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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holic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워싱턴사과)
날 짜 (Date): 1999년 1월 20일 수요일 오전 10시 24분 38초
제 목(Title): 참세상/김정호 다양성에 대한 인정 


미국을 보는 눈(USA 1) [23/22]
제목:다양성에 대한 인정
올린이:amdg77(김정호)  99.01.20 07:20:40  조회: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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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얼마나 다양한 문화가 있고 삶이 있는지 모르겠다.
오늘은 내가 몸을 담았던 신학교 이야기를 하고 싶다. 신학교를 다녔다는 
것에서도 보여지듯 기독교 신학은 내 전공이다. 하지만 나는 나 자신이 
특별히 어느 종교에 매여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비록 기독교라는 테두리 
안에 매여있지만 사고는 자유롭다고 생각한다. 이른바 제도화된 교회에 
있다는 현실적인 한계가 있지만 그래도 생각만큼은 누구보다 자유롭고자 
한다.

나는 어릴 때는 불교도인 삼촌의 영향을 강하게 받으면서 성장을 했고 
청소년기는 천주교에 몸을 담았으며 잠깐이기는 하지만 한때 민족종교에 
깊이 공감했던 적도 있다. 대학시절부터 이른바 개신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아주 보수적인 교단부터 맑시즘에 입각한 급진적 기독교까지 두루 
경험하였고 또한 해방신학과 민중신학의 세례를 받기도 했다.

이런 이력으로만 본다면 내가 종교를 두루 섭렵하면서 진리를 찾아 헤매는 
무슨 구도자 같지만 사실은 한 곳에 오래 집중을 하지 못하는 성격이 
종교편력에도 그대로 반영이 된 것이다. 어쨌든 지금은 현실적인 필요에 
의해서 개신교단 중의 하나인 감리교에 몸을 담고 있다.

덕분에 미국에서 신학을 공부했던 곳도 감리교 최대 신학교 중의 하나인 
에모리 대학교였다. 기독교의 분위기를 접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기독교 
자체가 상당히 배타적이다. 그러나 이런 배타성을 욕할 것은 없다. 
왜냐하면 종교는 원래 그런 것이다. 종교는 기본적으로 개방적이고 
포용적일 수가 없다. 물론 종교 중에는 개방적으로 보이는 것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것도 겉보기 일 뿐 조금만 안으로 들어가면 결국 자기네 
종교를 믿어야 구원이든 뭐든 일이 풀린다고 주장한다. 

