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YonSei ] in KIDS 글 쓴 이(By): Athena (유니콘) 날 짜 (Date): 1997년06월15일(일) 22시14분55초 KDT 제 목(Title): [연세춘추]80년, 그 후로 17년이 흐른... 80년, 그 후로 17년이 흐른 5월의 광주 망혼은 묘역에, 진실은 역사에 김진태 기자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비극적이고 추악한 상처를 간직하고 있 는 도시이며 민중항쟁의 서사시를 역사에 기록하고 있는 도시 광 주의 첫인상은 평온했다. 도청 까지 쭉 뻗은 금남로 주변은 깔끔 한 번화가의 풍경이었다. ‘애국가’와 ‘정의가’를 부르고 ‘비상계엄해제’와 ‘전두 환 퇴진’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했던 시민들로 가득 메워졌었 을 금남로에는 지금 세일을 알리는 상인들과 한가로워 보이는 사 람들의 움직임으로 분주하기만 했다. 하지만 “금남로는 오월항 쟁 전기간 동안 광주시민의 시위와 전투의 중심 근거지였으며 시 민의 발길과 공수부대의 잔인한 학살로 피바다를 이루었던 곳이 다”라는 광주 YMCA 최정남 간사의 설명에서 그 때의 상황을 어 렴풋이 나마 짐작할 수는 있었다. 한편 금남로를 쭉 따라 열리고 있는 광주 민중항쟁 17주년을 기념하는 거리미술전 『만인의 얼 굴』에는 광주 시민들의 5·18에 대한 열의가 가득했다. “살아 남은 자의 부끄러움으로 너를 위대한 도시라 찬양하기에는 아직 우리의 입술이 무겁기만 하다.” 어느 대학생이 그린 그림에 쓰 여있는 먹색 글귀에서 꽃잎처럼 떨어진 광주항쟁의 핏자국이 아 직 마르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광주민중항쟁의 10일동안 귓전을 때렸을 시민군과 계엄군과의 총성 소리도, 항쟁기간 걸려있었다는 옥상 태극기위의 검은 리본 도 그 자리에 없었지만 도청은 광주 항쟁의 상징으로 그 때 그 자리에 있었다. 연일 대자보로 쓰여진 새로운 소식과 사망자 명 단이 붙고, 공식적인 시민의 언론매체였던 ‘투사회보’가 나붙 었던 도청 주변 담벼락에는 장미 덩굴이 대신 둘러 싸여 있었다. 시민군의 본거지였던 도청 안쪽은 폭이 2미터도 채 안되는 계단 과 협소한 공간, 금남로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옥상 등이 을씨 년스럽게 보존되어 있었다. 하지만 청사 안쪽에 걸려있는 사진은 실망스럽게도 광주·전남지역의 발전상을 알리는 한라 조선소의 거대한 모습이었다. 외형적으로 볼 때 광주시민들은 5·18을 기념하기 위한 다양한 행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민간주도의 거리음악제, 특별사진전, 5 ·18 일일체험학교 등 총 30여개가 넘는 행사가 5월 한달에 걸쳐 치러지고 시청에서도 행사지원금으로 1억 5천만원을 보조하고 있 었다. 작년부터 오월의 행사가 거리 시위와 대규모 집회에서 추 모제, 문화·예술제로 상당 부분 변형되고 금년부터 5·18이 국 가 기념일로 지정되면서 민·관의 협조하에 행사를 치러내고 있 는 것이다. 80년 5월 계엄군에 의한 무자비한 시민 학살이 자행된 광주에 서는 사망자 1백54명, 행방 불명자 47명, 부상자 2천7백11명 등 총 3천4백21명의 인명피해가 발생한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이들 은 정부에 의해 ‘폭도’, ‘국가전복을 노린 불순한 세력’으로 낙인되었으며 이로 인해 당시 사망한 사람들은 쓰레기차, 손수 레, 달구지 등에 폐기물처럼 실려 망월동 야산에 버려졌었다고 한다. 그나마 문민 정부 출범 이후 외형적으로 ‘역사바로 세우 기’, ‘5·18특별법제정’이 이루어지고 ‘5·18묘지 성역화 사 업’이 진행되면서 망월동 묘역은 ‘5·18민중항쟁묘역’이라는 이름으로 새 단장을 하고 있었다. 민주의 문이라 명명된 출입구를 지나 민주광장, 추념문, 참배 광장까지 이어지는 길을 따라 가다보면 마지막에 40여미터의 5· 18민중항쟁추모탑이 서 있었다. 구묘지에 있던 시신 1백22구는 추모탑 뒤의 신묘지로 이미 이장된 상태였다. 