에 묶인 획일적인 사회가 되어서는 안된다. 그렇지만 적어도 구성원 대다수가 공감하는 고유의 것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는 그것을 쉽사리 찾기 힘들다. 사분오열된 개개집단 중 심주의가 두드러질 뿐, 전체에 적용되는 긍정적 공감대가 보이지 않는다. 어느 사회든 문화 적 공감대, 사회통합의 기능을 해온 것은 종교였다. 그러나 20세기 이후 우리나라 종교에서 그런 것을 찾기는 힘들다. 특별히 200여년 전 서구문명을 등에 업은 그리스도교가 들어온 이래 오늘까지 우리나라는 동양과 서양, 전근대와 근대가 뒤섞인 채 문화적 구심점, 정신적 지주를 찾지 못하고 있다. 현상적으로만 보면 우리나라는 세계의 모든 것이 들어와 있을만 큼 개방적인듯 하지만, 내부적으로 이것들은 충분히 소화되지 못한 채 그저 물과 기름처럼 겉돌고 있다. 무언가 창조되지 못하고 혼재해 있을 뿐인 것이다. 그저 혼재해 있을 뿐 아니라, 사실상 갈등하고 대립한다. 종교의 세계에서 이러한 현상은 극에 달한다. 자신과 다른 것을 거의 용납하지 않을뿐더러, 일체를 자기중심적으로만 본다. 상호 이해는 고사하고, 외면하거나 경시하거나 배타하는 수준에 그치고 마는 경우가 허다하 다. 서양에서 들어온 그리스도교(가톨릭 + 개신교)는 아직 우리 사회와 문화 안에 뿌리를 내 리지 못했으면서도, 어느새 민족의 주인인 양 착각한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대로 뿌리를 내리고 살아온 우리의 전통 종교와 문화를 경시하거나 배타하는 일이 다반사이다. 유교, 불교 등 전통 종교는 지나치게 아성만을 쌓고 그 속에 안주한다. 우리 사회에 주도적 인 세력을 형성해가고 있는 서양문명, 그 문명을 등에 업고 있는 그리스도교와 자신있게 접 촉하고 수용하기 보다는 무관심하거나 외면한다. 때로는 그 도도한 세력 앞에 위축된 채, 방 어적인 자세를 취하기 급급하다. 이런 식으로 우리 사회에서 서양을 배경으로 하는 종교와 동양을 배경으로 하는 종교는 언제나 따로 논다. 늘 자기중심주의, 자기집단우월주의, 더 나 아가 호교론적 배타주의 마저 횡행하는 형편이다. 유독 학연(學緣), 지연(地緣), 혈연(血緣)이 강한 한국 사회 속에서 종교는 한술 더 떠 종 파, 신분까지 보탠다. 자기 종파, 특정 신분에 속한 사람이 아니면, 누구도 받아들이지 않는 다. 가령 그리스도교의 경우, 신부나 목사가 아니면 교단 안에서 중요한 일을 거의 하지 못 한다. 자기 종파에 속하지 않은 사람에 대해서는 애당초부터 무관심하도록 틀지어져 있다. 자기 집단용 철옹성만을 쌓고서 대화 보다는 무관심으로, 다원주의 보다는 배타주의 내지는 자기우월주의로, 이타주의 보다는 이기주의로 무장한다. 대화한다면서 외교적인 태도를 보이 기도 하지만, 자기 집단 안으로 돌아서는 순간 호교적인 태도로 바뀐다. 이타주의를 가장한 이기주의와 같은 것이 판을 친다. 서로를 이해하고 긍정하는 분위기는 제도적 종교 안으로 들어갈수록 찾기 힘들다. 무엇이 그러게 만드는 것일까?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2. 종교들의 자기중심적 보편성 무릇 어떤 종교이든 보편성을 주장한다. 자신들의 가르침은 일부에만 적용되는 편협한 것이라고 보는 종교인들은 없다. 불교든 그리스도교든 유교든, 천도교든 원불교든 증산교든, 적어도 교리 차원에서 보면 대부분 포용성을 지니고 있다. 자신들의 가르침은 전 우주에 적용되고 또 적용되어야 할 보편적인 것이라고 믿는다. 모두가 보편적인 진리를 말하지, 일 부에만 적용되는 진리를 말하지 않는다. 가령 불교에서는 일체 중생에게 불성이 있다 (一切衆生悉有佛性) 말하고, 중생의 마음이 곧 부처 (心卽佛)라 한다. 부처님의 성품은 불자에게만이 아니라 일체 중생에게 있다는 것이 다. 일체 중생이 원천적으로 부처이거나 적어도 부처가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여기에는 신분이나 종파가 따로 없다. 누구나 본래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교에서는 모든 인간이 하느님의 형상 대로 창조되었다고 가르친다. 하느님은 세 상을 지극히 사랑하시며 ,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Immanuel)고도 말한다. 이러한 가 르침 역시 일체의 종파간 차별 없이 모든 이 에게 적용되는 원천적이고 보편적인 사실이다. 천도교에서는 시천주(侍天主), 인내천(人乃天) 등에 대해 말한다. 사람은 누구나 한울님(天 主)을 모시고 있고, 따라서 사람은 곧 하늘이라는 것이다. 원불교에서 말하는 궁극적 진리인 일원(一圓)은 법신불이며, 다름아닌 일체 중생의 본성이다. 그러니 사람을 섬기되 하늘처럼 섬기고(事人如天), 부처님 대하듯 해야 한다는 종교 윤리도 나오게 된다. 이것은 얼마나 깊은 자비와 생명의 가르침인가? 종교인들이 이대로만 살면 이 세상은 이 미 하느님 나라가 되어 있을 것이다. 서방정토, 극락은 더 이상 저 먼 곳에 있는 유토피아 가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이 땅이 될 것이다. 그러나 전체 종교인 수가 전체 인구 수를 능가하는 현실 속에서도 사회적 무질서는 여전하다. 조화와 평화 보다는 다툼과 알력, 긴장이 더 많다. 전쟁과 폭력이 끊이지 않고, 물신숭배가 횡행한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 가? 문제는 종교들에서 아무리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사랑의 가르침을 선포한다 해도, 정작 종 교인들은 그것을 자기 중심적으로만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데서 생겨난다. 원천적으로는 모 든 이에게 적용되는 사실이라고 해도 그러한 진리에 대한 열쇠는 자기가 쥐고 있다는 자기중 심적 태도를 취하는 데서 비롯된다. 말하는 자가 자기중심적 태도를 취할 뿐 아니라 듣는 자도 자기의 지평 안에서만 받아들인다. 가령 불교에서 아무리 일체 중생에 불성이 있다 고 선포한다 해도 그것을 듣는 타종교인은 불교적 깊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자기 식 대로 오해한다. 