특히 한국의 기독교는 그런 배타성이 유별난 편이다. 내가 다른 나라의 
기독교 분위기가 어떤지 알턱이 없지만 적어도 미국의 기독교와 비교하면 
그런 성향이 더 두드러진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많겠지만 아직도 
기독교인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상당히 부정적일 것이다. 이것은 
자업자득으로 아무리 기독교인들이 못난 몇몇을 보고 전체를 매도하지 
말라고 우겨봐야 소용이 없다. 그런 고착된 이미지를 만들어 놓기까지 
얼마나 분탕질을 쳐놓았는지 본인들이 제일 잘 알테니까 말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한국 교회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는 성장에 대한 
신화이다. 교회 물을 조금 먹은 사람들은 신도 100명을 가진 목사와 
1000명을 가진 목사의 끝발이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잘 알것이다. 기독교에 
대해 전반적인 이해를 하고 싶다면 역설적으로 김용옥 교수의 [나는 불교를 
이렇게 본다]라는 책을 일독할 것을 권한다. 음... 그리고 이 책에 
나와있었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어쨌든 김용옥 교수는 한국 
기독교의 폭발적인 성장의 비밀을 한마디로 요약한다. 한국 개신교의 
성장은 "미국의 지원에 의한 독재정권의 팽창기와 정확히 일치"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한국 개신교의 태생적인 비극이 있다. 아무리 성장의 신화에 대한 
기독교적 근거를 읊어봐야 그 성장은 결국 남한 자본주의의 기형적 성장의 
산물임을 부인할 수는 없는 것이다. 기독교의 몸을 담고 있는 사람으로써 
이를 부인하고 싶지만 그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잠시 샛길로 샜는데 내가 미국에서 다녔던 신학교 이야기로 돌아가고자 
한다. 이 학교는 진보적임을 자처하는 사람들에게는 보수적이라고 욕을 
먹고 정통보수적임을 자처하는 사람들에게는 리버럴하다고 욕을 먹는 
학풍을 지녔다. 기독교식으로 얘기하면 뜨겁지도 차지도 않은 셈인데 
학풍은 그렇다고 치고 한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우선 신약학을 가르치는 한 교수는 미국에서도 손꼽히는 사람인데 원래 
카톨릭의 신부였다가 뛰쳐나와서 애가 다섯 딸린 과부하고 결혼한 
사람이다. 그리고 한 과목의 교수는 그리이스 정교회(Greek Orthodox) 
신부다. 대학원을 마친후 박사를 최단기간에 바로 받고 교수로 특채된 한 
여자 교수는 소아마비로 장애인 신학(?)이라는 것을 한다. 신학교 안에 
게이/레즈비안 학생회가 버젓이 있고 불교 선모임이 학교 교회 안에서 
벌어진다. 한달에 한 번 꼴로는 유대교 예배를 위해서 학교 교회 본당을 
빌려준다. 

이렇게 말하면 그게 뭐 어떻다고 대단한 것인양 떠드냐고 할지 모르지만 
기독교 물을 조금이라도 먹은 사람들은 이게 얼마나 희한한 일인지 잘 알 
것이다. 이 학교는 전혀 진보적이지도 않고 꼴보수도 아니고 그냥 좌도 
우도 아닌 중간에 해당하는 적당하고 무난한 분위기를 지닌 학교인데도 
가급적이면 모든 것을 포용하려는 자세가 되어있다는 것이다.

내가 미국 생활을 하면서 이 나라에게 가장 두려움을 느끼고 우리가 쉽게 
쫓아갈 수 없다고 느낀 것이 이 다양성에 대한 인정이다. 물론 여기에는 
개인주의가 바탕되어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가진 생각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나도 상대의 생각을 인정해야 한다는 사고는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더 많은 것을 흡수, 포용할 수 있는 무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다양성에 대한 몇 가지 예를 들고 싶다. 같은 학교 박사과정에 
스리랑카에서 온 27살 된 여자가 있다. 기독교 사회윤리가 전공인데 
국제분쟁에 대해서 박사논문을 쓰고 있다. 여기까지만 보면야 대단할 것도 
없다. 하지만 그 박사논문을 위해서 지난 3년간 틈만 나면 국제분쟁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다면 얘기가 틀려진다. 

내가 제일 친한 미국 백인 친구 중에 같은 학교에 다니던 패트릭이라는 
나보다 한 살 어린 녀석이 있다. 미국 연합감리교 세계 선교국 소속인데 
학부 시절에는 오페라 이론을 전공을 한 엉뚱한 이력을 지녔다. 목사 
아들이기도 한데 7년간 세계 40개 국을 돌아다녔다. 물론 세계 선교국 
소속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이 었다. 자기 돈은 거의 안쓰고 돌아다녔으니 
현명한 놈이다. 이 친구는 진정한 기독교는 한 손에는 성서, 다른 한 
손에는 신문이 있어야 한다고 진짜로 굳게 믿고 CNN에서 뉴스원고를 쓰는 
아르바이트를 3년째하고 있다. 여기까지만 보면 특이할 것도 없지만 이 
친구도 주로 기아와 내전으로 나라가 거의 망해가는 나라들 만 40개국을 
돌아다녔다. 러시아 선교사나 중국 선교사니 하고 나가서 초코파이나 
주면서 괜히 순진한 사람들 데려다가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하는 우리나라 
선교사들과는 차원이 틀린다.  