구묘지와 신묘지를 잇는 길을 따라 진행되는 5월 영혼 띠잇기와 돌탑쌓기 행사가 참 배객들의 눈길을 끌었다. 초등학생부터 애엄마, 할아버지까지 참 배객들이 써놓은 쪽글은 신묘지에서 구묘지 입구까지 이어져 있 었다. “우리의 아이들에게 전하겠습니다. 5월이 얼마나 큰 용감 함이고 또 얼마나 큰 희망인가를... (두암 주공 아파트 109 -1201 김혜주.)”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 른 한켠에서는 사진전과 당시 현장의 다급함을 알리는 녹음테입 이 돌아가고 있었다. 아빠를 따라나온 듯한 어린 아이는 시민을 향해 무자비하게 곤봉을 내리치고 있는 공수부대원을 가리키며 “아빠, 저 사람이 아빠가 말한 나라 지키는 좋은 사람이야?”라 고 물었다. 역사를 왜곡하고 망각해 온 일본을 상대로 독설어린 비난을 해왔던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얼마나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으며 우리의 사회는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가 하는 자문을 하도 록 만드는 대목이었다. 하지만 정치권에서 전두환·노태우씨의 사면이 언론을 통해 조 심스럽게 흘러나오고 있는 지금의 현실이 망월동에 오기 위해서 투석전을 벌여야 했던 과거에 비해 얼마나 달라졌던가. “국민 대화합으로 가장한 전·노사면이 오월 항쟁의 정신과 의의를 전 면적으로 부정하는 반역사적 행위임을 인식한다면 아직 만족하기 에는 이르며 오월의 행사를 축제 분위기로 몰고가는 것은 문제 의 본질을 비껴가는 개량화된 처사”라고 망월도에서 만난 조대 공전 이한솔씨는 말한다. 또 정부측은 그동안 5·18구묘역에 안 치되어 있던 이철규, 강경대, 노수석, 이내창 등 해방 세상을 염 원하며 산화해 간 32명 열사의 신묘지로의 이장 문제에 제동을 걸고 나오고 있어 이들의 영혼은 어디로 가야하는지 암담하기만 한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작년 오월의 행사에 참가했다는 한 시 민은 “광주를 민주의 성지라 부르기에는 아직 이르다며, 가수가 나와서 노래 부르고 추모대회 한번 치른다고 해서 광주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잘라 말한다. 5·18광주민중항쟁은 아직까지도 진상이 완전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80년 5월 17일, 비상계엄 확대조치 이후 광주에 공수부대 를 증파한 이유는 무엇인지, 당시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를 진 두지휘한 자는 누구이고, 광주 시민에게 발포명령을 내린 사람은 누구이며, 80년 당시 미국은 단지 ‘집지키는 개' 에 불과했는지, 광주에서 사망한 양민은 정확히 몇 명인지 등 등 무수히 많은 미완의 과제들이 산적해 있다. 광주의 역사적 좌 표를 설정하려면 우선 확실한 진상규명을 바탕으로 그 역사적 의 의부터 바르게 자리매김해야 한다. 5·18묘역을 떠나오면서 만난 술에 취한 중년의 한 아주머니는 말했다. 자신은 기독교 신자이 며 술을 마시지도 못한다고. 하지만 자식을 키우면서 부모들이 쏟아붓는 사랑은 매한가지라고. 5·18묘역에 누워있는 고등학생, 대학생들을 보면은 너무나 억울하고 답답해서 술을 한잔 하게된 다고. 당시 시청 앞에 살면서 이불을 뒤집어 쓰고 숨어있던 자신 은 너무나 부끄럽다고. 자신을 무식쟁이라고 말하는 평범한 한 아주머니의 가슴에도 광주의 상처는 남아있었다. 그 아주머니의 상처 만큼이나 광주는 이 세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풀어야할 과제 인 것이 틀림없다. �逈耶耶耶耶耶耶耶耶耶耶耶耶耶耶耶耶耶耶耶耶耶耶耶� �� 빛은 가장 은은한 곳에서 움트느니 �� �� 천추광명 내리신 그 땅. �� �� 원한마저 사랑으로 변하는 그 땅. �� �� 오늘도 이름모를 젊은 혼은 �� �� 빛으로 움터 솟는다 �� �� �� �� 이세방, 「광주」 중에서 �� �說耶耶耶耶耶耶耶耶耶耶耶耶耶耶耶耶耶耶耶耶耶耶耶�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