그리고는 불성이라니? 신성이라면 몰라도! 하는 식의 부정적 반응을 보인 다. 그러다 보니 일체중생실유불성 이 신분이나 종파를 차별하지 않고 모든 이에게 적용되 는 원천적이고 보편적인 사실인 것은 분명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그저 불교적 입장에서의 사 실에 그치고 말 뿐, 다른 종교인들마저 동의하는 보편적 진리가 되지는 못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나 하느님의 형상을 한 하느님의 피조물이라 하고, 하느 님께서 언제나 우리 와 함께 하신다(God with us!)고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그 때의 우리 란 그리스도인에 제한된다는 식의 아전인수격 해석을 한다.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은 하느님의 무조건적 은총이라 말하면서도, 다른 한편에서 인간은 여러 가지 조건들을 달아놓는다. 여러 걸음 양보하여 신실한 타종교인들을 하느님의 자녀 혹은 예수님의 제 자 라고 부를 때 조차도, 그들이 자기 편으로 오는 것이 옳다는 차원을 버리지 못한다. 그러 다 보니 하느님이 세상을 이토록 사랑하신다면서도, 그러한 사랑을 받을 수 있게 해준다는 그리스도교 중심적 조건들은 도처에 널려 있다. 결국 원래 의도와는 다르게 그리스도교 중 심적 사실로 제한시켜버리고 마는 것이다. 이것은 모두 종교인들이 다른 종교적 진리를 그 자체로 긍정하기 보다는 자기 종교의 진 리로 흡수하는 차원에서 인정하기 때문이다. 불자는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을 여러 신들 중의 하나 정도로 생각하고, 그리스도교인은 부처님을 그저 뛰어난 하나의 인간 정도로만 받아들 인다. 다른 종교를 존중한다며 백번 양보하여 모든 종교는 다 옳아! 하는 결론을 내릴 수 도 있지만, 이것 역시 자기중심적으로 그렇게 할 수 있을 뿐이고, 자기중심적인 차원에서만 해석하고 이해해버릴 뿐이다. 마음이 곧 부처 라 한다 해도, 아무리 인간은 하늘을 모시고 있는 하늘과 같은 존재(侍天主, 人乃天)라 해도, 그 원칙적이고 보편적인 사실에 동의하는 사 람에게만 마음이 곧 부처 이고 사람이 곧 하늘 이라는 명제가 타당하게 받아들여지기 때문 이다. 결국 현실적인 종교의 세계에서 보편적인 판단, 보편적인 잣대란 없다는 말이 된다. 내가 남을 판단하는 그만큼, 동일한 이유로 남도 나를 판단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종교에서는 보편성을 주장한다. 자기들의 종교는 전 인류에, 전 우주에 통하는 보편적인 진리라고 믿는다. 어떤 종교든 원칙적으로 자기에게만 해당하는 좁은 진리를 말하지 않는다. 가령 가장 고전적 대승불교통론이라 할 수 있을 <대승기신론> 에서 일체 중생의 본래 깨달아 있음(本覺) 에 대해 말하는 것이나, 신약성서에서 만물(萬 物)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겨났다 고 말하는 것은 모두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보편적인 사 실이다. 그렇지만 불자든 그리스도인이든 특정 전통 안에 속한 종교인들은 바로 그렇기 때 문에 자기들의 가르침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식으로 이것을 해석한다. 누구든지 자기들의 진 리를 안다면 결국 자기 쪽으로 올 수 밖에 없으리라고 확신한다. 그런데 너무나도 분명한 것은 바로 모든 종교들에서 그렇게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모두가 자기중심적으로만 보편성을 주장하는 까닭에, 보편성이라는 이름 하에 특수성간의 대 립만 낳는 꼴이다. 종교들의 보편성 주장은 사실상 한번도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진 적이 없 는 특수한 주장들일 뿐인 셈이다. 그러다 보니 원래의 가르침과는 모순되게도, 현실적으로 가장 보편적이지 못한 곳이 바로 종교의 세계가 되고 말았다. 자기들의 진리는 전 우주에 통한다며 거창한 말들을 늘어놓지만, 너도 나도 거창한 말들을 하는 바람에, 실제로 그 거창 함이 실현된 적은 없으며, 도리어 그 거창한 진리와는 어울리지 않게 끼리끼리 놀기만 하 는 가장 속좁은 곳이 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3. 편협한 종교들의 세계 종교의 편협성을 반증하는 다른 식의 예를 들어보자. 문학이든 예술이든, 철학이든 역사 든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을만한 보편적인 것이 있게 마련이다. 보편적 이라고까 지 말하기 힘들다면, 적어도 한 사회의 다수가 공감하는 부분은 있게 마련이다. 예를 들어 보자. 가령 박경리나 이문열, 혹은 조정래의 소설을 그리스도인이라 해서 덜 읽고 불자라 해 서 더 읽는가? 비종교인이라 해서 좋아하고 종교인이라 해서 싫어하는가? 그렇지 않다. 개인의 취향에 따라 더 읽고 덜 읽을 수는 있으나, 이들의 소설에 굳이 종교색까지 개입시키 며 보지는 않는다. 그리고 이들 역시 특수 종교인을 염두에 두고 글을 쓰지도 않는다. 그저 인간의 삶을 다룰 뿐이다. 독자 역시 필자에 대한 별 선입견 없이 이들의 글을 읽고 감동한 다. 시도 마찬가지이고 수필도 마찬가지이다. 읽기만 한다면 우리 사회의 대다수가 공감할 수 있을만한 요소가 있게 마련인 것이다. 예술 분야에도 만인의 가슴을 울릴 멋진 음악, 미술, 춤이 있다. 김덕수패의 사물놀이 공 연을 보면서 한국사람이라면 종파에 관계없이 모두들 신명을 느낀다. 저절로 어깨가 들썩이 고, 그때만큼은 저것이 바로 우리의 소리로구나 공감한다. 우리의 것이라는 사실에 자긍심이 느껴진다. 살풀이든 승무(僧舞)든, 하나의 예술로서라면, 얼마든지 감상하고 힘찬 박수도 보 낸다. 조수미나 홍혜경의 노래를 들으면서 목소리 참 좋다고, 노래 정말 잘한다고 감탄한다. 이들의 음악이 세계적으로도 인정받는 수준높은 것이라는 소리를 들으면 괜시리 뿌듯해진다. 대중음악으로 가도 마찬가지이다. T.V.