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anaDA ] in KIDS 글 쓴 이(By): Dooly (넬로섭머린) 날 짜 (Date): 2000년 6월 1일 목요일 오후 04시 55분 22초 제 목(Title): 캐나다 연방공무원 난 얼마전 이곳 캐나다 연방정부내의 한 부서에 잡을 잡았다. 그동안 두번의 외교관공채시험의 낙방도 경험했고, 또 한번의 경제관련부서의 공채에서도 떨어져봤다. 사실 외무성의 외무 공무원공채에 응시한다는것은 나같이 20대 중반에 이민온 이민 1세로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냥 응시를 했었다. 경험도 쌓고, 또 시험 보는데 돈이 드는것도 아니고해서... 결과는 예상했던대로 낙방. 생각보다 쉬운 필기시험은 합격해도 Ranking에서 밀려 외무성에서는 인터뷰조차 받아보질 못했다. 경제관련 부서는 어느나라나 우수한 인력들이 모이기 마련인지, 인터뷰가 여간 까다로운게 아니었다. 약 2시간정도이어지는 인터 뷰에서, 처음 20분간은 간단한 프레센테이션을 시키기도 하고, 나머지 시간동안은, 개별면접과 패널들의 집단 면접으로 개인의적성과 성향 그리고 전공지식에 기반을둔 분석문제를 중심으로 지루하게 이루어진다. 영어가 짧은 나로서는 여간 곤혹스러운 일이 아닐수 없었다. 사실 영어를 한국말처럼만 할수있다면, 오히려 면접을 즐기며 할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어쨌든 내게는 정말 다시는 하고싶지 않을정도로 식은땀과 바짝 타오르는 목, 그리고 무엇보다 흡연욕구때문에 고통스러운 두시간이었다. 또다른 부서의 인터뷰도 약 두시간정도 진행 되기는 했지만, 내 전공인 경제쪽 보다는 비지니스에 가까운 일을 하는 부서여서인지, 질문도 좀 general했고, 무엇보다 몇번의 인터뷰경험 때문인지, 별로 떨지않고 대충 엉터리 영어이긴 하지만, 할말을 다하고 나왔다는 느낌이 드는 인터뷰였다. 그래서인지, 어느정도 기대를 하고있었지만, 결과를 기다 리는 두달동안은 내내 불안하기만 했다. 작년 9월에 지원을 하고, 10월말에 3가지 시험을 치르고, 3월에 인터뷰, 장장 8개월간의 지루한 기다림끝에,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리던중, 경제관련 부서와 다른 부서 모두에서 offer가 왔다. 처음 offer를 받곤 곧바로 다른 부서에 전화를 해 합격여부를 문의 했더니 offer를 주겠다고 했다. 너무 기뻐 마음을 억누르기 위해 아내에게 말도 하지 않고, 거리로 뛰쳐 나가 한참을 걸었다. 마음을 가다듬고 약 한시간후 집으로 돌아오니, 아내가 애써 실망감을 감추며 위로의 한마디를 건넸다. "괜찮아요..그냥 계속 공부 하지 뭐...난 박사학위가 더 좋은것같아..." 앞으로 2년후면 박사학위를 받을수있는데, 난 지금 잡을 잡아 학위를 접기로 한것이다. 사실 전공에 대해 정열을 잃은지 오래 되었는데, 그런 나의 모습을 아내에겐 별로 보이질 않고, 다만, 애는 커가는데, 먹고사는게 빠듯하여 잡을 잡는다는 인상을 주곤 했다. 갑자기 전화를 받고 뛰쳐나가 한시간 만에 돌아온 나를 보자 아들녀석이 장난을 걸 심산으로 나에게 뛰어와 "아빠~" 하며 아주 세게 안겼다. 내가 아픈척 아들 녀석을 안고 뒤로 쓰러지는 시늉을 하자, 내가 쓰러지는 척 할때마다 늘상 그래왔듯이 이녀석이 "아부라 카다부라 얍!" 하고 주문을 외쳤다. 녀석의 주문에 벌떡 일어서며, "여보, 나 취직했어..이제 맛있는거 많이 사줄게!" 했더니,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하며, 재차 확인을 한 아내가 마침내 펑펑 울기 시작했다. 결혼후 처음으로 남편노릇한다는 생각에 우쭐해져서 "근데 한개도 아니고 두군데나 취직이 낮는데 어떻하지?" 라고 말했더니, "둘다 됐어요? 정말? 한군데는 인터뷰 너무 못했다고 했잖아!" 하며 울다가 웃음을 비췄다. "어! 울다가 웃으면 똥꼬에 털나는데...한번보자 응, 어디 한번보자" 하며 아이와 더불어 세식구가 소파에서 뒹굴며 기뻐했다. 난 경제부서를 과감히 포기하고, 다른곳으로 가기로 정했다. 내자신이 그리 우수한 인재도 되지 못할뿐더러, 똑똑한놈들 가운데, 기죽기도 싫고, 무엇보다 공무원의 본분인 '게으름'이 용납 안되는 그 부서의 분위기와 인터뷰때 만났던 면접관들의 엘리트 의식이 부담 스러웠다. 왜냐 하면 누구보다도 내자신이 그렇지 못하다는것을 내가 잘알기 때문이다. 이제 다음주에 첫출근이다. 벌써부터 그 부서의 여직원은 내게 전화할대 이름앞에 Mr.란 호칭을 빼고 First Name을 부르며 친근감을 표시한다. 난 그와 전화통화를 할때면 가능한한 말을 적게하고 듣기만 한다. 왜냐 하면 내 액센트 섞인 엉터리 영어로 시작전부터 이질감을 심어주기 싫 어서이다.(그 부서엔 아마도 내가 유일한 유색인종이 될것같다) 사실 따지고 보면 캐나다에서 연방정부 공무원이라는것 별건 아니다. 보수도 그렇고, 또 요즘같이 경기가 좋은때엔 우수한 사람들은 보수면에서 월등한 private sector로 많이 빠지기 때문에, 그리 엘리트 집단도 아니다. 그런데, 내게는 꽤 큰 의미가 있다. 굳이 혼자만의 자부심인지는 몰라도, 인맥으로 쉽게 들어가는 특채가 아닌 공채로 인문계통의 중앙부서에 맨땅에 헤딩하는 심정으로 정면돌파하여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것도 떼떼 거리는 영어로...아마 이글을 읽는 사람들 중엔, 별것도 아닌것 가지고 되게 좋아하네 하며 말할 사람도 있을것이다. 그래도 난 좋다. 난 내 노력으로 당당하게 뽑힌거니까.... 마음이 어느정도 가라앉은 나와 아내는 계산기를 두드려 앞으로의 생활을 계획해 봤다. 여전히 빠듯한 예산이 나왔다. 그러자 아내가 나몰래 광섬유를 만드는 공장에 이력서를 내곤 인터뷰를 한것이다. 아내도 이젠 얼마후부턴 공장에 '공순이' 로 출근을 하게된다. 나는 말리고 싶었지만, 기쁜마음으로 일을 하겠다는 아내의 마음이 고맙고, 무엇보다 캐나다생활에 자신감을 얻은것 같은 아내의 모습이 보기좋아 그냥 슬쩍 허락을 하고 말았다. "어이~ 공순이.." 하고 놀릴때면 "같은 공자 돌림끼리 그러지 맙시다"하며 맞받아치는 여유 가 그리 싫어 보이진 않아 보인다. +++ 내가 좋아하는 비틀즈의 Yellow Submarine을 Philip이는 '넬로섭머린, 넬로섭머린~' 하며 따라 부릅니다. 그래서 '넬로섭머린'입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