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v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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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ravel ] in KIDS
글 쓴 이(By): charina (보잉~)
날 짜 (Date): 2001년 9월  4일 화요일 오후 08시 00분 54초
제 목(Title): [보잉~]러시아에서 보내는 편지-08


2001년 5월 2일(목)

이곳에 온지 한 주가 지났고 촬영 일정 중 1/4를 마친 셈이다. 이미 일에 대한 
욕심 같은 것은 버렸다. 그저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결론이 나의 
중간평가 결과이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는데도 가슴 한 켠이 답답하다. 
이렇게 날 다그쳐가며 일을 하다 보면 내게 무엇이 남을까. 이제 남은 시간은 
화살처럼 빨리 지나갈 것이다. 그리고 나는 못 견디게 그리운 서울로 돌아 
가겠지.

역에서 기차를 타고 출발하는 씬이 신피디는 많이도 신경 쓰이는가 보다. 하긴 
그럴 만도 하다. 꼭지 타이틀이 '철의 실크로드 대탐험'이자나. 그리고 앞으로 
적어도 석 달 간은 방송하게 될 꼭지의 시작이나 다름 없는 걸. 나는 바이칼 
호수까지 가지만 다른 팀들이 또 이어서 이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모스크바와 빼쩨르부르크를 지나 결국은 리스본까지 간다고 하니 말야. 
신피디는 아직도 나의 스타일을 파악하지 못하는 것 같다. 나는 그 상황 속에서 
느끼는 데로 맨트를 만들어 하는 타입인데 말야. 그 즉흥성이 사람들을 
실망시켰던 적은 한번도 없는데.. 기차를 타기 전에 어떤 맨트를 하고 기차에 
오를지를 벌써 며칠째 내게 생각해 보라고  추궁한다. 그래서 나는 아침에 
숙소를 떠나기 전에 맨트를 종이에 적었다. 신피디에서 보여 주고 그를 
안심시켜야 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였다.

"잠자는 땅 시베리아가 드디어 우리 앞에 그 문을 활짝 열었습니다. 우리도 
마음 문을 활짝 열고 대륙의 외침에 귀 기울여야 할 때 입니다. 신비의 땅, 
미지의 대륙. 그 놀라운 이야기들이 바로 이 철길 위에 있습니다. 장장 
9228km의 시베리아 횡단열차. 지구의 1/6길이의 대장정을 비로서 시작한다. 갈 
길이 머니까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시고.. 준비 되셨으면 저와 함께 
출발하시죠!"

그는 아주 만족해 했다. 하지만 이것은 정보의 전달에 지나지 않는 그저 평범한 
맨트야. 미리 만들어 놓는 대본 같은 거라구. 현장성이 전혀 없잖아. 그 곳에서 
리포터 이보영 만이 느낄 수 있는 감상은 전혀 없잖아. 차라리 "이렇게 좁은 
철로가 100년이 넘게 러시아 사람들의 대동맥이 되어 이 넓은 시베리아를 달려 
왔다는 것이 참으로 기특하네요!" 라든가 "이 철길이 우리나라의 경의선과 
연결이 되면 아마 이 철길의 끝은 이곳 블라디 보스톡이 아닌, 우리 나라의 
부산이 되겠네요. 아.. 철마, 달리고 싶다..!" 라든가.. 뭐 하여튼, 그 
현장에서 생각나는 대로 나오는 말이 있었을 거야. 나의 이런 면 을 잘 
이용하지 못하는 신피디가 안스러울 뿐이다.

우리는 오후 6시 30분 기차를 예매했지만 그래도 아침 일찍 숙소에서 출발했다. 
블라디 보스톡 역사를 좀 촬영하려고 말야. 알다시피 이 곳 블라디 보스톡은 
러시아 유일의 부동항으로 아시아, 태평양의 교역이 모두 이 곳에서 이루어 
진단다. 그러므로 배를 타고 들어온 물건들이 이 역에서 기차에 실려서 러시아 
전역으로 퍼져 나가는 거지. 그래서 항구와 연결된 이 역에서는 어마어마한 
양의 중고차들과 생필품들이 배에서 내려지고 또 거대한 통나무들이 배에 
실리고 있지. 이러한 교역품들과 관광객들과 기차를 이용하는 러시아 사람들로 
이 역은 가득 찼단다.