에서 각종 쇼프로 를 보면서 스트레스도 해소하고, 가족이나 친구끼리 부담없는 대화도 즐긴다. 술이라도 한 잔 들어가면,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 나 심수봉의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를 부르고, 그 분위기에 취한다. 이들 노래를 불교인이라서 싫어하고 가톨릭 신자라 해서 좋아하는 경우는 없다. 절에 나가는 아이나 교 회 나가는 아이나 대부분 서태지는 좋아한다. 신세대축에는 끼지도 못하는 나도 좋아하니까. 또 한국사람이라면 우리 소리를 다룬 영화 서편제 를 보며 아스라이 회상에 잠긴다.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 영화에서 우리 소리의 한(恨) 혹은 아픔을 읽어낸다. 이곳에 신분이나 종파란 따로 없다. 어느 학교든 국어, 역사를 가르치고, 수학이나 과학을 배운다. 설령 그 학교가 특정 종교적 이념을 가지고 설립한 학교라 해도 인간으로서 배워야 할 것이 라면 나름대로 열심히 가르치고, 학생들도 입시 때문이든, 취업 때문이든 학교의 방침을 따르 며 저마다 공부한다. 전국민이 열광하는 올림픽이나 월드컵 열기가 있는가 하면, 대선(大選) 철이라도 되면 절이나 교회 혹은 교당을 막론하고 전국적으로 달아오른다. 이런 주제를 가 지고 대화하는 데 신분이나 종파는 그다지 벽이 되지 않는다. 철학 분야도 그렇다. 가령 칸트는 서양철학자이지만 한국의 철학자에게도, 그리스도교권 철학자 뿐 아니라 불교권 철학자에게도 그 천재성을 인정받는다. 철학을 하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헤겔이나 하이데거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 한 두번쯤은 애쓰기도 한다. 이들에 대 해 공부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참 대단한 철학자들이라는 공감을 하게 된다. 우리나라의 퇴계나 율곡 같은 이 역시 전국민적인 위인이자 학자로 칭송받는다. 세종대왕의 이름은 세 종대학, 세종연구소, 남극 세종기지, 세종로 등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쓰는 곳에서 찾 아볼 수 있다. 누구나 없으면 못사는 돈에도 세종대왕의 초상이 그려져 있다. 최근에 소설 가 이문열씨가 그동안 벌어들인 인세 수입을 털어 평생 숙원사업이었던 소설가 지망생을 위 한 연수소를 개설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좋은 소설가를 배출하기 위한 작은 학교인 셈이다. 문인들 대부분이 반긴다는 전언이다. 그런데 종교의 세계에도 이런 것이 가능할까? 종교의 세계에도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가령 원효(元曉) 스님과 같은 분을 목사님 들까지 존경하는 전국민적인 스승으로 받들 수 있게 될까? 부활절에 스님이나 교무님들까지 어떤 감흥을 느낄 수 있게 될까? 다양한 종교인들이 동등한 자격으로 타종교들에 대해 배우 는 교육기관이 설립될 수 있을까? 타종교들에서 자기 종교적 깊이를 느낄 수 있게 될까? 4. 종파주의 - 종교라는 이름의 벽 현실적으로는 거의 힘들어 보인다. 왜인가? 역사적인 사실의 차원에서는 원효를 위인으 로 받들 수 있지만, 종교 라는 안경을 끼고 스님 으로서의 원효를 보는 순간, 특히 타종교인 에게 그러한 보편성은 사라지거나 반감되고 만다. 원효 같은 분을 화폐에 새겨 기념하고자 하면 일부 그리스도교인이 반대한다고 한다. 원효를 민족의 스승으로 보기 보다는, 그저 중 의 수준에 두는 몰지각함 때문이다. 그리스도교인만을 탓할 것도 없다. 다른 종교의 상황 을 보더라도 크게 다를 것을 없겠기 때문이다. 가령 그리스도교 밖의 사람들에게는 그리스 도교인이 부활이라는 황당한 사실을 믿는다는 것이 어리석어 보이기도 한다. 예수를 신으 로 섬기는 행위가 유치해 보이기도 한다. 종교의 내적이고 보편적인 세계는 닫아두고, 또 그 진정한 의미는 알려 하지 않은 채, 그 외적이고 차별적인 측면만 보기 때문이다. 종교라는 이름 하에 서로를 가리는 거대한 울타리들만 만들어놓고 있기 때문이다. 불교인에게는 스 님 이나 불교적 사상가로서의 원효만 주로 보이고, 그리스도교와 같은 타종교인에게는 바로 그러한 측면만 잘 보이지 않는다. 원효를 총체적으로 볼 수 없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다 그런 식이다. 불교인에게만 팔리는 책, 그리스도교인에게만 팔리는 책은 제법 있지만, 특정 종교의 제목을 달고서 그리스도교인과 불교인 모두에게 비슷한 양으로 팔리는 책은 거 의 없다. 다른 제목으로 종교적인 내용을 담으면 어느 정도 팔릴 수 있지만, 제목부터 특정 종단에 상응하는 말이 들어가면 일반 독자들의 손에는 아예 들어가기조차 힘들다. 불교의 이름을 단 책이 그리스도인의 손에 들어가기란 하늘의 별따기와 같다. 가톨릭이든 개신교이 든, 그리스도교와 관련된 이름을 단 책이 불자들의 손에 들어가기 힘들기도 매한가지이다. 이 뿐 아니다. 같은 그리스도교 전통이라면서도 가톨릭이든 개신교든 자기 종파 안에서 만 대화가 된다. 신학 이라 하지만, 가톨릭 신학과 개신교 신학은 다르다고들 생각한다. 특 히 자식뻘 되는 개신교인이 어미격되는 가톨릭에 대해 가지는 차별의 눈초리는 도를 넘는다. 개신교는 가톨릭을 심지어 이단 취급까지 한다. 그 정도는 아니라고 해도 가톨릭은 개신교 를 서자(庶子) 취급한다. 그러면서 서로 자기가 한 수 위라는 심리적 우월감에 사로잡힌다. 가톨릭 계통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한 사람은 개신교인이라 할지라도 개신교 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칠 수 없고, 개신교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한 사람은 설령 가톨릭 신자라 해도 가톨릭 대 학에서 신학을 가르치기 힘들다. 