내 말의 핵심은 내가 대학시절 귀가 닳도록 들었던 '이론과 실천의 
결합'이라는 명제가 아주 자연스럽게 자본주의의 첨단을 달리고 있는 
미국에서 실천되고 있고 그것은 다양성을 인정하는 사회분위기에 의해서 
장려되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사회는 다양성을 추구하려는 노력을 
가급적이면 존중하고 키워주려고 한다. 나는 내가 경험했던 분야에서만 
이야기하지만 다른 분야들의 분위기도 대체적으로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미국인들의 이런 역량은 정말 우리가 하루 아침에 따라가기가 어렵다고 
생각한다. 

또다른 예를 들자. 나하고 같은 토론그룹에 있었기에 간혹 만나서 술친구를 
하는 25살 난 러시아 출신의 여자애가 있다. 이 여학생은 이슬람교의 
법사상에 대한 기독교적 조명이 연구주제인데 이번에 학교측의 주선으로 구 
소련 연방에 속하던 우즈베키스탄 등 중앙아시아 국가들을 돌면서 
정부관리들을 만나서 이슬람교의 법사상에 근거해서 그 나라들의 
인권문제에 대해서 신랄하게 비판을 하고 왔다. 기독교 신학교에서 
이슬람의 종교사상을 연구하는 한 러시아 출신 여학생을 위해서 학교가 
왕복 항공료 줘 가면서 중앙아시아로 보낸 다는 것이 놀랍지 않은가?

우리나라 같으면 신문에 작은 기사로 나올만한 일들이 미국 남부 시골의 한 
신학교에서 그냥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것이다. 내가 언급하고 있는 곳이 
'신학교'라는 것을 기억하기 바란다. 이곳은 맑스가 아편이라고 했던 
기독교를 연구하고 가르치는 곳이다. 기본적으로 배타성을 띤 종교를 
가르치는 곳이기에 충분히 경직될 수 있고 자기 한계에 매몰될 수 있는 
이곳에서도 이 정도들을 하니 사회와 밀접하게 연관된 다른 학문분야는 
어떻게 학생들을 훈련시키고 있는지 모르겠다.

미국은 이렇게 다양성에 대한 인정을 통해서 여러가지 가치를 수용할 수 
있는 훈련을 시키고 있다. 물론 이것은 이민자로 구성된 나라이기 때문에 
불가피한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미국이 이렇다고 해서 다양한 가치가 다 
존중되고 목소리를 낼 수 있다고 볼 수도 없다. 모든 다양한 목소리를 체제 
내화 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임을 또한 간과해서는 안된다. 소수의 목소리를 
들어주는 척하기에 불만이 있는 소수가 반항의 의지를 미리 상실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1960년대 흑인들의 격정적인 투쟁이 금방 체제 
내화해버리고 그 힘을 상실해 버린 것이 그 한 예이다. 

어쨌든 다양성의 인정과 다양성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성장시키려는 미국의 
사회적인 분위기와 문화적인 역량은 상당히 오랜 시간 축적된 것으로 
우리가 쉽게 쫓아가기 어려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말지의 오연호 
기자가 쓴 "그래도 미국이 망하지 않는 이유"라는 글을 읽었던 기억이 
나는데 오연호 기자도 같은 이유를 들었던 생각이 난다. 친미, 반미, 
용미의 기준은 사실 애매하다. 하지만 친미를 제외한 반미와 용미는 우리의 
주체적인 역량이 있을 때 가능하다. 우리는 이 나라의 이런 사회적, 문화적 
역량을 능가할만한 그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는가?

                                        머나먼 미국에서 조국을 그리며~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 "활쏘기는 군자의 덕성과 비슷한 바 
가 있으니, 활을 쏘아 과녁을 벗어나더라도 오히려 그 이유
를 자기 몸에서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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