한참동안 이런 풍경들은 촬영하고 있는데 어디 선가 군악대 연주소리가 
들렸왔어. 무슨 재미난 일이 생긴 걸까 하고 스텝들은 그 쪽으로 뛰기 
시작했지. 플랫폼 끝에 사람들이 웅성웅성 모여 있었지. 군인들과 그의 가족, 
친구, 연인들이 가슴 아픈 이별을 하고 있고, 군악대가 배경음악을 연주하고 
있었지. 그들은 체첸으로 가는 군인들이었어. 체첸과 러시아는 10년이 넘게 
유혈분쟁을 하고 있어. 체첸은 제정 러시아 때 러시아 연방으로 합류된 
이후부터 계속해서 러시아와 독립전쟁을 벌이고 있지. 이들은 종교도 
이슬람교로 러시아 정교를 믿는 대부분의 러시아 연방과 큰 차이가 있을 
분더러, 강력한 씨족 국가이고 피를 두려워 하지 않는 민족이라 러시아 측의 그 
많은 압력과 학살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독립을 외치는 끈질긴 사람들이지. 
러시아 측에서 이들을 독립 시킬 수 없는 것이.. 이 지역에서 석유가 많이 
나오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체첸은 러시아 연방의 민족 중에 8번째로 많은 
인구가 살고 있는 곳이기도 하기 때문이야. 하지만 150여 개의 민족이 모여 
사는 러시아로서는 이들의 독립을 인정해 줄 수가 없는 거야. 그렇지 않으면 그 
많은 소수 민족들을 통합관리 할 수가 없거든.
그 호전적인 민족과 전쟁을 하러 가는 데 가족들이 걱정스럽지 않을 리가 
없겠지. 꾹꾹 참고 있던 눈물이.. 기차가 떠나자마자.. 서럽게 플랫폼에 
떨어지더구나. 하지만 우리의 통역인 올렉은 크게 동요되지 않는 것 같았어. 
그의 말에 의하면 저 군인들은 월급도 많이 받고, 다치거나 죽을 가능성이 
1/8밖에 되지 않으며, 다녀 오면 안정된 직장이 보장 된다더라구. 꼭 월남에 
참전했던 우리의 아버지들 같지 않니? 먹고 살기 위해.. 내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모진 맘을 먹고 지옥 같은 타국의 전쟁에 참전하러 가는 우리의 아버지들 
생각이 났단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은.. 슬픔이라는 짐을 져야 하는 
것이겠지. 그 슬픔을 딛고 일어서야 보다 나은 삶을 살게 되는 것이겠지. 
지금의 이 슬픔도 언젠가 웃음으로 회상할 수 있겠지.. "월남에서 돌아온 
새까만 김 상사~"

오후 6시 30분. 우리는 드디어 기차를 탔어. 초록색 벨벳 투피스를 잘 차려 
입은 승무원 언니가 칸칸 마다 있어서 우리의 잠자리나 차 마시는 것을 도와 
주실거야. 근데 영어를 전혀 하지 못하시네. 실은 우리는 기차로 도시간 이동을 
할 때는 통역이 없이 우리 스텝 셋만 다니게 되었어. 왜냐면 통역이나 코디는 
현지 사람들이기 때문에 각 도시마다 다른 사람으로 섭외해 놓았거든. 그래서 
약간 불안 하기도 해. 이곳 사람들은 대학을 다니는 젊은이들만 영어를 잘 
하는데, 그런 사람을 만나기란 그리 쉽지 않지. 그리고 이 기차는 전체가 다 
침대 칸이라 동승한 여행객들이 마주치는 일은 화장실 앞에서 줄을 선다거나, 
차를 마시러 보온병 앞으로 간다거나 식사를 하러 식당칸으로 이동한다거나.. 
할 때가 전부지. 하여튼 우리는 시계를 잘 맞춰 놓고 자야 하는 수밖에 없어. 
하바롭스크 도착 아침 8:00. 기차에 타서 이런 저런 기차 안 스케치를 하고 
나니 어느덧 시베리아 벌판에 노을이 내리기 시작했어. 기차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달리기 경주를 하는 듯한 붉은 태양은 이 넓은 시베리아 벌판을 
비추느라 하루종일 힘이 들었는지 금새 벌판 너머로 사라져 버렸어. 이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오른쪽 끝인 블라디보스톡에서 왼쪽 끝인 
빼째르부르크까지 가는 데는 기차로 한번도 쉬지 않고 꼬박 6박 7일이 걸린다는 
구나. 정말이지 어마어마한 길이이지. 그 긴 여정을 이제 시작하는 거야. 오늘 
밤은 맘이 설레서 잠도 오지 않을 것만 같다.