모두가 같은 경전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인 류의 구세주라 섬기며, 같은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끼리끼리만 일을 도모하고, 정작 사람이 필요할 때도 자기 사람만 쓴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더니, 그 전형적인 모습은 종교 안에 다 들어있는 셈이다. 개신교 안으로 들어가면 또 종파라는 벽이 도사리고 있다. 오늘날까지 개신교의 장로교 대학에서 신학 공부한 사람이 감리교 대학에서 교수가 되었다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다. 장로교 대학에서 공부한 장로교인이 감리교 대학에서 가르치고 있다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 다. 도대체 장로교와 감리교 간에 무슨 교리상의 차이가 그렇게 심하단 말인가. 더욱이 일 반 신자들이 느끼는 차이란 거의 없을 정도이다. 그렇지만 어떤 구체적인 일을 할 때는 자 연스럽게 편이 나뉜다. 의도적으로 편가르기를 하는 것은 아니더라도, 으레 자기 교파 중심 적으로 사고하고 말하고 행동하도록 짜여있다. 따라서 어떤 일을 하고자 할 때 만일 자기 옆에 사람이 없으면 다른 편에 협조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그 일을 포기해버리고 만다. 언제나 끼리끼리이다. 이것이 당연한 일이 아니냐고, 현실적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냐 고 반문한다면, 나는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이 당연하다거나 어쩔 수 없는 일이 라고 생각하는 그곳에서 그리스도교는 더 이상 그리스도교이기를 멈춘다고. 예수는 그저 세 불리기 좋아하고 편가르기나 일삼는 바로 그곳에 그것을 없애기 위해 다시 올 분이라고, 아 니 다시 와야 한다고. 앞으로 종교개혁이 일어난다면, 이러한 종파주의, 자기집단 중심주의 를 뒤집음으로써 시작되고 완성될 것이다. 이렇게 개별 집단중심으로 나아가다 보니, 오로지 자기 교회, 자기 종파의 양적 성장에만 골몰할 뿐이다. 제대로 된 시설 하나 갖추지 않고, 능력도 없는 사람끼리 신학교를 세워서 삼류 목사를 양산해낸다. 지금이 어떤 시대인가? 대학 교육이 보편화되어 있고, 대학원 교 육이 급속하게 전개되고 있을 만큼 국민의 지적 수준이 높아지고 있는데도, 1-2년 짜리 통신 신학교 같은 것을 만들어 쓱싹 목사를 만들어낸다. 장로교 안에만 100여개에 가까운 교파가 또 있으니, 그리고 이들 교파마다 자기 교회 안에 신학교를 두어 교파 신학을 가르치고 목사 를 양성하는 지경이니, 이들이 과연 중생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사람들인가? 우리의 영적 세계, 정신 구조를 더욱 피폐하게 만들 뿐이다. 모두들 내면적인 종교의 세계는 닫아두고, 종교적 재벌 이 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꼴이다. 겉으로 보기에 가톨릭은 개신교와 같은 분파는 없지만, 이것은 겉으로일 뿐이다. 가톨릭 에서는 사실상 교구가 개신교의 종파를 대신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교구 간의 벽은 종 교간의 벽 못지 않게 높다. 같은 신부라도 다른 교구에서 밥 빌어먹기 는 힘들다. 사제의 복장만 같을 뿐, 교구별로 내적 사제복은 이미 차별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마음 의 문을 닫고 산다. 교구 간에 벽이 높다 보니 벌어지는 현상 중 하나가 교구별 신학대학 세우기이다. 굳이 대학까지는 필요없고 또 대학을 세우고 운영할 능력이 있는지조차 의심스 러운데도 대학을 세우느라 출혈을 감수하면서까지 상호 경쟁하다시피 한다. 기존 타교구 대 학을 충분히 활용해도 되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작든 부실하든 우리끼리 해먹는게 속편 하다 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신부 재교육이 필요하다거나 사제 양성을 위해서라면 다른 교구 대학에 위탁 교육을 하면 충분히 될 일을 가지고, 우리 것 에 집착하고 내가 좌우하려는 소 유욕에 휩싸여 자기 것을 고집하느라 그러는 것이다. 땅덩어리나 넓고 지역간 차이도 워낙 커서 그런 것이라면 또 다른 문제이다. 가뜩이나 좁은 반도 땅에, 그것도 반쪽으로 나뉜 슬 픔의 땅에서, 어차피 로마 신학을 정점으로 하면서 무슨 신학상의 차이도 전무하다시피 한데, 신부 지원자는 점점 감소하고, 우수한 학생을 뽑기도 힘든 상황인데도 말이다. 먼 앞날을 내 다본 처사가 아니다. 모두가 자기 무덤을 파고 있는 꼴이다.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려도 마찬가지이다. 급격히 팽창하고 있는 대순진리회의 경우는 지 나치게 종말론적이고 현실 도피적이다. 현실을 긍정하지 않고 후천 세계 에만 집중하다보니, 다양한 모습으로 깊은 종교적 가르침을 실천하는 현실의 다양한 사람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 이라는 섬뜩한 표어를 내걸고 대다수 사람들을 지옥으로 내모 는듯한 극단적 예수쟁이들 이 무색하게, 우주적 진리의 근원자인 상제(上帝)를 역사적 인물인 증산에게만 가두어둔 채, 스스로 게토화해 나간다. 그러다 보니 형제/자매 종단인 증산도와 조차 조화하지 못한다. 증산도와 대순진리회는 모두 증산을 교조로 섬기는 한 종교의 두 종 파이지만, 이들은 서로를 별종 대하듯 한다. 상생 (相生)이라는 증산의 가르침이 무색하게 이들은 상극(相剋)이다. 그러니 똑같은 증산의 가르침에 근거하고, 같은 세계관을 가지면서 도 증산도인이 대순진리회 소속 대학의 교수가 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가톨릭 과 개신교의 갈등 그 이상이다. 불교 안으로 들어가도 사정은 크게 나아지지 않는다. 겉으로는 교파간 분열이 심하지 않 아 보이지만, 그 속에는 또 문중 중심주의라는 것이 있다. 어느 문중에 속하느냐에 따라 내 편, 네 편 가른다. 