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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쓴 이(By): Dooly (넬로섭머린)
날 짜 (Date): 2000년 10월  1일 일요일 오후 12시 17분 05초
제 목(Title): 동아일보에서: 트뤼도전수상..


캐나다 前수상 트뤼도 타계]오늘날의 캐나다 만든 '멋쟁이' 


 
  28일 피에르 엘리옷 트뤼도 전 캐나다 수상이 타계했다. 사인은 전립선암, 그는 
지지자들 사이에는 ‘존경하는(The Right Honorable)’이라는 수식어와 캐나다를 
국가답게 이끈 인물로 평가받고 있는 반면, 반대파들에게는 ‘캐나다를 빚더미에 
올려놓은 인물’ 또는 ‘퀘벡 문제에 해법을 찾지 못하고 물러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트뤼도 전 수상은 세계 1차대전 포성이 사그러져가던 1919년 10월18일 퀘벡주 
몬트리얼의 프랑스계 백만장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20대 시절 하버드대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프랑스 파리 정치대학원, 런던 경제대학원을 다닌 그는 43년 약관 24세의 
나이에 퀘벡 주법원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한다. 동시에 사회적 활동과 학구열을 
불태우며 30대까지 시간을 보낸다. 

◇정계입문 3년만에 수상에 취임 

고향 퀘벡주의 정치,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50년 잡지’시떼 리브레(Cite 
Libre)’를 창간하고 여행과 저술활동을 벌인다. 그가 추구했던 사회적 가치는 
자유주의에 가까웠음에도 그의 외양적인 모습은 급진주의자로 비치기도 했다. 

그는 65년 정치에 입문, 그해 하원의원에 당선된다. 67년에는 레스터 피어슨 당시 
수상이 그를 법무장관에 발탁, 낙태 동성애 이혼에 유화적인 형법 개정안 도입으로 
주목을 받는다. 결국 정계입문 3년만인 68년 자유당 당수로서 15대 캐나다 수상에 
취임하고 잇따른 총선에서 다수파로 공식적인 임기를 시작한다. 이때부터 트뤼도는 
79년까지, 80년부터 84년까지 두 차례 캐나다 수상으로 집권한다. 

◇영원한 화두 퀘벡 

캐나다 수상으로서 그는 현재의 캐나다를 만들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취임이후 최대 현안은 갈수록 분리독립으로 치달아가던 ‘퀘벡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수상취임 1년만인 69년 공용언어법을 발표, 당시까지 차별받던 불어를 
영어와 함께 캐나다의 공식언어로 지정했다. 

그러나 이같은 그의 노력은 70년 ‘10월 위기’라는 장애물에 봉착한다. 
급진테러조직인 퀘벡해방전선(FLQ)은 몬트리얼주재 영국무역조정관과 퀘벡주 
노동장관 라포테를 납치한다. 이들은 현금 50만달러와 FLQ 테러범 23명의 석방을 
요구했지만, 트뤼도는 이 제안을 거부하고, 오타와와 몬트리얼에 군대를 진주시켜 
수많은 FLQ 협조자들을 체포한다. FLQ 테러범들이 라포테 장관을 살해하고 
무역조정관은 석방한 후 그해 12월 쿠바로 망명해 사태는 일단락된다. 

그러나 분리주의 운동은 계속되어 퀘벡당의 르네 레베스크가 76년 주 수상이 된 후 
80년에 ‘퀘벡의 독립을 연방 정부와 협상하는 문제’로 주민투표를 실시했다. 
이같은 시도는 트뤼도의 집요한 국민통합의 호소속에 주민 60%의 반대로 
부결되었다. 

72년에는 마리엘 맥퀸 퍼거슨 여사를 상원 연사로 임명했다. 정치는 남성의 
것이라는 인식이 퍼져있던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조치였다. 이에 고무된 많은 
여성들이 정계에 등장하게 됐고 그는 은퇴하던 84년에는 여성을 연방총독에 
지명하기도 했다. 

◇’반미수상’ 트뤼도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70년대초에는 베트남 참전에 반대, 징집을 거부한 미국 
젊은이들이 캐나다 국경에 몰려와 망명을 요구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닉슨 미국 
대통령은 발끈해서 국경에서 징집연령을 판단해 군복무를 피해 도망간 청년들을 
내어놓으라고 요구했다. 이에 대해 트뤼도 수상은 닉슨 앞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썼다. 

“대통령 각하. 캐나다는 미국과는 다른 나라임을 분명히 해둡니다. 캐나다는 
평화를 사랑하고, 개개인의 선택의 자유를 인정하는 나라입니다. 젊은이들의 
선택에 귀를 기울이기 바랍니다. 귀하의 나라는 패전의 늪에 빠지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의 ‘악담’이 씨가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미국은 베트남 전에서 패하고 닉슨은 
워터게이트 스캔들에 휘말려 불명예퇴임하고 만다. 