(기차가 너무 흔들려서 글씨를 쓰기가 힘이 들어. 스페인에서 떼제베 
고속열차를 탔을 때는 아무 무리 없이 엄마에게 엽서를 썼었는데.. 확실히 
기술이 발전해 감에 따라 사람들의 기호는 점점 더 까다로워 지는 것 같아. 
글씨가 개발새발이 되었지만, 그래도 이해해 주렴. 흔들리는 기차도 그렇고, 
날아가는 글씨도 그렇고 너무 깔끔한 것 보단 인간미가 넘치자나..^^)

저녁은 또 사발면을 먹었다. 팔도 도시락 사발면 있잖아. 아까 오후에 
한국식당에서 싸온 밥을 말아서 먹었지. 이곳에 온 후로 평균 하루에 두개씩 이 
도시락 사발면을 먹은 것 같다. 이렇게 먹어야 왠지 밥 먹은 것 같아서 말야. 
빵과 햄이 전부인 이곳 사람들의 식사는 왠지 위가 뻑뻑해 할 것만 같아. 
다행히도 머리에 두건을 쓴 한국 엄마가 그려진 팔도 도시락 사발면을 
이곳에서는 아무데서나 살 수 있단다. 우리만 먹는 게 아니라 러시아 사람들 
전체가 이것을 주식으로 먹고 산다는 것이지. 사실 이것을 이곳에 수출해서 
남는 순이익은 한 개당 10원정도라고 해. 물가가 싸니까 가격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가격을 낮추었기 때문이지. 하지만 생각을 좀 해보면 그것이 그리 밑지는 
장사는 아니야. 인구가 1억 5천만명인 이 거대한 나라에서.. 열 명 중 한 명이 
평균 하루에 한 개씩 이걸 먹는 다고 생각해봐. 하루 판매량이 1천 5백만 개. 
순이익만 따져봐도 1억 5천만원. 와우.. 대단하지? 하여튼, 이것이 있어 줘서 
그럭저럭 먹을 것은 해결이 되긴 하지만.. 그래도 이제는 조금 지겨워지기 
시작했어. 원래 나 라면은 잘 안먹잖아. 근데 이걸 두개씩 먹고 있으니..쩝. 

우리나라 기차와 비슷한 풍경이 하나 있는데.. 그건 카터매점이야. 나이가 
지긋하신 할머니 한 분이 10량이 넘는 기차 전체를 돌면서 이런 저런 
주전부리들을 팔고 있지. 술, 음료수, 과자, 초컬릿 등등.. 대충 상상이 가지? 
신피디가 이 할머니에게서 보드카 한 병과 맥주 두병을 샀어. 우린 이제부터 
보드카 폭탄주를 마시며 이 감격을 순간을 논하게 될 것 같아. 취기가 돌면 
덜컹거리는 기차 바퀴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이 들겠지. 오늘은.. 참 긴 
하루였어. 너는 어땠는지 모르겠구나. 
난 매일 매일이 새로운 출발이야. 내일은 하바롭스크에 도착해 있겠지. 
하바에서는 주로 소수민족 촬영을 하게 될 것 같아. 더욱 열악한 환경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얘기지. 힘들 순간에 너의 이름을 부르게 되면 외면하지 
말아주길. 약속해 주면 난 편히 잠들 것 같구나. 너도 잘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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