의도적으로 상대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라 해도, 의도적으로 자기 문중 사 람만 쓰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기에 힘없는 사람은 힘있는 문중, 유력 인사에 줄서기 급급하 다. 이 마당에 나도 깨치고 일체 중생을 구제하리라는 서원은 공염불 에 지나지 않는다. 온 인류를 구원해야 한다는 소명은 순전히 개인의 근시안적이고 심리적인 위안거리에 지나지 않 는다. 같은 민족이면서도 종교의 세계 안으로만 들어오면 다른 민족 이상의 차별이 생기는 마당이기 때문이다. 가령 가톨릭 대학에서 불교학과 신학을 공부한 개신교인이 있다 치자. 그는 겉으로는 종교간 화합과 일치의 상징처럼 비칠 수도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아무 데서도 행세하지 못한다. 가톨릭 계통 대학에서는 개신교인이라 외면당하고, 개신교 계통 대학에서 는 천주교 신학을 했다 해서 거절당한다. 불교에서는 그리스도교인이라 하여 안중에 들지 못하고, 그리스도교 권에서는 불교를 공부했다 하여 의심의 눈초리를 보낸다. 물론 전부 다 그런 것은 아니고, 종파에 따라 약간의 태도 차이는 있다. 그러나 대다수가 그러는 것은 분 명하다. 학문의 세계로 들어가도 또 마찬가지이다. 학문이 학문인 한, 거기에는 보편적 타당성이 있어야 한다. 이 세상에 특정인만을 위한 학문이 있던가? 인류의 구원을 도모하는 종교 세 계의 학문이라면 더욱 더 보편성을 띠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종교 내부의 현실은 전혀 그 렇지 않다. 가령 신학의 세계에 들어가면, 진보다 보수다, 자유주의다 정통주의다 하여 또 편싸움 이 있다. 같은 그리스도교 서점에 들어간다 해도 보수주의에 속한 사람은 진보주의 에 속한 책은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 의도적으로 거들떠 보지 않는 것이라기 보다는, 그쪽에 는 아예 관심이 가지 않도록 머리 속에, 가슴 속에 이미 그렇게 입력되어 있다. 그런 책이 있는지조차 모른다. 같은 교단에 속했어도 신학적 입장이 다르면 완전히 남이 되어버리고 만다. 진보적 계열에 속한 사람은 보수적 계열에 속한 사람의 학문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학문이라고 간주조차 않는다. 이러한 현상은 분열을 생명으로 하는 개신교 계통에만 해당 되는 이야기일 것 같지만, 사실 가톨릭에서도 다르지 않다. 현대성 내지는 포스트모던성을 반영하는 학문에는 어두울 뿐 아니라, 뿌리가 없다며 기피한다. 오로지 중세의 로마 신학만 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것을 벗어나면 위험시한다. 다 이런 식이다. 종교 연구를 업으로 삼고자 한다면, 특정 종파에 어울리는 이름을 붙이 고 내세워야 일거리가 생긴다. 불교 연구를 위해서는 간판 어딘가에 불교 라는 이름이 들어 가야 불교라는 울타리 안에서 인정받고 통한다. 당연히 대다수 타종교인에게는, 특히 배타적 성향이 강한 그리스도교인에게는 안 통한다. 그저 남 얘기일 뿐이라고 치부하고 만다. 이런 식으로 종교 자(字)만 들어가면 벽 이 두터워진다. 같은 종교 안에서도 종파끼리 경쟁을 한 다. 의도적인 경쟁은 아니라 해도, 이미 구조적으로 자기 종파 이야기만 하도록 되어 있다. 다른 종파, 다른 종교에는 그만큼 관심이 없다는 얘기다. 관심이 있다면 자기 종파에 이익이 될 때뿐이다. 그만큼 현실적 종교들의 세계에서는 보편성은 커녕 자기 중심적 특수성만 판 을 친다. 종교라는 이름으로 불교적 우주관을 떠올리고, 종교라는 이름으로 그리스도교적 종 말론을 떠올리는 등 대부분 자기 식의 종교관을 연상할 뿐이다. 그것을 넘어서면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5. 신분 차별주의와 성차별주의 종교의 문제점은 이 밖에도 셀 수 없이 많다. 그 중 하나는 신분중심주의이다. 가령 가 톨릭을 보자. 그 세계 안에서 신부와 평신도는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난다. 같은 수도자라 해도 신부와 수녀의 차이 역시 일반적인 상상 이상이다. 신부는 많은 경우 섬기는 자라기 보다는 섬김받는 특권층이다. 같은 수도자인데도 수녀는 봉사와 순명이라는 미명하에 신부 가 하지 않는 허드렛일 을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도대체 예수라고 하는 사람은 세상에 와 서 낮은 이를 섬기다 가신 분이라고 가르치면서, 이러한 예수를 따르려 신부가 되었다는 사 람들은 그렇지 않아 보인다. 의도적으로 그러는 것이라기 보다는 구조적으로 그렇게 되어 있다. 신자들은 사제가 허드렛일을 못하도록 부추긴다. 그래서 처음 서원할 때의 결심과는 다르게 일단 신부복을 입게 되면 목이 굳어진다. 사제만 식자층이었던 서양의 중세 사회와 같은 시절이 아닌데도, 복종과 명령이 지배하는 봉건적 수직 사회가 아닌데도, 종교에서만큼은 통하지 않는다. 그동안 우리나라 가톨릭에서 는 평신도들이 신학을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전무했었다. 이제서야 평신도들도 신학을 공 부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나마도 천만 다행한 일이다. 하지만 아직도 요원 하다. 아무리 신학박사가 된다 한들, 그가 평신도인 한 제도권 교회 안에서는 쓰일 데가 거 의 없다. 무엇보다 신학교에서 가르치기 힘들다. 그저 당사자 스스로가 어렵사리 일을 만들 어나가야 한다. 간혹 평신도가 중요한 일을 담당하는 경우도 있지만, 찾다 찾다 그에 해당하 는 신부가 없을 경우, 아주 특수한 분야에서일 뿐이다. 말 그대로 예외적인 경우일 뿐이다. 평신도가 어찌 거룩한 신부를 가르칠 수 있겠는가 하는 분위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는 개신 교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신부든 목사든 배울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누 구에게서나 배워야 한다. 