트뤼도는 70년 미국에 앞서 중국과 독자적으로 수교를 맺고 71년 구 소련의 코시긴 
수상과 회담을 갖고, 76년에는 쿠바를 방문하는 등 자주적인 외교노선을 걷기 
시작한다. 

캐나다 건국이래 미국과 가장 사이가 벌어진 게 이 시기이고 국민들이 자주외교에 
카타르시스를 느낀 것도 역시 트뤼도 집권기였다. 75년에는 인플레로 인한 
경제위기를 맞아 ‘가격 및 임금관리법’을 실시해 사회보장제도 및 사회주의적 
자본주의의 기틀을 마련했다. 76년에는 당시까지 G6였던 G7 정상회담에 캐나다 
수상으로는 처음 참석, 캐나다의 국제적 위상을 한껏 드높였다. 

◇’완전한 독립’을 쟁취하다 

78년 6월 트뤼도는 연방하원에 신헌법 제정안을 제출한다. 지루한 논쟁 끝에 81년 
11월 퀘벡주의 반대 속에 연방 및 주 수상회의에서 대타협이 성립되어 82년 3월 
영국의회가 승인하였으며, 이를 4월17일 엘리자베스 2세 영국여왕이 오타와에 와서 
직접 서명, 공포함으로써 캐나다 최초의 헌법이 발효되었다. 

이로써 영국 여왕을 상징적인 국가원수로 하는 영연방의 일원으로 존속하는 한편, 
영국과의 기존의 법적 종속관계를 완전히 청산하여 명실상부한 주권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82년 인권헌장(Charter of Human Rights)제정도 트뤼도의 
작품이었다. 

◇멋쟁이 수상 

추남에 가까운 외모지만, 트뤼도는 자유분방한 면모와 파격적인 언동으로 인기를 
끌었다. 인간으로서의 트뤼도는 늦장가를 든 이혼남이며 세 아들의 아버지였다. 
그는 71년 만 52세에 30세연하의 마가렛 싱클레어와 결혼했다. 재임중 이뤄진 그의 
결혼은 ‘수상의 로맨스’로 국내에서 많은 관심을 끌기도 했다. 

그의 거칠 것 없는 언사는 과거 캐나다 수상들의 우중충한 형식과 체면을 걷어내고 
국민들에게 정치를 친숙한 화제로 끌고 갔다. 결혼을 통해 트뤼도는 세 아들의 
아버지가 되지만 77년에는 별거를 선언하고 84년 결국 이혼을 하게 된다. 

동시에 84년은 그에게 은퇴의 해였다. 사회보장제도를 정비하면서 캐나다 
연방부채가 크게 늘어난 것이다. 은퇴당시 정부 적자는 385억 달러로 취임당시의 
균형예산에서 한참 벗어나게 되었다. 정적들은 이 문제와 퀘벡문제를 집중공격, 
그에 대한 국민적 지지가 식어갔다. 한때 트뤼도매니아라고 지칭되는 광적인 
지지를 받던 그는 결국 정계에서 물러난다. 

◇만년의 트뤼도 

그러나 트뤼도는 퇴임후에도 ‘음지’에서의 왕성한 활동으로 국민들의 변함없는 
사랑을 받았다. 93년에는 회고록을 집필, 7·80년대 만난 세계의 지도자들, 특히 
냉전적인 사고의 미국 대통령들-닉슨, 레이건-을 비판하기도 했다. 대처 
영국수상을 '레이건의 나팔수'라고 대놓고 비판하기도 했다. 

94년 6월 독일 드레스덴에서 열린 제12차 전직정부수반회의(IAC)에 참석해서는 
“강대국들이 
갖고 있는 핵무기에 대해서는 아무말도 않고 북한의 핵개발에 대해서만 흥�
槿求윰치굅� 말해 이목을 끌기도 했다. 

98년 11월 트뤼도는 아들 마이클의 실종으로 큰 마음고생을 겪는다. 막내아들 
마이클은 스키를 타던 중 눈사태를 만나 실종됐으며 나중에 사망한 것으로 
판명됐다. 

올 7월에는 파킨슨병에 걸린 사실이 알려지고, 9월초에는 폐렴으로 와병중이라는 
소식이 들리더니 결국 28일 새벽 전립선암으로 사망한다. 영국으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을 쟁취하는 등 캐나다의 자주성 확립에 크게 공헌한 트뤼도는 이제 역사의 
인물로 남게 되었지만 그의 자유분방한 스타일과 진보적 사고는 고답적인 캐나다의 
이미지에서 벗어난 새로운 캐나다의 모습을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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