그것이 겸손한 자세가 아닌가? 그것이 예수가 그랬던 것과 같은 자기 비움의 자세가 아닌가? 신학은 이제 더 이상 사제나 목회자의 특권 학문이 아니다. 진정한 의미의 겸손이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며 베푸는 것이 아니라, 아예 으스댈 높은 자 리 조차 만들지 않는데 있다. 물론 어떤 개인을 탓할 일은 아닐 것이다. 제도권 종교집단이라는 구조가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신자들은 받들고 사제들은 누리도록 말이다. 스님들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스님 역시 본래는 신자들의 공양으로 빌어먹어야만 할 존재이지만,(비구/비구니는 빌어먹 는 자 라는 뜻의 범어 빅슈/빅슈니 의 음사이다.) 일단 승복을 입게 되면 다른 그 누구보다 가진 계층, 누리는 계층에 편입된다. 출가자들에게 도대체 부족할 것이라고는 없어 보인다. 출가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가 어떻게 사느냐와 상관없이 평생 삶이 보장되는 셈이다. 출가하는 것은 대단한 결심이고, 그를 위한 실천은 존중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출가는 수 행의 시작일 뿐이다. 끝없이 비워야 할 수행의 세계에서 애당초부터 쌓아놓고 시작하는 것 은 첫 단추부터 어긋난 꼴이다. IMF 한파에 퇴직 걱정, 밥 걱정하는 사람들과 대비된다. 일단 출가하면 먹고 사는 것에는 별 걱정이 없으니 말이다. 종교적인 차원에서 근심 걱정을 초탈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이다. 그러다 보니 조금만 능력있는 스님이라면 기도방이라는 명 분 하에 개인 토굴 을 챙기는 경우도 흔하다. 무소유는 커녕 사실상 이기적 축재(蓄財)인 셈 이다. 무슨 정신으로 어떻게 수행을 할 것인가? 승단의 정책 역시 출가자, 그것도 가톨릭과 조금도 다르지 않게, 비구 중심이다. 자연스 럽게 재가 불자는 물론 비구니까지 소외된다. 애당초 사부대중(四部大衆)으로 출발한 승가 사회가 왜곡되어 있다. 대학의 교수 사회도 승려들의 패권주의가 두드러진다. 재가자 교수 는 승려 밑에 줄서기에 급급하다. 교수 사회를 출가자 중심으로 하자는 논의마저 있는 실정 이다. 왜들 그러는지 모르겠다. 불교학도 학문인 이상 누구나 공부할 수 있고, 공부했다면 누구나 공부한 내용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그리고 출가자도 거리낌없이 재가자에게, 더 나아가 타종교인에게도 적극적으로 배워야 한다. 학문으로 승부하는 세상에 서는 학문을 잘 하는 사람이 대접받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그 래도 그리스도교(가톨릭, 개신교)에 비하면 어느 정도 융통성이 있기는 하지만. 약간 다른 이야기이지만, 우리나라 불교에서 이해하지 못할 것 중의 하나가 스님 이라는 호칭 문제이다. 스님이란 본래 스승님 에서 나온 말이다. 아주 높임말이고, 따라서 남에게 만 사용할 수 있는 말이다. 그런데 승려들이 남에게 자기 자신에 대해 소개할 때도 스스로 를 ○○스님 이라 부른다. 세상에 자기 이름에 님 자를 붙이고, 자기가 자기를 높이는 경우 가 있는가? 더욱이 자신을 낮추고 낮추어야 할 종교의 세계에서. 자기를 죽이는 수행을 하 는 수행자의 세상에서 말이다. 설령 자신을 높이려는 의도를 가지고 그러는 것은 아니라고 해도, 그것이 경우에 닿지 않는 말이라면 빨리 고쳐야 한다. 그저 자신의 이름(法名)만을 부 르면 될 일이다. 6. 무국적주의와 시대불감증 이러한 일들 외에도 우리나라에 있는 종교들의 국적이 의심스러울 때가 많다. 천주교인 은 자신의 국적이 로마인 것으로 착각하고, 학문도 서양 중세의 것을 복사하는 수준에 머무 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내 뒤에 로마가 있고, 수억의 신자가 있다는 사실에 내심 우쭐해 한 다. 21세기가 코앞에 닥쳤고, 모던, 포스트모던 논의마저 지리해진 마당에 불교학이라는 학 문은 19세기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 세계 불교학계를 주도하다시피 하는 미국 등의 학문적 흐름에 당췌 눈이 어두워 보인다. 불교학과 관련하여 한 가지 더 답답한 것은 왜 불자 중에 는 그리스도교를 전공으로 하는 이가 없는가 하는 점이다. 있다면 호교론적 차원이거나 호 기심 충족의 차원일 뿐, 제대로 된 의미의 학문적 수준을 갖춘 그리스도교 연구자는 거의 없 다. 도리어 전문적인 불교학의 깊이를 이해하고 전개하는 그리스도교인 불교 전공자가 눈에 띤다. 우리나라 불교를 구미에 전하는 이는 도리어 그리스도교인 불교 전공자이다. 이 얼마 나 부끄러운 노릇인가. 이른바 일본 교토학파(京都學派)에 속한 불교철학자들은 이미 일급 신학자 수준의 그리스도교학을 전개한다. 불교 언어를 19세기에 가두어두지 않고 21세기의 서양 학문사회에도 어울릴 전문적이면서 대중적인 언어로 바꾸어 놓는다. 그러니 서양 사람 들을 매혹시키는 창조적인 불교 철학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대오각성은 내적이고 심리적으로 일체중생실유불성 만 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산은 산, 물은 물 이란 일체 사물의 전적인 긍정이다. 진정한 타자 긍정, 참된 실유불성 이려면, 타종교 안에서도 불성의 움직임(性起)을 볼 줄 알아야 한다. 이슬람학에서도, 그리스도교 신 학에서도 사실상 부처를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그 사람들 만큼의 학문적 깊 이를 이루고, 그 신앙 세계를 이해해야 한다. 모든 불자가 그럴 수는 없다 해도, 진지하게 연구하는 불자를 통해 상대 종교의 세계가 충실히 소개될 수 있는 기회는 있어야 한다. 그 렇지 않고서는 결코 상대의 세계가 보이지 않고, 상대의 세계를 보지 못하는 한, 상대를 존중 한다면서도 언제까지나 자기의 언어만을 되뇌이게 될 뿐이다. 가톨릭이든 개신교든 젊은이를 필두로 신자들은 급격히 교회를 떠나가는데 무사태평하다. 도대체 100년은 커녕 10년 후의 일도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그저 시대가 악하기 때문이라 며 시대 탓만 한다. 신자들이 감소하고 있는 이유를 자신의 잘못에서 찾으려 하지 않는다. 자신이 변함으로써 세상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 종교든 신학이든 변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 각한다. 나 자신의 생김새가 변하고 생각이 변하고 언어가 변하는데, 어찌 종교가 변하지 않 겠으며, 그런 것들을 수단으로 하는 학문이 어찌 변할 수 없다는 말인가? 변하지 않는다고 고집해도 변하고, 변한다고 생각해도 변한다. 그러나 그 차이는 결정적이다. 불변을 고집한 결과의 변화는 언제나 시대를 주도하지 못하고, 그 뒤꼬리만을 잡는 소극적인 행동에 머문다. 변화야말로 시대와 학문의 속성일 수 밖에 없음을 진작에 깨친 사람은 그 변화 자체를 학문 의 내용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언제나 변화하는 현실을 신학이라는 학문 안으로 가져 와 정면 승부하고, 현실 자체를 신학화하는 적극성을 보여준다. 그래서 이런 이들의 학문이 언제나 시대를 선도(先導)하는 것이다. 7. 아늑한 듯 답답한 민족종교 그래도 천도교나 원불교와 같은 우리의 민족 종교는 다소나마 위안이 된다. 서구 사상과 문명이 이천년을 돌고 돌아온 자리를 이미 백년 전에 풍전등화와 같이 위태하고 보잘 것 없 는 반도 땅에서 예견하고 보여주었다는 사실에 자긍심도 느껴진다. 서구 종교, 그리고 기존 의 출가자 중심의 종교와는 달리, 여기서는 종파가 없고, 다른 종단에 비해 신분이나 성별간 의 차별도 적다. 물론 여전히 교령(천도교)이나 종법사(원불교) 혹은 상위 지도자는 주로 남 자에게 제한되어 있지만, 그래도 기성 종교에 비하면 한결 평등한 편이다. 이미 교리에서부 터 남녀동권(男女同權)을 선포하고 있다. 물론 이들 종단에도 문제점은 있다. 특히 천도교 는 무엇보다 과거의 영화만 되뇌이고 당췌 미래를 바라보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저 현 실을 추스리기에 급급해 보인다. 출가자나 사제 계층에 해당하는 사람이 없어 신분상의 차 별이 거의 없다는 장점이 있지만, 그러한 장점을 살리기 보다는 도리어 그것이 걸림돌이 되 어 정체해 있다. 책임감과 사명감을 가지고 포덕(布德)할 사람이 없으니, 점점 더 힘을 잃을 수 밖에 없지 않느냐 말하기도 한다. 이런 식으로 제도 탓을 한다. 하지만 제도가 언제나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다. 가령 일본의 신흥 불교인 릿쇼코세이카이(立正?成會)도 기본적으로 출가자가 없는 재가불교 단체이지만, 건실히 성장하고 있다. 교단의 지도급 인사 조차도 교회 밖의 자기 직업을 가지고서 종교생활을 한다. 그러나 자체 발표로는 이 교단 소속 신자가 600만에 이룰 만큼 큰 종단을 이루고 있다. 전임 포덕자가 없어서 종교 발전에 저해가 된다고 생각하는 천도교인이 있다면, 이 종교에서 한 번 배워봄직 하다. 유능한 젊은 이를 일본에 보내 이들과 함께 생활하며 배울 수 있도록 지원할 필요가 있다. 출가자가 없 이도, 사제 계층이 없이도 어떻게 발전할 수 있는지를 배우고서 미래를 대비해야 한다. 급격 히 노쇄해 가고 있는 현 흐름대로라면 미래는 암담하다. 젊은 사고, 미래적 사고로의 전환이 가장 강력히 요청되는 곳이 천도교인 듯 하다. 그저 과거의 영화만을 회상하는 수준을 하루 빨리 넘어, 급변하는 세계적 조류에 대처해야 한다. 젊은 생각이 힘을 얻을 수 있도록 배려 하고 지원해야 하는 것이다. 원불교는 천도교에 비하면 한결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모든 종교들을 한집안 식구로 보 는 교조의 앞선 가르침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느라 종교간 대화, 종교간 일치를 위해 동분서주 하고, 독창적으로 종교연합(United Religions) 운동을 펼치기도 한다. 이를 위해 어려운 상황 에서도 총부 차원에서 후원금도 낸다. 이러한 모습은 보기에도 멋있다. 가장 가능성있는 우 리 민족의 종교라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종교연합 운동이 대종사의 가르침, 교리적인 실천을 위한 것이라면, 똑같이 교리가 배타적으로 되어 있어서 참여하지 않는 것 과 진배없다는 사실까지 염두에 두어야 한다. 물론 이웃을 배타하는 태도에 비하면야 백배, 천배 훌륭한 자세이지만, 만에 하나 그것이 교리적인 실천을 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면, 어 차피 교리 라는 평면적 틀에 갇히기는 매한가지라는 말이다. 대종사님의 가르침을 확인하려 는 차원에서 하지 말고, 도리어 그 가르침을 버릴 각오를 하고서 해야 한다. 타종교에 대해 배우고 공부하지만, 자기의 이익을 우선적인 목적으로 하고서 하면 안된다. 도리어 자기가 깨질 각오를 하고서 배워야 한다. 그 때에만 자기가 참으로 살아나는 것이다. 진정한 의미 의 대화는 일체의 교리를 깨치려는 데서 시작된다. 자기가 깨져야 한다. 종교간 대화가 하 나의 교리라면, 그 교리부터 깨져야 한다. 개신교의 경우는 교리상 답답하고 배타적인 데가 많다. 도대체 몇백 년 후에까지 우리 사회 안에 살아있을지, 우리 사회 안에 종교적인 차원 에서 어느 정도의 자취를 남겨놓을지 현재로서는 단정하기 힘들다. 그만큼 아직 우리 사회 와 문화 안에 제대로 뿌리 내리고 있지 못하다. 그러나 그러다 보니 역설적이게도 그러한 사실을 자각하고 있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개신교의 편협함을 깨치려는 노력들도 제법 있다. 교리상 답답하고 배타적인 데가 많은 개신교가 어떻든지 생명력을 유지해 가는 것은 이런 사 람들 덕분이라고 생각된다. 종교의 세계는 기존의 틀을 깨치려는 사람을 통해 이어진다. 그 곳에서 생명력을 얻게 된다. 대종사의 가르침이 부정될 각오를 하고 실천할 때 대종사의 말 씀은 제대로 보이고 원불교는 진정한 원불교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 원불교는 지금 제도 적 종교로 나아가는 전환기인 것으로 보인다. 종교의 제도화가 피치 못할 것이라면, 제도화 에서 오는 폐해는 최소화해야 한다. 대다수 기성 종교들의 문제점은 제도화하면서 비롯된 것임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이다. 불교적 가르침의 핵심 역시 자기중심주의를 깨뜨리고 다른 이들을 자기 이상으로 돌아보 는 곳에서 성립된다. 불교는 어떤 굳어진 틀 안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살아움직 임에 있는 것이다. 자기(我)를 깨고 일체의 무집착을 실천하고자 하는 불교는 그 가르침에서 부터 대화적 태도, 다원적 태도의 한 복판에 있다. 무아, 무집착의 실천으로 부처님이 부처 님되신 것 아니겠는가? 하지만 이러한 가르침의 폭이 너무 넓고 깊어서인지 불자들은 도리 어 그 안에 갇혀버리는 것 같다. 넓고 깊은 이치가 도리어 도그마 가 되어, 도대체 자신을 깨뜨리려 하지 않는다면 지나친 오해이고 속단일까? 지옥에 있는 마지막 중생까지 구제하지 않고서는 성불하지 않겠다는 법장 보살의 서원을 되새겨야 할 때이다. 이것은 남을 차별하 는 자기중심주의가 남아있는 한 불가능하다. 넓고 깊은 부처님의 세계는 우리가 서있는 자 리 바깥에, 저 먼 곳에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그 가르침마저도 깨뜨 릴 수 있는 곳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기에 넓고 깊은 가르침인 것이다. 다양한 종교들 을 긍정하고 일체의 차별을 타파하는 것이야말로 오늘날 어울릴 뿐 아니라, 앞으로도 더욱 살려나가야 할 불교적 가르침이 아닐 수 없다. 배타적으로 외도(外道)를 만들어내는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그 외도의 길로 들어서고 마는 것이다. 삼라만상을 하느님의 피조물이라 말하면서도, 생겨난 것은 다 하느님의 말씀으로 말미암 은 좋은 것이라 하면서도, 도리어 그 좋은 것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그리스도교 중심적 조 건들은 타파되어야 한다. 초월적이고 무한한 하느님을 초라하게 만드는 행위는 참으로 비그 리스도교적이고 오만한 행위이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면서 하느님을 제 손 안에 가두어두는 꼴이다. 우상숭배하지 말라는 십계명을 실천한다며, 스스로 우상 숭배에 빠지는 꼴이다. 진 리를 독점하는 태도는 진리를 유한한 곳에 가두어두는 것이고, 유한한 곳에 가두어두기에 우 상숭배적 행위인 것이다. 참으로 우상숭배를 하지 않고,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않으려면 하느님이 모든 곳에서 일할 수 있도록 놓아드려야 한다.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 다 고 하는 예수의 말처럼, 곳곳에서 하느님의 일하심을 보고, 곳곳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보 아야 한다. 불교나 유교의 정신이야말로, 원불교나 천도교의 그 깊이야말로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는 적절한 장소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럴 때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교 로 살아날 수 있는 것이다. 8. 나오는 말 물론 모든 사람이 현실적으로 이와 같이 실천하기란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종교적 인 원리, 근거 자체는 워낙 심오하여 어떤 유한한 표현에 제한되지 않는 초월적인 것이지만, 인간이 이 깊은 종교적 체험을 표현하는 방식에서는 유한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 면 불자가 자신의 종교 체험을 불교적 원리에 따라 재단하고, 그리스도교인이 그리스도교적 원리에 따라 해석하는 행위는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저마다 자 신의 종교 안에서 최상의 모습을 보기 때문이다. 종교는 결국 하나라고 그 누군가 증언한다 해도, 그 하나됨 에 대한 이해가 종교 전통별로, 더 나아가 개인별로도 제각각인 까닭에, 그 러한 증언이 실제로 옳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자기의 세계관을 기초로 듣고 이해할 수 밖에 없도록 틀지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 마당에 종파주의, 자기중심주의는 필연 적인 결과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정당하다는 뜻은 더욱 아니다. 종교들의 세 계는 깊고 넓지만, 유한한 인간적 실천으로 나타나는 것인 한, 언제나 더 낳은 가능성에 개방 되어 있어야 한다. 유사 이래 인간이 언제나 인간에게 문제덩어리였듯이, 종교 역시 종교인 에게 문제덩어리일 수 밖에 없다. 21세기의 종교는 이러한 문제 의식을 가지고, 그 문제의 심부에까지 들어간 이들이 주도하게 될 것이다. 아니 그렇게 되어야 할 것이다. 종파주의, 자기중심주의를 부수면서도, 그렇게 부술 수 있는 능력에 의해 자신의 고유성과 정체성을 인 정받게 되는 깊은 가르침과 그 실천이 요청된다. 미래 한국 사회의 문화적이고 정신적인 통 합도 이 만큼 깊고 넓은 종교에 의해 이루어지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사랑하기 때문에 미 워한다 는 어느 유행가의 가사처럼, 종교적 깊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주변의 치부도 드 러내보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